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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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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Succession of Cognition and Family Scholarship in Sub-branch Family of Late Choson -Focusing on Changnyong Seong Family's Diplomatic Mission to China or Japan-

손혜리 ( Son Hye-ri )
  • : 한국한문학회
  • : 한국한문학연구 8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269-305(37pages)
한국한문학연구

DOI


목차

1. 머리말
2.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
3. 사행을 통한 학지와 가학의 전승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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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This article prospects one of representative sub-branch family in Late Choson, Changnyong Seong Family’s Chambong-gong Clan, especially about the succession of cognition and family scholarship in diachronic view. As discussion focus on personnel with experience of successful candidate of civil exam and participation in diplomatic mission to China or Japan, spotlight is on the 6 successive generation of the family, Seong Huryong - Seong Wan - Seong Mongryang - Seong Daejung - Seong Ujeung - Seong Inho.
Research on records of this members implies following tendencies. First, they were recognized as highly literate from scholars of their era. Though their literacy did not advanced to transition of perception, foreign experience led them to widen their knowledge. Second, each member have wellacquainted the writings of their ancestors on diplomatic mission. Thus they were able to capture new experience comparatively fast and leave the writings themselves. Third, because of personal political inclination and family background, they had firm and clear mindset of ‘Loyalty to Ming’. This tendency existed consistent after their diplomatic mission. Fourth, they had huge interest about foreign people and studies, such as Giulio Aleni, Matteo Ricci, Diplomats from RyukyuㆍAnnamㆍSiam, Jikbangoegi, Dongjamun. Fifth, they showed active curiosity upon foreign products and cultures like well bucket, sweet potato, waterwheel, which may help welfare of Choson, and emphasized to import those culture.
To put it short, it is found that quicker access to newest academic information and succession of the information within the family tree have allowed Chambong-gong Clan of Changnyong Seong Family firmly establish themselves as the prestigious sub-branch family of Late Cho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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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8-128x
  • : 2733-491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6-2021
  •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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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권0호(2021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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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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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학론(五學論)으로 읽는 경전학의 이면 -경학과 과거 문장학의 조응-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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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五學論을 통해 18세기 조선 학술의 풍토에 대해 매우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다산은 성리학과 훈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전환적 인식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성리학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 제고를 요청하여 기존의 理氣와 理發氣發 중심의 인식론적 이해에서 수기치인의 事功的 효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해의 시각을 조정하려 했다. 제한적인 훈고학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경전 이해의 최종적인 목표는 의리의 확인과 그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기타 문장학과 과거학, 술수학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온전한 학문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산의 당대 학술에 대한 관점을 집약한 五學論을 검토해보면 다산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학문관으로 이해된다. 그는 理氣의 발함이나 本然과 氣質의 분기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심성수양을 중시하는 宋學의 논리로 성리학을 바라보기보다는 誠意와 正心의 실천적 요소를 중심으로 수기치인의 사공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洙泗學의 시야로 성리학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종래의 성리학 인식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 결과 孝弟忠信과 禮樂刑政이 중시되었으며, 성리학자의 官人적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경전의 본지에 대한 이해에서 훈고학의 역할을 한정적으로 이해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산은 훈고가 경전의 의미파악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문구의 정확한 이해에 불과한 것으로 그 오묘한 본지의 추구에 있어서는 의리적인 접근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조선의 현실에서는 한대의 훈고와 송대의 의리를 절충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점은 훈고가 아닌 의리가 중점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 외에 문장학과 과거지학에 대한 비판은 다산의 경학 우위의 학문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다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이해가 과도하게 적용된 면이 없지 않다. 아울러 술수학에 대한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기존 技藝論을 중심으로 다산의 합리적인 과학사상을 높게 평가해온 것에 비추어 좀 더 그 인식에 대한 이해의 조정을 요청하는 측면이 있다.
다산의 오학론에 등장하는 학문인식의 정당함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통적인 이해의 측면을 살펴보았다. 사공적 효용을 강조하는 다산의 시야에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퇴계와 우암의 문제의식은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훈고학에 대한 이해는 다산의 관점이 지닌 학술사적 시효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전학과 과거 문장학의 문제를 검토한 위백규와 성해응 등의 언급은 경전공부를 두고 가급적 聖賢之學과 科擧之學, 그 둘의 간극을 좁혀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 효용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회의 저변에서 매우 진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향촌과 서얼이라는 사회적 발신이 과거제도 외에 딱히 찾기 어려웠던 지역과 계급의 경우, 과거 문장학을 置之度外하기 어려웠고, 그 경전에 대한 학자로서의 기본 태도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를 조화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한 정황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올바른 경전독서를 통한 과거 문장학의 도야를 은근히 권한 향촌 지식인 존재 위백규의 경전 주석과 '仁義의 功令文字'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를 위한 詩會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던 명문 서얼가 창녕성씨 상곡공파의 경우는 그 실제의 한 단면이다.
명분은 삶을 통과하여 드러날 수 없고, 학문이 수양의 도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성취를 위한 중요한 매개로 작동해야 함은 18~19세기 조선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삶의 기반이 취약한 계층의 경우, 그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산의 오학론은 재독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Dasan Jeong Yak-yong once had an extremely keen criticism on the practice of the 18C Joseon academic circle through his Ohakron (Dasan's criticism on the theory for five studies). Through the criticism on the Neo-Confucianism and exegetical studies, Dasan demanded the shifting perception on the existing understanding of the Neo-Confucianism. For example, he had requested the enhancement of perception on the grand social role of the Neo-Confucianism in a way of attempting to shift the view of understanding from the existing egi (a Confucian doctrine to explain the universe and human in reasoning and spirit) and ebalgibal (A theory of Toegye that reasoning has to be available to have the ethical emotion to have the relevance with good and evil) perceptive understanding to the direction to emphasize the work accomplishment efficacy of the Sigichiin (self-discipline and self-control). While acknowledging the efficacy of restricted exegetical studies, he clarified that the ultimate goal of the Scripture understanding is to confirm righteousness and its practice. With respect to other heraldry, gwageo (national examination) studies and Shu Shu, he emphasized the negative effect with the criticism that it would not be understood as a complete academic field.
Ohakron is the outline of Dasan's scholastic point of view of the time, as reviewed earlier, it is understood as the scholastic view with the strong reflection of the Dasan's subjective point of view. He thoroughly recognized the manifestation of Egi or stirring up of intrinsic nature in a way of finding out the Neo-Confucianism with the view of Susahak (Confucian studies) that may assert the work accomplishment competency of Sigocjoom (self-discipline, self-control) for the focusing on the practical factors of good faith and righteous mind rather than the Neo-Confucianism with the theorem of Song Studies that placed importance on Simseongsuyang (discipline of mindset). It would be radically different perception from the conventional Neo-Confucianism, and as a result, Hyojechungsin (filial duty toward family and loyalty to king and state) and Yeakhyeongjeong (Ye-conservation of social order, ak-music to harmonize social mind, Hyeong-penal code to prevent evil, and jeong-all administrative agencies) had the importance and the government official appearance of Neo-Confucianism scholars were emerged.
Such a shift for the point of view is not distanced from restricted understanding of the role for exegetical studies from understanding on the main part of the Scripture. Dasan clearly acknowledged that annotations would be of help in finding out the implication of the Scripture, but the role was the clear understanding of the phrases only that there has to be righteous approach in terms of pursuit for the exquisite main section. Therefore. under the reality of Joseon,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ing the annotations of the Han Dynasty and righteousness of the Song Dynasty with the compromise to each other and the emphasize is made to have the focus on righteousness, not on the annotations.
In addition, the criticism on heraldry and studies for gwageo comes from the Confucian Classics-intensified academic point of view of Dasan that it has certain aspect of excessive application on understanding on Dasan's own scholarship. Furthermore, any criticism almost like the neglect on Shu Shu has certain aspect of requesting for adjusting the understanding a little bit more on its perception rather the evaluation highly evaluated for the existing artistic and skill theory-oriented reasonable scientific ideology of Dasan.
For the understanding on appropriateness of academic perception as appearing on the Ohakron of Dasan, the aspect of traditional understanding has been sought. For the view of Data who emphasized time and spatial efficacy, the critical mind of Toegye and Wooam who placed importance on the origin of human and unive3rse or willingness of human seem not to be so easy to find the connecting point. Understanding on the exegetical studies may need to consider the scholastic efficacy for the Dasan's point of view.
Mentioning of Wi Baek-gyu and Sung Hae-eung revising the issues of Scripture studies and Gwageo heraldry confirmed that the attempt to acquire the efficacy in the positive scheme by narrowing the gap between studies of sacred wisemen and the studies for gwageo as much as possible with respect to the Scripture studies has been made extremely seriously on the social foundation level. In particular, for the case of regions and classes where there would not easily found other than the gwageo system for any social manifestation in local community, clan hierarchical order and so forth, the Gwageo heraldry would be difficult to Chijidooihagi (leave the matter alone without having an issue out of it), and the basic attitude as a scholar on the Scripture would not be deserted that it has the aspect to understand to make harmonious relationship of the two. With respect to the Scripture annotations of Wi Baek-gyu, a local community intellectual who subtle recommended for Doya of the Gwageo heraldry through the correct Scripture reading and Changnyeong Sung Clan Sanggokgongpa, a seoeol (out-of-wed off-spring) clan of reputable family that continuously held the poetry society for the Gwageo with the slogan in 'Gongryeongmunja (characters of meritorious orders) of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it has an aspect of the presence. The justification could not be appeared by pass through the life and the academics is not only a tool of such discipline but also an important medium for social accomplishment, which should not be an exception even during the 18C-19C joseon. In particular, for the case of classes with vulnerable foundation of lives, this issue would be even more des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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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수광(李睟光)(1563~1628)과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도문론(道文論)과 사상적 차이

