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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조선 후기 장동김문(壯洞金門)의 백운산(白雲山) 별서(別墅) 경영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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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장동김문(壯洞金門)의 백운산(白雲山) 별서(別墅) 경영과 그 의미

Management and Meaning of Jangdong Kimmun(壯洞金門) Baegunsan(白雲山) viila in the late Joseon Period

김세호 ( Kim Se-ho )
  • : 한국한문학회
  • : 한국한문학연구 8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157-185(29pages)
한국한문학연구

DOI


목차

1. 머리말
2. 백운산 별서의 경영과정
3. 문헌기록을 통한 위치비정
4. 백운산 별서의 의미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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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安東金門은 丙子胡亂 당시 斥和를 주장한 金尙憲의 후손으로 서울 莊義洞 일대에 세거하여 壯洞金氏라 일컬어진다. 이들은 肅宗 대 換局政治에서 요직을 도맡았고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은거를 단행하며 별서를 경영했다. 그중에서도 金壽恒이 送老菴을 경영한 永平 白雲山 別墅는 단연 그 의미가 지대하다. 己巳換局이 일어나 김수항이 사사되자 그의 아들들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은거를 이어나갔고 이후 金昌協은 이곳에 農巖을 경영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백운산에 은거하여 살았던 삶과 그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면모는 조명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백운산 별서의 경영과정을 돌아보고 그 위치를 비정하였으며 이곳이 지닌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壯洞金門의 백운산 별서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일대에 자리했다. 김수항의 송로암은 지금의 동화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김창협의 농암수옥은 장암5리마을회관으로, 金昌業의 歇菴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성장로1289번길 43-19로 비정된다. 이곳은 顯祖 김상헌의 영향이 감지되는 곳으로 일가 문인들이 경영한 은거의 별서 가운데 요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은거의 지향을 표방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김창협의 위상으로 인해 후대 문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 특징이 나타난다. 백운산 별서는 조선 후기 장동김문을 대표하는 별서이자 당대 은거의 상징적인 별서로 역사에 회자되는 공간이다. 향후 관련 학계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백운산 별서의 실체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Andong Kimmun(安東金門)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 descendant of Kim Sang-Heon(金尙憲), who claimed rejection of the peace during the Manchu war of 1636. They were called Jangdong Kimssi(壯洞金氏) as they settled down in Jangui-dong(莊義洞), Seoul. They held important posts in the politics of King Sukjong, and lived a secluded life and built Byeolseo(別墅) in line with their political ups and downs. Above all, Baegunsan(白雲山) Byeolseo in Yeongpyeong(永平) where Kim Su-Hang built Songroam(送老菴) has more significant meaning. When Kim Su-Hang died in 1689(己巳換局), his sons continued to live there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their father, and Kim Chang-Hyeop(金昌協) managed Nongam (農巖) there and left his name behind in history. Although it needs to understand Byeolseo to figure out the secluded life in Baegunsan and their literature, specific aspects of Byeolseo still have not been looked into.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management process and the location of Baegunsan Byeolseo to draw its meaning.
Baegunsan Byeolseo of Jangdong Kimmun(壯洞金門) was located in Jangam-ri, Idong-myeon, Pocheon-si, Gyeonggi-do. Songroam of Kim, Su-Hang is where the current Donghwasa(東和寺) is, and it is estimated that Nongam Suok of Kim, Chang-Hyeop is a village hall in Jangam 5-ri, and Heolam(歇菴) of Kim, Chang-Eub is 43-19, Seongjang-ro 1289, Idongmyeon, Pocheon-si, Gyeonggi-do. This is the place where was influenced by Kim Sang-Heon, and it can be seen that it was located in a key point among Byeolseo for secluded life managed by the literati family. In addition, socially, it was recognized as a place that advocated a secluded life in political struggle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 was featured that the later literati continued to visit due to the status of Kim Chang-Hyeop. Baegunsan Byeolseo is a space that is kept told in history as a representative Byeolseo of Jangdong Kimmu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also a symbolic Byeolseo of a secluded life of the time. It is hoped that the reality of Baegunsan Byeolseo will be revived through the attention and research of related academia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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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8-128x
  • : 2733-491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6-2021
  • :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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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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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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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조선 서울 문단의 사문학(詞文學) 창작 경향

저자 : 김영미 ( Kim Young-m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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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사 창작은 문인들의 문예 그룹인 詩社를 중심으로 동인간의 교유의 수단과 집단 창작의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사창작이 활발하게 나타나면서 그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詞調가 등장했으니, 이는 <巫山一段雲>사 창작을 위주로 한 고려ㆍ조선 전기의 사 창작에 대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의 서울은 지리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문인 사대부들이 거주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교유한 곳으로, 동서남북의 각 지역을 중심으로 시사가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시사인 北社의 趙冕鎬와 金允植, 南社의 姜瑋, 李裕元은 다양한 사조를 활용하여 다수의 사를 창작하면서 시 창작뿐만 아니라 詞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각종 詞選集과 詞譜의 유입은 이들이 다양한 사패를 활용하고 다수의 사를 창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사를 이끌어간 조면호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사를 창작하고 새로운 곡을 만드는 등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던 문인이었으며, 후배 동인인 김윤식은 모두 새로운 사조를 활용하여 사를 지었고, 고려ㆍ조선사에서는 많지 않은 詠物詞를 창작하기도 했다. 시사 동인간의 창작에 있어서 '사'는 교제와 교유의 수단이면서 문학유희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북사의 조면호가 동료 문인과의 창화와 증답사를 통해 교유했다면, 남사의 강위는 기록문학으로서 사를 활용하고 分韻詞 창작을 통해 집단 창작의 형식을 보여주었다.


