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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주문(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복수 서사의 이념성

A Study on the Ideological Characteristics of the Late Joseon Dynasty’s Revenge Narrative Focused on the Narrating Style of Chae Ju-mun Incident

오보라 ( Oh Bo-ra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6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73-108(36pages)
온지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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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蔡周文 獄事에 대한 문서상의 기록과 「蔡孝子復讎記事」
Ⅲ. 「蔡孝子傳」의 서사화 양상: 이념으로 수렴되는 복수 서사
Ⅳ.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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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복수를 둘러싼 쟁점들이 복수 서사를 통해 유교 이념으로 포섭되고 유교 이념을 실천하는 행위로 미화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분석했다.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장계, 옥안, 판부 등의 공문서에 형성된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한 행위로 판결되었다. 당초 황성엽에 대한 옥안에서는 채서우가 황성엽에 의해 죽은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상감사의 장계 등에서 각종 정황 증거를 거론하여 채주문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고자 창작된 것이 바로 정상리의 「채효자복수기사」이다. 채주문의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정상리는 실기류 산문을 통해 채주문의 복수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명문화했다. 그 뒤 정민병과 고성겸은 「채효자전」을 지어, 채효자 사건을 인구에 회자될 만한 흥미롭고도 특출난 효행으로 윤색했다.
정민병은 정상리의 再從姪이었으며, 고성겸은 정민병과 교유했던 상주지역의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리의 의도를 계승·발전하여, 복수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복수 준비 과정, 복수 살인 장면 등을 확대하고 새로운 서사를 삽입하여, 복수 서사를 흥미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새로 삽입하거나 확대한 서사 요소들은 모두 ‘孝’라는 가치와 긴밀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창작한 「채효자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 관련 쟁점들을 상기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채주문의 행위를 보기 드문 위대한 효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이러한 서사화를 통해 노린 것은 궁극적으로 채주문이 정려를 받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상리, 정민병, 고성겸은 의도적으로 채주문의 복수 관련 의혹들을 제거하여, 채주문의 살인을 칭송할 만한 윤리적 행위로 탈바꿈했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narrating style of Chae Ju-mun incident, noting that the issues surrounding revenge were captured as Confucian ideology through revenge narrative.
First of all, Chae Ju-mun’s revenge murder was recognized as a legitimate act through narratives formed in official documents such as Jang-gye, Ok-an, and Pan-bu. Originally, it was not specified whether Chae Seo-woo was killed by Hwang Seong-yeop, but various circumstantial evidence was cited by the Gyeongsang provincial governor evaluated Chae's revenge murder as a legitimate act. Also, Jeong Sang-ri’s 「Chaejumunboksugisa」 resolved various suspicions surrounding the Chae Ju-mun’s murder, glorifying his revenge murder as a legitimate. In other words, Chae Ju-mun’s revenge murder was justified by the narrative of official documents and articles.
Rather than re-discussing whether the revenge was justified or not, Jeong Min-byung and Ko Sung-kyum focused on drawing Chae Ju-mun’s revenge murder as a symbol of ‘filial piety’. Jung Min-byung's 「ChaeHyojajeon」 showed that Chae Ju-mun’s revenge murder was closely linked to ‘filial piety’ by expanding the long and difficult revenge preparation process and the brutal revenge murder scene. And in Go Sung-kyum's 「ChaeHyojajeon」, Chae Ju-mun’s revenge murder were portrayed as public punishment based on humanity. Through two exhibitions, various controversies surrounding the revenge murder are eliminated, and revenge is only embodied in the practice of Confucian ideology called ‘filial piety’.
In addition to 「ChaeHyojajeon」, there are countless narratives about revenge. It needs to be studied more broadly how these revenge narratives relate to contemporary ideologies, laws, and social situations.

UCI(KEPA)

I410-ECN-0102-2022-800-000544605

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5-2022
  • :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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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권0호(2022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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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전문학에 나타난 밥의 소재적 의미와 문화적 양상

