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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의 관혼례(冠婚禮) 의절(儀節) 연구

A study on the Sungho Lee-Ik`s Coming-of-age Ceremony & Marriage Ceremony

도민재 ( Doh Min-jae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6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235-264(30pages)
온지논총

DOI

10.16900/ONJI.2021.67.08.235


목차

Ⅰ. 머리말
Ⅱ. 「산절관의」에 나타난 관례 의절과 특징
Ⅲ. 「가녀의」와 「취부의」에 나타난 혼례 의절과 특징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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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이 실제 관례와 혼례를 거행하며 의식절차를 정리한 「산절관의(刪節冠儀)」와 「취부의(娶婦儀)」, 「가녀의(嫁女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이익이 제시한 실용적인 관례와 혼례 의절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익은 관례에서 빈객을 모시는 절차를 생략하고, 삼가례는 한 번으로 간소화하여 관례 시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기물 준비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였다. 이는 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혼례는 시속(時俗)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청기(請期)’도 신랑집이 아닌 신부집에서 청하도록 하고, 폐백과 음식의 종류 및 가짓수를 간소화하여 실용적인 혼례 의식을 제시했다.
이익은 『가례』가 의례 실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인정했으나, 『가례』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상황에 맞추어 의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가난한 양반이나 일반 서인들이 『가례』를 제대로 따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인 측면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례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익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실용적인 의례 실천을 추구하여, 형식에 치우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이 아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This paper is a consideration of the coming-of-age ceremony and Marriage ceremony of Sungho Lee-Ik. Lee-Ik argued for the need for Seoingarye for the ordinary people, as the Zhu-Xi`s Family Rituals are a ritual for the nobility.
In the Coming-of-Age Ceremony, the procedure for requesting officiating is omitted, and the use of hats three times has been reduced to one time, which has been simplified. In response, reduced the cost of implementing rituals at home and emphasized practicality. The wedding ceremony was held to follow the customs of the bride's house, and simplifying the types of waste bags and food and the number of branches, and offering a practical wedding ceremony.
He acknowledged that the Zhu-Xi`s Family Rituals was a standard for practice, but rather than being tied to the form of ancient rituals, it was more important to carry out rituals in accordance with realistic economic conditions. So, based on the Zhu-Xi`s Family Rituals, he established a practical rite suitable for the reality of Choson Dynasty. Therefore, he proposed a practical ritual format that ordinary people could implement regardless of economic conditions. As such, his studies reflect the practicality of scholars.

UCI(KEPA)

I410-ECN-0102-2022-800-000544650

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5-2022
  • :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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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권0호(2022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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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과 서술적 특징

저자 : 장안영 ( Jang An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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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87년 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 4편을 살펴본 것이다. 이 표류 기록은 1687년 9월 3일 출항한 이후부터 1688년 12월 17일 송환된 일까지 모두 1년 3개월에 걸친 내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동일 사건에 대한 표류 기록이 4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영록(知瀛錄)』,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주영편(晝永編)』에 기록된 이야기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건은 크게 「김태황 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과 「고상영 표류기(高尙英漂流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영록』, 『해외견문록』은 '제주진무(濟州鎭撫) 김태황'의 이야기로, 『탐라문견록』, 『주영편』은 '제주 주민 고상영'의 구술로 구성되었다.
4편의 기록은 모두 표류민들이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저자에 따라 서술의 차이점이 있었다. 각 자료를 살펴보면 『지영록』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송환 과정과 사후 조치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있었고, 『해외문견록』은 해외무역에 대한 관심 가운데 선박의 기록이 두드러졌고, 『탐라문견록』은 안남의 삶과 민심을 엿볼 수 있었고, 『주영편』에서는 안남의 지리(地理) 내용과 저자의 평가와 함께 기록되었다는 부분에서 각각의 특징이 드러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서술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특징이 드러났던 점은 기록하는 사람의 저술의식이 담겨있어서였고, 또 표류민의 구술로 된 체험 특성상 말하는 이에 따라 시선이 달리 표현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four records of the Annam drift of the Joseon Koreans in 1687. This drift record spans 1 year and 3 months from the departure on September 3, 1687 to the time of repatriation on December 17, 1688. What is unusual here is that there are 4 drift records of the same incident. Accordingly, each of the four stories recorded in 『Jiyoungnok(知瀛錄)』, 『Haeseongmungyunrok(海外聞見錄)』, 『Tamnamungyunrok( 耽羅聞見錄)』, and 『Juyeongpyeon(晝永編)』 were taken as the center of discussion. The incident can be largely divided into 「Kim Tae-hwang Pyo Hae Log(金大璜漂and 「Ko Sang-young's Adrift Records(高尙英漂流記)」 ' is composed of the oral form of 'Jeju resident Koh Sang-young'.
All four records have in common that they were recorded based on the experiences of the drifters, but differences in narrative style were revealed depending on the character or author. 『Jiyoungnok(知瀛錄)』 contained details about the repatriation process and follow-up measures that could not be confirmed in other documents. In 『Haeseongmungyunrok(海外聞見錄)』 the record of ships stood out among the interest in foreign trade, 『Tamnamungyunrok(耽羅聞見錄)』 gave a glimpse into Annam's life and people's feelings, In 『Juyeongpyeon(晝永編)』 each characteristic was revealed in the part where the geography of Annam was added and recorded along with the evaluation of the narrator alone.
Even in the process of narrating the same event, it can be seen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stics are revealed in different ways. The fac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stics of the same event were revealed was because the writer's writing consciousness was contained, and it seemed that the gaze could be express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person speaking due to the nature of the oral experience of the drif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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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石梧 尹致英의 북한산 유기 연구

