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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小齋集)』 연구

A Study on The Collection of Sojae's Works

오윤숙 ( Oh Yoon-sook )
  •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79-112(34pages)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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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소재(小齋) 오재영의 생애
Ⅲ. 『소재집(小齋集)』의 시문 분석
Ⅳ.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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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김대현 교수에 의해 근대시기 호남지역의 주목할 만한 한문문집으로 소개된 소재(小齋) 오재영(吳在永)의 『소재집(小齋集)』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소재집(小齋集)』은 1책 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권 635수의 시(詩)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서(序)와 행장(行狀)을 포함하여 서(書), 기(記) 등 총 4권 114편의 산문(散文)이 실려 있다.
오재영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호남의 고읍 동복오씨의 종손으로 태어나 지역 유지로 살았던 인물이다. 중년 이후에 보성군수에 부임하였으나,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직청원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귀향한 후에는 장음자(長飮子)라고 호를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도연명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인산(因山)에 다녀온 후 말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오재영은 자신의 서재 ‘長飮子三拾年稽古之室’에서 스스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오재영은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은 하였는데, 경운선사가 주관한 순천 선암사 수행단체 백련사(白蓮社)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사실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또한, 당시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동한 매천시파(梅泉詩派)나 순천 난국음사(蘭菊吟社)의 지명도가 있는 문인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시와 산문이 『소재집』에 실려 있으나, 이 역시 다른 문헌에서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동복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詩社)에 대한 기록도 확인하였으니, 향후 본 연구를 토대로 당시 지역문화의 일면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문문집에 대해서는, 황위주 김대현 연구팀의 선행연구를 통해 구한말 이후에도 많은 양의 개인문집들이 존재했었다는 통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존재여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문집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이들 한문문집들은 광복 이후 한문교육의 공백으로 인해 개략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사장될 위기에 놓이게 되어 있었다. 본 연구에서 『소재집』에 실린 시문을 통해 당시 동복 등 지역사회에서 한문으로 써진 시문이나 한문문집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향후 이들 유관 개인 한문문집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면 이를 지역의 역사문화 사료(史料)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Oh Jae-young(오재영) was born in Dongbok(동복), an old village in Honam province(South Korea), The time when he was born was the dark period marking the transition from the staggering Chosun dynasty into the colonial period ruled by Japan empire. At his advanced age, he was appointed to and served as the head of Boseong County(보성군), Later he returned to his hometown and lived in harmony with nature. He was not obsessed with the messy world and liked to write poets and work in his library. The reason why he wanted to be called ‘A person who drinks all the time(長飮子)’ is that he strived to escape from the messy world and to live in nature. However, he went to Seoul to participate in the funeral of Gojong(高宗), the last emperor of Choseon Dynasty(朝鮮). After one month after he returned from the funeral he committed suicide because of deep depression and despair that he was not able to escape. To summarize Oh Jae-young's life by quoting his poems titled 『The Collection of Sojae's Works(小齋集)』, ‘Source(源泉)’, ‘Live in seclusion(歸隱)’, ‘Know one's fate(知命)’, ‘A person who drinks all the time(長飮子)’, ‘See and learn from the past(稽古)’. They are legacies of his trying to do his best at any moment with an appropriate considerations to situations. His poems pursued the meaning and the rhyme rather than the form and kept distance from the existing rules, In their own way, the poems are joyful to read which are reminiscent of something in a poem like a painting. His poems are reminiscent of Wang Wei(王維), a poet of the Tang Dynasty(唐代), and his epic poems that contain rural life in the poems are reminiscent of Tao Yuanming(陶淵明) of the East Jin(東晉) period. His poems are not bound by rules of versification(律格), and the individuality that does not use the language of past poets is regarded as cre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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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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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三國)·통일신라시기(統一新羅時期)의 무등산(無等山)과 광주(光州)

저자 : 변동명 ( Byeon Dong-mye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8 (7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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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사이의 무등산을 광주 지역사회와 연관시켜 검토하였다. 광주의 역사적 흐름에 비춰 무등산을 조망함으로써, 이 산과 관련된 사람들의 지난날을 훑어보며 그 면모의 일부나마 드러내는 것을 겨냥하였다. 먼저 無等山의 名號를 광주의 고을 명칭과 연결지어 다룸으로써 이 산을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 다음, 이어서 無等山 信仰과 無等山歌 그리고 開仙寺址 石燈을 소재로 삼아 주로 통일신라시기의 무등산 내지는 그로써 표상되는 광주 지역사회의 움직임을 더듬어 헤아렸다.
無等山은 늦어도 통일신라 이래 武珍岳이라 불렸다. 무등산이라는 명호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기에 들어서였다. 무진악과 무등산은 同語의 異表記로 간주하는 게 보통이다. 그 독음과 의미를 두고는 견해가 대립하는데, '무돌뫼' 혹은 '무들뫼'로 달리 읽으면서 각각 '무리지어 모인 돌[石]의 산' 혹은 '물[水]이 있는 들녘의 산'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武'의 일본어 독음인 '다케(たけ)'에서 '독'[石]이 연상된다. '武珍岳'을 '독돌뫼'로 읽고 그 의미를 '石石山'으로 새기면, 동일어를 중첩해 복수형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여 '돌들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산마루의 장대한 암석군이 돋보이는 이 산의 명호로서 제격이거니와, 그러한 무진악이 景德王의 漢化政策과 고려왕조의 성립이라는 변화를 거치면서 武等岳(山)을 거쳐 無等山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의 옛 이름으로는 武珍州가 대표적이다. 무진악에서 유래하였거니와 아마도 백제에서는 武珍郡이었던 듯싶은데, 통일신라에 들어 무진주가 성립하면서 고을의 주된 명호로 자리를 잡았다. 광주의 다른 옛 이름인 奴只는 냇물이 흐르는 들녘을 연상시킨다. 광주의 옛 이름들이 무등산 및 그 앞의 들녘에서 유래한 바,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온 지역민의 삶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자못 함축적이다. 아울러 고을의 주된 명호가 무진주라는 점에서 무진악 곧 무등산이 광주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가 있기도 하다.
