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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양산과 변진접도국

Ancient Yangsan and Byeonjin Jeopdoguk

선석열 ( Seon¸ Seok-yeol )
  • : 부경역사연구소
  • : 지역과 역사 4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5-34(30pages)
지역과 역사

DOI

10.19120/cy.2021.04.48.5


목차

머리말
Ⅰ. 변진접도국의 위치비정
Ⅱ. 양산 변진접도국의 변화와 향방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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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본 연구는 삼한시기의 변한과 진한의 24개 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양산에 있었는가를 추정해 보았다. 그 위치가 비정된 소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 소국의 공간성과 방향성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삼한 소국명의 표기방식에는 음운적 음독뿐 아니라 음의적인 훈독을 병용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본 결과, 변진접도국의 위치는 양산에 비정되었다. 접도국이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을 의미하므로, 양산에 위치한 나라였다. 삼한시기의 양산지역은 4세기 이전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晋書』에 보이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중국 서진과 교섭하였으며, 독로국·접도국을 함께 교섭하였다.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4세기에 양산은 금관가야계 문화였다. 4세기에 이르러 접도국은 금관가야연맹에 참여하였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연맹이 와해되었고 접도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공격한 황산진 전투가 일어난 6세기 전후까지도 상당 기간 독자성은 유지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게 되어 지방의 지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63년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공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양산을 ①의례적인 공납의 대가로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유형에서 ②자치를 허용하면서 유력 세력을 재편하는 유형으로 통제가 강화되었다. 505년에 지증왕은 주군제를 시행하면서 양산지역도 지방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즉 접도국은 삽라군이 되었다.
The study is reviewing which of the 24 countries iin Byeonhan and Jinhan during the Samhan Period was located in Yangsan. The writer extracted its spatiality and directionality around the countries where the location was confirmed, and its notation included semantic as well as phonetic reading. As a result of applying these standards, Byeonjin Jeopdoguk was located in Yangsan. The name means the point where the sea and the river meet, so it was a country located in Yangsan.
The Yangsan area of the Samhan period was not surveyed on the ruins before the 4th century. Based on Jinseo, Jeopdoguk negotiated with West Jin along with Guyaguk and Dogroguk. According to archaeological research, Yangsan was a Geumgwan Gaya culture in the 4th century. By the 4th century, Jeopdoguk participated in the Geumgwan Gaya Confederation.
The League collapsed due to King Gwanggaeto's punishment, and the border country fell under Silla's influence. Silla maintained its independence for a considerable period of time until around the 6th century when the Battle of Hwangsanjin, which attacked Geumgwan Gaya, took place. At that time, Silla was not able to dominate the region because it was interfered with the internal affairs of Goguryeo. In 463, when the Japanese invaded Sapnyangseong Fortress, Silla strongly controlled mass production to prepare for it. In other words, from a type that allows complete autonomy in exchange for ceremonial contributions, to a type that allows autonomy while reorganizing influential forces. In 505, King Jijeung implemented the local system, and the Yangsan area was incorporated into the local governance system. Jeopdoguk became a Sapragun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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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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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9-6600
  • : 2733-4732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6-2021
  • :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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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권0호(2021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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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세기 전북 동부지역의 가야제국과 대산성 전투

저자 : 송영근 ( Song¸ Young-ge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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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5~6세기 전북 동부지역 加耶諸國의 실체에 대해 규명해보고, 이 지역의 가야계 小國과 백제, 고구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日本書紀』에 기록된 대산성 전투를 분석해보았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섬진강이 가진 대외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을 전제로 가라국 또는 백제의 영역 확장과 결부하여 기문-대사 쟁탈전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채록한『日本書紀』는 당시 전라 동부지역에 三己汶(上己汶·中己汶·下己汶), 任那四縣(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과 같은 가야계 소국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그들 스스로 백제에 대항하거나 협력하는 등 자체적 존립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했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6세기경 전라 동부지역에서 재지 문화를 영유하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와 문물을 교류하던 이들은 기문하(섬진강)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여, 지금의 장수군에는 하기문, 남원시에는 상기문과 같은 가야계 소국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 백제 동성왕은 고구려의 파상 공세로부터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전북지역으로 영향력을 강화하여 한강유역 상실로 인해 줄어든 농경지와 인구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이 소정의 성과를 거두면서 486년에 이르러서는 신라와 함께 大閱을 통해 되찾은 국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긴장감을 한층 고조되게 만들었다.
백제의 위 같은 행보는 전북지역 영향력 확대로 위기감을 느끼던 장수지역의 하기문과 고착된 남부 전선에서 돌파구를 찾던 고구려 두 국가가 상호협력 관계를 맺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은 공모를 통해 백제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후 하기문이 이림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서 대산성 전투가 발발하자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이림에서 백제 장군 적막이해를 살해했다. 배후에서의 예기치 못한 공격에 큰 위협을 느낀 백제는 즉각 군사적 보복을 통해 대산성을 공파하고 주동자 나기타갑배를 위시한 삼백여 명을 처단하였다. 가야제국에 대한 백제의 강경책은 무령왕대까지 이어지며 상기문까지 진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백제가 다시금 비옥한 곡창지대를 확보하는 한편, 자연 경계인 섬진강을 바탕으로 후방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고토 회복을 위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치를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487년 일어난 대산성 전투는 백제의 전라 동부지역 가야제국에 대한 계기적인 외교 변화를 가져오게 된 사건이자 전북 동부지역 가야계 소국의 자체적 존립을 위한 企圖가 실패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On this research, examine the Gaya Kingdoms(加耶諸國) in eastern region of Jeonbuk in the 5~6th century and analyzing the article about Daesanseong(帶山城) Battle, written on 『Nihon Shoki(日本書紀)』 focusing on the interests of small states(小國) which is related to Gaya Kingdoms, Baekje(百濟) and Goguryeo(高句麗).
On the previous studies, it was regarded that importance of Sumjingang as external traffic route or who owning the Gimuns(己汶)-Daesa(滯沙) in order to broaden Garaguk(加羅國)'s or Baekje's territory. However, according to 『Nihon Shoki(日本書紀)』, there were Three-Gimuns(三己文); Sang-gimun[上己汶]· Jung-gimun[中己汶]·Ha-gimun[下己汶], and Imnasahyun(任那四縣); Sang-dari[上哆唎]·Ha-dari[下哆唎]·Sata[娑陀]·Moru[牟婁], which were marginal states to Gaya kingdoms and found ways to survive themselves either resist or allying with Baekje. Be summed up as follows;
During 5~6th centuries, those who had a local culture in the Jeolla's eastern region and exchanged culture with various countries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based on their geographical advantage built their power around Gimun-ha(Sumjingang) and formed small states of Gaya. Which are Ha-gimun in Jansu-gun and Sang-gimun in Namwon-si.
King Dongseong committed reinforcements to Shilla to conserve his kingdom during Goguryeo's massive attack. Meanwhile, advanced into Jeonbuk region to restored farmland and their population since the loss of Han River basin. This led to regaining their power through Dae-yeol(大閱); which were check by King directly, along with Shilla in 486 and raised the military tension over western side of Korean Peninsula.
Due to the expansion of Baekje's influence in the north region of Jeolla, Ha-gimun in Jangsu, which sensed crisis, and Goguryeo struggling to find a breakthrough in the fixed southern front. They had cohesive interests through Baekje. In order to eliminate their threat to Baekje, Ha-gimun cut off provision transportation route to Illim(爾林) of Baekje which lead to outbreak of Dasanseong Battle in 487. During the battle, Goguryeo attacked Bakjae and killed general Jeokmakihae at Illim. Baekje felt menace, since the unexpected attack and get revenge immediately. This event leads to change of their perspective in Gaya kingdoms of Jeolla's eastern region. The efforts for the existence of Ha-gimun were in vain as Baekje had demolished Daesanseong and approximately 300 people including Nigita-gabbae were killed. Baekje's tough strategy was maintained until the reign of King Muryeong, resulting Baekje's advance into Sang-gimun of Namwon. Which were regained their homeland and stabilized the rear side based on Sumjingang; natural boundary. This situation implied that preparation for a war against Goguryeo were complete.
As a result, the Daesanseong Battle in 487 brought out an instrumental diplomatic change to the Gaya Kingdom of eastern Jeonbuk and the failure of plan, the Gaya-based small states in eastern Jeonbuk to survive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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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의 금강 상류지역 진출과 토착세력의 대응

