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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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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Managing Poverty: Vagrant Institutionalization and Private Welfare in Busan, South Korea (1960’s-70’s)

김일환 ( Kim Il-hwan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3월
  • : 61-105(45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9.2


목차

1. 문제제기
2. 전후 부산 사회와 ‘부랑’ 인구에 대한 대응
3. 1960년대 ‘부랑인’ 행정과 대규모 수용시설의 설치·운영
4. 1970년대 시설문제의 전개와 부랑인 수용체계의 변화
5. 결론과 함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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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In this article, I examined the dynamics of private welfare and issues of vagrant institutionalization at the local level in Busan between 1960’s-70’s. Previous research has elucidated aspects of vagrant isolation and institutional management but mostly overlooked local political dynamics vis-a-vis the central government’s roles. The diverse operational strategies of private welfare organizations and their interactions remained unexplained. In this context, I adopt a Bourdieusian approach to examine four private organizations that operated vagrant facilities and their influences in shaping local politics related to vagrant problems in Busan: Yeonghwasuk, The Sisters of Mary, Chilseong-won, and the Hyeongje-welfare institution. The results show that these organizations varied in their strategies, mobilizing various forms of capital, habitus, and social networks. However, they shared a general preference for institutionalization and isolationist tactics. Consequently, massive vagrant institution and confinement practice in Busan existed well before the promulgation of the Internal Department Order No.410 in 1975, a critical vagrant policy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he findings suggest a need to examine the local origins of social exclusion more closely, along with the roles private welfare agencies play.

UCI(KEPA)

I410-ECN-0102-2022-300-000568331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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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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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획특집: 한국 우생학의 역사와 오늘

저자 : 박지영 , 현재환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0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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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민족적 체질' 만들기 ― 식민지 시기 조선인 아동 발육 표준 연구

저자 : 박지영 ( Park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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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지금까지 제국주의의 도구로 알려져 온 생물측정학이 식민지 조선에서 피식민자들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탐구한다. 그러기 위해 이 논문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경성제국대학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수행한 아동 발육 표준 연구를 분석한다. 검토 결과에 의하면,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생물측정학을 그것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체질인류학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아동 발육 연구에 적용했다. 그런 선택에는 민족의 체질을 알고 개선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진 조선인 발육 표준은 조선인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기준이자 향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인 의학자들의 생물측정학 연구가 일반적으로 민족의 특질을 선천적이고 인종적인 것으로 묘사하던 것과 달리,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그것을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식민 통치에 저항적이거나 대립적이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식민 당국은 식민 통치의 정당화와 안정화를 위해 조선인 체위향상 정책을 추진했으며,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그 정책의 지원을 받고 또 그에 기여하면서 조선인의 발육에 관한 연구와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서술을 토대로, 이 논문은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생물측정학을 '민족적 체질'을 알고 개선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그 활동은 조선인 사회와 식민 당국의 협력과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how Korean medical specialists used and interpreted biometrics under Japanese rule in Korea. To do that, this paper examines studies on growth standards in the Korean population by Korean researchers in the Department of Hygie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s College of Medicine during the 1930s and early 1940s. The Korean Hygienists applied biometric methodology to research on growth patterns in Korean children, detaching biometrics from the anthropological context where it had been generally used. Their choice reflected a belief in Minjok Gaejoron, the notion that the composition of the Korean nation should be learned about and improved. From that point of view, growth standards were considered as both criteria for distinguishing Koreans from other ethnic groups and an area that could be targeted and developed. This shows that whilst Japanese anthropologists described Korean growth standards as innate and racial, Korean hygienists considered them to be acquired and variable. However, this does not mean that the Korean hygienists resisted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 hygienists contributed to the public health and wartime manpower management policies of the colonial authorities. They received support from the colonial state to study and promote the physical development of Korean children. Based on these observations, this paper argues that the Korean hygienists used biometrics as a tool to learn about and improve 'national composition,' and that such activities were possible through cooperation and compromise between Korean society and the colonial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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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우생'론과 의과학자들, 1945~1964

