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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ㆍ퇴계학(退溪學)의 교차와 절충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형제의 삶과 학문-

The Intersection and Compromise of Nammyeong Studies and Toegye Studies

김학수 ( Kim Hak-su )
  • : 청계사학회
  • : 청계사학 2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12월
  • : 87-136(50pages)
청계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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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家學淵源과 교육환경 : 詩敎ㆍ書敎의 家庭學
3. 月潭 金廷龍(1561~1619)의 관료적 삶과 학문
4. 菊園 金廷堅(1576~1645)의 처사적 삶과 학문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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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론적 관점에서 볼 때, 김정룡ㆍ정견 형제는 김담수에 의해 확립된 ‘서계가학’이라는 종적 지식과 ‘영남학[퇴계ㆍ남명학]’이라는 횡적 학문을 수렴함으로써 굴기한 인재들이었다. 이 점에서 형제는 서계가문이 낳고 영남이 기른 인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형제는 자신을 육성한 종횡의 지식과 학문의 수혜자로 만족하지 않고 치열한 자기 계발을 통해 크게는 조선, 작게는 영남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촉구하는 자극제로 역할했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의미는 컸다.
지금까지 김정룡의 역사적 위상이 문과합격자 통계처리 대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김정견의 경우 한강ㆍ우복문인 현황표에 이름이 등록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면, 이제는 이들 형제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7세기 영남의 사림사회에 김정룡ㆍ정견 형제가 반듯하게 존재하며 시대적 역할에 충실했고, 그것은 그들만의 특출함 때문이 아니라 자녀교육에 평생을 부심했던 아버지의 애착이 있었음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논고의 작은 성과이다.
From the theory of woof and warp perspective, Kim Jeong-ryong and Jeong-gyeon brothers were talented people who led by converging the longitudinal knowledge of family academic tradition of Seogye established by Kim Dam-soo and the lateral learning of Yeongnamhak (Toegyehak, Nammyeonghak). In this regard, the brothers were the talents that born into Seogye family and raised by regional infrastructure of Yeongnam. Above all, the brothers were not satisfied with their knowledge and studies, but rather acted as a stimulant for the social and cultural development of Joseon and Youngnam through their intense self-improvement.
So far, Kim Jeong-ryong 's historical status has not exceeded the target of statistical processing of successful examination candidate, and in the case of Kim Jeong-gyeon, he should be satisfied with the registration of names on the status table of disciple of Hangang(寒岡) and Ubok(愚伏), but now the viewpoint on these brothers needs to be fundamentally adjusted. In this part, we should recognize that Kim Jeong-ryong and Jeong-gyeon brothers exited with upright attitude in the 17th century in Sarim society in Yeongnam, and that they were faithful to the role of the times, not because of their own prominence , but because of their father's attachment to their child- ren's education. This is the small achievement of this disqui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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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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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98-49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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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4-2020
  • :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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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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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세기 역관(譯官)의 세전 실태에 대한 검토 -『종친록(宗親錄)』을 중심으로-