In the 19th century, Joseon's creative works were expanded to the way that the poet's club a literary group of scholar interacted with each other and created collectively. In particular, many works have been created around a particular area, and various rhythm of Ci that had not been used so far appeared.
This can be said to be a major change in the creation of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which focused on the creation of < Wushanyiduanyun (巫山一段雲) > Ci poetry.
In the 19th century, during the Joseon Dynasty, Buksa(北社) and Namsa(南社) led the literary circles of the time. Jo Myeon-Ho, Kim Yoon- Sik, Gang Wi, Lee You-Won, as they are the representative person who created many works.
Jo Myeon-Ho and Kim Yoon-Sik both created works that were not very common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Jo Myeonho made new attempts at creation by utilizing various tunes.
In the creation of current affairs drivers, Ci Poems are a means of companionship and exchange. And it serves as a literary game.
Jo Myeon-Ho who belonged to Buksa, wrote Ci poems as a present to poet's culb friends, they exchanged Ci poems with each other. Gang Wi who belonged to Namsa, wrote a Ci poems by dividing rhyme with his friend of poet's club. In particular, his works feature documentary literature, which shows the time of the work, the background of the work, and the figures of the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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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세기 한강(漢江) 시회(詩會)의 일면 -마포 녹범각(綠帆閣) 모임과 『녹범시화(綠帆詩話)』-

저자 : 김보성 ( Kim Bo-s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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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일본인의 시집에 마포구 일대 한강은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인이나 친일 경향의 개화파를 떠올리는 장소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일대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대부 문인들의 문화공간이었다. '대군'의 누정을 비롯하여 당대 '권세가'나 이름난 '문장가'의 별서가 마포구 일대 강변에 즐비하였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한강 유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예부터 공인된 명소인 마포구 일대 한강에서 무수한 작품이 지어졌다. 한시로 국한하여 보아도 이 일대를 들러 지은 시가 부지기수이다. 이곳에 일정 기간 머물며 지은 시들을 책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崔岦의 『麻浦錄』, 李敏求의 『西湖錄』, 李志傑의 『西湖錄』이 대표적이다. 세 시집이 보여주듯, 16∼17세기 마포구 일대 한강을 기점으로 한 아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주지가 비슷한 이들이 시사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수창하다가 특별한 날에 대대적으로 회동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19세기 중반 이 일대에 거주하며 당대 명사들을 한자리에 모은 문인은 錦舲 朴永輔(1808∼1872)이다. 그가 초기에 지은 시 가운데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는 『西泠霞錦集』과 『西泠小艸』에는 마포구 일대의 시적 교류 흔적이 빼곡하다. 박영보는 1830년 가을에 興坊의 거처에서 마포 서강가의 綠帆閣(江意樓)으로 옮긴 후 동인들과 꾸준히 아회를 열었다. 이른바 '녹범각 시회'는 시구마다 중국 문사의 일화를 투영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시회에서 인용된 중국 문인만 보더라도 신위가 박영보에게 '蘇軾을 통해 杜甫로 입문'하였다고 평론한 까닭이 수긍된다.
박영보는 녹범각을 기점으로 『서령하금집』과 『서령소초』라는 시집뿐만 아니라 『綠帆詩話』라는 비평집도 편찬하였다. 『녹범시화』는 한강 일대 아회 중에서 녹범각 시회를 변별하게 하는 성과이다. 『녹범시화』의 시적 흥취ㆍ이론ㆍ소재와 관련된 문장들은 대체로 송나라 문헌을 참고하였다. 『녹범시화』에 송나라 서적이 주로 활용된 양상은 녹범각시회의 성격과 긴밀히 연결된다. 녹범각 시회와 연관 지어 『녹범시화』의 실체를 검토하는 한편, 박영보가 마포에서 오갔던 申緯의 蓉涇(蓉湖) 거처, 李薘의 濠想觀, 李明五의 古梅樹屋과 李晩用의 東樊書齋를 녹범각과 연결된 문화공간으로 상정하고 여기에서 창작된 시의 경향도 참조한다.