저자 : 하경숙 ( Ha Gyeong 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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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밥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졌는데, 대체로 그 소재적 특성이 다양했다. 밥은 오랜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생명력을 상징한다. 밥은 무엇보다 우리 문화의 원천소스로 이어지며 대중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밥은 먹는 행위 속에는 단순히 먹는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들이 포진되어 서사를 형성하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밥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관심사나 지향이 상세히 드러난다. 또한 삶의 철학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고단한 생활과 현실에 대한 상세한 반영,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시절에 대한 인식, 사회의 규범과 가치 등이 선명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밥을 통해 서로간의 유대감을 쌓는 사회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우리 일상의 현실을 재현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밥은 오랜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생명력을 상징한다. 밥은 자연의 생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밥은 단순한 속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밥은 공존의 삶을 보여주며, 맛의 실천과 관계의 확장을 실천하고, 치유와 기원을 바라는 개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밥은 자연의 원시적 재료를 사용하지만 복잡하고 난해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박하지만 거부감이 없는 맛으로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다. 밥을 먹는 행위는 개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공동의 목표를 이룬다. 이들을 건강하게 하고, 구성원들을 연결하며 삶의 정체성을 규명할 수 있게 한다.


Rice in Korea had a wide variety of meanings, and its material characteristics were generally diverse. Rice acts as an important factor that enables life to continue in Korea, a long agricultural society, and symbolizes vitality. Above all, rice leads to a source of culture and is expressed as the most important meaning to the public. As such, rice plays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narratives by having cultural meanings in the act of eating.
Rice is not just a survival, but the interests and orientations of our lives are revealed in detail. Also, the philosophy of life clearly appears. Detailed reflection of hard life and reality, respect and consideration for people, awareness of the times, and norms and values of society are clearly embodied. It has an important meaning of reproducing the reality of daily life through rice and the value as a social tool to build bonds with each other through rice.
Rice has a long farming community life in Korea, an important factor that can go to and symbolizes life. Rice is based on the lives of nature. It seems that with our properties that are often eating something that is very simple.In particular, the coexistence of the rice, rice flavors of practice and implement an extension of the relationship, showing individual showing the meaning of the healing and rice to the origin.
Rice was a natural vitality that includes materials using complex and intricate ways not made. Constant love will receive to a plain but denial is no flavor. An act to eat it despite the behavior of individual jointly make the blood and flesh of primitive representations that the members through its representation, and identity will be able to 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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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임진록>에 나타난 일본과 지도자상 ― 역사계열 '숭전대본'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창현 ( Kim Chang-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6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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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은 단순한 복수의 서사가 아니라 반성의 서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쟁의 결과보다도 그 원인과 책임에 주목했다. 그래서 침략자인 일본의 야만성을 성토하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일본 지배층의 유능함, 단결력을 조선 지배층의 무능, 분열과 비교했다. 그 결과 <임진록>은 유능함이 이념적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서민들이 전쟁을 통해 체감한 제일의 가치는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백성을 사지(死地)로 모는 자가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당시의 임금인 선조를 향할 때, 이것은 중세의 최고 가치였던 '충'의 이념에 심각한 균열을 낸다. 또 능력을 우선시하는 일본 지배층과 달리 조선의 지배층은 유능한 인재를 시기하고 버림으로써 더욱 무능해진다. 이런 임금과 신료들 사이에서 이순신은 뛰어난 능력과 책임감으로 새로운 지도자 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책임감은 임금이나 나라가 아니라 부하와 백성, 즉 사람을 향한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순신은 임금의 명도 거역한다. 충(忠)과 같은 이념이나 용맹 따위보다 능력과 책임감이 더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라는 생각. 이것은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군신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그래서 <임진록>은 전쟁 전에 비해 전쟁 후 지배층과 민중 사이에 더 큰 의식의 차이가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임진록>의 작가들은 전쟁을 서사하면서 알게 된, 또 상상하게 된 일본과 일본의 지도자, 신료들의 모습과 조선의 군신들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후(戰後)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이 문학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파되면서 역사의 다른 한 장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Imjinrok is not just a narrative of revenge, but a narrative of reflection. This work focused on the cause and responsibility rather than the outcome of the war that led to the death of many people. So it didn't stop at blaming the savagery of the aggressor Japan. And furthermore, the competence and unity of the Japanese ruling class were compared with the incompetence and division of the Joseon ruling class. As a result, Imjinrok comes to the conclusion that competence is more important than ideological value. This is because the greatest value that ordinary people felt through war was survival. A leader should not be the one who leads the people to death for any reason. When this thought is directed toward Seonjo, the king of the time, it creates a serious crack in the ideology of 'loyalty', the highest value in the Middle Ages. In addition, while the Japanese ruling class places importance on talented people, the Joseon ruling class becomes more incompetent by envying and abandoning talented people. Among these kings and ministers, Sunsin Yi presents a new leader image with outstanding ability and responsibility. Above all, Sunsin Yi's responsibility is not toward the king or the country, but toward his subordinates and the common people, that is, humans. In order to protect the people, Sunsin Yi disobeys the king's orders. There was a thought that ability and responsibility were more important virtues of a leader than ideologies such as loyalty or bravery. And this thought was difficult to accept for the ruling class of Joseon, the country of Confucian scholars. Therefore, Imjinrok shows that a greater difference in consciousness has arisen between the ruling class and the people after the war than before the war. The writers of Imjinrok had no choice but to compare the appearance of the ruling class in Japan and the ruling class in Joseon, which they knew and imagined while describing the war. The ideological horizon after the war, which was completely different from before the war, was revealed through literature, and another chapter in history was being opened as it spread to more readers through works such as Imjin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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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원십영> 배향 인물을 통해 본 퇴계 이황의 서원관

