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

KCI등재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

The Staring Point of Looking for the Root of Chinese Civilization, Emperor Yan(炎帝)

배현준 ( Bae Hyun-joon )
  • : 한국고대학회
  • : 선사와 고대 6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141-174(34pages)
선사와 고대

DOI


목차

Ⅰ. 서론
Ⅱ. 문헌 기록 속 각기 다른 염제의 모습
Ⅲ. 고고자료를 통한 염제의 실체화
Ⅳ. 현대 사회 속에서의 염제
V. 결론
참고문헌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중국은 자신들을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일컫는다. 과거에는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들을 실제로 존재한 인물 또는 집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문헌기록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고, 서양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문명(국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며, 이에 따른 사회발전단계론도 구축한다. 중국의 문명 기준과 사회발전단계에 의하면 문헌 속의 하나라는 이미 발달된 문명 국가 단계로 고고학적으로는 이리두문화로 비정된다. 중화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보다 앞선 오제시대는 수장사회(고국) 단계에 해당하고, 홍산문화, 양저문화 등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중화문명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삼황시대는 자연스럽게 초기수장사회(고성) 또는 부족사회(고문화) 단계에 해당하며, 중화문명의 기원이 되는 시기가 된다.
한편 염제는 오제시대의 맨 앞에 있는 황제와 형제 관계이면서, 삼황시대의 맨 마지막인 신농과 동일시된다. 즉, 염제는 오제시대의 처음과 삼황시대의 마지막에 걸쳐 있는 것이다. 결국 염제의 실체화는 중화문명, 더 나아가서 중화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그 뿌리를 찾아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는 평등사회에서 문명의 전제가 되는 불평등사회로 전환되는 양상이 확인되기에 여기서 염제에 대응되는 고고학문화를 찾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앙소문화의 반파유형과 묘저구유형이 거론되지만, 문헌의 염제와 곧바로 대응시키기에는 아직 적지 않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과 정부차원에서는 염제와 관련된 사당과 무덤을 건설하고, 조상숭배의 제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The Chinese consider themselves the descendants of Emperor Yan(炎帝) and Emperor Huang(黃帝). Emperor Yan(炎帝) and Emperor Huang(黃帝) is person or group that represent the Three Emperors(三皇) and the Five Emperors(五帝) respectively. They used to be thought of as legendary beings, but recently they have been made to be real beings.
The Chinese emphasize trust in literature records, make standards of their own for civilizations and constructs social development theories different from the West.
On the other hand, Emperor Yan(炎帝) is identified as a brotherhood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Huang(黃帝) at the head of the five emperors(五帝), as well as Sinnong(神農) at the last of the three emperors(三皇). In other words, Emperor Yan(炎帝) covers the beginning of the five emperors(五帝) period and the end of the three emperors(三皇) period. In the end, the realization of Emperor Yan(炎帝) is the beginning of revealing how the Chinese civilization, and furthermore, the Chinese people, was formed, and at the same time, it was the beginning of the search for its roots.
Nevertheless, the private and government levels have built shrines and tombs related to Emperor Yan(炎帝) and used them as a place for ancestral worship. This gives Chinese people national pride, and also provides a good mechanism to unite Chinese society where various ethnic groups are intertwined.

UCI(KEPA)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9-0432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1-2021
  • : 623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6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청동기시대 고대 북방 유라시아와 동북아시아의 네트워크 -전차의 확산을 중심으로-

저자 : 강인욱 ( Kang¸ In U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43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고에서는 우랄산맥 지역에서 발생한 고대 전차의 연구현황을 살펴보고 그들이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과정을 유라시아 초원문화의 유입경로가 되는 하가점상층문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전차의 등장과 동아시아로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의 전파 과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 기술과 사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인문적 요인과 함께 전차를 운용 가능할 수 있는 지리 환경적인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각 지역 사회에서 전차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하가점상층문화의 경우 전차를 만들고 운용한 집단과 전사 집단이 별도로 존재한 흔적이 있다. 이후 실질적인 전차가 사라지고 대신에 전차는 전사를 상징하는 도구(고삐걸이)가 장식화되어서 전사 집단과 결합하게 된다. 하가점상층문화에서는 실제 전차를 전쟁에 도입하는 실질적인 효용이 크지 않았다. 대신에 전차의 부속구는 의례와 상징의 역할이 강조되는 샤먼의 도구로 전환되었고, 이후 비파형동검문화로 그 요소가 확산된다. 이것은 동아시아 청동기의 발달이 전쟁보다는 제사와 샤먼계급의 등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왔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국력과 행정적인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유라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된 전차는 일방적인 확산이 아니라 각 지역에 맞게 적절하게 변용되었고 재지사회에서 재창조 되었다. 비파형동검 문화권의 의례용 청동기들이 전차의 부속과 관련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유라시아 전차의 확산은 동아시아와 유라시아 청동기 시 기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가장 실증적이며 구체적인 자료가 된다.