저자 : 오세현 ( Oh¸ Se-hy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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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과거제 시행 과정에서 등장했던 강경이라는 경학 시험과 제술이라는 문장 시험의 힘겨루기는 문장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장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즈음이었다. 문장가 이수광은 문장의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의 지속을 대표한 인물이고, 정경세는 그러한 공감대에 문제제기를 제기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수광은 도학이 근본이고 문장은 말단이라는 도본문말론의 원칙론에 공감했지만, 동시에 문장의 실제적인 효용성과 가치에 대해서도 긍정했다. 도학과 문장의 관계에 관한 이수광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 중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습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반면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확산과 더불어 예학이 심화되고 예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조선 중기에 정경세는 도학이 근본이고 문장이 말단이라는 주희의 견해를 근거로 하여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문장의 역할을 제한고자 했다.
정경세는 이수광의 격물치지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거나, 「채신잡록」의 곳곳에 대해 양명학은 물론 노장철학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제기하며 비판했다. 이러한 정경세의 비판은 문장가로 명망을 얻었던 이수광의 사상적 다양성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수광과 정경세의 도문론과 사상적 차이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의 조선사회에서 이수광을 비롯한 다수의 문장가들에 의해 지속되었던 문장에 대한 집중과 그 집중의 연장선에서 만나게 되는 불교와 노장철학에 대한 관심과 인정, 그리고 이에 관한 정경세를 비롯한 일부 성리학자들에 의한 강력한 문제제기와 비판이라는 역사적 특징을 말해준다.