무등산신앙은 광주 일원에서 전해오는 민간의 풍속으로서, 무등산을 주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전통 관습이다. 광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을 상징하는 전통시기의 정치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습속이었는데, 통일신라에서는 그러한 무등산신앙을 小祀에 편제하여 중앙의 규제를 받도록 정하였다. 왕경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일환이었는데, 광주의 토착세력은 신라 중앙의 그러한 정책에 꽤나 협조적이었다. '무진고성'(무등산고성)의 축조라든지 그 결과 탄생한 무등산가에 함축된 광주 지역사회의 동향에서 헤아릴 수가 있었다. 신라의 백제 병합으로 신라 중앙과 접촉을 시작한 이래, 광주의 토착 유력계층은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는 타협의 길을 걸었다. 중앙귀족과의 연계를 발판으로 삼아 광주를 이끄는 전통적인 유력 사회계층으로서의 위치를 다지며, 나아가 노령 이남에서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고 또 지켜나가고자 하는 게 통일신라시기 광주 지역사회의 선택이었다. 이후 9세기 前半에 이르도록 광주 지역사회의 그러한 방침은 대체로 일관되고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무등산신앙과 무등산가를 더듬어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무등산의 존재 의미를 되짚었거니와, 이 산이 광주나 다름없는 상징적 존재임을 거듭 확인할 수가 있었다.
9세기 말엽 광주에 甄萱의 後百濟가 들어섰다. 신라 중앙과 타협하고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던 지역 토착세력이, 기왕의 고식적인 방책을 버리고 왕경 경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세력으로 자립하였다. 무등산 開仙寺址 石燈의 銘文에는 그처럼 이제까지와 다른 길을 선택하기에 이른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전한다. 진성여왕 5년(891) 10월 무렵 새겨진 石燈記에 의하면, 開仙寺라 전하는 사찰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佛事에 국왕이나 왕실은 관여하지 못하였다. 신라 중앙의 경우도 기껏해야 관여했을 가능성이 짐작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국왕이라든지 신라 중앙에서는 해당 佛事에 가능한 한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더불어 그러한 중앙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지역사회의 일부에서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에 그쳤다.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신라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암시한다. 아직 신라 중앙과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反新羅的인 기운이 만연한 가운데, 저들과의 관계를 되짚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지역 토착세력의 은밀한 준동이 있었다. 眞聖女王 6년(892) 견훤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기까지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그러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Mudeungsan Mountain during the three kingdoms and the Unified Silla period in connection with the Gwangju community. By looking at Mudeungsan Mountain in light of the historical trend of Gwangju, it aims to reveal at least a part of the people's past lives connected with the mountain. First of all, by connecting the name of Mudeungsan Mountain with the name of the town in Gwangju, it laid the foundation for understanding the mountain in connection with the Gwangju community. And based on the faith of Mudeungsan Mountain, Mudeungsan Song and the stone lantern at Gaeseonsa Temple site, it mainly examined Mudeungsan Mountain and the movement of the Gwangju community represented by it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Mudeungsan Mountain was called Mujinak since the Unified Silla period at the latest. It was during the Goryeo Dynasty that the name Mudeungsan appeared. It is common to regard Mujinak and Mudeungsan as the same words but written differently. There are conflicting views on the reading and meaning. Differently read as “Mudolmoe” or “Mudeulmoe”, they are interpreted as “the mountain of stones gathered in groups” or “the mountain in fields with water”, respectively. However, it reminds us of “Dok”(石) in “Dake”(たけ) which is the Japanese reading sound of “mu(武)”. If “Mujinak(武珍岳)” is read as “Dokdolmoe”, and the meaning is “doldolsan(the mountain of stone and stone)”, it is understood as a plural form by overlapping the same words, and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he word “the mountain of stones”. It is a perfect name for this mountain, which stands out for its magnificent rock groups. As such Mujinak went through the changes of King Gyeongdeok's Hanwha policy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Goryeo Dynasty, and it was settled as Mudeungsan after passing through Mudeungak(Mudeungsan) and reached today.
As the old name of Gwangju, Mujinju is representative. It originated from Mujinak, and it seems that it was probably called Mujingun in Baekje. But when Mujinju was established in the Unified Silla period, it became the main name of the town. Noji, another old name of Gwangju, reminds us of a field where a stream flows. The old names of Gwangju originated from Mudeungsan and the field in front of it, and it is implicit in that it represents the lives of local residents who had lived there. In addition, considering that the main name of the village is Mujinju, it can be confirmed that Mujinak, or Mudeungsan Mountain, is a symbol of the Gwangju community.
The faith in Mudeungsan Mountain is a folk custom passed down from the Gwangju area, and is a traditional custom of worshiping the mountain gods who are believed to preside over Mudeungsan Mountain. It was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custom in the traditional period that symbolized the influential indigenous power of Gwangju. In the Unified Silla period, the faith of Mudeungsan was organized in rituals to be regula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It was part of the reorganization of a unified governing system centered on the capital, and the indigenous powers of Gwangju were quite cooperative with the policy of central Silla. It can be estimated from the construction of “Mujingoseong” (an Old Castle in Mujin, Mudeungsangoseong) and the trends in the Gwangju community contained in the Mudeungsan song. Since the start of contact with the center of Silla by Silla's annexation of Baekje, the indigenous and influential classes of Gwangju had taken a compromise path to cooperate with the central nobility. Based on the connection with the central nobility, it was the choice of the Gwangju community in the Unified Shilla period to establish its position as the traditional influential social class leading Gwangju and furthermore to maintain the status of the indigenous power in the southern region of Noryeong mountain range. Later, until the first half of the 9th century, such policy of the Gwangju community was generally consistent and effective. By looking into the faith of Mudeungsan Mountain and the Mudeungsan song, the meaning of the existence of Mudeungsan Mountain in the relationship with the local community of Gwangju was retraced, and it was repeatedly confirmed that this mountain is a symbolic existence that is Gwangju.
