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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의 내수외양(內修外攘)과 대일관계 변화

The Chosun Policies Regarding to the Dynasty's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in the King Sukjong's Reign

김태훈 ( Kim¸ Tae-hoon )
  • : 부경역사연구소
  • : 지역과 역사 4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205-239(35pages)
지역과 역사

DOI

10.19120/cy.2021.04.48.205


목차

머리말
Ⅰ. 17세기 대일관계의 흐름과 왜관 移轉 교섭
Ⅱ. 숙종대 대일정책 성과와 대일관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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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숙종대 대일정책 성과가 조선후기 한일관계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지만, 일본측이 가해오는 외교적 압박은 조선의 대일정책 혼선과 맞물려 교섭과정에서 원칙이 무시되다시피 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고착시켰다. 통틀어 3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왜관 이전 교섭 과정은 17세기 중반 대일정책·대일관계의 수세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17세기 후반기에 점차 대내외적 상황이 호전되고 국가적 재건을 달성하면서, 숙종대에는 대일관계도 점차 변화를 보이게 된다. 1673년에 결말을 보게 된 왜관이전 교섭은 수세적 대일관계의 산물이지만, 왜관 이전이 완료된 1678년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1678년에 무오약조와 1683년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대일외교에서 불합리한 관행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을 정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대내외적 여건들로 인해 대일정책·대일관계가 수세적 양상을 보였다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수를 달성해나가던 시점인 숙종 전반기의 대일관계는 무오약조와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확연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This thesis is a study examin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olicy in the King Sukjong's Reign toward Japan, in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fter the Imjin War, peace continues between Joseon and Japan. But the diplomatic pressure from the Japan, coupled with the confusion of Joseon’s policy toward Japan, fixed the unusual practice of neglecting principles in the process of bargaining. In total, the bargaining process for the transfer of Waegwan, which took place over 30 years, is an example of implicitly showing the defensive posture of Japanese policy and relations with Japan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However,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 gradually improved and national reconstruction was achieved in the late 17th century,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Japan gradually changed during the Sukjong's Reign. It was decided in 1673 to move Waegwan, and the decision was the result of defensive posture of Japanese policy. But after the transfer Waegwan in 1678, the situation was reversed.
The signing of the Treaty in the Muoh-Year(1678), and the Treaty in the Gyaehae-Year(1683) served as an opportunity to break through unreasonable practices in diplomacy with Japan and to apply diplomatic principles normally.
Until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due to internal and external conditions, the policy toward Japan and the relationship with Japan showed a defensive pattern. But the relationship with Japan in the Sukjong's Reign, a time when overcoming the crisis and achieving national reconstruction, showed a marked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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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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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9-6600
  • : 2733-4732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6-2021
  •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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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0호(2021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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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의 양산과 변진접도국

저자 : 선석열 ( Seon¸ Seok-yeo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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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한시기의 변한과 진한의 24개 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양산에 있었는가를 추정해 보았다. 그 위치가 비정된 소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 소국의 공간성과 방향성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삼한 소국명의 표기방식에는 음운적 음독뿐 아니라 음의적인 훈독을 병용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본 결과, 변진접도국의 위치는 양산에 비정되었다. 접도국이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을 의미하므로, 양산에 위치한 나라였다. 삼한시기의 양산지역은 4세기 이전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晋書』에 보이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중국 서진과 교섭하였으며, 독로국·접도국을 함께 교섭하였다.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4세기에 양산은 금관가야계 문화였다. 4세기에 이르러 접도국은 금관가야연맹에 참여하였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연맹이 와해되었고 접도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공격한 황산진 전투가 일어난 6세기 전후까지도 상당 기간 독자성은 유지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게 되어 지방의 지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63년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공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양산을 ①의례적인 공납의 대가로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유형에서 ②자치를 허용하면서 유력 세력을 재편하는 유형으로 통제가 강화되었다. 505년에 지증왕은 주군제를 시행하면서 양산지역도 지방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즉 접도국은 삽라군이 되었다.


The study is reviewing which of the 24 countries iin Byeonhan and Jinhan during the Samhan Period was located in Yangsan. The writer extracted its spatiality and directionality around the countries where the location was confirmed, and its notation included semantic as well as phonetic reading. As a result of applying these standards, Byeonjin Jeopdoguk was located in Yangsan. The name means the point where the sea and the river meet, so it was a country located in Yangsan.
The Yangsan area of the Samhan period was not surveyed on the ruins before the 4th century. Based on Jinseo, Jeopdoguk negotiated with West Jin along with Guyaguk and Dogroguk. According to archaeological research, Yangsan was a Geumgwan Gaya culture in the 4th century. By the 4th century, Jeopdoguk participated in the Geumgwan Gaya Confederation.
The League collapsed due to King Gwanggaeto's punishment, and the border country fell under Silla's influence. Silla maintained its independence for a considerable period of time until around the 6th century when the Battle of Hwangsanjin, which attacked Geumgwan Gaya, took place. At that time, Silla was not able to dominate the region because it was interfered with the internal affairs of Goguryeo. In 463, when the Japanese invaded Sapnyangseong Fortress, Silla strongly controlled mass production to prepare for it. In other words, from a type that allows complete autonomy in exchange for ceremonial contributions, to a type that allows autonomy while reorganizing influential forces. In 505, King Jijeung implemented the local system, and the Yangsan area was incorporated into the local governance system. Jeopdoguk became a Sapragun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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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야불교와 파사석탑