The struggle between the scripture test called Gang-gyeong(講經) and the sentence test called Je-sul(製述), which appeared during the implementation of the past system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eans that a consensus on the social role and values of sentences has been maintained for a long time. It was around the late 16th and 17th centuries that the question of the consensus on the social role and values of these sentences began to appear in earnest. Literary writer Yi Soo-gwang(李睟光) represents the continuation of consensus on the role and values of sentences, and Jeong Gyeong-se(鄭經世) is a representative person who raises a problem with such a consensus.
Yi Soo-gwang sympathized with the principle of the Dobonmunmallon(道本文末論) that Dohak(道學) is fundamental and sentences are the end, but at the same time affirmed the practical utility and value of sentences. This attitude of Yi Soo-gwang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Dohak and sentence was not a new appearance in the mid-Joseon period, but had been maintained since before. On the other hand, with the spread of understanding of Neo-Confucianism in the mid-Joseon period, Ritual study(禮學) deepened and the compilation of Ritual study books(禮書) actively proceeded. Based on Zhu-Xi(朱熹)'s view that Dohak is fundamental and sentences are the end, Jeong Gyeong-se tried to limit the role of sentences to conveying meaning.
Jeong Gyeong-se criticized Yi Soo-gwang's understanding of Gewuzhizhi(格物致知), or criticized various places in 「Chaesin-Japrok(采薪雜錄)」 by raising the connection between Yangmyonghak(陽明學) as well as the Taoism and Buddhism. These criticisms of Jeong Gyeong-se led to a point on the ideological diversity of Yi Soo-gwang, who gained a reputation as a literary writer. These differences in Domunron and ideology between Yi Soo-gwang and Jeong Gyeong-se are related to the concentration on texts that were continued by Yi Soo-gwang and many other literary writers in Joseon society in the lat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and Buddhism and Taoism encountered in the extension of the concentration. It tells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interest and recognition, and strong questioning and criticism by some Neo-Confucian scholars including Jeong Gyeong-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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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과문(科文) 관련 자료의 유형과 특징-규장각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현순 ( Park¸ Hyun-so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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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文 학습용으로 편찬된 科文集은 학습의 내용을 제공하는 교재인 동시에 편찬자 개개인이 주체가 된 학습 활동의 기록물이다. 최근 과거에 대한 연구가 다각화되고 科文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과문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현전하는 과문집들은 그 수도 부지기수지만 그 구성 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그 성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과문 관련 자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그 특성을 조망해 보려는 시도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 중 과문 관련 자료 47종을 뽑아 국가행정용으로 편찬된 科作集, 우수과문을 선집한 科文抄集, 특정한 개인의 과문 작품을 모은 科文私集 등으로 유형화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The anthology of exam writings, Gwamunjip(科文集), was a document that served as teaching materials of the exam writing, Gwamun(科文), and at the same time, a result of the learning activity of compiler individuals themselves. As recent studies o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of Joseon Korea are getting diverse with growing interest in the Gwamun, Gwamunjip is also gaining more scholarly attention. Since the number of extant Gwamunjip is numerous and its compositions vary, there is a need to identify their characteristics by grouping them in a systematic way.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materials related to the exam writing, this study categorizes the relevant materials among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collections into Gwajakjip(科作集), compiled for state administration purpose, Gwamunchojip(科文抄集), a collection of outstanding answers, and Gwamunsajip(科文私集), a collection of the answers of each individ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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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숙종(肅宗)·영조대(英祖代) 과거제(科擧制)와 과문(科文)의 추이(推移)와 쟁점에 관한 일고찰

저자 : 박선이 ( Park¸ Seon-y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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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후기 科擧制에서 肅宗ㆍ英祖代 科擧制의 推移와 그 양상을 살펴보고 科文의 程式과 文體에 관한 논의와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을 고찰하여 당대 科文과 관련한 논란의 핵심을 밝히고 그 推移를 규명한 글이다.
먼저 肅宗ㆍ英祖代 科擧制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사안은 숙종 대부터 과거 시험의 시행이 확대됨에 따라 응시자가 대폭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科場 관리의 부실 및 과거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폐해가 극심해졌다. 특히 숙종 대에는 庭試가 자주 시행되면서 表文 작성에 유리한 서울 유생들의 합격률이 높아지는 한편, 表文의 빈번한 출제로 인해 응시자들이 科文 관련 類抄와 儷文選集類의 학습에 몰두하여 표절하고 답습하는 폐단이 심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종 대와 영조 대에는 과거제와 관련한 폐단을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였으며, 일정 부분은 科擧事目에도 반영되었다.
다음으로 肅宗ㆍ英祖代 科文의 程式과 文體에 관련한 논의와 그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은 크게 科文의 격식과 문체에 대한 논란과 사륙문의 애호와 科表 위주의 선발로 인한 논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후기 科文의 격식과 문체에 대한 논란은 문체정책이 이루어졌던 정조 대가 아니라 숙종 초기부터 문제가 되었던 사안으로, 영조 대를 거쳐 정조 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문제점으로 인식되었다. 肅宗ㆍ英祖代에는 科文의 程式에 맞지 않는 試券을 작성하거나 科文의 문체에 맞지 않는 용어와 語錄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科擧事目에 반영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科文의 격식과 문체를 바로잡고 응시자의 기호에 따라 기괴한 작법과 용어를 쓰는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科文의 격식과 문체 변화 역시 개성적이고 신기함을 추구했던 조선 후기 文風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그러므로 科文의 정식과 격식을 위배한 응시자를 처벌하고 이러한 응시자를 선발한 試官을 처벌하는 제도적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別試를 대체한 庭試 시행의 확대는 제도상의 변화 뿐 아니라 합격자의 선발 방식과 科文 문체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숙종 대부터 科文에서 表文을 중시하고 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그로 인해 과거를 준비하는 응시자 사이에서 表文의 학습이 중시되었으며, 儷文選集類에 대한 수요와 편찬이 확대되었다. 애초에 表文 위주의 선발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표절과 모방의 답습 등 表文의 애호와 중시로 인한 폐단 역시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科擧制의 변화가 단순히 제도상의 변화와 머물지 않고 科文의 문체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changes in national civil service examination(科擧制) during King Sukjong(肅宗) and King Yeongjo(英祖) Periods, explore discussions and controversies on standard format and literary style in exam writing, clarify the key points in controversies over exam writing, and investigate on the trends.
First, noteworthy points in the flow of national civil service examination during King Sukjong(肅宗) and King Yeongjo(英祖) periods are that number of applicant rapidly increased in response to expansion of national civil service examination since King Sukjong(肅宗) periods. This resulted in lack of management on examination places and issues occurring during the examination process. Especially, Jeongsi(庭試) was often held during King Sukjong(肅宗) period and scholars from Seoul were more likely to pass the examination because they were more advantageous in Pyomun(表文). Meanwhile, as applicants were often asked to Pyomun(表文), the applicants immersed into studying collections and selections of parallel style writings(儷文選集類) ended up plagiarizing and imitating them. To solve such issue, there were attempts to find solutions for issues related to national civil service examination during King Sukjong(肅宗) and King Yeongjo(英祖 periods and part of those attempts were reflected on Gwa Geo Sa Mok(科擧事目).
Also, the discussions and controversies on the standard format(程式) and literary style for exam writing are largely summarized into controversies over systems and formality of exam writing and controversies on preference toward four-six prose style writing and selection focusing on Gwapyo(科表). The controversies over systems and formality of exam writing during late Joseon Dynasty didn't start from the King Jeongjo period when literature policy started. Instead, such controversies started from King Sukjong(肅宗) period, affected on King Yeongjo(英祖) period, and lasted until King Jeongjo(正祖) period continuously. During King Sukjong(肅宗) and King Yeongjo(英祖) periods, not complying with the standard format of exam writing or using the terms and quotations(語錄) that are not associated with literary style of exam writing were prohibited. These were applied on Gwa Geo Sa Mok(科擧事目) to correct the system and formality in the state level and regulate applicants from using awkward writing technique or terms for preference of applicants. Nevertheless, such attempts were not effective. Such phenomenon was closely related to changes in literary style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pursued individuality and novelty in exam writing system, formality, and literary style. Therefore, such controversies could not be solved in the institutional level by punishing the applicants who didn't comply with the standard format or formality of exam writing and punishing the civil officer who selected such applicants.
In addition, expansion of Jeongsi(庭試) that replaced Byeolsi(別試) in the late Joseon Dynasty not only brought institutional changes but also had a huge influence on method of selecting winners and changes in exam writing. The phenomena of valuing and preferring memorials to throne became remarkable starting from King Sukjong(肅宗) period. As a result, applicants focused on learning how to Pyomun(表文) and the demand and compilation of selections on parallel style writings. Although selection of applicants focusing on writing the memorials to throne started as a good intention for finding applicants proficient in writing, there existed considerable issues due to preference and focus toward memorials to throne under the form of plagiarism and imitation in the last Joseon Dynasty. These facts proved that the changes in national civil service examination not only brought institutional changes but also influenced on literary style of exam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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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중 과거(科擧) 경의문(經義文) 비교 -조선시대 사서의(四書疑)·오경의(五經義)와 명·청대 팔고문(八股文)을 중심으로-