At the end of the 9th century, Later Baekje was established in Gwangju by Gyeonhwon. Local indigenous forces that compromised with the central government of Silla and cooperated with the central aristocracy, abandoned their previous tricks, and emerged as independent forces getting out of the control of the capital Gyeongju. The record of the Stone Lantern at Gaeseonsa Temple Site in the Mudeungsan Mountain contains the atmosphere of the Gwangju community, which had taken a different path than before. According to the writings engraved on the stone lantern in the 5th year of Queen Jinseong(891) around October, neither the king nor the royal family were involved in purchasing land at a temple known as Gaesansa Temple. In the case of central Shilla, it was estimated that it was only possible to be involved in the purchase. At that time, the king or the central Silla needed to participate in the work of Buddhism as much as possible, and in spite of the efforts of some of the local communities to reflect the demands of the central government, it was limited to that level. It shows that the atmosphere of the Gwangju community was not favorable to Silla. It was not yet completely cut off from the center of Silla. However, in the midst of the anti-Silla-like atmosphere in general, it is a part where the secret movement of the local indigenous forces trying to find a new way to retrace the relationship with them is detected. In the 6th year of Queen Jinseong(892), the atmosphere of the Gwangju community was like that while Gyeonhwon became independent and called himself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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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재집(小齋集)』 연구

저자 : 오윤숙 ( Oh Yoon-sook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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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김대현 교수에 의해 근대시기 호남지역의 주목할 만한 한문문집으로 소개된 소재(小齋) 오재영(吳在永)의 『소재집(小齋集)』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소재집(小齋集)』은 1책 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권 635수의 시(詩)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서(序)와 행장(行狀)을 포함하여 서(書), 기(記) 등 총 4권 114편의 산문(散文)이 실려 있다.
오재영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호남의 고읍 동복오씨의 종손으로 태어나 지역 유지로 살았던 인물이다. 중년 이후에 보성군수에 부임하였으나,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직청원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귀향한 후에는 장음자(長飮子)라고 호를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도연명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인산(因山)에 다녀온 후 말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오재영은 자신의 서재 '長飮子三拾年稽古之室'에서 스스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오재영은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은 하였는데, 경운선사가 주관한 순천 선암사 수행단체 백련사(白蓮社)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사실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또한, 당시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동한 매천시파(梅泉詩派)나 순천 난국음사(蘭菊吟社)의 지명도가 있는 문인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시와 산문이 『소재집』에 실려 있으나, 이 역시 다른 문헌에서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동복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詩社)에 대한 기록도 확인하였으니, 향후 본 연구를 토대로 당시 지역문화의 일면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문문집에 대해서는, 황위주 김대현 연구팀의 선행연구를 통해 구한말 이후에도 많은 양의 개인문집들이 존재했었다는 통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존재여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문집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이들 한문문집들은 광복 이후 한문교육의 공백으로 인해 개략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사장될 위기에 놓이게 되어 있었다. 본 연구에서 『소재집』에 실린 시문을 통해 당시 동복 등 지역사회에서 한문으로 써진 시문이나 한문문집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향후 이들 유관 개인 한문문집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면 이를 지역의 역사문화 사료(史料)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Oh Jae-young(오재영) was born in Dongbok(동복), an old village in Honam province(South Korea), The time when he was born was the dark period marking the transition from the staggering Chosun dynasty into the colonial period ruled by Japan empire. At his advanced age, he was appointed to and served as the head of Boseong County(보성군), Later he returned to his hometown and lived in harmony with nature. He was not obsessed with the messy world and liked to write poets and work in his library. The reason why he wanted to be called 'A person who drinks all the time(長飮子)' is that he strived to escape from the messy world and to live in nature. However, he went to Seoul to participate in the funeral of Gojong(高宗), the last emperor of Choseon Dynasty(朝鮮). After one month after he returned from the funeral he committed suicide because of deep depression and despair that he was not able to escape. To summarize Oh Jae-young's life by quoting his poems titled 『The Collection of Sojae's Works(小齋集)』, 'Source(源泉)', 'Live in seclusion(歸隱)', 'Know one's fate(知命)', 'A person who drinks all the time(長飮子)', 'See and learn from the past(稽古)'. They are legacies of his trying to do his best at any moment with an appropriate considerations to situations. His poems pursued the meaning and the rhyme rather than the form and kept distance from the existing rules, In their own way, the poems are joyful to read which are reminiscent of something in a poem like a painting. His poems are reminiscent of Wang Wei(王維), a poet of the Tang Dynasty(唐代), and his epic poems that contain rural life in the poems are reminiscent of Tao Yuanming(陶淵明) of the East Jin(東晉) period. His poems are not bound by rules of versification(律格), and the individuality that does not use the language of past poets is regarded as cre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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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엄두섭 목사의 '난중일기'를 통해 본 남평지역의 한국전쟁 경험

저자 : 김관영 ( Kim Kwan-ye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3-13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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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 때 지역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빈약한 상황에서 당시 엄두섭 남평교회 목사가 남겨 놓은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남평 지역의 상황을 재구성해보았다. 그를 위해 1950년 7월 22일부터 10월 13일까지 기간 중 다른 지역 피난일 7일을 제외한 77일 간 남평과 인근지역에서 일어난 유의미한 사건 101건을 도출하여 인민군과 좌익, 미군과 군경, 일반 민중 등 주체별 사건들을 시계열화(時系列化)하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였다.
