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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강좌 미술사> 키질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사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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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사적 연구

A Comparative Study of Korean Golgul Cave-temple and the Kizil Cave-temple Cave 38, and Cave 47

심주완 ( Shim Joo-wan )
  •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 : 강좌 미술사 56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119-150(32pages)
강좌 미술사

DOI

10.24828/AHJ.56.119.150


목차

Ⅰ. 머리말
Ⅱ. 골굴 석굴의 특징
Ⅲ. 키질 석굴
Ⅳ. 골굴 석굴과 키질 석굴의 비교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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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최근 골굴 석굴은 세계적인 석굴과 비교하는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앞의 연구가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비교하였다면, 이 글은 인도 석굴과 중국 석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서역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로 서역 석굴 중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키질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 논문이다. 키질 석굴은 제38굴과 제47굴을, 골굴 석굴은 예배굴과 마애불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였다.
골굴 석굴은 세계 석굴 사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석굴 사원이라는 점이다. 석굴암 석굴이 창조적인 석굴이라면 골굴 석굴은 정통 석굴 사원을 계승하는 석굴이다. 골굴 석굴의 복원은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을 보인다.
키질 석굴은 서역남로 호탄과 함께 서역의 최대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에 자리하고 있으며, 3세기경 불교가 번성했던 쿠차국 시대에 개착되었다. 이 글은 키질 석굴의 위치적 특성, 열강의 약탈, 석굴의 분포, 석굴의 구조, 석굴 형식의 변천, 석굴의 의의 등을 고찰하였다. 키질 석굴의 대표적인 구조인 중심주굴 형식은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로 창안된 석굴 형식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키질 석굴을 대표하는 석굴을 현장 조사하여 제38굴과 제47굴의 구조와 공간 구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름모형 문양의 벽화는 기존의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 이외에 우주목의 잎인 보리수잎 혹은 연꽃잎으로 해석하였다. 키질 석굴의 정벽은 인도 초기 스투파의 상징 체계를 창조적으로 구현하여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해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골굴 석굴의 예배굴, 마애불과 키질 석굴의 제38굴과 제47굴을 비교하여 골굴 석굴과 키질 석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자연조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배굴과 대상굴이라 형식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Recently, the Korean Golgul Cave-temple has attracted attention as research comparing it with the world-class Cave-temple has begun in earnest. If the previous work compared the Cave-temple in India and China, this article compares the Cave-temple on the Silk Road and the Golgul Cave-temple, which served as a link between the Indian Cave-temple and the Chinese Cave-temple. The first of the Silk Road Cave-temples to emerge is the Kizil Cave-temple. This article compares the Kizil Cave-temple and the Golgul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studied by Cave 38 and Cave 47, while the Golgul Cave-temple is studied by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The Golgul Cave-temple is a famous Cave-temple temple that inherits the world's Cave-temple tradition. If Seokguram is a creative Cave-temple, the Golgul Cave-temple inherits the orthodox Cave-temple. The restoration of the Golgul Cave-temple will be an opportunity to shed light on the value and meaning of our country's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located in Kucha, the largest oasis city in the Western Regions, along with Hotan in the Western Regions, and was created during the Kucha Kingdom, when Buddhism flourished around the 3rd century. This article considers the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the Kizil Cave-temple, the plunder of the powers, the distribution of Cave-temple, the structure of Cave-temple, the transformation of the Cave-temple format, and the significance of Cave-temple. The typical structure of the Kizil Cave-temple is the Center Column Format. This form of Cave-temple is created as a problem of structural safety. In addition, the writer investigate the Kizil Cave-temple in the field to consider the structure and spatial composition of Cave 38 and Cave 47. Contrary to the interpretation that the diamond-shaped mural symbolizes Sumisan Mountain(Sumeru), it is interpreted as barley or lotus petals, the leaves of the spatial tree. The Kizil Cave Temple is believed to have creatively implemented the symbolic scheme of early Indian Stupa to address the structural limitations under load.
In addition, the Golgul Cave-temple's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were compared to the Kizil Cave-temple Cave 38, and Cave 47. So we looked at each other's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Although they reveal differences in structural limitations that arise in natural conditions, they were found in common in the form of worship and a large Buddha statue c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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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226-6604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8-2021
  • :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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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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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돈황 285굴과 골굴석굴의 석굴 구조와 도상의 비교 연구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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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285굴의 석굴 구조와 불상·불화는 서위시대의 가장 중요한 석굴일 뿐더러 벽면의 불상·불화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불교 미술이다. 이와 함께 신라의 골굴석굴은 이런 실크로드 상의 석굴을 계승하여 조성되었는데 인도나 중국 석굴에 가장 가까워 한국 석굴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첫째, 석굴 주실구조는 돈황 285굴이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인데 비하여 골굴 법당굴은 직사각형이어서 대조적이다.
둘째, 돈황 285굴의 불상은 정벽의 주존불만 조성되었는데 주존불은 미륵불의상과 협시보살로 대묘상과 법림보살 등 미륵 삼존상이고, 두 소감실(小龕室)의 상은 유가유식파의 창시자들인 무착과 세친으로 추정된다.
셋째, 돈황 285굴의 4벽과 천정에 전면적으로 벽화가 묘사되어있다. 이 벽화의 특징은 아미타사상(정토3부경)과 법화경사상을 도상화한 내용인데 본존 미륵불에 유가유식사상을 보조하는 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넷째, 골굴석굴과 돈황 285굴은 구조와 도상 특징 그리고 조형 사상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석굴 구조는 전실과 주실로 구성된 구조는 같지만 골굴 법당굴은 주실이 장방형이나 돈황 285굴은 정방형으로 거의 유사하며, 천정은 골굴법당 평천장이나 285굴은 말을 엎은 듯한 복두천정(伏斗天井)이어서 다른 점이다.
또한, 돈황 285굴은 정벽 감실에 미륵삼존불을 주존으로 봉안했으나 골굴 법당굴은 좌우에 불상이 봉안되었으나 정벽에 주존불은 확인할 수 없고 통일신라 마애석가불이 옆 벽면에 마련되어 주존불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돈황 285굴의 4벽과 천정은 전체적으로 벽화로 채색되어 있으나 골굴 법당굴은 벽화는 없이 조각으로만 장엄되어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다섯째, 돈황 285굴은 창건때는 유가유식사상에 의하여 조성되었는데 여기에 법화사상과 아미타사상이 가미되어 점차 법화와 아미타 신앙으로 확대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골굴 석굴은 초창때는 유가유식사상이 주신앙이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통일신라때는 법화사상이 주신앙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The stone cave structure and Buddhist statues and painting at Dunhuang 285-cave are the most important stone caves in the Western Wei Dynasty, and the Buddhist statues and painting on the wall are the most important Buddhist art representing this era. In addition, Shilla's Golgul Caves were created by inheriting these stone caves on the Silk Road, and as they are closest to those of Indian's and Chinese stone caves, so they are regarded very important in Korean stone caves.
First, the structure of the main chamber of the stone cave is a flat plane with a Dunhuang 285-cave close to a square shape, whereas the Golgul Buddhist sanctum cave is a rectangular shape, which is in contrast.
Second, only the Main Buddha Statue on the main wall of Dunhuang 285-cave was built, while the main Buddha statues are Maitreya Buddha statue seated on a chair and accompanying Bodhisattva that are the Maitreya Buddha Triad including Daemyosang and Beoprimbosal, and the images of two small niches (小龕室) are presumed to be Muchak and Sechin, the founders of the Yogacara vijnaptimatra.
Third, the mural is depicted throughout the four walls and ceiling of Dunhuang 285-cave. The characteristic of this mural is the content iconographicized from Amitabha thought (Jeongto3bugyeong) and the Lotus Sutra thought, and it is evaluated as a thought that assists the Yogacara vijnaptimatra thought in the main Maitreya Buddha.
Fourth, Golgul Caves and Dunhuang 285-cave have the same structure, iconography characteristics, and formative thoughts, and have different points. The stone cave structure is the same structure consisting of the front chamber and the main chamber, but the Golgul Buddhist sanctum cave has a rectangular main chamber, and the Dunhuang 285-cave has a square shape and is almost similar, and the ceiling is the flat ceiling of the Golgul main hall, but the 285-cave is different because it is Bokducheonjeong (伏斗天井) that looks like a horse is upset.
In addition, Dunhuang 285-cave enshrined the Maitreya Triad Statue as the main entity in the chamber of the main wall, but in the Golgul Buddhist sanctum cave, Buddha statues were enclosed on the left and right, but the Main Buddha Statues on the front wall were not confirmed, and the rock cliff Shakyamuni Buddha in the unified Shilla is placed on the side wall and serves as the Main Buddha Statue.
In addition, the four walls and ceiling of Dunhuang 285-cave are painted entirely with mural paintings, but the difference is that the Golgul Buddhist sanctum cave is magnificent only with sculpture without mural paintings.
Fifth, Dunhuang 285-cave was created by the Yogacara vijnaptimatra thought when it was founded, and it is said that here Beobhwa thought and Amitabha thought were added to this and gradually expanded to the Beobhwa and Amitabha faith. In contrast, it is possible that the Yogacara vijnaptimatra thought was the main faith when the Golgul stone cave was first founded, but it is believed that at the time of the Unified Shilla, the Beobhwa thought was the main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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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령사석굴과 골굴석굴에 대한 고찰