In this paper, the author examines the current status of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ariot in Eurasia, and its expansion to North-eastern Asia, focused on the upper-xiajiadian culture located on the crossroad of the Eurasian steppe and Northeast Asia. Unlike many cultures of the Late shang~early Zhou period in northern China, such as the baifu type and the Lijiaai culture, Upper Xiajiadian culture didn't accept chariot as the main weaponry. Instead, the symbolic significance of the chariot held its meaning, and various elements of the chariot were absorbed into the ritual system of the Lute-shaped dagger culture, in which bronze mirror with knots was used as the main rite tool. Finally, this deformed chariot symbolic material affected the Korean Peninsula indirectly during Slender dagger culture.
The advent of the chariot and its spread to North-eastern Asia cannot be explained simply by the diffusion of technology. In order to understand the technology and use, the geographical and environmental factors that can operate chariot, along with geo-sociological factors such as war, politics, society, and economy, must be considered comprehensively. In other words, each community should have the ability to create and use a chariot. In the case of Xiaoheishigou cemetery of Upper-Xiajiadian culture, the author could trace the divided groups of warriors 1) chariot and weaponry, 2) chariot, 3) weaponry without chariot. This shows that the usage of the chariot was not so actual in Upper Xiajidian culture. Instead of that, some details of chariot instruments like horse-bell, hoppers, and rein hook were decorated and combined with the warrior group. The reason why the chariot was not used as a tool in real warfare is due to the geographical environment in southeastern Inner Mongolia, where the plains are not developed. In other words, the practical utility of the chariot was not significant in Upper Xiajiadian culture. Instead, Chariot was transformed into a ritual and symbolic significance for Shaman and spread over into Lute-shaped dagger culture area of Manchuria and Korea.
As such, the spread of chariot worked with the global historical dynamics of Eurasia, as well as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he Upper Xiajiadian. In the Shiertaiyingzi type of Lute-shaped dagger culture of Liaoxi region, the feature of chariot just remained as some bronze bells and π-shaped rein hook and a bronze mirror with knot symbolized the wheel of the chariot.
We can conclude that chariot tradition led to the development of the bronze age of the Eurasian steppe, which was transformed into a ritual-oriented symbol in North-eastern Asia. Meanwhile, in China, it was transformed into a symbol of the statelet's power and administrative capabilities through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The chariot was appropriately adapted for each region and recreated in the context of each society, rather than a one-sided spread. Considering that the ritual bronze ware of the Lute-shaped dagger culture is related to the indirect spread of chariot tradition, it can be assumed that the ideas and myths related to chariot spread to ancient Korea like the Haemosu epic of Buyeo state could be a result that has been modified over a long period of time, but has continued cumulatively.

KCI등재

2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청동 네트워크와 교류

저자 : 이후석 ( Yi Hu-seo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5-8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변동 과정에서 확인되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는 정치체의 교류 또는 권력 관계가 반영되어 있어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청동 네트워크에는 엘리트층의 권력 기반으로 연결되는 기술이나 이념 등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비파형동검문화의 형성 단계에는 요하평원지역과 요하 상류 방면과의 청동 네트워크가 주목된다. 비파형동검문화는 요하평원 동쪽 구간에서 기원전 10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장인집단과 엘리트층이 청동 제련기술을 바탕으로 검의 이념 체계를 수용하여 비파형동검을 만든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기 단계에는 요동지역에서 길림~남한지역으로 청동 네트워크가 확장되며, 요북 동부지역(철령)과 요동 남단지역(대련)에서 거점 유적군이 확인된다. 무기류와 공구류는 요북지역에서 남한지역까지 확산되며, 선형동부 같은 일부 공구류는 요남지역을 거쳐 산동지역까지 전해진다. 요동 남단지역에는 요서계통 유물들도 확인되고 있어 광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 단계에는 요중지역을 중심으로 청동 네트워크가 재편된다. 청동 유물들은 요동계통 위주에서 요서계통 중심으로 일변하며, 요중지역에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들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특히 정가와자유형의 네트워크가 북한 방면으로 확산되는 한편 산동지역과도 동검 같은 무기류를 교류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고조선의 발전 과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양상으로 추정된다.


The interaction network identified in the process of change in Liadong Area the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is notable for its reflection of polities' exchanges or power relations. The Bronze Network deserves particular attention because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elite reacting, new technology, or ideologies connected to the power base.
The bronze network that arose between the Liaohe Plains and the upper region of the Liaohe River during the formation of the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is noteworthy. The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began as the artisan group around 10 BCE in the eastern part of the Liaohe Plains, where the elite adopted the ideological system of the sword to create mandolin-shaped daggers using bronze-smelting technology.
In the early the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the bronze network expanded from the Liadong area to the region between Jilin and South Korea; central sites have been identified in the eastern part of Liaobei(Tieling) and the southern tip of Liaodong(Dalian). Weapons and tools spread from the Liaobei area to South Korea. Some tools, including the fan-shaped bronze axe, reached Shandong through the Liaonan area. Liaoxi-style artifacts have also been found in the southern tip of Liaodong, implying that there was a broad network at the time.
In the later the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the bronze network was reorganized around the Liaozhong area. Bronze artifacts shifted from Liadong-style to Liaoxi-style, with a wide diffusion from the Liaozhong area to surrounding areas. It is noteworthy that the network of Zhengjiawazi Assemblage, which is estimated to be close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Old Joseon, spread toward North Korea and exchanged weapons such as bronze dagger with Shandong area.

