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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Patrilineal Transformation in Chosun and Relation Capital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3월
  • : 183-228(46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9.5


목차

1. 문제제기와 선행연구
2. 관계자본 개념과 에이전시의 관점에서의 친족구조
3. 자료 및 분석
4. 가설의 검토와 해석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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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This paper revisits the process of patrilineal transformation in the late-Chosun period from the ‘agency’ perspective. We assume that, besides the Confucian emphasis on paternalism, strategic mobilization of non-paternal relations was crucial to forming the unique patrilineal transformation of Chosun, and check this hypothesis by several historical documents. Kin relations serve as essential resource, and we propose that the specific alignment of kinship ties in Chosun was achieved through selective investment of ‘relation capital’ such as gift exchange or labor sharing. We thus derived three hypotheses: 1) basically, more material/time resources are invested in kin relations with an expected higher return; 2) relation capital investments in paternal ties were relatively less affected by the rate of return and thus remain stable, whereas investments in non-paternal ties likely reacted more sensitively to partner’s rate of return thus producing a greater range of exchange fluctuation; 3) since regular Confucian rituals were conducted on the paternal line, we expect that investments in paternal lines were mainly in material resource, while maternal and in-laws investments were relatively more in time resource. The findings show that Confucianism did not produce a perfectly paternal state during Chosun period. This study suggests reconsidering the active role of ‘complementary filiations’ during the late-Chosun period’s patrilineal transformation. We emphasize that satisfactory understanding about the changing pattern of Chosun kinship structure calls for bringing up more of “actor’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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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1
  • : 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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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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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0-30년대 “조선인 군중 소요”와 식민지 군중의 정치동학

저자 : 기유정 ( Ki You J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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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20-30년대 식민 공간에서 발생했던 조선인 군중 소요들을 군중의 정치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설정 위에서 크게 4가지의 개념적 틀에 의거해 분석한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군중을 개인의 '상실'이나 계급 혹은 민족의식의 '결여'라는 근대주의적 주체관에 입각해 접근하는 방법론적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했던 것으로서,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사건의 철학'이라는 이론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식민지 군중의 동학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당시 소요 사태들을 분석했을 때, 1920-30년대 식민지 군중 소요들은 사건의 발발과 전개 발전 그리고 결과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발성과 구경꾼 심리(혹은 욕망) 변이와 이항화라는 동학에 의거해 그 정치가 설명될 수 있다고 접근하였다. 특히, 본 연구는 이 같은 접근의 과정에서 기성 식민지 정치사 연구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례들을 발굴해 사건의 철학이라는 틀 위에서 접근했을 때, 이 같은 역사적 사례가 어떻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시도했다.


This study analyzed the dynamics of civil disobedience and riot behaviors in colonial space during the 1920s and 30s. The research attends to the limitations of modernist analytical approaches that interpret mass participation as a 'loss' of the 'subject' produced through the diminishment of individuality or the blurring of class and national consciousnesses. To this end, this research analyzes colonial mass behavior through the 'philosophy of events,' a recurring theme in the works of post-modernist philosophers like Deleuze. By adopting this theoretical approach, this study provides new findings that explain mass participation in the 1920s and 30s by applying alternative analytical tools and measurements such as the dynamics of contingency, spectator psychology, complex behavioral variation, and factor binomialization. This exploratory work provides an innovative means of interpreting and researching Korea's political history and moves beyond traditional methods, which have often overlooked comparisons between Korea's loose and incidental mass riots and its larger-scale nationalist or socialist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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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6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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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는 다카라즈카에서 조선악극단을 거쳐 위문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조선, 만주국에 걸쳐 순회하는 공연 문화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다카라즈카는 조선의 극단들에게 위문대의 역할모델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문화 권력은 여성 예인을 젠더규범을 통해 순화시키면서 전시체제기의 황군용사라는 남성성을 새롭게 호명하였다. 동시에 그녀들은 일본인 혹은 조선인 황군용사를 직접 찾아가서 무용과 음악을 통해 여성성을 표상하는 위문연예를 수행하였다. 이는 여급과 기생이 만든 위문인형과 위문주머니까지 포함되었다. 위문공연의 관객이자 제국의 남성은 위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동질적으로 상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위문대가 자발적이고 순수했던 오락이나 예능이기보다 문화권력에 의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투영을 위한 매개체로서 전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This article researched tour performances of comfort groups in the colony and empire during wartime. The various comfort groups visited and entertained as a collective and organized unit, providing performances for Korean immigrants in Japan and Joseon, Manchukuo. Takarazuka had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types of comfort groups in Joseon. They entertained Korean men in Joseon who fulfilled the task of construction and war. Those wielding cultural power produced a social narrative that fetishized Korean women in Joseon as good female entertainers during this period. The comfort group conducted unified performances in which they visited mixed groups of Japanese and Korean soldiers to provide 'comfort', which led to their becoming signifiers of femininity. Gisaeng and waitresses reproduced and manufactured such symbols by creating comfort dolls and pouches. The comfort group formed the emotion of the empire's men framed as encouraging entertainment. Furthermore, this means that the imperial ideology trumps the cultural power of pure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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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성대학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와 미군정 초기 대학정책