저자 : 손영문 ( Son Young Mo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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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은 하서주랑에 개착된 석굴로, 동서문화의 교착점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교류하며 불교교학 뿐만 아니라 불교미술사상 의미 있는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병령사 석굴에서 가장 중요한 석굴은 제169굴로, 이 석굴은 개착 당시의 신앙을 알려주는 불상과 수행자의 흔적이 벽화로 남아 있어 석굴연구에 있어서 절대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병령사 석굴은 영이(靈異)롭게 생긴 암벽에 형성된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수행자들이 드나들며 예배존상을 조성하고 관불수선하므로서 그 시작을 알렸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있는 골굴 석굴은 초기의 신앙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마애대불의 존재나 그 주변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천연의 석굴은 병령사 초기 석굴과 유사점이 많다. 법흥왕대 불교가 공인된 이래 수도 경주의 곳곳에는 가람이 건립되고 많은 수행자들와 이를 따르는 신도들이 생겨났다. 수행자들은 불교의 홍포를 위해 대중과 호흡하면서도 불교의 본연의 가르침인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수행 장소로는 반듯하게 지어진 가람과 더불어 불교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숲이나 나무아래, 수려한 바위굴 등도 선호되었다.
이렇듯 병령사 석굴이나 골굴 석굴은 천연의 수행 장소였다. 이곳은 대규모 인원이 들어 가 불상을 예불하거나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일념으로 구도행각을 벌이는 수행자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초기 병령사 석굴의 기록을 보아도 주로 수행을 위한 몇 몇의 이승(異僧)들이 드나들며, 불상을 만들고 일념으로 관하며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병령사 석굴이 그러했듯이 골굴 석굴도 이와 같은 신앙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즉 불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단석산 마애불상군이나 경주 남산의 삼화령 석굴, 불곡 석굴, 탑곡 마애조상군 등 삼국시대 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골굴 석굴의 수행방식도 불상을 일념으로 관하고 칭념하며 궁극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한편 병령사 석굴의 상징인 미륵대불은 당대에 조성되고, 골굴 석굴의 상징인 마애대불도 통일신라 9세기대에 조성된다. 수많은 석굴을 대표하여 큰 규모의 상징을 조성하는 사례는 당대에 들어서서야 본격화 된다. 상징불로 선택된 도상은 대개가 의좌세를 취한 미륵불이 많으며, 그것은 정치권력의 정치적인 야망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륵은 석가여래 이어 下生하는 부처이지만, 그가 하생할 시점은 곧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 전륜성왕이 치세하는 시절이어야 하므로 정치화하기 매우 좋은 신앙이었다.
골굴 석굴의 마애대불은 도상과 신앙적으로 석가여래로 판단되고 있고, 조성시기 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신라 9세기 대는 왕족들 간의 왕권쟁탈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불 미륵신앙이 급부상하고 각광을 받았다. 아마도 마애대불이 조성되던 시대를 통찰하면, 이 마애대불을 조성한 조성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던 문무대왕릉이 조망되는 곳에 새로운 세상과 시대를 갈망하며 미륵대불을 조성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 원류와 조성배경은 둔황이나 병령사, 천제산 등 당대 조성된 대불신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The Byeongnyeongsa(炳靈寺) cave, which is a stone cave that was excavated in the Hexi(河西) corridor, is located at the intersection of East and West cultures. As Buddhism was practiced in the place from early on, not only study of Buddhist doctrines were established, but also meaningful Buddhist art were created. The most important cave in the Byeongnyeongsa cave is the 169th cave, and this cave provides absolute data for the study of the stone cave, as the traces of Buddhist statues and Buddhist monks who convey the faith at the time of the founding remain as murals. Disciples of Byeongnyeongsa cave used strangely shaped natural rock surface to create alter with seating Buddhist. They began and announced their spiritual training by seating down in front of statue of Buddha and closing their eyes. The Golgul(骨窟) cave at the eastern end of the Silk Road does not contain any information indicating the form of faith, but the existence of the big engraved Buddha on the rock surface and the large and small natural caves formed around it are similar to those in the early days of Byeongnyeongsa cave. Since Buddhism was recognized during King Beopheung(法興王) of Silla era, Buddhist temples were built in various places in Gyeongju, the capital city of Silla, and many people became Buddhist monks or believers. The disciples of Buddhism breathe with the public to promote the Buddhism, but have not neglected the original teaching of Buddhism and their own training for enlightenment. As the Buddhist scriptures say, for the place for meditation, well-built Buddhist temples, forests, under trees, and beautiful rock caves were favored.
As such, the Byeongnyeongsa and Golgul caves were natural places of practicing Buddhism. This is not a space where a large number of people can enter and worship or preach the Buddha's will, but it is best for disciples who practice Gudohaenggak(traveling the whole country to practice Buddhist doctrine, 求道行脚) with ilnyeom(one thought, 一念). Looking at the early records of the Byeongryeongsa cave, several foreign Buddhist monks came to cave making Buddha statues, thinking deeply with conviction, in order to advance to the level of enlightenment. Like the Byeongnyeongsa cave, the Golgul cave would have taken the same form of faith. In other words, just like the caves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such as Danseoksan(斷石山) Buddha engravings, Samhwaryeong(三花嶺) cave, Bulgok(佛谷) cave, and Tapgok(塔谷) Buddha Group in Namsan, Gyeongju, the disciples thought deeply about the statue of Buddha and trained themselves to move on to the ultimate goal of enlightenment.
On the other hand, big Maitreya Buddha, the symbol of the Byeongnyeongsa cave, was built in the Tang Dynasty of China, and the image of Buddha engraved on rock, the symbol of the Golgul cave, was engraved in the 9th century of the Unified Silla. The case of creating a large-scale symbol representing numerous caves did not happen until the Tang dynasty of China. Most of the statues chosen as symbolic Buddha have many Maitreya Buddha in the form of sitting on a chair, and it is often associated with the political ambitions and power. Maitreya Buddha is a Buddha who descends after Sakyamuni Buddha who descends into the world to rebirth, but when the time when he will descend must be the period of the reign of Chakravarti, the ideal monarch of Buddhism, which was a very good faith to politicize.
The big Buddha engravings in the Golgul cave is religiously considered to be the Buddha of Sakyamuni, and is considered to be in the late 9th century when it was engraved. The 9th century of Silla was a period of great political and social unrest due to the struggle for kingship among royal families. In times of social unrest, the faith of the future Buddha, Maitreya, emerged in the limelight regardless of the times. Perhaps looking deeper into the time when the big Buddha was engraved, the creator of the Buddha dreamt of a new world, longing for a peaceful new era in the place such as the time of great achievement of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unified by King Munmu(文武王) of Silla. As the engraved Buddha was created overlooking of the tomb of King Munmu of Silla, the possibility of engraving of big Maitreya Buddha was cannot be excluded. Of course, the origin and background of its creation can be found sorely in the beliefs of the big Buddha engravings that were often established during the Tang Dynasty, such as Dunhuang, Byeongnyeongsa cave, and Mt. Cheon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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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베제크릭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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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중앙아시아 투르판 지역 최대의 석굴로 손꼽히는 베제크릭(柏孜克里克, Bezeklik) 석굴과 우리나라에서 자연동굴을 적극 활용하면서 축조가 동시에 이루어진 골굴석굴을 비교한 논문이다. 이 두 석굴은 자연 개착과 인공 축조굴로 이루어진 혼합석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에 따라서 Ⅱ장에서는 베제크릭석굴의 조성배경과 사상 및 현황을 살펴보았고, Ⅲ장에서는 석굴 조영 형식과 석굴에 조성된 다양한 벽화 주제 가운데서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서원화(誓願畵)'를 중심으로 알아보았으며, Ⅳ장에서는 베제크릭석굴을 통해 골굴석굴의 위상을 살펴보고 상호 연관성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첫째, 베제크릭석굴은 개착식과 축조식 조영 방법으로 이루어 졌는데 골굴석굴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굴석굴이 베제크릭석굴과 유사한 측면은 수행굴의 외형을 자연스럽게 바위면을 놔두고 그 사이에 수행굴을 개착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골굴석굴은 대부분 자연암벽을 깍은 개착식이며 베제크릭석굴은 이와는 다르게 축조 방식으로 많이 조영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둘째, 예배굴 내부 구조 형식에서 전실과 본실이 긴 장방형에 가까운 석굴에 속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수행굴도 베제크릭석굴에서 소굴을 후벽에 조영했다는 점에서 승방 역할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골굴석굴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셋째, 베제크릭석굴 '서원도' 도상에서 묘사한 건장하고 당당한 형태의 불상은 필선이 매우 유려하면서도 강한 힘이 표현되어 있는데 골굴석굴 마애불상의 형태와 가사 옷주름 표현도 이와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 베제크릭석굴의 벽화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봐야하겠지만 현황으로 봐서는 그 중심이 법화사상을 배경으로 조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골굴석굴의 조성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골굴석굴과 서역 베제크릭석굴의 비교 연구는 중앙아시아 미술의 중요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원류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This study compares the Bezeklik (柏孜克里克, Bezeklik) caves, one of the largest caves in the Turpan region in Central Asia, and the Golgul Caves, which were constructed at the same time while actively utilizing natural caves in Korea. These caves of two separate regions have great implications from the point that they have a common point of being mixed caves consisting of natural excavation and artificial burrows.
Accordingly, in Chapter II, the background, thoughts, and current status of Bezeklik Caves were examined, in Chapter III, of the caves building formats and the various mural themes created in the caves, the best remaining Seowonhwa(誓願畵)' was focused and examined, and in Chapter IV, through Bezeklik caves, this study examined the status of Golgul Caves and examined their interrelationships.
As a result, first, it can be seen that the Bezeklik Caves were constructed by the cut-and-cover and construction-type methods, and that the Golgul Caves also show both methods. The similar aspect of Golgul Caves to Bezeklik Caves is that as for the outer shape of the discipline cave, its rock surface is naturally left, and the discipline cave is intersected between them. Besides, most of Golgul Caves are cut-and-cover, cut from natural rock walls, and unlike the Bezeklik caves, there was a difference in that they were built a lot by way of construction.
Second, in the internal structure of the worship cave, it was found that the front and main rooms belong to caves that are close to the long rectangular shape. It can be said that the discipline cave also played a role of monks' living quarters in that a small cave was built in the rear wall of the Bezeklik caves, and this point was also connected to the Golgul Caves.
Third, the sturdy and stately form of the Buddha statue described in the 'Seowondo' iconography of Bezeklik Caves has a very fluid line and expresses a strong force, and the shape of the Golgul Caves rock cliff Buddha statue and the expression of the Kasa creases were similar.
Fourth, the theme of murals in Bezeklik Caves is very diverse, so we need to take a closer look, but in terms of the current status, it can be seen that the center was created with the Lotus Sūtra thought in the background. It is said that this could be in line with the idea of the formation of Golgul Caves.
Thus, through a study on comparison between our Golgul Caves and the Bezeklik caves in a country to the west of China, it is thought that it can present the importance of Central Asian art and will be an important study to clarify the original streams of Buddhist art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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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돈황석굴과 골굴석굴의 전실 건축 비교 연구

