논문 상세보기

근역한문학회> 한문학논집> 『열수문황(冽水文簧)』과 정약용(丁若鏞)의 변려문 인식

KCI등재

『열수문황(冽水文簧)』과 정약용(丁若鏞)의 변려문 인식

『Lieshuiwenhuang(冽水文簧)』 and Jeong Yak-yong’s Perceptions of Pianliwen(騈儷文)

신윤수 ( Shin Yunsoo )
  • : 근역한문학회
  • : 한문학논집 5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191-214(24pages)
한문학논집

DOI


목차

1. 머리말
2. 『冽水文簧』 속 丁若鏞 변려문의 특징
3. 丁若鏞의 변려문 인식
4. 맺음말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冽水文簧』은 丁若鏞(1762~1836)이 아들들에게 자신의 변려문을 한데 모으게 하여 엮은 책이다. 그는 自序에서 젊은 시절 몰두했던 변려문에 대한 후회를 담아 이를 엮었다고 밝혔다. 정조 연간 문장가이자 비평가, 관료로서 활동한 정약용의 변려문 인식은 ‘古文’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에서 변려문이 어떤 위치를 가졌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다.
정약용의 ‘후회’는 단순하지 않다. 변려문 자체나 존재 가치 전부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변려문은 사명 등 용도에 맞게 작성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자신의 변려문 몇 작품을 문집에 따로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의 반성적 회고는 변려문 전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實’을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성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기교에 지나치게 공력을 요구하는 변려문, 그 중에서도 특히 科文을 반성한 것이다. 취실과 경세의 문장을 짓고자 했던 정약용은 『冽水文簧』을 통해 기예가 되어 버린 科文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을 남긴 것이다.
The 『Lieshuiwenhuang(冽水文簧)』 is the Jeong Yak-yong(1762~1836)’s own pianliwen(騈儷文) collection complied by his sons. Jeong Yak-yong said that he collected it with regrets about pianliwen(騈儷文), which he was immersed in as a young man. His perception is an essential material that can examine the position of pianliwen(騈儷文) in a period when guwen(古文) was the mainstream.
Jeong Yak-yong’s repentance was not simple. He was able to enter the government and earn King Jeongjo’s confidence because of his writing ability. His regretful retrospect was made under the pursuit of actuality(實). He regretted and reflected on himself about pianliwen(騈儷文) that skill-oriented, especially civil official examination’s. He wrote a kind of letter of apology about civil official examination’s and the composition examination(製述) through the 『Lieshuiwenhuang (冽水文簧)』.

UCI(KEPA)

I410-ECN-0102-2022-800-000643167

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5-1313
  • : 2713-9905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3-2022
  • : 692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1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17~19세기 제갈량 초상 담론의 제양상(諸樣相)

저자 : 김기완 ( Kim Kiwan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8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선행 연구들에 이어 한문학과 회화 방면의 한 연구 의제로서 '제갈량 초상'을 주제화하고, 제갈량 초상 수용사의 중간 거점으로서의 '주희'에 다시 주목하는 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본고에서는 우선 송시열의 사례를 중심으로 주희에 연원을 둔 제갈량 초상 담론의 주요 논점과 전형적 언술 지표들을 정리하였다. 제갈량 초상과 관련된 송시열과 김수증의 사례는 노론계 제갈량 초상 담론의 한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인데, 그 이후에 이것이 큰 이견 없이 노론 내부에서 계승, 확산되는 양상을 유한준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다. 한편 주희의 시문에 기반한 노론계 제갈량 초상 담론의 구심력 내지 표상 체계의 결속력이 약화되는 요인들로는, 노론 외부의 시선이라든가, 세대가 지나고 관점이 유연해진 결과 청을 더 이상 '오랑캐'로만 인지하지 않는 대중국 인식의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본고에서는 전자의 사례로 정약용을, 후대의 사례로 홍한주를 예시하였는데, 물론 이는 논의의 편의상 일부 대표적인 사례를 선별한 것이므로 본고에서 시도한 서술방식과 관점을 여타 작가들을 아울러 보다 촘촘하게 재구하는 작업이 향후 과제로 남았다. 때로 여러 당파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제갈량 초상 이미지를 둘러싼 상징의 혼란 내지 비동조 현상이 야기되기도 했기에, 이러한 측면은 제갈량 초상과 관련 시문을 일종의 정치적 텍스트로 읽어낼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본 연구는 주희와 관련된 시각 문화와 주희 문학의 수용에 대한 연구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Following the previous research, this paper again tried to focus on 'Zhuge Liang's portrait' as an research between classical literature and painting, and tried to focus on 'Zhu Hui' as an intermediate base in the history of acceptance toward Zhuge Liang's portrait. This paper first summarizes the main points and typical indicators of Zhuge Liang's portrait discourse based on Song Si-yeol's case. Song Si-yeol's case was typical type of discourse in No-ron group, and Yoo Han-joon followed Song's texts as one of No-ron literary person. On the other hand, eyes from the outside(not as a No-ron) or changes of perception toward Qing China allowed different point of view about representation system related to Zhuge Liang's portrait. In this paper, Jeong Yak-yong was cited as the former case, and Hong Han-ju was cited as the latter case. Of course, this paper selected some representative cases for convenience of discussion so we need to search and analyze much more samples. Sometimes when the interests of various parties clashed with each other, there were confusion and inconsistency in the image or symbol of Zhuge Liang, and this suggests us to read poems and writings about Zhuge Liang's portrait as political texts. In addition, this study has a value as a study on the visual culture related to Zhu Hui and the acceptance about Zhu Hui's literature.

