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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지학회> 온지논총> 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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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A Study on Jeong Yun-young's Youngakrok

박종훈 ( Park Chonghoon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6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109-144(36pages)
온지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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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鄭胤永의 『瀛嶽錄』
Ⅲ. 정윤영 『영악록』의 특징적 일면
Ⅳ. 나가는 말 - 『영악록』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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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강산 유기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后山 鄭胤永의 『瀛嶽錄』을 살펴본 것이다. 정윤영은 1897년 8월 16일 安城을 출발하여 內外 金剛과 東海를 유람하고 10월 8일 귀향했다.
『영악록』은 화성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99면, 17,956자이다. 특징 중 하나는 前代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의 「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전인의 기록을 대폭 수용한 것은 『영악록』을 쓴 의도가, 단순히 금강산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첫째, 금강산의 절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영악록』에는 산수 유람과 관련된 수많은 중국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금강산을 말하지 않고 중국의 뛰어난 산수만을 표현함으로써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 유자적 사유를 체험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람을 통해, 유자로서 평소 익혔던 사유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체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고증하는 자세를 취했다. 셋째, 산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절경의 산수에 대해서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암벽에 새겨진 이름이나 정자에 걸린 작품 등을 통해 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넷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척화 관련 소장으로 유배의 시련을 겪었는데, 그러한 시련의 삶에 대한 진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유람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측면에서도 그 목적의식을 살필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Jeong Yun-young's 『Yeongakrok』, a travel journal related to Mt. Geumgang, which is not yet known. He was in 1897, the Anseong, on August 16 starting Mount Geumgang and donghae a sightseeing trip and returned home on October 8. After he returned from his trip, it was 『Yeongakrok』 that summarized the trip.
One of the biggest features of the book is that it embraces the records of previous writers. Among them, Kim Chang-hyup's 「Dongyugi」 is very similar in terms of its system and contents. Records of the journey, descriptions of the scenery, and personal impressions were also greatly accepted by Kim Chang-hyup. In addition, he accepted records such as Lee Eui-hyun, Oh Do-il, Nam Hyo-on and Hong Kyung-mo, calling himself a record of former writers. The reason why the records of the previous writers were greatly accepted seems to have been due to their own sense of purpose.
First, it was to effectively reveal the scenic beauty of Mt. Geumgang. It indirectly revealed the scenic beauty of Mt. Geumgang by expressing only the outstanding scenery of China without directly mentioning Mt. It also emphasized that Mt. Geumgang is cooler in contrast to the Chinese landscape.
Second, it was intended to be used as a venue for experiencing academic reasons. As a scholar, he used his usual learning as an opportunity to learn from the real world. He also took a stance of thoroughly testifying the parts that needed to be verified. These are all derived from scholarly reasons.
Third, it was to show his own view of nature. He praised the wonderful scenery. However, he sharply criticized the name carved on the cliff or the work hung on the building.
Fourth, it was to use it a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one's life. This book contains a serious retrospective on life that has undergone difficulties. After all, he took advantage of his trip to Mt. Geumgang a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his life.
I hope this paper will serve as the basis for research on not only Jeong Yun-yeong's 『Yeongakrok』, but also his travel records to Mt. Geum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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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5-2021
  • : 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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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권0호(2021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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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근재(謹齋) 안축(安軸)(1282~1348)의 관동(關東) 체험 고찰 ― 가정(稼亭) 이곡(李穀)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裴圭範 ( Bae Kuybeom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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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謹齋 安軸과 稼亭 李穀이 경험한 關東 체험을 비교 분석하여 그들의 삶과 이 시기 시문에 드러난 주제 의식을 확인하고자 진행되었다. 安軸-安輔 형제와 李穀-李穡 부자의 인연은 학문을 토대로 전개되었고, 科擧라는 매개를 통해 더욱 깊어졌다. 특히 元 制科에 형제와 부자가 동시에 급제하여 一身은 물론 家門을 일으킴으로써 新進士大夫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진행된 그들의 관동 체험은 안축이 江陵道存撫使에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19년 뒤 이곡은 그런 안축의 발자취를 뒤따라감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시에 담았다. 시문에 드러난 주제 의식은 두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안축이 암담한 현실을 비판적이며 풍자적인 논조로 노래한 반면, 이곡은 낙관적이며 조금은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현실감각이 떨어져 보인다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This paper was conducted to compare and analyze the experience of Kwandong experienced by Keun-jae Ahn-chook(謹齋 安軸) and Ga-jeong Lee-Gok(稼亭 李穀) to confirm their lives and the theme consciousness revealed in poetry during this perio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hn-chook(安軸), Ahn-bo(安輔) brothers and the Lee-Gok(李穀), Lee-Saek(李穡) father developed based on learning and deepened through the medium of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In particular, brothers and fathers passed the Yuan Empire state examination at the same time to established the family as well as a single person, showing the typical form of a new generation(新進士大夫). Their experience in Kwandong, which took place in a chaotic domestic political situation, began when Ahn-chook was appointed to Gangwon-do Jonmu-sa(江陵道存撫使). 19 years later, Lee-Gok followed in Ahn-chook's footsteps and expressed his admiration and longing for him. The consciousness of the subject matter revealed in the poem varied depending on the situation the two faced. While Ahn-chook sang in a critical and satirical tone of the dark reality, Lee-Gok was optimistic and understood a little super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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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창협(金昌協)의 <동유기(東游記)> 연구

저자 : 정영문 ( Jeong¸ Young-m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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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金昌協)은 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문장가이면서 유람객이다. 그는 21살 되던 1671년 8월 11일부터 9월 11일까지 1달동안 관동지역(금강산과 동해)을 유람하였다. 금강산만 유람하고 돌아오려던 여행이었지만, 권세경(權世經)의 권유로 동해안으로까지 유람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때의 유람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 <동유기(東遊記)>이다.