KCI등재

3금강하류지역 석관묘제의 구조와 성격 -청동기시대 묘제의 네트워크 분석을 위한 예비적 검토-

저자 : 오대양 ( Oh Dae-ya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3-117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주지하다시피, 금강하류지역 청동시기대의 중심 묘제는 복판식의 석관묘이다. 2000년대 초반 이와 공존하는 석개토광묘, 옹관묘 등이 소위 송국리형묘제로 설정된 이래, 최근에는 고인돌 역시 그러한 묘제 범위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각기 상이한 종류의 묘제형식에서 공유되는 몇 가지 속성들을 간추려 보면 송국리문화의 중신권역인 금강하류에서만 관찰되는 지역적 특수성과 문화권 전체에서 확인되는 보편성 등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각 묘제의 부장품 구성과도 연동되어 당시 사회의 매장풍습이나 묘제적 전통에 관여되었을 정신문화적 세계관, 즉 그들이 신앙하였을 종교적 가치관의 일면을 제한적이나마 추론케 한다. 본고에서는 고인돌과 석관묘의 매장주체부가 유사해지는 현상 그리고 지역 문화권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무덤 상부의 석개적 구조 등을 송국리형묘제의 주요 특징으로 파악하여, 그러한 묘제적 전통이 성립되는 과정에서의 사회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As you noted, the main tomb system in the Bronze Age in the downstream region of the Geumgang River was the stone-lined tomb with multiple panels. Since the 2000s, pit-type tombs with a stone lid, jar-coffin tombs, etc., have been classified as the Songkukri-style tomb system. Recently, dolmens are recognized to belong to such a tomb system. Summarizing a few characteristics that can be shared for each different tomb system, they can be classified as regional particularities observed in the downstream region of the Geumgang River, a central zone of Songgukri Culture, and universal features found in the entire cultural zones. The tomb systems were also connected to the structure of burials in each system based on which we can restrictively assume some parts of mental and cultural beliefs of people, that is, religious sense of value that they believed in. This study is a preliminary review for a network analysis of the tomb systems in the Bronze Age. It noted two things as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e Songgukri-style tomb system: the similarities of the buried subjects in dolmens and stone-lined tombs and the stone-lid structure of the top of the tombs, the latter of which was commonly found in the entire regional culture zones. This study tried to find the social significance in the formation process of such tomb traditions.

KCI등재

4신석기시대 기후 변화와 그에 대한 대응 -한강 유역 석기체계 변화를 중심으로-

저자 : 김영준 ( Kim Young-ju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45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최근 홀로세 기후에 관한 분석 자료가 축적되면서 그동안 미진했던 신석기시대 기후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신석기 사람들은 나름대로 기후 변화에 대응하여 물질문화를 변동하였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주요 생업도구인 석기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이 글의 목적은 신석기시대 기후 변화에 따른 대응 과정에 대해 석기체계 변화를 통해 살피는데 있다.
한강유역은 한반도 다른 지역보다 발굴 성과가 축적되었고, 석기체계에서 지역성 또한 존재한다.
기후 최적기에는 한강 유역에 조성된 대규모 마을 유적을 중심으로 다양한 석기를 사용하여, 생업 활동을 하였다. 석기의 출토 수량으로 볼 때 뗀석기도 주요 생업 도구였다. 특히 유적의 입지 환경(층적지/구릉)에 따라 주거체계 및 뗀석기 기술 체계(제작ㆍ사용ㆍ폐기)를 다르게 이용하여 생업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 최적기 이후 잦은 한냉화에 의한 불안정한 기후 환경에서 한강 유역의 신석기 사람들은 취락을 소규모화 하였고 소규모화 된 마을 유적에서는 고석 혹은 갈돌ㆍ갈판만을 사용한 단순한 석기체계로 생업 생활을 영위하였다.
한편으로 이들은 주변의 단독 주거지로 특수 목적 집단을 보내, 식량 자원을 획득하는 조달적 이동 양상으로 조직적인 생업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이 기후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한강 유역에 거주한 신석기인들은 주거지 및 석기 체계 전략을 변화시키면서 환경에 대응하였다.


As the climate data in the Holocene Epoch has been accumulated lately, the discussion on the climate of the Neolithic Period which is proceeding again, which was inactive for a while. However, the stone tool as a main tool for subsisting on still need more work.
In the Holocene climatic optimum, A variety of stone tools were used to subsist on in a large scale of residential remains near the Han river valley. knapped stone was also one of the main tools for a living based on the amount of stone tools excavated. Especially, the main feature is that a production activity was conducted by using a different knapped stone technic and residential system according to the surrounding environment of the remains(an alluvion/hill).
In 4,200B.P. people in the Neolithic community in the dry climate after the Stade lived a life in small-sized residential sites intensively using Hammer stone or Mitting stone-Saddle quern.
Futhermore, they sent people which had special purposes to a detached house area in order to get food resources such as logistically residential system.
Thus as the climatic environment had changed, people near the Han river valley in the Neolithic community adapted gradually adjusting the strategies of residential areas and the Lithic system.