In a collection of Japanese poetry between the late 19th and the early 20th centuries, the Han River area near Mapo(麻浦) was a place that reminded powerful Japanese living in Korea or pro-Japanese enlightenment groups in Korea. However, before the mid-19th century, this place was a cultural space for the nobles(士大夫). There were many vacation homes of royal families, powerful people of the time, and famous writers. Also, foreign envoys used to tour around that Han River area.
Many writings were born in the Han River area near Mapo-gu which had been a famous place for a long time. Just for poetry, there were many poems written in this area. In some cases, the poems people wrote while staying in that area were compiled into a book. For example, Maporok(麻浦 錄) by Choirip(崔岦), Seohorok(西湖錄) by Lee Minkoo(李敏求), and Seohorok (西湖錄) by Lee Jigeol(李志傑) are representative. These three collections of poetry tell us that the poetry group formed in the Han River area near Mapo-gu betwee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displays a pattern that people with similar residences formed a group to write poetry periodically, and then on some special occasions, the majority of the people gathered together.
In the mid 19th century, Park Youngbo (朴永輔, 1808-1872) who was living in Mapo-gu gathered the famous people of the time. Among his early books, the relatively important collections of poetry, Seoryeonghageumjip (西泠霞錦集) and Seoryeongsocho(西泠小艸), reveal the fact that he actively exchanged poetry in the Mapo-gu area. After moving from Heungbang(興 坊) to Nokbeomgak(綠帆閣)-also known as Gangyilu(江意樓)-in Mapo's Seogang in the fall of 1830, Park Youngbo regularly held poetry meetings with his members. The so-called 'Nokbeomgak Sihoe(詩會)' tends to use anecdotes of Chinese writers for each passage. Even if we analyze only the Chinese writers mentioned in these meetings, it is understandable why Xin Yu(申緯) evaluated "Park Youngbo passed SuShi(蘇軾) and approached Dufu(杜甫)."
Park Youngbo wrote a book of criticism called Nokbeomsihwa(綠帆詩話) in addition to the collections of poems called Seoryeonghageumjip and Seoryeongsocho which based on Nokbeomgak. The Nokbeomsihwa is an achievement that makes the Nokbeomgak group stand out among the Han River gatherings. Most of the contents related to the enjoyment of poetry, the theory of poetry, and the subject matter of the poem in Nokbeomsihwa refer to the Song Dynasty(宋朝) books. The fact that Park Youngbo quoted a lot of Song dynasty books when writing the Nokbeomsihwa is related to the nature of the Nokbeomgak group. Yonggyeong(蓉涇)-also known as Yongho(蓉湖)-house of Xin Wei(申緯), Ho Sanggwan(濠想觀) of Lee Dal(李 薘), Gomaesuok(古梅樹屋) of Lee Myeongoh(李明五), and Dongbeonseojae (東樊書齋) by Lee Manyong(李晩用), where Park Youngbo came from Mapo are regarded as a cultural space connected to Nokbeomgak. So I'll also analyze the trends of poetry written in these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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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문학의 지방지적(地方誌的) 성격 -지방관 재임기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장진영 ( Jang Jin-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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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 있어 19세기 중반기는 17∼18세기에 이룩된 성취에 가려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새로운 문인의 발굴과 소개, 근대 문학과의 연결과 접속 가능성 모색 등 문학 동향을 폭넓게 이해하여, 이 시기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매력과 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海藏 申錫愚(1805∼1865)는 이러한 연구사적 흐름을 고려할 때 19세기 중반의 문학 실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데 유의미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문학관의 대략이나 대표 저작인 『入燕記』에 대한 몇 편의 연구 성과만이 제출되어 있으며, 다루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北學'이나 '實學'의 관점에서만 주로 논의되었다. 물론 신석우의 문학에 있어 이러한 작품이나 속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19세기 문단의 중심에 서서 평생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그의 문학 세계를 몇 가지 단어나 개념만으로 규정짓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본고는 신석우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의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 있는 '地方誌的 성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그는 약 30여 년 동안 이어진 관직 생활 속에서 여러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시문이 그의 작품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당대 한층 고조되고 있던 지리ㆍ풍속ㆍ역사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자신이 보고 들은 지역에서의 경험을 다양한 문학적 수단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석우 문학에서 보이는 지방지적 성격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의 주요한 문학적 특질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 됨은 물론, 19세기의 선명한 문학적 흐름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도 유의미한 참조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In Chinese literature, the mid-19th century did not receive sufficient light due to the achievements achieve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However, in recent years, it has been widely understood, such as the discovery and introduction of new literary men, and connection with modern literature. Efforts are being made to reveal the literary charm and status of the company.
Shin Seok-woo(申錫愚) is a significant figure in elucidating the reality of literature in the mid-19th century in view of this historical flow of research. However, for his literature, only a few research results on the representative work Ip-yeon-gi(入燕記), and even if it was dealt with, it was mainly discussed only from the perspective of 'Bukhak(北學)' or 'Silhak(實學)'. Of course, these works and attributes are an important part that cannot be ignored in Shin Seok-woo's literature, but there are many difficult parts to define his literary world, which was active throughout his life at the center of the 19th century literary arts, with only a few words or concepts.
This paper attempts to focus on the local record that is deeply embedded in his work as a process to comprehensively investigate the literary world of Shin Seok-woo. He served as a local government office several times during his life as a government office for about 30 years, and the poems built at this time not only occupied a high proportion of his works, but he reported it in conjunction with his interest in geography, customs, and history, which was growing higher at the time. This is because they are expressing their local experiences through various literary means. Therefore, the work of confirming the local intellectual character seen in Shin Seok-woo's literature not only becomes the process of discovering his major literary characteristics, but also provides a meaningful reference point for confirming the clear literary flow of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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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작자 문제