저자 : 김형태 ( Kim¸ Hyeong-ta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1-8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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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5세기 후반 금강 상류지역에서 벌어진 토착세력과 백제의 대립에 대하여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5세기 후반 백제가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에 대해 검토하였다. 5세기 후반 백제·신라·가야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 집중하는 틈을 이용해 신라와 가야는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선을 확보하는 동시에 신라·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둘째, 금강 상류지역 토착세력의 성격에 대해 검토하였다. 금강 상류지역은 백제와 가야의 점이지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본서기』 현종천황 3년 시세조에 등장하는 紀生磐宿禰와 那奇他甲背는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다. 이들은 백제와 가라국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며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셋째, 爾林·帶山城 전투의 전개과정과 토착세력의 대응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5세기 후반 백제가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을 본격화함에 따라 토착세력은 이에 맞는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토착세력은 고구려와 결탁하고 反백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 노력은 백제의 군사행동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5세기 후반 장수지역 토착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가라국은 토착세력의 反백제활동에 대해 묵인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가라국이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중시하였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이림·대산성 전투는 5세기 후반 금강 상류지역을 두고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으로 파악하였다.


In this paper, we investigated from three aspects, the indigenous people of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and the advance of Baekje(百濟) from the last 5th century
First, examining The background of Baekje(百濟) advance into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from the late 5th century. Baekje(百濟) advanced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Because, contain that Silla(新羅) and Gaya(加耶) spread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and responded to the military threat of Goguryeo(高句麗).
Secondly, examining character of the indigenous people from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indigenous forces from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acted as a relay between Baekje(百濟) and Gara-kuk(加羅國), but strengthened their relationship with Gara-kuk(加羅國) in the latter half of the 5th century.
Third, examin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Daesanseong(帶山城) battle and the response of the indigenous people. the indigenous people alliance with Goguryeo(高句麗) and resisted that advancement of Baekje(百濟) to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錦江) from the late 5th century. meanwhile, Gara-kuk(加羅國) that alliance the indigenous people take no notice of there. Because Daegaya think highly of the alliance with Baekje.
conclusionally, Daesanseong battle was action that clash of interests between several forces on the Koer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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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항 법광사 건립과 중창에 대한 일고찰

저자 : 함윤아 ( Hahm¸ Yun-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2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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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법광사는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의 아버지인 김균정과 관련된 왕실의 願刹로 알려져 있다.
법광사가 위치한 비학산은 신라시대 小祀를 지냈던 지역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왕경인 경주에서 북쪽으로 안강을 지나 동해안에 도달한 다음, 동해안을 따라 명주 등을 거쳐 북쪽 국경까지 연결되는 신라의 대표적 북방진출로인 왕경북로와 인접해 있다.
왕실의 조상을 추복하기 위한 원찰인 법광사가 왕경이 아닌 지방에 조성된 것은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문성왕대 무열왕계 김주원 후손의 근거지였던 보령 성주사에 사액을 한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김균정의 가문 또한 법광사가 위치한 포항시 신광면 일대에 연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법광사의 중창과정은 산지가람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금당이 세워질 평탄한 대지를 조성하고 석축을 쌓은 후 지형에 맞춰 배수체계를 갖추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실시되었다. 삼층석탑의 이건은 이러한 중창과정의 일환으로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에 봉안된 불상은 9세기대 조성된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는데 비로자나불은 빛과 광명을 뜻하는 법신불로 조상의 명복을 빌고 극락정토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The Beopgwangsa Temple site in Pohang, Korea, is known as a memorial temple of the royal family of Silla, related to Kim Gyun-jeong, who was the father of King Sinmu, 45th monarch of the Korean kingdom of Silla (reigned in 839).
Bihaksan Mountain where Beopgwangsa Temple was located was a place of military strategic importance for local defense, and small-scale national ancestral rites were held at the temple. The temple was in the vicinity of Wanggyeongbukro Road, a major route of Silla, which began from the capital city Gyeongju, passed Angang River in the north and Myeongju along the east coast and reached the northern border.
It appears that the reason Beopgwangsa Temple, a memorial temple of the royal family, was built in a local area not in the capital city, is related to the geographical importance. It can be also assumed that Kim Gyun-jeong's family had connections in the area of Singwang-myeon, Pohang, where the Beopgwangsa Temple site is located from the record that a tablet was given by a king to Seongjusa Temple, Boryeong, the base of descendants of Kim Ju-won, who belonged to the group of King Muyeol during the reign of King Munseong.
When Beopgwangsa Temple was rebuilt, an embankment was built to create a flat site on which the main building of the temple would be placed and a large-scale civil work was carried out to establish a drainage system suitable for the terrain in an effort to overcome the spatial restrictions of the mountainous area. It appears that a three-story stone pagoda was relocated as part of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The Buddha statue enshrined in the main building of the temple is assumed to be a Vairocana Buddha statute made in the 9th century. Vairocana Buddha is a law-body Buddha that embodies light and bright future, and Vairocana Buddha statutes were created to pray for the repose of ancestors and their rebirth in the Land of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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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 하대 처용(處容)의 관등 급간(級干)과 그의 실체