KCI등재

2蟾窩 李玄煥의 繪畫 관련 '說' 작품 분석

저자 : 정은진 ( Jeoung Eun-jin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2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한문학 문체 가운데 說을 주목하여 繪畫와 說 문학의 관계를 점검하고, 이현환의 「崔北畵說」·「謹齋書畫說」·「圖章說」을 분석하였다. 알려진 대로 회화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한문학 문체는 書畫題跋이다. 서화제발이 주로 해당 서화작품에 관한 단형의 비평이 주를 이룬다면, 설은 보다 전문적인 시각에서 작자와 대상의 관계와 일화, 대상에 대한 작자의 주장과 평가 등이 통시적으로 조망된다. 그렇다보니 조선후기 소품의 발달과 함께 양적 증가를 보였던 서화제발에 비해, 설로 표현된 회화 담론 수는 현격하게 적었다.
그런데 강세황·최북과 가까웠던 남인계 이현환은 설이란 문체를 통해 18세기 근기지역의 문화적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본고에서 논한 이현환의 「崔北畵說」·「謹齋書畫說」·「圖章說」은 최북의 회화, 이관휴의 서화수장, 회화에 첨부되는 도장과 이를 전각하는 인물 강세황을 다룬 작품이다. 제목을 '회화 관련 설'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회화의 중심과 외연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이현환은 이 작품을 통해 서화에 대한 가치 부여, 최북·이관휴·강세황이라는 세 인물의 고도의 예술적 경지, 그들을 향한 짙은 공감을 표현하였다. 곧 회화 창작의 주변인이라 할 수 있는 이현환은 조선후기 경기도 안산에서 활동했던 회화 창작 주체들의 회화관과 이념을 '설'을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This thesis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painting and 說 by paying attention to 說 among the styles of Korean Chinese literature, and analyzes Lee Hyeon-hwan's 「崔北畵說」, 「謹齋書畫說」 and 「圖章說」. As is known, the style of Korean Chinese literature that is closely related to painting is 書畫題跋. While 書畫題跋 mainly criticizes the short-form criticism on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works, 說 sees diachronically the relationship and anecdotes between the author and the subject, and the author's assertion and evaluation of the subject from a more specialized perspective. Therefore, the number of discourses expressed in 說 was significantly less compared to Calligraphy and Painting, which showed a quantitative increase with the development of short literary work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Namin-Party Lee Hyeon-hwan, who was close to Kang Se-hwang and Choi buk, conveys the cultural atmosphere of the 18th century Geungi region through the style of 說. Lee Hyeon-hwan's 「崔北畵說」, 「謹齋書畫說」 and 「圖章說」 deal with Choi buk's paintings, Lee Gwan-hye's calligraphy and painting collection, the seal attached to the paintings, and Kang Se-hwang who engraved them. Although the title is 'Painting-related Theory', strictly speaking, the center and extension of the painting are expressed together. Through these works, Lee Hyeon-Hwan expressed the value of calligraphy and painting, the high artistic status of the three figures, Choi Buk, Lee Gwan-Hyu, and Kang Se-Hwang, and deep sympathy for them. Lee Hyeon-Hwan, who can be said to be a peripheral figure in painting creation, three-dimensionally expressed the views and ideas of painting creators who were active in Ansan, Gyeonggi-do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說.

KCI등재

3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1890-1960)의 행적과 회화 -일제 강점기의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저자 : 송희경 ( Song Hee-kyung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3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0세기 초 전통화단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에서 새로운 조형성을 수용한 동양화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 서화의 제재와 양식, 제화시의 형식을 계승하며 시서화 일치를 실현하려는 화가도 존재하였다. 바로 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1890-1960)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오일영은 근대기의 대표적인 미술교육 기관인 서화미술회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고, 서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왕실 회사인 창덕궁 부벽화를 포함한 왕실 헌상 회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오일영은 서화미술회 교수로 활동한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화미술회의 동학 및 당시 활동한 화가들이 새로운 화법과 형식의 동양화를 모색하고자 한 반면, 오일영은 스승의 화풍을 계승하여 평생 '전통' 서화만을 고집하였다. 또한 오일영은 주문자, 소재 등을 불문하고 그림을 그린 후 반드시 제화시를 적어 넣었다. 오일영에게 제화시란 동아시아 회화의 오랜 형식인 시서화 일치와 삼절을 실천하는 방식이자 화가 본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전통이었던 셈이다.


In the early 20th century, oriental paintings that embraced new types of formativeness from the standpoint of combining Eastern techniques and Western tools began to spread in the traditional art circles. However, there were still some painters who maintained the traditional methodologies in their work. Oh Il-Young (1890-1960), art name Jeong-Jae, was one of such figures. Oh Il-Young mainly attempted to realize the unity of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by inheriting the material and style of calligraphy and those of painting as well as the form of painting poetry bequeathed from the past. Oh Il-Young studied painting at Seohwa Misulhoe (Calligraphy and Painting Art Association) - one of the representative art education institutions during the modern era - and worked actively as a member of Seohwa Hyeophoe(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He also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of royal tribute paintings, including the royally-commissioned buttress paintings in the Changdeok Palace. In particular, Oh Il-Young was profoundly influenced by Ahn Jung-Sik, a professor at Seohwa Misulhoe. While the fellow artists of Seohwa Misulhoe and other contemporarily active painters wanted to explore a new style and form of oriental painting, Oh Il-Young persisted throughout his entire life in inheriting his master's style and insisted on only 'traditional' approaches wherein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coexisted. Also, upon drawing a picture, Oh Il-Young always wrote coordinating painting poetry into it regardless of its orderer, material, etc. For Oh Il-Young, painting poetry was a way of implementing the accord of three perfections in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 the long-standing forms of East Asian painting - as well as a tradition of confirming his own artist identity.

KCI등재

4고려후기 명시(銘詩)·만시(挽詩)의 특성과 장르적 상관성

저자 : 김보경 ( Kim Bo Kyeong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41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애도시의 관점에서 고려후기 銘詩·挽詩 두 양식의 양상과 특성을 밝히고 그 장르적 상관성 문제를 검토하였다.
고려후기에는 묘지명의 명시가 활발히 지어지는 가운데 만시 창작도 증가했다. 두 양식은 죽음이란 사건에서 비롯되고 애도를 기본 속성으로 한다는 점에선 공통되나 애도의 층위와 표현, 죽음 인식과 이미지에서는 대조를 이룬다. 명시는 망자를 공적 영역에서 다루고 칭양을 위주로 하는 데 대해 만시는 공적 영역과 개인적 관계에 걸쳐서 망자를 이야기하고 생자의 비탄을 위주로 한다. 명시의 시간은 영속적이고 미래를 향하며 그 어휘와 어조는 확신에 차고 당당하고 상승의 기세를 드러낸다. 반면 만시의 시간은 현재에 머물고 머뭇거리며 어휘와 어조는 침울하고 하강하는 경향을 보인다.
죽음 인식과 이미지에서도 대조적인 면이 드러난다. 명시에는 무덤이나 저승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이고 만시에는 장례 의식이나 장례와 관련된 용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명시는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이름이나 업적, 자손, 또 誠의 理法과 같은 인간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노력으로 초극하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만시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 사태에 직면해 사/생의 격리,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허무와 절망감을 토로하고 신선사상이나 비교적 자유로운 내세관을 드러낸다.
두 양식은 애도시로서 역할 분담을 하면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고려후기에는 이런 분담의 경계가 흐려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것은 상장례의 정착, 묘지명 문화의 쇠퇴, 그리고 三首連章體와 같은 만시 자체의 변화, 여기에 작자의식의 성장이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요인이 만시를 서서히 애도시의 주류의 위치로 밀어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This study explores the aspects and characteristics of myeongsi (銘詩) and mansi (挽詩), two poetry styles in the late Goryeo dynasty, from the perspective of mourning poetry and examines the issue of their genre correlations.
In the late Goryeo dynasty, a number of myeongsi of epitaphs were written and mansi writing was also on the rise. The two styles had commonalities, such as being written after death events and having condolences as a basic property. However, they have different layers of condolences and are in contrast with each other in terms of the perception and image of death. Myeongsi deal with and mainly admires the dead in the public realm, while mansi tell of the dead in a range covering the public realm and personal relationships and focus on the grief of the living. The time of myeongsi is permanent and future-oriented, and its vocabulary and tone are confident and dignified, showing the spirit of ascent. On the other hand, the time of mansi stays and hesitates in the present and its vocabulary and tone tend to be gloomy and descending.
The two styles are in contrast to each other in terms of the perception and image of death, as well. Graves and the afterlife are often mentioned in myeongsi, while words related to funeral rituals or funerals frequently appear in mansi. Myeongsi's view of the world is characterized by accepting but trying to overcome death with efforts that can be made in the realm of humans, such as reputation, feat, descendants and the rules and principles of the sincerity (誠). Mansi are characterized by the expression of futility and despair as to the separation between life and death and a finite life in the face of death and hold a relatively free view of afterlife, such as Taoism.
The two styles were in a complementary relationship by playing their respective roles as mourning poems. But the boundary between their respective roles became less clear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is could be the results of such factors as the establishment of funeral rites, the decline of the epitaph culture, and changes in mansi itself, including change into a three-poem series (三首連章体), and the growth of authors' consciousness. These factors are assumed to have gradually elevated mansi to the mainstream position of mourning poetry.