저자 : 신향림 ( Shin Hyang-ri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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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高山九曲歌」 관련 기록을 망라하여 살펴서 李珥가 「고산구곡가」를 창작하고 향유한 사실을 고증하고, 현존 「고산구곡가」가 이이가 창작한 원작이 아님을 논증한 것이다.
이이는 1580년 황해도 남강 가에서 아우를 전별하면서 지은 시에서 “해주의 소리꾼 碧桃가 연회 자리에서 「고산구곡가」를 가창하였다.”라고 했다. 이이와 친밀하게 교유했던 李海壽와 成渾은 1593년 해주 석담을 방문하여 시를 화창하면서 “석담은 「고산구곡가」에서 노래한 그대로이지만, 이제 더는 「고산구곡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이 시들을 통해 이이가 1580년 이전에 실제로 「고산구곡가」를 창작하였고, 1580년 무렵 해주의 소리꾼들이 「고산구곡가」를 가창하고 있었으며, 이이가 생전에 지기들과 이 노래를 향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宋時烈은 젊은 날 스승 金集의 명을 받아 이이의 서녀인 김집의 측실이 소장하고 있던 이이의 한글 원고들을 한역하였다. 이 한역한 원고 가운데 「고산구곡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朴世采는 『栗谷先生外集』을 간행하면서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수록하고자 했다. 「고산구곡가」 원작은 찾지 못하고 송시열의 한역시를 입수하게 된 박세채는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수록하기 위해 1681년 송시열의 한역시를 직접 한글로 번안하여 「고산구곡가」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복원한 「고산구곡가」를 한역한 당사자인 송시열에게 보내어 수정을 부탁하였다.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 역시를 다시 한글로 번안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1681년 무렵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이미 일실되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송시열은 1688년 자신의 집에 옛날부터 이이의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고산구곡가」를 金壽興 형제에게 공개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공개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한시를 한글로 번안해서 만든 시조로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언어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보면 송시열이 1688년 공개한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박세채가 송시열의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 안하여 송시열에 수정해달라고 보냈던 바로 그 「고산구곡가」로 짐작된다. 따라서 지금 전하는 「고산구곡가」는 이이의 원작이 아니라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안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all possible records about Gosangugokga and investigate whether it was really written by Lee Yi and if the Hangul version released and passed down by Song Si-yeol was Lee's original script.
The discussions of the study are summarized as follows: Lee Yi wrote a poem by the Nam River in Hwanghae Province, and Byeokdo, a singer from Haeju, sang a new song called Gosangugokga in 1580. These records indicate that Gosangugokga was created before 1580 and sung by singers of Haeju as a new song by 1580. As a young man, Song Si-yeol was given an order by his teacher Kim Jip and translated Lee's Hangul scripts kept by Kim Jip's mistress, who was an illegitimate daughter of Lee, into Chinese. One of these works must have been Gosangugokga. Before publishing his Yulgokseonsaengoijip, Park Se-chae wanted to include his Gosangugokga only to fail the original script. He ended up getting its translation into Chinese by Song. Determined to include Lee's Gosangugokga as close to its original script as possible, Park translated its Chinese version of Song into Hangul himself in 1681 and restored Lee's Gosangugokga in Hangul. He sent this to Song and had it revised to be the same as the original script. Park had to translate the Chinese version of Gosangugokga by Song into Hangul again, which suggests that the original Hangul version was no longer found in the world already by 1681. Maintaining that he had kept Lee's Hangul script of Gosangugokga from the beginning, he released it to Kim Su-heung and his brother in 1688. The Hangul version of Gosangugokga released by Song and passed down so far has several features that make it seem like a Sijo translated from a Chinese version into Hangul. Given these features, it is estimated that Song's version of Gosangugokga released in 1688 is Park's translation of Song's Chinese translation into Hangul that he sent Song for revision.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the remaining Gosangugokga is not Lee's original script but Park's translation of Song's Chinese version into Han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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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후기 장동김문(壯洞金門)의 백운산(白雲山) 별서(別墅) 경영과 그 의미

저자 : 김세호 ( Kim Se-ho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7-18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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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安東金門은 丙子胡亂 당시 斥和를 주장한 金尙憲의 후손으로 서울 莊義洞 일대에 세거하여 壯洞金氏라 일컬어진다. 이들은 肅宗 대 換局政治에서 요직을 도맡았고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은거를 단행하며 별서를 경영했다. 그중에서도 金壽恒이 送老菴을 경영한 永平 白雲山 別墅는 단연 그 의미가 지대하다. 己巳換局이 일어나 김수항이 사사되자 그의 아들들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은거를 이어나갔고 이후 金昌協은 이곳에 農巖을 경영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백운산에 은거하여 살았던 삶과 그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면모는 조명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백운산 별서의 경영과정을 돌아보고 그 위치를 비정하였으며 이곳이 지닌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壯洞金門의 백운산 별서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일대에 자리했다. 김수항의 송로암은 지금의 동화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김창협의 농암수옥은 장암5리마을회관으로, 金昌業의 歇菴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성장로1289번길 43-19로 비정된다. 이곳은 顯祖 김상헌의 영향이 감지되는 곳으로 일가 문인들이 경영한 은거의 별서 가운데 요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은거의 지향을 표방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김창협의 위상으로 인해 후대 문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 특징이 나타난다. 백운산 별서는 조선 후기 장동김문을 대표하는 별서이자 당대 은거의 상징적인 별서로 역사에 회자되는 공간이다. 향후 관련 학계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백운산 별서의 실체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Andong Kimmun(安東金門)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 descendant of Kim Sang-Heon(金尙憲), who claimed rejection of the peace during the Manchu war of 1636. They were called Jangdong Kimssi(壯洞金氏) as they settled down in Jangui-dong(莊義洞), Seoul. They held important posts in the politics of King Sukjong, and lived a secluded life and built Byeolseo(別墅) in line with their political ups and downs. Above all, Baegunsan(白雲山) Byeolseo in Yeongpyeong(永平) where Kim Su-Hang built Songroam(送老菴) has more significant meaning. When Kim Su-Hang died in 1689(己巳換局), his sons continued to live there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their father, and Kim Chang-Hyeop(金昌協) managed Nongam (農巖) there and left his name behind in history. Although it needs to understand Byeolseo to figure out the secluded life in Baegunsan and their literature, specific aspects of Byeolseo still have not been looked into.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management process and the location of Baegunsan Byeolseo to draw its meaning.
Baegunsan Byeolseo of Jangdong Kimmun(壯洞金門) was located in Jangam-ri, Idong-myeon, Pocheon-si, Gyeonggi-do. Songroam of Kim, Su-Hang is where the current Donghwasa(東和寺) is, and it is estimated that Nongam Suok of Kim, Chang-Hyeop is a village hall in Jangam 5-ri, and Heolam(歇菴) of Kim, Chang-Eub is 43-19, Seongjang-ro 1289, Idongmyeon, Pocheon-si, Gyeonggi-do. This is the place where was influenced by Kim Sang-Heon, and it can be seen that it was located in a key point among Byeolseo for secluded life managed by the literati family. In addition, socially, it was recognized as a place that advocated a secluded life in political struggle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 was featured that the later literati continued to visit due to the status of Kim Chang-Hyeop. Baegunsan Byeolseo is a space that is kept told in history as a representative Byeolseo of Jangdong Kimmu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also a symbolic Byeolseo of a secluded life of the time. It is hoped that the reality of Baegunsan Byeolseo will be revived through the attention and research of related academia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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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유록(四遊錄)」을 통해 본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의 학적 지향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7-26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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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강필효의 학문과 문학을 규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은선생유고』에 수록된 「四遊錄」을 살펴보았다. 「사유록」은 산수 유람을 넘어서 강필효의 생애와 교유, 학문ㆍ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강필효는 「사유록」을 저술하여, 유람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再構했다.
강필효는 유람을 강학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강필효의 유람록 가운데서도 유람과 강학이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유록」이다. 「사유록」을 살펴보면, 자연 경관에 대한 흥취보다는 강필효가 주변 인물들과 학문을 토론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강필효는 평생의 유람 중에서 자신의 학문ㆍ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섯 번의 유람을 선택적으로 기술하여, 「사유록」에서 학적 지향을 드러냈다.
「사유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론계 학맥을 현양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강필효는 스스로 소론의 嫡傳으로 자부하여 자신의 학맥이야말로 정주학을 올바로 계승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정자와 주자의 고사를 차용하여 소론계 학맥의 사승 관계를 宋代 性理學의 전수 과정에 빗대었다. 「사유록」 상ㆍ하편은 강필효가 윤광소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은 내용으로 시작하여, 영남에서 소론계 학인의 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사유록」 전편은 소론계 적전으로서의 학문적 계승 의식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 평생의 유람 여정을 재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간취할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포용하려는 학문 태도이다. 이러한 면모는 특히 『심경』을 강론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사유록」에 채록된 윤광소의 언급을 보면, 윤광소는 당파에 따라 어느 한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필효도 이러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아, 이이와 이황의 학설이 모두 주자학에 근본을 둔 것이므로 병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강필효의 다른 저술을 살펴보면, 강필효가 양자를 동등하게 긍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필효는 이기심성론에서 이이의 입장을 지지하되, 이황의 설도 유연하게 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필효의 학문은 소론에 본원을 두고 있으면서, 유연한 태도로 영남 남인의 학풍도 포용하고자 하였다.
강필효는 영남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지역 문인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이어가며 소론계 학풍을 전파했다. 다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사유록」을 보면, 강필효는 주로 성리학의 주요 명제는 윤광소, 성근묵 등 소론계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영남 남인들과 유람을 함께 했으나, 그들과의 심도 있는 강론은 「사유록」에 수록되지 않았다. 강필효가 영남 남인들과 학문적으로 민감한 쟁점을 전면적으로 논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후고를 기약한다.