<동유기>에 나타나는 서술상의 특징으로는 첫째, 김창협은 『농암집(農巖集)』에 567題의 한시를 남겼지만, <동유기>에는 한시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동유기>가 12편의 짧은 기(記)를 결합하여 완성했다는 점이다. 김창협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산수에서 흥취(興趣), 유묵에서 아취(雅趣), 승려와의 관계에서 정취(情趣)를 느꼈다. 이러한 감정은 유람을 떠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현상이지만, 각인각색의 정감이기 때문에 단순화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김창협은 금강산을 유람한 이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하여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애당초 보지 못했던 때보다 더 간절해진다.”고 말할 정도로 잊지 못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유산(遊山)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또한, 김창협은 유람지에 있는 바위나 누정 등에 적혀있는 이름과 유묵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제명(題名)을 남기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흥취를 즐기는 여흥인 동시에 동류들과 소통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 김창협은 이전의 사대부들과는 달리 승려들과 성리학에 관해 논쟁하기보다 불교와 승려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Kim Chang-Hyup(金昌協) is a Neo-Confucian scholar, writer, and traveler who represents Joseon in the 17th century. At the age of 21, from August 11 to September 11, 1671, he toured the Kwandong(關東) area (Mt. Geumgang and the East Sea) for one month. He was on a trip to return from a tour of Mt. Geumgang only, but at the recommendation of Kwon Se-Kyung, he expanded the tour area to the east coast. The record of the excursion at this time in a diary is 「Dong Yugi (東遊記)」.
As the descriptive characteristics of 「Dong Yugi」, first point is that although Kim Chang-Hyup left 567 Chinese poetry in 「Nongamjip(農巖集)」, he did not record them in 「Dong Yugi」. The second is that 「Dong Yugi」 is composed of 12 short experiences. While Kim Chang-Hyup toured Mt. Geumgangsan(金剛山), he felt joy(興趣) in the landscape, the elegance(雅趣) in the writings of various persons, and the Emotion(情趣) in the relationship with the Buddhist monks. These feelings are felt by anyone who goes on a sightseeing, but it is difficult to unify them because they are various emotions by person.
After traveling to Mt. Geumgangsan, Kim Chang-Hyup has never forgot his desire to see it again for the rest of his life, as much as to say, “As time goes by, I can't forget it, and my desire to see it again becomes more earnest than when I never saw it at all.” After that, it came to think of ways to understand nature for a long time. In addition, Kim Chang-Hyup actively searched for names written on rocks and pavilions in the excursion site, and tried to leave his name on such places. This was because these actions were both entertainment to enjoy and a way to communicate with fellow members. During his excursion to Mt. Geumgangsan, unlike previous noblemen, Kim Chang-Hyup showed an attitude in favor of Buddhism and monks rather than arguing with them about Neo-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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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후기 고소설에 나타난 죄벌(罪罰)을 통해 본 소수자 혐오 양상과 그 의미 ― 추모(醜貌)·귀물(鬼物)·유충(幼蟲)·병신(病身)의 형상화를 중심으로 ―

저자 : 구선정 ( Koo-sun-j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0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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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조선 후기 고소설에 나타나는 죄벌(罪罰)의 방식인 추모(醜貌)·귀물(鬼物)·유충(幼蟲)·병신(病身)의 형상화를 통해 조선 후기 고소설 속 갈등의 방식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 원인을 고찰하는 것이다.
고소설은 일반적으로 권선징악을 세계관으로 삼아 선악(善惡)을 중심으로 한 갈등과 악행에 대한 죄과(罪科)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고소설 속에서 가문의 질서를 따르는 인물을 선인으로, 가문의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질서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물에게는 징벌이 내려지는데 그 대상이 권력 관계 속에서 열세에 있는 소수자인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들은 죄벌로 인해 못생긴 외모(醜貌)로 태어나고(<한조삼성기봉>), 몸에서 수많은 벌레(幼蟲)를 쏟아내며(<완월회맹연>), 흉악한 귀물(鬼物)이 되어 돌아오고(<완월회맹연>) 맹인·앉은뱅이·성불구자와 같은 병신(病身)이 된다.(<한후룡전>·<유화기연>) 소수자를 악취·유충·버러지·더러움·우두나찰·귀신·잔나비·흉계망측·병신·일무가취 등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신분 질서의 동요 등이 일어났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사대부 남성들은 흔들리는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윤리를 구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종법 의식을 강화하여 가문 중심의 질서로 사회를 재편하려 했는데 이러한 움직임 이면에는 주체 남성의 은폐된 욕망과 자신들이 만든 공동체가 새로운 사고에 의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반(反)이데올로기, 성적 욕망, 신체적 불완전성에 대한 주체 집단의 원초적 두려움이 소수자를 괴물화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주체가 만들어낸 괴물이 사실은 폭력적인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 권력의 희생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This study is aimed at examining and considering the formats of conflicts and the causes of abhorrence against minorities displayed thereof during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embodiment of hideous appearance, evil spirits, vermin, and physical deformation, which are the formats of punishment, illustrated in the old novels of the time.
