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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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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The Construction of Compulsory Protection and the Prostitute Guidance Project in 1950-60s

김대현 ( Kim Daehyun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3월
  • : 7-59(53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9.1


목차

1. 들어가며
2. ‘요보호’와 여성 처벌의 논리
3. ‘요보호여성’ 수용시설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4. 나오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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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Many prostitute women between the 1950-60s in South Korea endured summary judgment rather than formal penal procedures. However, social punishments as protracted through the yoboho yeoseong (要保護女性; compulsory protection of women) policies, included prostitute women who received heavier than normal juridical punishments. First, yoboho yeoseong implicated women who engaged in yunrak (淪落; ‘immoral’), which led to their regulation via the security measures(保安處分) of the time. Second, the government confined these women to detention facilities where they had to adhere to ‘vocational guidance.’ Finally, the academic discourse at the time defined women’s psychological characteristics in pathological terms. From the 1950s,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operated detention facilities in line with other social work projects at that time. The enactment of the Act on Prevention of Prostitution in 1961 further institutionalized management with prostitution district designations and the creation of more detention centers. The Prostitute Guidance Countermeasure Committee during the Park Chung-Hee Regime and organizations acting as arms of the government also expanded policing efforts with the infiltration and prosecuting intermediary exploitation and arbitrary violence. These organizations constituted a significant part of the multi-layered dominance structure over the prostitution districts, which worked alongside local police offices and prostitute procurers. Established in 1961, the Seoul Municipal Woman Protection Guidance Office (서울市立婦女保護指導所) for the detention of yoboho yeoseong had dual-purpose of correctional and welfare institution. The program of those institutions was constituted by religious teachings as well as ‘scientific approaches’ in accordance with the social work discourse at the time. It led to prevalent attempts to escape from the institutions throughout the 1960s, for being in ‘protection’ was the same as being punished to these women. The Prostitute Guidance Countermeasure Committee (淪落女性善導對策委員會) and managers of the yoboho yeoseong institutions repeatedly tried to find the causes of yunrak from personal and psychological characteristics by psychiatric measures, which were commonly introduced into the social work at the time. In conclusion, the process of systemized institutionalization of yoboho yeoseong around the detention centers and the local communities, and the pathologization of the institutionalized women were the violence created by the society as well as the government, and it shows various societal influences fabricated from the legal system of prostitution by the framework of ‘Toleration-Regulation Regime’.

UCI(KEPA)

I410-ECN-0102-2022-300-000568326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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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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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융희연간의 통계체계 구축과 농업통계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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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금껏 연구된 바 없는 갑오개혁기부터 보호국기까지의 정부통계에 대한 것이다. 갑오개혁 이래 '통계'는 정부의 일상적 문서행정의 일부로 규정되었으나, 고종 재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전통적 관료제의 보고체계도 여전히 작동했지만, 그런 정보들은 거의 공간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순종 즉위 이후, 일본 세력에 의해서다. 메가타 쥬타로 재정고문부의 인력과 노하우를 물려받은 탁지부가 한발 앞서 통계체계를 구축하고, 인쇄된 숫자의 작은 '쇄도'를 만들었다. 1908년부터 탁지부는 징세기구의, 농상공부는 지방행정기관의 인력을 동원해서, 경쟁적으로 조사를 하고 통계를 집계했다. 탁지부는 재정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 걸친 통계서를 다수 간행했고, 농상공부는 일본인 이민 유치를 위해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제작했다. 물론 초창기의 통계, 특히 농업통계는 매우 부정확·불완전했다. 조사원의 훈련도 없었고 현장에서 표본추출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 같지도 않다. 조사와 통계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조사·통계의 확장이 식민지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점이 큰 한계가 되었을 것이다.