저자 : 차삼임 ( Cha Sam Im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5-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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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원십영(書院十詠)> 서원 배향(配享) 인물을 통해 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원관을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황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일컬어지는 백운동서원(白鹿洞書院)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시킨 인물이다. 백운동서원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 풍기군수 재직 중 안향(安珦)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주희(朱熹)가 중수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 따 풍기군 순흥면에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이 서원에 사액이 내려지면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이황은 최충(崔冲)·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등 선정(先正)의 자취가 있고 향기가 뿌려져 있는 곳에 모두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고 하면서, 생전에 자신은 물론 제자들과 함께 10여개의 서원 건립과 중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인물로, 이러한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작품이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 <서원십영(書院十詠)>이다.
이황은 서원 건립의 당위성에 대해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가 융성할 때 교법(敎法)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 가르침과 배움이 무너져 국학과 향교는 겨우 형식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선비들의 바램에 의해 서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서원의 교육 효과에 대해 국학이나 향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城廓)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학령(學令)에 구애되고 과거 등의 일에 유혹되기 때문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는 유학 본령에 비추어 볼 때 관학보다 크다고 자신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황은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지은 <이산원규>는 영남지역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This article investigates Yi Hwang's view of Confucian scholars canonized in private academies in his Ten Poems of Private Academies. Yi Hwang played a prominent role in elevating the White Cloud Grotto[Baekundong 白雲洞書院] Academy, the first neo-Confucian private academy in Korea, to the status of the “Royal Plaque Private Academy”[賜額書院]. This academy had been established by Ju Sebung(1495-1554), magistrate of the Punggi County, in 1543 to commemorate the famed Goryeo scholar An Hyang(1243-1306), and in emulation of the White Deer Grotto Academy[Bailudong shuyuan 白鹿洞書院] restored by Zhu Xi in Song China. The academy was renamed as the Sosu (紹修) Private Academy after it was granted a plaque by the throne.
Yi Hwang advocated establishment of private academies in places where one can find traces of great scholars as Choe Chung(984-1068), U Tak(1262-1342), Jeong Mongju(1337-1392), Gil Jae(1353-1419), Kim Jongjik (1431-1492), and Kim Goengpil(1454-1504). Yi Hwang and his disciples were instrumental in establishment or restoration of more than ten private academies, and their efforts are well documented in Record of Isan Private Academy, Record of Yeokdong Private Academy, Record of Yeongbong Private Academy, and Ten Poems of Private Academies. Yi Hwang stated that Confucian scholars of the time established private academies as places of learning. Conditions of the National Academy and local schools had deteriorated since the flourishing of learning in ancient Xia, Yin, and Zhou periods. Yi Hwang was confident that private academies were more effective in teaching of the Confucian study of self-cultivation. On the other hand, the government sponsored National Academy and local schools, located within crowded town centers, were subjected to various regulations and practices. Yi Hwang's Regulations for Isan Private Academy is a very valuable source for the study of management standard of private academy in Southeastern reg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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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의 교육정신 고찰