KCI등재

5산운 이양연 한시에 나타난 허무 의식 연구

저자 : 박동욱 ( Pak Dong-uk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67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산운의 한시를 읽어보면 누구라도 쉽게 삶에 대한 짙은 허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시 전편에는 비애와 우수가 관류하고 있다. 먼저 그의 삶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이 그의 허무의식을 織造하고 있는지를 알아본 후, 그의 시에 나타난 허무 의식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허무는 타고난 기질과 주어진 상황에 의해 형성된다. 그의 삶 속에서 허무를 심화시킨 세 가지 상황을 찾아내어 정리했다. 어려서 겪었던 養子의 체험과, 養父 · 親父의 죽음을 연이어 맞으면서 유년기의 상처는 내재되었다. 철이 들고는 出仕를 포기함으로 인해 심한 방황을 경험하게 되고, 노년에는 가족의 상실을 여러 차례 겪으며 그의 시에는 허무감이 짙게 깔리게 된다.
산운의 시에서 허무 의식은 다음과 같이 발현된다. 첫째, 定住하지 못하고 浮游하는 삶을 택했다. 그는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데, 그것은 실제 여행과 상상 속의 여행으로 나뉜다.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자아 찾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둘째, 狂飮하며 醉歌를 불렀다. 出仕에 대한 포기로 삶의 좌표를 상실하고 痛飮에 빠져 살았다. 유람이 심리적 불화의 외적 표출이었다면 음주는 심리적 불화의 내적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소멸하는 것들에 대해 응시했다. 모든 것은 시간의 장단만 있을 뿐 사라지기 마련이다. 장소도 기억도 예외는 없다. 소멸하는 것에 대한 응시는 소멸하고 싶다는 욕구보다 소멸해 가는 모든 것에 안타까운 시선을 담고 있다.


Anyone can easily feel the deep emptiness of life by reading Sanwoon's poems. Sorrow and excellence permeate all of his poems. First, we investigated what events in his life were contributing to his consciousness of emptiness, and then examined how the consciousness of emptiness expressed in his poetry was expressed.
The emptiness is formed by innate temperament and given circumstances. He found and organized three situations that deepened the emptiness in his life. The wounds of childhood were inherent as they faced the experiences of foster child as a child and the deaths of foster father and real father. When he grows old, he experiences a severe wandering due to giving up on 出仕, and in old age he experiences the loss of his family several times.
In Sanun's poetry, the consciousness of emptiness is expressed as follows. First, he chose to live a life that was unpredictable and unpredictable. He travels constantly, which is divided into real travel and imaginary travel. Such a journey can be seen as a part of self-discovery rather than just wandering. Second, he sang crazy drink and Sing while drunk. He lost the coordinates of his life by giving up on government post and was immersed in crazy drink. If excursion was an external expression of psychological discord, drinking could be said to be an internal expression of psychological discord. Third, he gazed at things that perish. Everything has only the pros and cons of time, and it tends to disappear. Places and memories are no exception. The gaze on the disappearing thing contains a sad gaze on everything that is disappearing rather than the desire to disappear.

KCI등재

6남용익 문학론 보유(補遺) -『壺谷漫筆』과 『詩話叢林』 內 『壺谷詩話』의 대비를 중심으로-

저자 : 신영미 ( Shin Youngmi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194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詩話叢林』 內 『壺谷詩話』와 그 원본인 『壺谷漫筆』을 대조하여 『호곡시화』에 누락 된 내용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南龍翼(1628~1692)의 문학적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원론적으로, '작가 개인의 고유한 문학론이 있는가?'의 문제는 섬세한 고려가 필요하지만, 그간 '문학론'의 범주에서 남용익의 문학 비평과 시론이 제출되고 인정된 것이 사실이다. 品格 批評, 格論, 體論, 復古論, 尊唐論, 主氣論, 優劣 비평 등으로 알려진 그의 비평과 詩論은 當代 문단을 견인했던 논의와 일치하여, 남용익을 명실상부 17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문학 비평가로 자리매김 시켰다.
'문학론'이라는 주제는 때로 문학 비평가가 작품과 작가를 대하는 실제 태도를 간과하게 만들곤 한다. 특별한 문학론의 입론 여부에 집중하여, 비평가가 지닌 구체적 견해와 태도에 조명할 필요를 못 느끼게 만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 남용익에 관한 연구 다수는 초록본인 『시화총림』 內 『호곡시화』를 통해 진행되었기에, 원본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본고는 이에 집중하여, '문학론'이라는 범주로 원고를 작성하였으나, 실상은 작가, 작품, 문단에 대한 남용익의 구체적 견해와 태도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남용익은 事大 文翰을 高評하고, 自國 문단을 재단하려는 태도를 지녔으며, 任叔英에 대해 높은 관심을 둔 인물이다. 또한 문학사에 관한 通時的 시각을 바탕으로 중국 문학사를 기술했고, 이를 토대로 作詩의 典範을 제시했다. 전범에서 빈출된 소재인 봄, 가을, 달, 술 등은 『壺谷集』 내 漢詩에서도 상당 수 등장하여 전범의 제시와 作詩가 연관됨을 유추할 수 있다. 이상에서 도출된 사실은 작가론의 관점 뿐 아니라 실제 남용익 한시 작품 분석의 관점에서도 일정 부분 유의미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더불어 남용익 전후 시기의 비평, 당대 문학사의 이해에 부족하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derive the missing contents in Hogok-Sihwa(壺谷詩話) and to present views and attitudes on literature of Nam Yong-Ik(南龍翼, 1628-1692). The way is the contrast between Hogok-Sihwa in the Sihwa-Chonglim(詩話叢林) and Hogok-Manpil(壺谷漫筆). Although the issue of 'Is there a unique literary theory of an individual writer?' requires careful consideration, Nam Yong-ik's literary criticism and poetry have been submitted and accepted in the category of 'literary theory'. Nam Yong-ik is one of the recognized literary figures representing the 17th century in name and reality.
However, the research category of 'Literary Theory' resulted in a somewhat overlooked aspect of Nam Yong-ik's actual attitude toward his works and writers. In order to understand his actual appearance as a literary artist, it is necessary to find out what kind of views and attitudes Yong-Ik Nam has toward writers, works, and paragraphs. In the meantime, most of the research on Nam Yong-Ik has been done through the summary version Sihwa- Chonglim. So, there are some unknowns about him.
Nam Yong-Ik highly valued literature related to diplomacy, had an attitude to tailor his own country's literature, and was highly interested in Lim Sook-Young(任叔英). He also described the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based on a historical perspective on literature, and presented an example of writing poetry based on this. Spring, autumn, moon, and alcohol, which frequently appear in the examples, also appear in a significant number of Chinese poems in Hogok-Jip(壺谷集), so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resentation of the examples and the his poetry are related. It is expected that the facts derived from the above can be used meaningfully to some extent not only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author's theory, but also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actual analysis of Nam Yong-Ik's poetry.