This article traces the history of government statistics from the Gabo Reform (1894) to the protectorate period (1906~1910), a topic which has not yet been studied. Since the Gabo Reform, “statistics” were defined in regulations as part of the government's routine administration, but there was no significant achievement in government statistics during the Gwangmu era (1897~1907). The traditional bureaucratic reporting system still worked, but little information was published. It was from the Yunghee era (1907~ 1910) that change began. However, this change was led by the Japanese. The Ministry of Finance (Takjibu), which inherited the personnel and know-how of Megata Jūtarō's (目賀田種太郞) Bureau of Financial Advisers, established a statistical system one step ahead of other ministries and created a small “avalanche” of printed numbers at this time. Since 1908, the Ministry of Finance and the Ministry of Agriculture, Commerce and Industry (Nongsanggongbu) competitively conducted investigations and compiled statistics. The former mobilized the manpower of the tax collection organization, and the latter mobilized the manpower of local administrative agencies. The Takjibu published a number of statistical periodicals, not only for finance, but also for administration as a whole, and the Nongsanggongbu produced brochures about Joseon to attract Japanese immigrants. Of course, these early statistics, especially agricultural statistics, were very inaccurate and incomplete. The investigators were barely trained, and sampling and investigation at the survey site were unlikely to have been carried out properly. The people had little understanding of surveys and statistics, and above all, the fact that the expansion of surveys and statistics was linked to the progress of colonization would have served as a major lim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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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건당국의 신체 및 사회에 대한 무균화 기획과 질병 낙인의 지속 ― 한센병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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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한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과정과 이유로 인해 10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강고히 지속되었는가를 세균설이라는 의료지식과 이에 근거한 보건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 세균설과 이에 근거한 엄격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과 그 결과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 과정을 선행연구와 의학 보고서 및 논문, 신문자료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드러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과 낙인과 차별은 광복 이후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개발과 사용으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정부와 의료전문가들은 이들을 계속 '환자'로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회에 숨어 있는 신환자들을 색출하여 통제하기 위해 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완치된 이들의 삶을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내부와 사회 내의 균 제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이러한 보건당국의 무균화 기획과 이로 인한 질병 낙인의 지속은 코로나19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현재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where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faced by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in South Korea originated, and the causes and processes that have maintained it for nearly 100 years. It focuses on the medical knowledge of germ theory and the health policies based on it. The introduction of a strict policy of controlling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which was based on germ theory,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this caused is clarified by analyzing various sources of historical data, including previous studies, medical reports, medical papers, and newspaper materials. Both leprosy patient control policies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continued in different forms even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ism. With the development and use of effective treatments, leprosy has become a curable disease, but governments and healthcare professionals have perceived them as “patients” and created new institutions to monitor and control them. In addition, a system was developed to identify and control undetected patients in society. However,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has remained strong, as all these new systems focused only on the removal of bacteria inside the individual's body and within society, rather than considering the lives of those who were completely cured. The history of the 'germ free' project led by health authorities and the resulting persistence of stigma is expected to provide lessons for contemporary Korean society as it deals with the experience of COVI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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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신체제(1972-1979) 하 '좌익수' 전향정책의 역사정치적 성격

저자 : 김동춘 ( Kim Dong-ch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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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사상범, 수감 좌익수에 대한 전향공작은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감옥에서 징벌적 전향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특히 유신 체제에서 전향공작은 더욱 폭력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폭력과 고문까지 가하면서 좌익수들에게 전향을 압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접촉할 수 없는 특별 사동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각은 감옥 밖에서는 물론 감옥 안에서도 주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이들의 비전향 상태에 대해 느낀 '위험'은 실제 정치적 위험보다는 수백 명의 비전향수가 풀려날 경우, 대북 관계에서 남한 체제의 정당성과 대북 이념적 우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신앙 개종을 요구하는 전향 공작은 멀리는 천황제 하의 일본의 전향 정책, 특히 일제 말 전시파시즘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전향공작이 갱생, 사회복귀를 지향하는 사회통합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의 전향공작은 징벌적 성격으로 일관했고, 폭력과 강압에 주로 의존하였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반공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좌익수 대상 전향공작은 '통일'과 '민족해방'의 '진실성'에 확신을 가진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저항에 직면했다.


The policy of conversion for political prisoners in South Korea continued regardless of changes in government. The policy of conversion developed up to using the naked violence after the approval of the Yushin constitution. Why did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demand written confessions of conversion from leftist prisoners and even resort to violence to secure them? As they were incarcerated in special prisons where even other prisoners could not contact them, political prisoners' ideologies could not affect any other segments of society. The 'danger' that the Park Chung-hee regime anticipated was not a real political one, but a threat to its ability to assert comparative superiority over North Korea. The regime worried that if hundreds of political criminals were released with unconverted pro-North-Korean positions, that would threaten the superiority or honor of the South Korean system in the context of its competition with North Korea. The Park Chung-hee government's conversion policy originated from Imperial Japan's system of Peace Preservation Law and Tenno, both of which compelled thought criminals to convert from a rebellious 'religion' to a state-religion, anticommunism and capitalist ideology. While the Japanese conversion policy had focused on reeducation and rehabilitation, South Korea's persisted in punishing or asking for total surrender from leftist prisoners. That kind of policy could not triumph over the stubborn authenticity and inner sense of morality possessed by the leftist political priso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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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사회학사(제도사)의 주요 변곡점으로서 1975년의 의미 ― 충남대학교 사회학과의 설치와 그 파급 효과에 대하여

