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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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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From Hospital to Village: A New Approach to Community Health in Rural Areas During the 1970s: A Focus on the Koje Community Health Project

정다혜 ( Jeong Dahye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3월
  • : 107-146(40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9.3


목차

1. 들어가며: 박정희정권기 보건의료와 지역
2. 의료와 지역사회: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발단
3. 지역민과 의료: 건강사업의 전개와 주민참여
4. 보건개발의 전형?: 정부 지역보건시범사업으로의 전환 시도와 귀결
5. 나오며: 지역사회보건사업과 지역사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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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This study elucidates the characteristics of community health programs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focusing on the Koje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roject. A medical missionary group implemented the Koje Project to address the demands of village leaders living on Koje Island. The pilot project applied new healthcare approaches that focused on community-centered healthcare―primary health care and health improvement through community participation―instead of relying on the existing hospital-centered models. The project goals were developed in conversation with community medicine practices, and the goals’ impact went beyond the immediate community, influencing domestic and international spaces. Unlike previous healthcare policies, the degree of villagers’ involvement became the decisive factor of the project’s success. However, during the project’s expansion from a private to government-led model, its administrators regarded the village voices as obstructive. This reaction presents some of the limitations of villagers as active agents. The Koje Project illustrates the dilemma that community-centered health programs faced during project development and expansion. Understanding communities and their involvement are crucial factors that shed light 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health and social welfare projects.

UCI(KEPA)

I410-ECN-0102-2022-300-000568346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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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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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저자 : 박경숙 ( Park Keo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82 (7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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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총수의 자료는 조선 시기의 인구동태를 추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되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에서 호적들이 발굴되고 전산화되면서 그동안의 호적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들을 질문하는 논의들이 확대되었다. 호구총수의 근거가 되는 호적이 작성될 때 상당한 누락과 복잡한 편제가 작용하여, 호구총수의 추이를 그대로 인구동태의 추이로 가정하는 데 비판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호구총이 인구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는지, 호구총에 어떻게 인구동태와 호정(戶政)이 배태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호총의 추이와 실질적 인구동태 사이의 관련성을 추론하기 위해 조선 시기 재해(역병)의 기록자료를 검색하여 호총과 재해기록의 추이 사이의 연관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염병의 빈도 추이와 호총의 추이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18세기를 통해 심각한 재해가 지속되고, 특히 재해가 심각했던 시기 호총의 수치도 여느 식년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지는 추세가 확인되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재해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데 호총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정체되어 그 맥락이 무엇인지 새로운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에서 재해상황, 호적, 부세, 신분, 가족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여 호정(戶政)의 이념과 현실을 해석하였다. 자연호와 편제호의 논란의 쟁점이듯이, 호총이 실제의 호수나 인구동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호총과 그 기록이 복잡한 사회관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관계성이 허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총에 작용하는 인구동태와 호적 등록율 그리고 호적 편제 양식의 영향을 세심하게 선별하면 맥락타당한 추정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