인민군은 7월 23일에 남평에 진주하여 7월 31일 면민의 노동당 가입, 8월 3일 인민위원회 조직, 8월 17일 면 위원장, 서기 선거 등을 통해 정착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다가 한 달이 지난 8월 21일부터 전황이 여의치 못해지자 방공호 구축, 각종 전쟁물자 징용에 몰두하다 9월 29일 서서히 퇴각을 시작, 10월 4일 지석강 전투 후 6일에 경찰대에 의해 완전히 수복되었다.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탄압과 살상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행해졌으나 인민재판은 없었다. 또한 죄 없는 양민들 중 미군의 자의적이고 무차별적인 공습에 의해서, 그리고 산중에 숨어 있던 경찰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래저래 죄 없는 양민들에게는 수난의 시대였다.
민심은 7월 24일에는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리만큼 환영분위기였지만 8월 21일부터 토지분배 등의 문제로 한풀 꺾이기 시작, 9월에는 현물세 조사에 대한 불평으로 이반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7월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9월초 해갈이 될 때까지 2개월간 농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추석에는 적으나마 음식을 장만하여 명절을 지냈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민간 기록물의 중요성이다. 엄목사의 '난중일기'는 민간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실명(實名)의 국회의원이나 지역유지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의 행보와 각종 사건, 민심의 향배 등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대단히 가치 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민간기록의 발굴과 보존, 활용은 접근성과 현장성 측면에서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방법론에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서 관장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이 논문을 계기로 지역의 민간기록물에 대한 적극적인 발굴과 보존, 활용 그리고 그에 기초한 지역학 연구가 보다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reconstructed the situation in the area of Nampyeong based on the diary left by Nampyeong Church pastor named Doo-seop Um, although the records and research on the local situation during the Korean War were poor. By content, 101 significant incidents occurred in Nampyeong and surrounding areas for 77 days excluding the 7 days of evacuation in other regions during the period from July 22 to October 13, 1950, were time-series by subject such as North korean military and leftist, US military and South korean military-police, and the general people. After the North korean military entered Nampyeong on July 23, it enjoyed its heyday by compulsory membership in the Labor party on July 31, organized the people's committee on August 3, and held the elections for the Chairman and the secretary on August 17. The war gradually retreated from the 29th, and was completely restored by the police on October 6th after the Battle of Jiseok-river on October 4th.
Repression and killings by the North korean military or the leftist were carried out as in other regions, but there was no North korean military's trial. In addition, many of the innocent civilians were unjustly killed by the arbitrary and indiscriminate air strikes of the US military and by the police hiding in the mountains. It was a time of suffering for the innocent people.
The public sentiment was in a welcoming atmosphere that made the sound of national independence vibrate the heavens and the earth on July 24, but from August 21, it began to be shaken by problems such as land distribution, and in September, it was separated due to complaints about the in-kind tax investigation. Farmers suffered greatly from the drought that lasted for two months from early July to early September. Nevertheless, although there were few, they prepared food and spent the Chuseok holidays.
What this study suggests to us is the importance of civilian records. Despite being a civilian record, Pastor Eom's “Nanjung Diary”(Diary during the war) is a very valuable document that vividly shows the situation at the time, such as the actions of many persons, including real-name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local important persons, various events, and the ambition of public sentiment. Considering the efficiency in terms of accessibility and practicality the discovery, preservation, and use of such private records may be rightly managed by the local government rather than the central government in the methodology.
With this thesis, I hope that active discovery, preservation, and utilization of local civilian records will be active, and regional studies based on these records will become more a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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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현대 장소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과 해석

저자 : 류시현 ( Ryu Si-hyun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16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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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 대한 '부정적' 표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일시적이거나 단발적이지 않으며 동어반복 혹은 비슷한 논리는 계속 재생산되어 왔다. 차별이 전제된다고 할 때, '전라도'라는 단어는 중앙과 타 지역과의 권력관계가 반영된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왜냐하면 개념 전라도(인)은 지역차별과 연동해서 민감한 정치적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념 전라도는 한국 근·현대 일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정치·사회운동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념 전라도에 관한 접근은 호남학과 연동된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 시대적 흐름을 중심으로 개념 전라도를 첫째,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역에 대한 기행문에 관한 문화적 해석을 둘째, 1960∼80년대 정치가 김대중과 전라도를 연동한 정치적 해석을 셋째, 87년 체제 이후의 전라도에 대한 긍·부정 논의가 담고 있는 사회적 해석을 살펴보았다.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을 통해 학문 '호남학'의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The 'negative' expression for Jeonrado is currently in progress. And this logic is not temporary or unilateral, and the same repetition or similar logic has continued to be reproduced. As such, the word “Jeonrado” is a political concept that reflects power relationships.
This paper explored the possibility of a conceptual historical approach to Jeonrado. Because the concept of Jeonrado and Jeonrado people are discrimination and to work sensitive political subject. Thus, in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Jeonrado is a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 concept closely related to modern Korean daily life.