저자 : 현재환 ( Hyun Jae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5-9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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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70년대 가족계획사업과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측면을 조명하는 연구들 덕분에 해방 이후 한국의 우생학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글은 해방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생물학자들과 의학 전문가들의 활동들을 검토하여 이들이 1945년 이전의 미국 우생학과 전전(戰前) 및 전후(戰後) 일본의 민족위생학(民族衛生学)을 자원으로 삼아 '민족우생' 혹은 '국민우생'을 과학적으로 온당한 분야이자 담론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의과학자들은 적어도 1970년대초까지 우생학을 '건전한 과학'으로 가르치고 홍보했으며, 1950년대에는 동성동본 불혼제 등과 같이 생식과 관련된 사법적 문제에 우생학의 이름으로 개입했다. 특히 권이혁(1923~2020)을 위시한 의학 전문가들은 1950~60년대 사이에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라 우생법을 입안해 '유전병' 환자들의 강제불임수술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의과학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우생학과 우생주의 형성에 맡은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가족계획사업에만 초점을 맞춘 국민우생법안(1964) 입안의 역사를 재고한다. 나아가 한국이 '우생사회'가 되어가는 과정과 그 면모를 드러내려는 최근의 간학제적인 노력에 과학사가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In recent years, interest in South Korean eugenics has grown among social historians, particularly with regards to eugenic aspects of family planning in the 1970s and the Mother and Child Health Act of 1973. Examining the scientific discourse and social activities of biologists and medical researchers from the post-liberation period to the early 1960s, this paper argues that these medical scientists played a crucial role in making “national eugenics” (minjok usaeng) appear to be objective science and legitimate medical policy. Using pre-WWII American eugenic theories and prewar and postwar Japanese ideas about racial hygiene (minzoku eisei), they presented eugenics as a “sound science” and intervened in legal debates concerning human reproduction-related family laws. Furthermore, they continuously pushed for legislation of a eugenics law modeled on the Japanese Eugenic Protection Law (1948), and hoped to legalize the sterilization of people with cognitive disabilities. Through this case study, I demonstrate that History of Science can contribute to the current interdisciplinary effort to revisit the family planning-centered history of Korean eugenics legislation and help uncover the origin of eugenic ideas in South Korean society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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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획특집: 고등교육의 경험과 그 (포스트)식민적 효과들