저자 : 조원영 ( Jo¸ One-yo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7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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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가야불교의 전래 시기와 전래된 불교의 성격, 그리고 허왕후가 가지고 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가야의 불교 전래와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작성되었다.
가야불교에 대한 자료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편적 내용뿐이며 그 외에는 대부분 김해지역에 전승되는 자료들에 한정된다. 그중에서 가야불교와 관련된 전승 자료를 살펴보면 대체로 가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가야인들에게 불교가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가야불교 전래 시기를 증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질지왕대 왕후사 창건을 통해 국가불교 또는 왕실불교로 보고 있다.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가야 불교는 남방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중국을 거쳐서 전래되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가야불교 전래와 관련 짓는 아유타국과 허왕후의 정체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허왕후와 그 일행이 모두 중국식 이름이라는 것과 중국식 관직명을 갖고 있다는 점, 가지고 온 물건도 '중국 점포의 여러 물건'으로 표현한 점 등에서 인도와 관련 짓기는 어려운 듯하다. 아마도 아유타국과 허왕후 관련 설화는 후대의 불교적 윤색을 거쳐 불교를 전해준 인도의 어느 지역,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증거로 알려진 파사석탑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있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살펴보면 수로왕대에는 가야에 창사·봉불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가락국 초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가야에 불교가 공인된 시점은 왕후사가 창건된 질지왕 2년(452) 전후이며,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그보다 좀 더 이른 백제와의 외교 교섭이 활발했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은 그 시기에 제작된 인도의 불탑 양식이 아니므로 인도에서 전래된 탑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탑 부재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많이 마멸되긴 했지만 다포형식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이 탑이 우리나라에 다포형식의 공포가 전해진 원 간섭기 전후에 조성된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examine the history of Gaya Buddhism, the nature of Buddhism that was introduced, and whether the Pasa Stone Stūpa, which was said to have been brought by Queen Heo, was related to Gaya's Buddhist tradition.
The data on Gaya Buddhism is only a piece of material handed down to the "Samguk Yusa" and is limited to most other materials handed down to the Gimhae region. Among them, if you look at the historical data related to Gaya Buddhism, it is difficult to prove the period of Gaya Buddhism as it reflects the generalization of Buddhism to Gaya people rather than the fact that Buddhism was introduced to Gaya.
As for the nature of Buddhism that was introduced to Gaya, it is regarded as national or royal Buddhism through the creation of the Royal Preceptor of the King Jiilji, the period when Gaya Buddhism was recognized. If the characteristics of Buddhism are national Buddhism, it is clear that Gaya Buddhism was not introduced from the south, but from China.
The identity of Ayuttha and Queen Heo, which are related to the tradition of Gaya Buddhism, cannot be asserted, but it seems difficult to build India in terms of the fact that Heo and her party both have Chinese names, Chinese government names, and the items they brought. Perhaps the tales related to Ayuttha and Queen Heo were depicted in some part of India, where Buddhism was transmitted through later Buddhist embellishments.
According to the "Samguk Yusa" 'GeumgwanSeong Pasa Stone Stūpa', which contains evidence of Buddhism transfer in Gaya, King Suro clearly states that Buddhism was not introduced in Gaya at the beginning of the Garak Kingdom. Therefore, Buddhism was recognized in Gaya around the 2nd year of King Zilji (452), and it is convincing that Buddhism was first introduced earlier than that of Baekje.
The Pasa Stone Stūpa, which was said to have been brought by Queen Heo when she came to Gaya, was not a type of Indian stūpa produced at that time, so it was confirmed that it was not from India. Although many of the remaining patterns on the surface of the stūpa are worn out, the fact that it expresses fear in the form of polymorphism suggests that this stūpa was built before and after the interferenc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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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락국기」로 본 가락국의 형성

저자 : 안홍좌 ( Ahn¸ Hong-jw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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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는 점차 개별 정치집단에 대한 연구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다양한 사료들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야가 남긴 것이 아니어서 가야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가락국기」로 가야 사회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가락국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가야지역에 변한의 '國'이 형성되던 시기를 복원하고자 했다.
「가락국기」에는 이외에도 왕후사의 창건 등 가야불교 관련 기록, 가락국의 사적에 있는 멸망 기록, 가야의 왕력 기록 등이 있고 이를 활용한 연구결과들도 쌓여가는 중이다. 이런 연구가 계속된다면 가야 사회는 좀 더 입체적으로 완성되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윤색이 있으나, 가락국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락국기」의 활용은 앞으로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Gaya history is gradually changing into research on individual political groups as the research progresses, and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are being used to this end. However, most of them are not left by Gaya, so it is not easy to grasp the internal situation of Gaya. In this manuscript, it was check please that it was possible to restore the Gaya society with the 「Garakgukgy」. And, based on records of the founded of the Garakguk of 「Garakgukgy」, it was possible to restore the period when the changed "country" of the Byeonhan was formed in Gaya region.
In addition, on the 「Garakgukgy」 records related to build of Wanghoo Temple and Garakguk's fall and Garakguk's historical. And related research results are piling up. If such research continues, I think the Gaya society will be completed in a more way. I think that although exaggerated, use of 「Garakgukgy」 should be more diverse in the future because it is a record by the Garakguk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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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세기 가야, 백제, 왜의 교류와 충돌 - 왜계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중심으로 -