저자 : 이동윤 ( Lee¸ Dong-y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5-15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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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삼국유사』 「處容郞望海寺」조에서 확인되는 등장인물의 관등인 級干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 그와 관련하여 신라 하대 處容의 실체를 검토하였다. 級干은 급벌찬으로 알려진 신라의 9등급 관등이다. 이 관등의 수여 대상을 확인한 결과, 군공을 세우다 전사한 자들이 많았고, 그들을 위무하기 위한 관등의 하나가 級干이었다. 더불어 처용이 가진 級干 관등을 분석하여, 해당 관등이 역신에 대항하는 긍정적 존재가 사회에 미치는 위무적 영향력을 담보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처용랑망해사」조의 지백 級干(地神)이 부정적 차원의 자연재해로 해석되는 점과 대응된다.
또한 처용의 등장 배경이 동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신라 초기부터 동해와 관련된 왕실의 인식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고, 이를 처용이라는 인물과 연결을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처용은 헌강왕 당시의 왕실과 혈연적으로 관련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헌강왕이 문무왕과 같이 용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한 바가 확인되지 않는 한, 헌강왕을 용으로 볼 수도 없고, 용의 아들이 처용을 헌강왕과 연결하기는 곤란하다. 또한 산신과 지신의 춤사위가 사실상 자연재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동일선상에서 부정적으로 파악되는 역신에 대항한 처용을 만들어진 신적 존재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This paper analyzes the meaning of 'Geupgan(級干)', which is the official character of the characters in the "Cheoyongrang Manghaesa(處容郞望海寺)" section of the Samguk Yusa(三國遺事), and examines the reality of Cheoyong(處容) with it. Intervals are grade 9 bureaucracies, also known as Geupbeolchan(級伐飡). As a result of confirming the recipients of this bureaucracy, many died while establishing the military service, and one of the bureaucracies to consolate them was the rank. Based on this, it was possible to analyze Cheo-yong's inter-class bureaucracy, and it could be seen as guaranteeing the consoled influence of the positive existence against the evil spirit on society. This corresponds to the fact that the inter-class governments of the land god in the "Cheoyongrang Manghaesa" section are natural disasters of a negative dimension.
Also, since the background of Cheoyong's appearance is related to the East Sea, we examined what the royal family's perception of the East Sea was from the early days of Silla, and thought about whether it could be connected with the character of Cheoyong. It was difficult to say that Cheoyong was related by blood to the royal family at the time of King Heongang(憲康王). Unless it is confirmed that King Heongang emphasized the aspect of a dragon like King Munmu(文武王), King Heongang cannot be regarded as a dragon, and it is difficult for the son of the dragon to link Cheoyong with King Heongang. In addition, the dance movements of the mountain gods and the earth gods were viewed as actually symbolizing natural disasters, and Cheoyong, who opposed the evil spirit perceived negatively in the same line, was attempted to be understood as a created divine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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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 명종대 별기은(別祈恩) 주창자(主唱者) 술승(術僧) 치순(致純)

저자 : 정서윤 ( Jung¸ Seo-y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7-18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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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祈恩은 종교의례가 그 定例의 형태가 아닌 '別例' 형태로 설행되는 의례를 가리킨다. 고려 全 시기에 걸쳐 佛·道·儒·巫 등 다양한 종교적 색채를 보이며 설행되어 온 별기은은 고려 중기 국가적 환난으로 인해 빈번히 개설되며 점차 체계화되어 고유의례로 변모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고려 중기 별기은의 제도화·고유화를 주도했던 術僧 致純의 정체에 대해 고찰하였다. 치순은 명종대에서만 그 모습을 보이는데, 그에 대한 모든 기록에서 그가 별기은을 主唱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치순의 건의로 명종 8년(1178) 別例祈恩都監이 설치되며, 이제껏 타 의례의 별례의 경우에 불과하였던 별기은에 처음으로 고유성이 부과된다. 이듬해 치순은 또 한 번의 별기은 주창 모습을 보이는데, 3년에 한 번 會慶殿에서 행해지는 것이 정례였던 백좌회를 開國寺에서 前年에 이어 다시금 別設케 한 것이다. 즉 현재까지 확인되는 치순의 모습은 오직 두 기록 뿐이지만 모두 거국적 의례를 주창하던 그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으니, 명종대 별기은제행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이 중대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록 치순과 관련하여 유이한 두 기록만이 현전하고 있지만, 그가 술승이라는 사실과 함께 佛事와 관련한 도감 설치를 주장한 사실, 개국사에서 별기은 설행을 제안한 사실 등을 통해, 치순이 개국사 소속 승려로 짐작되며 당대 日官이었을 가능성이 있겠다. 이 글에서는 소량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치순의 흔적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의 정체와 함께 행보 및 정치적 관계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Byeolgieun(別祈恩) refers to a case where a religious ritual is practiced in a separate form rather than in a regular form. Throughout the Goryeo period, Byeolgieun, which has various religious colors such as Buddhism, Confucianism, Taoism, and shamanism, has been practiced. In the early Goryeo Dynasty, Byeolgieun, which has outstanding exceptions, has been practiced frequently due to national hardship and gradually systematized and transformed into a unique ritual since the middle of Goryeo Dynasty.
This study considered the identity of Sulseung(術僧) Chisun(致純), who led the institutionalization and uniqueness of Byeolgieun in the middle of Goryeo. Chisun appears only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明宗), and all of his records show the appearance of director Byeolgieun, drawing attention. Chisun insisted on the establishment of the Byeolryegieundogam(別例祈恩都監) in the 8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and it imposed uniqueness on Byeolgieun, which had been only a exceptional case of other rituals, for the first time. The following year, Chisun shows another appearance related to Byeolgieun, which allowed the Baekjwahoe(百座會), which was regular to be held once every three years, to be held at Gaeguk temple(開國寺) again following last year. In other words, there are only two records of Chisun that can be confirmed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but both show a move to oversee national rituals, so it is clear that his influence was great in the performance of Byeolgieun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Although only two records remain regarding Chisun, based on the fact that Chisun was a Sulseung, the fact that he suggested the establishment of a Buddhist-related Dogam(都監), and the fact that Byeolgieun was held at Gaeguk temple, it is presumed that he was a monk belonging to Gaeguk temple and a Ilgwan(日官) at the time. This study closely analyzed Chisun's two records and examined his identity, behavior, and background of his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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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임진왜란과 민족 구성원의 확대 - 왜란기 항왜(降倭)를 중심으로