저자 : 윤선영 ( Yoon¸ Sun-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8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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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과거에서 經義를 시험하기 위해 치러진 과목들의 답안을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들여다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의 四書疑ㆍ五經義 과목과 명ㆍ청시대의 八股文에 대해 주자설 인용 방식과 의존도 변화 양상에 대해 비교하였다. 조선의 경의문은 주로 주자학파의 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설은 내세우지 않은 채 선유들의 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팔고문은 주자설을 위주로 하였으나 이를 문장 속에 간접적으로 녹여냈으며, 후기로 갈수록 주자설 의존도가 점차 약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건륭제 이후의 답안에서 古註를 근거로 하여 주자설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는 답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답안들이 시관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모범 답안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19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주자설을 엄혹히 견지했던 조선시대 과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This paper analyzes civil service examination answers subject about meaning of Chinese classics in Jo-seon and MingQing dynasty. To compare both countries, the author collected sample answers of Questioning on the Four books(Saseoui, 四書疑), Questioning on the Five classics(Ogyungyi, 五經義) and Eight legged essay(baguwen, 八股文). Many answers of Joseon distinctly show aspect of respect for Zhu-Xi(朱熹). They directly quoted his word, strongly rely on older scholar's opinion. On the other side, Ming-Qing dynasty's answers also based Zhu-Xi's learning, but they expressed indirectly from Saint's point of view. In addition, a few answers of Ming-Qing shows different opinion or supplement Zhu-Xi's word through old explanatory notes after King Qiánlóng[乾隆帝]. These answers got good reviews and grades from contemporary test supervisors, so seleted model answer. This tendency show completely different aspect with late Joseon's mood firmly include his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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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시대 문학관의 변화와 한국문학의 정체성(2) -기(氣) 위주 문학관을 중심으로-