저자 : 남영웅 ( Nam¸ Young-woo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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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 경남서부지역 일대에서는 규슈계통의 왜계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왜계고분은 백제의 왜계관료, 임나일본부와의 연관지어 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을 백제권역, 경남서부지역을 가야권역으로 구분한 뒤 각 권역에 존재하는 왜계고분의 특성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권역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확인한 뒤 『三國史記』와 『日本書紀』의 기록을 통해 고분이 성립되던 시기 야마토왕실과 백제왕실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전방후원분이 야마토왕권과 관계있는 자들의 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야마토왕실에 의해 파견된 자들로 보인다. 이들의 가족들은 친위왜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 따라 웅진에 머물게 된 결과 공주의 왜계고분군이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서남해안의 왜계고분과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는 백제계 위신재는 동성왕이 왜인들을 통제하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야마토 왕권이 지방의 호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 위신재를 바탕으로 그들의 권위와 독자적인 외교권을 인정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령왕 이후 이들은 중앙의 왜계관료로 변화하게 되었고 백제화 됨에 따라 영산강의 전방후원분과 서남해안의 왜계고분도 소멸하였을 것이다.
가야권역의 왜계고분의 성립에 대한 배경은 한국문헌에는 그 기록이 등장하지 않아 『日本書紀』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검토해보았다. 우선 고구려 남정이후 가야-왜의 교역로 변화에 대해 확인하고, 이와이 난 이후 近江毛野臣과 임나일본부 등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의 활동에 대해 확인하였다.
이와이 난 이후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은 북규슈 지역호족으로 보이며, 가야제국에 파견되어 백제왜계관료와 대립하거나 혹은 백제를 공격하려 시도한 것은 북규슈, 키비지역 호족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함께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기나이, 오우미 지역 호족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왕권은 당시 지방호족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하지 못한 결과, 규슈지역을 장악함에도 불구하고, 야마토 왕권의 외교적 노선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왜계고분들은 5~6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충돌이 증가하고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일본열도 통합이 가속화됨에 따라 일본열도에 건너가 있던 도래인들과 일본열도 제 세력 간의 관계, 그리고 백제왕권과 야마토 왕권과 가야제국과 일본 지방수장세력들 간의 정치, 외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During the mid-AD 5th Century to the early 6th Century, near the Yeongsan river basin, South-west coastline, Geumgang basin,(Baekjae area) Western Gyeongnam province(Gaya area), Kyushu type Japanese style tombs were constructed. Especially these tombs are linked with Gaya, Baekjae, Yamato, and Kyushu clans relationship King Dongseung's 500 guardman, from northern Kyushu's local clans, guarded Baekjae royal families, deployed for themselves, and they deployed for keeping in check central noble families in local. According to Key hole-shaped tombs symbolize Yamato and his peoples', sent by Yamato to Baekjae. Besides, their families stay in capital, for keeping in check Japanese guards. As a result, Japanese style tombs in Gong-ju were constructed. Japanese guard, deployed in Youngsan river and South-west coastline, they seem to take power in the area by the taken status goods. It is quite similar that Yamato's system accept local powerful clans dignity by the status and their aithprity and diplomatic rights. Baekjae style status goods which uncovered from Japanese style tombs in Baekjae area support the possibility that king Dong sung controlled Japanese guards similar system as what Yamato did. But Japanese guard changed as 倭係官僚(Japanese-Baekjae officer), after King Muryeong. they came to Capital and 'Baekjaenized'. As a result, Japanese style tombs in Baekjae are faded out. About construction background of Japanese style tombs in Gaya did not appear in Korean literature, have to study it from archeological achievement and 『日本書紀』. It confirms the change of Gaya-Japan isles trade route after conquest of Goguryeo, also confirms that Japanese people, work in Gaya area like 近江毛野臣(gengangmoyashin), 任那日本部(Imnailbonbu) and so on after Iwai's rebel. Japanese people who work in Gaya area afrer Iwai's rebel, they seem the local clan, not related to Yamato. They deployed to Gaya and confront with 倭係官僚 or Baekjae. It links to local clan of northern Kyushu's the intention of getting stable iron supply for economical interests from Gaya area. During 5th to 6th Century, Yamato seems do not control well local clans again. It seems he did anti-Baekjae diplomatic policy, even though northern Kyushu under the control after Iwai's rebel suppressed. Japanese style tombs, discovered in Korean peninsula, it is reflected that the tombs was built when 5th-6th Century complicated diplomatic and economic situation between Baekjae, Gaya, Yamato, Japanese isle local cl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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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서기』 소재 '임나 4현 할양'기사의 재해석

저자 : 위가야 ( Wee¸ Ka-y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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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나 4현 할양' 기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점검하여 각각의 異見을 통해 확인된 '위치 비정'의 난맥상을 확인한 후, 관점을 달리하는 '임나 4현 할양' 기사 이해를 시도해 보려 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에 '사실'과 '인식'이 섞여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합적 반영의 결과가 사료의 조작이라면 그 조작 이전의 실체를 검증하고 조작이 배태된 동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사실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지적 또한 중시하면서 '임나 4현 할양' 기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서 大伴金村大連의 실각 원인을 기술하면서 신라 방면에서의 실책이라는 실상에 덧붙여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한반도관에 입각하여 임나의 멸망 또한 大伴氏의 실책에 따른 결과라는 내용을 부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에 전해지고 있던 임나 관련 지리적 정보에 의거하여 '임나 4현'의 지명이 부가되면서 513년 '기문·대사 분쟁'의 전제로서 '임나 4현 할양'이라는 가공의 사실이 창출된 것이다. 따라서 관련 지명의 비정을 통해 당시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aims at reviewing the disorder in the “specification of location” identified through different views by examining previous studies on the article “Cession of Imna Four prefectures(任那四縣)”, and comprehending the article interpreted from different perspectives. Different perspectives mean that the content of Nihon Shoki can be approached from the point of view that “facts” and “recognition” are mixed and reflected comprehensively. This article attempts to approach the actuality of the article by placing importance on the comment that if the result of the comprehensive reflection is the falsification of historical records, the fact can be restored only when the substance before being falsified is verified and the motive that bears fabrication is understood.
While describing the cause of Ohotomo no Kanamuran Omuraji(大伴金村大 連)'s downfall in Nihon Shoki, in addition to the fact that it was a mistake of Ohotomo in the Silla region, additional content was added. The additional content is that the fall of Imna was also the result of Ohotomo's mistake, based on the view of the Korean Peninsula at the time of the compilation of Nihon Shoki. The place name of “Imna Four prefectures” was added based on the geographic information related to Imna that was transmitted to Japan at the time, and the historical fact of “Cession of Imna's Four Prefectures” was created as the premise of the “Gimun and Daesa dispute” in 513. Therefore, this article argues that it is necessary to be more cautious when restoring the historical fact of the time through the specification of related place n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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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전과 상주(尙州)와 문경(聞慶) 지역 호족의 동향