The approach to the concept of Jeonrado in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is a research project linked to Honam Studies. For the purpose of concept approach on Jeonrado First, Japanese colonial era cultural Interpretation of Jeonrado region, second, the '60s and '80s, Kim Dae-jung and Jeonra provinces with a political spin, third, we looked at the social interpretation of the positive and negative discussions on Jeonrado sinc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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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흥현 읍치(邑治) 이동과 읍치 관련 문화재 고찰

저자 : 이수경 ( Lee Su-kyung ) , 김일동 ( Kim Il-d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20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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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의 연혁에서는 '1395년 왜구를 피해 고흥 읍치가 보성군 조양현으로 옮겨가고, 1441년 현재의 흥양 읍치로 옮겼다,'라고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우선 본 글에서는 1395년부터 1441년까지 보성군에 소재하였던 고흥읍치에 천착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고흥읍석성(高興邑石城) 둘레가 565 보(步)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현재 보성군 조성면에 소재한 석성은 1424년 무렵 고흥읍 석성이 축조되어 1441년까지 약 17년 동안 고흥현(高興縣)의 읍성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장 조사 결과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에는 성곽, 북문, 객사, 동헌, 내아, 군창[兆陽倉] 등이 구전(口傳)되고 있다. 성문과 관아건축물은 고흥읍성 내의 건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동로현과 고려시대 조양현의 기록에서는 성곽의 기록이 검토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1441년 본 현으로 돌아온 고흥 읍치는 '흥양(興陽)'으로 개칭하여 흥양의 행정, 국방을 주관하였다. 흥양 읍치 내 시설물 중 존심당 및 아문[전남 유형문화재 53호], 남휘루[전남 문화재자료 183호]와 홍교[전남 유형문화재 73호]를 고지도·지리지 및 192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검토하였다.
흥양 읍치의 관아건물은 목조건축물이기에 중수가 필요하였지만, 흥양 읍치 내부의 종횡으로 흐르는 하천은 물난리로 수재를 자주 입었고, 그 피해는 관아건물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휘루에 있는 6점의 현판을 근거로 남휘루의 역사를 고증할 수 있었다.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1667년 현감 안책이 건립하였다.'라는 문화재 안내문을 참고하여 남휘루는 1787년 흥양현감 안책이 건립하였으며, 남휘루 상량문을 통해 1887년 당시까지 아문을 '瀛洲衙門'이라고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아문의 이름은 '高興衙門'이다. 따라서 고흥아문보다는 영주아문이라고 하여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옥하리 홍교(虹橋)'라는 문화재 명칭과 문화재 성격이 일치하는지 검토하였다. 고흥읍 서문리에 소재한 이 문화재는 성벽을 축조할 때 하천의 배수로이므로 수구가 옳으며, 방어시설인 철책을 건 흔적이 홍예에 남아 있으므로 수문이란 명칭이 합당하다. 비록 고지도에 서홍교, 남홍교, 수구홍교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기능을 고려한다면 이 문화재는 '고흥 서문리 위수문·아래수문'으로 정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본 연구가 흥양 읍치 관아건물의 고증 및 복원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In the history of Goheung-gun, Jeollanam-do, it is briefly described that 'the town of Goheung was moved to Joyang-hyeon, Boseong-gun in 1395 to avoid Japanese invasion, and in 1441 it was moved to the township of Heungyang-eup'. First of all, this article focuses on the town of Goheung, which was located in Boseong-gun from 1395 to 1441. Based on the record that 'Goheung-eup Seokseong Fortress has a circumference of 565 treasures' in the Annals of King Sejong, It can be seen that it functioned as the town fortress of Goheung-hyeon (高興縣) for many years. As a result of the on-site investigation, in Gonae Village, Ucheon-ri, Seong-myeon, Boseong-gun, the fortress wall, Bukmun, Gaeksa, Dongheon, Naeah, and Gunchang [兆阳倉] are being passed down orally. The castle gate and the government building are presumed to be buildings within the Goheung-eupseong Fortress. The records of the fortress walls were not reviewed in the records of Dongro-hyeon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Joyang-hyeon during the Goryeo period.
Second, government buildings in Heungyang township were frequently rebuilt and repaired. Since it was a wooden building, it needed heavy water, but the river flowing vertically and horizontally inside the township of Heungyang suffered frequent floods due to flooding, and the damage also extended to the government building. In previous studies, the site of the chaebol of Heungyang-eupseong was known as the Goheung Police Station, but it is not. My son said that it was being told, and Dongheon Johnsimdang did not, but this is not true. Amun is the entrance to Dongheon Zongsimdang, and the scales must be corrected to Heungyang Amun and Yeongju Amun. Through the signboard at Namhuiru, it was confirmed that the expression “Yeongjuahmun” was in use until 1887. Therefore, it should be called Yeongju Amun rather than Goheung Amun to match the historical facts.
Third, the history of Namfiru could be verified based on the six signboards in Namfiru. Currently, Namhuiru has left its original site and is far from the foot of Mt. Bonghwang. When the Heungyang-eupseong Historical Park is being built, the Munru Namfiru should find its place and shine its history together with Dongheon Johnsimdang and Yeongju Amun.
Lastly, it was examined whether the cultural property name of 'Okhari Honggyo (虹橋)'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cultural property match. This cultural property, located in Seomun-ri, Goheung-eup, is properly named as the water gate because it is a drainage channel for the river when the fortress wall was built, and the traces of the iron fence, a defensive facility, remain in Hongye. Although it is expressed as Seohonggyo, Namhonggyo, and Suguhonggyo on the old map, considering the function, I think that this cultural property should be corrected as 'Upstream and Lower Watergates in Seomunri, Goheung. It is expected that this study will be used as historical evidence and restoration data for the Heungyang-eupchi government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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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은 광주광역시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조성하는 국책사업으로, 문화를 기반으로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의 실현을 위해 허브로 기능하기 위해 옛 전남도청 일대에 설립되었으며, 2015년에 개관하였다. 지역사회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 이후 일관되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역사회 협력을 요구해왔다.