KCI등재

7조선 후기 伯夷·叔齊에 대한 인식과 淸聖廟 건립의 含意 -「淸聖廟碑」와 「淸聖廟重修碑」를 중심으로 살펴본 小中華 의식과 華夷觀-

저자 : 김융창 ( Kim Yoongchang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5-219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 후기 海州 首陽山에 淸聖廟를 건립하고 伯夷·叔齊를 추모하는 새로운 전통이 탄생한 사실에 주목하고, 그 배경과 의의를 고찰하였다.
청성묘는 백이·숙제에게 제향하는 賜額 祠宇이므로, 우선 조선 후기 백이·숙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이·숙제는 조선 전반기부터 개인의 忠節을 顯彰하기 위한 表象으로 활용되었다가, 倭亂과 胡亂을 겪으면서 對明義理가 대두되었던 조선 후기에는 '조선'이라는 국가 집단의 의리를 드러내는 表象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립되어 賜額을 받은 청성묘는 萬東廟, 大報壇 등과 더불어 조선의 對明義理 및 尊周 의식의 産物이라 할 수 있다.
해주 수양산의 청성묘는 백이·숙제와 동시대의 인물로 여겨지는 箕子와도 무관하지 않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기자를 禮敎와 文明의 전달자로 인식하였고, 이를 小中華의 근거이자 자부심으로 삼았다. 이는 백이·숙제 역시 의리상 周의 疆域을 벗어나 동시대에 기자가 이주한 조선으로 함께 귀의하였을 것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되었고, 해주 수양산을 이제의 은거지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청성묘의 건립과 인식 제고에는 조선 후기 小中華 의식이 일정 부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청성묘 건립에 對明義理 및 尊周 의식, 小中華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崔錫鼎의 「淸聖廟碑」와 金祖淳의 「淸聖廟重修碑」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최석정의 「청성묘비」는 청성묘가 사액 받은 것을 기념하여 작성된 비문이고, 김조순의 「청성묘중수비」는 청성묘가 사액받은 후 120여년 뒤에 작성된 비문이다. 「청성묘비」와 「청성묘중수비」는 儒家의 人文과 制度를 각각 '明'과 '中國'이라는 초월적 中華로 관념화하고, 조선 그 자신이 小中華로서 기존의 중화를 계승 혹은 대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이·숙제는 조선의 海州 首陽山에 은거함으로써 조선에 '의리'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한 鼻祖가 되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청성묘는 문명 국가로서의 자존심과 오랑캐와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규정되었다. 두 작품 사이에는 120여년의 시간적 간극이 존재하였지만 華夷觀에 기반한 소중화주의가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청성묘는 백이·숙제를 통해 조선의 정체성, 곧 '의리[義]'를 表明하는 새로운 전통의 공간으로서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This study focuses on new tradition of establishment The Cheongseong- Shrine(淸聖廟) in Mt.Suyang(首陽山) in Haeju(海州) in the Late Joseon Period to commemorate the Baek-Yi(伯夷) & Suk-Je(叔齊), and examines its cause and significance.
Baek-Yi & Suk-Je were a representations of a individual loyalty for dynasty in early Joseon Period. Then, after Japanese Invasion(倭亂) and Qing Invasion(胡亂), Baek-Yi & Suk-Je were used as representations of a national group called Joseon. In this respect, The Cheongseong-Shrine is the product of loyalty for ming(明) dynasty and respect for the Zhou(周) Dynasty, such as The Mandong- Shrine(萬東廟), The Daebo-Altar(大報壇).
Baek-Yi & Suk-Je are related to Gija(箕子).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tellectuals recognized Gija as a messenger of civilization, which was the basis and pride of Little Sinocentrism. In this notion, intellectuals perception expanded that Baek Yi and Suk-je also migrated to Chosun like a Gija, leaving the Zhou region in order to defend loyalty.
Choi-Seokjeong(崔錫鼎)'s The Epigraph of The Cheongseong-Shrine(淸聖廟碑) and Kim-Josoon(金祖淳)'s The Epigraph of repairing The Cheongseong- Shrine(淸聖廟重修碑) show Sinocentrism and View of Civilized man-Barbarian. These two epigraphs conceptualized the humanities and institutions of Confucianism and called them Ming(明) and China(中國), and suggested the view that Joseon could inherit or replace existing Sinocentrism as a Little Sinocentrism.
As a result, Baek-Yi & Suk-Je became the ancestor of the tradition of loyalty, who lived in Mt.Suyang in Haeju. In addition, The Cheongseong-Shrine established for Baek-Yi & Suk-Je became a pride of Joseon civilization and a space to show the difference from Barbarians.
In conclusion, The Cheongseong-Shrine was created by the combination of Baek-Yi & Suk-Je and Sinocentrism and View of Civilized man-Barbarian, remained as a new traditional space that reveals Joseon's identity.