저자 : 허준 ( Hur¸ J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5-21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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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降倭'로 불리는 일본인들이다. 애초에 침략군으로 조선에 온 그들에게 조선인들의 태도는 부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곧 그들의 전략적 유용성에 주목하였고 '항왜'는 倭軍과 싸울 아군으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항왜 중 상당수는 조선에 남아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降倭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은 전쟁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중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항왜에 대해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와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것은 항왜의 戰功이 조선 위정자들의 국가 수호에 대한 노력과 능력을 증명하는 유의미한 증거로 제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항왜에게 한국식 이름과 관직을 내리고 거주지를 확보해 주었다.
항왜는 이제 조선의 문화를 숭앙한 충성스러운 국가의 신민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현재 한국 민족의 일원으로 발전하게 된 역사적 성원의 하나로서 인식되어지고 있다. 이 논문은 조선 시대에 나타난 항왜의 정체성 전환 과정을 통해 '민족'의 출현을 역사적 기원에서 찾는 원초론적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민족'을 단순히 근대 이후의 산물로 정의하는 근대론적 관점의 문제 또한 지적하고자 한다.


This article examines hangwae, the Japanese who surrendered themselves to Chosŏn Korea during the Imjin War. Chosŏn people initially showed their negative attitudes toward hangwae who came to Korea as “invaders.” But after they found the usefulness of hangwae, the Chosŏn ruling elite often expected that hangwae would fight Japanese armies as a part of the Korean military. After the Imjin War, many hangwae remained and lived in Chosŏn Korea as Chosŏn people.
However, the antagonism of Chosŏn people against hangwae lasted long even after the war. Despite the collective anger, the Chosŏn ruling elite kept their favorable policy toward hangwae because they believed that hangwae could be the crucial evidence verifying the elite's efforts and competence to protect their people. Thus, they gave hangwae Korean names, official titles, and the places to live.
Now, hangwae are remembered as those who sincerely admired the culture of Chosŏn Korea and as a part of the origin of current Korean nation. Delving into the issue of the identity transformation of hangwae during the Chosŏn period, this study raises a question about a primordialist vision of the nation as timeless. Also, this study suggests that modernists' assumption that developments associated with modernity were crucial to the origin of national consciousness cannot be universally applied to all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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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芹曝集』의 자료적 검토

저자 : 장준호 ( Jang¸ Jun-ho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5-25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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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芹曝集』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柳成龍은 자신이 작성했던 차자와 계사를 謄出하여 成冊하고 '芹曝'이라고 명명했다. 『근폭집』에는 壬辰年(1592)부터 丙申年(1596)까지 유성룡이 작성했던 군국 기무와 관련된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辰巳錄』·『軍門謄錄』과 함께 『亂後雜錄』, 초본 『懲毖錄』 저술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후 유성룡의 후손들은 목판본 16권본 『징비록』을 간행하면서 『근폭집』을 권3~5에 수록하였다.
그동안 유성룡과 임진왜란 연구에서 『근폭집』은 널리 활용되었지만, 이 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는 초본 『근폭집』과 간본 『근폭집』의 체재와 수록 내용을 살펴보았다. 또한 『서애집』에 수록된 차자와 계사를 조사하고, 두 판본을 비교·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애집』에만 수록된 계사 2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서애집』 간행에 초본 『근폭집』의 자료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간본 『근폭집』은 어떠한 형식과 체재를 갖추어 간행되었는지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간본 『근폭집』은 초본 『근폭집』과 달리 문서들이 차자와 계사로 분류되어 간행되었다. 수록된 차자들은 임진왜란 각 시기 마다의 전황과 時務策의 大綱이 제시되어 있다. 이에 비해 계사들은 차자에서 제시된 시무책들이 各論的으로 논해져 있다. 「陳時務箚 甲午四月」에서 유성룡은 “대강이 이미 거행되면 節目은 저절로 따라가게 마련”이라고 하였다. 간본 『근폭집』은 저술로서 통일성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차자가 綱으로, 계사는 目으로 하는 綱目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성룡의 『근폭집』은 『징비록』에 가장 빈약하게 기술되어 있는 강화협상기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폭집』은 강화협상기 유성룡의 행적과 그가 제안한 정책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난후잡록』과 초본 『징비록』의 저술과 『서애집』과 16권본 『징비록』의 간행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This thesis comprehensively examines Yoo Seong-ryong's Geunpokjip(芹曝集) This book was written by Yoo Seong-ryong during the war and contains matters related to military service. This data was widely used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 study of Yu Seong-ryong, but a comprehensive study of this book has not yet been published.
In this paper, the list and its contents were confirmed by comparing the two editions of geunpokjip. Through this work,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data were first identified. In the process of publishing Geunpokjip as a woodblock print, the types of documents were clearly classified. The documents in the front are the main points of military policy proposed by Yoo Seong-ry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documents in the back contain details for policy implementation. This can be said to be a book published by descendants that best reflects Yoo Seong-ryong's military government ideas. In this respect, this book can be said to be an important sample to understand Yoo Seong-ryong's deeds and how his writings were published in later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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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세기 후반 통제영의 화포 제작과 監造軍官의 궤적