저자 : 한동수 ( Han Dongsoo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17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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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돈황의 석굴 막고굴과 경주의 골굴암 석굴의 전실건축을 비교 고찰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차이가 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전면에 처마가 있는 다양한 전실이 확인되는 돈황석굴 막고굴의 전실건축 가운데 주요한 사례를 기반으로 한 일부 복원 계획을 살펴 보았다. 또한 경주 골굴암 석굴 앞에 조영되었을 전실 복원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석굴사원의 전실 건축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와 사례를 조사한 후 관련 용어의 차이점을 분석 하였다. 또한 본고에서는 둔황 석굴 막고굴의 전실 건축 변화 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문서와 사진을 통해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실 건축의 원형을 추적하였다. 고고학 발굴 상황은 대부분의 석굴 앞에 남아 있는데 제72-77굴 석굴 복원 계획 포함해서 제53굴 및 제55굴은 중국의 건축역사학자 소묵와 오소가 제안한 둔황 석굴 전실 건축의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를 통해 전실 건축 복원의 원리와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지형적 특징을 고려하여 골굴암 석굴 복원 계획의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복원 계획에 의거하여 석굴 전실은 표준화 된 구조가 아니라 지형 조건에 따라 목조틀로 구성된 간략한 구조체의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으며 그 근거로서 유사한 구조로 판단되는 일본의 가케즈쿠리 (懸造り) 건축의 사례를 참고하였다.
돈황 석굴 막고굴과 관련해서는 발굴, 문헌 기록, 벽화 등 다양한 자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의 문제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완전한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석굴 안팎의 종교적인 활동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사실, 다양한 전실 구조가 있는 둔황석굴 막고굴의 경우는 참고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지만 복원을 시도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경주 골굴암의 전실 건축 복원을 위해서는 현재 심각하게 훼손된 지형을 비롯한 전체 환경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원래의 형태로 추적하고 상세한 현장 조사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복원 시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골굴암 석굴을 보호하기 위해, 현재 유적과 부조화를 이루며 중앙 부처만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보호 시설 대신 신자와 숭배자들이 골굴암 석굴 전체에 효과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적 전체를 보호 할 수 있는 보호 시설이 오히려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은 다양한 관점과 상상력으로 수시로 할 수 있지만, 고고학 유적지에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This thesis examines the front-room architecture of the Grottoes Mogauku in Dunhuang and Golgulam Grottoes in Gyeongju. Although there are differences in time and space, we looked at some of the restoration plans based on the excavation surveys and major examples of the Buddhist Caves with eaves in the front and with chambers in Dunhuang Grottoes Mogauku. Thus, this study attempted to present the possibility and problems of the restoration of all rooms in the Mogauku Temple, which may have been projected in front of Gyeongju Golgulam Grottoes.
To this end, first, various terms and examples of front chamber architecture among stone caves were investigated, and then the differences between the related terms were analyzed. In addition, this paper tried to trace the original form of the front chamber architecture that can grasp the reality to some extent through documents and photographs in different stages of the changing process of the front chamber architecture in Dunhuang Mogauku. Also, the state of the archaeological excavation remains of all chambers of Grottoes no. 72-77, including the restoration plan of Grottoes no. 53 and no. 55 suggested by the Chinese architectural historian Xiamo(蕭黙) and Wuxiao(吳筱) each, who argues to be representative examples of the restoration on the entire chambers of the Dunhuang Cave. They reviewed the principle and process of restoration of the all-chamber architecture of the Seokgul Mogauku. Based on this analysis, this research makes a restoration plan on the Golgulam Grottoes in consideration of the topographic features. In the case of the restoration plan, all chambers are not standardized structures. It is assumed to be a simple wooden structure entangled with a timber frame according to the terrain conditions. The restoration plan completed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example of Japanese Gakezukuri (懸造り) architecture, which is judged to be a similar structure.
There are various data expressed in excavations, literature records, and murals at the site. Nevertheless, the problem of restoration is still inevitable, and perfect restoration is practically impossible. Moreover, considering the religious activities inside and outside the cave, it is an even more difficult challenge. In fact, the case of the Dunhuang Grottoes Mogauku, where there are various front-chamber architectures, provides some clues that can be referred to, but this also faces many limitations in attempting a restora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Gyeongju Golgulam's front-chamber architecture, the entire environment, which is currently damaged a lot, has to be traced to the original form through a scientific method and be carried out through detailed field investigations.
Next, setting the point of restoration is one of the important tasks. For the protection of Golgulam Grottoes, w should consider a way that believers and worshipers can effectively access the entire Golgulam Grottoes in place of the facilities built to protect only the central Buddha causing current inconsistency. A protection facility that can protect the entire ruins is rather suitable in this situation. Restoration can be done anytime with a variety of perspectives and imaginations, but it is necessary to take care to implement it on the archaeologica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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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키질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사적 연구