KCI등재

8程門 『중용』 주석의 신비화 경향에 대한 주자의 비판

저자 : 주광호 ( Joo Kwangh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48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程門의 『중용』 주석에서 보이는 신비화 경향에 대한 주자의 비판을 추적 분석하고, 그 사상사적 의미를 구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주자는 자신의 『사서장구집주』에서 정문의 관점을 대대적으로 인용한다. 이 때문에 程朱 계열의 연속성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주자 사서학의 형성과정을 추적해보면, 그가 오히려 정문 주석을 적극 비판한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내용은 주로 '이단' 혹은 '불교'라는 것이다.
정문의 『중용』 주석에서 주자가 비판하는 내용은 주로 신비화 경향과 내면화 경향이다. 여기서 신비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란 정문 주석이 『중용』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을 지나치게 어려운 것으로 관념화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히 내면의 도덕성을 찾아서 확보할 것을 주장하는 도남학과 호상학의 내면화 경향과 연결된다. 주자는 정문의 이러한 경향을 불교와 비슷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단'이라고 비판한다. 일상의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초월적인 도덕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모두 유학의 본질적인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track and analyze Zhuxi's criticism of The tendency to mystify of Cheng School's Zhongyong Comments and to investigate its historical meaning. In his book, Zhuxi extensively cites the perspective of the Cheng school. For this reason, the continuity of the Cheng-Zhu series is generally recognized. However, tracking the formation process of Zhuxi's Study of Four Books, it can be easily confirmed that he actively criticizes the commentary of the Cheng school. And the content of the criticism is mainly about 'heresy' or 'Buddhism'.
In the commentary on Zhongyong of the Cheng School, what Zhuxi criticizes is mainly about the tendency to mystify, internalize, and indifference to norms. Zhuxi's criticism of the trend of mystification means that the commentator of the Cheng school conceptualizes the everyday and common sense contents of Zhongyong as too difficult. This is particularly linked to the trend of internalization of Daonan School(道南學) and Hushang School(湖湘學) to find and secure inner morality. All attempts to find transcendent morality regardless of everyday reality are not consistent with the essential character of Confucianism.

KCI등재

9『養性堂題詠』攷

저자 : 李東宰 ( Lee Dong-jae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9-274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돈암서원의 모태가 되는 양성당과 관련된 시문의 편록집인 『養性堂題詠』을 검토하여, 이 책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서 생긴 여러 오류를 바로잡아서 관련 연구의 활성화와 문화사업의 활용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다.
『양성당제영』은 김장생이 양성당을 짓고 자신의 동문들과 제자 등 당대 문사들에게 시문을 구하여 수집해 놓은 것을 그의 막내아들인 金棐가 1636년 인멸될까 두려워서 다시 編錄한 뒤 1672년 송시열의 발문을 붙여 成冊한 책이다.
책의 목차는 8경시의 소표제만 제시하여 뒤의 「양성당십영」의 시제와 일치하지 않는다. 산문은 1602년 김장생 본인이 지은 「養性堂記」와 1603년 정엽이 지은 「養性堂記」, 1672년 송시열이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양성당 이전의 정자였던 雅閑亭을 대상으로 한 송익필의 시 3수, 양성당을 대상으로 읊은 김상용 외 15인의 시 34수, 홍천경 외 3인의 「양성당십영」 시 40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성당제영』의 내용은 『여지도서』에 내용의 일부가 전재되어 있고, 『돈암서원지』에는 송시열이 지은 발문과 일부 시의 小序를 제외하고 모두 전재되어 있다. 또한 『양성당제영』에 수록된 시 77수 가운데 각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는 홍천경 외 4인의 시 29수이다.
申欽의 시 등 일부 시는 개인 문집과 글자의 出入이 있고, 송익필, 김상용, 양경우의 시는 작시 시기 표기가 오류이며, 黃赫 시의 작시 시기인 '白駒'는 '白狗'의 오기이다. 또한 일부 소개 자료의 '松磵'은 李端夏가 아닌 洪天璟이고, 趙翼은 '趙翊'으로, '鄭弘湜'은 '鄭弘溟'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This study examined 『YangseongdangJeyeong(養性堂題詠)』, a compilation of poems related to Yangseongdang, which is the matrix of Donamseowon, designat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in 2019, and contributed to vitalization of related research and utilization of cultural projects by correcting various errors that occurred because this book was not released to the public.
A collection of poems Kim Jang-saeng(金長生) who built Yangseongdang and collected poems from his alumni and literary men of the time is the 『YangseongdangJeyeong』, a book compiled by his youngest son, Kim Bi(金棐), who edited and recorded again owing to his fear that the collection would be extinct in 1636 after that was completed with Song Shi-yeol in 1672 after putting an epilogue of Song Shi-yeol.
The table of contents of the book does not match the title of the later 「Yangseongdangsipyeong(養性堂十詠」 as only the titles of the eight scenery poems are presented. The proses include 「Yangseongdanggi(養性堂記)」 by Kim Jang-saeng himself in 1602, 「Yangseongdanggi」 by Jeong Yeop(鄭曄) in 1603, and the epilogue written by Song Shi-yeol(宋時烈) in 1672. It is composed of Song Ik-pil(宋翼弼)'s three poems for Ahanjeong(雅閑亭), which was a pavilion before Yangseongdang, 34 poems written by Kim Sang-yong(金尙容) and 15 others. for Yangseongdang, and 40 poems of “Yangseongdangsipyeong” by Hong Cheon-gyeong(洪天璟) and 3 others.
The contents of 『YangseongdangJeyeong』 are partially reprinted in 『Yeojidoseo(輿地圖書)』, and in 『Donamseowonji(遯巖書院誌)』, except for the epilogue written by Song Shi-yeol and the short prefaces of some poems, all are reprinted. Also, of the 77 poems included in 『YangseongdangJeyeong』, 29 poems by Hong Cheon-gyeong and 4 others are not included in each individual's anthology.
In 『YangseongdangJeyeong』, dates of poems such as Song Ik-pil(宋翼弼)'s and Kim Sang-yong(金尙容)'s, Yang Gyeong-wu(梁慶遇)'s Chinese poems are written in error, 'Baekgu(白駒)', the date when Hwang Hyeok(黃赫)'s poem was written, is an incorrect spelling of 'Baekgu(白狗)'. Also, 'Songgan(松磵)' is Hong Cheon-gyeong, not Lee Dan-ha(李端夏), and Cho Ik(趙翼) is 'Cho Ik(趙翊)', and 'Jeong Hong-shik(鄭弘湜)' should be corrected to 'Jeong Hong-myeong(鄭弘溟)'.