저자 : 박경남 ( Park¸ Kyeong-na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5-22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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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문학관을 매개로 한국문학의 정체성 및 정체성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두번째 기획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동아시아 전통적 문학관의 다기한 측면중 '氣를 중심으로 한 문학관'을 소개하고, 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기 위주 문학관 역시 중국의 문학 담론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조선 문인들 개개인의 고민과 시대적 요청 속에서 새롭게 호명되고, 서로 경쟁하며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선천적인 기를 중시하는 문기론과 유람과 독서를 통한 양기론이 각축했고, 이러한 각축은 서거정 단계에서 양기론을 긍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선천적인 기를 중시하는 담론은 논의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유람을 통한 양기론과 경전 독서를 통한 양기론이 공존하며 점차 강화되어 갔다. 또한, 독서를 통한 의기 함양 담론은 유가 성리학 경전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독서를 지향하는 개방적 경향과 유가 성리학 이외의 서적에 대한 독서를 이단으로 취급하며 배제하는 경향이 공존하며 각축했다. 다만, 동아시아의 기철학과 서구 근대학문의 성과를 종합하고자 했던 최한기와 같은 개방적인 기 위주 문학관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기 위주 문학관은 근대 이후 계승되지 못하고 그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기 위주 문학관에서 강조되었던 '부단한 독서'와 '내면적 성찰', '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 등은 현대에도 여전히 창작 수련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비록 기라는 용어의 쓰임새와 유효성은 현대사회에서 미미해졌지만 기 중심의 문학 담론으로 제출되었던 여러 의견들은 여전히 문학 창작과 비평에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the second study to reconsider the concept of identity and identity of Korean literature through a point of view on Literature. To this end, we introduced and reviewed it at different times to the discourse of Qi 氣-oriented literature among the diverse aspect of the point of view on literature in the pre-modern East Asia.
The discourse of Qi-oriented literature had also a close relationship with Chinese literary discourse, and was newly called, competed with each other, and showed aspects of change amid Joseon writers' individual concerns and requests of the times. From the mid-Goryeo period to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discourse of WenQi 文氣 that values innate Qi and the discourse of LiangQi 養氣 through sightseeing and reading were competed. This competition resulted in the affirmation of the discourse of LiangQi 養氣 in the period of Seo GeoJung 徐居正. Since then, the discourse of WenQi has disappeared from the center of discussion in Joseon, and the discourse of LiangQi that train one's mind through sightseeing and reading has gradually been strengthened by coexistence. Furthermore, the discourse of LiangQi through reading competed and coexisted with the open tendency toward various reading not limited to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the tendency to treat it as heresy and exclude reading of books other than the Confucian scriptures. However, open views such as Choi Hanki 崔漢綺, who sought to combine the achievements of East Asian philosophy of Qi and Western modern university culture, were no longer spread or enlightened by Western and Japanese imperial invasions.
As a result, the discourse of Qi-oriented literature was no longer inherited and lost its vitality after modern times, but the constant reading, internal reflection and expanding knowledge through sightseeing and reading that were emphasized in it are still recognized as the most important ways of literary creation and training. Therefore, although the usefulness and validity of the term Qi has become insignificant in modern society, many opinions that have been submitted as a Qi-oriented literary discourse are still valid in literary creation and cri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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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정선당송천가련주시격(精選唐宋千家聯珠詩格)』에 활용된 송(宋)ㆍ원대(元代) 문학비평서의 문헌학적 검토

저자 : 류화정 ( Ryu¸ Hwa-je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5-25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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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選唐宋千家聯珠詩格』(이하, 『聯珠詩格』)은 于濟ㆍ蔡正孫의 絶句選集이다. 이 책이 국내로 유입된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絶句는 『연주시격』'이라는 공식이 전해질 정도로 유행했다. 1483년에는 成宗이 직접 이 책의 諺解와 註解를 명했다. 언해는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해는 1485년 徐居正을 중심으로 1차 완성되었고, 1492년에 성종이 다시 安琛 등에게 補削을 요구하여 1502년에 간행되었다. 채정손의 評釋을 의식하여 '增註'라고 이름 붙인 朝鮮 註解本은 이후에 원본 『연주시격』을 대체하여 일본으로 전해지고, 중국에도 역수출되었다.
『연주시격』과 같은 詩選集이 한시 학습서로 수용된 데는 고려로부터 이어진 宋ㆍ元代 批評書에 대한 독서와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黃庭堅을 인지하고, 江西詩派를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海東江西詩派까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송ㆍ원대 비평이 조선 초기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자료들이 비교적 드물어서, 비펑서들의 유입과 활용 양상을 충분히 규명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된 『연주시격』의 增註에 활용된 송ㆍ원대 비평서를 검토해 보는 것은, 자료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초기 문학비평과의 관련성을 재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증주에 인용되었다고 모두 당시 문단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화집과 시선집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해 내용을 통해 비평서의 활용 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초기 문학비평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JeongSeonDangSongCheonGaYeonJuShiGeok』(『精選唐宋千家聯珠詩格』) (Abbreviation, 『聯珠詩格』) is a book of selections of JeolGu(絶句) by 于濟ㆍ蔡正孫. It is not clear when this book came into the country. The slogan, '絶句 is 『聯珠詩格』' was so popular that it was passed on. SungJong(成宗) ordered Korean translation of Chinese classics(諺解) andannotation(註解) of this book in 1483. It is not known whether 諺解 is complete. 註解 was first completed around 徐居正 in 1485. In 1492, 成宗 asked 安琛 and a few others to make up again, and it was published in 1502. The '增註', named 朝鮮 註解本, was later exported to Japan as a replacement for the original, and was also exported back to China.
Acceptance of 『聯珠詩格』 was possible because the Literature Criticism of hat followed from Goryeo was premised. Recognition of 黃庭堅, developmental acceptance of 江西詩派, the appearance of 海東江西詩派, these are examples. Nevertheless, the lack of data, it difficult to identify the inflow and utilization aspects of the early 朝鮮. In this situation, it is meaningful to review the Literature Criticism that was used for 『聯珠詩格』 增註. The limits of the data can be overcome and it can be an opportunity to reconsider literary criticism in the early 朝鮮. Of course, not all of these books influenced at the time. I think this can be a way to understand literary criticism in the early 朝鮮, given that we can guess the usage of critical books through the contents of the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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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국 의고시(擬古詩)의 사적(史的) 전개와 의고(擬古) 양상 연구-고려 후기~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저자 : 이훈 ( Lee¸ Ho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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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古詩十九首」와 연관된 한국 擬古詩에 대한 통시적 연구의 일환으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의고시의 史的 전개와 擬古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본고의 연구는 韓中 의고시 간의 관계망을 분석하는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구축하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두었다. 이에 먼저 의고시의 개념과 유형을 제시하였고, 중국의 의고시 작품 개황을 표로 정리하였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의고시의 史的 전개와 擬古 양상에 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는 前代의 여러 작품에서 語句와 詩意를 차용하여 모의하는 광의적 개념으로서의 의고시 창작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權近의 「擬古和陶」 4수는 陶潛의 「飮酒」를 화운하여 모의한 것으로서 和韻과 擬古의 창작방식이 융합된 양상을 지니는데, 陶潛의 「擬古九首」를 화운한 蘇軾의 「和擬古九首」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광의적 의고시의 창작이 지속되었으며, 중국의 의고시를 화운한 작품이 출현하기에 앞서 한국 의고시에 있어 최초의 협의적 의고시인 成俔의 「擬古十首」가 등장하였다. 성현의 작품은 陸機의 「擬古詩十二首」처럼 「고시십구수」의 체재를 유지하면서 句數를 가감하는 방식으로 모의한 것이다.
육기와 성현의 의고시를 비교 분석한 결과, 작품 간의 연관성을 통해 前代의 의고시가 後代의 의고시 창작에 교과서적이고 교량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양자의 의고시가 원작의 詩型과 정형성을 변주한 양상, 원작의 語句를 대체한 양상, 원작의 詩意를 전환한 양상 등에서 개별적인 면모를 지닌다는 점도 구명하였다.