저자 : 심주완 ( Shim Joo-wa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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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골굴 석굴은 세계적인 석굴과 비교하는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앞의 연구가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비교하였다면, 이 글은 인도 석굴과 중국 석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서역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로 서역 석굴 중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키질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 논문이다. 키질 석굴은 제38굴과 제47굴을, 골굴 석굴은 예배굴과 마애불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였다.
골굴 석굴은 세계 석굴 사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석굴 사원이라는 점이다. 석굴암 석굴이 창조적인 석굴이라면 골굴 석굴은 정통 석굴 사원을 계승하는 석굴이다. 골굴 석굴의 복원은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을 보인다.
키질 석굴은 서역남로 호탄과 함께 서역의 최대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에 자리하고 있으며, 3세기경 불교가 번성했던 쿠차국 시대에 개착되었다. 이 글은 키질 석굴의 위치적 특성, 열강의 약탈, 석굴의 분포, 석굴의 구조, 석굴 형식의 변천, 석굴의 의의 등을 고찰하였다. 키질 석굴의 대표적인 구조인 중심주굴 형식은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로 창안된 석굴 형식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키질 석굴을 대표하는 석굴을 현장 조사하여 제38굴과 제47굴의 구조와 공간 구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름모형 문양의 벽화는 기존의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 이외에 우주목의 잎인 보리수잎 혹은 연꽃잎으로 해석하였다. 키질 석굴의 정벽은 인도 초기 스투파의 상징 체계를 창조적으로 구현하여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해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골굴 석굴의 예배굴, 마애불과 키질 석굴의 제38굴과 제47굴을 비교하여 골굴 석굴과 키질 석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자연조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배굴과 대상굴이라 형식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Recently, the Korean Golgul Cave-temple has attracted attention as research comparing it with the world-class Cave-temple has begun in earnest. If the previous work compared the Cave-temple in India and China, this article compares the Cave-temple on the Silk Road and the Golgul Cave-temple, which served as a link between the Indian Cave-temple and the Chinese Cave-temple. The first of the Silk Road Cave-temples to emerge is the Kizil Cave-temple. This article compares the Kizil Cave-temple and the Golgul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studied by Cave 38 and Cave 47, while the Golgul Cave-temple is studied by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The Golgul Cave-temple is a famous Cave-temple temple that inherits the world's Cave-temple tradition. If Seokguram is a creative Cave-temple, the Golgul Cave-temple inherits the orthodox Cave-temple. The restoration of the Golgul Cave-temple will be an opportunity to shed light on the value and meaning of our country's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located in Kucha, the largest oasis city in the Western Regions, along with Hotan in the Western Regions, and was created during the Kucha Kingdom, when Buddhism flourished around the 3rd century. This article considers the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the Kizil Cave-temple, the plunder of the powers, the distribution of Cave-temple, the structure of Cave-temple, the transformation of the Cave-temple format, and the significance of Cave-temple. The typical structure of the Kizil Cave-temple is the Center Column Format. This form of Cave-temple is created as a problem of structural safety. In addition, the writer investigate the Kizil Cave-temple in the field to consider the structure and spatial composition of Cave 38 and Cave 47. Contrary to the interpretation that the diamond-shaped mural symbolizes Sumisan Mountain(Sumeru), it is interpreted as barley or lotus petals, the leaves of the spatial tree. The Kizil Cave Temple is believed to have creatively implemented the symbolic scheme of early Indian Stupa to address the structural limitations under load.
In addition, the Golgul Cave-temple's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were compared to the Kizil Cave-temple Cave 38, and Cave 47. So we looked at each other's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Although they reveal differences in structural limitations that arise in natural conditions, they were found in common in the form of worship and a large Buddha statue c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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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사의 기원과 삼의제(三衣制)의 도상학

저자 : 김경숙 ( Kim Gyeong-suk ) , 문명대 ( Moon Myung-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1-167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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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사는 불교 승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불상의 가사는 불상 연구에 가장 기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가사의 기원과 삼의제(三衣制)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첫째, 가사는 범어 Kasaya의 음역으로 탁한 색, 흐린 색, 괴색이라 말하며 탁한 옷, 괴색 옷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둘째, 가사의 의재(衣材)는 내다버린 옷감을 꿰맨 분소의에서 기원하여 옷감을 재단하여 꿰맨 할절의로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가사의 작법은 옷감을 절단하여 일정한 크기의 田 모양으로 꿰매어 하나의 옷을 만드는 작법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넷째, 가사는 승가리 즉 대의(大衣), 울타라승 즉 상의(上衣), 안타회 즉 내의(內衣) 등 세 가지인데 그래서 삼의(三衣)라 하며, 이를 제도화하여 삼의제라 부르고 있다.
이런 점을 경론(經論)에서 근거를 찾아 간략하게 논의한 것이다.


Not only are Buddhist Gasa (kāṣāya; costumes) indispensable to the life of Buddhist monks, but also Buddhist costumes are the most basic in the study of Buddha statues. Therefore, the study of the origin of costumes and the three-ui-je (三衣制) is a very important task.
First, Gasa (costume) is a Romanized expression of Sanskrit “Kasaya,” which means dull, dull, or weird colors, meaning dull clothes or weird color clothes.
Second, Gasa's clothing materials (衣材) originated from divided-small-piece-clothes sewn out of cloth and developed into divided-cut-clothes sewn by cutting cloth.
Third, in terms of Gasa's method of making, it is to apply the method of making a single piece of clothing by cutting the cloth and stitching it into a 田 shape of a certain size.
Fourth, there are three types of Gasa such as Saṃghāṭī or big costume (大衣), Uttarāsaṃga or upper costume (上衣), and antarvāsa or under costume (內衣), and that's why they are called three costumes (三衣), and they are institutionalized and called the three costume system (三衣制).
This point was briefly discussed by finding the evidence in sutra scripture (經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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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사(袈裟)의 수용과 전개에 대한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9-19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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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가사(袈裟)의 수용과 전개에 대한 논문이다. 우리나라 가사의 전통은 불교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가사는 불교회화와 조각, 기타 유물 등 불교미술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특히 다양한 주제로 그려진 불화를 통해 잘 살펴볼 수 있는데 고려불화에 보이는 불·보살상의 법의(法衣) 표현은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맥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가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Ⅱ장에서는 불전(佛傳)과 율장의 가사 연원과 분소의(糞掃衣)와 할절의(割截衣)의 발생과정을 살펴보았고, Ⅲ장에서는 인도와 중국 불교미술에 표현된 가사의 형식을 알아보았다. Ⅳ장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불화에 표현된 불·보살상 가사의 구성과 형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의미를 고찰해보았다.
그 결과 첫째, 가사의 기원은 분소의와 할절의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가사는 환경적인 요인에 따른 영향으로 기후에 맞게 변화되었으며, 우리나라 또한 중국에서 변화된 가사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우리나라 삼국시대 가사 유물은 통도사의 <석가여래 가사>와 <자장율사 가사> 등을 통해 기본적인 구성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었으며, 쌍영총 등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승려 복식의 모습을 통해 편단우견의 조(條)가 없는 가사를 착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고려시대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불교회화에 표현된 불상과 지장보살상, 진영도 등을 통해 법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었다. 불상이 래영도인 경우 통천의와 할절의의 표현이 비교적 대등하게 표현되었고, 설법도인 경우 래영도와 달리 할절의를 표현한 도상이 빈도수가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전개에 대한 면모를 모두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요청과 수용, 가사의 정립은 점차 실용성과 특수성으로 완성되어짐을 어느 정도는 살펴볼 수 있었다.