KCI등재

10邵南이 星湖에게 보낸 서간의 성격과 家藏 書簡의 중요성

저자 : 구지현 ( Koo Jeahyoun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296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성호 이익은 근기 남인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소남 윤동규는 성호 이익의 첫 번째 제자로서 성호학파의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학자이다. 성호와 소남은 평생 서간을 주고받으며 실제 생활에서 예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기도 하였고 경전에 관한 학술적인 토론이 오갔으며, 사제 간에 관심을 공유하고 확대시켜 나가면서 학파 내에 학문적인 진전을 이루어나가기도 하였다. 정치적인 문제 및 학파의 분열로 인해 성호의 문집이 불완전한 데 비해 소남의 가장 문집은 간행되기 전 초고의 상태이므로 원형에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성호학파의 사상 및 학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한 자료이다.
그런데 소남 집안에 소장된 원찰과 소남 문집에 실린 서간을 비교해 보면 사적인 내용이 제외된 채 학술적인 내용만이 선별되어 실렸고, 문집이 편집된 후에도 개인적인 내용은 대부분 산삭하도록 표기되어 있다. 편집자가 소남의 학문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거듭해서 선별하고 산삭해 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집에 실리지 않은 내용 및 원찰을 포괄하여 연구하여만 성호학파의 실제에 접근할 수 있다.
소남 문집에 실리지 않은 원찰 28편을 살펴보면 사회적인 교유나 학문의 전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가장 서간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상시적으로 안부를 묻는 서간의 내용 속에 여타 제자들과 성호와의 교유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소남의 개인사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성호와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성호학파에서의 소남의 역할과 학문을 연구한다면 학문적인 면뿐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 교유의 모습과 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가장 서간의 연구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Seongho I-ik was a scholar of the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represented by Namin at Geungi region. Sonam Yun Dong-gyu was a scholar who had played a main role to lay a foundation of Seongho school as a first student of Seongho I-ik. Seongho and Sonam had exchanged letters and the idea of how to apply a matter of courtesy to a real life throughout their whole life and had scientific discussion about sacred book. Additionally having a teacher and a student relationship, they had accomplished academic progress as sharing and expanding their interest. Compared with Seongho anthology, it was imperfect due to a political matter and the split within school, however, the Letter Owned by Sonam Family is a meaningful material to understand Seongho school's idea and study because it was a rough draft before the publication, which was relatively similar with the original form.
However when we compare with two materials which are the original form of the letter owned by Sonam family and the letter published in a Sonam anthology, chosen scientific content was only published as excepted personal content. After the anthology was edited, most of the personal content is marked to delete. Because editor have been selecting and deleting focusing on the scientific work of Sonam. Therefore only if we study the content and the original form of the letter which were not published in anthology could be possible to get near to the substance of Seongho school.
Looking at the twenty-eight original form of letter which were not published in Sonam anthology, we could figure out the fact that the Letter Owned by Sonam Family shows in a concrete way how social association or instruction of one's study had been progressed. We could also check the substance of exchange with Seongho and other students out in the letter about asking about welfare at all time. Moreover, it could be possible to see not only Sonam's personal affairs, but also personal intimacy with Seongho as much as they have.
Should the role and study of Sonam in Seongho school be researched, it will be essential to research the Letter owned by Sonam Family, which shows not only a side of study but also the aspect of real exchange and personal matters.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 안어(按語)와 전(傳) 장지완 『규장전운간오』의 비교

저자 : 심경호 ( Sim Kyungh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61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張之琬(1806~1858)의 『張玉山斐然外抄』에 수록되어 있는 奎章全韻刊誤는 정조가 『奎章全韻』의 上聲梗韻에 御名 '祘'을 배속시키고 '省'의 음을 註記했다고 밝혔다. 규장전운간오 는 이외에도 『규장전운』의 편찬 과정, 字序, 字訓, 字形, 韻屬등에 관해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평을 가했다. 그런데 그 상당 부분이 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의 안어와 일치한다. 하지만 장지완은 『규장전운』의 편집이나 교정에 참여한 인물이 아니다. 『규장전운』을 교정한 일이 있는 정약용이 그 사실을 수택본의 天頭에 기록해 두었으나 후대에 지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전운간오 는 장지완의 저술이 아니라 정약용이 별도로 정리해 두었던 원고를 轉錄한 것인지 모른다. 규장전운간오 의 여러 내용이 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의 欄外按語와 일치한다.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 정조에게 진헌할 목적으로 文獻備考刊誤를 이룬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정약용은 국가 편찬물인 『규장전운』에 대해 '刊誤'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KCI등재

2안평대군의 『비해당선반산정화(匪懈堂選半山精華)』 편찬과 주해방법

저자 : 노요한 ( Johann Noh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102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왕안석의 시를 애호한 조선의 왕자가 있었다. 바로 安平大君李瑢(1418~1453)이다. 안평대군은 북송 때 정치가이자 시인인 王安石(1021~1086) 시의 정수를 모아 『匪懈堂選半山精華』로 엮고 목판으로 간행했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과 일본 세이기도(成簣堂) 문고 등에 소장된 6권 2책의 이 목판본은 『고사촬요』(1585년경)의 책판 목록에 '경상도 안동'에 책판이 저록되어 있어 안동에서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평대군 자신의 서문과 신숙주의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의 『반산정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으며, 왕안석의 어떤 시들을 담고 있을까. 안평대군은 어떤 텍스트를 저본으로 왕안석의 시를 읽고 있었으며 어떠한 기준으로 시를 선정하였을까. 안평대군이 작성한 주해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때 참조 준거가 된 것은 무엇일까. 본고는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안평대군 편 『비해 당선반산정화』의 편찬 과정, 저본과 작품 선정 기준, 주해 방법에 대해 간략히 논하였다.

KCI등재

3신숙주(申叔舟)시세계에 있어서의 '윤리성(倫理性)'의 문제와 그 파장(波長)

저자 : 김창호 ( Kim Chang-h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3-129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신숙주의 시에서 '윤리성'에 대한 負荷가 시세계의 형성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 가를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변을 거치면서 양심의 가책, 곧 윤리성에 대한 부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립감으로 이어졌다. 그는 세상사를 一括하는 표현이나 넒은 의미 영역에 걸쳐있는 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투식화한 이들 시어는 교제 상황에서 감정의 곡절이나 세세한 심리 표현을 의례적 차원에서 관리한다.
그는 '閑'을 지향했고 '達觀'의 위치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醉興을 통한 윤리적 상흔의 망각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酬唱이나 贈答의 상황에서 명쾌하게 자신의 지향을 제시하거나 상대와의 정서적 합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公的역할의 우산 아래 상투적 표현과 모호한 시어의 구사, 자아 은폐의 경향으로 흐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숙주는 絶句의 마지막 부분에 상대와 함께 하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거나, 限定形의 어구를 통해 상대와의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격상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자아의 왜소화에 따른 불안 심리가 굴절되어 나타난 형태이다. 그의 시에는 영웅적 삶에 대한 의지와 허무감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한다. 시인은 허무감을 느끼지만 작품 맥락에서 이것은 곧바로 영웅적 다짐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구조는 윤리적 각도에서 자신을 점검할 여지를 적게 만든다. 허무감은 윤리적 성찰로 연결될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무감에서 영웅의식으로 리셋되던 궤도가 무너지는 순간, 윤리성의 문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올 수 있다. 영웅의식을 대체할 지향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탄이나 종교에의 귀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만년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성찰적 시의 창작은 이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KCI등재