This study analyzes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archaic poems and the aspects of archaism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as part of a diachronic research of korean archaic poems related to < Gosisipgusu(「擬古詩十二首」) >. The primary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stablish basic data to analyze the network between Korean and Chinese archaic poems. To this end, the concepts and types of those poems are organized, and then the archaic works of China are summarized.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e archaic poems were created mainly under the broad concept which imitates the phrases and the poetic themes of various works of previous times. In particular, Kwon Geun(權近)'s < Uigohwado(「擬古和陶」) > shows the convergence of bouts-rimes(和韻) and archaism, which can be seen as influenced by Su Shi(蘇軾)'s < Hwauigogusu(「和擬古九首」) >.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creating of broad archaic poems maintained, but the first creation with the narrow concept, Seong Hyun(成俔)'s < Uigosipsu(「擬古十首」) >, appeared in Korean archaic poetry. Like Lu Ji(陸機)'s < Uigosisipisu(「擬古詩十二首」) >, his work was imitated by maintaining the format of < Gosisipgusu(「古詩十九首」) > while adding or subtracting the number of lines.
Comparing the works of Lu ji and Seong hyun, it's confirmed that the previous poems played a textbook and bridge role in the creation of future poems. Their archaic poems have their own particular aspects: Variation of the structure, replacement of the phrases, and change of the poetic themes of the original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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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63年 계미통신사행록 『동차기행(東槎紀行)』의 작자와 일본 체험

저자 : 정우봉 ( Chung¸ Woo-b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3-334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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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63년 계미통신사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崔英泰(1723∼?)의 일본 사행록 『東槎紀行』의 일본 체험이 지닌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저자는 格軍으로 참가했다가 盤纏次知로 職役을 변경했던 인물이다. 『동사기행』은 格軍으로 참여했던 작자가 통신사행 동안 관찰하고 경험했던 내용을 매우 진솔하게 기록하게 두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 통신사행단 참가 인원 중에서 중하층의 職役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어떠한 관심과 의식지향을 보였는가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작자는 일본 사행 중 민간인과의 접촉이 엄격하게 통제된 가운데 여러 일본인들과 만났는데, 특히 일본 중하층 인물들과 활발하게 접촉을 하고 교류를 가졌다. 이 점이 『동사기행』의 독특한 면모이다. 통신사 일행을 호위, 응대하는 일본의 중하층 인물들과의 접촉과 교류를 일화 중심으로 흥미롭게 묘사하였으며, 때로는 일본 민가의 한 처녀와의 외설스러운 장면을 가감 없이 다루기도 하였다.
또한 『동사기행』은 매우 잡다하고 다양한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었으며, 일본의 제도와 문물, 학술, 외교 문제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주로 일본에 와서 그곳 현지 사람들과 접촉하고 부딪히면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일들,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 혹은 일화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작자는 일본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문화적 우위의 시선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동사기행』은 특별하고 신기한 이국 체험의 견문기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was focused on explaining the author and Japanese experience of 『Dongsagihaeng』, the record of Joseon Tongsinsa. It is worth noting that it was written by a person who was in charge of the lower ranks of the news agency. Because their social status was different and their positions and roles within the news agency were also different, there were considerable differences in their views and attitudes toward Japan, as well as the subjects and subjects of the narrative.
『Dongsagihaeng』 dealt with very miscellaneous and diverse subjects and events. Things that were not mentioned otherwise in other news agencies are very interestingly described in 『Dongsagihaeng』. While traveling in Japan, Choi Youngtae wanted to record all the bizarre landscapes, events, and episodes. Based on his strong curiosity about foreign landscapes, he also introduced trivial and everyday materials into his work. Instead, he made little mention of Japan's institutions, culture, academics, and foreign affairs. He mainly focused on recording in detail the things he saw and heard, the incidents or episodes he had personally experienced while coming to Japan, contacting and colliding with the local people there. Also, there is no attitude to view Japan as an object of edification or to grasp it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al superiority. You can get a glimpse of a more realistic and objective view of Japan. It can be said that 『Dongsagihaeng』 is a story of special and strange foreign exper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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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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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조선 서울 문단의 사문학(詞文學) 창작 경향

저자 : 김영미 ( Kim Young-m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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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사 창작은 문인들의 문예 그룹인 詩社를 중심으로 동인간의 교유의 수단과 집단 창작의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사창작이 활발하게 나타나면서 그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詞調가 등장했으니, 이는 <巫山一段雲>사 창작을 위주로 한 고려ㆍ조선 전기의 사 창작에 대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의 서울은 지리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문인 사대부들이 거주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교유한 곳으로, 동서남북의 각 지역을 중심으로 시사가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시사인 北社의 趙冕鎬와 金允植, 南社의 姜瑋, 李裕元은 다양한 사조를 활용하여 다수의 사를 창작하면서 시 창작뿐만 아니라 詞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각종 詞選集과 詞譜의 유입은 이들이 다양한 사패를 활용하고 다수의 사를 창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사를 이끌어간 조면호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사를 창작하고 새로운 곡을 만드는 등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던 문인이었으며, 후배 동인인 김윤식은 모두 새로운 사조를 활용하여 사를 지었고, 고려ㆍ조선사에서는 많지 않은 詠物詞를 창작하기도 했다. 시사 동인간의 창작에 있어서 '사'는 교제와 교유의 수단이면서 문학유희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북사의 조면호가 동료 문인과의 창화와 증답사를 통해 교유했다면, 남사의 강위는 기록문학으로서 사를 활용하고 分韻詞 창작을 통해 집단 창작의 형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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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세기 한강(漢江) 시회(詩會)의 일면 -마포 녹범각(綠帆閣) 모임과 『녹범시화(綠帆詩話)』-