This article analyzed "Sayurok" to reveal Kang Pil-hyo's academic characteristics. "Sanyurok" provides a glimpse of Kang Pil-hyo's life, fellowship, learning, and ideas as well as his travel. Kang Pil-hyo regarded Confucianism as an extension of academic research.
Kang Pil-hyo called his visit to No-sung at the age of 22 "the first travel," and in fact, the record at this time is more of a "lecture book" than a "travel book." For Kang Pil-hyo, travel and academic research were inextricably linked. Therefore, Kang Pil-hyo often read the Bible or lectured on learning with those who accompanied him on a cruise during his later tour of the landscape. "Sayurok" is a record of Kang Pil-hyo's academic journey.
There are two main academic orientations of Kang Pil-hyo in "Sayurok". First, it is the ritual of succession of Soron Neo-Confucianism. Kang Pil-hyo believed that the academic style from Seong Hon and Yun Seon-geo to Yoon Jeung and Yoon Gwang-so inherited Neo-Confucianism properly. Thus, the meeting between himself and Yoon Kwang-so was portrayed in "Sayurok" in comparis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Neo-Confucian scholars of Songdae.
Second, Kang Pil-hyo summoned a Soron scholar at an academic holy site in Yeongnam, clearly revealing his academic background in Soron. The writings of Yeongnam writers, who usually record tours of Cheongnyang Mountain and Oksan, make up the most important points about Yi Hwang and Yi Eon-jeok. However, Kang Pil-hyo not only mentioned Yi Hwang and Yi Eon-jeok, but also mentioned the activities and poems of scholars of the Soron world, such as Seong Hon, Yun Seon-geo, Yoon Jeung, and Yoon Kwang-so. Through this, Kang Pil-hyo repeatedly revealed that he succeeded in the Soron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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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저자 : 손혜리 ( Son Hye-r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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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This article prospects one of representative sub-branch family in Late Choson, Changnyong Seong Family's Chambong-gong Clan, especially about the succession of cognition and family scholarship in diachronic view. As discussion focus on personnel with experience of successful candidate of civil exam and participation in diplomatic mission to China or Japan, spotlight is on the 6 successive generation of the family, Seong Huryong - Seong Wan - Seong Mongryang - Seong Daejung - Seong Ujeung - Seong Inho.
Research on records of this members implies following tendencies. First, they were recognized as highly literate from scholars of their era. Though their literacy did not advanced to transition of perception, foreign experience led them to widen their knowledge. Second, each member have wellacquainted the writings of their ancestors on diplomatic mission. Thus they were able to capture new experience comparatively fast and leave the writings themselves. Third, because of personal political inclination and family background, they had firm and clear mindset of 'Loyalty to Ming'. This tendency existed consistent after their diplomatic mission. Fourth, they had huge interest about foreign people and studies, such as Giulio Aleni, Matteo Ricci, Diplomats from RyukyuㆍAnnamㆍSiam, Jikbangoegi, Dongjamun. Fifth, they showed active curiosity upon foreign products and cultures like well bucket, sweet potato, waterwheel, which may help welfare of Choson, and emphasized to import those culture.
To put it short, it is found that quicker access to newest academic information and succession of the information within the family tree have allowed Chambong-gong Clan of Changnyong Seong Family firmly establish themselves as the prestigious sub-branch family of Late Cho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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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죽어야 사는 여자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 제문 연구-