저자 : 정병준 ( Jung Byung J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5-127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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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크로프츠는 1945년 10월 17일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12월 7일까지 근무했다. 크로프츠는 미군정 학무국 장교 중 뛰어난 학력(시카고대학 석사, 스탠포드대학 박사), 경력(대학 교수), 성장배경(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성장 및 교육) 등을 갖추었고, 또한 경성대학의 재건·복구에 진정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된 크로프츠 대위는 경성대학 이공학부와 법문학부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며, 동양인들에게 대학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주한미군 내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의 재임을 전후해 경성제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경성제대 직원, 학생,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자치위원회와 미군정 학무국, 한국교육위원회 사이에 벌어졌다. 연희전문 출신 백낙준이 경성제대 임시총장이자 법문학부장에 임명되었고, 그를 배척하는 경성제대 출신들의 반대시위가 이어진 끝에 크로프츠가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경성제대와 사립전문의 주도권 경쟁이자 고등교육의 주도권 경쟁이었다.
총장과 학부장 선임문제에 이어 경성대학 교수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교수 선출·임명권을 둘러싼 갈등이자 경성대학의 권력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었다. 이어서 1945년 12월 10~11일 경성대학 총장후보 추천 투표가 이뤄졌고, 학무국과 법문학부 교수진이 합의한 홍명희 대신 공산당원 김태준이 추천되었다.
이 시점에 크로프츠는 경성대학과 한국에 대한 양심적이고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크로프츠는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전출되었다. 이후 지속적 갈등을 겪은 경성대학은 1946년 여름에 이르자 국대안파동에 직면했다. 이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필적하는 교육분야의 대폭풍이었다.


This research provides a biographical investigation of Alfred Crofts, his role as the president of Kyongsong University and orchestrator of the high educatio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USAFIK). Crofts was raised and educated in China, got his PhD in Stanford University and taught in universities before the World War II. It also analyzes two significant disputes related to his university-related work in Korea. After being appointed president of the university, Crofts argued for the withdrawal of USAFIK units stationed in colleges at Kyongsong University. Before his appointment, there was a dispute between the Korean employees, students, alumni, and the Education Bureau of USAFIK over the control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after Japan left. When George Paik of Chosen Christian College was nominated as the acting-president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and the dean of Law and Literature College, wide-spread anti-Paik rallies followed, which led to Crofts serving as Kyongsong University's new president. A second dispute was the power struggle between faculty, employees, students, alumni, and the Education Bureau to nominate the president candidate of the only university in South Korea at the time. Eventually, the USAFIK dismissed Crofts due to his liberal views and enthusiasm for the rehabilitation and rebuild of Kyongsong University. However, after Crofts's transfer to Japan in early February 1946, the dispute within the Kyongsong University worsened and eventually helped to instigate a nationwide student strike in the summer of 1946 against USAFIK's plan to create a new university,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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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쟁포로의 또 다른 경계 ―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수용소 연구