저자 : 김보성 ( Kim Bo-s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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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일본인의 시집에 마포구 일대 한강은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인이나 친일 경향의 개화파를 떠올리는 장소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일대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대부 문인들의 문화공간이었다. '대군'의 누정을 비롯하여 당대 '권세가'나 이름난 '문장가'의 별서가 마포구 일대 강변에 즐비하였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한강 유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예부터 공인된 명소인 마포구 일대 한강에서 무수한 작품이 지어졌다. 한시로 국한하여 보아도 이 일대를 들러 지은 시가 부지기수이다. 이곳에 일정 기간 머물며 지은 시들을 책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崔岦의 『麻浦錄』, 李敏求의 『西湖錄』, 李志傑의 『西湖錄』이 대표적이다. 세 시집이 보여주듯, 16∼17세기 마포구 일대 한강을 기점으로 한 아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주지가 비슷한 이들이 시사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수창하다가 특별한 날에 대대적으로 회동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19세기 중반 이 일대에 거주하며 당대 명사들을 한자리에 모은 문인은 錦舲 朴永輔(1808∼1872)이다. 그가 초기에 지은 시 가운데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는 『西泠霞錦集』과 『西泠小艸』에는 마포구 일대의 시적 교류 흔적이 빼곡하다. 박영보는 1830년 가을에 興坊의 거처에서 마포 서강가의 綠帆閣(江意樓)으로 옮긴 후 동인들과 꾸준히 아회를 열었다. 이른바 '녹범각 시회'는 시구마다 중국 문사의 일화를 투영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시회에서 인용된 중국 문인만 보더라도 신위가 박영보에게 '蘇軾을 통해 杜甫로 입문'하였다고 평론한 까닭이 수긍된다.
박영보는 녹범각을 기점으로 『서령하금집』과 『서령소초』라는 시집뿐만 아니라 『綠帆詩話』라는 비평집도 편찬하였다. 『녹범시화』는 한강 일대 아회 중에서 녹범각 시회를 변별하게 하는 성과이다. 『녹범시화』의 시적 흥취ㆍ이론ㆍ소재와 관련된 문장들은 대체로 송나라 문헌을 참고하였다. 『녹범시화』에 송나라 서적이 주로 활용된 양상은 녹범각시회의 성격과 긴밀히 연결된다. 녹범각 시회와 연관 지어 『녹범시화』의 실체를 검토하는 한편, 박영보가 마포에서 오갔던 申緯의 蓉涇(蓉湖) 거처, 李薘의 濠想觀, 李明五의 古梅樹屋과 李晩用의 東樊書齋를 녹범각과 연결된 문화공간으로 상정하고 여기에서 창작된 시의 경향도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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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문학의 지방지적(地方誌的) 성격 -지방관 재임기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장진영 ( Jang Jin-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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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 있어 19세기 중반기는 17∼18세기에 이룩된 성취에 가려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새로운 문인의 발굴과 소개, 근대 문학과의 연결과 접속 가능성 모색 등 문학 동향을 폭넓게 이해하여, 이 시기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매력과 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海藏 申錫愚(1805∼1865)는 이러한 연구사적 흐름을 고려할 때 19세기 중반의 문학 실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데 유의미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문학관의 대략이나 대표 저작인 『入燕記』에 대한 몇 편의 연구 성과만이 제출되어 있으며, 다루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北學'이나 '實學'의 관점에서만 주로 논의되었다. 물론 신석우의 문학에 있어 이러한 작품이나 속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19세기 문단의 중심에 서서 평생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그의 문학 세계를 몇 가지 단어나 개념만으로 규정짓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본고는 신석우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의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 있는 '地方誌的 성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그는 약 30여 년 동안 이어진 관직 생활 속에서 여러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시문이 그의 작품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당대 한층 고조되고 있던 지리ㆍ풍속ㆍ역사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자신이 보고 들은 지역에서의 경험을 다양한 문학적 수단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석우 문학에서 보이는 지방지적 성격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의 주요한 문학적 특질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 됨은 물론, 19세기의 선명한 문학적 흐름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도 유의미한 참조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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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작자 문제

저자 : 신향림 ( Shin Hyang-ri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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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高山九曲歌」 관련 기록을 망라하여 살펴서 李珥가 「고산구곡가」를 창작하고 향유한 사실을 고증하고, 현존 「고산구곡가」가 이이가 창작한 원작이 아님을 논증한 것이다.
이이는 1580년 황해도 남강 가에서 아우를 전별하면서 지은 시에서 “해주의 소리꾼 碧桃가 연회 자리에서 「고산구곡가」를 가창하였다.”라고 했다. 이이와 친밀하게 교유했던 李海壽와 成渾은 1593년 해주 석담을 방문하여 시를 화창하면서 “석담은 「고산구곡가」에서 노래한 그대로이지만, 이제 더는 「고산구곡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이 시들을 통해 이이가 1580년 이전에 실제로 「고산구곡가」를 창작하였고, 1580년 무렵 해주의 소리꾼들이 「고산구곡가」를 가창하고 있었으며, 이이가 생전에 지기들과 이 노래를 향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宋時烈은 젊은 날 스승 金集의 명을 받아 이이의 서녀인 김집의 측실이 소장하고 있던 이이의 한글 원고들을 한역하였다. 이 한역한 원고 가운데 「고산구곡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朴世采는 『栗谷先生外集』을 간행하면서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수록하고자 했다. 「고산구곡가」 원작은 찾지 못하고 송시열의 한역시를 입수하게 된 박세채는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수록하기 위해 1681년 송시열의 한역시를 직접 한글로 번안하여 「고산구곡가」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복원한 「고산구곡가」를 한역한 당사자인 송시열에게 보내어 수정을 부탁하였다.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 역시를 다시 한글로 번안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1681년 무렵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이미 일실되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송시열은 1688년 자신의 집에 옛날부터 이이의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고산구곡가」를 金壽興 형제에게 공개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공개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한시를 한글로 번안해서 만든 시조로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언어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보면 송시열이 1688년 공개한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박세채가 송시열의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 안하여 송시열에 수정해달라고 보냈던 바로 그 「고산구곡가」로 짐작된다. 따라서 지금 전하는 「고산구곡가」는 이이의 원작이 아니라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안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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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후기 장동김문(壯洞金門)의 백운산(白雲山) 별서(別墅) 경영과 그 의미