저자 : 김미란 ( Kim Mi-ra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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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중반 관료이자 문인인 石梧 尹致英(1803∼1858)을 19세기 북한산 유람의 주요 양상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고, 『石梧集』(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된 그의 산수유기 19편 가운데 북한산 유기 9편을 취합하여 분석하고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환로에서 발생한 정치적 부침으로 인해 유배기를 중심으로 사환기의 유람과 해배기의 유람으로 양분되며, 동행자의 유무에 따라 두 시기의 주요 활동과 정서적 분위기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사환기의 유람이 형제와 조카를 비롯해 벗이나 손님들과 함께 즐겁고 화락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이에 대한 묘사에 치중했다면, 해배기 이후의 유람은 유배의 과정에서 얻은 숙병으로 인해 주로 홀로 유람하였으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주관적인 입장에서 느낌이나 감회 등을 술회하는 데 집중하였다. 구성 방식과 표현상의 특징에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구성 방식과 표현방식의 주요 양상인 구성의 단편화와 간략화 등에서 그 맥을 같이 하며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인용과 열거를 통한 비유적 표현 등도 19세기 유기 문학에서 현격히 증가한 비유적인 표현 등과 함께 궤를 같이하면서 유기의 객관성 및 사실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寫實美를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인근에 한정된 勝景과 名所의 탐방, 그리고 暢神을 통한 治癒의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석오의 북한산 유기 전편이 모두 거주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승경이나 주변의 명소를 일회적으로 탐방하기 위해 진행된 단일화된 유람이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같은 시기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을 보여 준 박윤묵이나 한장석 등과 같이 한두 차례의 유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는 석오가전 생애에 걸쳐 도성과 성북의 외곽에 거처하며 일상적으로 근거리에 한정된 승경과 명소를 빈번하게 유람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석오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주요 양상의 하나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람이 일상 속의 근거리 유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매우 크고, 또 구체적인 실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한 사람이 기록한 북한산 유기로는 가장 많은 편수인 6편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산 유기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 또한 높다고 판단된다.


This study identified Seokoh Yun Chi-yeong (石梧 尹致英, 1803-1858), a bureaucrat and literary man in the mid-19th century as the central figure of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 the main aspect of Bukhansan mountain travel in the 19th century, and attempted to collect, analyze, and identify the nine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mong his 19 hills and rivers travelogues included in “Seokohjip (石梧集)” (housed by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took place throughout his life, due to political ups and downs in his government service career, and focusing on the exile period, it is divided into travel in the government service period and travel in the post-exile period, and depending on the presence or absence of a companion, there is a marked difference in the main activities and emotional atmosphere of the two periods. While travel of the government service period focused on describing it while creating a pleasant and luxurious atmosphere with friends and guests, including brothers and nephews, travel after the post-exile period was mainly solo travel due to a chronicle disease obtained in the course of exile. From an objective point of view, it was focused on a detailed record of the trace of events (事跡), and from a subjective point of view, expressing feelings and emotions. In terms of narrative aspect and conten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is in line with the fragmentation and simplification of the composition, which are the main aspects of the construction method and expression method of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nd contributes greatly, and figurative expressions through citations and enumerations also coincided with the metaphorical expressions that increased significantly in 19th century travelogue literature. While securing objectivity and realism of travelogue, realistic beauty (寫實美) was created. In terms of conten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have their high material value as they specifically record the main temples of Bukhansan mountain that appeared newly in the 19th century, and the anecdotes related to the birth of the royal court and Seokoh's own extraordinary friendship (方外之交).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has meaning as enjoyment of magnificent scenes, visiting famous sights, healing through mindfulness (治癒), and short-distance travel in everyday life. As Seokoh lived on the outskirts of the capital and north fortress throughout his life, it is thought that it was possible because he frequently traveled to magnificent scenes and famous sights that were limited to short distances on a daily basis. From this fact, it is confirmed that all of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were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 and at that time, it was not just one or two trips along with Park Yun-muk or Han Jang-seok, etc., but all his Bukhansan mountain travels are characteristic in that they were all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s. Through these facts, it is confirmed that Seokoh is the central figure of short-distance unified travel, one of the main aspects of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s a resul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contributes greatly to establishing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 as a short-distance travel in everyday life, and it is also meaningful in that it is a concrete example. In addition, it is said that the significance of the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 in the literature history is high by securing six books, which is the largest number of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recorded by one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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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重訂南漢志』 소재 인물 관련 조목 '節義', '孝子', '烈女' 고찰

저자 : 박소영 ( Park S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8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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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46년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편찬 배경과 항목을 제시하고, 그중 <절의>, <효자>, <열녀> 항목에 수록된 인물 사례와 행적을 연구한 논의다. 『중정남한지』는 오늘날 경기도 광주(廣州)지역의 사찬지리지로, 13권에 달하는 현전하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광주지(廣州志)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간 지리지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과 지리학, 넓게는 역사인류학 분야에 중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통지리지 양식, 즉 관찬지리지에 한정 지어 본다면 이는 타당한 결과겠으나, 조선 후기 사찬지리지가 확대되고 지리지 내 항목과 내용이 다양해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리지라는 양식은 보다 넓은 학문 분야에서 재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 한 실례로서 『중정남한지』를 주목할 수 있다. 남한지(南漢志)라 이름한 데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현장을 바탕으로 서술되었기에 그 수록 양상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중 특히 절의, 효자, 열녀 등 인물(人物) 항목에 주목한 까닭은, 여타 지리지에 비해 인물과 사례가 많고 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몇몇 인물들이 광주 지역과 관련한 전란(戰亂)의 아픔과 기억을 간직한 인물들이 선정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절의(節義)는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자연적 지형 공간이라는 데서 나아가 의미를 지닌 심상적 공간으로서 전환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병자호란(1636)과 관련한 김상헌, 정온, 삼학사(三學士) 등의 행적을 수록하여 광주에서 생장(生長)한 인물은 아니지만 충절을 지킨 인물임을 밝혔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의 경우, 각각 20명, 18명으로 많은 숫자의 인물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그 인물 유형 또한 전형적인 사례들이 많지만, 광주 지역의 효자와 열녀 인물군과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내용과 제재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고 보고,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This paper presents the background and items of the compilation of ≪jungjeong-namhanji≫, compiled by Hong Gyeong-mo(洪敬謨) in 1846, and studies the examples and deeds of characters in the items of removal of honor(節義)', 'Filial Son(孝子)', 'Chaste Women(烈女)'. ≪jungjeongnamhanji≫ is today a private geography in Gwang-ju, Gyeonggi-do, and it is the largest amount of Gwangju, which has 13books, and has high value as a historical material. Until now, research on geography has been conducted focusing on the fields of history and geography, and broadly, historical anthropology. This would be a valid result to limit the traditional geography tyle, that is, Geography Books but considering the expansion of private geogra-ph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diversification of items and contents in geography, the form of geography should be discussed again in a wider academic field As an example of this, ≪jungjeongnamhanji≫ can be noted. As can be seen from the name 'Namhanji', it is described based on the historical events of the Imjin War(壬辰倭亂) and the Byeongja Horan(丙子胡亂), so the aspect is very characteristic. Among them, the reason why they paid particular attention to the person items such as temples, filial piety, and filial piety is that the number of people is significantly higher than the number of people in other geography, and the cases are also detailed and specific. It is also noteworthy that among the characters, those who kept the pain and memory of the war related to the Gwang-ju area were selected. In this regard, this study was conducted because it wa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contents and sanctions of ≪jungjeongnamh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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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전문학에 형상화된 역병(疫病)의 인식과 특질