저자 : 정준영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95 (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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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학의 장'과 식민지 고등교육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51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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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의 조선학은 국학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학운동'이라는 좁은 렌즈만으로는 조선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학술장이라는 개념을 분석도구로 삼아,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분석과정에서 특히 고등교육과의 관련을 중시했다.
1920년대 벽두 최남선의 조선학선언을 통해 조선학이라는 지평이 서서히 조선사회에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조선인들이 주도하는 조선학은 어문학과 발명학이라는 하위장에서만 새로운 시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1926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본격적인 조선학 연구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대학에 부임한 일본인 연구자와 1929년부터 배출되는 조선인 졸업생 그리고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조선인 해외유학생들이 조선학 붐의 주체가 되었다.
1930년 결성된 청구학회는 본격적인 조선학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가 출현한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제도화된 분과학문을 바탕으로 청구학회가 조선학 전문지식을 본격적으로 생산해내게 되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1930년 이후 어문학, 철학, 민속학, 경제학 등의 인문학과 의학, 발명학, 박물학 등의 이공학 분야에서 조선학 하위 학술장이 족출하게 되었다. 조선학의 장은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화려하게 만개하게 되었다.
이런 하위장의 성립을 토대로 1934년 조선인 중심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인 진단학회가 탄생하였다. 진단학회는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조선연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조선학 전분야의 하위장 연합으로 발족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 우파 그룹이 조선학의 상징으로 실학을 내걸고 조선학운동을 시작한 것은, 이런 과학적 조선연구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조선학의 성립을 자극한 것은 일본의 조선 연구였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조선학 연구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조선인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경성제국 설립과 유학생의 유입이 조선학 형성의 신호탄이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학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하고, 고등교육을 통해 배출된 연구인력은 조선학 연구를 진전시켜 갔다. 식민지기의 고등교육은 조선학을 추동한 자극의 원천이자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Joseon studi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can placed within the tradition of national learning (國學). As such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the full extent of Joseon studies through the narrow lens of the 'Chosunhak Movement'. This article analys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Joseon studies using the concepts of academic fields and sub academic fields, emphasizing Joseon studies' relationship with higher education was emphasized.
In the 1920s, through the declaration of Joseon Studies by Choi Nam-sun, the horizon of Joseon Studies gradually emerged in Korean society. However, during the 1920s, only minor and experimental research in the sub-field of linguistics and 'invention' (that is engineering) was led by Koreans in Joseon studies. Instead, Keijo Imperial University, which opened in 1926, laid the foundation for full-fledged Joseon studies. Japanese researchers who took office at universities, Korean graduates who had studied abroad, and from 1929, Korean graduates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came together at the same time to become the main agents of the Joseon studies boom.
The formation of Cheonggu Academic Society (靑丘學會) in 1930, signaled the full-fledged launch of Joseon studies. The first comprehensive academic society on Joseon studies centered on Japanese researchers appeared. Based on the academic discipline institutionalized at Keijo University, the Cheonggu Academic Society produced expertise in Joseon studies in earnest. As a result, from 1930, the sub-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have been established in humanities such as language and literature, philosophy, folklore studies, and economics, as well as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disciplines such as medicine, 'invention', and natural science. The 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thus came to be in full bloom in the early 1930s.
Based on the establishment of these sub-field, the Jindan Academic Society (震檀學會), a comprehensive society for Joseon studies centered on Koreans, was born in 1934. Paradoxically, the Jindan Academic Society put forward 'scientific Joseon research' as a slogan, and it was able to be launched as a sub-field alliance in humanities of Joseon studies. The reason why the nationalist right-wing group started the Joseon Studies Movement with Silhak (實學) as a symbol of Joseon Studies was this sense of crisis over scientific Jose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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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미션스쿨의 지식인 풍경 ―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8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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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식민지 미션스쿨에 재직 중인 지식인들을 하나의 풍경화로 묘사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풍경화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본다. 하나가 풍경화가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공간, 둘째가 풍경화가 포착하는 특정한 시간대, 마지막으로 풍경화의 구도를 잡아주는 출발점이자 확장선인 소실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비추어 평양에 있었던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사례로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을 풍경화로 그려보고자 한다. 지식인 풍경이라는 이 새로운 방법은 식민지 지식인들을 당대의 시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좀 더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기 위해 고안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이 활동한 공간은 식민지에서는 때 이르게 글로벌하면서도 로컬했다. 지역 유일 사립전문학교였던 숭실전문학교는 평양의 역사와 식민지적 특성으로 인해 인구구성이 비교적 다양했고, 교수들의 학력구성도 제국을 기반으로 글로벌했다. 동시에 평양이 역사적으로 오래 차별받아 온 서북지역이이면서 민족주의와 사립학교의 설립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라는 특성이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들 역시 지역에서의 책무를 기꺼이 맡는 지역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지식인들이 처한 시간대를 보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지식인들의 직선적 시간과 이를 제국주의 국가권력의 시간 쪽으로 끌어당기는 권력의 힘이 충돌하면서 울퉁불퉁한 구부러진 시간대를 살아갔다. 셋째, 지식인들에게 핵심적 역할인 지적 행위를 소실점으로 두고 봤을 때,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은 식민지라는 한계와 전문학교라는 한계 속에서 그들의 학문적 활동을 진행했으며, 여러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술교육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This article paints a landscape painting of intellectuals working at the Colonial Mission College. The author believes that landscape painting includes three elements. The first is the wide space landscape paintings describe, the second is the specific time zone captured by landscape paintings, and the third is the vanishing point. This is the starting point and extension line that defines the composition of the painting. In light of these three elements, the author attempts to paint a picture of intellectuals in colonial mission college using the example of Soongsil College professors in Pyongyang.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space of intellectuals at Soongsil College, a colonial mission school, was both global and local. Second, time at Soongsil College was uneven and curved. The straight time of intellectuals trying to move toward the future collided with the colonial power that pulled it toward the time of state power. Third, with regards to intellectual activity, which is a defining role for intellectuals, professors at Soongsil College conducted their academic activities under the limitations imposed by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institution's status as a vocational school. They tended to focus on technical education as this met the interests of various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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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묵은 술을 새 부대에 ― 고종의 '전제왕권'과 관보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2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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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갑오개혁 때부터 발행된 인쇄 관보는 이듬해 6월에는 일본 관보와 비슷한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근대국가의 관보는 일차적으로 법령을 공표하고 정부 소식을 전하는 매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고종대의 관보에서 법령보다 더 부각된 것은, 규정과 달리 관보 맨 앞자리로 옮겨진 「궁정녹사」였다. 「궁정녹사」는 본래정치와는 별개로 임금과 왕실의 동정, 각종 제사 소식을 싣는 주변적인 꼭지로 설정되었지만, 고종대 관보에서는 “詔曰”이라는 명령 형식을 취한 고종의 정치적 결정, 관리 인사, 각종 상소와 고종의 비답이 상당한 분량으로 이 꼭지를 채웠다. 심지어 고종이 자신의 “무한하온 군권”을 강조한 「대한국국제」를 공포한 것 역시 「궁정녹사」 난을 통해서였다. 「궁정녹사」는 관보 속의 또다른 관보였고, 고종대 관보는 법치의 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제왕권의 과시를 위한 매체였다.