저자 : 이상규 ( Lee Sang-gyu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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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에 간행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 문무 2품 첩(妾)의 증ㆍ현손 대에 잡과(雜科)에 응시한다는 조항은 조선왕조의 잡과 지망생을 충원하기 위한 방침의 결정판이었다. 본래 양인(良人) 자제뿐 아니라 양반 자제들도 잡과 생도에 입속하게 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신분 의식이 굳어짐에 따라 양인 자제들도 잡과 응모를 기피하였고 성종~연산군대에 천첩 자손들이 중인 관서에 입속하게 되었다. 기존 양첩(良妾) 소생들이 반대하였지만 마침내 천첩(賤妾) 소생도 잡과 관서에 입속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역관(譯官)을 비롯한 의관(醫官), 음양관(陰陽官), 율관(律官) 등의 중인 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였고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통설이었고, 장서각 소장『종친록(宗親錄)』에 기재된 역관, 의관, 관상감 관원, 율관 등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역시 기존 통설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잡과 내에서 역관의 세전은 같은 전공으로 또는 다른 전공으로든 2대에 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드물게 3대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미진한 느낌이 있어 16세기의 잡과단회방목(雜科單回榜目)을 수집하여 역관 인명을 찾고 그것을 다시 같은 시기의 실록에서 역관 인명을 찾았다. 더 나아가 중종대부터 광해군대까지 연행록에서 역관 인명을 찾았다. 잡과단회방목에 나온 역관 인명이 실록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었고 실록에서 나온 인명이 연행록(燕行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3대 이상의 역관 세전은 없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역관을 발판으로 해서 무과(武科), 생원(生員) ㆍ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신분적 성장을 도모하는 형편이었다.
아직 아버지 할아버지가 역관이면 손자 대에서 역관을 포함한 기술 관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는 아니었다. 약간의 사회적 유동성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역관 세전은 천녕현씨 가계, 남양홍씨 중인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광해군 시기부터 나타난다. 16세기 역관의 세전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 요인의 해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The provision in Daejeonhusokrok(大典後續錄) published in 1543 that great-grandson and great-great-grandson of concubine of the second ranked civil and military functionaries can apply for Chapkwa(雜科) was the arrangement for nurturing applicants for Chapkwa. There was a provision that not only sons of Yangin(良人) but also sons of Yangban(兩班) can enter to the institute for studying Chapkwa, but as the consciousness of social status was emphasized, sons of Yangin avoided entering to the institute for Chapkwa, and sons of Cheonchp (賤妾, concubine of low birth origin) in the days of King Seongjong to King Yeonsan entered to the institute for Chapkwa offices. Despite the opposition of the sons of of Yangchup (良妾, concubine of Yangin origin), finally sons of Cheonchup could enter to the institute for Chapkwa offices.
In the 16th century, there was being formed the class of Chungin such as medical officer(醫官), astromical officer(陰陽官) and judicial officer(律官), but was not formed fully yet according to the commonly accepted theory. The families of the interpretation officers, medical officers, Gwansanggam officers, judicial officers, etc. that were recorded in Jongchinrok(宗親錄) which was stored in Jangseogak show that they were not different from the commonly accepted theory. Interpretation officers in Chapkwa were mostly succeeded to the following generation by means of same majoring or different majoring, and some were succeeded to the third generation.
However, this study collected works of Jabkwadanhuibangmok(雜科單回榜目) of the 16th century to find names of interpretation officers and also to find name of interpretation officers in the his- tory records of the same period. Furthermore, this study searched for names of interpretation officers in Yeonhaengrok(燕行錄) from King Jungjong to King Gwanghaegun. The names of interpretation officers appearing in Jabkwadanhuibangmok were found in the history records, and the names which appeared in the history records did not appear in Yeonghaengrok. Likewise, there were no succession of interpretation officers for three generations or more. As seen in the example of Suneon Hong, an interpretation officer, who made achievements in Jonggyebyeonmu(correcting the Chosun Dynasty's genealogy) from the 16th to 17th century, people raised their social status from the interpretation office to the military examination(武科), classics licentiate(生員), literary licentiate(進士), and civilian service examination (文科).
It was not a society where if the father and grandfather were still in adversity, they had no choice but to choose technical posts, including those in the grandchild family. It should be said that there was some social fluidity. As can be seen from the families of Chunnyeong-hyeon and Namyang Hong, the official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began to emerge from the period of King Gwanghaegun.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as hereditary phenomenon in the 16th century, and the cause was not explained.