The Hogu Chongsu, published in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 (1789),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ovided key data for estimating the population dynamics of the Joseon period. However, as ho (household) registers for various regions were discovered and computerized in the 2000s, scholars began to discuss the epistemological assumptions involved in ho register research. Significant omissions and a complicated editing process affected the creation of ho registers and, since these were the basis of record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questions were raised about whether the trends seen in those records could be treated as reliable indicators of population dynamics.
This study examines whether the ho registers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both of which were produced in the complex context of ho-politics, can be used as population data. It also analyzes how population dynamics and ho-politics are embedded ho registers. In order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ho registers and actual demographic dynamics, the relationship between register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records of disasters (plague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examined. A very interesting relationship between the frequency of infectious diseases and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was found. Serious disasters occurred throughout the 16th, 17th and 18th centuries, and the number of households declined during years of severe disaster. However, whilst the number of disasters recorded during the 19th century was relatively small, the number of households decreased significantly and stagnated over this period, raising the question of why, and in what context, this transpired. To address these questions the study explores how ho politics was strongly related to disaster governance and the politics of tax, social status, and family support. Ho politics sought to secure the ho as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state's system of military, agricultural and financial obligations. The concept of ho insisted that men and women form a family regardless of their social status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observing the three doctrines (samgang). These tenets were easily absorbed by the populace. They were internalized and put into practice through small, male-centered family living units that embodied the three doctrines (samgang) and acted as units of self-reliant survival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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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후기 근기남인 사족의 '가(家)' 이념에 대한 일고찰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정일균 ( Jeong¸ Il-g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3-139 (5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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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근기남인(近畿南人) 사족(士族)의 '가(家)' 이념의 요체를 당시 근기남인을 대표했던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일별해보았다. 즉, 그가 제시한바 ① '사족의 가' 개념의 이상형으로서 '유인(幽人)의 삶'을 전제하는 가운데, ② '사족의 가'론과 관련하여 '사족의 가'의 기본구성과 그 확대조직, ③ '사족의 가 윤리'론과 관련해서는 '사족의 제가(齊家) 덕목(德目)'론, '사족의 가례(家禮)'론 및 '사족의 입후(立後)'론의 주요내용과 그 내용적 특징, ④ '사족의 가계경영(家計經營)'론과 관련해서는 특히 '상업적 농업경영론'의 주요내용과 내용적 특징을 차례대로 정리·개관해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이 구상·제출했던 '사족의 가' 이념은 또한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조선사회가 목하 경험하고 있었던 일련의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정약용이 구상·제출한바 상기의 '사족의 가' 이념은, ① 특히 그가 '사족의 가계경영'론에서 그 대상으로 “작록(爵祿)의 계통(系統)을 잃은 사대부가(士大夫家)” 또는 “가난한 사족”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데서 간취할 수 있듯이, 당시 당색(黨色)을 막론하고 몰락해가던 대다수 하층양반의 입장에서 꿈꿀 수 있었던 '거가사본(居家四本)[제가(齊家)·치가(治家)·기가(起家)·보가(保家)]'의 최대치이자, ② 같은 남인(南人)이면서도 영남남인(嶺南南人)의 경우에 비해 근기남인이 가지는 재지적 기반의 상대적 허약함에다 불행하게도 어느덧 '폐족(廢族)'으로 전락하고 만 자신의 가문의 중흥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이 아니었던가 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cardinal points of 'family'(家) ideology among the nobility (Yangban) of the Southerners (Namin) in Gyeonggi (京畿) districts. It focuses on the case of Jeong Yak-Yong who was a typical example of noble members of the Southerners in Gyeonggi districts. The main conte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① The paper introduces Jeong Yak-Yong's idea that 'the life of a hermit' represents the ideal type of the nobility's concept of 'family'. ② In relation to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of the nobility', the basic constituent elements of 'family of the nobility' and its enlarged organizations are examined. ③ In connection with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ethics of the nobility', the main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heory of 'virtues for wise government of the nobility's family', that of 'family formalities of the nobility', and that of 'adoption of the nobility's heir' are considered. ④ Jeong Yak-Yong's theory of 'management of household economy of the nobility' is surveyed briefly, with special attention paid to the main points and characteristics of his theory of 'commercial management of agriculture'.
It is clear that the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hich Jeong Yak-Yong mapped out and presented was a response to a series of enormous socio-economic changes which Joseon society experienc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19th century. After all, Jeong Yak-Yong's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as probably ① the maximum to which the then lower-class nobility could dream of going forward, and ② a practical plan for the restoration of Jeong Yak-Yong's own family, which had fallen into 'a ruined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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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족보를 활용한 조선후기 인구현상의 이해 ― 전주이씨 『선원속보(璿源續譜)』를 중심으로

저자 : 백광열 ( Baek¸ Kwang Ryeo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7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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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주이씨 대동보인 『선원속보』를 활용하여 조선후기의 출산 관련 현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지금까지 족보는 자료적 한계로 인해 인구학적 분석에 그다지 잘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중에 족보는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유용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이 글에서는 족보가 가진 인구 자료로서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하여 출산 관련 지표를 도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 결과 조선후기 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함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합계출산율 개념을 활용하여, 한 여성이 평생동안 출산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시킬 것이 기대되는 자녀 수인 '합계생존율'을 구해보았다. 전주이씨 집단에 있어 '합계생존율' 값은 17세기 전반기까지 전란으로 인해 매우 낮은 상태이다가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걸쳐 상승하였다. 특히, 종래의 일반적인 관찰과는 다르게 19세기 전반기에 이 값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출산 및 인구동태에 관한 인식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비록 완전한 의미의 것은 아니지만, (기록상의) 초산연령 및 평균출산연령도 구해보았다. 이 값은 17세기까지 상승하다가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이 '합계생존율'의 상승과 병행했다. 18세기 이후에는 기록상 초산연령이 급격히 하강하고 '합계생존율'은 증가하였다. 이에 대해 유아사망율이나 출산율의 관련을 통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한편, 『선원속보』가 왕실 후손의 족보라는 것에서 오는 계층편의를 보완하기 위해 적파/서파를 구분하여 그 인구학적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 서파의 영향이 기록상의 출산아 수에 음의 방향으로 작용함을 관찰하였다. 추후,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분석과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가미한다면 인구 및 사회에 관한 보다 심화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utilizing the Jeonju Yi clan's great companion genealogy, The Seonwon Sokbo (璿源續譜, 1900~1902). Until now, genealogy has not often been used for demographic analysis due to data limitations. However, of the available forms of data for understanding the population of the Joseon society, genealogy offers advantages in terms of size and quality. In this paper, in order to solve the limitations of genealogy as a form of population data, various methods were used to derive and analyze fertility-related indicators. The results have several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dapting the concept of Total Fertility Rate (TFR), I calculated the Yi clan's 'total survival rate'. This is the number of children a woman is expected to give birth to and survive to adulthood. In the Jeonju Yi clan, the 'total survival rate' was very low until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due to war, but rose from the late 17th to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The total survival rate stayed at a very high level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a finding which differs from previous observations. This suggests we need to reconsider fertility and population-related phenomena during this period. Although the data was not complete, I also calculated the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and (recorded) mean age at birth. These values rose through the 17th century and peaked in the 18th century. This process coincided with an increase in the total survival rate. After the 18th century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dropped sharply while the total survival rate increased. In this regard, an interpretation was attempted through the relation between the infant mortality rate and the fertility rate. The Seonwon Sokbo has an inherent class bias because it is a genealogy of royal descendants, so, in order to compensate for this, the demographic effects for legitimate and illegitimate son were investigated individually. As a result, it was observed that illegitimacy had a negative effect on fertility. In the future, if we add analysis of various variables and comparison with other societies, we may be able to attain a more in-depth history of population and society during thi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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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병역 대체복무제도의 역사적 구성 ― '잉여자원' 관리와 발전에의 동원