저자 : 이도학 ( Lee¸ Do-hack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0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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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신라 멸망의 기폭제가 되었던 농민 난이 상주 지역에서 발생한 원종과 애노의 난이었다. 이 난을 신라 조정이 진압하지 못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신라 전역에서는 群小 세력들이 할거하거나 독립했다. 이 가운데 후백제를 건국한 진훤의 父인 아자개는 농민 난의 와중에 상주 지역을 석권하고 장군을 칭하며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그러한 아자개는 918년에 고려가 건국된 직후 왕건에게 歸附하였다. 아들인 진훤이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호령하는 시점에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했다는 것은 납득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同名異人說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자개는 이전 906년에 상주지역으로 진출한 궁예의 부하 왕건과 遭遇한 바 있다. 이에 대응하여 후백제의 진훤은 상주 지역 확보차 출병했지만 거듭된 전투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왕건은 궁예의 신라 시책과는 달리 아자개에 대해 유화적으로 나왔다. 이러한 선상에서 후계자 상속 문제가 발생하여 진훤과 이복형제들 간의 갈등 속에서 아자개는 고려로 귀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아자개와 자제를 비롯한 친족들은 출신지인 가은현을 지배하였다. 가은현이 포함된 문경 지역은 소백산맥 남북을 잇는 兩大 교통로의 하나인 계립령로와 연결되어 있는 요충지였다. 게다가 문경은 남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지점에 소재하였다. 왕건은 문경을 전진 기지로 하여 낙동강을 이용해 康州 즉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까지 일사천리로 진출하고자 했다. 왕건의 집요한 진출 시도로 인해 문경 일원의 후백제 호족들은 귀부하고 말았다. 진훤은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의 수도를 급습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진훤의 패배는 父인 아자개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문경을 비롯한 신라 지역에서의 거점 확보 실패와 신라 민심 이반에 기인한 바 컸다.


The peasant revolt, which was the catalyst for the collapse of Silla, was a revolt of Wonjong and Anno in the Sangju area. As the Silla government failed to suppress the revolt, small forces were either forced to do it or independently throughout Silla. Among them, Azagae, the father of Jin Heon, who founded the Hu-Baekje Kingdom, emerged as a noble tribe, dominating the Sangju area during the peasant war and calling it a general. Such a son-in-law returned to Wang Geon shortly after Goryeo was founded in 918. It was hard to understand that Azagae returned to Goryeo at a time when his son, Jin Heon, commanded the sou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is led to claims that the names were identical but different. However, Azagae had previously met Wang Geon, a subordinate of Gungye, who entered the residential area in 906. In response, Jin Heon of Hu-Baekje was dispatched to secure the Sangju area, but he withdrew after several battles. At this time, Wang Geon appeared conciliatory toward Ahjagae, unlike Gungye's Silla policy. In this line, the succession problem occurred, and amid the conflict between Jin Heon and his half brothers, Ah-Ja-gae tried to solve the problem by returning to Goryeo.
His relatives, including his son and brother, ruled Ga Eun-hyeon, where he was from. The Mungyeong area, which includes Ga Eun-hyeon, was an important point connected to Gyeryeong-ro, one of the two major transportation routes linking the north and south of the Sobaeksan Mountain Range. Furthermore, Mungyeong was located at the point where the Namhangang River and Nakdong River were connected. Wang Geon used the Nakdonggang River as the base of Mungyeong as the current location of Gangju, Gyeongsangnam-do.
He wanted to go all the way to. Wang Geon's persistent attempt to enter the area resulted in the return of the descendants of the Hu-Baekje clans of Mungyeong. Jin Heon raided the capital of Silla to make up for this inferiority complex, but as a result, it was defeated.
Jin Heon's defeat was largely due to his failure to inherit the legacy of his father, Azagae, and his failure to secure strongholds in the Silla region, including Mun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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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숙종대의 내수외양(內修外攘)과 대일관계 변화

저자 : 김태훈 ( Kim¸ Tae-h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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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숙종대 대일정책 성과가 조선후기 한일관계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지만, 일본측이 가해오는 외교적 압박은 조선의 대일정책 혼선과 맞물려 교섭과정에서 원칙이 무시되다시피 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고착시켰다. 통틀어 3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왜관 이전 교섭 과정은 17세기 중반 대일정책·대일관계의 수세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17세기 후반기에 점차 대내외적 상황이 호전되고 국가적 재건을 달성하면서, 숙종대에는 대일관계도 점차 변화를 보이게 된다. 1673년에 결말을 보게 된 왜관이전 교섭은 수세적 대일관계의 산물이지만, 왜관 이전이 완료된 1678년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1678년에 무오약조와 1683년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대일외교에서 불합리한 관행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을 정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대내외적 여건들로 인해 대일정책·대일관계가 수세적 양상을 보였다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수를 달성해나가던 시점인 숙종 전반기의 대일관계는 무오약조와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확연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This thesis is a study examin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olicy in the King Sukjong's Reign toward Japan, in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fter the Imjin War, peace continues between Joseon and Japan. But the diplomatic pressure from the Japan, coupled with the confusion of Joseon's policy toward Japan, fixed the unusual practice of neglecting principles in the process of bargaining. In total, the bargaining process for the transfer of Waegwan, which took place over 30 years, is an example of implicitly showing the defensive posture of Japanese policy and relations with Japan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However,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 gradually improved and national reconstruction was achieved in the late 17th century,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Japan gradually changed during the Sukjong's Reign. It was decided in 1673 to move Waegwan, and the decision was the result of defensive posture of Japanese policy. But after the transfer Waegwan in 1678, the situation was reversed.
The signing of the Treaty in the Muoh-Year(1678), and the Treaty in the Gyaehae-Year(1683) served as an opportunity to break through unreasonable practices in diplomacy with Japan and to apply diplomatic principles normally.
Until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due to internal and external conditions, the policy toward Japan and the relationship with Japan showed a defensive pattern. But the relationship with Japan in the Sukjong's Reign, a time when overcoming the crisis and achieving national reconstruction, showed a marked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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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량화집(草梁話集)』의 이본(異本)과 재생산 - 『조선초량화집(朝鮮草梁話集)』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양흥숙 ( Yang Heung-sook ) , 정성일 ( Chung Sung-il ) , 김동철 ( Kim Dong-chu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1-28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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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초량왜관에서 근무한 조선어 역관 小田幾五郞이 쓴 『草梁話集』의 異本들을 고찰하였다. 『초량화집』은 초량왜관 안팎의 조선인, 부산사람들, 부산의 마을 등이 묘사되어 있어, 조일교류사는 물론 18세기 후반의 부산 현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다. 『초량화집』은 여러 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은 일본 東京都立中央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도립본」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부산박물관에 『조선초량화집』이란 표제로 소장되어 있는 『초량화집』을 소개하였고, 이를 「부박본」이라고 하였다. 「부박본」은 1927년에 1월 小田省吾가 교정한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 중 필사 시기가 가장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립본」과 「부박본」의 가장 큰 차이는 도입부이다. 『초량화집』은 서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도립본」은 바로 본문이 시작되는데, 첫 목차는 「一 御送使船着之節古來者萬戶牧ノ嶋外迄爲出迎由」이다. 대마도 사절이 왜관이 도착하였을 때 조선측에서 영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박본」은 첫 목차가 시작되기 전에 '초량 지명 유래와 왜관 이전', '초량왜관의 크기' 등 초량왜관의 개요가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부박본」은 전체 목차와 내용 구성면에서 「도립본」과 많이 다르며, 「도립본」보다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초량화집』은 계속 필사되면서 수정 또는 증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부박본」은 1933년부터 편찬된 『釜山府史原稿』에 인용된 『초량화집』과 내용면에서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부산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많은 사료들이 수집되고, 참고문헌으로 인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초량화집』이 다시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몇 개의 異本들을 비교하면서 『초량화집』의 변화와 그 의미들을 고찰하였다.