저자 : 정영문 ( Joung Young-moon ) , 하경숙 ( Ha Kyoung-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1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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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류는 질병과 싸웠고, 그 시간을 지나 현재로 왔다. 역병은 강한 전파 속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여러 불안과 공포의 요소로 작용한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역병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 역병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 죽음에 대한 목격과 공포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상세히 형상화되어 있었고, 시대적 상황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단순한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역병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경험하고, 생계(生計)를 잃고 방황하는 삶의 모습, 차별과 배제의 현상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역병이 확산하면서 사회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전염이 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여준다.
고대 국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보여주는 '처용설화'에서는 '감염', '간병과 기도', '치유'의 순간만 기록으로 남았다. 조선에서는 '이성(理性)'과 '기록(記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순간들을 기록하였다. 과거에 맹위(猛威)를 떨치다 사라진 전염병은 시대를 달리하여 변이되어 돌아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코로나19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염병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특질, 치유에 대한 염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역병을 극복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병'은 그 어떤 이야기에 비해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의 서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단순히 고난을 참아내며 고통과 괴로움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극복 방안을 생각하고, 참혹함 속에서도 선의는 존재한다. 사람들은 절망과 참혹함을 말하기보다 희망(希望)과 선의(善意)를 말하고, 이러한 인식은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Even before history began, mankind fought against disease, and past that time came to the present. Plague has a strong rate of transmission and acts as a factor of anxiety and fear in people. The pain and fear of the plague, the finite nature of humans standing in front of the plague, and the sighting and fear of death were embodied in detail regardless of the times, and are inextricably related to the situation of the times. The phenomenon of life,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which are not just a product of memory, but experiences the unfortunate deaths of people around them through plague, loses their livelihoods, and wanders, can be applied not only to memories of the past but also to the present reality. As the plague spreads, even members of society become infected. Like reality, it shows various efforts to heal them in the past.
In the "Cheoyong Story," which shows infectious diseases that occurred in ancient countries, only the moments of "infection," "care and prayer," and "healing" remained as records. In Joseon, these moments were recorded because reason and record were considered important. Infectious diseases that have disappeared after showing dignity in the past come back with variations from different times.
Currently, COVID-19, which is spread around the world, has a different form from the infectious disease we know, but the perception and desire of people to cope with it have not changed. However, in the context of overcoming it, the 'disease' that people remember represents a voice of desperate hope for human life compared to any other story
Humans simply endure hardships and do not remember only pain and suffering. There is always hope in despair, and good faith in misery. People say hope and good faith rather than despair and brutality, and this situation continues from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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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임진전쟁기 조선 사신의 대명(對明) 외교활동 ― 정유재란 중 대명 사행록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지현 ( Kim Chi-hyo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5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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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은 조선, 일본, 명의 운명을 좌우한 16세기 말 발발했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전쟁 중 정유재란 당시 북경 사신이 남긴 사행록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신들이 명 조정에서 행했던 외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임진전쟁 당시 북경 사행을 다녀온 사신 중에서 류몽정, 정곤수, 정철, 최립, 민인백, 류사원, 권협, 허균, 이수광, 이상의, 이항복, 이정구, 황여일 등이 사행록을 남겼으며, 사행록은 대략 20여 편이 전한다. 이 사행록 중 정유재란을 중심으로 북경에서 사신들의 외교활동을 사행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예부의 관원이 아닌 다른 관원들을 직접 대면하고 청원 등을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시이면서 명조정 내에서의 주전파와 화의파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에게 유리하게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교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으로 복귀 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정사의 이름으로 정문을 만들어 예부 관원뿐만 아니라 명 조정의 조현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던 과도관 등을 길에서 만나 직접 당시의 정황이 담긴 정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 북경으로 갔던 사행은 임진전쟁 이전의 외교활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명 조정의 동향을 주시하고 명 조정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조선의 상황을 적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The Imjin War was an international war in East Asia that broke out at the end of the 16th century that determined the fate of Joseon, Japan, and Ming. In relation to diplomatic activities, the meandering record has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records and private records. Focusing on the four books, we looked at the diplomatic activities that Joseon envoys carried out during the Imjin War, especially during the Jeongyu Rebellion, went to the Ming Dynasty. Among the envoys who went to Beijing during the Imjin War, Ryu Mong-jeong, Jeong Gon-soo, Jeong Cheol, Choe Rip, Min In-baek, Yoo Sa-won, Kwon Hyeop, Heo Gyun, Lee Soo-kwang, Lee Sang-bok, Lee Jung-gu, and Hwang Yeo-il left about 20 of them. If you look at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envoys in Beijing, focusing on the Jeongyu Jae-ran, you can see that during his stay in Beijing, he made informal visits, face-to-face with Chinese officials, and petitioned them. This is because it could not be solved through existing diplomatic activities in order to lead the political situation in favor of Joseon amid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main faction and the Chinese faction within the Ming Dynasty. Therefore, at the risk of being punished after returning to Joseon, they made the main gate in the name of the magistrate and used not only the Yebu official but also the time of the mediation of the Ming Dynasty to meet and post the main gate. As such, it can be seen that the envoy who went to Beijing at the time was more active than the diplomatic activities before the Imjin War to watch the Ming Dynasty's movements, collect information on the Ming Dynasty, and to accurately inform the situation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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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