저자 : 강인화 ( Kang¸ Inhw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1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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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병역 대체복무제도가 형성되어온 역사·사회적 과정을 살펴본다. 병역제도의 운영은 국민개병 이념과 징병제 실행 사이의 불일치를 수반한다. 한국사회는 병역의무의 대상에게 현역 군복무를 '대체'하는 의무를 '병역'의 일종으로 요구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운영을 통해 이러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냉전시기 징병제는 안보와 발전의 중첩된 이해를 토대로 방위소집복무, 병역특례 등과 같은 대체복무를 병역제도 안으로 포섭하였다. 대체복무가 제도화되면서 군사활동을 담당하는 현역복무 이외에 이를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병역의무'로 개념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는 병역 대상자를 현역 군복무 이외의 분야에 동원하던 앞선 시기의 유제를 이용하여 '잉여' 병역자원의 경제·사회적 활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공익분야에서의 복무'가 대체복무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확대된 병역 개념에 기초하여 징병제 운영의 전면화와 병역의무의 보편화가 추구되어 왔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y and the social processes of the alternative service system in South Korea. The management of the military service system faces a discrepancy between the ideology of the citizen-soldier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scription system. Korean society solved these discrepancies by implementing an alternative service system that offers alternatives to military service as a kind of “military duty.” During the Cold War, the draft system included alternative military services such as the homeland reserve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ceptions based on the understanding that development and national security overlap. Various alternative forms of activities were conceptualized as “military service obligations” since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lternative services. After democratization, the government developed economic and social utilization policies for “surplus resources,” based on the legacy of the earlier mobilization of military service personnel to other areas. At that time, “serving in an area of public interest” was a form of military service. Based on the expanded concept of military service, which includes alternative services, the Korean government aimed to manage the universal conscrip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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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성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 1980년대 이후 중국 '부녀회가(婦女回家)' 담론의 전개와 굴절

저자 : 김란 ( Jin¸ L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5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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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혁명과정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이 시기 국가 주도로 여성을 노동자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주체화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여성노동자 모범이나 노동자 모범가족 선정과 같은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 '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문화적 작업은 당시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주의의 도입에 따른 고용유연화로 여성 노동력 감축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부녀회가”라는 문화적 담론의 장이 열렸다. 본 연구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중국 8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쇠퇴과정을 반영하는 문화적 흐름을 십년 단위로 전개된 네 차례의 '부녀회가(여성회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시기별로 80년대 단계성취업론, 90년대 기업부담론, 사회발전 단계론, 2000년대 가사노동 찬양, 2010년대 생물학적 모성론 등 다양한 논변이 제기되었고, 그 와중에도 중국 전국부녀연합회의 반대는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 여성지위의 하락과 쇠퇴의 과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부침과 격론을 거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회주의 시기 여성-노동자로서의 주체화는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했다.