저자 : 신창호 ( Shin Chang H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1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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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1499∼1547)의 학문 사상에 담긴 교육정신을 고찰한 것이다. 규암은 사화(士禍)가 이어지는 험난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정통 유학자이자 정치 관료로서 유학의 정신을 투철하게 반영하여 자신의 본분과 책무에 충실하였다. 김종직에서 이심원과 윤탁, 또는 김굉필과 김안국, 유희령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學統)을 통해 문학(文學)과 도학(道學), 그리고 경학(經學)에 두루 능통하였다. 동시에 주세붕과 이황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시대를 고민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한 학자관료였다. 특히, 강학(講學)을 강조하고 간언(諫言)을 중시하며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쇠락해가는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관찰사로서 인간교육의 기초 원리를 담고 있는 『소학(小學)』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려는 운동을 펼쳤다. 『소학』의 근본 배양 정신을 통해 정교(政敎)의 실천을 고심하는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대학』의 수신(修身)을 일상생활에서 자기교육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개인의 수양은 물론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려는 학문적 열정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감(情感)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 사상을 담은 철학적 시(詩)를 통해 역사의 엄중성과 현실의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며 인간이 나아가야 할 교육의 문제를 고민하였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educational spirit contained in the academic discipline of Kyuam, Song In-su(圭菴 宋麟壽, 1499-1547). In spite of the difficult period of the purge of Confucian scholars, Kyu-am was faithful to his duties and responsibilities as an orthodox Confucian scholar and political bureaucrat, reflecting the spirit of Confucianism. He achieved absolute mastery over literature, Taoism, and Confucian classics (Gyeong-Hak) through a school of learning succeeding from Jong-Jik Kim, Shim-Won Lee, Tak Yun, Gong-Pil Kim, An-Guk Kim, to Hee-Ryeong Yoo. At the same time, he was scholar bureaucrat who tried to stabilize the lives of the people by contemplating the state during that period, while interacting with the best scholars at that time, such as Ju Se-bung and Yi Hwang. In particular, he attempted to reform the declining society with a strong will to build schools and nurture talented people, emphasizing Lectures(teaching) and learning as well as Remonstrance. Accordingly, as a governor, he launched a movement to edify the people through 'Xiao-xue (『小學』)', which involves the basic principles of human education. In other words, he developed an educational movement that considered the practice of 'political education(政敎)' through the fundamental cultivating spirit of ''Xiao-xue'. Furthermore, he set the teaching of 'Daxue(『大學』)' as the core of self-education in everyday life, and pursued academic passions to realize, not only self-discipline, but also real politics. In addition, while expressing the the seriousness of history and various emotions of reality through philosophical poetry involving historical facts and thoughts as well as personal sentiments, he pondered the problems of education that human beings should move fo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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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서화제발(書畵題跋) 연구 ― 소도론(小道論)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은혁 ( Lee Eun-hyu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4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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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후기 학자들이 문인예술로 지칭되는 서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서화제발에 나타난 소도론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종래에는 서화가의 작품연구나 서화론을 탐구하는 이론적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반면 조선후기 서화제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제발은 순수하게 서화를 논한 서론(書論)이나 화론과 달리 작품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감상평을 적은 것으로 일종의 감상문이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서화감상을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서화제발은 서화의 가치를 품평한 중요한 기록임과 동시에 개인의 서화인식을 넘어 시대적 미의식과 문화 관념을 일별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서화를 여기(餘技), 여사(餘事), 소기(小技), 소도(小道) 등으로 인식했으며, 나아가 서이재도(書以載道)를 제기하여 서의 효용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지식인들의 보편적 서화관념인 소도론은 체용과 본말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으로 학문과 더불어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결론적으로 조선후기 서화제발은 조선의 축적된 문화 역량과 예술성과가 빚어낸 조선문화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As a new academic trend called Bukhak was added to the cultural foundation that had been in full bloom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people had more and more interest in epigraphs and developed a greater taste in paintings, calligraphic works and antiques. Those days it was common among intellectuals to create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appreciate them, engage in discourse about them, and further criticize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of the past and also their contemporary Yedan even though they were not professional painters or calligraphers. In Joseon, intellectuals were thus able to equip themselves with the basic refinement about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essentially. Jebals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which are records about episodes or reviews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were other cultural products of literary people in Joseon. They calle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so-called the remaining talent and work or little talent and craft, voicing their opinions about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the Sodo theory in Jebals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was cultural discourse to understand them as a cultural concept of implementing truth from Confucian scholars' perspective of Bonmal theory called Dobonyemal and practicing it person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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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종대(中宗代) 음악정책의 중흥과 개혁