저자 : 김현미 ( Kim Hyunm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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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병을 했던 명(明)측 인사가 남긴 기록을 통하여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있는 '임진전쟁'의 실제 양상과 각국 입장에 따른 임진전쟁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하여 파병 명군에 의해서 지어진, 그리고 임진전쟁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조건을 만족하는 기록인 가유약이 집필한 「釜山平倭碑銘」(1599.10 작성)을 살펴보았다.
평왜비명은 현재 『선조실록』 32년 (1599) 10월 1일 조에 '가유약이 초고를 지었다'며 접반사(接伴使) 한술(韓述)이 보고한 형태로 전문이 소개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또한 완성된 비(碑)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釜山平倭碑銘」 두 가지 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이본의 차이를 비교하고 글자의 출입, 배치의 차이 등을 살펴봄으로써 파병된 명군(明軍)인사가 이 임진전쟁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 측의 실제 '비명 제작'이라는 편집을 거쳐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양자를 비교한 결과, 구성상의 차이와 내용(특히 다른 글자들이 쓰이거나 포함된 면에서)의 차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상 일종의 액자 구조로 되어있는 실록본(實錄本)은 이 글이 지어진 외부 맥락을 소개함으로써, 비명(碑銘)의 실제 저자인 '가유약'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곧 이 비문(碑文)이 명군(明軍)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유약' 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라는 부분도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쓴 글 때문에 국가 사이에 어떠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글을 쓰게 된 책임을 맡은 개인에게 돌릴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기 위한 가능성도 생긴다.
글자 출입에 의한 차이에서 유의할만한 것은 파병 명단을 밝히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초고인 실록본에는 '水'자가 빠져있지만, 결과본인 비명본에는 '水'자가 추가되어 있고 이것이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서 적군을 물리친 부분과 이어져, 파병된 명군이 지상에서는 물론 해상 전투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후, '비문(碑文)'이라는 조건 하에서 부산평왜비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화하여 보기 위해 타 비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임진전쟁에 파병된 명군이 주체가 되어 지은 비명인 장양상(張良相)의 남해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와의 비교를 통해 파병 명군들의 임진전쟁 관련 전적비(戰績碑)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임진전쟁에서 싸웠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가 황제의 명을 따라 임진전쟁에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좋게 만들었는가'로 요약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다음, 조선인에 의하여 지어진 임진전쟁 관련 비문(碑文)과의 비교를 해보았다. 평왜비가 위치하던 부산 지역에 있는 조선인작 임진전쟁 관련 금석문으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1670)인데, 이 글과의 비교에서 조선인들이 임진전쟁 관련 비문을 제작하는 내용의 취택 기준과 비문 내용의 수집 과정 특성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임진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그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리고 조선인이 비를 건립하는 경우, 비석에 수록 혹은 누락 될 내용의 기준은 '실재(實在)'성 이다. 실재성의 점검을 위해 비를 세우는 자들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가승(家乘)과 같은 검증 기록을 참조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에서, 파병 명군인사에 의해 지어진 평왜비명은 임진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서 총괄 평가의 마음으로 내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유약이 그려내는 임진전쟁은 명나라 황제의 '상황 판단과 정의 수호를 위한 마음'에 따른 명군(明軍)의 충성된 실천을 표현하되, 실제 사건의 충실한 묘사가 아니라 고사(古事)를 이용한 비유나 전쟁 후의 평온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ual aspect of the "Imjin War(壬辰戰爭)," which is closely intertwined with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perception of the Imjin War according to each country's position, through analyzed <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 written by Gayuyak(賈維鑰) (1599.10), a record that satisfies the conditions for showing thoughts about the Imjin War.
The full text of PyeongwaebiMyeong has two versions. The first one is introduced in the 32nd year of Seonjo Silok(宣祖實錄) (1599) on October 1st, and second one is introduced in Dongnaebueupji(東萊府邑誌).
By compar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version and examining the differences in entry and placement of letters, we could find that there were two aspects of the differences in composition (especially in terms of writing or inclusion) on the premise that the dispatched Mingun(明軍) thought about the Imjin War and their role. Silok(實錄) version, which has a kind of frame structure in its composition, introduces the external context in which this article was built, thereby making the existence of Gayuyak(賈維鑰), the actual author of this epitaph more prominent. This shows that this inscription becomes a declaration claiming the major of the Ming army, while also specifying that it is written by an individual named "Gayuyak(賈維鑰)," Therefore, when any problems arise between countries due to his writing, there is also a possibility to use it as a kind of safety device that can be attributed to the individual in charge of writing it.
What is noteworthy about the difference in text access is found in the part of revealing the dispatch list. The letter "water" is missing in the Silok(實錄) version but in the second version, 'water' letter is added to the part where the enemy was defeated in the land and sea battles, revealing that the dispatched Ming army fought not only on the ground but also on the sea.
After that, I compared it with other inscriptions to explore the meaning of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under the condition of inscription. By comparing Jang Ryangsang(張良相)'s Namhae Dongjeong Rock-carved Monument (東征磨崖碑), written by Ming army dispatched to the Imjin War, they were able to know the common characteristics of the epitaph's points were about who participated in the Imjin War, not about how Ming soldiers battle.
Next, we compared the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built by Koreans. Song Si-yeol's Dongnae Nammunbi(東萊南門碑) (1670) was represented epitaph related to the Imjin War in Busan, where the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was located, indicating the difference in the criteria for Koreans' adoption and collection of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The memories of Koreans related to the "Imjin War" focus on events that occurred at the place. In addition, when Koreans build a monument, the standard for the content that will be included or omitted from the monument is 'reality'. It can be seen that those who erected the monument to check the reality refer to verification records such as witnesses' testimony and a family record. In the sense of being at the opposite point of these factors, it can be seen that PyeongwaebiMyeong(平倭碑銘) which was built by the dispatch army, chose the content with the mind of general evaluation at the time the Imjin War was almost over. In addition, the Imjin War drawn by Gayuyak expresses the loyal practice of Mingun(明軍) according to Minghwang(明皇)'s "mind for judging the situation and protecting justice," but is explained not by faithful description of actual events but by metaphors using idiom originated in an ancient event or peaceful images after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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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宗의 리더십 ―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으로 ―