저자 : 김세호 ( Kim Se-ho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7-18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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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安東金門은 丙子胡亂 당시 斥和를 주장한 金尙憲의 후손으로 서울 莊義洞 일대에 세거하여 壯洞金氏라 일컬어진다. 이들은 肅宗 대 換局政治에서 요직을 도맡았고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은거를 단행하며 별서를 경영했다. 그중에서도 金壽恒이 送老菴을 경영한 永平 白雲山 別墅는 단연 그 의미가 지대하다. 己巳換局이 일어나 김수항이 사사되자 그의 아들들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은거를 이어나갔고 이후 金昌協은 이곳에 農巖을 경영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백운산에 은거하여 살았던 삶과 그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면모는 조명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백운산 별서의 경영과정을 돌아보고 그 위치를 비정하였으며 이곳이 지닌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壯洞金門의 백운산 별서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일대에 자리했다. 김수항의 송로암은 지금의 동화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김창협의 농암수옥은 장암5리마을회관으로, 金昌業의 歇菴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성장로1289번길 43-19로 비정된다. 이곳은 顯祖 김상헌의 영향이 감지되는 곳으로 일가 문인들이 경영한 은거의 별서 가운데 요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은거의 지향을 표방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김창협의 위상으로 인해 후대 문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 특징이 나타난다. 백운산 별서는 조선 후기 장동김문을 대표하는 별서이자 당대 은거의 상징적인 별서로 역사에 회자되는 공간이다. 향후 관련 학계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백운산 별서의 실체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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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유록(四遊錄)」을 통해 본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의 학적 지향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7-26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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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강필효의 학문과 문학을 규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은선생유고』에 수록된 「四遊錄」을 살펴보았다. 「사유록」은 산수 유람을 넘어서 강필효의 생애와 교유, 학문ㆍ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강필효는 「사유록」을 저술하여, 유람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再構했다.
강필효는 유람을 강학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강필효의 유람록 가운데서도 유람과 강학이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유록」이다. 「사유록」을 살펴보면, 자연 경관에 대한 흥취보다는 강필효가 주변 인물들과 학문을 토론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강필효는 평생의 유람 중에서 자신의 학문ㆍ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섯 번의 유람을 선택적으로 기술하여, 「사유록」에서 학적 지향을 드러냈다.
「사유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론계 학맥을 현양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강필효는 스스로 소론의 嫡傳으로 자부하여 자신의 학맥이야말로 정주학을 올바로 계승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정자와 주자의 고사를 차용하여 소론계 학맥의 사승 관계를 宋代 性理學의 전수 과정에 빗대었다. 「사유록」 상ㆍ하편은 강필효가 윤광소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은 내용으로 시작하여, 영남에서 소론계 학인의 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사유록」 전편은 소론계 적전으로서의 학문적 계승 의식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 평생의 유람 여정을 재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간취할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포용하려는 학문 태도이다. 이러한 면모는 특히 『심경』을 강론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사유록」에 채록된 윤광소의 언급을 보면, 윤광소는 당파에 따라 어느 한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필효도 이러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아, 이이와 이황의 학설이 모두 주자학에 근본을 둔 것이므로 병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강필효의 다른 저술을 살펴보면, 강필효가 양자를 동등하게 긍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필효는 이기심성론에서 이이의 입장을 지지하되, 이황의 설도 유연하게 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필효의 학문은 소론에 본원을 두고 있으면서, 유연한 태도로 영남 남인의 학풍도 포용하고자 하였다.
강필효는 영남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지역 문인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이어가며 소론계 학풍을 전파했다. 다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사유록」을 보면, 강필효는 주로 성리학의 주요 명제는 윤광소, 성근묵 등 소론계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영남 남인들과 유람을 함께 했으나, 그들과의 심도 있는 강론은 「사유록」에 수록되지 않았다. 강필효가 영남 남인들과 학문적으로 민감한 쟁점을 전면적으로 논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후고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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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저자 : 손혜리 ( Son Hye-r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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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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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죽어야 사는 여자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 제문 연구-

저자 : 김수진 ( Kim Su-ji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7-32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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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의 명성은 남성의 증언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으므로 여성을 향해 남성은 話者로서 절대적 특권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발화와 증언을 통해 결국 도달한 곳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사대부 작가 자신에 대해서이다. 본고는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에 대한 제문을 대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여성을 보는 시각을 주요 쟁점으로 해서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과 변별점을 진단하였다.
본고의 대비적 고찰은 다음 두 개의 복선 궤도를 오가며 전개되었다. 첫 번째 경로는 남성 사대부 작가와 글 속 대상 여성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작가의 증언을 고구해보면, 이인상의 아내 장씨와 김종수의 며느리 홍씨는 매우 다른 성격과 얼굴을 지닌 여성이다. '知己'와 '烈女'라는 이 양극의 여성상은 그녀들의 자화상이 아니라 남성 작가의 일련의 해석이 가해진 초상이다. 이에 그녀들의 모습에서 작가 자신의 초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두 번째 경로는 이인상과 김종수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이인상과 김종수는 각각 丹壺 그룹의 핵심 멤버와 후속 세대로서 18세기라는 동일한 시기를 살다간 남성 사대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추구한 생의 지향과 물리적 존재 여건에 따라 주변 여성의 삶을 수용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대단히 상이하다는 점을 논구하였다.
여성에 대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갔을 때 그간 모호하게 파악되던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이 구체적으로 포착되고, 그들 간의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유표하게 노정되며, 그들을 둘러싼 생활 환경과 시대의 흔적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남성의 여성 인식은 그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주요한 길임을 이인상과 김종수의 글은 예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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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집 휘보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7-32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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