저자 : 성영애 ( Sung Young-a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8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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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중종대 음악적 중흥과 개혁 과정을 왕권의 위상 변화와 함께 그에 따른 음악정책의 전개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이를 위해 관련 사항에 변화가 나타난 주요 사건들을 기준으로 중종대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중종 즉위년 9월부터 중종 9년 12월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연산군대에 확대된 여악제도를 바로 잡기 위해 재정비한 사실과, 여악을 혁파하자는 빗발치는 대간(臺諫)의 상소에 여악을 양감(量減)하고, 또 남녀상열지사를 금지한 논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번째 시기는 조광조(趙光祖)가 등용되는 중종 10년부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는 해인 중종 14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사림이 언관직(言官職)에 대거 진출하고 언관직을 중심으로 정치적 역할을 증대해 가며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고 있었다. 중종과 대신, 조광조와의 논쟁에서 외방 여악(外方女樂)의 혁파와 악장 쇄신(樂章刷新)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 번째 시기는 기묘사화 이후 대신들이 다시 주도적인 정치세력의 지위를 회복한 중종 15년부터 중종 25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비교적 적었던 안정된 국면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조광조와 기묘사림(己卯士林) 시기에 혁파되었던 외방여악의 복설(復設)이 대두되어 혁파된 외방 여기(外方女妓)가 어떻게 다시 설치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네 번째 시기는 중종 26년부터 중종 32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면서 척신정치(戚臣政治)가 실시되어 정치세력 사이의 권력균형이 크게 와해(瓦解)되면서 국정 전체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파악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동안 비판적 언론기관으로 충실히 활동해온 삼사(三司)가 김안로라는 한 개인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심각한 기능 변질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인식하면서 명(明)사신 접대에 관한 문제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다섯 번째 시기는 중종 33년부터 중종 39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앞 시기의 복잡한 정치적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그동안 왕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했던 중종이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한 국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종의 노력한 국면을 음악정책에서는 악공·악생의 폐단과, 재해로 인한 여기(女妓)를 임시로 혁파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중종대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무너진 예악(禮樂)을 수습해 음악문화를 재건하려는 목표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거듭하면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남긴 기간이라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process of musical restoration and reform in the reign of King Jungjong by focusing on changes in the status of royal authority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music policy. For this, the reign of King Jungjong was divided into five periods on the basis of main incidents showing changes in the relevant matter.
The first period is from September in the year of King Jungjong's enthronement to December in the 9th year of King Jungjong. After the enthronement, King Jungjong reformed the Yeo-ak(music performed by female entertainers) system which was expanded in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reduced the Yeo-ak because of government officials' petitions to abolish it, and also banned the discussion of love songs between man and woman.
The second period is from the 10th year of King Jungjong when Jo Gwang-Jo was appointed to the 14th year of King Jungjong when the Gimyosahwa happened. During this period, a large number of Sarim got into the Eongwan post and also increased their political roles, which caused huge changes. This study examined the arguments of King Jungjong, ministers, and Jo Gwang-Jo by focusing on the abolition of Yeo-ak outside of Seoul and innovation of movement.
The third period is from the 15th year of King Jungjong when the ministers recovered their status of leading political power again after the Gimyosahwa, to the 25th year of King Jungjong. In this period, it was overall stabilized with relatively less conflicts between political powers. However, the re-provision of Yeo-ak outside of Seoul that was abolished by Jo Gwang-Jo during the period of Gimyosarim emerged during this period. Thus, this study examined the process of reinstalling the abolished Yeogi(female entertainers) outside of Seoul.
The fourth period is from the 26th year of King Jungjong to the 32nd year of King Jungjong. After a powerful retainer Kim An-Ro seized power, the balance of power between political powers was greatly broken up, which was led to many problems in the overall state affairs. And the most important fact is that the Samsa that used to be faithfully working as critical media agencies was degraded to a personal political tool for Kim An-Ro. Considering this point, this study examined the discussion of a problem shown in the reception poems for Chinese envoys.
The fifth period is from the 33rd year of King Jungjong to the 39th year of King Jungjong. In this period, King Jungjong who could not fully exercise his royal authority while going through complex political power struggles in the previous period, made the last effort to realize his own political conception. This study examined such King Jungjong's efforts into music policy by focusing on the abolition of evil effects of AkgongㆍAksaeng(court musicians) and the temporary abolition of Yeogi by disaster.
The reign of King Jungjong showed both outcomes and limitations through the repetition of various explorations and experiments for the goal of rebuilding the music culture by amending the Ye-ak(rites and music) collapsed by King Yeonsan-gun's tyr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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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용익의 <독사시장편삼백이십오운(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에 대하여