본고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역사회와 제도적·행정적인 측면에서 협력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문화 협치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병행적으로 프로그램의 기획 및 문화콘텐츠의 제작과정에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문화 협치 구축이 시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문화콘텐츠 '나는 고려인이다'는 아시아스토리커뮤니티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사회와 협력해 제작되었다. 본고는 '나는 고려인이다' 제작 과정을 살피고, 제작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심층면담을 통해 문화 협치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성공적인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을 위해 지역사회와 문화콘텐츠를 공동제작하면서 문화 협치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다. 이 공동제작을 통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지역단체 그리고 지역대학은 첫째, 각종 자원의 상호 공유를 통한 문화 협치 구축 시도. 둘째, 지역과 아시아 소재 기반의 콘텐츠 제작을 통한 지역적 한계 극복. 셋째, 지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젊은 문화예술계 활동가들에 대한 교육적 성과 도출. 넷째, 지역의 사회적 약자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이슈화하여 문제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상호협력관점에서 지역단체 및 지역대학과 협력하여 문화콘텐츠를 제작하는 구체적인 문화 협치 구축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과 성과에서 얻은 의미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지역사회에 몇 가지의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째, 지역의 이야기인 동시에 아시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지역사회·지역 창작자들과 개방적이며 관용적인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둘째,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수립하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종합계획이나 문화전당의 사업계획에 지역사회의 역할과 참여가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전당 조직구성'이라는 이슈를 뛰어넘어, 문화전당 프로그램을 어떻게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갈지에 대한 문화전당과 지역사회의 고민과 관심이 필요하다.


The Hub city of Asian Culture Project is a national project to establish Gwangju Metropolitan City as an Asia Cultural Center. This project aims to achieve balanced national development based on culture. The Asia Culture Center(ACC) opened in 2015 and it was built in the former Jeonnam Provincial Office to implement the creation of an Asian cultural center city. Since the opening of the ACC, it has consistently held rapport with the local community.
This study emphasizes importance of a cultural coordination by the ACC promoting governance through cooperation with the local community in terms of institutional and administrative aspects, as well as developing a close bond with the local community to promote participation in the process of planning programs and producing cultural contents. Under this guidance, the “I am Goryeoin” cultural content of the ACC was co-produced with local organization and university as a part of the Asian Story Community project. The study aims look at the making of “I am Goryeoin” cultural content, as well as evaluating achievements and significance of the cultural governance through in qualitative indepth interview with those involved in the project as indication.
The ACC attempted to establish cultural cooperation by co-producing cultural contents with local organizations and universities to create a successful Hub city of Asian culture. Through this co-production, the ACC and the local community 1) attempted to establish cultural governance through mutually sharing various cultural contents. 2) Overcame regional limitations through cultural content production based on local and international resources. 3) Derived educational outcomes for young artists and artisans who study and work in the region. 4) Allowing for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in the region to actively participate in the cultural contents creating.
In conclusion, from the perspective of mutual cooperation, ACC tried to establish a specific cultural governance in cooperation with local organization and local university to produce cultural contents. In the process, both achievements and implications can be attributed for the ACC and the local community. The cultural contents are local stories to Jeonam, as well as other Asian country's contents intertwined within the local community.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keep a rapport with the local community cultural content makers by having an honest open and understanding relationship. The national Hub city of Asian Culture project and ACC's comprehensive plan for creating cultural content through cooperation with the local community shall be open to reflect the participation from the community. It is thus necessary for the ACC and the local community to consider and pay close attention to how and which actors participate and in what context the ACC program is to be cr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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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三國)·통일신라시기(統一新羅時期)의 무등산(無等山)과 광주(光州)

저자 : 변동명 ( Byeon Dong-mye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8 (7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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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사이의 무등산을 광주 지역사회와 연관시켜 검토하였다. 광주의 역사적 흐름에 비춰 무등산을 조망함으로써, 이 산과 관련된 사람들의 지난날을 훑어보며 그 면모의 일부나마 드러내는 것을 겨냥하였다. 먼저 無等山의 名號를 광주의 고을 명칭과 연결지어 다룸으로써 이 산을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 다음, 이어서 無等山 信仰과 無等山歌 그리고 開仙寺址 石燈을 소재로 삼아 주로 통일신라시기의 무등산 내지는 그로써 표상되는 광주 지역사회의 움직임을 더듬어 헤아렸다.
無等山은 늦어도 통일신라 이래 武珍岳이라 불렸다. 무등산이라는 명호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기에 들어서였다. 무진악과 무등산은 同語의 異表記로 간주하는 게 보통이다. 그 독음과 의미를 두고는 견해가 대립하는데, '무돌뫼' 혹은 '무들뫼'로 달리 읽으면서 각각 '무리지어 모인 돌[石]의 산' 혹은 '물[水]이 있는 들녘의 산'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武'의 일본어 독음인 '다케(たけ)'에서 '독'[石]이 연상된다. '武珍岳'을 '독돌뫼'로 읽고 그 의미를 '石石山'으로 새기면, 동일어를 중첩해 복수형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여 '돌들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산마루의 장대한 암석군이 돋보이는 이 산의 명호로서 제격이거니와, 그러한 무진악이 景德王의 漢化政策과 고려왕조의 성립이라는 변화를 거치면서 武等岳(山)을 거쳐 無等山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의 옛 이름으로는 武珍州가 대표적이다. 무진악에서 유래하였거니와 아마도 백제에서는 武珍郡이었던 듯싶은데, 통일신라에 들어 무진주가 성립하면서 고을의 주된 명호로 자리를 잡았다. 광주의 다른 옛 이름인 奴只는 냇물이 흐르는 들녘을 연상시킨다. 광주의 옛 이름들이 무등산 및 그 앞의 들녘에서 유래한 바,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온 지역민의 삶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자못 함축적이다. 아울러 고을의 주된 명호가 무진주라는 점에서 무진악 곧 무등산이 광주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가 있기도 하다.