KCI등재

5고대 진번의 변천 연구

저자 : 조원진 ( Cho Won-ch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2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진번은 고조선과 흥망을 함께한 정치체로 고조선 다음으로 한국 고대에 등장한 국가였다. 진번 주민들은 韓 사회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史記』에 의하면 진번은 기원전 4~3세기 고조선과 함께 燕나라와 전쟁을 했으며 위만의 초기 거주지와도 관련된다. 고조선과 燕나라의 전쟁 기사에서 진번의 존재가 특별히 강조된 것은 당시 전쟁에서 진번의 위상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진번은 당시 조선 주변의 유력한 정치체로 燕나라 및 주변 예맥계 집단과 활발히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번의 위치에 대한 상이한 기록들은 진번이 이동했다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진번은 본래 요동군 번한현과 관련되어 요동 북부에 위치했으나 燕나라의 공격을 받아 황해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위만은 요동의 옛 진번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냈으며 漢나라의 지원을 받은 뒤에 황해도 지역의 진번을 복속시켰다. 이후 진번은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漢나라에 멸망하게 된다. 漢나라는 진번 지역에 진번군을 설치하는데 진번군은 기원전 108년 설치되어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다. 『茂陵書』의 진번군에 15현이 있었다는 기록은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한군현의 남쪽 경계는 황해도 일대로 볼 수 있다.


Jinbeon is a polity that shared its rise and fall with Old Joseon, and was a state that emerged following Old Joseon i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It seems that after the fall of Jinbeon, its inhabitants moved southwards, and influenced the society of Han(韓) as well.
According to Shiji(史記), Jinbeon(眞蕃), together with Old Joseon(古朝鮮), waged war against Yan Kingdom(燕國) in the 4th-3rd century BC, and also has connection with Wiman's initial habitation. The special emphasis on the existence of Jinbeon laid by the article on the war between Yan Kingdom and Old Joseon suggests such a great status of Jinbeon in the war. It appears that Jinbeon, which was an influential polity around Old Joseon at that time, actively interacted with Yan Kingdom and surrounding groups of Yemaek(濊貊) extraction as well as Old Joseon.
Records of different descriptions about the location of Jinbeon may be reasonably understood from the fact that Jinbeon was moved. Jinbeon was originally related to Fanhan County(番汗縣) in Liaodong Commandery(遼東郡), and was located in the west of Quian Shan Mountains(千山山脈); however, it seems that it was moved to the region of Hwanghae-do due to the attack of Yan Kingdom. Wiman Joseon grew with the old Jinbeon region as its stronghold, and ousted the King Jun of Old Joseon, and subjugated Jinbeon in the region of Hwanghae-do after obtaining support from the Han(漢) dynasty. Jinbeon, which was subjugated by Wiman Joseon, was later conquered by the Han Dynasty. The Han Dynasty established Jinbeon Commandery in the region of Jinbeon; the Jinbeon Commandery was established in 108 BC and was abolished in 82 BC. However, it is unclear whether the Han Dynasty established a commandery or a county even in the region of Jinbeon amidst unstable circumstances during the early period of its establishing commanderies and counties.