During the Gabo Reform, the government in Korea began to be publish a government gazette. The government gazette of the modern state is primarily a medium for promulgating and publishing laws and delivering government news. However, in the King Gojong Era, “The Royal Events” section, which was originally only a secondary concern, was given a prominent position. Originally, “The Royal Events” section covered the daily life of the king and the royal family and ancestral rituals. However, during the King Gojong Era, this section reported on the emperor's rule rather than the news of the court's event. Through this section, King Gojong even promulgated the Constitution of the Korean Empire which emphasized his “infinite sovereignty”. The government gazette in King Gojong Era was a medium for the display of aut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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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한 연구 ―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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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해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위문대/군예대는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전국 각지에 걸쳐 순회하였으며, 관객들에게 위문연예라는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위문공연은 상이군인과 산업전사 같은 기표를 통해 남성성을 찬양하면서 반공사상과 계몽의식을 반복적으로 함양하기도 했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악극단과 연예계의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 문화 형식 등이 계승되면서 재구성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다. 위문대/군예대 안에는 기생과 접대부를 포함하는 여성 예인이 참여하였다. 그녀들은 무용과 음악을 통해 위문연예를 수행하면서, 가두에 진출하여 위문금까지 모금하여 헌납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위문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도, 남성성을 보완하기 위해 여성 신체가 비/자발적으로 전유되었던 서비스 노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looks at the continuity between performances given for troops in Korea before and after liberation, focusing on military arts troupes and what were known in Korea as “comfort groups”.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oured all over the country, undergoing various transformations and providing the audience with a visual spectacle. The shows praised masculinity through symbols such as disabled soldiers and industrial warriors, while cultivating an anti-communism and enlightenment consciousness. Key aspects of these performances were inherited and reconstructed from the musical theater troupes and the entertainment industry of colonial Joseon, including the human resources, networks, cultural forms. Female entertainers, including gisaengs and waitresses, participated in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hey even raised money for condolences by performing dance and music in the street. This can be seen as service labor in which the female body was involuntarily/voluntarily appropriated to supplement masculinity, creating an everyday culture of “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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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군부 정권의 가속 통치와 '3S 정책'

저자 : 김학선 ( Kim Hak-s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5-30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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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Screen, Sex, Sports)란 용어는 보통 우민화 정책을 지칭하는데, 대한민국의 1980년대를 특징짓는 표현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신군부 정권의 '3S 정책'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3S'는 당시 자율화·자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라는 의견이 맞서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신군부 정권의 가속화 열망에서 비롯된 가속 통치의 측면에서 '3S 정책'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가속통치란 인접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정통성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 미래를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워 사회 가속화를 촉진하는 통치행위를 가리킨다.
신군부 정권은 2번의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했으므로 정당성 확보가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황은 예전과 같은 고속성장을 보장할 수 없었다. 신군부 정권은 정치·경제 안정화에 주력하면서 속도 조절 담론을 통해서 고속성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적 시점에서 해결하자는 논리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며 가속 정치를 시행했는데, 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3S'다. 신군부 정권은 '3S 정책'을 통해서 삼중의 속도-과거와의 단절 속도, 자본의 회전 속도, 속도에의 몰입과 속도 경쟁의 자유가 일상화되는 속도-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의 가속화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3S 정책'이란 곧 '3S' 소비책을 의미하는데, 신군부 정권은 '3S'에 대한 소비 진작을 통해서 정치·경제적 당면과제를 해결하고, 정권의 정당성과 국민 동원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했다. 본 글에서는 '3S'의 구체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당시 신군부 정권이 펼친 '3S 정책'을 정리하고, 그로 인해 '3S'가 1980년대 시공간에서 산업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신군부의 스크린 정책은 영상 산업, 유흥·향락 정책은 성 산업, 스포츠 정책은 스포츠 붐과 관련해서 논의한다.