2임진왜란시 영천성(永川城) 수복 전투와 그 의의

저자 : 장준호 ( Jang Jun-ho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9-8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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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은 경상좌도의 巨鎭인 경주부와 대구진과 접하고 있는 곳으로 교통상의 중요한 요지였다. 특히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대구와 영천을 지나고 있어, 영천은 대구와 함께 내지 방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조선의 지방 군사 체제인 익군체제와 진관체제 하에서 영천은 내륙 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을묘왜변 이후 군사체제가 제승방략으로 변경됨에 따라 영천은 경상좌도 내륙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군사적 위치를 상실하였다.
임란왜란 초기 영천은 일본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후속 일본 장수가 영천성에 주둔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 활동으로 경상우도에서 의병 창의가 이어졌고, 이들이 경상우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다. 한편 경상좌도 영천에서도 권응수ㆍ정세아ㆍ정대임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 의병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절제를 요청하여 의병 창의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권응수를 중심으로 한 영천의 의병부대는 주변 지역에 격문을 보내 合陣을 독려하였고, 인근 지역 의병장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더 나아가 관군 장수들이 합류하면서 조직과 병력을 보다 강화하였다. 영천 의병부대는 1592년 7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영천성 탈환 작전을 돌입하였다. 영천의 의병장들은 지형과 지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천성 내부의 일본군의 동향을 충분히 파악하였다. 또한 火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성 밖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는 방법으로 일본군의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권응수를 중심으로 한 영천의 의병진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영천성 수복 전투는 임진왜란의 전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 임진왜란기 최초로 일본군에게 빼앗았던 邑治를 탈환한 전투였다. 둘째, 경상좌도의 의병 창의와 활동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셋째, 일본군의 兵站線을 교란하고 일본군의 점령 정책에도 타격을 가한 전투였다. 이처럼 영천성 수복 전투는 경상좌도에서 조선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에 충분했고, 경상좌도의 거진인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초전으로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영천성 수복으로 영천이 갖는 군사적 중요성이 재차 부각되었고, 이후 경상좌도 방위 활동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Yeongcheon was an important transportation hub in the Gyeongsangjwado area, bordering Gyeongju-bu and Daegu-jin. In particular, as Geumho River, a tributary of the Nakdong River, passed through Daegu and Yeongcheon, Yeongcheon was a very important base for internal defense with Daegu. Under the Ikgun system and Jingwan system, the local military system of Joseon, Yeongcheon was highlighted as an important base for inland defense. However, Yeongcheon lost its military position as a stronghold for the inland defense of Gyeongsangjwado as the military regime was changed to a strategy for Jeseung Bangryak(制勝方略) after Eulmyo Invasion. In the early day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Yeongcheon was captured by the troops of Kato Kiyomasa, the 2nd Japanese Army, and a subsequent Japanese general was stationed in Yeongcheon Fortress. Since then, Kim Sung-il's activities have led to the creation of righteous army in Gyeongsangwudo, and they have raised their majors in defeating Japanese troops stationed in Gyeongsangwudo. Meanwhile, Kwon Eung-soo, Jeong Se-ah, and Jeong Dae-im caused righteous army in Yeongcheon, Gyeongsangjwado. The Yeongcheon righteous army unit was officially approved by Kim Sung-il for the creation of righteous army and continued its full-fledged righteous army activities.
The righteous army unit of Yeongcheon, led by Kwon Eung-su, sent a proclamation to the surrounding area to encourage the merger, and led to the participation of the righteous army leader in the nearby area. With the joining of government generals, the organization and troops were more strengthened. In July 1592, the Yeongcheon righteous army began operations to recapture Yeongcheon Fortress, which was occupied by the Japanese army. The heads of the righteous army in Yeongcheon fully grasped the trends of the Japanese army in Yeongcheon Fortress based on their understanding of topography and geography. It also caused an agitation in the Japanese military by detonating gunpowder outside the fortress despite the lack of proper firearms. On July 27, 1592, the righteous army of Yeongcheon, led by Kwon Eung-su, redeemed Yeongcheon Fortress.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is very important in the war situation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First, it was the first battle to recapture the region that was taken away by the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econd, it provided an opportunity for the creation and activities of righteous army in Gyeongsangjwado to be carried out in earnest. Third, it was a battle that disrupted the Japanese military's line of demarcation and damaged the Japanese occupation policy. As such,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was enough to boost the morale of Joseon troops in Gyeongsangjwado, and was very important as a prelude to the recapture of Gyeongju Fortress, a stronghold of Gyeongsangjwado. With the retake of Yeongcheon Fortress, the military importance of Yeongcheon was highlighted again, and it became an important strategic point fo the defense of Gyeongsangjwado.