Old novels generally employ 'encouragement of good and punishment for evil' as the worldly values, thereby focusing on depicting the conflicts centered around good and evil, as well as the punishment of evil deeds most importantly. What should be noted is the trend of the distinction between goodness and evilness of the characters appearing in the novels becoming even more definitive towards the latter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there had been a marked increase of novels that depicted those who safeguard the orderliness within the family clan as virtuous persons and those who threatened such orderliness as evil persons. Accordingly, those who failed to comply with the orderliness of the family clan were subjected to an extensive range of punishments. Moreover, women and disabled persons who were the minorities deemed to be inferior amidst of the power dynamics within the family clan become the targets of abhorrence. Accordingly, they were borne with hideous appearances (< Hanjosamsunggibong >), countless vermin gushing out of their bodies (< Wanwolhoemaengyeon >), returning as atrocious evil spirits (< Wanwolhoemaengyeon >), and becoming blind, paralyzed in the lower body, sexually impotent, and intellectually disabled as the results of punishments for their crimes committed. (< Hanhuryongjeon >, < Yuhwagiyeon >) depict the images of minorities with descriptions such as foul odors, larva, insects, foulness, ghosts with bull's heads, evil spirits, monkeys, physical deformations, worthless persons to incite strong senses of abhorrence. They were then either eliminated or reformed into persons who were in compliance with the ideologies of the ruling group to be incorporated into such group
Depiction of women and disabled persons as monstrous characters as well as displays of abhorrence against them could be seen as the results of reflection of the uneasy consciousness of the male principals with power and their psychological horrors of being castrated from the status quo they enjoyed. Monsters are the manifestation of the internal impulses of principals that are difficult to understand from the moral viewpoint of humanity. Therefore,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monsters created by the principals are in fact the victims of the social powers rather than violent authority. It was possible to deduce the mentality of the social classes striving to continue to enjoy their status quo in the latter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owards hideous appearances that underwent hierarchical changes through the aforementioned punishments for what they considered 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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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렁덩덩 신선비>와 <두꺼비 신랑> 속 '허물'과 '아내 고행'의 의미 ― 동물 토템에서 기인한 가부장제로의 이행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용선 ( Kim Yong-s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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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사람의 오랜 관계는 구전설화에서도 즐겨 다루는 주제의 하나이다. 설화 속 이물은 대체로 동물이며 이물교혼은 동물과 사람 간의 혼인을 다루는 서사로서 <구렁덩덩 신선비>와 <두꺼비 신랑>은 남성 배우자가 이물 즉 동물이다. 동물 신랑과 사람 각시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이야기. 두 서사는 나란히 이물교혼을 다루며 비슷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다. 아이를 갖기 어려운 부모나 노파가 구렁이 아들, 혹은 두꺼비 아들을 얻고 이웃집 세 딸 중 막내딸과 혼사를 이룬다. 첫날밤 동물신랑은 허물을 벗고 미남자가 되며 아내에게 허물간수를 부탁하고 멀리 떠난다. 언니들의 방해로 허물을 태우자 냄새가 신랑에게 닿고 신랑은 새 각시를 만난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떠나 고행을 겪고 끝내 두 처가 겨루어 아내는 집 나간 남편과 재결합 한다. 여기까지 구조는 두 서사 모두 동일하나 <두꺼비 신랑>의 경우 동물 신랑이 처가로부터 시험을 겪는 각 편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두 설화는 모두 민담의 구조를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말하는 동물과 이를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 성과 속의 세계는 평면적 서사 세계에 함께 놓여 있고 교차된다. 민담 속 구렁이와 두꺼비는 고대의 동물 토템 흔적을, 변신과 혼인의 과정은 민간 신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처가에서 남편 가정으로의 서사 공간이 이동되고 아내의 입장이 남편의 시험과정을 통해 승인된다는 점에서 두 서사는 모권제에서 가부장제로의 이행을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허물'은 신성성의 탈각이며 아내의 고행은 동물 토템에의 숭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두꺼비 신랑의 처가 승인 과정은 일종의 변이형으로 이물의 비범한 능력을 과시하는 무대로 활용된다. 이는 동물 토템이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이기보다 도리어 우월한 입장인 '신격'에 놓여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두 민담은 토템과 민간 신격의 흔적, 그리고 가부장제의 학습을 남편의 '허물'과 아내의 '고행'을 통해 전승한다.