This study is a thesis on the acceptance and development of Kaṣāya (袈裟), monk's costumes. It can be said that the tradition of Kaṣāya in Korea began with the transmission of Buddhism, and after the 'Three Kingdoms' era, the Kaṣāya of Goryeo era and Joseon era can be found in Buddhist art works such as Buddhist paintings, sculptures, and other relics. During the Goryeo era, when Buddhism was most prosperous, it can be seen especially through Buddhist paintings painted on various themes, and the expression of the monk's robe (法衣) of the Buddha statue-Bodhisattva statue shown in Goryeo Buddhist paintings has a meaning as a very important data for grasping the veins of Korean traditional Kaṣāya.
Accordingly, before examining Kaṣāya in Korea, in Chapter Ⅱ, the origin of Kaṣāya in Buddhist Buildings (佛傳) and Vinaya Piṭaka, and the process of development of Bunsoui costume (糞掃衣) and Haljeolui costume (割截衣) were examined. In Chapter III, this study investigated the form of Kaṣāya expressed in Buddhist art in India and China. In Chapter IV, the composition and form of Buddha statue Kaṣāya - Bodhisattva statue Kaṣāya expressed in Buddhist paintings during the Three Kingdoms' era and Goryeo period in Korea were examined, and through this, the meaning of the traditional Kaṣāya in Korea was examined.
As a result, first, Kaṣāya's origins began with Bunso Costume (Clothes made from shit wipes in the toilet) and Haljeol Costume (Clothes made by dividing and splitting fabric), and based on this, Kaṣāya, which was introduced from India to China, has been changed to suit the climate due to the influence of environmental factors, and it can be seen that the changed Kaṣāya was transmitted from China as well in Korea.
Second, the relics of Kaṣāya from the Three Kingdoms' era in Korea were able to infer the basic composition of the Tongdosa temple's < Sakyamuni Kaṣāya > and < Jajangyulsa Kaṣāya > to some extent, and through the appearance of monks' costumes expressed on tomb murals such as Ssangyeongchong Tomb, it can be seen that the shape of Buddhist statue clothes revealing the right shoulder of the Kaṣāya without Jo (條) was worn.
Third, in the Goryeo era, through < Huirangjosa wooden statue > at Haeinsa temple and Buddha statue, Ksitigarbha statue, Jinyeongdo, etc. expressed in Buddhist paintings, the composition of monk's robe could be specifically grasped. In the case of the Buddha statue as a standing figure statue, The expressions of Tongcheon costume (whole piece cloth costume) and Haljeol costume (split cloth costume) were expressed relatively equally, and in the case of a seated statue, unlike a standing figure statue, it was confirmed that the iconography expressing the Haljeol costume showed a high frequency.
Although there was a limit to grasping all aspects of the development of Korean traditional Kaṣāya through the above studies, to some extent, it could be seen that the request and acceptance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and the establishment of Kaṣāya are gradually completed with practicality and specif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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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말기 칠성도의 수노인 도상 연구

저자 : 안희숙 ( An Hee Sook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1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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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노인도는 인간 수명을 관장한 수성(壽星)을 인격화하여 그린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수노인성을 표현한 예는 덕흥리 2호분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수노인성은 원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노인을 인격화하여 그렸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서에는 수노인도를 전각 내부에 안치하고 제를 지냈다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전반기에 수노인 그림과제를 지낸 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 수노인 관련 그림이 희박한 요인은 수노인성제 축소와 숭유억불정책으로 소격소 혁파로 보고 있다. 이후 정조는 수노인제를 복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말기에는 수노인 도상이 칠성도에 유입되어 유불 습합을 엿볼 수 있으며, 민화에도 유행한다.
수노인의 신체적 특징과 세부도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노인의 신체 특징은 長頭, 短身으로 19세기후반에는 얼굴과 머리 비율이 1:2 또는 1:3으로 정수리 부분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20세기에는 정수리부분이 낮아지면서 차츰 쇠퇴된다.
수노인과 함께 등장한 사슴과 두루마리는 초기부터 보이며, 동자는 명대에 나타난다. 학은 수노인이 공간을 이동할 때 이동 수단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물은 두루마리, 홀, 영지, 여의, 호리병, 복숭아 등이 있다. 두루마리는 수노인이 두 손에 쥐고 있는 표현에서 이를 펼쳐보거나, 지팡이에 매단 모습으로 변화된다. 호리병은 이철괴의 지물로 수노인이 소지하면서 허리춤에 차거나 동자가 대신 들고 있는 유형으로 나타난다. 불로장생의 상징인 복숭아는 칠성도 보다는 주로 민화에서 수노인의 지물로 등장한다.
이와같이 칠성도와 민화에서 수노인의 선호는 조선말기 수명 장수에 대한 사회문화적 풍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is a person who depicts Mercury, which controls human life. For the first time in Korea, an example of expressing the south pole star can be seen in Deokheung-ri No.2. Here, the star of longevity is described as a round circle. The record depicting the elderly as a person can be found in 『Shinjeungdongguk Yeoji Seungram. In the geography book, there is a record that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was placed inside the hall and the rites were held. Through this, it is estimated that there existed a building where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and ceremonies were held in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eason that the picture related to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was scarce was the reduction of the rituals The star of longevity and the policy to suppress the worship of The star of longevity. After that, King Jeongjo tried to restore Suoinje, but failed. Howev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was painted on Chilseongdo, which gives a glimpse of the combination of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is also popular in folk paintings.
The physical characteristics and detailed drawings of the star of longevity Painting are as follows. The star of longevity has a raised head and is short. In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face-to-head ratio was 1:2 or 1:3, and the top of head was exaggerated. In the 20th century, it gradually disappears as the top of head lowers.
Deer and scrolls that appeared together with the star of longevity were seen from the beginning, and Dongja(童子) appeared in Ming dynasty. Crane was expressed as a means of transportation when The star of longevity moved through space.
Belongings include scrolls, ganoderma lucidum, yeoui, gourd bottle, and peaches. The scroll changes from an expression held by the star of longevity in both hands to unfold it or hang it on a cane. The gourd bottle appears as a type held by the star of longevity in the hand, worn on the waist, or held by Dongja(童子) instead. Peaches, a symbol of immortality, are mainly painted in folk paintings.
In this way, the preference of The star of longevity in Chilseongdo and folk paintings reflected the socio-cultural trend of longevity in the late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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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업경대(業鏡臺)' 명문분석과 도상학적 연구

저자 : 김창원 ( Kim Chang W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4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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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거울은 주술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제작되어 왔다. 불교의식에 있어서도 경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의식구로 거울이 제작되었으며, 불교미술의 여러 방면에서 표현되어 왔다. 전통사찰의 건축물이나 불단의 장엄물로 진설되기도 하고, 종교의례의 의식구로, 혹은 거울 그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소위 '업경대'로 명명되는 사찰유물의 도상연구와 명분분석을 통해 유물의 적합한 명칭과 용도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조선후기에 제작되어 학계에 보고된 60여점의 유물을 대상으로 그 양상을 살펴보고, 특히 명문이 있는 6점의 유물을 집중 분석하였다. 업경대(業鏡臺), 불영패(佛影牌), 명경대(明鏡臺), 경단(鏡壇)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불교 의식/의례와의 관련 연구없이 각각의 편의에 따라 명칭이 결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의 모든 물품은 불교의식/의례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제작되어 발전해왔다. '업경대' 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제작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동 유물의 용도를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규명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 유물의 명칭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거울과 관련된 논의에는 두 개의 각각 다른 신앙형태가 있다. 대표적으로 지장명부시왕신앙이다. 현재 '업경대'로 알려진 유물의 명칭은 이 명부신앙의 흐름 속에서 고착되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명부신앙의 여러 의식관련 경전과 절차를 살펴보아도, 업경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염라대왕의 지물이라는 회화적 모티프와 문학적 수사에 나타날 뿐이다. 또 다른 흐름은 밀교의 대경작법의 전통 속에서, 특히 조선 중기 준제신앙의 확산에 따라 경단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다. 본 연구는 이 두 번째 가능성에 중점을 두어 유물의 명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토대로 존상과 불교의식과의 관계 및 그 명칭의 적합성 문제를 중점으로 고찰하고, 그 기능과 형태에 대한 도상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대상유물과 불교의식과의 연관성에 근거하여 여러 의미있는 해석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억불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의식/의례 체계가 혼란되어 기존 의식절차가 유실되는 한편, 명부신앙의 영향력에 크지는데, 이 과정에서 경단은 업경대로 인식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전하는 대부분의 '업경대'는 조선 중기 관음신앙의 확산과 어려워진 사회변화 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제난구제를 기원함과 동시에, 수행자의 염송과 관행이라는 자력수행을 통해 성불코자하는 불교수행의식이 기존의 불교의식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예경의 대상인 경단(鏡壇)으로 조상되어, 본전의 불상 앞에 진설되었다는 논의를 바탕으로, 향후 동 유물의 명칭과 그 기능에 대해,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From the ancient times, mirrors have been produced as symbolic icons which carry power of incantation. In the Buddhist sutras, passages related with mirrors are often found and in the history of the Buddhist arts, a lot of mirror images are spreaded out in various area of works.
This paper illuminates the identification and terminology of mirror stands which manufactur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th the number of over sixty cases, full bodies and/or parts. These works are recognised as so-called 'karma mirror stand', 'buddhist spirit stand', 'bright mirror stand' or 'mirror alter'. This paper tries to focus on the naming and definition of those stands in related iconographic methodology, especially in connection with buddhist rites.
In relation to mirrors, Korean buddhist tradition has two main streams; one is karma mirror in the belief of Ksitigarbha Bodhisattva and Ten Underworld Kings, and the other is mirror alter in the faith of Cundi Bodhisattva. In the research of the former usage of mirror, even though it is common understanding of the stands, the connection between mirrors and the related buddhist ritual. On the other hand, in the tradition of the belief of Cundi Bodhisattva, mirror prove itself as a key instrument in the process of religious services and discipline.
As a result of this research, the remained mirror stands produc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could be identified as 'mirror alter' instead of 'karma mirror stand' on the basis of the concrete investigation on the connection of the mirrors and the buddhist rituals, and the analyses of inscriptions also verifies the hypo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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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간다라 불탑의 특징과 변천에 대한 고찰