저자 : 김현구 ( Kim¸ Hyun-gu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9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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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양란을 겪으면서 화기류의 개발과 보급은 확대되었다. 17세기 후반기는 명ㆍ청의 교체에 따른 수도권 방어 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이 추진되고, 중앙 군영이 신설되면서 화기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특히 수군의 전력 유지를 위한 탑재 화포의 다양화와 배정의 증대는 화포 주조의 활성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8전선 선단 자체의 수급을 위한 주요 화포의 제작 현장이자 여분의 물량 공급이 가능했던 곳이 통제영이었다. 통제영과 연관된 현존 화포들은 천자 총통에서부터 주류를 이룬 불랑기류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화포 제작을 위한 기술력과 원자재 공급의 용이함이 작동하였고, 이를 이끈 감조군관이나 장인의 활약상은 눈부신 바 있었다. 화포 제작의 양상은 통제영 현지에서 생산된 물량을 직접 수요처에 공급하는 방식과 풍부한 경험과 기술력을 보유한 감조관과 장인들이 현장에 파견 투입되어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전자에는 신청과 강준, 후자에는 신기립이 감조군관으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이를 계기로 삼아 재지무반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그 후 그들 가계의 후예들은 여럿 보직을 맡아 지역사회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윤만제의 가계처럼 중앙무대에서 이탈하여 변방 사회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컨대 지방 군영이 가진 화기 제작의 여력과 인적 자원의 양성은 이 시기 군제 재편의 일익을 담당했고, 나아가서 해당 지역사회의 변모에도 파급력을 발휘하였다. 통제영은 그러한 역동성의 구현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During the dual w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development and distribution of a kind of firearms(cannons) expand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7th century, the demand for firearms increased further as a series of policies were promoted to strengthen the defense of the metropolitan area following the replacement of Ming and Qing, and the central military was newly established. In particular, the diversification and allocation of artillery loaded to maintain the naval forces seem to have led to the activation of cannon casting.
In this process, Tongjeyoung was the main site of the production of cannon to adjust supply and demand of the 8 Warships fleet itself and the place where the extra supplies could be supplied. The existing cannons related to Tongjeyoung range from Cheonjachongtong(天字銃筒) to the mainstream Bulranggi(佛狼機). Above all, the technology for the production of canon and the ease of supplying raw materials worked, and the performance of the military commander in overseeing or craftsman who led it was remarkable activities. The aspect of cannon production was to directly supply supplies produced in the Tongjeyoung to the consumer, and to be dispatched to the site by inspectors and craftsmen with abundant experience and technology. Shin Chung(申淸) and Kang Joon(姜俊)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former and Shin Gi-Rib(申起立) in the latter as a inspecting military officer.
Taking this opportunity, they were able to solidify their position as Jaejimuban(在地武班), and after that, descendants of their households took several positions and emerged as key forces in the local community. On the one hand, like Yoon Man-je's family, there were cases where he deviated from the central stage 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marginal society to seek a new path. In short, the capacity and training of human resources for the production of firearms owned by local military Camps and military management played a part in the reorganization of the military system during this period, and furthermore, it had a ripple effect on the transformation of the local community. The Tongjeyoung was a site showing the realization of such dyna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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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국역 해행총재』를 통해 본 지식 교류의 두 층위

저자 : 김경남 ( Kim¸ Kyung-nam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2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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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국역해행총재』를 대상으로 시대 상황에 따른 지식 교류의 양상을 살펴보고, 이들 작품을 사행 기록과 피로·표류 기록으로 나누어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이루어지는 지식 교류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지식 교류의 두 층위가 갖는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해행총재』는 조선 후기 일본 사행 기록(일기)을 모아 엮은 책으로 조엄의 『해사일기』에 따르면 洪啓禧가 처음 편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徐命膺의 『식파록』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책은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또 『월봉해상록』이 간행될 당시 조엄이 쓴 '발문'에서는 그 당시 윤봉조가 일본 사행 기록을 모아 『해행 총재』를 편찬했다고 하나 이 또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 이후 1914년 조선고서 간행회에서 『해행총재』 4책을 간행하였으며, 1975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다수의 작품을 추가하여 이를 국역하였다. 이 점에서 『국역해행총재』는 조선시대 한일 지식 교류의 양상과 특징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지식 교류의 두 층위를 고려할 때 사행단과 피로·표류 기록은 공식성과 체험의 생동감 여부에서 차이를 보인다. 『국역해행총재』를 통해 볼 때, 근대 이전 일본과의 지식 교류에서 '사행단 기록'은 공식성을 띠며 그를 통한 서적 유입 등의 지식 유입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피로·표류 기록'은 격식적인 면보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동감이 잘 나타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aspect of knowledge exchange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s for the GUKYEOK(Korean translation) HAEHAENGCHONGJAE(國譯海行摠載), and divides these works into meandering records and fatigue-drifting records to clarify the formal procedures for knowledge exchange and knowledge that takes place in unintended situations. It started with the purpose of examin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layers of exchange.
According to JO EOM(趙曮)'s HAESAILGI(海槎日記), HONG GYEHEE(洪啓禧) compiled the first book, and based on this, SEO MYEONGEUNFG(徐命膺)'s SILPARPK(息波錄) was compiled. However, the reality of these two types of books is unknown, and in the BALMUN(concluding remarks) written by JO EOM at the time the WOLBONGHAESANGROK(月峯海上錄) was published, it is said that YUN BONGJO compiled the HAEHAENGCHONGJAE(海行摠載) by collecting Japanese meandering records at that time. It is difficult to ascertain the reality. After that, in 1914, the JOSEONGOSEOGANHAENGHOI(朝鮮古書刊行 會) published 4 books of the HAEHAENGCHONGJAE, and in 1975, the MINJOKMUNHWACHUJINHOI(民族文化推進會) added a number of works and translated them into Korean. In this regard, this books are a good resource for examining the aspects and characteristics of knowledge exchange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Joseon Dynasty.
Considering the two levels of knowledge exchange, the meandering group and the fatigue-drift record show differences in the formality and liveliness of the experience. According to these books, in the knowledge exchange with pre-modern Japan, record of the diplomatic mission(使行記錄) are formal and knowledge flows through them, such as inflow of books, whereas records of fatigue and drift had a vitality based on experience rather than form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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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적성방향약금사학절목(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으로 본 천주교 금지 정책과 척사(斥邪) 인식