4이이첨(李爾瞻)과 광해군대 한문학의 한 국면

저자 : 심규식 ( Sim Kyusik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1-16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仁祖反正으로 光海君정권의 인사들이 제거됨으로 인해, 약 10년간의 館閣文學은 한국한문학사의 공백기가 되었다. 이 시기 관각문학의 중심에는 文衡을 담당한 李爾瞻이 있었다. 1613년의 癸丑獄事로 禮曹判書에 오른 이이첨은 李白·杜甫에 대한 조선 전기 시학서를 복간하고 李杜의 시 암송을 進士試응시 자격으로 두었는데, 이는 당대 學唐風을 官學에 포섭하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또, 윤리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東國新續三綱行實圖』와 『忠烈錄』을 편찬했다. 이이첨은 四六騈儷文의 창작에 있어서 平仄規式을 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그가 역적으로 사형당했음에도 그의 관각문 일부는 문체의 모범으로서 보존될 수 있었다. 이이첨은 科表양식을 정확히 적용시킨 謝恩表를 지었으며, 討逆敎書에는 簡嚴한 문체로서 정권의 위엄을 선언했다. 한편으로 서적의 序跋文에는 변려문과 같은 四六言의 對句로 이루어졌으나 그 변격의 평측을 활용한 독특한 문체를 사용했다. 이이첨과 광해군대 관각문학은 17세기 초 한국한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KCI등재

5이계(耳溪) 홍량호(洪良浩)의 고문론(古文論) 연구(硏究)

저자 : 이향배 ( Lee Hyang-bae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0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耳溪 洪良浩(1724-1802)는 영·정조시기에 활동한 소론계 대표문인이다. 어려서 저촌 심육에게 수학한 홍량호는 兩館大提學을 지낸 관각문인이지만 경세치용의 실학적 글쓰기를 통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평소에 박학을 추구하여 경학은 물론, 한자학, 지리학에 이르기까지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다. 학문의 근본을 經術에 두고는 경술을 다시 體와 用으로 나누었다. 性理를 체로, 政事를 용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체용이 원활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典章에 대한 넓은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의 실학적 글쓰기 이면에는 확고한 고문이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이를 문학론의 차원에서 검토해왔지만 본고는 고문론의 관점에서 다시 분석하였다. 홍량호가 단순한 산문작가가 아니라 고문을 추구한 고문가이기 때문이었다.
이치가 象에 붙은 것이 문이며 도의 영화라고 정의한 그는 폭넓은 의미로 문을 설명하였다. 聖人의 문장을 行道와 傳道두 종류로 나누고는 학문을 통해 조화를 형용하고 사물의 변화를 다하는 글쓰기를 주창하였다. 결국 문장이 천하의 공리라고 선언한 그는 깊은 학문을 통해 공적으로 천하에 이치를 밝히는 글을 추구했다.
또한 문을 經緯라고 정의한 그는 도와 기가 錯綜이 되어야 지극한 문장이라 보았다. 도와 기를 기준으로 역대 고문의 흐름을 진단했는데 도기가 착종된 전범이 육경이었다. 진한 당송의 글은 도기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경으로써 도를 중시하고 동시에 緯로써 기가 없다면 문이 될 수 없다면서 기의 배양을 중시했다. 기를 배양하는 방법이 바로 호연지기였다.
홍량호는 육경에 기준을 두고 선진 전한의 문장이 가장 근고하다고 보았다. 先秦 前漢 및 唐宋작가에 대해 학문을 기준으로 비평한 그는 사마천보다는 가의를 가장 높게 평가하였다. 가의가 서한 고문을 창도했다고 본 그는 『가자수언』을 편찬했으며 그의 글쓰기를 추종하였다. 서한시대 재주와 학문을 두루 갖추고 체용을 겸비한 유일한 학자로 가의를 꼽고는 서한시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홍량호의 고문론은 도학가의 문학이론과 진한고문가의 이론을 절충한 특징이 보인다. 이는 진한고문가와 당송고문가의 양대 흐름에서 벗어나 고문의 전범을 육경에 두고 경세치용의 실학적 글쓰기를 위한 새로운 고문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KCI등재

6『열수문황(冽水文簧)』과 정약용(丁若鏞)의 변려문 인식

저자 : 신윤수 ( Shin Yunso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14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冽水文簧』은 丁若鏞(1762~1836)이 아들들에게 자신의 변려문을 한데 모으게 하여 엮은 책이다. 그는 自序에서 젊은 시절 몰두했던 변려문에 대한 후회를 담아 이를 엮었다고 밝혔다. 정조 연간 문장가이자 비평가, 관료로서 활동한 정약용의 변려문 인식은 '古文'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에서 변려문이 어떤 위치를 가졌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다.
정약용의 '후회'는 단순하지 않다. 변려문 자체나 존재 가치 전부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변려문은 사명 등 용도에 맞게 작성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자신의 변려문 몇 작품을 문집에 따로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의 반성적 회고는 변려문 전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實'을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성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기교에 지나치게 공력을 요구하는 변려문, 그 중에서도 특히 科文을 반성한 것이다. 취실과 경세의 문장을 짓고자 했던 정약용은 『冽水文簧』을 통해 기예가 되어 버린 科文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을 남긴 것이다.

KCI등재

7조선 후기 송두신문(送痘神文)의 창작 양상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5-253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 후기에 송두신문이 지속적으로 창작된 현상에 주목하여, 송두신문의 등장 배경과 내용, 송두신문의 창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에 두창이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앗아가자, 민간에서는 두창을 섬기는 풍습이 만연했다. 이로 인해 이전에는 시문의 주된 제재가 되지 못했던 '두창'이 본격적으로 시문의 전면에 등장했는데, 이현석의 「聖痘歌」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숙종이 재위 중에 두창에 걸렸다가 낫자, 이현석은 「성두가」를 지어 두창을 '聖痘'로 신격화하고 두창의 공능을 칭송했다. 이현석의 「성두가」는 이후 송두신문 계열 작품의 창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조선 시대 유자들은 굿을 벌여 두신을 섬기는 풍속을 비판했지만, 두창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두신의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나오게 된 문학적 양식이 송두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유자들은 송두신문을 통해 두신의 존재와 두신의 영험함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은 두신을 보는 관점에서는 차이를 보였으나, 공통적으로 두신의 존재와 공능을 인정하고 두신을 제대로 배송하는 방법은 무당굿이 아니라 시문을 지어 전송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즉 조선 시대 문인들은 두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무당굿이 아닌 제문으로 전송함으로써, 두창에 대한 주술적 대응 방식을 활용하되 미신에 빠졌다는 비판은 면하려 했던 것이다. 송두신문은 두창이라는 공포의 질병을 마주한 문인들이 유가적 이상과 현실적인 대응 사이의 괴리를 좁히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창작된 송두신문은 祭神文의 일종으로서 서두부-전개부-종결부라는 3단계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때 두창의 순조로운 진행이야말로 두신을 공경히 배송하는 핵심 근거인 만큼, 대부분의 송두신문에는 병증의 규칙적인 진행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한편, 송두신문은 작자의 삶에 대한 성찰을 표현하는 문학적 장치로 활용되기도 했다. 유희와 윤기는 송두신문을 변주하여,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두신'을 소재로 삼아 인간 사회의 禍福과 窮達에 대한 성찰을 드러냈다.
현재의 관점에서 송두신문을 보면, 조선 시대 문인들이 두신에게 복을 비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송두신문의 창작은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나름의 논리로 전염병의 유행을 설명하고, 그러한 해석을 토대로 두창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KCI등재