This study considered different versions of Choryanghwajib written by a Korean language interpreter Oda Ikugoro, who worked at Choryang Waegwan. Choryanghwajib includes descriptions of Joseon people in and out of Choryang Waegwan, the people and villages of Busan. Therefore, it is an important record revealing the situations of Busan as well as Joseon-Japan relations in the late 18th century. Choryanghwajib remains in several versions of manuscript, and the most famous one is Choryanghwajib housed in Tokyo Metropolitan Central Library. This manuscript is referred to as the Tokyo Metropolitan version.
This study newly introduced Choryanghwajib manuscript that is housed in Busan Museum and entitled Joseon Choryanghwajib, which is referred to as the Busan Museum version. The Busan Museum version is a manuscript that was revised by Oda Shogo in 1927 and is judged to be the latest produced manuscript among the remaining versions of Choryanghwajib.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the Tokyo Metropolitan version and the Busan Museum version is the introduction. Choryanghwajib is characterized by having no introduction. Thus, the Tokyo Metropolitan version immediately begins with the body with the first content covering matters of reception in Joseon when a ship with an envoy from Tsushima Island arrives. On the other hand, the Busan Museum version begins with a summary of Choryang Waegwan containing contents such as the 'Origin of Choryang, the name of the place, and the relocation of waegwan,' and the 'Size of Choryang Waegwan' before the main contents start. The Busan Museum version is quite different from the Tokyo Metropolitan version in terms of overall list and organization of contents and is characterized by more contents than the Tokyo Metropolitan version. This confirms that Choryanghwajib was modified and expanded as it was repeatedly transcribed. It was found that the contents of the Busan Museum version, in particular, is almost the same as that of Choryanghwajib cited in Busanbusawongo(Manuscripts for the History of Busan-bu) published in 1933. At the time, a lot of historical records were collected in order to compile the history of Busan. it appears that Choryanghwajib was transcribed again in that process. This study considered the changes and significance of Choryanghwajib comparing its different ver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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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항기 초상국(招商局)의 한국항로 개척과 한중 해상운송망

저자 : 김영신 ( Kim¸ Young-si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1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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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품의 판매가격은 구매력과 직결되어 판로를 좌우한다. 유통과정의 단축과 운임의 절감을 통해 상품 원가를 어느 정도 하락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산지나 집산지에서 직송하는 직무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개항 초 공히 중계무역을 통해 한국시장 진출을 노렸던 日商과 華商의 경쟁관계에서 운송망 확충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화상이 단시간에 한국 무역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 확대를 통해 그간 형식에 불과하였던 '종주권'을 강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변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한중 간 해상운송망이 확충된 것은 화상의 상무진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개입하였던 袁世凱는 경제세력 확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기간 화상의 정상적인 무역활동은 물론이고 '밀무역'까지도 방조하고 조장하는 등 화상의 경제활동에 유무형의 도움을 주었다. 화상의 경제진출지원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초상국 선박의 정기적인 한국운항을 성사시킨 것이다.
上海와 仁川을 잇는 해상운송망 확충은 화상의 무역활동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지닌다. 한중항로는 운항 후 계속되는 적자에 한 차례 운항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항로를 재개설하고 적자상태에서도 유지한 것은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중시한 李鴻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중항로 개통과 유지가 정치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The selling price of imported goods is directly related to purchasing power and further decides the market. The product cost can be cut to some degree by shortening the distribution process and reducing freight charges. In that sense, the direct trade, by which goods are directly sent from the production area or the distribution center to the final destination, is absolutely advantageous in terms of price. The most important foundation in building a direct trade system which ensures direct transport of imported goods and direct transaction is the expansion of a transportation network where the distribution bases of goods are connected. In this regard, at the initial stage of overseas trade, the expansion of a transportation network was of the greatest importance in the competitive relationship between Japanese and Chinese merchants who aimed to enter the Korean market through intermediate trade.
At the time of initial entry into the Korean market, Chinese merchants, who were late to enter the Korean market compared to Japanese merchants, were in a relatively unfavorable position in the aspect of transportation network. To overcome this challenge, Chénshutang in charge of Chinese trade with Korea actively promoted the operation of Chinese vessels led by the China Merchants Steam Navigation Company to Korea, under the broad support of Lǐ Hóngzhāng.
Yuán Shìkǎi, who involved himself deeply in the internal affairs and diplomacy of Korea at that time, paid much attention even to the expansion of economic forces in Korea. During his reign, he gave tangible and intangible assistance in Chinese merchants' economic activities by not only promoting their normal trading activities but even neglecting or encouraging “smuggling”. The most noticeable part in his trading support for Chinese merchants would be that it was made possible for Chinese vessels operated by the China Merchants Steam Navigation Company to regularly navigate to Korean sea routes.
The total volume of Korean-Chinese trade between 1883 and 1892 was just 0.01 to 0.25% of that of China's overseas trade during the same period. Korea was of little importance to China in terms of trade advancement. Nevertheless, the Chinese government was active in supporting the economic activities of Chinese merchants in Korea, with an intention of strengthening suzerainty through the improvement of economic strength and, at the same time, countering the Japanese forces.
In some ways, the act of pioneering Korean sea routes seemed to stem from several political considerations, but it would certainly be a considerable help for the trading activities of Chinese merchants in Korea.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hen railroads were not built yet, the navigation of steamship as a new means of transportation and the regular operation of vessels were the absolute conditions for the development of overseas t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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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45년 해방공간에서 교차하는 미군과 일본군의 이동