저자 : 김수진 ( Kim Su-ji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7-32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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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의 명성은 남성의 증언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으므로 여성을 향해 남성은 話者로서 절대적 특권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발화와 증언을 통해 결국 도달한 곳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사대부 작가 자신에 대해서이다. 본고는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에 대한 제문을 대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여성을 보는 시각을 주요 쟁점으로 해서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과 변별점을 진단하였다.
본고의 대비적 고찰은 다음 두 개의 복선 궤도를 오가며 전개되었다. 첫 번째 경로는 남성 사대부 작가와 글 속 대상 여성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작가의 증언을 고구해보면, 이인상의 아내 장씨와 김종수의 며느리 홍씨는 매우 다른 성격과 얼굴을 지닌 여성이다. '知己'와 '烈女'라는 이 양극의 여성상은 그녀들의 자화상이 아니라 남성 작가의 일련의 해석이 가해진 초상이다. 이에 그녀들의 모습에서 작가 자신의 초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두 번째 경로는 이인상과 김종수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이인상과 김종수는 각각 丹壺 그룹의 핵심 멤버와 후속 세대로서 18세기라는 동일한 시기를 살다간 남성 사대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추구한 생의 지향과 물리적 존재 여건에 따라 주변 여성의 삶을 수용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대단히 상이하다는 점을 논구하였다.
여성에 대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갔을 때 그간 모호하게 파악되던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이 구체적으로 포착되고, 그들 간의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유표하게 노정되며, 그들을 둘러싼 생활 환경과 시대의 흔적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남성의 여성 인식은 그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주요한 길임을 이인상과 김종수의 글은 예증해주고 있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women's reputation could not be established without the testimony of men. In this regard, men held absolute power, being the very narrators of women's lives. However, what can be seen from these testimonies and word utterances do not throw light on the women, but on the aristocratic male writers themselves. This article seeks to comparatively analyze the funeral odes written for women by Lee In-sang and Kim Jong-su, focusing on how the women were viewed by the two writers and observing the points of contact and separation between their ideas.
This paper develops this comparative analysis through alternating between two main thematic tracks. The first focuses on the connection between the aristocratic male writer and the woman who appears in their writing. Upon studying the two writers' testimonies, Lee In-sang's wife Jang-ssi and Kim Jong-su's daughter-in-law Hong-ssi come across as having very different personalities and outlooks. The contrasting personality types of “wise friend”(知己) and “chaste woman”(烈女) do not arise from self-portraits drawn by the women themselves, but from an image created of them through a series of interpretations drawn by the men. Through the portrayal of these women, it is rather the men's image of their own selves that come across to the reader. The second thematic track is the thread that connects Lee In-sang and Kim Jong-su. As aristocratic men in the eighteenth century, both were part of the literary group Danho(丹壺), where Lee was a central member whereas Kim was part of the later generation of the group. In spite of these similarities, the two men's ways of recalling and accepting the lives of the women around them, in accordance with their particular life choices and conditions of material existence, were observed as being quite opposed.
Through in-depth analysis of their writing about the two women, the points of contact between Lee In-sang and Kim Jong-su, which were not explored deeply in the past have been pointed out in all their specificity, the glaring contrasts between the two, their life, as well as the traces of the era they lived in, have all come into clear view. The writings of Lee In-sang and Kim Jong-su exemplify how central portrayals of women by men are in revealing the substantive truth of the writer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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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집 휘보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7-32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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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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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조선 서울 문단의 사문학(詞文學) 창작 경향

저자 : 김영미 ( Kim Young-m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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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사 창작은 문인들의 문예 그룹인 詩社를 중심으로 동인간의 교유의 수단과 집단 창작의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사창작이 활발하게 나타나면서 그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詞調가 등장했으니, 이는 <巫山一段雲>사 창작을 위주로 한 고려ㆍ조선 전기의 사 창작에 대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의 서울은 지리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문인 사대부들이 거주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교유한 곳으로, 동서남북의 각 지역을 중심으로 시사가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시사인 北社의 趙冕鎬와 金允植, 南社의 姜瑋, 李裕元은 다양한 사조를 활용하여 다수의 사를 창작하면서 시 창작뿐만 아니라 詞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각종 詞選集과 詞譜의 유입은 이들이 다양한 사패를 활용하고 다수의 사를 창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사를 이끌어간 조면호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사를 창작하고 새로운 곡을 만드는 등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던 문인이었으며, 후배 동인인 김윤식은 모두 새로운 사조를 활용하여 사를 지었고, 고려ㆍ조선사에서는 많지 않은 詠物詞를 창작하기도 했다. 시사 동인간의 창작에 있어서 '사'는 교제와 교유의 수단이면서 문학유희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북사의 조면호가 동료 문인과의 창화와 증답사를 통해 교유했다면, 남사의 강위는 기록문학으로서 사를 활용하고 分韻詞 창작을 통해 집단 창작의 형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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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세기 한강(漢江) 시회(詩會)의 일면 -마포 녹범각(綠帆閣) 모임과 『녹범시화(綠帆詩話)』-