8조선후기 문인들의 시축제작 참여양상과 관계 맺기 - 조인영(趙寅永)의 '추흥창수(秋興唱酬)'를 중심으로 -

저자 : 신민섭 ( Shin Min-seob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시축제작 참여양상을 살펴보고 조인영의 '추흥창수'를 통해 당시 문인들이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시축을 제작하였고, 활용했으며, 관계 맺기를 시도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詩軸간 雅趣의 경쟁은 조선후기 시회문화의 새로운 이슈가 되었다. 한편, 황화수창이 중단된 이후 詩는 국가적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이유로 문인들의 作詩수준은 저하되어, 비록 詩會를 열고 시축을 제작한다 하더라고 아취를 담보할 수 없었다. 이에 문인들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시회와 무관한 외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끌어들이기'였다.
申緯(1769~1845)는 1833년 2~3월 사이에 『秋興唱酬卷』의 序文을 작성했다. 이 시축에는 趙萬永, 趙寅永, 李止淵, 李紀淵, 權敦仁, 趙秉鉉, 李復鉉등 7인이 杜甫의 「秋興」 8수의 韻字를 차운한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조인영 그룹이 당시 서산에 머물고 있었던 신위에게 시축을 보낸 이유는 『추흥창수권』의 8번째 자리를 채우라는 의도였다. 시축이 제작된 '추흥창수'는 1832년 9월, 東岩에 위치한 조인영의 別墅에서, 杜甫의 「秋興」 8수의 운자를 차운한 시가 제작된 시회이다. 추흥창수를 통해 제작된 시축이 『秋興唱酬』로서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유일본(이하 고려대본)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대본에는 조만영, 조인영, 이지연, 이기연, 권돈인, 조병현, 이복현, 趙秀三, 姜溍 등 9인의 詩가 수록되어 있다.
신위가 전달받은 시축과 고려대본의 차이점은 조수삼, 강진의 존재 여부다. 고려대본을 살펴보면 조수삼, 강진은 추흥창수 참여자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위가 전달받은 시축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는 시축이 완성된 1832년 10월 이후부터, 신위의 서문 작성 시기인 1833년 2~3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KCI등재

9기해년 통신사행과 한일 문사의 시론 및 시 비평

저자 : 이효원 ( Lee Hyo Won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19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7세기 말 임술사행에서 新井白石의 등장으로 촉발된 일본 한시에 대한 통신사의 관심은 18세기 초 소라이학파의 등장과 더불어 고조된다. 특히 기해년 사행의 필담창화집에는 양국 문사들이 이상으로 삼는 시론과 관련한 필담이 증가했다. 또 시선집 및 비평서에 대한 언급이나 통신사에게 자신의 시를 비평해줄 것을 청하고 이를 출판하는 등 시 비평에 대한 관심 역시 증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사들은 주로 당시와 명시를 존숭하고 송시를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조선 문사들은 당시를 으뜸으로 치면서도 송시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통신사가 명시를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은 데 비해, 일본에서는 소라이학파의 영향으로 명시를 한시 학습의 첩경으로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었다. 기해년 사행의 필담과 시 비평에는 당시 변화하는 일본의 문풍이 잘 드러난다. 양국 문사들은 추구하는 시론와 관련해서 활발하게 필담을 나누었고, 통신사는 일본 문사의 시집에 평어를 쓰고 일본 문사가 이 평어를 읽고 다시 평어를 다는 등 양국 문사 사이에 활발한 시 비평이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한일 문사의 문학 교류의 양상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검토하였다.

KCI등재

10『상서(尙書)』 강의(講義)를 통해서 본 정조(正祖)의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에 관한 인식과 해석 방식에 대하여

저자 : 이영준 ( Lee Young-june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21-359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弘齋全書』의 『尙書』 講義를 통해 程朱性理學에 관한 正祖의 인식 및 해석과 이해를 개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조는 君師를 자임하여 文治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1778년에 규장각을 문화정책의 추진 기관으로 재구성하고 1781년 抄啓文臣制度를 신설하였다. 經史 講義는 이 초계문신을 재교육하는 과정에 진행된 것이며 이 조문과 조대를 수합한 것이 바로 「경사강의」이다. 『弘齋全書』에 수록된 이 「경사강의」는 정조의 條問과 초계문신 및 지방 유생들의 條對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경사강의」는 일종의 經典解釋學자료로서, 경학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학문적 성과, 그리고 강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을 종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조는 梅賾本 『古文尙書』의 위작 문제, 人心과 道心의 이해, 道學의 관건으로서 欽과 敬의 이해 등 『상서』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어떠한 조문을 내렸으며 어떠한 조대를 취하였을까. 또 강의를 통해 표명한 정조의 학문 방법론으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본고는 『상서』 강의를 통해 정조의 정주성리학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12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온지논총
71권 0호

KCI등재

민족문학사연구
78권 0호

KCI등재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KCI등재

반교어문연구
60권 0호

KCI등재

어문론총
91권 0호

KCI등재

한국문예비평연구
73권 0호

KCI등재

동방한문학
90권 0호

KCI등재

현대문학이론연구
88권 0호

KCI등재

세계문학비교연구
78권 0호

KCI등재

한민족어문학
95권 0호

KCI등재

국제어문
92권 0호

KCI후보

한국문화기술
32권 0호

KCI후보

방정환연구
7권 0호

KCI등재

어문연구
50권 1호

KCI등재

한민족문화연구
77권 0호

KCI등재

구비문학연구
64권 0호

KCI등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94권 0호

KCI등재

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
49권 0호

KCI후보

한성어문학
46권 0호

KCI등재

한문학논집
61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