저자 : 장영희 ( Jang Young H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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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세운 왕조이다. 조선조의 성군의 대표적 모델은 세종이다. 세종은 덕치와 제도를 결합하여 治道를 펴고 制度를 잘 운영하였다. 본고는 세종이 덕치를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운영하여 시대를 지도해 나갔는가를 규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에서도 덕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의 운영에서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 내용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의 관련 기록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본 논문의 주제에 따라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과전법에서의 시대적 병폐, 세종의 시대적 병폐의 문제 제기와 시대의 목표 제시, 공법에 의거한 정액제에 대한 여론 듣기를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이어서 조선조 정치체제와 의정부서사제 회복, 현신과 함께한 의사소통의 리더십으로 공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리더십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여민동락을 위해 공법을 완성한 의미를 조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개혁과 혁신의 리더십이다. 아버지 태종의 국정운영 방식인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회복한다.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요 의정부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의정부서 사제의 회복은 유학 사상에 충실한 것이며 그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가동하였다. 국가적 사안인 공법에 관하여 의정부와 육조의 논의를 거쳐 의정부에서 합의안을 올렸으며 세종은 이를 따랐다. 공적 시스템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치적 결단을 하였다. 그리고 주목한 바는 공법의 제정과 실행에 사안마다 신료들은 찬성과 반대를 자유로이 개진할 수 있는 열린 의사소통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소통의 리더십은 세종이 지도하는 방향대로 한발 한발 진전하는 개혁이었다. 공법의 제정과 시행은 마치 周나라의 文王과 같은 切磋琢磨의 개혁의 리더십이었다. 기존 체재에서 제후로서 한발 한발 개선해 나간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료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얻는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법 시행에 있어 부작용으로 임계치에 이른다. 그것은 척박한 토지를 소유한 백성의 비탄의 소리였다. 이에 세종은 신공법의 혁신안을 제안한다. 공법의 대전환의 계기로 세종의 혁신적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유학 사상은 조건과 때가 맞으면 백성을 위하여 혁명이 가능하며, 시대를 이끌 인물의 주도하에 정치와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제도가 오래되면 부패하고 비능률과 부조리로 인하여 현실과 맞지 않을 때는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폐단을 수정, 보완하는 개혁을 하든지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태조의 조선 건국을 守成하는 것을 넘어 세종은 改革과 革新을 이루어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의 교체 없이도 혁명적 혁신을 이룩하였다. 『周易』 「革」卦에 의하면 혁명이란 민심에 의한 것이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전의 대립적인 것이 소멸되어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다. 공법의 완성인 소위 田分6等과 年分9等의 法이 그것이다. 최종 법안은 어질고 뛰어난 세종이 비탄에 젖은 民心에 귀 기울이고 賢臣과 함께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설한 혁신적 리더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The Joseon Dynasty was based on Confucianism. Sejong the Great was the typical good king of Joseon. Sejong the Great combined virtuous politics and good system to manage the nation properly. The aim of this paper is innovative leadership of Sejong the Great. The focus of this thesis is the enactment process of new tax law that he has taken lead. The subject matter of this article is the related documents of the Sejong Annals(The Sejong Sillok). The contents of this essay is as follows. Sejong the Great raised the bad problems of Gwajeonbeob, established tax law and proposed the flat rate scheme of tax law. The reform proceedings of tax law was the listening of public opinion, the restoration of prime ministers council agreement system(Uijeongbu seosaje) and communicative enactment and enforcement of new tax law. The essence of Sejong the Great leadership is love of the people and the ruler's shared happiness with the people.
The Leadership of Sejong the Great is the leadership of reform and innovation. He reformed the autocratic administration of His father, King Taejong. He abolished the king's direct administration system(Yugjo jiggyeje) and restored the prime ministers council agreement system(Uijeongbu seosaje). He divided his power and gave it the prime ministers council. He agreed with consensus of government departments in tax law. His leadership of enactment process of new tax law resembled indefatigable assiduity of King Wen's reform in Zhou Dynasty. Both won the trust and support of subjects through gradual progress of reform. He listened people's voice willingly and amended tax law rightly. The final system of new tax was six classification of land grade and nine classification of annual grade in taxation. He achieved the great transformation of tax system in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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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自撰墓誌銘」에 드러난 茶山의 中庸觀연구 ― 『중용자잠』과 『중용강의보』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조영 ( Kim J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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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茶山 丁若鏞의 『中庸』에 관한 저술 중 『中庸自箴』과 『中庸講義補』를 중심으로 茶山이 「自撰墓誌銘」에서 『中庸』에 대해 언급한 7가지 논점을 통해 다산의 中庸觀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經學은 일반적으로 朱子學的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후기 丁若鏞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수용의 태도로 자신의 경학관을 제시하였다.
茶山이 「자찬묘지명」에서 『中庸』에 관해 제시한 7가지 논점을 살펴보면, 中의 의미를 주자와 같이 '不偏不倚無過不及'의 의미로 見地하고 있으나 주자의 中과 구별되고, 庸의 의미는 '능히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有常'의 의미로 파악하고 有常은 '恒常' '能久'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이 말하는 中庸은 '연속적인 실천성'을 강조한 특징이 보인다. '不睹不聞'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주체와 대상'에 대해 초점을 두어 主宰者로서의 上帝를 제시하고 '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며, '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隱微'는 暗處細事가 아니고 上天의 일이라고 하였으며, '喜怒哀樂之未發'은 喜怒哀樂의 未發이지 心知思慮의 未發이 아니라고 하여 喜怒哀樂과 心知思慮를 구분함으로써 情의 범위를 재해석하고 있다. '罟擭陷阱'은 잘못을 저질러 有司에게 형벌을 받는 것만이 罟擭陷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索隱'은 隱僻한 이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改而止'는 自修의 공부로 파악하여 내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道心人心, 唯一唯精'은 『荀子』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이기에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순자』가 인용한 本意를 따른다면 '道心人心'과, '唯一唯精'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같이 『중용』에 나타난 다산의 經學觀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으로 제시하였고, 현실적인 경세론의 입장으로 경학에 접근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Dasan(茶山)'s Jungyong perspective through the seven points that Dasan mentioned about Jungyong in Jachanmyojimyeong (self-written epitaph) focusing on Jungyong Jajam and Jungyong Ganguibo among his writings on Jungyong by Dasan Jeongyakyong.
In general, the study of Korean 經學was based on the worldview of 朱子學的, and in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 studies were deepened and Neo-Confucian thinking expanded by Yulgok and Toegye. Howev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Dasan Jeongyakyong presented his own 經學觀from a critical standpoint vis-à-vis Neo-Confucianism, escaping from the worldview of Neo-Confucianism, which was the main school at the time. In addition, he suggested seven points in hisJachanmyojimyeong about Jungyong, one of the Confucian Classics.
Among the seven points, he considered the meaning of '中' with respect to the meaning of '不偏不倚無過不及' as Zhu Xi had done, but adopted a distinct interpretation of '中' from Zhu Xi, while he understood 庸as meaning 有常, focusing on 'being able to do it consistently for a long time', where 有常 is understood as meaning '恒常' and '能久'. Therefore, in Dasan's view, 中庸is characterized by an emphasis on 'continuous practicality'. Regarding the phrase ' 不睹不聞', it shows a focus on the 'subject and object' that we cannot see or hear, suggesting the 上帝as 主宰者, and confirming that '不睹' is what is not seen and '不聞' is what is not heard. Regarding '隱微', it was said to be a matter of 上天, not of 暗處細事. Moreover, in '喜怒哀樂之未發', by distinguishing 喜怒哀樂and 心知思慮and stating that it is not the 未發of 心知思慮that is meant but 未發of 喜怒哀樂, the scope of 情was reinterpreted. Regarding '罟擭陷阱', he stated that it was not 罟擭陷阱only to have committed a wrong and to be punished by 有司and that the meaning of '索隱' was not to find 隱僻reason, but to be hidden for no reason. '改而止' means that if one exerts self-control and corrects one's mistakes, it does not mean to stop controlling oneself, but rather to correct one's own actions through self-study. The two halves of '道心人心, 唯一唯精' are not connected to each other based on the 『道經』 in 『荀子』, and according to the 本意quoted by Xunzi, people should follow the order '道心人心' rather than '人心道心' and of '唯一唯精' rather than '惟精惟一'. In this way, if we examine Dasan's view of 經學觀in Jungyong, we see that the philosophical concepts of Neo-Confucianism are presented in a concrete way for easy recognition, and 經學is approached from the perspective of governing, with a focus on examples revealed in re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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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역사지리적 관점에서 본 지역어의 언어문화 연구 ― 무주군 설천면의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을 사례로 ―