저자 : 김윤미 ( Kim¸ Yun-mi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1-33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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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동북아 지역의 물리적 주체였던 일본군과 현대 동북아의 물리적 주체로 등장한 미군이 해방공간에서 교차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1945년 일본군과 미군의 이동은 일본 '제국'이 붕괴하고 국민국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 주도의 현대적 시작을 의미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군 무장해제와 철수를 실시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미군정의 행정업무가 아니라 미군의 첫 번째 군사작전이었다. 이것은 남한이 '해방지역'이 아니라 '점령지역'으로 미군이 직접통치하는 작전구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점령한 지역은 일본군의 군사적 거점지역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귀환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일본군의 전략 지점에 병력을 배치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군사시설과 병력을 장악하여 한반도를 군사점령하기 위한 거점으로 서울지구, 부산지구, 군산지구를 선정했다.
일본군과 미군의 교차지점 중 유동성이 가장 큰 해방공간은 부산이었다. 부산항은 대다수의 일본인과 일본군이 이동하고, 조선인들이 귀환하였으며, 귀환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많은 수의 미군도 주둔했다. 부산은 미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주둔하는 공간이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귀환항으로 역사적 전개를 맞이했다.


The article noted that Japanese and U.S. troops intersect in a liberation space. The movement of Japanese and U.S. forces in 1945 marked the beginning of the modern U.S.-led movement in the process of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Empire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nation's state. U.S. troops stationed in South Korea were the first to disarm and withdraw Japanese troops. The withdrawal of Japanese troops was not the administrative work of the U.S. military, but the U.S. military's first military operation. This is because South Korea was not a "liberation zone" but a "occupation zone" directly controlled by the U.S. military.
The area occupied by the U.S. military was the military base of the Japanese military. The U.S. military deployed its forces at the strategic point of the Japanese military, as it aimed to disarm and return the Japanese troops. The U.S. military selected Seoul, Busan and Gunsan districts as bases for military occup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by taking control of Japanese military facilities and forces.
Busan was the most fluid liberation space among the intersection of the Japanese and U.S. forces. Most Japanese and Japanese troops moved to Busan Port. Koreans returned home, and a large number of U.S. troops were stationed to control and manage the return. Busan was a space where both U.S. and Japanese troops were stationed. The port of return of Koreans and Japanese also marked a historic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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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의 양산과 변진접도국

저자 : 선석열 ( Seon¸ Seok-yeo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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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한시기의 변한과 진한의 24개 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양산에 있었는가를 추정해 보았다. 그 위치가 비정된 소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 소국의 공간성과 방향성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삼한 소국명의 표기방식에는 음운적 음독뿐 아니라 음의적인 훈독을 병용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본 결과, 변진접도국의 위치는 양산에 비정되었다. 접도국이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을 의미하므로, 양산에 위치한 나라였다. 삼한시기의 양산지역은 4세기 이전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晋書』에 보이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중국 서진과 교섭하였으며, 독로국·접도국을 함께 교섭하였다.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4세기에 양산은 금관가야계 문화였다. 4세기에 이르러 접도국은 금관가야연맹에 참여하였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연맹이 와해되었고 접도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공격한 황산진 전투가 일어난 6세기 전후까지도 상당 기간 독자성은 유지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게 되어 지방의 지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63년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공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양산을 ①의례적인 공납의 대가로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유형에서 ②자치를 허용하면서 유력 세력을 재편하는 유형으로 통제가 강화되었다. 505년에 지증왕은 주군제를 시행하면서 양산지역도 지방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즉 접도국은 삽라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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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야불교와 파사석탑

저자 : 조원영 ( Jo¸ One-yo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7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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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가야불교의 전래 시기와 전래된 불교의 성격, 그리고 허왕후가 가지고 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가야의 불교 전래와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작성되었다.
가야불교에 대한 자료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편적 내용뿐이며 그 외에는 대부분 김해지역에 전승되는 자료들에 한정된다. 그중에서 가야불교와 관련된 전승 자료를 살펴보면 대체로 가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가야인들에게 불교가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가야불교 전래 시기를 증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질지왕대 왕후사 창건을 통해 국가불교 또는 왕실불교로 보고 있다.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가야 불교는 남방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중국을 거쳐서 전래되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가야불교 전래와 관련 짓는 아유타국과 허왕후의 정체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허왕후와 그 일행이 모두 중국식 이름이라는 것과 중국식 관직명을 갖고 있다는 점, 가지고 온 물건도 '중국 점포의 여러 물건'으로 표현한 점 등에서 인도와 관련 짓기는 어려운 듯하다. 아마도 아유타국과 허왕후 관련 설화는 후대의 불교적 윤색을 거쳐 불교를 전해준 인도의 어느 지역,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증거로 알려진 파사석탑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있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살펴보면 수로왕대에는 가야에 창사·봉불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가락국 초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가야에 불교가 공인된 시점은 왕후사가 창건된 질지왕 2년(452) 전후이며,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그보다 좀 더 이른 백제와의 외교 교섭이 활발했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은 그 시기에 제작된 인도의 불탑 양식이 아니므로 인도에서 전래된 탑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탑 부재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많이 마멸되긴 했지만 다포형식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이 탑이 우리나라에 다포형식의 공포가 전해진 원 간섭기 전후에 조성된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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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락국기」로 본 가락국의 형성