저자 : 이남면 ( Lee Nam-my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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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용익의 <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시를 고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太古시대부터 淸나라 초기까지 흥망성쇠의 변천 과정을 시대 순으로 읊은 칠언고시로, 총 325운이고 650구이며 4,550자에 이르는 장편 대작이다.
창작 동기는 남용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勸善懲惡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였으며 명말청초의 암울한 현실을 역사의 반추를 통해 위안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의 특징은 儒家的 이념과 사유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가의 인물을 칭송하고 異端을 배척했으며, 蜀漢이 漢나라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기술했고, 곳곳에서 尊王攘夷 의식을 드러내었으며, 秦始皇과 隋煬帝 등 폭군을 비판한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표현의 특징은, 우선 장법 면에서 褒와 貶의 반복과 그 거리 조절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였고, 역사의 전환기마다 과거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聯'을 배치하여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시어의 사용은 '哀', '恨', '傷' 등 감정 표현의 글자를 사용하여 비판의 효과를 높였으며, 동물과 관련한 일화를 실패와 몰락 등의 표현을 위해 원용하는 한편 고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어 역사를 현장감 있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구법 면에서는 7언구가 5언구에 비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 시는 다양한 역사 기술의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해주었고, 家學을 통해 전승된 남용익의 역사 인식이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다만 긴 편폭에 너무 많은 역사를 압축 제시하여 일별하기에 쉽지 않고 그 내용 또한 난해하다. 결국 이런 방식의 역사 시 창작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의 한계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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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설리시(說理詩) 연구(硏究)

저자 : 李貞和 ( Lee Jeong Hw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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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설리적 언표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병와 이형상의 학문 인식과 시세계의 상관관계를 탐색한 것이다. 병와가 애호한 산수는 음풍농월하기 위한 소일의 공간이 아니라 성학의 이치를 깨닫는 장소이자 학문적 사유의 공간이다. 병와의 학자적 풍모는 벼슬아치들이 모여 있는 조시에서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오히려 초야에서의 은거생활 속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병와는 생전에 '병와순옹(甁窩順翁)'를 명정(銘旌)에 써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 수양에 철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경전명(鏡前銘)>에서는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유자의 자세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때 묻기 쉬운 마음 상태를 염려하여 수신해야 함을 일깨운 작품이 <경후명(鏡後銘)>이다. 또한 <경갑명(鏡匣銘)>에서는 먼지를 막기 위해 거울에 덮개가 있는 것과 같이 유자의 수기(修己) 역시 허물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절조축(節操祝)」은 자신의 기상을 낙락장송에 빗대어 표출하고 있는데, 올곧은 선비로 살았던 병와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임고알묘(臨皐謁廟)」에서는 유학의 도통을 전수한 포은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고결한 스승의 정신을 본받아서 자신 또한 지극한 정성을 다해 스승의 사우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에서 이러한 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설리시에 내재된 시정신은 기본적으로 이학자의 구도 정신인데, 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마음의 다스림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 성학을 통해 체득한 이치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삶이 설리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맹(孔孟)을 위시한 성현의 학문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유자의 일상은 수기(修己)가 중심이 됨은 물론이다. 병와의 시에는 『대학(大學)』을 비롯한 경전을 통해 성학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시화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 병와의 가르침은 오로지 학문에 전념해야 통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일깨우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병와시에는 실천궁행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병와는 설리시를 읊음으로써 사람이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 곧 '도'임을 표명하고 있으니, 이는 깨달음의 도가 충만할수록 더욱더 실천궁행하는 것이 유자의 바른 길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일방삼연(一方三然)」에서 병와는 공자와 안회의 덕망을 우러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인(仁)의 마음을 변치 않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병와의 설리시 가운데 일상의 경솔한 언동을 경계하는 설리시가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중한 태도로 살아가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삼성수수(三聖授受)」의 경우, 도심(道心)을 정밀하게 살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삼가고 재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은사(隱士)인 소부·허유의 고사를 전고로 하여 「소허청절(巢許淸節)」을 읊은 바 있으니, 이 시에는 본성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하는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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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채주문(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복수 서사의 이념성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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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복수를 둘러싼 쟁점들이 복수 서사를 통해 유교 이념으로 포섭되고 유교 이념을 실천하는 행위로 미화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분석했다.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장계, 옥안, 판부 등의 공문서에 형성된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한 행위로 판결되었다. 당초 황성엽에 대한 옥안에서는 채서우가 황성엽에 의해 죽은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상감사의 장계 등에서 각종 정황 증거를 거론하여 채주문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고자 창작된 것이 바로 정상리의 「채효자복수기사」이다. 채주문의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정상리는 실기류 산문을 통해 채주문의 복수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명문화했다. 그 뒤 정민병과 고성겸은 「채효자전」을 지어, 채효자 사건을 인구에 회자될 만한 흥미롭고도 특출난 효행으로 윤색했다.
정민병은 정상리의 再從姪이었으며, 고성겸은 정민병과 교유했던 상주지역의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리의 의도를 계승·발전하여, 복수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복수 준비 과정, 복수 살인 장면 등을 확대하고 새로운 서사를 삽입하여, 복수 서사를 흥미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새로 삽입하거나 확대한 서사 요소들은 모두 '孝'라는 가치와 긴밀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창작한 「채효자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 관련 쟁점들을 상기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채주문의 행위를 보기 드문 위대한 효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이러한 서사화를 통해 노린 것은 궁극적으로 채주문이 정려를 받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상리, 정민병, 고성겸은 의도적으로 채주문의 복수 관련 의혹들을 제거하여, 채주문의 살인을 칭송할 만한 윤리적 행위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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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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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강산 유기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后山 鄭胤永의 『瀛嶽錄』을 살펴본 것이다. 정윤영은 1897년 8월 16일 安城을 출발하여 內外 金剛과 東海를 유람하고 10월 8일 귀향했다.
『영악록』은 화성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99면, 17,956자이다. 특징 중 하나는 前代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의 「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전인의 기록을 대폭 수용한 것은 『영악록』을 쓴 의도가, 단순히 금강산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첫째, 금강산의 절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영악록』에는 산수 유람과 관련된 수많은 중국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금강산을 말하지 않고 중국의 뛰어난 산수만을 표현함으로써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 유자적 사유를 체험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람을 통해, 유자로서 평소 익혔던 사유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체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고증하는 자세를 취했다. 셋째, 산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절경의 산수에 대해서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암벽에 새겨진 이름이나 정자에 걸린 작품 등을 통해 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넷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척화 관련 소장으로 유배의 시련을 겪었는데, 그러한 시련의 삶에 대한 진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유람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측면에서도 그 목적의식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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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전문학에 수용된 인물의 특질과 형상화 방안 ― 설화 <우렁각시>를 중심으로 ―