저자 : 김숙경 ( Kim¸ Sook-kyeo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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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은 '사학'을 금지하기 위해 '적성방'에서 만든 '절목'이	다.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의 척사전교에 따라 비변사는 강력한 금교 정책과 천주교 배척 내용을 담은 관부 문서를 전국에 내렸다. 이른바 신유박해의 시작으로, 정조대의 교화중심대책에서 일변해 천주교 근절을 목표로 삼은 강력한 금교책이었다. 조정은 이를 위해 오가작통법과 향약에 주목하고, 이 두 가지를 결합해 향촌의 말단 조직까지 미치는 금사학절목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은 1801년 조정의 지시로 향촌단위에서 만든 절목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확인되는 문서이다. '향약금사학절목'에는 비변사의 지시에 따라 적성방에서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오가통법을 통한 천주교 신자 색출 및 통수의 연대책임을 비롯해, 향약을 통한 풍속교화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척사 인식과 금교 정책뿐만 아니라 비변사의 지시에 따른 향촌사회의 금사학 대응책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러한 '절목'의 검토를 통해 당시 조정의 입장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면밀히 확인할 수 있다. 조정은 정조대의 교화책을 탈피해 천주교를 변혁의 종교로 인식하여 근절을 목표로 삼았고, 조정을 넘어 향촌의 지배층도 이런 인식을 공유했다. 그래서 향촌사회도 조정의 지시에 호응하여 오가작통을 통한 감시와 통제책을 시행해, 천주교의 횡적 전파를 막고 전통적 유교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정과 향촌의 강력한 금교 정책을 시행한 결과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체포되고 천주교의 확산은 저지되었다. 아울러 鄕約禁邪學節目의 제정과 실시에도 살아남은 천주교 신자들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을 실천함에 따라 산중 교우촌 중심으로 교회가 재편되었다. 결국 「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을 통해 신유박해 당시 조선 지배층의 천주교에 대한 척사 인식과 금교 정책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교회에 미친 영향까지 파악할 수 있다. 「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을 검토한 의의는 여기에 있다.


Jeokseongbang-Hyangyak-Geumsahak-Jeolmok (赤城坊鄕約禁邪學節目) is a jeolmok (detailed regulations) compiled at Jeokseong-bang for the prohibition of 'sahak (wicked learning).' On January 1, 1801, pursuant to the grand queen dowager's order for the rejection of heterodoxy, Bibyeonsa issued across the country an official document proclaiming strict policy against Catholicism and the rejection of it as heterodoxy. It was the beginning of so-called Sinyubakhae (Catholic Persecution of 1801), and was a strict policy aiming at the eradication of Catholicism, changing completely from edification-centered measures during King Jeongjo's reign. For this, the Royal court took notice of oga-jaktong-beop (the system of five households in one tong) and hyangyak (village self-governing rules), and combined both of them and made geumsahak-jeolmok, which applied even to the lowest organizations of rural villages. Jeokseongbang- Hyangyak-Geumsahak-Jeolmok was issued in such a context, and is the only document currently found among jeolmoks enforced at villages in 1801. The Hyangyak-Geumsahak-Jeolmok contains not only the process of jeolmok being enforced at Jeokseong-bang according to the instruction of Bibyeonsa, but also matters such as the tracking down of Catholics through oga-tong-beop, the joint responsibility of the head of tong, and the edification of customs through hyangyak. Therefore, it is an important historical source that reveals the countermeasures of village society taken against sahak under the instruction of Bibyeonsa, as well as the Joseon government's perception on the rejection of heterodoxy and its policy on the prohibition of Catholicism. From the review of the 'jeolmok,' the position of the Royal court and the response of village society can be identified in detail. The Royal court perceived Catholicism as a religion of revolution and was determined to eradicate it, breaking from the policy of edification during King Jeongjo's reign. And the ruling class of villages also shared this perception. Thus, villages tried to autonomously enforce surveillance and control through ogajaktong in order to prevent the horizontal propagation of Catholicism and to maintain the traditional Confucian order in village society. As a result of the strict policy against Catholicism carried out by the Royal court and villages, lots of Catholics were arrested, and the spread of Catholicism was suppressed. In addition, the church was re-organized revolving around believers' villages in mountains according as Catholics, who survived the enforcement of Hyangyak-Geumsahak-Jeolmok, fled to deep mountains and adhered to their faith. In conclusion, from Jeokseongbang-Hyangyak- Geumsahak-Jeolmok, it is possible to know the rejective perception of the Joseon's ruling class on Catholicism as heterodoxy as well as polices against Catholicism at the time of Sinyubakhae, and also to grasp subsequent effects on the church. The present investigation of Jeokseongbang-Hyangyak- Geumsahak-Jeolmok is significant in this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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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의 양산과 변진접도국

저자 : 선석열 ( Seon¸ Seok-yeo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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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한시기의 변한과 진한의 24개 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양산에 있었는가를 추정해 보았다. 그 위치가 비정된 소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 소국의 공간성과 방향성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삼한 소국명의 표기방식에는 음운적 음독뿐 아니라 음의적인 훈독을 병용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본 결과, 변진접도국의 위치는 양산에 비정되었다. 접도국이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을 의미하므로, 양산에 위치한 나라였다. 삼한시기의 양산지역은 4세기 이전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晋書』에 보이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중국 서진과 교섭하였으며, 독로국·접도국을 함께 교섭하였다.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4세기에 양산은 금관가야계 문화였다. 4세기에 이르러 접도국은 금관가야연맹에 참여하였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연맹이 와해되었고 접도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공격한 황산진 전투가 일어난 6세기 전후까지도 상당 기간 독자성은 유지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게 되어 지방의 지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63년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공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양산을 ①의례적인 공납의 대가로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유형에서 ②자치를 허용하면서 유력 세력을 재편하는 유형으로 통제가 강화되었다. 505년에 지증왕은 주군제를 시행하면서 양산지역도 지방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즉 접도국은 삽라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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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야불교와 파사석탑