KCI등재

6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구도와 가야 제국(諸國)의 향방

저자 : 신가영 ( Shin¸ Ka-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08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는 「광개토왕비」의 영락 9년과 10년조를 '백제ㆍ가야ㆍ왜 연합'의 대응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구도로 인해 가야 제국은 백제, 왜와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고구려, 신라와 대립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가야 세력의 대외활동을 가야 전체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야 제국의 실상을 왜곡할 여지가 있다.
가야 제국은 단일한 정치체가 아니었고, 당시 구심 역할을 하는 중심국의 여부도 불확실하다. 4세기 후반 가야 각국의 대외교섭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데, 백제ㆍ왜와 이해관계가 같지 않았던 가야 세력을 상정할 수도 있다. 가야사 연구에서는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에서 가야 각국의 동향을 달리 이해하고 있기에 전쟁의 피해를 입은 지역은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파악한다. 그러므로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을 백제, 왜와의 관계에서만 분석하는 것은 당시의 가야의 역사상을 왜곡할 여지가 있다.
가야와 백제의 우호관계의 근거로 제시된 『일본서기』 신공기를 검토해보면, 금관국이 아닌 탁순이 백제와 왜의 교섭을 중계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는 '임나가라', 즉 금관국만 등장할 뿐 백제 측에서 4세기 후반부터 우호관계가 있었다고 주장된 대가야, 안라, 탁순은 나타나지 않는다. 신공기와 비문을 근거로 가야 제국이 백제, 왜와 연합하고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ㆍ신라 연합'과 '백제ㆍ가야ㆍ왜 연합'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4세기 후반 가야 각국의 동향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또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도 백제, 왜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에서 면밀히 재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가야 제국이 백제,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맞섰다는 기존 견해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의 국제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This article argues that the descriptions of the ninth and tenth years of Yeongrak discussed in the inscription of the Great King Gwanggaeto are responses to the union of Baekje, Gaya, and the Japanese Wae. Due to the confrontation between Goguryeo and Baekje in the late 4th century, the Gaya countries came to be at odds with Goguryeo and Silla as a result of the empire's friendly relations with Baekje and Wae. However, perceptions of the Gaya Countries can be warped because they were understood to be a unified whole as a result of some of their activities.
The Gaya Countries were not a single political body and it is uncertain whether it ever acted in a unified way at the time. Each Gaya countries engaged in foreign relations in different ways in the late 4th century and had different interests with regard to Baekje and Wae. Gaya researchers view the behaviors of the Gaya countries during Goguryeo's southward conquest in 400 and identify the areas affected by the war differently. Therefore, analyzing Goguryeo's southward conquest in 400 only in relation to Baekje and Japan would produce a distorted perspective of the Gaya countries at the time.
According to the chapter reviewing the Jin'gu-ki in Nihonshoki, Takujunnokuni, not Geumgwan, which was closely related to Wae, reported on the negotiations between Baekje and Wae. The inscription of Great King Gwanggaeto shows only Imnagara, or Geumgwan, but Daegaya, Anra, or Taksun, with which Baekje had had friendly relations since the late 4th century, were not mentioned. Based on the Jin'gu-ki and the inscription, it is difficult to conclude that the Gaya countries were allied with Baekje and Wa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stop viewing this period in terms of the Goguryeo-Silla alliance and the Baekje-Gaya-Wae alliance and instead examine the actions of each Gaya country individually. In addition, Goguryeo's southward conquest in 400 should be closely reviewed in relation to Baekje, Wae, Goguryeo, and Silla. It is time to understand international relations during this period from a new perspective and reject the prevailing idea that the Gaya Countries were allied with Baekje and Wae against Goguryeo and Silla.

KCI등재

7문학적 서사의 역사화와 기억의 전승

저자 : 정호섭 ( Jung Ho-sub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42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한국 고대사와 관련한 내용이 문학적 서사를 통해 창작되었고, 만들어진 역사에 대한 집단 기억이 역사적 사실처럼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전승되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역사화되었고, 집단 기억으로 자리잡아 현재까지도 잘못된 인식을 낳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역사적 소재가 문학적 서사를 통해 구현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도성이나 목적이 내재되었던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그것이 忠, 여성의 정절이라는 유교적 관념일 수도 있고, 근현대사회로 오면서 국가나 민족의 위기 속에서 민족주의나 주체성이 강하게 발현되었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 속에서 민족을 넘어 민중의 모습을 찾기도 하였다. 결국 국가 혹은 민족 중심의 역사서술이 소위 '만들어진 고대'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듯이 근대 국민국가의 태동 이후에 민족주의 역사학이나 문학에서 민족주의를 내재한 문학적 서사는 거의 동질적인 결을 지니고 있다.
역사도 그러하듯이 대체로 기억은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축적되고 전승되게 마련인데, 기억의 내용과 방법이 문학적 서사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역사 너머 다른 저편에 자리잡아야 한다. 안시성과 양만춘,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연개소문과 당태종, 의지왕과 삼천궁녀, 무영탑과 아사달ㆍ아사녀 등은 어쩌면 우리 고대사 소재 가운데 극적이어서 주목된 것이었다. 대체로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나 근현대 문학가들도 민족의식의 발로에서 이러한 문학적 서사를 추구했다는 점은 공통된 현상이다. 이러한 민족의식을 자극시킬 수 있는 역사적 소재가 이용되었고, 문학작품 등에서 이러한 역사적 소재를 보다 극적이고 생동감있게 전달하는 방편으로 문학적 서사를 활용하였다.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서사를 시대적 필요라는 차원에서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당시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으나, 역사인식의 차원 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In this paper, the contents of ancient Korean history were created through literary narratives, and several examples were presented in which collective memories of the history were accepted and handed down to people as historical facts. In addition, we also looked at how it was historized throughout the process and became a collective memory, creating false perceptions to this day. In the process of implementing historical materials through literary narratives, some intention or purpose was embedded. In the pre-modern society, it could be the Confucian idea of women's fidelity, or in modern society, nationalism or identity could be expressed strongly in the crisis of the nation or nation, and sometimes people could be found beyond the people. After all, as state- or ethnic-oriented historical descriptions are shaped by the so-called 'the ancient society created' image, literary narratives made after the birth of modern national states have almost homogeneous characteristics.
As with history, memory is usually accumulated and transmitted through records and phrases, and if the content and method of memory are based on literary narratives, it must be located beyond history. Ansiseong Fortress and General Yang Man-chun, Euljimundeok and War of Salsu, Yeongaesomoon and Emperor Taizong of the Tang Dynasty, King of the Uija and three thousand palace women, Muyeong Pagoda and Asadal‧Asanyeo were probably the highlights of our ancient history. In general, it is a common phenomenon that modern and contemporary writers, as well as nationalist historians, pursued these literary narratives in the footsteps of national consciousness. Historical materials that can stimulate this national consciousness were used, and literary narratives were used to convey these historical materials more dramatically and vividly in literary works. It is a dramatic expression of historical narratives about characters and events in terms of the needs of the times, but it is problematic in terms of historical awareness.