저자 : 정찬대 ( Jeong Chand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76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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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 인민군은 각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후 전선이 북상하고 수복기가 되면서 군경에 의한 후방 토벌작전이 본격화됐다. 그리고 수많은 입산자들이 토벌과정에서 빨치산 포로로 분류·처리됐다. 이들은 작전지역 내임시수용소를 거쳐 광주중앙포로수용소로 모두 옮겨왔다.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연구는 거제포로수용소에 편중된 측면이 컸다. 빨치산 연구 역시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생성 과정과 입산 후 활동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전쟁포로로서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떻게 관리됐으며, 이후 포로처리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실태 분석을 통해 이를 면밀하게 살피고 자 했다. 본 논문은 구술 면담자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뤘다. 이를 통해 빨치산포로들의 처우, 감찰, 신문 과정 등을 들여다본 것은 물론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시설도까지 복원이 가능했다. 또 미군 보고서 등의 분석을 통해 광주중앙포로수용소 현황 및 실태 등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1952년 광주중앙포로수용소는 한 차례 명칭이 변경됐다. '포로'라는 이름을 빼 '광주중앙수용소'로 불린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그 배경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초 '민간인 억류자'들이 별도로 분류되지 않은 배경 또한 분석이 이뤄질 수 있었다. 빨치산 포로수용소는 그간 한국전쟁기 포로 연구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 논문은 빨치산 포로를 분석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At the beginning of the Korean War,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quickly occupied and controlled several areas of the peninsula. As the front moved north and the recovery period began, the rear subjugation operation by the military and police began in earnest. Many people who entered the mountain were classified and treated as partizan prisoner of war during the subjugation process. They were transferred to the Gwangju Central POW Camps through a temporary camp within the operation area. Studies on POW camps during the Korean War are often biased towards Geoje POW camp. Partisan research also focused on the creation process of partisan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and their activities after that. This thesis differs from previous studies by concentrating on the 'partisan prisoner of war' itself. The testimonies of interviewer serve as the main source of data. It then explores the treatment, inspection, and interrogation processes of partisan prisoner of war, and investigates the restoration of Gwangju Central Prison Camp facilities. The current state of the Gwangju Central Prison was identified in detail through the analysis of the US military report. In 1952, the name of the Gwangju Central POW Camp was changed. This work focused on this change and traced the background. In this process, the background in which 'civilian internee' were not separately classified at the beginning of the war could also be analyzed. Partisan POW camps have been neglected in Korean War POW research. In that respect, this paper presents another implication in analyzing partisan prisoners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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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7-20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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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This study examines enemy cemeteries created in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hese enemy cemeteries were created in accordance with the Geneva Conventions. However, though the US Army was not a signatory to the Convention, it soon joined after entering the war, which led to a graves registration system for those killed in action and for the repatriation of remains. Therefore, it was not until around September 1950, when graves registration was systematized to some extent, that the enemy remains were first buried in some areas of US Army Cemetery in Busan. Furthermore, the Enemy Cemetery Number 2 was built and started operation in December 1950. At the same time, as UN Military Cemetery was created, the existing US Army Cemetery was converted into the Enemy Cemetery Number 1 in mid-April 1951. While numerous 'transfer of remains of the dead' took place after the signing of a repatriation agreement in 1954, the number of burials in the Busan enemy cemeteries was 8,602, including 1,691 in the 1st Enemy Cemetery, 5,459 in the 2nd Enemy Cemetery, and 79 in the Memorial Temple, accounting for 2/3 of the total repatriated remains. The remains buried in these enemy cemeteries include not only North Korean and Chinese People's Army, but also South Korean soldiers. There were also many civilian internees of different nationalities buried in these cemeteries. Although many were transferred during the verification process, foreigners were also included. These enemy cemeteries in Busan, where most of the enemies' remains were buried, was not simply a graveyard for the enemy. It was a graveyard with complex significance, for it was not merely one for Korean soldiers but also one that held civilians and foreig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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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투사 중심 재현을 넘어선 한국전쟁의 대안적 전시 ―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와 < 허락되지 않은 기억(RESTRICTED) >을 중심으로

저자 : 김민환 ( Kim Min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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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쟁기념관의 전시를 상대화하기 위해 기획된 두 전시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와 < 허락되지 않은 기억(RESTRICTED) >의 내용을 소개하고, 전시 기획의 과정 및 실제 전시 과정에서 발생한 쟁점과 사회적 '소란'과 논란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기념관의 전시는 군인의 관점에 기반해서 전투사 혹은 전사(戰史)로서 재현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 두 전시는 전쟁포로와 민간인이 겪은 전쟁 체험을 부각하려고 시도했다. 관점의 전환 자체가 한국전쟁이 전시로서 재현될 때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민간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절대로 발발하면 안 되는 사건임이 강조되었다. 이 두 전시를 통해 전시 장소의 상징성이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전시로 다루는 방식, 전시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 등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 '금기'의 일단이 드러나기도 했다.