저자 : 송봉주 ( Song Bong-joo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7-2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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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간다라 불탑 외형의 특징과 변천에 대해 고찰하는 데 의의를 두었다. 간다라 지역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스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관계로 일찍이 페르시아, 그리스 문명이 유입되면서 인도문화와 서로 결합하여 새롭고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인도의 원형, 반구형 복발 스투파가 이곳으로 전해지면서 그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호에 맞춰 여러 가지 변화를 더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불탑 조성 경험과 축조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인도 스투파와는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간다라 불탑은 크게 3가지 평면으로 구분되며, 이들 불탑의 구성요소에 의해 세분화된다.
첫 번째는 초기에 중인도 산치대탑과 비슷한 원형 기단이다.
두 번째는 방형 기단으로 쿠샨왕조 카니슈카왕 이후 외형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원형 기단에서 방형 기단으로 바뀌고 원통형의 탑신부가 추가되어 높은 형태로 발달하고 복잡해지나 반구형 복 발은 오히려 퇴화하는 모습으로 변화된다.
세 번째는 방형 기단의 각 면에 계단을 조성하여 십자형 평면과 기단과 계단 사이에 방형 부위를 추가하는 사면 돌출형 평면의 형태를 나타낸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원형에 가까운 사면 돌출형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확인된다. 이들 평면은 기둥의 유무, 기단부의 중첩 등을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되며 다양화된 간다라 불탑은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북인도, 방글라데시 등으로 전해지면서 규모가 커지는 모습으로 변화가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남인도 스투파 내부의 바큇살구조가 쿠샨왕조 대에 서북부인도로 전해진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유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부에서 형식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기술의 이해 부족이 합쳐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티베트 불탑(쵸르텐)과의 연결고리가 보이는 다중 방형기단 불탑의 시원형 예가 발견됨으로써 티베트 불탑과 더 나아가 중국 백탑과의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불교사원과 스투파의 조성방법에서 다양한 형태의 조적법과 기단을 장식하는 몰딩, 기둥, 처마받침, 감실, 불전도 등 다양한 부조상이 불탑의 외관을 장식하는 장엄탑이 등장한다.


In this study, we first address transformations in the forms of the stupa of Gandhara, which are the most important objects of worship in Buddhist architecture. It is thought that the oldest stupa is the 1st great stupa at Sanchi in India whose form originated in approximately the 2nd century B.C. The beginning of Buddhist architecture is this mound-shaped stupa.
In many ways, the stupa of Gandhara occupy a definite place of importance in Indian art history. The numerous stupa and sculptures that have been excavated in the district of Gandhara have attracted considerable attention.
Large stupa as well as Dharmarajika was built in Taxila and Swat. The pilasters went around the base. The detail survey about this stupa has not been carried out. However, it is one example of typical stupa which is the mound type with the circular base. The proportions of stupas dramatically changed in this manner. The axiality of the vertical direction rising up into the sky was created because the drum was given by changing the form of the base from a circle into a square.
The stupas developed into a solemn construction afterward because their bases became higher and the surfaces of both the bases and drums were decorated. It may also be said that the surfaces of the stupa came to be decorated with Buddhist statues and other sculptures, pilasters, friezes, cornices, using various techniques.
On the other hand, stupa was built with free-standing columns on the four corners of a square base, as one of the classifications of the stupa bases.
Stupas with cruciform plans, as an alternative development of the stupa, also appeared. This spectacle may have presented dynamic effect, giving worshipers solemn fee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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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돈황 285굴과 골굴석굴의 석굴 구조와 도상의 비교 연구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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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285굴의 석굴 구조와 불상·불화는 서위시대의 가장 중요한 석굴일 뿐더러 벽면의 불상·불화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불교 미술이다. 이와 함께 신라의 골굴석굴은 이런 실크로드 상의 석굴을 계승하여 조성되었는데 인도나 중국 석굴에 가장 가까워 한국 석굴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첫째, 석굴 주실구조는 돈황 285굴이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인데 비하여 골굴 법당굴은 직사각형이어서 대조적이다.
둘째, 돈황 285굴의 불상은 정벽의 주존불만 조성되었는데 주존불은 미륵불의상과 협시보살로 대묘상과 법림보살 등 미륵 삼존상이고, 두 소감실(小龕室)의 상은 유가유식파의 창시자들인 무착과 세친으로 추정된다.
셋째, 돈황 285굴의 4벽과 천정에 전면적으로 벽화가 묘사되어있다. 이 벽화의 특징은 아미타사상(정토3부경)과 법화경사상을 도상화한 내용인데 본존 미륵불에 유가유식사상을 보조하는 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넷째, 골굴석굴과 돈황 285굴은 구조와 도상 특징 그리고 조형 사상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석굴 구조는 전실과 주실로 구성된 구조는 같지만 골굴 법당굴은 주실이 장방형이나 돈황 285굴은 정방형으로 거의 유사하며, 천정은 골굴법당 평천장이나 285굴은 말을 엎은 듯한 복두천정(伏斗天井)이어서 다른 점이다.
또한, 돈황 285굴은 정벽 감실에 미륵삼존불을 주존으로 봉안했으나 골굴 법당굴은 좌우에 불상이 봉안되었으나 정벽에 주존불은 확인할 수 없고 통일신라 마애석가불이 옆 벽면에 마련되어 주존불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돈황 285굴의 4벽과 천정은 전체적으로 벽화로 채색되어 있으나 골굴 법당굴은 벽화는 없이 조각으로만 장엄되어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다섯째, 돈황 285굴은 창건때는 유가유식사상에 의하여 조성되었는데 여기에 법화사상과 아미타사상이 가미되어 점차 법화와 아미타 신앙으로 확대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골굴 석굴은 초창때는 유가유식사상이 주신앙이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통일신라때는 법화사상이 주신앙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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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령사석굴과 골굴석굴에 대한 고찰