KCI등재

8日本 北部九州地域의 初期造瓦系統과 生産方式

저자 : 최영희 ( Choi Yeong-he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3-284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일본 초기와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기나이지역에 편중되었고, 조와기술의 교류 역시 백제-기나이지역의 관계 규명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북부큐슈지역에서도 6세기말부터 기와의 제작과 사용이 시작되었으며, 그 도입경로와 존재방식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본 글에서는 기와제작의 기본 도구인 암ㆍ수키와 성형틀의 형식과 그 조합 관계를 기준으로 크게 네 가지의 조와계통을 구분ㆍ상정하였다. 각 계통은 6세기말~7세기전반 신라, 일본의 기나이지역, 한반도의 지방에서 유입되어 복수의 조와집단을 형성하였고, 꽤 오랜 기간 공존하였다. 북부큐슈지역의 초기조와기술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만큼, 기존의 '도성:도성' 간 교류 뿐 아니라, '도성:지방', 그리고 국가를 달리하여 '지방:지방'의 교류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窯場 및 소성기술의 보유 여부는 기와 생산의 중요한 요소로, 이 지역 토기공인들의 오랜 경험과 기술력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7세기후반 이후, 기나이계 조와기술이 재유입되면서 도성의 새로운 기술요소가 수용되며, 그것은 막새를 비롯한 장식용 기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지붕 의장의 확산을 의미한다. 수용방식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치쿠젠지역의 우시쿠비 생산유적의 사례는 기나이지역 공인의 이동 내지는 직접적인 전수방식을 상정할 수 있는 경우이다. 한편, 치쿠고지역의 카미이와타유적의 사례는 재래식 기술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장요소만을 받아들인 간접적인 수용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북부큐슈지역은 도성을 벗어난 지역에서 조와기술이 도입, 정착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한반도의 초기조와방식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도 유효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search on the Japanese early roof tile was concentrated in the Kinai region, and the exchange of roof tile-making technology has also been focused on ident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Kinai region. However, in the northern Kyushu region, the manufacture and use of roof tiles began in the late 6th century, and the introduction path and method of existence have also been various.
In this article, four types of roof tiles and systems were divided and presented based on the form of molds and their combination relationships with concave and convex roof tile, which are the basic tools of roof tile production. Each system is at the end of the 6th century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it was introduced from Silla, Japan's kinai region, and the provinces of the Korean, forming groups and coexisting for quite a long time. As the early roof tides and techniques of the Northern Kyushu region show very complex aspects, it is necessary to identify not only the existing interchange between the capitals, but also the interchange between the capital and the provinces, and the provinces. In particular, the possibility of kiln and firing technology is thought to have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tile production method.
After the second half of the 7th century, the reintroduction of the kiln system and the new technology elements of the city are accommodated, which means the expansion of new roofing facilities that use ornamental roof tiles, including marshes, in earnest. The acceptance method is largely divided into two aspects. First of all, the case of Ushikubi production sites in the Chikuzen area is when it is possible to assume the transfer or direct transfer method of official personnel in the Kinai region. On the other hand, the case of Kamiwata ruins in Chikugo area is the case of indirect acceptance of new elements based on conventional technology.
The Northern Kyushu region clearly demonstrates the introduction and settlement of tide and technology outside the capital, which could serve as a valid model for examining the early roof tide and methods of the Korean Peninsula.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한반도 선사시대의 제정분리(祭政分離) 양상에 대한 일 고찰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김선우 ( Kim Sun-wo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24 (2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서울ㆍ인천ㆍ경기지역)의 기존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 유적들과 매장 유적들의 위치 확인과 유적들의 형태, 규모 및 출토 유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로의 양상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가 되면, 전ㆍ중ㆍ후기에 걸쳐 주거 유적의 수와 규모가 증가하는 양상이 보여지는데,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 유적들은 대체로 축조가 용이한 평탄한 구릉 정상부 능선에 입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기의 특징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매장 유적인 지석묘 상석의 규모가 가장 컸다가 이후 점 차 감소하는 경향이 관찰되는데, 이 시기에 구릉 정상부에 환호 유적이 등장한다. 환호 유적 은 그 규모와 입지면에서 방어의 기능보다는 의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제정분리 (祭政分離)의 양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KCI등재