The long relationship between animals and humans is one of the topics that are often treated in oral folktales. The monsters in the narrative are generally animals, and foreign body marriage is a narrative dealing with marriage between animals and humans. The male spouse is a foreign object, or animal, in < Gureongdeongdeong Sinseonbi > and 'Toad Bridegroom'. This is a story of an animal groom and a human bridegroom's meeting and becoming a couple. The two narratives deal with marriage between man and animal side by side and have a similar narrative structure. A parent or old woman, who is difficult to have children, gets a snake son or a toad son, and marries the youngest of the three daughters in the neighbor's house. On the first night, the animal groom takes off his skin and becomes a handsome man, asks his wife to keep his skin exuviae, and leaves far away. When the exuviae is burnt due to the interference of the older sisters, the burning smell reaches the bridegroom and the groom happens to meet a new bridegroom. The wife leaves for her husband, suffers adversities, and eventually the two wives compete, and the original wife reunites with the husband who left the house. The structure up to this point is the same for both narratives, but there is a difference in the case of < Toad Bridegroom >, the animal groom undergoes a test from his wife's family. Both stories have the typical structures of folktales intact. The typical structures are that animals talk and people do not surprise at them. The worlds of the sacred and the profane lie together and intersect in the flat narrative world. In folklore, the snakes and toads capture the traces of ancient animal totems, and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marriage captures the traces of folk myths. The two narratives narratively reveal the transition from the motherhood system to the patriarchal system in that the narrative space moves from the wife's family to the husband's family and the wife's position is approved through the husband's examination process. The “exuviae” is read as a symbol of the renunciation of divine nature, and the wife's asceticism symbolizes the worship of animal totems. The approval process of the toad bridegroom's wife is used as a stage to show off the extraordinary ability of a foreign body as a kind of variant. This indicates that animal totems are in a superior position rather than being inferior to humans, which is a “godliness”. The two folktales pass on totems, traces of the folk deity, and the learning of patriarchy through the husband's “exuviae” and the wife's “pe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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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수석>에 구현된 국가의 존망과 가문의 존재 양상

저자 : 김강은 ( Kim¸ Kang-e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7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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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석>은 당말오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활용하면서도 비극적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국문장편소설 중 특이한 작품으로 일컬어져 왔다. 당 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차용한 작품이 드물기도 하지만, 가문 번영에 중점을 두는 여타의 국문장편소설과 달리 <천수석>은 국가와 가문의 쇠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러한 특수성에 초점을 맞추어, <천수석>에 나타난 국가의 존망과 가문의 존재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천수석>은 실존 인물인 위보형과 위부를 중심으로, 국가와 명운을 함께하게 된 가문이 번영하였다가 쇠락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처사 가문이었던 위부가 공주혼을 통해 당 왕실과 운명을 함께하고, 당이 멸망하자 다시 처사 가문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작품은 이극용과 동창공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위부의 명맥을 계승하고 당과 후당의 연결성 또한 확보한다. 이는 난세에 가문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거시적인 역사를 문학적 범주에서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수석>의 지향은 대내적으로는 가문의 생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조하고, 대외적으로는 국문장편소설과 역사적 배경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상당수의 국문장편소설이 역사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활용하면서도 가상의 역사에 머물거나 역사적 사건을 주변화시키는 것과 달리, <천수석>은 시대 배경이 작품을 좌우하며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때로는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가의 멸망이라는 큰 사건을 한 가문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작품이 스스로 역사의 빈 공간을 상상하고, 국가가 멸망할 때 가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서사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수석>은 가문의 존속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은 물론, 고소설에서의 역사 활용 방식을 검토하는 데 있어 유의미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Cheonsuseok is a work that reveals a tragic perception of reality while utilizing the special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late Tang Dynasty, and has been referred to as an unusual work among Korean classical novels. Although it is rare to borrow the background of the period at the end of the year, unlike other Korean classical novels centered on the prosperity of the family, Cheonsuseok contains the decline of the state and family. Therefore, this paper focused on this specificity and examined the existence of the state and the family in Cheonsuseok.
Cheonsuseok. is about the process of prosperity and decline of the family who joined the nation and fate, centering on the real characters, Wi Bo-hyung and Wi family. It is to establish a structure in which Wi family, who was a retired family, shares fate with the Tang royal family through marriage with Princess Dongchang, preserves his reputation through the Later Party when the party collapsed, and returns to the retired family. And in the midst of this, the work actively utilizes Lee Kuk-yong and Princess Dongchang, inheriting the prestige of the stomach, while also securing the connection between the Tang Dynasty and the later Tang Dynasty. This shows the awareness of how the family can survive in difficult times at the family level, and it can be said that it reveals an attempt to newly understand macroscopic history in the literary category at the national level. It can be seen as the result of literary imagination to understand the macroscopic flow of history through the changes experienced by a family.