저자 : 하경숙 ( Ha Kyoung-sook ) , 이정현 ( Lee Jung-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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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 설화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우렁각시는 다양한 유통을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총각이 농사를 짓다가 우렁이를 발견하고 우렁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총각과 처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설화 <우렁각시> 속에는 여성적이며 현실적이며 신비한 면모를 지닌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문맥을 통하여 이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결핍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의 특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지니고 있는 관계적 가치를 풀어보고자 모색하였다. 우렁각시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내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총각이 지닌 다양한 결핍과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해결해주는 인물이다. 아울러 현모양처의 면모가 상세히 드러난다.
우렁각시라는 인물은 독립적인 결정과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능동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 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서사에서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황으로의 국면을 전환하는 노력과 아울러 주체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보다 삶에 대해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렁각시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속하게 되면서 다양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여성이 지닌 생명성을 동일하게 바라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대사회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속에서 생명추구의 모습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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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행록(燕行錄) 국역 사업'의 성과와 향후 과제 ― 학술적 가치와 연계하여 ―

저자 : 이홍식 ( Lee¸ Hongshi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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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15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학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여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제출된 연행록 국역 성과와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비교 분석하여 현재 의미를 평가하였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루어진 사행 관련 학술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 가치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에 비추어서 앞으로의 국역 사업 진행 방향 등에 대해 정책 제언을 더하였다.
대중국 사행기록인 연행록은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화의 교류와 충격 그리고 자각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지성사적 자료이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한·중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밝히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출간한 20권의 연행록은 이러한 사행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연행록 국역 사업'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필요가 있다. 더하여 학술 연구와의 연계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업 주체들의 책임의식과 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한국고전번역원의 평가 심사 외에도 성과발표회 및 학술세미나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국역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학술연구와 연계하여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부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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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조초반 사인조보(私印朝報)사건을 통해 본 정치상황과 조보(朝報)정책