저자 : 손영문 ( Son Young Mo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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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은 하서주랑에 개착된 석굴로, 동서문화의 교착점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교류하며 불교교학 뿐만 아니라 불교미술사상 의미 있는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병령사 석굴에서 가장 중요한 석굴은 제169굴로, 이 석굴은 개착 당시의 신앙을 알려주는 불상과 수행자의 흔적이 벽화로 남아 있어 석굴연구에 있어서 절대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병령사 석굴은 영이(靈異)롭게 생긴 암벽에 형성된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수행자들이 드나들며 예배존상을 조성하고 관불수선하므로서 그 시작을 알렸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있는 골굴 석굴은 초기의 신앙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마애대불의 존재나 그 주변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천연의 석굴은 병령사 초기 석굴과 유사점이 많다. 법흥왕대 불교가 공인된 이래 수도 경주의 곳곳에는 가람이 건립되고 많은 수행자들와 이를 따르는 신도들이 생겨났다. 수행자들은 불교의 홍포를 위해 대중과 호흡하면서도 불교의 본연의 가르침인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수행 장소로는 반듯하게 지어진 가람과 더불어 불교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숲이나 나무아래, 수려한 바위굴 등도 선호되었다.
이렇듯 병령사 석굴이나 골굴 석굴은 천연의 수행 장소였다. 이곳은 대규모 인원이 들어 가 불상을 예불하거나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일념으로 구도행각을 벌이는 수행자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초기 병령사 석굴의 기록을 보아도 주로 수행을 위한 몇 몇의 이승(異僧)들이 드나들며, 불상을 만들고 일념으로 관하며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병령사 석굴이 그러했듯이 골굴 석굴도 이와 같은 신앙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즉 불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단석산 마애불상군이나 경주 남산의 삼화령 석굴, 불곡 석굴, 탑곡 마애조상군 등 삼국시대 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골굴 석굴의 수행방식도 불상을 일념으로 관하고 칭념하며 궁극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한편 병령사 석굴의 상징인 미륵대불은 당대에 조성되고, 골굴 석굴의 상징인 마애대불도 통일신라 9세기대에 조성된다. 수많은 석굴을 대표하여 큰 규모의 상징을 조성하는 사례는 당대에 들어서서야 본격화 된다. 상징불로 선택된 도상은 대개가 의좌세를 취한 미륵불이 많으며, 그것은 정치권력의 정치적인 야망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륵은 석가여래 이어 下生하는 부처이지만, 그가 하생할 시점은 곧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 전륜성왕이 치세하는 시절이어야 하므로 정치화하기 매우 좋은 신앙이었다.
골굴 석굴의 마애대불은 도상과 신앙적으로 석가여래로 판단되고 있고, 조성시기 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신라 9세기 대는 왕족들 간의 왕권쟁탈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불 미륵신앙이 급부상하고 각광을 받았다. 아마도 마애대불이 조성되던 시대를 통찰하면, 이 마애대불을 조성한 조성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던 문무대왕릉이 조망되는 곳에 새로운 세상과 시대를 갈망하며 미륵대불을 조성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 원류와 조성배경은 둔황이나 병령사, 천제산 등 당대 조성된 대불신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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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베제크릭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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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중앙아시아 투르판 지역 최대의 석굴로 손꼽히는 베제크릭(柏孜克里克, Bezeklik) 석굴과 우리나라에서 자연동굴을 적극 활용하면서 축조가 동시에 이루어진 골굴석굴을 비교한 논문이다. 이 두 석굴은 자연 개착과 인공 축조굴로 이루어진 혼합석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에 따라서 Ⅱ장에서는 베제크릭석굴의 조성배경과 사상 및 현황을 살펴보았고, Ⅲ장에서는 석굴 조영 형식과 석굴에 조성된 다양한 벽화 주제 가운데서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서원화(誓願畵)'를 중심으로 알아보았으며, Ⅳ장에서는 베제크릭석굴을 통해 골굴석굴의 위상을 살펴보고 상호 연관성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첫째, 베제크릭석굴은 개착식과 축조식 조영 방법으로 이루어 졌는데 골굴석굴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굴석굴이 베제크릭석굴과 유사한 측면은 수행굴의 외형을 자연스럽게 바위면을 놔두고 그 사이에 수행굴을 개착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골굴석굴은 대부분 자연암벽을 깍은 개착식이며 베제크릭석굴은 이와는 다르게 축조 방식으로 많이 조영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둘째, 예배굴 내부 구조 형식에서 전실과 본실이 긴 장방형에 가까운 석굴에 속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수행굴도 베제크릭석굴에서 소굴을 후벽에 조영했다는 점에서 승방 역할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골굴석굴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셋째, 베제크릭석굴 '서원도' 도상에서 묘사한 건장하고 당당한 형태의 불상은 필선이 매우 유려하면서도 강한 힘이 표현되어 있는데 골굴석굴 마애불상의 형태와 가사 옷주름 표현도 이와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 베제크릭석굴의 벽화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봐야하겠지만 현황으로 봐서는 그 중심이 법화사상을 배경으로 조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골굴석굴의 조성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골굴석굴과 서역 베제크릭석굴의 비교 연구는 중앙아시아 미술의 중요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원류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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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돈황석굴과 골굴석굴의 전실 건축 비교 연구

저자 : 한동수 ( Han Dongsoo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17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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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돈황의 석굴 막고굴과 경주의 골굴암 석굴의 전실건축을 비교 고찰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차이가 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전면에 처마가 있는 다양한 전실이 확인되는 돈황석굴 막고굴의 전실건축 가운데 주요한 사례를 기반으로 한 일부 복원 계획을 살펴 보았다. 또한 경주 골굴암 석굴 앞에 조영되었을 전실 복원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석굴사원의 전실 건축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와 사례를 조사한 후 관련 용어의 차이점을 분석 하였다. 또한 본고에서는 둔황 석굴 막고굴의 전실 건축 변화 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문서와 사진을 통해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실 건축의 원형을 추적하였다. 고고학 발굴 상황은 대부분의 석굴 앞에 남아 있는데 제72-77굴 석굴 복원 계획 포함해서 제53굴 및 제55굴은 중국의 건축역사학자 소묵와 오소가 제안한 둔황 석굴 전실 건축의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를 통해 전실 건축 복원의 원리와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지형적 특징을 고려하여 골굴암 석굴 복원 계획의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복원 계획에 의거하여 석굴 전실은 표준화 된 구조가 아니라 지형 조건에 따라 목조틀로 구성된 간략한 구조체의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으며 그 근거로서 유사한 구조로 판단되는 일본의 가케즈쿠리 (懸造り) 건축의 사례를 참고하였다.
돈황 석굴 막고굴과 관련해서는 발굴, 문헌 기록, 벽화 등 다양한 자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의 문제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완전한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석굴 안팎의 종교적인 활동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사실, 다양한 전실 구조가 있는 둔황석굴 막고굴의 경우는 참고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지만 복원을 시도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경주 골굴암의 전실 건축 복원을 위해서는 현재 심각하게 훼손된 지형을 비롯한 전체 환경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원래의 형태로 추적하고 상세한 현장 조사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복원 시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골굴암 석굴을 보호하기 위해, 현재 유적과 부조화를 이루며 중앙 부처만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보호 시설 대신 신자와 숭배자들이 골굴암 석굴 전체에 효과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적 전체를 보호 할 수 있는 보호 시설이 오히려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은 다양한 관점과 상상력으로 수시로 할 수 있지만, 고고학 유적지에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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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키질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사적 연구

저자 : 심주완 ( Shim Joo-wa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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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골굴 석굴은 세계적인 석굴과 비교하는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앞의 연구가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비교하였다면, 이 글은 인도 석굴과 중국 석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서역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로 서역 석굴 중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키질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 논문이다. 키질 석굴은 제38굴과 제47굴을, 골굴 석굴은 예배굴과 마애불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였다.
골굴 석굴은 세계 석굴 사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석굴 사원이라는 점이다. 석굴암 석굴이 창조적인 석굴이라면 골굴 석굴은 정통 석굴 사원을 계승하는 석굴이다. 골굴 석굴의 복원은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을 보인다.
키질 석굴은 서역남로 호탄과 함께 서역의 최대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에 자리하고 있으며, 3세기경 불교가 번성했던 쿠차국 시대에 개착되었다. 이 글은 키질 석굴의 위치적 특성, 열강의 약탈, 석굴의 분포, 석굴의 구조, 석굴 형식의 변천, 석굴의 의의 등을 고찰하였다. 키질 석굴의 대표적인 구조인 중심주굴 형식은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로 창안된 석굴 형식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키질 석굴을 대표하는 석굴을 현장 조사하여 제38굴과 제47굴의 구조와 공간 구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름모형 문양의 벽화는 기존의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 이외에 우주목의 잎인 보리수잎 혹은 연꽃잎으로 해석하였다. 키질 석굴의 정벽은 인도 초기 스투파의 상징 체계를 창조적으로 구현하여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해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골굴 석굴의 예배굴, 마애불과 키질 석굴의 제38굴과 제47굴을 비교하여 골굴 석굴과 키질 석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자연조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배굴과 대상굴이라 형식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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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사의 기원과 삼의제(三衣制)의 도상학