저자 : 안홍좌 ( Ahn¸ Hong-jw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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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는 점차 개별 정치집단에 대한 연구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다양한 사료들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야가 남긴 것이 아니어서 가야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가락국기」로 가야 사회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가락국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가야지역에 변한의 '國'이 형성되던 시기를 복원하고자 했다.
「가락국기」에는 이외에도 왕후사의 창건 등 가야불교 관련 기록, 가락국의 사적에 있는 멸망 기록, 가야의 왕력 기록 등이 있고 이를 활용한 연구결과들도 쌓여가는 중이다. 이런 연구가 계속된다면 가야 사회는 좀 더 입체적으로 완성되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윤색이 있으나, 가락국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락국기」의 활용은 앞으로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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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세기 가야, 백제, 왜의 교류와 충돌 - 왜계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중심으로 -

저자 : 남영웅 ( Nam¸ Young-woo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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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 경남서부지역 일대에서는 규슈계통의 왜계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왜계고분은 백제의 왜계관료, 임나일본부와의 연관지어 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을 백제권역, 경남서부지역을 가야권역으로 구분한 뒤 각 권역에 존재하는 왜계고분의 특성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권역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확인한 뒤 『三國史記』와 『日本書紀』의 기록을 통해 고분이 성립되던 시기 야마토왕실과 백제왕실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전방후원분이 야마토왕권과 관계있는 자들의 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야마토왕실에 의해 파견된 자들로 보인다. 이들의 가족들은 친위왜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 따라 웅진에 머물게 된 결과 공주의 왜계고분군이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서남해안의 왜계고분과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는 백제계 위신재는 동성왕이 왜인들을 통제하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야마토 왕권이 지방의 호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 위신재를 바탕으로 그들의 권위와 독자적인 외교권을 인정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령왕 이후 이들은 중앙의 왜계관료로 변화하게 되었고 백제화 됨에 따라 영산강의 전방후원분과 서남해안의 왜계고분도 소멸하였을 것이다.
가야권역의 왜계고분의 성립에 대한 배경은 한국문헌에는 그 기록이 등장하지 않아 『日本書紀』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검토해보았다. 우선 고구려 남정이후 가야-왜의 교역로 변화에 대해 확인하고, 이와이 난 이후 近江毛野臣과 임나일본부 등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의 활동에 대해 확인하였다.
이와이 난 이후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은 북규슈 지역호족으로 보이며, 가야제국에 파견되어 백제왜계관료와 대립하거나 혹은 백제를 공격하려 시도한 것은 북규슈, 키비지역 호족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함께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기나이, 오우미 지역 호족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왕권은 당시 지방호족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하지 못한 결과, 규슈지역을 장악함에도 불구하고, 야마토 왕권의 외교적 노선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왜계고분들은 5~6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충돌이 증가하고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일본열도 통합이 가속화됨에 따라 일본열도에 건너가 있던 도래인들과 일본열도 제 세력 간의 관계, 그리고 백제왕권과 야마토 왕권과 가야제국과 일본 지방수장세력들 간의 정치, 외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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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서기』 소재 '임나 4현 할양'기사의 재해석

저자 : 위가야 ( Wee¸ Ka-y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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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나 4현 할양' 기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점검하여 각각의 異見을 통해 확인된 '위치 비정'의 난맥상을 확인한 후, 관점을 달리하는 '임나 4현 할양' 기사 이해를 시도해 보려 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에 '사실'과 '인식'이 섞여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합적 반영의 결과가 사료의 조작이라면 그 조작 이전의 실체를 검증하고 조작이 배태된 동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사실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지적 또한 중시하면서 '임나 4현 할양' 기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서 大伴金村大連의 실각 원인을 기술하면서 신라 방면에서의 실책이라는 실상에 덧붙여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한반도관에 입각하여 임나의 멸망 또한 大伴氏의 실책에 따른 결과라는 내용을 부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에 전해지고 있던 임나 관련 지리적 정보에 의거하여 '임나 4현'의 지명이 부가되면서 513년 '기문·대사 분쟁'의 전제로서 '임나 4현 할양'이라는 가공의 사실이 창출된 것이다. 따라서 관련 지명의 비정을 통해 당시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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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전과 상주(尙州)와 문경(聞慶) 지역 호족의 동향

저자 : 이도학 ( Lee¸ Do-hack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0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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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신라 멸망의 기폭제가 되었던 농민 난이 상주 지역에서 발생한 원종과 애노의 난이었다. 이 난을 신라 조정이 진압하지 못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신라 전역에서는 群小 세력들이 할거하거나 독립했다. 이 가운데 후백제를 건국한 진훤의 父인 아자개는 농민 난의 와중에 상주 지역을 석권하고 장군을 칭하며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그러한 아자개는 918년에 고려가 건국된 직후 왕건에게 歸附하였다. 아들인 진훤이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호령하는 시점에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했다는 것은 납득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同名異人說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자개는 이전 906년에 상주지역으로 진출한 궁예의 부하 왕건과 遭遇한 바 있다. 이에 대응하여 후백제의 진훤은 상주 지역 확보차 출병했지만 거듭된 전투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왕건은 궁예의 신라 시책과는 달리 아자개에 대해 유화적으로 나왔다. 이러한 선상에서 후계자 상속 문제가 발생하여 진훤과 이복형제들 간의 갈등 속에서 아자개는 고려로 귀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아자개와 자제를 비롯한 친족들은 출신지인 가은현을 지배하였다. 가은현이 포함된 문경 지역은 소백산맥 남북을 잇는 兩大 교통로의 하나인 계립령로와 연결되어 있는 요충지였다. 게다가 문경은 남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지점에 소재하였다. 왕건은 문경을 전진 기지로 하여 낙동강을 이용해 康州 즉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까지 일사천리로 진출하고자 했다. 왕건의 집요한 진출 시도로 인해 문경 일원의 후백제 호족들은 귀부하고 말았다. 진훤은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의 수도를 급습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진훤의 패배는 父인 아자개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문경을 비롯한 신라 지역에서의 거점 확보 실패와 신라 민심 이반에 기인한 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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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숙종대의 내수외양(內修外攘)과 대일관계 변화