저자 : 윤지훈 ( Yun Ji 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3-28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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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오늘날 동일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두 마을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차이가 나는 배경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다시말해 본 연구는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접한 두 지역을 사례로 현대 언어문화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이 있는 설천면과 인접과 무풍면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와 신라의 변방 가장자리의 접경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신촌마을과 이남마을 사이에 소재하고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둘째, 조선 태종 14년(1414년), 신라계 무풍현과 백제계 주계현이 통합되어 무주현이 된 이래로 옛 신라의 일부 영토는 현재까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무풍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역적,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이남마을은 주민들은 가까운 설천장보다는 무풍장을 이용하고, 고개 넘어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주로 무풍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고대국가 백제의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촌마을 주민들은 나제통문 넘어를 신라땅, 혹은 경상도라고 인식하여 이남마을이나 무풍지역 사람들과는 통혼은 물론 교류도 거의 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고대국가에 정체성를 두고 오랜 세월 교류도 거의 없었기에 각자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보전되어 온 것이다.
넷째, 이남마을과 무풍면 사람들은 비록 오랫동안 전북권에 속해 있음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경상도식 언어문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신촌마을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전라도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하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와 분수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연구를 통해 현대 언어문화는 신라나 백제와 같은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부분 검증될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This study was attempted to clarify the background of the different customs and language cultures of two villages that belong to the same administrative district today.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historical origin of modern language culture, taking as an example two adjacent regions rooted in ancient countries. First, it is understood that Seolcheon-myeon where Sinchon village and Inam village are located, and the adjacent Mupung-myeon were historically and geographically the border area between ancient countries Baekje and Silla. In particular, the 'Rajetongmun Gate' located between Sinchon and Inam villages is also a symbolical object that supports such a historical background. Second, in the 14th year of Taejong of Joseon(1414), Mupung-hyeon of Silla and Jugye-hyeon of Baekje were integrated into Muju-hyeon; therefore, some territories of the former Silla have belonged to Jeolla-do until now. Nevertheless, even today, more than 600 years later, people from Mupung-myeon maintain their regional and cultural identity of being rooted in Silla. Third, while Inam village residents have a cultural identity in the Gyeongsang-do as interacting mainly with people from Mupung-myeon, the residents of Sinchon village, on the other hand, have the cultural identity of the ancient nation Baekje, Since there have been little interactions for a long time over their identity in different ancient countries, their customs and language culture have been preserved. Fourth, the people of Inam Village and Mupung-myeon have their own Gyeongsang-do-style language culture even though they have belonged to Jeonbuk for a long time, and the people of Sinchon Village use Jeolla-do dialect mixed with Chungcheong-do dialect. In short, just as the origins and watersheds of the river can be traced back upstream, this study confirms that the hypothesis that modern language culture is rooted in ancient countries such as Silla and Baekje can be verified to a large ex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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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용익의 <독사시장편삼백이십오운(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에 대하여

저자 : 이남면 ( Lee Nam-my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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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용익의 <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시를 고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太古시대부터 淸나라 초기까지 흥망성쇠의 변천 과정을 시대 순으로 읊은 칠언고시로, 총 325운이고 650구이며 4,550자에 이르는 장편 대작이다.
창작 동기는 남용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勸善懲惡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였으며 명말청초의 암울한 현실을 역사의 반추를 통해 위안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의 특징은 儒家的 이념과 사유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가의 인물을 칭송하고 異端을 배척했으며, 蜀漢이 漢나라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기술했고, 곳곳에서 尊王攘夷 의식을 드러내었으며, 秦始皇과 隋煬帝 등 폭군을 비판한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표현의 특징은, 우선 장법 면에서 褒와 貶의 반복과 그 거리 조절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였고, 역사의 전환기마다 과거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聯'을 배치하여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시어의 사용은 '哀', '恨', '傷' 등 감정 표현의 글자를 사용하여 비판의 효과를 높였으며, 동물과 관련한 일화를 실패와 몰락 등의 표현을 위해 원용하는 한편 고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어 역사를 현장감 있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구법 면에서는 7언구가 5언구에 비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 시는 다양한 역사 기술의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해주었고, 家學을 통해 전승된 남용익의 역사 인식이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다만 긴 편폭에 너무 많은 역사를 압축 제시하여 일별하기에 쉽지 않고 그 내용 또한 난해하다. 결국 이런 방식의 역사 시 창작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의 한계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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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설리시(說理詩) 연구(硏究)