저자 : 김필동 ( Kim Pil-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5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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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서 사회학과는 1946년 서울대학교의 개교와 함께 처음 설치되었으나, 다른 대학으로의 확산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설치되었던 학과의 폐과도 이어져서 1974년까지 사회학과가 있는 대학은 전국에 5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5년 충남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이듬해부터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사회학과의 설치가 이어졌고, 1979년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1980년대 초 사회학과의 수는 전국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75년 충남대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것은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에 대해 학문적 호감을 갖고 있던 박희범 총장이 낙후되어 있던 충남대 개혁의 방법론의 하나로 사회과학의 기초 학문인 경제학과와 사회학과의 설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 총장은 우수한 교수진의 충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1976년부터 다른 주요 국립대학에 사회학과가 설치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런 파급 효과는 일부 사립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사회학은 1975년에서 1983년 사이에 제도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한편 1975년은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정책적 대응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점에서 나타난, 지방대학 육성이라는 대학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사회학이란 학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요가 제고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동의 조건 하에서, 향후 일어날 연쇄 반응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선례의 축적은 1980년대 초 대학팽창의 시기에 주요 사회계 학과 중에서 사회학과의 증설이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Sociology was first established at Korean university in 1946 with the opening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but the spread to other universities was very slow. As a result, there were only five universities nationwide with sociology department until 1974. However, from 1975, when the sociology department was established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the number of sociology departments began to increase, first mainly at major national universities outside Seoul, then across the country in the early 1980s after political upheavals in 1979 and 1980.
The sociology department was established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in 1975 because President Park Hee-beom, an economist who had academic affinity for sociology, pushed for the establishment of economics and sociology departments, the basic social sciences, as a methodology for university reform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In addition, Park devoted himself to recruiting excellent faculty members. The establishment of Chungnam National University's sociology department opened the door for the establishment of sociology departments in other major national universities after 1976, and this ripple effect affected some private universities too. As a result, sociology was able to greatly expand its institutional foundation between 1975 and 1983.
Meanwhile, 1975 was also the time when a fundamental change in university policy - the fostering of local universities - emerged. This was a period when changes in the socio-economic structure of Korean society were accelerating and social policy responses were progressing rapidly. It was also a time when social awareness and demand for sociology increased. Ther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sociology department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was the first step in a chain reaction driven by structural change. The accumulation of precedents led sociology to have the highest rate of expansion among major social science departments in the early 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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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포퓰리즘, '국민주권'의 변형을 지향하는 정치이념

저자 : 윤종희 ( Yoon Jong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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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후,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을 촉발한다.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우려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대부분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것에서 비롯된다. 기존 연구들은 포퓰리즘으로 지칭되는 사례들에서 공통의 특성을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개념을 정의한다. 그런데 이 같은 방식은 너무도 많은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외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기하학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 발생원인에 반영하여 개념을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의 적대적 대립물로 구성된 현실의 '인민'이 주권자임을 주장하면서 대표제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정치이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기 때문에 대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볼 수 있다.


After the global financial crisis, populism spreads around the world, sparking debates about the future of democracy. Some fear that it will destroy the values and order of democracy, while others expect that it will help realize 'true' democracy. Most of these conflicting evaluations stem from the vague definition of populism. Existing studies define the concept by deriving key characteristics from representative cases. However, this method includes too many political phenomena in the category of populism. Instead, this study, according to the method of geometry, defines a concept based on the structural (generating) cause. Populism can be defined as a political ideology that seeks to overthrow representative democracy while claiming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 as a real substance constructed through hostility to the 'elite'. It actually denies the principle of popular sovereignty. Populism, therefore, can be seen as a serious threat to the democratic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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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저자 : 김대현 ( Kim Dae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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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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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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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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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저자 : 정다혜 ( Jeong Dahy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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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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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80년대 사회정화와 여성 수용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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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회정화'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들이 사회정화의 주요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제하여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으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여성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 인식과 정책에서 여성이 주요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1960~80년대에 여성 통제의 주요 방식이었던 수용시설을 분석하였다. 수용시설의 목적과 규정, 현황, 여성들의 수용 과정과 퇴소 이후 상황을 새로운 자료로 밝힐 수 있었다. 여성 수용시설은 보호, 교도, 자활을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통제와 낙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시설 운영과정에서는 젠더 특성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심각하였고,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이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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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저자 :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2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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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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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저자 : 노선희 ( Roh Sun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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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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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 무장대 출신자의 과거청산 경험을 사례로

저자 : 고성만 ( Koh Sung-m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3-2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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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견인책이자 주요한 성과물로 의미 규정되어 왔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다양한 기념사업은 새롭게 결정되는 '희생자'의 수, 추가로 각명되는 '희생자'의 기념비와 같은 양적 성장을 순항하는 과거청산의 희망적인 시그널로 홍보하며 4·3의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려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희생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과거청산 슬로건의 실증성을 제고하는 데에도 역할 해왔다. 그러나 4·3의 다종다양한 주체들 모두가 이러한 발전 모델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으로 분류되는 무장대 출신자들의 사례를 통해 '희생자'가 단순히 추가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되고 활용되어 온 점을 밝힘으로써 '폭도에서 희생자로'와 같은 과거청산의 성장주의적 논법을 재검토하는 데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됐던 4·3 '희생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가역적 지위를 갖는 집합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장대 이력을 이유로 '희생자' 자격이 취소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희생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선별과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다시 심사대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가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종래의 연구들 역시 시야의 확장과 관점의 갱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은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의 유동적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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