This orientation of Cheonsuseok is problematic in that it internally emphasizes the sense of problem with the family's survival method and externally reflect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classical novels and historical backgrounds. Unlike staying in "virtual history" or marginalizing historical events while using the past in which a considerable number of Korean classical novels exist, Cheonsuseok leads the overall story as the background of the times influences the work. Sometimes crossing the boundaries between fiction and facts, vividly describing the great event of the collapse of the state from the standpoint of a family. This can be said to be an experimental narrative about the work imagining the empty space of history on its own and what choices the family can make when the state collapses. In this respect, Cheonsuseok can be said to be a significant work in the history of novels in reviewing the way history is used within the complaint theory as well as the problem consciousness of the family's survival meth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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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광개토태왕훈적비(廣開土太王勳績碑) 제3·4면 해독(解讀)과 수묘제(守墓制) 고찰(考察)

저자 : 朴光敏 ( Park¸ Kwang-m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23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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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太王勳績碑연구에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비문에 대한 解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많은 연구자의 선행 연구에 의해 대부분의 글자는 해독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글자의 해독에는 논란이 많고, 아직 읽지 못한 부분도 상당히 남아 있다. 필자는 제1면과 제2면을 다룬 논문에서 광개토태왕훈적비의 글자와 古代의 金石文 자료들을 한 글자 한 글자 對比하여 그간 논란이 되어 왔던 일부 글자를 새롭게 해독한 바 있는데, 본고에서도 古代 금석문 자료들을 활용하여 3-5-10의 '挺', 3-7-29의 '抺', 3-10-9와 3-10-16의 '契', 3-11-37의 '岺' 등을 새롭게 解讀 하였다. 碑面이 완전히 깨져나간 4-1-1∼4-1-3, 碑面이 훼손된 4-1-4∼4-1-7도 문맥으로 헤아려 일부 글자를 해독하였다.
제3면의 討倭 기사 중 “侵入帶方界”라는 내용은 몇 글자 아래의 “王躬率住(왕)討徙平穰”과 연결되어 高句麗 平穰의 위치에 대하여 새로운 논의를 요한다. 본고에서는 중국 『二十四史』 중 『新唐書』와 『遼史』, 『元史』 등의 기록을 詳察하여 高句麗 平穰의 遼東 존재설에 대하여 문제 제기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3-8-16∼4-9-41은 守墓制에 관한 기사다. 4-1-41∼4-2-10에는 “百殘의 남쪽에 사는 韓은 國烟 1家 간연 5家”라고 기록해 있는데, 이는 濊貊을 비롯한 北方 韓系와 남쪽의 馬韓系 등 韓이 여러 곳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三國志』 『魏書-동이전』에, “景初 연간(237년∼239년)에 辰韓 여덟 개 나라를 나누어 樂浪에 주었는데, 吏讀(이두) 번역의 轉音에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있었다.”고 하였다. 『魏書』에서 말한 '辰韓 여덟 개 나라'는 古代의 요동에 존재했던 北方系 韓을 가리킨 것이다.
제4면의 “烟戶매매를 금지했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墓直이(>묘지기)에 관한 필사본 자료를 처음 발굴하여 '연호 매매'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國烟과 看烟의 의미는 무엇인지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Section 3 and 4 of King Gwanggaeto's Stele and deciphered the Chinese character '挺' of 3-5-10, '抺' of 3-7-29, '契' of 3-10-9 and 3-10-16, and '岺' of 3-11-37 of King Gwanggaeto's Stele which had been misread. Several heavily damaged letters from 4-1-1 to 4-1-3 and the defaced part from 4-1-4 to 4-1-7 were interpreted according to the context as well. In addition, the theory of Liaodong-Pyongyang in Goguryeo is suggested after a thorough study on New Book of Tang (『新唐書』), History of Liao (『遼史』), History of Yuan (『元史』) of Twenty-Four Histories (『二十四史』).
The part from 3-1-1 to 3-8-15 of the Stele is about the war-time story that King Gwanggaeto's yielding Japanese and conquering East Buyeo (東扶餘). King Gwanggaeto clarified the number of fortresses and villages that he acquired during his regime, and it provides us previous information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and dynamics between the countires of its time. The part from 3-8-16 to 3-14-41 is about Yeonho (the house unit) and has a record of the number of Gukyeon (國烟) and Ganyeon (看烟). The section 4 of King Gwanggato's Stele inscribes Yeonho system and the total number of it, and declares that trading of YeonHo was illegal as well as why he modified the system for tending royal tombs (守墓制).
The part from 4-1-41 to 4-2-10 describes that “The Hans (韓) of south Baekjan (百殘) have one Gukyeon and five Ganyeons” and it means that the Hans, Yemaek Tribe and other the Northern Hans and the Mahan in the south, settled separate in the several area. According to Book of Wei-Dongyi (『魏書-東夷傳』) of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三國志』), “Around the year of 237 to 239, in the period of Cao Rui (Chinese emperor from 226 to 239), eight countries of Jinhan confederacy (辰韓) were divided and given to Nakrang (樂浪) and some of them had the same name in Idu (吏讀)”1), and the 'eight countries of Jinhan confederacy' indicates the Northern Hans of ancient Liaodong area. This requires the further discussion.
As for the part of Section 4 of King Gwanggaeto's Stele, this study clarifies the meaning of trading Yeonho and the words, Gukyeon and Ganyeon, and specifies its examples with the help of the manuscripts about tomb-keepers during the Joseon Dynasty which have not been made public before.