This work introduces the contents of the two exhibitions, Prison of War, Yearning for Peace and Memory Not Allowed (Restricted), which were designed to relativize the War Memorial of Korea. This research examines the issues that occurred during the exhibition planning process and the actual exhibition, as well as social 'turbulence' and controversies. Although the exhibitions at the War Memorial of Korea tend to represent the Korean War as 'the history of battle' based on the soldier's point of view, these two exhibitions attempted to highlight the war experiences through the experiences of prisoners of war and civilians. The change of perspective itself had the effect of making familiar things 'unfamiliar'. It was also emphasized that, from a civilian's point of view, war was not an option but an event that should never happen. Through these two exhibitions, one part of our society's taboo on the Korean War was revealed, such as the symbolism of the exhibition site, the way the theme of the Korean War was treated as an exhibition, and the boundaries of what should not be revealed in the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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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70년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과 교관의 교육 경험 다시 읽기

저자 : 윤충로 ( Yoon Chung-r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1-28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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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교육은 새마을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던 문화적 기제인 동시에 그 자체가 대규모 국가동원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 교육의 중심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었다. 이 연구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교육을 통해 국가의 의도가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되는 미시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관 2명의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이들의 교육 경험과 일상, 연수원 교육의 특성을 재구성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교관의 활동 공간이었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특징을 검토했다. 둘째, 연수원 '교관되기'와 '교육 일상'을 교관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셋째. 교관의 교육 업무를 그들의 '노동 경험'으로, 그리고 연수원 교육을 일종의 '집합적 열광'의 구축과정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또한 교관의 상징적 의미와 교육의 효과를 살펴봤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은 국가의 대중정치, 대중동원 방식, 이와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동의기제 형성과 그 한계의 구체적 일면을 보여준다.


Saemaul education was a cultural mechanism that suggested the vision of Saemaul Undong, and it was a large-scale national mobilization exercise. In the 1970s, the epicenter of Saemaul education was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 This study examined the microscopic process in which the state's intentions were transmitted to Saemaul leaders through the education offered at the institute. Using the oral histories of two former institute instructors, I reconstructed their experiences in daily life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stitute's education. This article contains three parts. First, I review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 which was the instructors' space of activity. Second, I reconstructed “becoming an instructor” and “daily education life” at the institute based on the instructors' oral testimonies. Third, I re-read the instructors' teaching as their 'labor experience', and the institute's education program as a process of building a kind of 'collective effervescence'. And I also examined the symbolic meaning of instructors and the effects of education.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s education shows the state's mass control politics, mass mobilization, and one aspect of the specific process of creating a mechanism for consent from below, and its lim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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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95년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나타난 '정신질환자'의 정의 ―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변화

저자 : 이정연 ( Yi Jungye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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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95년 '정신보건법'의 제정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정신질환자의 정의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를 고찰한다. 약 25년간의 정신보건정책 역사는 정신보건법의 제정·개정 과정과 정신보건사업의 변화를 토대로 분석된다. 이를 기반으로 정신질환자의 정의변화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정신보건법 제정 직후까지 정신질환자는 주로 만성적인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서 전문기관의 격리 입원이 필요한 자들로 규정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뿐 아니라 정신질환의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일상적인 정신관리가 필요한 사람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신질환자', '정신장애자', '기능저하 정신질환자'라는 개념이라는 혼재했다. 이후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만 지칭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정신보건정책은 대상과 방식이 분리되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증진'의 이중적 관리체제로 분화되었다. 지역의 통합적 관리체제 속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었고 전 국민 대상의 정신건강증진사업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적 정의변화에도 불구하고 '강제입원의 대상자'라는 내포적 정의는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강제입원의 정당성은 정신보건정책의 법제화와 제도화 속에서 권리, 보호, 돌봄의 논리를 통해 유지되었다.


This study examines changes in the definition of 'person with mental illness' in public health since the enactment of the Mental Health Act in 1995. For 25 years, changes on mental health policy have been based on revisions of the Mental Health Act and historical changes in mental health services. This research locates these definitional changes in three periods. Until just after the enactment of the Mental Health Act, mental illness primarily referred to people with chronic severe mental illness that required hospitalization at specialized medical institutions. By the 2000s, however, this definition expanded to include people with severe illness, people susceptible to mental illness, and those in need of daily mental management. Various concepts such as 'a person with a mental illness', 'a person with a mental disability', and 'a person with dysfunctional mental illness' were mixed during this period. Later, the definition of a person with mental illness was narrowed to refer only to those with severe illness. The mental health policy was also differentiated into a dual management system of 'mental illness' and 'mental health promotion'. Through the regionally integrated management system, surveillance and control of people living with mental illnesses were strengthened, and mental health services for all citizens were expanded. Despite changes in the denotative definition of a person living with mental illness, the connotative definition stipulating 'subject to compulsory hospitalization' remained as part of the working definition for a long time. The legitimacy of compulsory hospitalization was founded on a logic of rights, protection, and care and legislated, institutionalized in mental health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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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의 배우자관 ― 여성지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을 중심으로