저자 : 김보성 ( Kim Bo-s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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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일본인의 시집에 마포구 일대 한강은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인이나 친일 경향의 개화파를 떠올리는 장소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일대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대부 문인들의 문화공간이었다. '대군'의 누정을 비롯하여 당대 '권세가'나 이름난 '문장가'의 별서가 마포구 일대 강변에 즐비하였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한강 유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예부터 공인된 명소인 마포구 일대 한강에서 무수한 작품이 지어졌다. 한시로 국한하여 보아도 이 일대를 들러 지은 시가 부지기수이다. 이곳에 일정 기간 머물며 지은 시들을 책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崔岦의 『麻浦錄』, 李敏求의 『西湖錄』, 李志傑의 『西湖錄』이 대표적이다. 세 시집이 보여주듯, 16∼17세기 마포구 일대 한강을 기점으로 한 아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주지가 비슷한 이들이 시사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수창하다가 특별한 날에 대대적으로 회동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19세기 중반 이 일대에 거주하며 당대 명사들을 한자리에 모은 문인은 錦舲 朴永輔(1808∼1872)이다. 그가 초기에 지은 시 가운데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는 『西泠霞錦集』과 『西泠小艸』에는 마포구 일대의 시적 교류 흔적이 빼곡하다. 박영보는 1830년 가을에 興坊의 거처에서 마포 서강가의 綠帆閣(江意樓)으로 옮긴 후 동인들과 꾸준히 아회를 열었다. 이른바 '녹범각 시회'는 시구마다 중국 문사의 일화를 투영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시회에서 인용된 중국 문인만 보더라도 신위가 박영보에게 '蘇軾을 통해 杜甫로 입문'하였다고 평론한 까닭이 수긍된다.
박영보는 녹범각을 기점으로 『서령하금집』과 『서령소초』라는 시집뿐만 아니라 『綠帆詩話』라는 비평집도 편찬하였다. 『녹범시화』는 한강 일대 아회 중에서 녹범각 시회를 변별하게 하는 성과이다. 『녹범시화』의 시적 흥취ㆍ이론ㆍ소재와 관련된 문장들은 대체로 송나라 문헌을 참고하였다. 『녹범시화』에 송나라 서적이 주로 활용된 양상은 녹범각시회의 성격과 긴밀히 연결된다. 녹범각 시회와 연관 지어 『녹범시화』의 실체를 검토하는 한편, 박영보가 마포에서 오갔던 申緯의 蓉涇(蓉湖) 거처, 李薘의 濠想觀, 李明五의 古梅樹屋과 李晩用의 東樊書齋를 녹범각과 연결된 문화공간으로 상정하고 여기에서 창작된 시의 경향도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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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문학의 지방지적(地方誌的) 성격 -지방관 재임기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장진영 ( Jang Jin-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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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 있어 19세기 중반기는 17∼18세기에 이룩된 성취에 가려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새로운 문인의 발굴과 소개, 근대 문학과의 연결과 접속 가능성 모색 등 문학 동향을 폭넓게 이해하여, 이 시기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매력과 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海藏 申錫愚(1805∼1865)는 이러한 연구사적 흐름을 고려할 때 19세기 중반의 문학 실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데 유의미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문학관의 대략이나 대표 저작인 『入燕記』에 대한 몇 편의 연구 성과만이 제출되어 있으며, 다루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北學'이나 '實學'의 관점에서만 주로 논의되었다. 물론 신석우의 문학에 있어 이러한 작품이나 속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19세기 문단의 중심에 서서 평생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그의 문학 세계를 몇 가지 단어나 개념만으로 규정짓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본고는 신석우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의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 있는 '地方誌的 성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그는 약 30여 년 동안 이어진 관직 생활 속에서 여러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시문이 그의 작품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당대 한층 고조되고 있던 지리ㆍ풍속ㆍ역사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자신이 보고 들은 지역에서의 경험을 다양한 문학적 수단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석우 문학에서 보이는 지방지적 성격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의 주요한 문학적 특질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 됨은 물론, 19세기의 선명한 문학적 흐름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도 유의미한 참조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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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작자 문제

저자 : 신향림 ( Shin Hyang-ri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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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高山九曲歌」 관련 기록을 망라하여 살펴서 李珥가 「고산구곡가」를 창작하고 향유한 사실을 고증하고, 현존 「고산구곡가」가 이이가 창작한 원작이 아님을 논증한 것이다.
이이는 1580년 황해도 남강 가에서 아우를 전별하면서 지은 시에서 “해주의 소리꾼 碧桃가 연회 자리에서 「고산구곡가」를 가창하였다.”라고 했다. 이이와 친밀하게 교유했던 李海壽와 成渾은 1593년 해주 석담을 방문하여 시를 화창하면서 “석담은 「고산구곡가」에서 노래한 그대로이지만, 이제 더는 「고산구곡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이 시들을 통해 이이가 1580년 이전에 실제로 「고산구곡가」를 창작하였고, 1580년 무렵 해주의 소리꾼들이 「고산구곡가」를 가창하고 있었으며, 이이가 생전에 지기들과 이 노래를 향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宋時烈은 젊은 날 스승 金集의 명을 받아 이이의 서녀인 김집의 측실이 소장하고 있던 이이의 한글 원고들을 한역하였다. 이 한역한 원고 가운데 「고산구곡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朴世采는 『栗谷先生外集』을 간행하면서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수록하고자 했다. 「고산구곡가」 원작은 찾지 못하고 송시열의 한역시를 입수하게 된 박세채는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수록하기 위해 1681년 송시열의 한역시를 직접 한글로 번안하여 「고산구곡가」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복원한 「고산구곡가」를 한역한 당사자인 송시열에게 보내어 수정을 부탁하였다.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 역시를 다시 한글로 번안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1681년 무렵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이미 일실되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송시열은 1688년 자신의 집에 옛날부터 이이의 한글본 「고산구곡가」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고산구곡가」를 金壽興 형제에게 공개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공개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한시를 한글로 번안해서 만든 시조로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언어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보면 송시열이 1688년 공개한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박세채가 송시열의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 안하여 송시열에 수정해달라고 보냈던 바로 그 「고산구곡가」로 짐작된다. 따라서 지금 전하는 「고산구곡가」는 이이의 원작이 아니라 박세채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를 한글로 재번안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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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후기 장동김문(壯洞金門)의 백운산(白雲山) 별서(別墅) 경영과 그 의미