저자 : 김경록 ( Kim Kyeong L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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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보는 승정원에서 정리하여 전국에 전파함으로써 국왕의 선정 및 통치의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발간되었다.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필사조보를 인쇄하여 보다 많은 부수를 보다 편리하게 전파할 수 있음에도 선조는 이를 사건화하여 정국을 경색시켰다. 그 결과 인쇄를 통해 신속하고 대량으로 전파할 수 있음에도 인쇄조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의 지배체제가 공론정치를 지향했다. 공론정치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 국왕의 정당한 정치를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 조보였다. 조보는 국왕과 왕실의 동정 및 각종 예제, 인사정책, 관리의 공론정치 및 보고서와 이에 대한 국왕의 처분을 포함하였다. 조선은 건국직후 조보를 왕정의 전파수단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각종 정치사건, 예제사건, 인사정책에 조보는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선조는 즉위하며 명종대에 척신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분화 및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군사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선조는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즉, 선조는 왕위계승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치 상황에 대응하고자 정세를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에 의한 사인조보의 발행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조보를 왕권의 대외 전파수단임을 강조했다.
1577년(선조 10) 선조의 備忘記에서 시작된 사인조보사건은 유교국가에서 조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직계왕손으로 즉위하지 못한 선조가 초반기 왕위의 정통성과 통치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국왕의 정당한 통치를 전파하는 조보를 민간에서 사적 이익을 위해 인쇄하였다는 점은 선조로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약 3개월의 조사를 통해 30여 명의 관련자를 처벌한 선조는 향후 조보의 인쇄를 금지하고 철저한 관리를 지시하며 사건을 종료했다.
선조에 의해 제기되고 처벌된 사인조보사건은 선조초반 정치상황의 전개과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재위 10년을 경과하며 선조는 왕위의 권위를 회복하고 갈등구도의 정치상황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고자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엄단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 사인조보는 당시 명에서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王政의 전파 및 전달단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이의 발행을 수월하게 하여 민간에서 이익을 가지고자 했던 사회발전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왕명출납의 한방식이라 강조하였다. 조보는 이후 매우 한정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임진전쟁의 와중에 통치질서가 붕괴되자 이를 보완하는 매체로 활용됨으로써 선조초반 사인조보사건이 선조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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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호 이익의 관혼례(冠婚禮) 의절(儀節) 연구

저자 : 도민재 ( Doh Min-j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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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이 실제 관례와 혼례를 거행하며 의식절차를 정리한 「산절관의(刪節冠儀)」와 「취부의(娶婦儀)」, 「가녀의(嫁女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이익이 제시한 실용적인 관례와 혼례 의절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익은 관례에서 빈객을 모시는 절차를 생략하고, 삼가례는 한 번으로 간소화하여 관례 시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기물 준비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였다. 이는 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혼례는 시속(時俗)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청기(請期)'도 신랑집이 아닌 신부집에서 청하도록 하고, 폐백과 음식의 종류 및 가짓수를 간소화하여 실용적인 혼례 의식을 제시했다.
이익은 『가례』가 의례 실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인정했으나, 『가례』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상황에 맞추어 의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가난한 양반이나 일반 서인들이 『가례』를 제대로 따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인 측면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례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익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실용적인 의례 실천을 추구하여, 형식에 치우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이 아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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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의 미발공부 유무와 호락논쟁

저자 : 이종우 ( Yi Jongwo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5-2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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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미발시 공부로서 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훗날 조선후기 호락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호학의 한원진은 낙학인 이현익의 미발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김창흡을 지지하였다. 당시 김창흡은 낙학에서 이현익과 박필주가 논쟁을 벌인 것에 대하여 이현익을 비판하면서 박필주를 지지하였다. 그는 미발시에도 함양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익은 미발이란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허황된 생각도 생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무공부에 근거하였다. 반면에 김창흡은 그러한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함양으로서 계신공구 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공부에 근거하였다. 김창흡은 미발이란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여긴 반면에 한원진은 기질지성도 있기 때문에 선악이 함께 있다고 여긴 것이 다른 점이다. 이간은 미발을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김창흡과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정조실록』에서 이간을 김창흡과 같은 낙학으로 분류하였으나 미발시 공부설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간은 미발을 중과 부중으로 구분하여 부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주희의 미발공부의 유무에 근거하였다. 이간의 미발시 무공부는 이현익과 공통점을 갖는 반면에 김창흡과 다르다. 그러므로 『정조실록』에서 이간과 김창흡을 낙학으로 분류한 것은 미발시 본연지성만 있다는 주장이 같았기 때문일 뿐 공부설이 같아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미발시 공부에 관한 논쟁은 성리학의 목적에 해당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호락논쟁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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