저자 : 조원영 ( Jo¸ One-yo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7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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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가야불교의 전래 시기와 전래된 불교의 성격, 그리고 허왕후가 가지고 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가야의 불교 전래와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작성되었다.
가야불교에 대한 자료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편적 내용뿐이며 그 외에는 대부분 김해지역에 전승되는 자료들에 한정된다. 그중에서 가야불교와 관련된 전승 자료를 살펴보면 대체로 가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가야인들에게 불교가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가야불교 전래 시기를 증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질지왕대 왕후사 창건을 통해 국가불교 또는 왕실불교로 보고 있다.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가야 불교는 남방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중국을 거쳐서 전래되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가야불교 전래와 관련 짓는 아유타국과 허왕후의 정체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허왕후와 그 일행이 모두 중국식 이름이라는 것과 중국식 관직명을 갖고 있다는 점, 가지고 온 물건도 '중국 점포의 여러 물건'으로 표현한 점 등에서 인도와 관련 짓기는 어려운 듯하다. 아마도 아유타국과 허왕후 관련 설화는 후대의 불교적 윤색을 거쳐 불교를 전해준 인도의 어느 지역,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증거로 알려진 파사석탑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있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살펴보면 수로왕대에는 가야에 창사·봉불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가락국 초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가야에 불교가 공인된 시점은 왕후사가 창건된 질지왕 2년(452) 전후이며,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그보다 좀 더 이른 백제와의 외교 교섭이 활발했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은 그 시기에 제작된 인도의 불탑 양식이 아니므로 인도에서 전래된 탑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탑 부재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많이 마멸되긴 했지만 다포형식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이 탑이 우리나라에 다포형식의 공포가 전해진 원 간섭기 전후에 조성된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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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락국기」로 본 가락국의 형성

저자 : 안홍좌 ( Ahn¸ Hong-jw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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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는 점차 개별 정치집단에 대한 연구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다양한 사료들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야가 남긴 것이 아니어서 가야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가락국기」로 가야 사회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가락국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가야지역에 변한의 '國'이 형성되던 시기를 복원하고자 했다.
「가락국기」에는 이외에도 왕후사의 창건 등 가야불교 관련 기록, 가락국의 사적에 있는 멸망 기록, 가야의 왕력 기록 등이 있고 이를 활용한 연구결과들도 쌓여가는 중이다. 이런 연구가 계속된다면 가야 사회는 좀 더 입체적으로 완성되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윤색이 있으나, 가락국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락국기」의 활용은 앞으로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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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세기 가야, 백제, 왜의 교류와 충돌 - 왜계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중심으로 -

저자 : 남영웅 ( Nam¸ Young-woo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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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 경남서부지역 일대에서는 규슈계통의 왜계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왜계고분은 백제의 왜계관료, 임나일본부와의 연관지어 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에 영산강과 서남해안, 금강유역을 백제권역, 경남서부지역을 가야권역으로 구분한 뒤 각 권역에 존재하는 왜계고분의 특성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권역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확인한 뒤 『三國史記』와 『日本書紀』의 기록을 통해 고분이 성립되던 시기 야마토왕실과 백제왕실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전방후원분이 야마토왕권과 관계있는 자들의 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야마토왕실에 의해 파견된 자들로 보인다. 이들의 가족들은 친위왜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 따라 웅진에 머물게 된 결과 공주의 왜계고분군이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서남해안의 왜계고분과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는 백제계 위신재는 동성왕이 왜인들을 통제하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야마토 왕권이 지방의 호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 위신재를 바탕으로 그들의 권위와 독자적인 외교권을 인정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령왕 이후 이들은 중앙의 왜계관료로 변화하게 되었고 백제화 됨에 따라 영산강의 전방후원분과 서남해안의 왜계고분도 소멸하였을 것이다.
가야권역의 왜계고분의 성립에 대한 배경은 한국문헌에는 그 기록이 등장하지 않아 『日本書紀』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검토해보았다. 우선 고구려 남정이후 가야-왜의 교역로 변화에 대해 확인하고, 이와이 난 이후 近江毛野臣과 임나일본부 등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의 활동에 대해 확인하였다.
이와이 난 이후 가야권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은 북규슈 지역호족으로 보이며, 가야제국에 파견되어 백제왜계관료와 대립하거나 혹은 백제를 공격하려 시도한 것은 북규슈, 키비지역 호족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함께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기나이, 오우미 지역 호족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왕권은 당시 지방호족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하지 못한 결과, 규슈지역을 장악함에도 불구하고, 야마토 왕권의 외교적 노선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왜계고분들은 5~6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충돌이 증가하고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일본열도 통합이 가속화됨에 따라 일본열도에 건너가 있던 도래인들과 일본열도 제 세력 간의 관계, 그리고 백제왕권과 야마토 왕권과 가야제국과 일본 지방수장세력들 간의 정치, 외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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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서기』 소재 '임나 4현 할양'기사의 재해석

저자 : 위가야 ( Wee¸ Ka-y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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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나 4현 할양' 기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점검하여 각각의 異見을 통해 확인된 '위치 비정'의 난맥상을 확인한 후, 관점을 달리하는 '임나 4현 할양' 기사 이해를 시도해 보려 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에 '사실'과 '인식'이 섞여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합적 반영의 결과가 사료의 조작이라면 그 조작 이전의 실체를 검증하고 조작이 배태된 동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사실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지적 또한 중시하면서 '임나 4현 할양' 기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서 大伴金村大連의 실각 원인을 기술하면서 신라 방면에서의 실책이라는 실상에 덧붙여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한반도관에 입각하여 임나의 멸망 또한 大伴氏의 실책에 따른 결과라는 내용을 부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에 전해지고 있던 임나 관련 지리적 정보에 의거하여 '임나 4현'의 지명이 부가되면서 513년 '기문·대사 분쟁'의 전제로서 '임나 4현 할양'이라는 가공의 사실이 창출된 것이다. 따라서 관련 지명의 비정을 통해 당시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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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전과 상주(尙州)와 문경(聞慶) 지역 호족의 동향

저자 : 이도학 ( Lee¸ Do-hack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0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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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신라 멸망의 기폭제가 되었던 농민 난이 상주 지역에서 발생한 원종과 애노의 난이었다. 이 난을 신라 조정이 진압하지 못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신라 전역에서는 群小 세력들이 할거하거나 독립했다. 이 가운데 후백제를 건국한 진훤의 父인 아자개는 농민 난의 와중에 상주 지역을 석권하고 장군을 칭하며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그러한 아자개는 918년에 고려가 건국된 직후 왕건에게 歸附하였다. 아들인 진훤이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호령하는 시점에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했다는 것은 납득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同名異人說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자개는 이전 906년에 상주지역으로 진출한 궁예의 부하 왕건과 遭遇한 바 있다. 이에 대응하여 후백제의 진훤은 상주 지역 확보차 출병했지만 거듭된 전투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왕건은 궁예의 신라 시책과는 달리 아자개에 대해 유화적으로 나왔다. 이러한 선상에서 후계자 상속 문제가 발생하여 진훤과 이복형제들 간의 갈등 속에서 아자개는 고려로 귀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아자개와 자제를 비롯한 친족들은 출신지인 가은현을 지배하였다. 가은현이 포함된 문경 지역은 소백산맥 남북을 잇는 兩大 교통로의 하나인 계립령로와 연결되어 있는 요충지였다. 게다가 문경은 남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지점에 소재하였다. 왕건은 문경을 전진 기지로 하여 낙동강을 이용해 康州 즉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까지 일사천리로 진출하고자 했다. 왕건의 집요한 진출 시도로 인해 문경 일원의 후백제 호족들은 귀부하고 말았다. 진훤은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의 수도를 급습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진훤의 패배는 父인 아자개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문경을 비롯한 신라 지역에서의 거점 확보 실패와 신라 민심 이반에 기인한 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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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숙종대의 내수외양(內修外攘)과 대일관계 변화