저자 : 김세호 ( Kim Se-ho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7-18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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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安東金門은 丙子胡亂 당시 斥和를 주장한 金尙憲의 후손으로 서울 莊義洞 일대에 세거하여 壯洞金氏라 일컬어진다. 이들은 肅宗 대 換局政治에서 요직을 도맡았고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은거를 단행하며 별서를 경영했다. 그중에서도 金壽恒이 送老菴을 경영한 永平 白雲山 別墅는 단연 그 의미가 지대하다. 己巳換局이 일어나 김수항이 사사되자 그의 아들들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은거를 이어나갔고 이후 金昌協은 이곳에 農巖을 경영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백운산에 은거하여 살았던 삶과 그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면모는 조명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백운산 별서의 경영과정을 돌아보고 그 위치를 비정하였으며 이곳이 지닌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壯洞金門의 백운산 별서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일대에 자리했다. 김수항의 송로암은 지금의 동화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김창협의 농암수옥은 장암5리마을회관으로, 金昌業의 歇菴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성장로1289번길 43-19로 비정된다. 이곳은 顯祖 김상헌의 영향이 감지되는 곳으로 일가 문인들이 경영한 은거의 별서 가운데 요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은거의 지향을 표방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김창협의 위상으로 인해 후대 문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 특징이 나타난다. 백운산 별서는 조선 후기 장동김문을 대표하는 별서이자 당대 은거의 상징적인 별서로 역사에 회자되는 공간이다. 향후 관련 학계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백운산 별서의 실체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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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유록(四遊錄)」을 통해 본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의 학적 지향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7-26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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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강필효의 학문과 문학을 규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은선생유고』에 수록된 「四遊錄」을 살펴보았다. 「사유록」은 산수 유람을 넘어서 강필효의 생애와 교유, 학문ㆍ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강필효는 「사유록」을 저술하여, 유람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再構했다.
강필효는 유람을 강학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강필효의 유람록 가운데서도 유람과 강학이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유록」이다. 「사유록」을 살펴보면, 자연 경관에 대한 흥취보다는 강필효가 주변 인물들과 학문을 토론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강필효는 평생의 유람 중에서 자신의 학문ㆍ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섯 번의 유람을 선택적으로 기술하여, 「사유록」에서 학적 지향을 드러냈다.
「사유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론계 학맥을 현양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강필효는 스스로 소론의 嫡傳으로 자부하여 자신의 학맥이야말로 정주학을 올바로 계승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정자와 주자의 고사를 차용하여 소론계 학맥의 사승 관계를 宋代 性理學의 전수 과정에 빗대었다. 「사유록」 상ㆍ하편은 강필효가 윤광소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은 내용으로 시작하여, 영남에서 소론계 학인의 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사유록」 전편은 소론계 적전으로서의 학문적 계승 의식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 평생의 유람 여정을 재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간취할 수 있는 강필효의 학적 지향은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포용하려는 학문 태도이다. 이러한 면모는 특히 『심경』을 강론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사유록」에 채록된 윤광소의 언급을 보면, 윤광소는 당파에 따라 어느 한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필효도 이러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아, 이이와 이황의 학설이 모두 주자학에 근본을 둔 것이므로 병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강필효의 다른 저술을 살펴보면, 강필효가 양자를 동등하게 긍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필효는 이기심성론에서 이이의 입장을 지지하되, 이황의 설도 유연하게 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필효의 학문은 소론에 본원을 두고 있으면서, 유연한 태도로 영남 남인의 학풍도 포용하고자 하였다.
강필효는 영남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지역 문인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이어가며 소론계 학풍을 전파했다. 다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사유록」을 보면, 강필효는 주로 성리학의 주요 명제는 윤광소, 성근묵 등 소론계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영남 남인들과 유람을 함께 했으나, 그들과의 심도 있는 강론은 「사유록」에 수록되지 않았다. 강필효가 영남 남인들과 학문적으로 민감한 쟁점을 전면적으로 논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후고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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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저자 : 손혜리 ( Son Hye-r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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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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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죽어야 사는 여자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 제문 연구-

저자 : 김수진 ( Kim Su-ji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7-32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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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의 명성은 남성의 증언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으므로 여성을 향해 남성은 話者로서 절대적 특권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발화와 증언을 통해 결국 도달한 곳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사대부 작가 자신에 대해서이다. 본고는 이인상과 김종수의 여성에 대한 제문을 대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여성을 보는 시각을 주요 쟁점으로 해서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과 변별점을 진단하였다.
본고의 대비적 고찰은 다음 두 개의 복선 궤도를 오가며 전개되었다. 첫 번째 경로는 남성 사대부 작가와 글 속 대상 여성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작가의 증언을 고구해보면, 이인상의 아내 장씨와 김종수의 며느리 홍씨는 매우 다른 성격과 얼굴을 지닌 여성이다. '知己'와 '烈女'라는 이 양극의 여성상은 그녀들의 자화상이 아니라 남성 작가의 일련의 해석이 가해진 초상이다. 이에 그녀들의 모습에서 작가 자신의 초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두 번째 경로는 이인상과 김종수 간을 오가는 노선이다. 이인상과 김종수는 각각 丹壺 그룹의 핵심 멤버와 후속 세대로서 18세기라는 동일한 시기를 살다간 남성 사대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추구한 생의 지향과 물리적 존재 여건에 따라 주변 여성의 삶을 수용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대단히 상이하다는 점을 논구하였다.
여성에 대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갔을 때 그간 모호하게 파악되던 이인상과 김종수 간의 접점이 구체적으로 포착되고, 그들 간의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유표하게 노정되며, 그들을 둘러싼 생활 환경과 시대의 흔적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남성의 여성 인식은 그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주요한 길임을 이인상과 김종수의 글은 예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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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집 휘보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7-32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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