저자 : 방미화 ( Fang Meihua ) , 예성호 ( Rui Shenghao ) , 김흠 ( Jin Xi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3-37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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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에 대한 텍스트 마이닝 분석을 중심으로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지향의 '역행'현상에 고찰하였다. 1960~1970년대 조선족 여성들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은 노동자, 군인 등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인 1980~1990년대에는 공무원, 사업가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사업이 있는 남자,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배우자 선택관의 변화는 국가의 경제체제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체제 하의 여성들의 취직난, 경제체제 변화에 부응한 남성들의 창업, 나아가 1980~1990년대 조선족 여성들의 이중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변화 등 요소들이 맞물려 여성들은 사업이 있거나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면서 자신들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지향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여성들이 사업심이 강하고 사업이 있는 배우자를 선호한 것은 결코 혼인에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남성에 의탁하여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사회에 진입하면서 여성들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해 부의 축적을 욕망하는 등의 시대적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 성 역할의 강화 내지 지속은 조선족 여성들이 젠더 정체성 수행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문화는 단번에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들의 행위에 의해 지속, 해체, 생성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변화되는 것이다.


This paper uses text mining methods to analyze Yanbian Women's < Ojakgyo >. It also investigates the “retrograde” phenomenon of Korean women's traditional gender division of labor after reform and liberalization. During the 1960s and 1970s, Korean women chose to marry workers and soldiers. However, starting in the 1980s, more women became civil servants and entrepreneurs and preferred men with stable careers and, presumably, with greater ambitions. This change of mate selection coincided with national economic changes. After the reform, it was difficult for women to acquire desirable employment, and men's entrepreneurship became a new systemic way to adapt to market changes. In particular, between the 1980s and 1900s, Korean women faced a double burden of finding a job and adjusting to the rise in male-centered entrepreneurism. They had to deal with a new social consciousness that expected them to seek ambitious men while maintaining traditional divisions of labor and fulfilling their familial responsibilities. However, women did not simply forego all independence and rely on men to live; women became important actors in consumer society. The accumulation of wealth and living richer lives became crucial values for them. Such pursuits became the rising raison d'etre of the times. Yet, gender roles remained cemented in tradition and Korean womens' belief that spousal responsibilities reaffirmed their Korean identity. Despite today's turn toward a new, more liberal era, parental culture, while influenced considerably, remains a persistent phenomenon that maintains much of its earlier forms but with minor adjustments to account for systemic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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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도론(獨島論) ― 군사주의를 넘어서