3남명(南冥)ㆍ퇴계학(退溪學)의 교차와 절충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형제의 삶과 학문-

저자 : 김학수 ( Kim Hak-su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7-13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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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론적 관점에서 볼 때, 김정룡ㆍ정견 형제는 김담수에 의해 확립된 '서계가학'이라는 종적 지식과 '영남학[퇴계ㆍ남명학]'이라는 횡적 학문을 수렴함으로써 굴기한 인재들이었다. 이 점에서 형제는 서계가문이 낳고 영남이 기른 인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형제는 자신을 육성한 종횡의 지식과 학문의 수혜자로 만족하지 않고 치열한 자기 계발을 통해 크게는 조선, 작게는 영남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촉구하는 자극제로 역할했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의미는 컸다.
지금까지 김정룡의 역사적 위상이 문과합격자 통계처리 대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김정견의 경우 한강ㆍ우복문인 현황표에 이름이 등록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면, 이제는 이들 형제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7세기 영남의 사림사회에 김정룡ㆍ정견 형제가 반듯하게 존재하며 시대적 역할에 충실했고, 그것은 그들만의 특출함 때문이 아니라 자녀교육에 평생을 부심했던 아버지의 애착이 있었음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논고의 작은 성과이다.


From the theory of woof and warp perspective, Kim Jeong-ryong and Jeong-gyeon brothers were talented people who led by converging the longitudinal knowledge of family academic tradition of Seogye established by Kim Dam-soo and the lateral learning of Yeongnamhak (Toegyehak, Nammyeonghak). In this regard, the brothers were the talents that born into Seogye family and raised by regional infrastructure of Yeongnam. Above all, the brothers were not satisfied with their knowledge and studies, but rather acted as a stimulant for the social and cultural development of Joseon and Youngnam through their intense self-improvement.
So far, Kim Jeong-ryong 's historical status has not exceeded the target of statistical processing of successful examination candidate, and in the case of Kim Jeong-gyeon, he should be satisfied with the registration of names on the status table of disciple of Hangang(寒岡) and Ubok(愚伏), but now the viewpoint on these brothers needs to be fundamentally adjusted. In this part, we should recognize that Kim Jeong-ryong and Jeong-gyeon brothers exited with upright attitude in the 17th century in Sarim society in Yeongnam, and that they were faithful to the role of the times, not because of their own prominence , but because of their father's attachment to their child- ren's education. This is the small achievement of this disquisition.

4박창화(朴昌和)(1889~1962)의 궁내성 촉탁 활동

저자 : 정욱재 ( Jeong Uk-jae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7-15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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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궁내청에서 발견된 '박창화 자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그의 촉탁 활동의 일단을 밝히고자 하였다. 『화랑세기(花郞世紀) 』의 위작자로 학계에 널리 알려진 박창화는 1920년대 이후 약 20년을 일본에 체류하면서 약 10년 가까이 궁내성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박창화 자료'는 비록 1937년 10월 초순부터 12월 초까지의 짧은 기간의 활동만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가 궁내성 도서료 촉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당시 궁내성 도서료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간본(朝鮮刊本)의 정리ㆍ조사하는 일환으로 조선간본의 상호 대조(對照)ㆍ검교(檢校)를 위해 1937년 10월 초순 이후에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파견되었고, 그는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138종 1,080책의 조선간본을 열람하며 상세히 조사하였다.
'박창화 자료'는 도쿄에 있는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조선본을 조사ㆍ열람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로 그가 온축한 학문적 지식도 알려주는 자료이다. 특히 고활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서지학 연구사적 관점에서 박창화를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박창화 자료'는 그동안『화랑세기』 진위논쟁에서 벗어나서 박창화의 개인 활동에 주목하여 그의 새로운 면을 밝히는 개인 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박창화 자료'는 여전히 일본 궁내청에 한국학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 관련 자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This article was intended to reveal a group of Japanese colonial era's activities, focusing on the 'Park Chang-hwa materials' discovered at the Japanese Imperial Household Agency. Park Chang-hwa, widely known in academia as making a pseudograph of Hwarang segi (Annals of the Hwarang 花郞世記) and worked as a part-time employee of Japanese Imperial Household Ministry for nearly 10 years. The 'Park Chang-hwa materials' shows only a short period of activities from early October to early December 1937, but it allows us to fully infer what activities he has done as a part-time employ in library of Japanese Imperial Household Ministry. As part of the compilation and investigation of the Joseon-published book collection at the time, he was dispatched to Jongyeonggak Archives in early October 1937 for the mutual comparison and inspection. He examined 1,080 Joseon books of 138 kinds in detail in Jongyeonggak Archives.
'Park Chang-hwa materials' is a report of inspecting the Joseon version stored in the Jongyeonggak Archives in Tokyo, and also informs his stock of academic knowledge. In particular, his explanation of the Early Type suggests that it is also necessary to consider Park Chang-hwa from the perspective of history of bibliography. In other words, 'Park Chang-hwa materials' can be used as a personal research material that sheds light on Park Chang-hwa's personal activities and his different sides. Furthermore, the 'Park Chang-hwa materials' paradoxically shows that data related to Korea, which is still waiting for the help of the Korean academia, is hiding at the Japanese Imperial Household Agency.