무등산신앙은 광주 일원에서 전해오는 민간의 풍속으로서, 무등산을 주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전통 관습이다. 광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을 상징하는 전통시기의 정치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습속이었는데, 통일신라에서는 그러한 무등산신앙을 小祀에 편제하여 중앙의 규제를 받도록 정하였다. 왕경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일환이었는데, 광주의 토착세력은 신라 중앙의 그러한 정책에 꽤나 협조적이었다. '무진고성'(무등산고성)의 축조라든지 그 결과 탄생한 무등산가에 함축된 광주 지역사회의 동향에서 헤아릴 수가 있었다. 신라의 백제 병합으로 신라 중앙과 접촉을 시작한 이래, 광주의 토착 유력계층은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는 타협의 길을 걸었다. 중앙귀족과의 연계를 발판으로 삼아 광주를 이끄는 전통적인 유력 사회계층으로서의 위치를 다지며, 나아가 노령 이남에서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고 또 지켜나가고자 하는 게 통일신라시기 광주 지역사회의 선택이었다. 이후 9세기 前半에 이르도록 광주 지역사회의 그러한 방침은 대체로 일관되고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무등산신앙과 무등산가를 더듬어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무등산의 존재 의미를 되짚었거니와, 이 산이 광주나 다름없는 상징적 존재임을 거듭 확인할 수가 있었다.
9세기 말엽 광주에 甄萱의 後百濟가 들어섰다. 신라 중앙과 타협하고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던 지역 토착세력이, 기왕의 고식적인 방책을 버리고 왕경 경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세력으로 자립하였다. 무등산 開仙寺址 石燈의 銘文에는 그처럼 이제까지와 다른 길을 선택하기에 이른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전한다. 진성여왕 5년(891) 10월 무렵 새겨진 石燈記에 의하면, 開仙寺라 전하는 사찰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佛事에 국왕이나 왕실은 관여하지 못하였다. 신라 중앙의 경우도 기껏해야 관여했을 가능성이 짐작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국왕이라든지 신라 중앙에서는 해당 佛事에 가능한 한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더불어 그러한 중앙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지역사회의 일부에서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에 그쳤다.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신라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암시한다. 아직 신라 중앙과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反新羅的인 기운이 만연한 가운데, 저들과의 관계를 되짚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지역 토착세력의 은밀한 준동이 있었다. 眞聖女王 6년(892) 견훤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기까지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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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재집(小齋集)』 연구

저자 : 오윤숙 ( Oh Yoon-sook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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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김대현 교수에 의해 근대시기 호남지역의 주목할 만한 한문문집으로 소개된 소재(小齋) 오재영(吳在永)의 『소재집(小齋集)』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소재집(小齋集)』은 1책 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권 635수의 시(詩)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서(序)와 행장(行狀)을 포함하여 서(書), 기(記) 등 총 4권 114편의 산문(散文)이 실려 있다.
오재영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호남의 고읍 동복오씨의 종손으로 태어나 지역 유지로 살았던 인물이다. 중년 이후에 보성군수에 부임하였으나,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직청원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귀향한 후에는 장음자(長飮子)라고 호를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도연명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인산(因山)에 다녀온 후 말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오재영은 자신의 서재 '長飮子三拾年稽古之室'에서 스스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오재영은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은 하였는데, 경운선사가 주관한 순천 선암사 수행단체 백련사(白蓮社)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사실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또한, 당시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동한 매천시파(梅泉詩派)나 순천 난국음사(蘭菊吟社)의 지명도가 있는 문인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시와 산문이 『소재집』에 실려 있으나, 이 역시 다른 문헌에서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동복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詩社)에 대한 기록도 확인하였으니, 향후 본 연구를 토대로 당시 지역문화의 일면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문문집에 대해서는, 황위주 김대현 연구팀의 선행연구를 통해 구한말 이후에도 많은 양의 개인문집들이 존재했었다는 통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존재여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문집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이들 한문문집들은 광복 이후 한문교육의 공백으로 인해 개략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사장될 위기에 놓이게 되어 있었다. 본 연구에서 『소재집』에 실린 시문을 통해 당시 동복 등 지역사회에서 한문으로 써진 시문이나 한문문집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향후 이들 유관 개인 한문문집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면 이를 지역의 역사문화 사료(史料)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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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엄두섭 목사의 '난중일기'를 통해 본 남평지역의 한국전쟁 경험

저자 : 김관영 ( Kim Kwan-ye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3-13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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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 때 지역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빈약한 상황에서 당시 엄두섭 남평교회 목사가 남겨 놓은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남평 지역의 상황을 재구성해보았다. 그를 위해 1950년 7월 22일부터 10월 13일까지 기간 중 다른 지역 피난일 7일을 제외한 77일 간 남평과 인근지역에서 일어난 유의미한 사건 101건을 도출하여 인민군과 좌익, 미군과 군경, 일반 민중 등 주체별 사건들을 시계열화(時系列化)하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였다.
인민군은 7월 23일에 남평에 진주하여 7월 31일 면민의 노동당 가입, 8월 3일 인민위원회 조직, 8월 17일 면 위원장, 서기 선거 등을 통해 정착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다가 한 달이 지난 8월 21일부터 전황이 여의치 못해지자 방공호 구축, 각종 전쟁물자 징용에 몰두하다 9월 29일 서서히 퇴각을 시작, 10월 4일 지석강 전투 후 6일에 경찰대에 의해 완전히 수복되었다.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탄압과 살상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행해졌으나 인민재판은 없었다. 또한 죄 없는 양민들 중 미군의 자의적이고 무차별적인 공습에 의해서, 그리고 산중에 숨어 있던 경찰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래저래 죄 없는 양민들에게는 수난의 시대였다.