This study follows the previous two articles, “An Interpretation of Section 1 of King Gwanggaeto's Stele” and “A Study on Section 2 of King Gwanggaeto's Stele.” I hope it can be a cornerstone of the studies on the ancient Korean history and the further studies will be continue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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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誠)'의 도덕적 이해 방식에 관한 고찰 ―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을 중심으로 ―

저자 : 홍한얼 ( Hong¸ Han Eol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5-24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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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성실(誠實)'은 '부지런함'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부지런함'은 '어떤 일을 꾸물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꾸준하게 열심히 하는 태도'로 정의(定義)된다. 또 '정성(精誠)'은 '마음을 다함'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부지런함'이나 '마음을 다함'을 곧바로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동양고전에 나타난 '성(誠)'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이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의 개념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알아보고, '부지런함'과 '마음을 다함'이 '성실(誠實)' 그리고 '정성(精誠)'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이유를 탐구해 보고자 했다.
이 연구는 '성(誠)'의 의미를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으로 한정한다거나 정형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첩된 의미 구조로 이해되는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의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부지런함'과 '마음을 다함'은 그 대상과 목적이 도덕적 자기완성에 있어야만 '성실(誠實)'과 '정성(精誠)'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In Korea, the term Seongsil 誠實 is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diligence,” which is defined as "an attitude of steadily working hard without procrastinating or delaying one's work." Also the term Jeongseong 精誠 is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wholeheartedness." However, I suggest that we should be cautious to immediately connect those two terms, Seongsil and Jeongseong, to diligence or wholeheartedness.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cept of Seong 誠(Ch. Cheng; Jp. Sei) that appeared in the Oriental classics, and examines how that concept relates to those two terms, Seongsil and Jeongseong, in Korea. Furthermore, it will explore why those two terms ar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diligence and wholeheartedness.
As a result of this study, those two terms, Seongsil and Jeongseong, can only relate to the context of diligence and wholeheartedness when the subject and the purpose of the action are aimed at one's moral comple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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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용익의 <독사시장편삼백이십오운(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에 대하여

저자 : 이남면 ( Lee Nam-my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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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용익의 <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시를 고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太古시대부터 淸나라 초기까지 흥망성쇠의 변천 과정을 시대 순으로 읊은 칠언고시로, 총 325운이고 650구이며 4,550자에 이르는 장편 대작이다.
창작 동기는 남용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勸善懲惡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였으며 명말청초의 암울한 현실을 역사의 반추를 통해 위안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의 특징은 儒家的 이념과 사유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가의 인물을 칭송하고 異端을 배척했으며, 蜀漢이 漢나라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기술했고, 곳곳에서 尊王攘夷 의식을 드러내었으며, 秦始皇과 隋煬帝 등 폭군을 비판한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표현의 특징은, 우선 장법 면에서 褒와 貶의 반복과 그 거리 조절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였고, 역사의 전환기마다 과거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聯'을 배치하여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시어의 사용은 '哀', '恨', '傷' 등 감정 표현의 글자를 사용하여 비판의 효과를 높였으며, 동물과 관련한 일화를 실패와 몰락 등의 표현을 위해 원용하는 한편 고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어 역사를 현장감 있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구법 면에서는 7언구가 5언구에 비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 시는 다양한 역사 기술의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해주었고, 家學을 통해 전승된 남용익의 역사 인식이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다만 긴 편폭에 너무 많은 역사를 압축 제시하여 일별하기에 쉽지 않고 그 내용 또한 난해하다. 결국 이런 방식의 역사 시 창작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의 한계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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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설리시(說理詩) 연구(硏究)

저자 : 李貞和 ( Lee Jeong Hw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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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설리적 언표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병와 이형상의 학문 인식과 시세계의 상관관계를 탐색한 것이다. 병와가 애호한 산수는 음풍농월하기 위한 소일의 공간이 아니라 성학의 이치를 깨닫는 장소이자 학문적 사유의 공간이다. 병와의 학자적 풍모는 벼슬아치들이 모여 있는 조시에서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오히려 초야에서의 은거생활 속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병와는 생전에 '병와순옹(甁窩順翁)'를 명정(銘旌)에 써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 수양에 철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경전명(鏡前銘)>에서는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유자의 자세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때 묻기 쉬운 마음 상태를 염려하여 수신해야 함을 일깨운 작품이 <경후명(鏡後銘)>이다. 또한 <경갑명(鏡匣銘)>에서는 먼지를 막기 위해 거울에 덮개가 있는 것과 같이 유자의 수기(修己) 역시 허물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절조축(節操祝)」은 자신의 기상을 낙락장송에 빗대어 표출하고 있는데, 올곧은 선비로 살았던 병와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임고알묘(臨皐謁廟)」에서는 유학의 도통을 전수한 포은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고결한 스승의 정신을 본받아서 자신 또한 지극한 정성을 다해 스승의 사우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에서 이러한 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설리시에 내재된 시정신은 기본적으로 이학자의 구도 정신인데, 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마음의 다스림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 성학을 통해 체득한 이치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삶이 설리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맹(孔孟)을 위시한 성현의 학문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유자의 일상은 수기(修己)가 중심이 됨은 물론이다. 