저자 : 김경숙 ( Kim Gyeong-suk ) , 문명대 ( Moon Myung-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1-167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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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사는 불교 승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불상의 가사는 불상 연구에 가장 기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가사의 기원과 삼의제(三衣制)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첫째, 가사는 범어 Kasaya의 음역으로 탁한 색, 흐린 색, 괴색이라 말하며 탁한 옷, 괴색 옷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둘째, 가사의 의재(衣材)는 내다버린 옷감을 꿰맨 분소의에서 기원하여 옷감을 재단하여 꿰맨 할절의로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가사의 작법은 옷감을 절단하여 일정한 크기의 田 모양으로 꿰매어 하나의 옷을 만드는 작법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넷째, 가사는 승가리 즉 대의(大衣), 울타라승 즉 상의(上衣), 안타회 즉 내의(內衣) 등 세 가지인데 그래서 삼의(三衣)라 하며, 이를 제도화하여 삼의제라 부르고 있다.
이런 점을 경론(經論)에서 근거를 찾아 간략하게 논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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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사(袈裟)의 수용과 전개에 대한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9-19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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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가사(袈裟)의 수용과 전개에 대한 논문이다. 우리나라 가사의 전통은 불교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가사는 불교회화와 조각, 기타 유물 등 불교미술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특히 다양한 주제로 그려진 불화를 통해 잘 살펴볼 수 있는데 고려불화에 보이는 불·보살상의 법의(法衣) 표현은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맥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가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Ⅱ장에서는 불전(佛傳)과 율장의 가사 연원과 분소의(糞掃衣)와 할절의(割截衣)의 발생과정을 살펴보았고, Ⅲ장에서는 인도와 중국 불교미술에 표현된 가사의 형식을 알아보았다. Ⅳ장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불화에 표현된 불·보살상 가사의 구성과 형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의미를 고찰해보았다.
그 결과 첫째, 가사의 기원은 분소의와 할절의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가사는 환경적인 요인에 따른 영향으로 기후에 맞게 변화되었으며, 우리나라 또한 중국에서 변화된 가사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우리나라 삼국시대 가사 유물은 통도사의 <석가여래 가사>와 <자장율사 가사> 등을 통해 기본적인 구성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었으며, 쌍영총 등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승려 복식의 모습을 통해 편단우견의 조(條)가 없는 가사를 착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고려시대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불교회화에 표현된 불상과 지장보살상, 진영도 등을 통해 법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었다. 불상이 래영도인 경우 통천의와 할절의의 표현이 비교적 대등하게 표현되었고, 설법도인 경우 래영도와 달리 할절의를 표현한 도상이 빈도수가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 가사의 전개에 대한 면모를 모두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요청과 수용, 가사의 정립은 점차 실용성과 특수성으로 완성되어짐을 어느 정도는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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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말기 칠성도의 수노인 도상 연구

저자 : 안희숙 ( An Hee Sook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1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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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노인도는 인간 수명을 관장한 수성(壽星)을 인격화하여 그린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수노인성을 표현한 예는 덕흥리 2호분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수노인성은 원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노인을 인격화하여 그렸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서에는 수노인도를 전각 내부에 안치하고 제를 지냈다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전반기에 수노인 그림과제를 지낸 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 수노인 관련 그림이 희박한 요인은 수노인성제 축소와 숭유억불정책으로 소격소 혁파로 보고 있다. 이후 정조는 수노인제를 복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말기에는 수노인 도상이 칠성도에 유입되어 유불 습합을 엿볼 수 있으며, 민화에도 유행한다.
수노인의 신체적 특징과 세부도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노인의 신체 특징은 長頭, 短身으로 19세기후반에는 얼굴과 머리 비율이 1:2 또는 1:3으로 정수리 부분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20세기에는 정수리부분이 낮아지면서 차츰 쇠퇴된다.
수노인과 함께 등장한 사슴과 두루마리는 초기부터 보이며, 동자는 명대에 나타난다. 학은 수노인이 공간을 이동할 때 이동 수단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물은 두루마리, 홀, 영지, 여의, 호리병, 복숭아 등이 있다. 두루마리는 수노인이 두 손에 쥐고 있는 표현에서 이를 펼쳐보거나, 지팡이에 매단 모습으로 변화된다. 호리병은 이철괴의 지물로 수노인이 소지하면서 허리춤에 차거나 동자가 대신 들고 있는 유형으로 나타난다. 불로장생의 상징인 복숭아는 칠성도 보다는 주로 민화에서 수노인의 지물로 등장한다.
이와같이 칠성도와 민화에서 수노인의 선호는 조선말기 수명 장수에 대한 사회문화적 풍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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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업경대(業鏡臺)' 명문분석과 도상학적 연구

저자 : 김창원 ( Kim Chang W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4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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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거울은 주술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제작되어 왔다. 불교의식에 있어서도 경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의식구로 거울이 제작되었으며, 불교미술의 여러 방면에서 표현되어 왔다. 전통사찰의 건축물이나 불단의 장엄물로 진설되기도 하고, 종교의례의 의식구로, 혹은 거울 그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소위 '업경대'로 명명되는 사찰유물의 도상연구와 명분분석을 통해 유물의 적합한 명칭과 용도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조선후기에 제작되어 학계에 보고된 60여점의 유물을 대상으로 그 양상을 살펴보고, 특히 명문이 있는 6점의 유물을 집중 분석하였다. 업경대(業鏡臺), 불영패(佛影牌), 명경대(明鏡臺), 경단(鏡壇)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불교 의식/의례와의 관련 연구없이 각각의 편의에 따라 명칭이 결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의 모든 물품은 불교의식/의례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제작되어 발전해왔다. '업경대' 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제작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동 유물의 용도를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규명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 유물의 명칭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거울과 관련된 논의에는 두 개의 각각 다른 신앙형태가 있다. 대표적으로 지장명부시왕신앙이다. 현재 '업경대'로 알려진 유물의 명칭은 이 명부신앙의 흐름 속에서 고착되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명부신앙의 여러 의식관련 경전과 절차를 살펴보아도, 업경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염라대왕의 지물이라는 회화적 모티프와 문학적 수사에 나타날 뿐이다. 또 다른 흐름은 밀교의 대경작법의 전통 속에서, 특히 조선 중기 준제신앙의 확산에 따라 경단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다. 본 연구는 이 두 번째 가능성에 중점을 두어 유물의 명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토대로 존상과 불교의식과의 관계 및 그 명칭의 적합성 문제를 중점으로 고찰하고, 그 기능과 형태에 대한 도상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대상유물과 불교의식과의 연관성에 근거하여 여러 의미있는 해석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억불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의식/의례 체계가 혼란되어 기존 의식절차가 유실되는 한편, 명부신앙의 영향력에 크지는데, 이 과정에서 경단은 업경대로 인식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전하는 대부분의 '업경대'는 조선 중기 관음신앙의 확산과 어려워진 사회변화 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제난구제를 기원함과 동시에, 수행자의 염송과 관행이라는 자력수행을 통해 성불코자하는 불교수행의식이 기존의 불교의식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예경의 대상인 경단(鏡壇)으로 조상되어, 본전의 불상 앞에 진설되었다는 논의를 바탕으로, 향후 동 유물의 명칭과 그 기능에 대해,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KCI등재

10간다라 불탑의 특징과 변천에 대한 고찰

저자 : 송봉주 ( Song Bong-joo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7-2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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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간다라 불탑 외형의 특징과 변천에 대해 고찰하는 데 의의를 두었다. 간다라 지역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스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관계로 일찍이 페르시아, 그리스 문명이 유입되면서 인도문화와 서로 결합하여 새롭고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인도의 원형, 반구형 복발 스투파가 이곳으로 전해지면서 그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호에 맞춰 여러 가지 변화를 더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불탑 조성 경험과 축조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인도 스투파와는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간다라 불탑은 크게 3가지 평면으로 구분되며, 이들 불탑의 구성요소에 의해 세분화된다.
첫 번째는 초기에 중인도 산치대탑과 비슷한 원형 기단이다.
두 번째는 방형 기단으로 쿠샨왕조 카니슈카왕 이후 외형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원형 기단에서 방형 기단으로 바뀌고 원통형의 탑신부가 추가되어 높은 형태로 발달하고 복잡해지나 반구형 복 발은 오히려 퇴화하는 모습으로 변화된다.
세 번째는 방형 기단의 각 면에 계단을 조성하여 십자형 평면과 기단과 계단 사이에 방형 부위를 추가하는 사면 돌출형 평면의 형태를 나타낸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원형에 가까운 사면 돌출형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확인된다. 이들 평면은 기둥의 유무, 기단부의 중첩 등을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되며 다양화된 간다라 불탑은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북인도, 방글라데시 등으로 전해지면서 규모가 커지는 모습으로 변화가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남인도 스투파 내부의 바큇살구조가 쿠샨왕조 대에 서북부인도로 전해진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유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부에서 형식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기술의 이해 부족이 합쳐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티베트 불탑(쵸르텐)과의 연결고리가 보이는 다중 방형기단 불탑의 시원형 예가 발견됨으로써 티베트 불탑과 더 나아가 중국 백탑과의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불교사원과 스투파의 조성방법에서 다양한 형태의 조적법과 기단을 장식하는 몰딩, 기둥, 처마받침, 감실, 불전도 등 다양한 부조상이 불탑의 외관을 장식하는 장엄탑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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