In the early era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labor” was top of the government's agenda. During this period the state led a process of top-down subjectivation that intended to make women into workers. However, after China's reform and opening up, women's involvement in the labor market began to decline and a cultural discourse about “women-going-home” emerged. This study will describe different forms of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from the 1980s, 1990s, 2000s and 2010s. These reflect the process of change and decline in women's social status since the 1980s. Over this period a variety of debates and ideas arose that reinforced and interacted with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including stage employment discourses in the 1980s, corporate burden discourses and the social development stage theory in the 1990s, the praise of domestic labor debates in the 2000s, and biological maternity discourses in the 2010s. Throughout this era the All-China Women's Federation mounted persistent opposition. The decline in women's status in China has not been linear, but instead developed in a complex manner through controversy and argument. From this perspective, the socialist era subjectivation of women laborers remained strong even after reform and open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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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내몽골 자치구 '다원일체' 민족주의의 구축 ― 왕소군 이미지의 변모 양상과 소군박물원을 중심으로

저자 : 고페이 ( Gu¸ Fe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30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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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왕소군(王昭君)의 이미지의 변모 과정과 역사 기억의 시기별 특징을 고찰하고, 동시에 현재 왕소군을 활발히 기념하고 있는 내몽골 소군박물원에서의 현지 참여 경험을 토대로 내몽골 지역 주민들의 담론과 심리적 반응을 분석함으로써 비소수민족자치구역인 후베이(湖北)성에 있는 왕소군 기념물과 대비1)되어 나타나는 '다원일체론'적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상상된 영웅의 과거를 신비롭게 구성하여 국가의 권위를 표출하는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적 영웅의 창출은 훨씬 더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왕소군을 여성영웅으로 추앙하여 민족주의 구축의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왕소군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최초 등장한 한나라 시기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이미지는 계속 변모해왔다. 그녀는 민족적 저항, 다민족국가건설, 소수민족통합, 다원일체적 국가 구축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져 왔으며, 소수민족 우세지역과 한족우세지역에서 그 상징적 가치가 다르게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의 '재소환 및 재기'시기에 북방소수민족지역인 내몽골에서 그녀는 '다원일체' 민족주의 구축의 역사적 소재로 적극 활용되어 왔는데, 이는 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t is common for modern nation-states to express the authority of the state by mythicizing an imagined hero's past. But the creation of national heroes in a multinational state requires much more complex logic. China, a representative multi-ethnic country, held up Wang Zhaojun as a heroine during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used her as a historical resource to help establish a unified national identity. The image of Wang Zhaojun, a historical figure, her image has been constantly changing since her first appearance during the Han Dynasty. She has been used in various contexts, including national resistance, multi-ethnic country construction, minority integration, and pluralistic state construction. Most interesting is that her symbolic value has been used differently in minority and non-minority areas. In particular, in Inner Mongolia, a northern minority region of China, she was actively used as a historical resource for the establishment of “Diversity in Unity” nationalism during the “recall and comeback” period of Chinese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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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과 반론 : 예술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어려움

저자 : 이진아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34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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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저자 : 김대현 ( Kim Dae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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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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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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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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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저자 : 정다혜 ( Jeong Dahy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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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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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80년대 사회정화와 여성 수용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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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회정화'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들이 사회정화의 주요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제하여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으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여성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 인식과 정책에서 여성이 주요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1960~80년대에 여성 통제의 주요 방식이었던 수용시설을 분석하였다. 수용시설의 목적과 규정, 현황, 여성들의 수용 과정과 퇴소 이후 상황을 새로운 자료로 밝힐 수 있었다. 여성 수용시설은 보호, 교도, 자활을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통제와 낙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시설 운영과정에서는 젠더 특성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심각하였고,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이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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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저자 :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2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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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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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저자 : 노선희 ( Roh Sun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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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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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 무장대 출신자의 과거청산 경험을 사례로

저자 : 고성만 ( Koh Sung-m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3-2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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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견인책이자 주요한 성과물로 의미 규정되어 왔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다양한 기념사업은 새롭게 결정되는 '희생자'의 수, 추가로 각명되는 '희생자'의 기념비와 같은 양적 성장을 순항하는 과거청산의 희망적인 시그널로 홍보하며 4·3의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려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희생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과거청산 슬로건의 실증성을 제고하는 데에도 역할 해왔다. 그러나 4·3의 다종다양한 주체들 모두가 이러한 발전 모델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으로 분류되는 무장대 출신자들의 사례를 통해 '희생자'가 단순히 추가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되고 활용되어 온 점을 밝힘으로써 '폭도에서 희생자로'와 같은 과거청산의 성장주의적 논법을 재검토하는 데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됐던 4·3 '희생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가역적 지위를 갖는 집합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장대 이력을 이유로 '희생자' 자격이 취소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희생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선별과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다시 심사대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가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종래의 연구들 역시 시야의 확장과 관점의 갱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은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의 유동적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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