병와의 시에는 『대학(大學)』을 비롯한 경전을 통해 성학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시화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 병와의 가르침은 오로지 학문에 전념해야 통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일깨우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병와시에는 실천궁행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병와는 설리시를 읊음으로써 사람이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 곧 '도'임을 표명하고 있으니, 이는 깨달음의 도가 충만할수록 더욱더 실천궁행하는 것이 유자의 바른 길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일방삼연(一方三然)」에서 병와는 공자와 안회의 덕망을 우러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인(仁)의 마음을 변치 않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병와의 설리시 가운데 일상의 경솔한 언동을 경계하는 설리시가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중한 태도로 살아가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삼성수수(三聖授受)」의 경우, 도심(道心)을 정밀하게 살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삼가고 재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은사(隱士)인 소부·허유의 고사를 전고로 하여 「소허청절(巢許淸節)」을 읊은 바 있으니, 이 시에는 본성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하는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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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채주문(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복수 서사의 이념성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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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복수를 둘러싼 쟁점들이 복수 서사를 통해 유교 이념으로 포섭되고 유교 이념을 실천하는 행위로 미화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분석했다.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장계, 옥안, 판부 등의 공문서에 형성된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한 행위로 판결되었다. 당초 황성엽에 대한 옥안에서는 채서우가 황성엽에 의해 죽은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상감사의 장계 등에서 각종 정황 증거를 거론하여 채주문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고자 창작된 것이 바로 정상리의 「채효자복수기사」이다. 채주문의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정상리는 실기류 산문을 통해 채주문의 복수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명문화했다. 그 뒤 정민병과 고성겸은 「채효자전」을 지어, 채효자 사건을 인구에 회자될 만한 흥미롭고도 특출난 효행으로 윤색했다.
정민병은 정상리의 再從姪이었으며, 고성겸은 정민병과 교유했던 상주지역의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리의 의도를 계승·발전하여, 복수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복수 준비 과정, 복수 살인 장면 등을 확대하고 새로운 서사를 삽입하여, 복수 서사를 흥미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새로 삽입하거나 확대한 서사 요소들은 모두 '孝'라는 가치와 긴밀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창작한 「채효자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 관련 쟁점들을 상기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채주문의 행위를 보기 드문 위대한 효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이러한 서사화를 통해 노린 것은 궁극적으로 채주문이 정려를 받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상리, 정민병, 고성겸은 의도적으로 채주문의 복수 관련 의혹들을 제거하여, 채주문의 살인을 칭송할 만한 윤리적 행위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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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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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강산 유기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后山 鄭胤永의 『瀛嶽錄』을 살펴본 것이다. 정윤영은 1897년 8월 16일 安城을 출발하여 內外 金剛과 東海를 유람하고 10월 8일 귀향했다.
『영악록』은 화성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99면, 17,956자이다. 특징 중 하나는 前代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의 「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전인의 기록을 대폭 수용한 것은 『영악록』을 쓴 의도가, 단순히 금강산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첫째, 금강산의 절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영악록』에는 산수 유람과 관련된 수많은 중국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금강산을 말하지 않고 중국의 뛰어난 산수만을 표현함으로써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 유자적 사유를 체험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람을 통해, 유자로서 평소 익혔던 사유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체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고증하는 자세를 취했다. 셋째, 산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절경의 산수에 대해서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암벽에 새겨진 이름이나 정자에 걸린 작품 등을 통해 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넷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척화 관련 소장으로 유배의 시련을 겪었는데, 그러한 시련의 삶에 대한 진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유람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측면에서도 그 목적의식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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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전문학에 수용된 인물의 특질과 형상화 방안 ― 설화 <우렁각시>를 중심으로 ―

저자 : 하경숙 ( Ha Kyoung-sook ) , 이정현 ( Lee Jung-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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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 설화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우렁각시는 다양한 유통을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총각이 농사를 짓다가 우렁이를 발견하고 우렁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총각과 처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설화 <우렁각시> 속에는 여성적이며 현실적이며 신비한 면모를 지닌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문맥을 통하여 이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결핍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의 특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지니고 있는 관계적 가치를 풀어보고자 모색하였다. 우렁각시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내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총각이 지닌 다양한 결핍과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해결해주는 인물이다. 아울러 현모양처의 면모가 상세히 드러난다.
우렁각시라는 인물은 독립적인 결정과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능동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 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서사에서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황으로의 국면을 전환하는 노력과 아울러 주체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보다 삶에 대해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렁각시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속하게 되면서 다양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여성이 지닌 생명성을 동일하게 바라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대사회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속에서 생명추구의 모습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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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행록(燕行錄) 국역 사업'의 성과와 향후 과제 ― 학술적 가치와 연계하여 ―

저자 : 이홍식 ( Lee¸ Hongshi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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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15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학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여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제출된 연행록 국역 성과와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비교 분석하여 현재 의미를 평가하였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루어진 사행 관련 학술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 가치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에 비추어서 앞으로의 국역 사업 진행 방향 등에 대해 정책 제언을 더하였다.