저자 : 김태훈 ( Kim¸ Tae-h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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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숙종대 대일정책 성과가 조선후기 한일관계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지만, 일본측이 가해오는 외교적 압박은 조선의 대일정책 혼선과 맞물려 교섭과정에서 원칙이 무시되다시피 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고착시켰다. 통틀어 3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왜관 이전 교섭 과정은 17세기 중반 대일정책·대일관계의 수세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17세기 후반기에 점차 대내외적 상황이 호전되고 국가적 재건을 달성하면서, 숙종대에는 대일관계도 점차 변화를 보이게 된다. 1673년에 결말을 보게 된 왜관이전 교섭은 수세적 대일관계의 산물이지만, 왜관 이전이 완료된 1678년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1678년에 무오약조와 1683년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대일외교에서 불합리한 관행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을 정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대내외적 여건들로 인해 대일정책·대일관계가 수세적 양상을 보였다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수를 달성해나가던 시점인 숙종 전반기의 대일관계는 무오약조와 계해약조의 성립으로 확연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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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량화집(草梁話集)』의 이본(異本)과 재생산 - 『조선초량화집(朝鮮草梁話集)』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양흥숙 ( Yang Heung-sook ) , 정성일 ( Chung Sung-il ) , 김동철 ( Kim Dong-chu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1-28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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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초량왜관에서 근무한 조선어 역관 小田幾五郞이 쓴 『草梁話集』의 異本들을 고찰하였다. 『초량화집』은 초량왜관 안팎의 조선인, 부산사람들, 부산의 마을 등이 묘사되어 있어, 조일교류사는 물론 18세기 후반의 부산 현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다. 『초량화집』은 여러 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은 일본 東京都立中央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도립본」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부산박물관에 『조선초량화집』이란 표제로 소장되어 있는 『초량화집』을 소개하였고, 이를 「부박본」이라고 하였다. 「부박본」은 1927년에 1월 小田省吾가 교정한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는 『초량화집』 중 필사 시기가 가장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립본」과 「부박본」의 가장 큰 차이는 도입부이다. 『초량화집』은 서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도립본」은 바로 본문이 시작되는데, 첫 목차는 「一 御送使船着之節古來者萬戶牧ノ嶋外迄爲出迎由」이다. 대마도 사절이 왜관이 도착하였을 때 조선측에서 영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박본」은 첫 목차가 시작되기 전에 '초량 지명 유래와 왜관 이전', '초량왜관의 크기' 등 초량왜관의 개요가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부박본」은 전체 목차와 내용 구성면에서 「도립본」과 많이 다르며, 「도립본」보다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초량화집』은 계속 필사되면서 수정 또는 증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부박본」은 1933년부터 편찬된 『釜山府史原稿』에 인용된 『초량화집』과 내용면에서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부산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많은 사료들이 수집되고, 참고문헌으로 인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초량화집』이 다시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몇 개의 異本들을 비교하면서 『초량화집』의 변화와 그 의미들을 고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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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항기 초상국(招商局)의 한국항로 개척과 한중 해상운송망

저자 : 김영신 ( Kim¸ Young-si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1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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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품의 판매가격은 구매력과 직결되어 판로를 좌우한다. 유통과정의 단축과 운임의 절감을 통해 상품 원가를 어느 정도 하락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산지나 집산지에서 직송하는 직무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개항 초 공히 중계무역을 통해 한국시장 진출을 노렸던 日商과 華商의 경쟁관계에서 운송망 확충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화상이 단시간에 한국 무역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 확대를 통해 그간 형식에 불과하였던 '종주권'을 강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변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한중 간 해상운송망이 확충된 것은 화상의 상무진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개입하였던 袁世凱는 경제세력 확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기간 화상의 정상적인 무역활동은 물론이고 '밀무역'까지도 방조하고 조장하는 등 화상의 경제활동에 유무형의 도움을 주었다. 화상의 경제진출지원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초상국 선박의 정기적인 한국운항을 성사시킨 것이다.
上海와 仁川을 잇는 해상운송망 확충은 화상의 무역활동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지닌다. 한중항로는 운항 후 계속되는 적자에 한 차례 운항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항로를 재개설하고 적자상태에서도 유지한 것은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중시한 李鴻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중항로 개통과 유지가 정치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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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45년 해방공간에서 교차하는 미군과 일본군의 이동

저자 : 김윤미 ( Kim¸ Yun-mi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1-33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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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동북아 지역의 물리적 주체였던 일본군과 현대 동북아의 물리적 주체로 등장한 미군이 해방공간에서 교차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1945년 일본군과 미군의 이동은 일본 '제국'이 붕괴하고 국민국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 주도의 현대적 시작을 의미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군 무장해제와 철수를 실시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미군정의 행정업무가 아니라 미군의 첫 번째 군사작전이었다. 이것은 남한이 '해방지역'이 아니라 '점령지역'으로 미군이 직접통치하는 작전구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점령한 지역은 일본군의 군사적 거점지역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귀환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일본군의 전략 지점에 병력을 배치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군사시설과 병력을 장악하여 한반도를 군사점령하기 위한 거점으로 서울지구, 부산지구, 군산지구를 선정했다.
일본군과 미군의 교차지점 중 유동성이 가장 큰 해방공간은 부산이었다. 부산항은 대다수의 일본인과 일본군이 이동하고, 조선인들이 귀환하였으며, 귀환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많은 수의 미군도 주둔했다. 부산은 미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주둔하는 공간이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귀환항으로 역사적 전개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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