저자 : 李貞和 ( Lee Jeong Hw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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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설리적 언표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병와 이형상의 학문 인식과 시세계의 상관관계를 탐색한 것이다. 병와가 애호한 산수는 음풍농월하기 위한 소일의 공간이 아니라 성학의 이치를 깨닫는 장소이자 학문적 사유의 공간이다. 병와의 학자적 풍모는 벼슬아치들이 모여 있는 조시에서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오히려 초야에서의 은거생활 속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병와는 생전에 '병와순옹(甁窩順翁)'를 명정(銘旌)에 써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 수양에 철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경전명(鏡前銘)>에서는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유자의 자세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때 묻기 쉬운 마음 상태를 염려하여 수신해야 함을 일깨운 작품이 <경후명(鏡後銘)>이다. 또한 <경갑명(鏡匣銘)>에서는 먼지를 막기 위해 거울에 덮개가 있는 것과 같이 유자의 수기(修己) 역시 허물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절조축(節操祝)」은 자신의 기상을 낙락장송에 빗대어 표출하고 있는데, 올곧은 선비로 살았던 병와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임고알묘(臨皐謁廟)」에서는 유학의 도통을 전수한 포은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고결한 스승의 정신을 본받아서 자신 또한 지극한 정성을 다해 스승의 사우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에서 이러한 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설리시에 내재된 시정신은 기본적으로 이학자의 구도 정신인데, 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마음의 다스림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 성학을 통해 체득한 이치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삶이 설리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맹(孔孟)을 위시한 성현의 학문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유자의 일상은 수기(修己)가 중심이 됨은 물론이다. 병와의 시에는 『대학(大學)』을 비롯한 경전을 통해 성학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시화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 병와의 가르침은 오로지 학문에 전념해야 통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일깨우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병와시에는 실천궁행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병와는 설리시를 읊음으로써 사람이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 곧 '도'임을 표명하고 있으니, 이는 깨달음의 도가 충만할수록 더욱더 실천궁행하는 것이 유자의 바른 길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일방삼연(一方三然)」에서 병와는 공자와 안회의 덕망을 우러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인(仁)의 마음을 변치 않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병와의 설리시 가운데 일상의 경솔한 언동을 경계하는 설리시가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중한 태도로 살아가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삼성수수(三聖授受)」의 경우, 도심(道心)을 정밀하게 살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삼가고 재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은사(隱士)인 소부·허유의 고사를 전고로 하여 「소허청절(巢許淸節)」을 읊은 바 있으니, 이 시에는 본성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하는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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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채주문(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복수 서사의 이념성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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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복수를 둘러싼 쟁점들이 복수 서사를 통해 유교 이념으로 포섭되고 유교 이념을 실천하는 행위로 미화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분석했다.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장계, 옥안, 판부 등의 공문서에 형성된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한 행위로 판결되었다. 당초 황성엽에 대한 옥안에서는 채서우가 황성엽에 의해 죽은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상감사의 장계 등에서 각종 정황 증거를 거론하여 채주문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고자 창작된 것이 바로 정상리의 「채효자복수기사」이다. 채주문의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정상리는 실기류 산문을 통해 채주문의 복수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명문화했다. 그 뒤 정민병과 고성겸은 「채효자전」을 지어, 채효자 사건을 인구에 회자될 만한 흥미롭고도 특출난 효행으로 윤색했다.
정민병은 정상리의 再從姪이었으며, 고성겸은 정민병과 교유했던 상주지역의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리의 의도를 계승·발전하여, 복수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복수 준비 과정, 복수 살인 장면 등을 확대하고 새로운 서사를 삽입하여, 복수 서사를 흥미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새로 삽입하거나 확대한 서사 요소들은 모두 '孝'라는 가치와 긴밀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창작한 「채효자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 관련 쟁점들을 상기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채주문의 행위를 보기 드문 위대한 효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이러한 서사화를 통해 노린 것은 궁극적으로 채주문이 정려를 받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상리, 정민병, 고성겸은 의도적으로 채주문의 복수 관련 의혹들을 제거하여, 채주문의 살인을 칭송할 만한 윤리적 행위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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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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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강산 유기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后山 鄭胤永의 『瀛嶽錄』을 살펴본 것이다. 정윤영은 1897년 8월 16일 安城을 출발하여 內外 金剛과 東海를 유람하고 10월 8일 귀향했다.
『영악록』은 화성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99면, 17,956자이다. 특징 중 하나는 前代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의 「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전인의 기록을 대폭 수용한 것은 『영악록』을 쓴 의도가, 단순히 금강산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첫째, 금강산의 절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영악록』에는 산수 유람과 관련된 수많은 중국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금강산을 말하지 않고 중국의 뛰어난 산수만을 표현함으로써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 유자적 사유를 체험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람을 통해, 유자로서 평소 익혔던 사유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체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고증하는 자세를 취했다. 셋째, 산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절경의 산수에 대해서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암벽에 새겨진 이름이나 정자에 걸린 작품 등을 통해 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넷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척화 관련 소장으로 유배의 시련을 겪었는데, 그러한 시련의 삶에 대한 진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유람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측면에서도 그 목적의식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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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전문학에 수용된 인물의 특질과 형상화 방안 ― 설화 <우렁각시>를 중심으로 ―