대중국 사행기록인 연행록은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화의 교류와 충격 그리고 자각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지성사적 자료이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한·중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밝히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출간한 20권의 연행록은 이러한 사행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연행록 국역 사업'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필요가 있다. 더하여 학술 연구와의 연계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업 주체들의 책임의식과 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한국고전번역원의 평가 심사 외에도 성과발표회 및 학술세미나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국역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학술연구와 연계하여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부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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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조초반 사인조보(私印朝報)사건을 통해 본 정치상황과 조보(朝報)정책

저자 : 김경록 ( Kim Kyeong L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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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보는 승정원에서 정리하여 전국에 전파함으로써 국왕의 선정 및 통치의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발간되었다.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필사조보를 인쇄하여 보다 많은 부수를 보다 편리하게 전파할 수 있음에도 선조는 이를 사건화하여 정국을 경색시켰다. 그 결과 인쇄를 통해 신속하고 대량으로 전파할 수 있음에도 인쇄조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의 지배체제가 공론정치를 지향했다. 공론정치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 국왕의 정당한 정치를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 조보였다. 조보는 국왕과 왕실의 동정 및 각종 예제, 인사정책, 관리의 공론정치 및 보고서와 이에 대한 국왕의 처분을 포함하였다. 조선은 건국직후 조보를 왕정의 전파수단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각종 정치사건, 예제사건, 인사정책에 조보는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선조는 즉위하며 명종대에 척신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분화 및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군사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선조는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즉, 선조는 왕위계승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치 상황에 대응하고자 정세를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에 의한 사인조보의 발행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조보를 왕권의 대외 전파수단임을 강조했다.
1577년(선조 10) 선조의 備忘記에서 시작된 사인조보사건은 유교국가에서 조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직계왕손으로 즉위하지 못한 선조가 초반기 왕위의 정통성과 통치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국왕의 정당한 통치를 전파하는 조보를 민간에서 사적 이익을 위해 인쇄하였다는 점은 선조로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약 3개월의 조사를 통해 30여 명의 관련자를 처벌한 선조는 향후 조보의 인쇄를 금지하고 철저한 관리를 지시하며 사건을 종료했다.
선조에 의해 제기되고 처벌된 사인조보사건은 선조초반 정치상황의 전개과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재위 10년을 경과하며 선조는 왕위의 권위를 회복하고 갈등구도의 정치상황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고자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엄단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 사인조보는 당시 명에서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王政의 전파 및 전달단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이의 발행을 수월하게 하여 민간에서 이익을 가지고자 했던 사회발전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왕명출납의 한방식이라 강조하였다. 조보는 이후 매우 한정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임진전쟁의 와중에 통치질서가 붕괴되자 이를 보완하는 매체로 활용됨으로써 선조초반 사인조보사건이 선조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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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호 이익의 관혼례(冠婚禮) 의절(儀節) 연구

저자 : 도민재 ( Doh Min-j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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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이 실제 관례와 혼례를 거행하며 의식절차를 정리한 「산절관의(刪節冠儀)」와 「취부의(娶婦儀)」, 「가녀의(嫁女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이익이 제시한 실용적인 관례와 혼례 의절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익은 관례에서 빈객을 모시는 절차를 생략하고, 삼가례는 한 번으로 간소화하여 관례 시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기물 준비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였다. 이는 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혼례는 시속(時俗)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청기(請期)'도 신랑집이 아닌 신부집에서 청하도록 하고, 폐백과 음식의 종류 및 가짓수를 간소화하여 실용적인 혼례 의식을 제시했다.
이익은 『가례』가 의례 실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인정했으나, 『가례』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상황에 맞추어 의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가난한 양반이나 일반 서인들이 『가례』를 제대로 따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인 측면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례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익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실용적인 의례 실천을 추구하여, 형식에 치우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이 아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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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의 미발공부 유무와 호락논쟁

저자 : 이종우 ( Yi Jongwo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5-2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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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미발시 공부로서 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훗날 조선후기 호락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호학의 한원진은 낙학인 이현익의 미발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김창흡을 지지하였다. 당시 김창흡은 낙학에서 이현익과 박필주가 논쟁을 벌인 것에 대하여 이현익을 비판하면서 박필주를 지지하였다. 그는 미발시에도 함양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익은 미발이란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허황된 생각도 생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무공부에 근거하였다. 반면에 김창흡은 그러한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함양으로서 계신공구 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공부에 근거하였다. 김창흡은 미발이란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여긴 반면에 한원진은 기질지성도 있기 때문에 선악이 함께 있다고 여긴 것이 다른 점이다. 이간은 미발을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김창흡과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정조실록』에서 이간을 김창흡과 같은 낙학으로 분류하였으나 미발시 공부설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간은 미발을 중과 부중으로 구분하여 부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주희의 미발공부의 유무에 근거하였다. 이간의 미발시 무공부는 이현익과 공통점을 갖는 반면에 김창흡과 다르다. 그러므로 『정조실록』에서 이간과 김창흡을 낙학으로 분류한 것은 미발시 본연지성만 있다는 주장이 같았기 때문일 뿐 공부설이 같아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미발시 공부에 관한 논쟁은 성리학의 목적에 해당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호락논쟁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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