2일제 강점기 이병도의 고조선사 연구

저자 : 송호정 ( Song Ho-j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4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일제 강점기 이병도는 고조선을 한국 최초의 국가로 파악하고, 그 왕조가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을 거쳐 위만조선으로 이어진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시기로 파악하고, 그 시기의 역사를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정리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패수고(浿水考)」 논문에서는 그동안의 평가와 달리 고조선사의 전개와 활동 무대를 초기부터 요동(遼東) 지역을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이병도는 일제 강점기 이래 줄곧 요동반도~한반도 서북지방(평안 황해도)을 고조선 계열의 문화발상지로 보았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요동~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세력을 키우던 고조선이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세력이 진출하자 청천강 이남으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고, 그 이남 지역에서 왕(王)과 대부(大夫) 등 초기 고대 국가로서의 국가 조직을 갖추고 성장해 나갔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병도는 최근 고조선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내용을 이미 일제 시기부터 문헌 고증을 통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이병도의 연구 성과는 최근 고조선 중심지 평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고,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많은 역사학자들이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되고 폄하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한국 고대사의 웅대한 면을 그리려고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이병도는 역사서술의 합리성만을 추구했고, 식민지 시대에 요구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KCI등재

3북한 정권의 평양 인식 변화와 활용 -고조선ㆍ고구려사 연구 추이와 관련하여-

저자 : 이준성 ( Lee Jun-s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79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국가에서 수도가 지니는 위상은 단순히 행정적 중심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계획하고 도시 공간을 조직하는 데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해방 전후 평양에 대한 인식은 '고조선ㆍ고구려의 옛 도읍'이라는 역사적 자긍심과 '중국의 식민지'라는 타율적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정권은 평양의 재건 과정에서 고구려에 초점을 맞춰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을 '평양시 창건'의 시점으로 삼아, 1957년 '평양시 창건 1,530주년' 관련 행사를 대대적으로 기획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대동강 유역을 개척하면서 '동방의 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모습에 현재의 북한 정권을 투영하여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한편, 이후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평양이 지니는 역사적 정체성은 '인류문명 발상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발원지'라는 점으로 모아졌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 북한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되고, 더욱이 민족의 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혈연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는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단군릉'의 발굴과 복원은 북한 정권이 의도를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이벤트였다. 이후 평양은 더욱 성지화되며 주체사상과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선전하는 데에 활용되었다.

KCI등재

4성내천 하류역의 고지형 연구

저자 : 이성호 ( Lee Sung-h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0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성내천 하류역은 한성백제기 핵심유적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성내천 하류역은 1970년대 초 상당한 지형변화로 원형을 잃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되지 못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성내천 하류역의 원지형을 찾고 세부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다.
서울 동남부 일대는 암반(풍화대) 위에 홍적층과 충적층 물질이 차례로 퇴적되어 형성된 지대이다. 성내천 하류역에서도 이와 동일한 퇴적 질서를 나타나며, '북동-남서' 방향의 충적단구가 기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성내천 하류역에는 독특한 원야(原野) 필지가 확인된다. 원야는 미고지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옛 항공사진과 시추주상도의 토층구조 자료를 사용하여 원지형적 양상을 분석해 보았다. 그 가운데 성내천으로 돌출된 한 필지에서 자갈섞인 두꺼운 점토층이 발견되었는데, 주변 풍납토성의 성토지대 점토층과 비교해 볼 때 물성적인 유사성을 보여 지형지세적 특성과 함께 성토 지대의 가능성이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그동안 잘 다뤄지지 못했던 성내천 하류역의 원지형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비록 연구결과는 실증적이고 명료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향후 풍납 및 몽촌토성의 관계성 문제를 비롯하여 백제 한성(漢城) 지역 이해에 대한 기초적인 틀로써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KCI등재