저자 : 전경수 ( Chun Kyung 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9-43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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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독도에 관련된 군사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군사주의적 인식을 해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발발로 인하여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급선회하였고, 미국은 그때부터 군사적인 차원에서 태평양체제를 운영해왔고, 연합군의 일본“점령” 통치를 겪으면서 태평양체제에도 일련의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작금 미국은 대중국/대러시아 용의 군사적인 인도태평양체제를 확립하였다. 즉 과거의 태평양체제가 인도 태평양체제로 전환함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화에는 미일적대의 관계로부터 미일동맹의 관계로 변화한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과거의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밀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일관계의 변화가 독도 영유권이라는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예측적 관찰에 대비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부차적인 목적이다.
1900년 독도의 영유권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포고령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일언 반구도 않고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노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대한제국의 동해안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강압적 협약을 맺었다. 노일전쟁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문을 작성하였다. 그 과정에는 일본해군의 수로부장을 역임하였던 키모츠키 카네유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하는 것이 본론의 일부이다. 본고에서 독도론의 배경에 깔린 군사주의를 논하는 전반부에 해당되는 내용인 키모츠키의 역할과 노일전쟁 중의 일본해군의 군사적 활동을 살펴본다. 독도의 영유권에 얽힌 두 번째의 군사주의적 맥락은 미국해군과의 관련성에서 논증된다. 일본에서 변호사 업무의 경험을 갖고 있는 윌리엄 시볼드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미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였고, GHQ의 일본점령 통치기간에는 외교국장을 역임하였다. NARA에 보관된 GHQ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미해군이 작성한 지도는 점령후 일본의 영토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축소된 지도를 제시하였다. 그 속에 표기된 독도는 “Korea”의 소속으로 명기되어 있다. GHQ의 초기 자료에도 일본영토의 표기에 있어서 최소원칙은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GHQ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본고에서 지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직전에 윌리엄 시볼드는 “타케시마”는 일본영토라는 의견서를 제출하였음도 확인되었다.
변화된 태평양체제를 배경으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미국과의 군사적·외교적 관계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제 변화된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미일관계가 밀접한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독도 영유권의 문제가 어떠한 지위에 놓일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독도의 영유권에 개입되어 온 군사주의적인 상황들이 앞으로 전개가능한 군사주의적 변화체제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할지에 대해서 심사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와 관련된 군사주의에 개입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영유권 외교를 전개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sovereignty of Dokdo (Takeshima in Japanese) through an analysis of the militarism that started with the island's controversial position as a territorially disputed area. With the outbreak of war in East Asia in 1941, US-Japan relations took a hostile turn. The US created a so-called 'Pacific system' founded on geopolitical militarism. This system is moving towards a new 'Indo-Pacific system' militarized against the PRC. Japan's role has consequently grown heavier, and its status increasingly mimics what the US had with its Pacific system. The Korean government declared sovereignty over Dokdo in 1900, while Japan neglected the island. At the time, Japan was preparing for war against Russia. Japan thus forced Korea to accept a treaty to use Korean territory for military bases and military communication facilities. Japan declared sovereignty over Takeshima (Dokdo) during the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in 1905. The Japanese Navy purportedly prepared a declaration with General Kimotsuki Kaneyuki as the key person in charge of hydrographic measurement in the sea. This author considers him an initiator who promulgated sovereignty over Takeshima through discussions with fishers in Okinoshima. Such is the case of Japanese militarism related to sovereignty over the island. The second case was related to the US military during its occupation of Japan after World War II. The US Navy created a map for occupation in 1944. Though the GHQ applied the minimum principle to analyze their political data when it previously denoted Japan's territory, the map clearly indicates Dokdo as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document kept the prime position even while William Sebald was a high-ranking officer in Navy Intelligence and in charge of GHQ's foreign affairs after the war. He submitted his memorandum about Japanese sovereignty over Takeshima before the San Francisco treaty between USA and Japan in 1952. I would say that this could be the 2nd case of militarism related to sovereignty over Dokdo.
There must be a closer relationship between the USA and Japan concerning their militarism, especially with this new Indo-Pacific system. This author would like to point out that this changing system from the Pacific one to an Indo-Pacific one potentially affects the sovereignty over Dokdo favorable to Japan with US support agains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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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저자 : 김대현 ( Kim Dae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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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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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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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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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저자 : 정다혜 ( Jeong Dahy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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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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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80년대 사회정화와 여성 수용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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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회정화'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들이 사회정화의 주요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제하여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으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여성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 인식과 정책에서 여성이 주요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1960~80년대에 여성 통제의 주요 방식이었던 수용시설을 분석하였다. 수용시설의 목적과 규정, 현황, 여성들의 수용 과정과 퇴소 이후 상황을 새로운 자료로 밝힐 수 있었다. 여성 수용시설은 보호, 교도, 자활을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통제와 낙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시설 운영과정에서는 젠더 특성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심각하였고,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이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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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저자 :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2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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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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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저자 : 노선희 ( Roh Sun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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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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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 무장대 출신자의 과거청산 경험을 사례로

저자 : 고성만 ( Koh Sung-m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3-2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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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견인책이자 주요한 성과물로 의미 규정되어 왔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다양한 기념사업은 새롭게 결정되는 '희생자'의 수, 추가로 각명되는 '희생자'의 기념비와 같은 양적 성장을 순항하는 과거청산의 희망적인 시그널로 홍보하며 4·3의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려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희생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과거청산 슬로건의 실증성을 제고하는 데에도 역할 해왔다. 그러나 4·3의 다종다양한 주체들 모두가 이러한 발전 모델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으로 분류되는 무장대 출신자들의 사례를 통해 '희생자'가 단순히 추가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되고 활용되어 온 점을 밝힘으로써 '폭도에서 희생자로'와 같은 과거청산의 성장주의적 논법을 재검토하는 데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됐던 4·3 '희생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가역적 지위를 갖는 집합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장대 이력을 이유로 '희생자' 자격이 취소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희생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선별과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다시 심사대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가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종래의 연구들 역시 시야의 확장과 관점의 갱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은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의 유동적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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