South Korea in the 1980's is often characterized by the term “3Ss” (Screen, Sex, Sports). 3Ss culture is often assumed to have been the result of a conscious state policy to “dumb-down” society. However, some contend that this interpretation misrepresents the nature of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or argue that 3S culture emerged naturally as a result of growing autonomy and liberalization. This article seeks to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the 3S policy, arguing that it can be seen as the result of “accelerated government”. Accelerated governance stemmed from the New Military Group's desire for acceleration, and refers to governing behaviors in which the ruling power promotes social acceleration because it has not obtained legitimacy from the adjacent past or present.
Since the New Military Group usurped the government through two military coups, securing legitimacy was a priority. However, political instability and the economic depression meant it could not even guarantee that growth would match the pace of previous years. Through the 3S policy, the new regime instead tried to realize its aspiration for acceleration by speeding up in three ways―in the rate of disconnection from the past, the speed of capital rotation, and the rate at which immersion in speed and speed competition became commonplace.
The 3Ss policy refers to the 3Ss consumption policy. In order to determine the concrete reality of 3S, this article summarizes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and its attempts to govern by stimulating consumption of the 3Ss. This explains how the 3Ss established itself as an industry in the space and time of the 1980s. The new regime's entertainment and pleasure policies, screen policy, and sports policy, are discussed in relation to the video industry, the sex industry, and the sports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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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80-90년대 발전국가 전환기의 부실기업 처리 ―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

저자 : 오형석 ( Oh Hyu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7-3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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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발전국가 전환의 불균등성이라는 맥락에서 1980-90년대 대표적인 부실기업인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를 분석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정부는 여러 방면에서 이전의 전형적인 발전국가의 면모를 탈색하려 했다. 그 와중에 큰 규모의 기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부 대응은 각각 상이했다. 1985년 국제그룹 사례에서는 정부가 해체를 직접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계열사별 인수업체 선정까지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그룹이라는 개별 기업의 부실이 국가적 차원의 부실로 심화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정부의 직접개입은 민간 자율이라는 경제 정책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기의 방지라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모순은 1997년 한보그룹 위기 상황에서 기업주, 정부, 은행이 서로 다른 판단을 하여 한보를 부도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가 무개입으로 일관한 가운데, 기업주 정태수의 은행관리 거부라는 돌발상황이 발생했고, 은행은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던 가운데 청와대 한보 부도 결정이라는 오보를 즉각 수용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97년 1월 한보 부도 이후의 결과는 대기업의 연쇄 도산이었다.


This paper analyzes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and the Hanbo bankruptcy case of 1997, both of which are representative instances of corporate insolvency in South Korea.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show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uccessfully using a strategy of active market intervention to prevent the spread of insolvency. However, the bankruptcy of Hanbo in 1997 suggests that this strategy was extremely limited. In the Hanbo crisis,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s evaluation of the situation differed, and consequently each took different actions. The result was the Hanbo Group's bankruptcy. This was not only an undesirable outcome for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 but also led to series of large corporations going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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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저자 : 김대현 ( Kim Dae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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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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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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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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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저자 : 정다혜 ( Jeong Dahy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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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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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80년대 사회정화와 여성 수용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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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회정화'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들이 사회정화의 주요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제하여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으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여성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 인식과 정책에서 여성이 주요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1960~80년대에 여성 통제의 주요 방식이었던 수용시설을 분석하였다. 수용시설의 목적과 규정, 현황, 여성들의 수용 과정과 퇴소 이후 상황을 새로운 자료로 밝힐 수 있었다. 여성 수용시설은 보호, 교도, 자활을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통제와 낙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시설 운영과정에서는 젠더 특성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심각하였고,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이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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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저자 :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2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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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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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저자 : 노선희 ( Roh Sun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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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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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 무장대 출신자의 과거청산 경험을 사례로

저자 : 고성만 ( Koh Sung-m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3-2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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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견인책이자 주요한 성과물로 의미 규정되어 왔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다양한 기념사업은 새롭게 결정되는 '희생자'의 수, 추가로 각명되는 '희생자'의 기념비와 같은 양적 성장을 순항하는 과거청산의 희망적인 시그널로 홍보하며 4·3의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려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희생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과거청산 슬로건의 실증성을 제고하는 데에도 역할 해왔다. 그러나 4·3의 다종다양한 주체들 모두가 이러한 발전 모델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으로 분류되는 무장대 출신자들의 사례를 통해 '희생자'가 단순히 추가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되고 활용되어 온 점을 밝힘으로써 '폭도에서 희생자로'와 같은 과거청산의 성장주의적 논법을 재검토하는 데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됐던 4·3 '희생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가역적 지위를 갖는 집합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장대 이력을 이유로 '희생자' 자격이 취소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희생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선별과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다시 심사대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가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종래의 연구들 역시 시야의 확장과 관점의 갱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은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의 유동적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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