민심은 7월 24일에는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리만큼 환영분위기였지만 8월 21일부터 토지분배 등의 문제로 한풀 꺾이기 시작, 9월에는 현물세 조사에 대한 불평으로 이반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7월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9월초 해갈이 될 때까지 2개월간 농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추석에는 적으나마 음식을 장만하여 명절을 지냈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민간 기록물의 중요성이다. 엄목사의 '난중일기'는 민간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실명(實名)의 국회의원이나 지역유지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의 행보와 각종 사건, 민심의 향배 등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대단히 가치 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민간기록의 발굴과 보존, 활용은 접근성과 현장성 측면에서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방법론에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서 관장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이 논문을 계기로 지역의 민간기록물에 대한 적극적인 발굴과 보존, 활용 그리고 그에 기초한 지역학 연구가 보다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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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현대 장소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과 해석

저자 : 류시현 ( Ryu Si-hyun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16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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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 대한 '부정적' 표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일시적이거나 단발적이지 않으며 동어반복 혹은 비슷한 논리는 계속 재생산되어 왔다. 차별이 전제된다고 할 때, '전라도'라는 단어는 중앙과 타 지역과의 권력관계가 반영된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왜냐하면 개념 전라도(인)은 지역차별과 연동해서 민감한 정치적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념 전라도는 한국 근·현대 일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정치·사회운동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념 전라도에 관한 접근은 호남학과 연동된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 시대적 흐름을 중심으로 개념 전라도를 첫째,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역에 대한 기행문에 관한 문화적 해석을 둘째, 1960∼80년대 정치가 김대중과 전라도를 연동한 정치적 해석을 셋째, 87년 체제 이후의 전라도에 대한 긍·부정 논의가 담고 있는 사회적 해석을 살펴보았다. 전라도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을 통해 학문 '호남학'의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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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흥현 읍치(邑治) 이동과 읍치 관련 문화재 고찰

저자 : 이수경 ( Lee Su-kyung ) , 김일동 ( Kim Il-d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20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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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의 연혁에서는 '1395년 왜구를 피해 고흥 읍치가 보성군 조양현으로 옮겨가고, 1441년 현재의 흥양 읍치로 옮겼다,'라고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우선 본 글에서는 1395년부터 1441년까지 보성군에 소재하였던 고흥읍치에 천착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고흥읍석성(高興邑石城) 둘레가 565 보(步)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현재 보성군 조성면에 소재한 석성은 1424년 무렵 고흥읍 석성이 축조되어 1441년까지 약 17년 동안 고흥현(高興縣)의 읍성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장 조사 결과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에는 성곽, 북문, 객사, 동헌, 내아, 군창[兆陽倉] 등이 구전(口傳)되고 있다. 성문과 관아건축물은 고흥읍성 내의 건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동로현과 고려시대 조양현의 기록에서는 성곽의 기록이 검토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1441년 본 현으로 돌아온 고흥 읍치는 '흥양(興陽)'으로 개칭하여 흥양의 행정, 국방을 주관하였다. 흥양 읍치 내 시설물 중 존심당 및 아문[전남 유형문화재 53호], 남휘루[전남 문화재자료 183호]와 홍교[전남 유형문화재 73호]를 고지도·지리지 및 192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검토하였다.
흥양 읍치의 관아건물은 목조건축물이기에 중수가 필요하였지만, 흥양 읍치 내부의 종횡으로 흐르는 하천은 물난리로 수재를 자주 입었고, 그 피해는 관아건물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휘루에 있는 6점의 현판을 근거로 남휘루의 역사를 고증할 수 있었다.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1667년 현감 안책이 건립하였다.'라는 문화재 안내문을 참고하여 남휘루는 1787년 흥양현감 안책이 건립하였으며, 남휘루 상량문을 통해 1887년 당시까지 아문을 '瀛洲衙門'이라고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아문의 이름은 '高興衙門'이다. 따라서 고흥아문보다는 영주아문이라고 하여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옥하리 홍교(虹橋)'라는 문화재 명칭과 문화재 성격이 일치하는지 검토하였다. 고흥읍 서문리에 소재한 이 문화재는 성벽을 축조할 때 하천의 배수로이므로 수구가 옳으며, 방어시설인 철책을 건 흔적이 홍예에 남아 있으므로 수문이란 명칭이 합당하다. 비록 고지도에 서홍교, 남홍교, 수구홍교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기능을 고려한다면 이 문화재는 '고흥 서문리 위수문·아래수문'으로 정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본 연구가 흥양 읍치 관아건물의 고증 및 복원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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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은 광주광역시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조성하는 국책사업으로, 문화를 기반으로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의 실현을 위해 허브로 기능하기 위해 옛 전남도청 일대에 설립되었으며, 2015년에 개관하였다. 지역사회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 이후 일관되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역사회 협력을 요구해왔다.
본고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역사회와 제도적·행정적인 측면에서 협력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문화 협치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병행적으로 프로그램의 기획 및 문화콘텐츠의 제작과정에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문화 협치 구축이 시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문화콘텐츠 '나는 고려인이다'는 아시아스토리커뮤니티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사회와 협력해 제작되었다. 본고는 '나는 고려인이다' 제작 과정을 살피고, 제작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심층면담을 통해 문화 협치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성공적인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을 위해 지역사회와 문화콘텐츠를 공동제작하면서 문화 협치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다. 이 공동제작을 통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지역단체 그리고 지역대학은 첫째, 각종 자원의 상호 공유를 통한 문화 협치 구축 시도. 둘째, 지역과 아시아 소재 기반의 콘텐츠 제작을 통한 지역적 한계 극복. 셋째, 지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젊은 문화예술계 활동가들에 대한 교육적 성과 도출. 넷째, 지역의 사회적 약자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이슈화하여 문제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상호협력관점에서 지역단체 및 지역대학과 협력하여 문화콘텐츠를 제작하는 구체적인 문화 협치 구축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과 성과에서 얻은 의미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지역사회에 몇 가지의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째, 지역의 이야기인 동시에 아시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지역사회·지역 창작자들과 개방적이며 관용적인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둘째,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수립하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종합계획이나 문화전당의 사업계획에 지역사회의 역할과 참여가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전당 조직구성'이라는 이슈를 뛰어넘어, 문화전당 프로그램을 어떻게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갈지에 대한 문화전당과 지역사회의 고민과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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