저자 : 하경숙 ( Ha Kyoung-sook ) , 이정현 ( Lee Jung-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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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 설화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우렁각시는 다양한 유통을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총각이 농사를 짓다가 우렁이를 발견하고 우렁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총각과 처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설화 <우렁각시> 속에는 여성적이며 현실적이며 신비한 면모를 지닌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문맥을 통하여 이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결핍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의 특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지니고 있는 관계적 가치를 풀어보고자 모색하였다. 우렁각시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내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총각이 지닌 다양한 결핍과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해결해주는 인물이다. 아울러 현모양처의 면모가 상세히 드러난다.
우렁각시라는 인물은 독립적인 결정과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능동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 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서사에서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황으로의 국면을 전환하는 노력과 아울러 주체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보다 삶에 대해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렁각시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속하게 되면서 다양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여성이 지닌 생명성을 동일하게 바라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대사회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속에서 생명추구의 모습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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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행록(燕行錄) 국역 사업'의 성과와 향후 과제 ― 학술적 가치와 연계하여 ―

저자 : 이홍식 ( Lee¸ Hongshi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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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15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학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여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제출된 연행록 국역 성과와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비교 분석하여 현재 의미를 평가하였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루어진 사행 관련 학술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 가치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에 비추어서 앞으로의 국역 사업 진행 방향 등에 대해 정책 제언을 더하였다.
대중국 사행기록인 연행록은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화의 교류와 충격 그리고 자각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지성사적 자료이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한·중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밝히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출간한 20권의 연행록은 이러한 사행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연행록 국역 사업'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필요가 있다. 더하여 학술 연구와의 연계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업 주체들의 책임의식과 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한국고전번역원의 평가 심사 외에도 성과발표회 및 학술세미나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국역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학술연구와 연계하여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부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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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조초반 사인조보(私印朝報)사건을 통해 본 정치상황과 조보(朝報)정책

저자 : 김경록 ( Kim Kyeong L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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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보는 승정원에서 정리하여 전국에 전파함으로써 국왕의 선정 및 통치의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발간되었다.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필사조보를 인쇄하여 보다 많은 부수를 보다 편리하게 전파할 수 있음에도 선조는 이를 사건화하여 정국을 경색시켰다. 그 결과 인쇄를 통해 신속하고 대량으로 전파할 수 있음에도 인쇄조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의 지배체제가 공론정치를 지향했다. 공론정치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 국왕의 정당한 정치를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 조보였다. 조보는 국왕과 왕실의 동정 및 각종 예제, 인사정책, 관리의 공론정치 및 보고서와 이에 대한 국왕의 처분을 포함하였다. 조선은 건국직후 조보를 왕정의 전파수단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각종 정치사건, 예제사건, 인사정책에 조보는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선조는 즉위하며 명종대에 척신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분화 및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군사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선조는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즉, 선조는 왕위계승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치 상황에 대응하고자 정세를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에 의한 사인조보의 발행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조보를 왕권의 대외 전파수단임을 강조했다.
1577년(선조 10) 선조의 備忘記에서 시작된 사인조보사건은 유교국가에서 조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직계왕손으로 즉위하지 못한 선조가 초반기 왕위의 정통성과 통치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국왕의 정당한 통치를 전파하는 조보를 민간에서 사적 이익을 위해 인쇄하였다는 점은 선조로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약 3개월의 조사를 통해 30여 명의 관련자를 처벌한 선조는 향후 조보의 인쇄를 금지하고 철저한 관리를 지시하며 사건을 종료했다.
선조에 의해 제기되고 처벌된 사인조보사건은 선조초반 정치상황의 전개과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재위 10년을 경과하며 선조는 왕위의 권위를 회복하고 갈등구도의 정치상황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고자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엄단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 사인조보는 당시 명에서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王政의 전파 및 전달단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이의 발행을 수월하게 하여 민간에서 이익을 가지고자 했던 사회발전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왕명출납의 한방식이라 강조하였다. 조보는 이후 매우 한정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임진전쟁의 와중에 통치질서가 붕괴되자 이를 보완하는 매체로 활용됨으로써 선조초반 사인조보사건이 선조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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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호 이익의 관혼례(冠婚禮) 의절(儀節) 연구

저자 : 도민재 ( Doh Min-j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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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이 실제 관례와 혼례를 거행하며 의식절차를 정리한 「산절관의(刪節冠儀)」와 「취부의(娶婦儀)」, 「가녀의(嫁女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이익이 제시한 실용적인 관례와 혼례 의절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익은 관례에서 빈객을 모시는 절차를 생략하고, 삼가례는 한 번으로 간소화하여 관례 시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기물 준비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였다. 이는 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혼례는 시속(時俗)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청기(請期)'도 신랑집이 아닌 신부집에서 청하도록 하고, 폐백과 음식의 종류 및 가짓수를 간소화하여 실용적인 혼례 의식을 제시했다.
이익은 『가례』가 의례 실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인정했으나, 『가례』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상황에 맞추어 의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가난한 양반이나 일반 서인들이 『가례』를 제대로 따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인 측면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례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익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실용적인 의례 실천을 추구하여, 형식에 치우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이 아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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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의 미발공부 유무와 호락논쟁

저자 : 이종우 ( Yi Jongwo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5-2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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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미발시 공부로서 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훗날 조선후기 호락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호학의 한원진은 낙학인 이현익의 미발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김창흡을 지지하였다. 당시 김창흡은 낙학에서 이현익과 박필주가 논쟁을 벌인 것에 대하여 이현익을 비판하면서 박필주를 지지하였다. 그는 미발시에도 함양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익은 미발이란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허황된 생각도 생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무공부에 근거하였다. 반면에 김창흡은 그러한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함양으로서 계신공구 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공부에 근거하였다. 김창흡은 미발이란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여긴 반면에 한원진은 기질지성도 있기 때문에 선악이 함께 있다고 여긴 것이 다른 점이다. 이간은 미발을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김창흡과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정조실록』에서 이간을 김창흡과 같은 낙학으로 분류하였으나 미발시 공부설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간은 미발을 중과 부중으로 구분하여 부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주희의 미발공부의 유무에 근거하였다. 이간의 미발시 무공부는 이현익과 공통점을 갖는 반면에 김창흡과 다르다. 그러므로 『정조실록』에서 이간과 김창흡을 낙학으로 분류한 것은 미발시 본연지성만 있다는 주장이 같았기 때문일 뿐 공부설이 같아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미발시 공부에 관한 논쟁은 성리학의 목적에 해당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호락논쟁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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