저자 : 김태훈 ( Kim¸ Tae-h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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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숙종대 대일정책 성과가 조선후기 한일관계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지만, 일본측이 가해오는 외교적 압박은 조선의 대일정책 혼선과 맞물려 교섭과정에서 원칙이 무시되다시피 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고착시켰다. 통틀어 3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왜관 이전 교섭 과정은 17세기 중반 대일정책·대일관계의 수세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17세기 후반기에 점차 대내외적 상황이 호전되고 국가적 재건을 달성하면서, 숙종대에는 대일관계도 점차 변화를 보이게 된다. 1673년에 결말을 보게 된 왜관이전 교섭은 수세적 대일관계의 산물이지만, 왜관 이전이 완료된 1678년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1678년에 무오약조와 1683년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대일외교에서 불합리한 관행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을 정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대내외적 여건들로 인해 대일정책·대일관계가 수세적 양상을 보였다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수를 달성해나가던 시점인 숙종 전반기의 대일관계는 무오약조와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확연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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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량화집(草梁話集)』의 이본(異本)과 재생산 - 『조선초량화집(朝鮮草梁話集)』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양흥숙 ( Yang Heung-sook ) , 정성일 ( Chung Sung-il ) , 김동철 ( Kim Dong-chu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1-28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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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초량왜관에서 근무한 조선어 역관 小田幾五郞이 쓴 『草梁話集』의 異本들을 고찰하였다. 『초량화집』은 초량왜관 안팎의 조선인, 부산사람들, 부산의 마을 등이 묘사되어 있어, 조일교류사는 물론 18세기 후반의 부산 현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다. 『초량화집』은 여러 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은 일본 東京都立中央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도립본」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부산박물관에 『조선초량화집』이란 표제로 소장되어 있는 『초량화집』을 소개하였고, 이를 「부박본」이라고 하였다. 「부박본」은 1927년에 1월 小田省吾가 교정한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 중 필사 시기가 가장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립본」과 「부박본」의 가장 큰 차이는 도입부이다. 『초량화집』은 서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도립본」은 바로 본문이 시작되는데, 첫 목차는 「一 御送使船着之節古來者萬戶牧ノ嶋外迄爲出迎由」이다. 대마도 사절이 왜관이 도착하였을 때 조선측에서 영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박본」은 첫 목차가 시작되기 전에 '초량 지명 유래와 왜관 이전', '초량왜관의 크기' 등 초량왜관의 개요가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부박본」은 전체 목차와 내용 구성면에서 「도립본」과 많이 다르며, 「도립본」보다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초량화집』은 계속 필사되면서 수정 또는 증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부박본」은 1933년부터 편찬된 『釜山府史原稿』에 인용된 『초량화집』과 내용면에서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부산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많은 사료들이 수집되고, 참고문헌으로 인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초량화집』이 다시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몇 개의 異本들을 비교하면서 『초량화집』의 변화와 그 의미들을 고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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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항기 초상국(招商局)의 한국항로 개척과 한중 해상운송망

저자 : 김영신 ( Kim¸ Young-si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1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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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품의 판매가격은 구매력과 직결되어 판로를 좌우한다. 유통과정의 단축과 운임의 절감을 통해 상품 원가를 어느 정도 하락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산지나 집산지에서 직송하는 직무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개항 초 공히 중계무역을 통해 한국시장 진출을 노렸던 日商과 華商의 경쟁관계에서 운송망 확충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화상이 단시간에 한국 무역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 확대를 통해 그간 형식에 불과하였던 '종주권'을 강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변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한중 간 해상운송망이 확충된 것은 화상의 상무진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개입하였던 袁世凱는 경제세력 확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기간 화상의 정상적인 무역활동은 물론이고 '밀무역'까지도 방조하고 조장하는 등 화상의 경제활동에 유무형의 도움을 주었다. 화상의 경제진출지원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초상국 선박의 정기적인 한국운항을 성사시킨 것이다.
上海와 仁川을 잇는 해상운송망 확충은 화상의 무역활동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지닌다. 한중항로는 운항 후 계속되는 적자에 한 차례 운항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항로를 재개설하고 적자상태에서도 유지한 것은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중시한 李鴻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중항로 개통과 유지가 정치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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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45년 해방공간에서 교차하는 미군과 일본군의 이동

저자 : 김윤미 ( Kim¸ Yun-mi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1-33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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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동북아 지역의 물리적 주체였던 일본군과 현대 동북아의 물리적 주체로 등장한 미군이 해방공간에서 교차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1945년 일본군과 미군의 이동은 일본 '제국'이 붕괴하고 국민국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 주도의 현대적 시작을 의미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군 무장해제와 철수를 실시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미군정의 행정업무가 아니라 미군의 첫 번째 군사작전이었다. 이것은 남한이 '해방지역'이 아니라 '점령지역'으로 미군이 직접통치하는 작전구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점령한 지역은 일본군의 군사적 거점지역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귀환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일본군의 전략 지점에 병력을 배치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군사시설과 병력을 장악하여 한반도를 군사점령하기 위한 거점으로 서울지구, 부산지구, 군산지구를 선정했다.
일본군과 미군의 교차지점 중 유동성이 가장 큰 해방공간은 부산이었다. 부산항은 대다수의 일본인과 일본군이 이동하고, 조선인들이 귀환하였으며, 귀환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많은 수의 미군도 주둔했다. 부산은 미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주둔하는 공간이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귀환항으로 역사적 전개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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