5신라 원성왕 '즉위 설화'의 역사학적 고찰 -꿈과 해몽의 정치적 상징조작-

저자 : 최홍조 ( Choi Hong-j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원성왕 '즉위 설화'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사적 의미를 탐구한 것이다. 신라 下代의 실질적 開創者인 원성왕(재위 785~798) 김경신은 무혈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785년 1월 선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群臣 회의에서 김주원이 신왕으로 추대되었다. 北川(알천) 너머에 살던 김주원이 왕궁으로 향하던 때에 마침 냇물이 불어나 북천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衆議는 김경신에게 기울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알천 물이 불어난 것을 때마침 큰비가 내린(大雨 閼川水漲) 때문이라 서술하였다. 『삼국유사』는 왕위가 뒤바뀐 이유를 갑자기 불어난 냇물(忽川漲)로 설명하면서도 비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덕왕 재위 시절 김경신이 꾸었다고 하는 흥미로운 꿈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꿈 속에서 그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갖고, 天官寺 우물에 들어갔다. 깨어나 점을 쳤더니 관직을 잃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징조라 하였다. 근심으로 두문불출하는 김경신에게 여삼이라는 귀족이 찾아와서 새로 해몽을 해주었다. 면류관을 쓰고, 12세손에게 왕위가 전해지며,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꿈이라는 것이다. 여삼은 또 김경신이 김주원을 이길 수 있는 방책으로 북천신 비밀 제사(密祀北川神)를 건의하였고, 경신은 이에 따랐다. 좋은 꿈의 응험으로 김경신은 결국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 所載 김경신의 '꿈' 설화는 『삼국사기』의 '큰비' 기사에 비해 언뜻 비합리적인 이야기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큰비(폭우)는 승자의 권력을 天命으로 수식하는 유교적 修史로 해석해야 한다. 오히려 '갑작스런 냇물의 벌창' 앞에 '꿈과 해몽' '북천신 비밀 제사'를 前文으로 실어 놓은 『삼국유사』 쪽이 그 역사적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 같다. 김경신은 왕위 계승 서열상 上位에 있던 무열왕계의 김주원을 제압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한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이다. 무혈 정변으로 종결된 이 쿠데타가 북천 냇물의 벌창과 김주원 '不得渡(건너지 못하였다)'로 상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경신의 즉위는 하늘(天)의 뜻에 의한 것으로도 北川의 神力에 의한 것으로도 꾸며질 수 있지만, 『삼국유사』의 설화는 북천신의 조력이 사실은 김경신 측의 인위적 노력이라는 것을 더 구체화하여 알려준다는 점에 그 사료적 의의가 있다. 방계 왕족 김경신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이 '나물왕 12세손'을 표방하였다. 여러 자료에서 원성왕 김경신의 治水에 대한 관심과 水神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북천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왕권을 후대에까지 영속화하려 했던 정치적 상징조작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KCI등재

6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

저자 : 배현준 ( Bae Hyun-joo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74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중국은 자신들을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일컫는다. 과거에는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들을 실제로 존재한 인물 또는 집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문헌기록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고, 서양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문명(국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며, 이에 따른 사회발전단계론도 구축한다. 중국의 문명 기준과 사회발전단계에 의하면 문헌 속의 하나라는 이미 발달된 문명 국가 단계로 고고학적으로는 이리두문화로 비정된다. 중화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보다 앞선 오제시대는 수장사회(고국) 단계에 해당하고, 홍산문화, 양저문화 등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중화문명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삼황시대는 자연스럽게 초기수장사회(고성) 또는 부족사회(고문화) 단계에 해당하며, 중화문명의 기원이 되는 시기가 된다.
한편 염제는 오제시대의 맨 앞에 있는 황제와 형제 관계이면서, 삼황시대의 맨 마지막인 신농과 동일시된다. 즉, 염제는 오제시대의 처음과 삼황시대의 마지막에 걸쳐 있는 것이다. 결국 염제의 실체화는 중화문명, 더 나아가서 중화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그 뿌리를 찾아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는 평등사회에서 문명의 전제가 되는 불평등사회로 전환되는 양상이 확인되기에 여기서 염제에 대응되는 고고학문화를 찾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앙소문화의 반파유형과 묘저구유형이 거론되지만, 문헌의 염제와 곧바로 대응시키기에는 아직 적지 않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과 정부차원에서는 염제와 관련된 사당과 무덤을 건설하고, 조상숭배의 제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KCI등재

7조우(遭遇)와 충돌(衝突)로 고구려(高句麗) 후기(後期)를 이해하다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저자 : 정동민 ( Jung Dong-m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190 (1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5~7세기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제세력과 교섭하고 혹은 무력 충돌을 빚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렇다면 5~7세기 고구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외교와 전쟁 등 대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외교와 전쟁은 당시 국제 질서 그리고 각국의 외교 역량이나 집권 세력의 이해 관계가 반영되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대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질서뿐만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향까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최근에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김진한이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를 출간하였다. 저자는 고구려의 국정(내정)과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외정)를 연동시키며 역학 관계론적 시각에서 고구려 후기의 대외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ㆍ정리하였다. 본고에서는 저서의 구성과 내용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저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던 제세력의 내정과 외정까지 고려함으로써 어느 일방에 치우쳐 고찰하지 않았다. 또한 특정 세력이 아닌 제세력을 연구 대상으로 삼으며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체계ㆍ종합적으로 규명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 대외관계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KCI등재

8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저자 : 김진웅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20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9용인 할미산성 10년의 발굴과 그 성과

저자 : 이상국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34 (1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10영월(寧越) 정양산성(正陽山城)의 발굴조사 성과와 과제

저자 : 김진형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70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선사와 고대
66권 0호

KCI등재

동양예술
52권 0호

KCI등재

일본학
54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3권 0호

KCI등재

고문서연구
59권 0호

KCI등재

몽골학
66권 0호

KCI등재

동아시아문화연구
86권 0호

KCI등재

사림(성대사림)
77권 0호

KCI등재

석당논총
80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4권 0호

KCI등재

동양문화연구
34권 0호

KCI등재

이화사학연구
62권 0호

KCI등재

동국사학
70권 0호

KCI등재

동양예술
51권 0호

KCI등재

중국연구
87권 0호

KCI등재

중국학논총
72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2권 0호

KCI등재

대구사학
143권 0호

문물연구
39권 0호

KCI등재

몽골학
65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