5제주 영등굿의 기원에 대한 재고찰

저자 : 강문종 ( Kang Mun-jong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5-172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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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굿의 기원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제주의 풍속 내용 중에 2월 1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지는 '燃燈節'과 1602년에 제주인 문계명이 구연하고, 이를 김상헌이『남사록』에 기록한 연등절 관련 전설에서 찾았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대로 영등굿의 기원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시풍속의 성격을 갖고 있는 연등절(燃燈節)과 영등굿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대로 2월1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지는 귀덕과 김녕 등의 마을에서의 제사와 애월에서 행해졌던 약마희(躍馬戱), 그리고 각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연행된 행사 및 제주 각 각의 가정에서 자유롭게 행해지는 잔치 등은 세시풍속으로서의 연등절(燃燈節)에 행해지는 다양한 퍼포먼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연행되는 영등굿의 문헌적 기원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구분하고, _남사록_에서 전해지는 연등절(燃燈節)관련 전설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이는 구비전승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기록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술문화의 영역에서 그 기원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槎', '躍馬戱', '燃燈 및 燃燈節', '燃燈神' 등을 영등굿의 내용과 제차 등과 무리하게 연결시켜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연관된 퍼포먼스가 설령굿의 형태였을 지라도 모두 제주 고유의 연등절(燃燈節)의 전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바람과 어로 그리고 농경의 영역에서 이어진 영등굿의 전통은 연등절의 전통과는 다른 층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등굿의 기원과 계승의 부분에서는 기록문헌보다 구비자료와의 관련 양상이 더 중요해 보인다.


The origin of Yeongdeung-gut was found in the part of the customs in Jeju in Newly Augmented Geographical Survey of the Territory of the Eastern Kingdom (Sinjeungdonggugyeojiseungnam 新增東國輿地勝覽) that the legend related to Yeondeungjeol(燃燈節) which was performed from February 1 to 15 and also found in the record of Yeondeungjeol legend narrated by Jeju man named Mun Gye- myeong in Namsarok (南槎錄) which was written by Kim Sang-heon. However, as discussed earlier,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origin of Yeongdeung-gut. First of all, it is necessary to distinguish Yeongdeungjeol from Yeongdeunggut, which has the characteristics of a seasonal custom. In other words, as described in Newly Augmented Geographical Survey of the Territory of the Eastern Kingdom (Sinjeungdonggugyeojiseungnam 新增東國輿地勝覽), it needs to be understood as various performances on the Yeondeungjeol as a seasonal custom rituals held in villages such as Gudeok and Gimnyeong from February 1 to 15 and Yakmahee(躍馬戱) held in Aewol.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s events taken from each temple and festivals held in each household in Jeju Island as various performances held on the Yeondeungjeol as a seasonal custom.
It seems desirable to distinguish the literary origin of Yeongdeung- gut from the stories in Newly Augmented Geographical Survey of the Territory of the Eastern Kingdom and find it in the legend related to Yeondeungjeol in Namsarok. Of course, this is characterized by the succession of the oral heritage and it may be possible to further expand its origin in the realm of oral culture that cannot be found in the text culture. In particular, there is no need to forcibly link sa(槎), Yakmahee(躍馬戱), Yeondeung(燃燈), Yeondeungjeol(燃燈節), the God of Yeongdeung(燃燈神) with the contents of Yeongdeung-gut to interpret it. Even though the performance related to the contents of Newly Augmented Geographical Survey of the Territory of the Eastern Kingdom was in the form of shamanic ritual, it is desirable to understand all of them as the traditions of Yeondeungjeol, which is unique feature of Jeju. Furthermore, the tradition of Yeongdeung-gut which continued in the realm of wind, fishery and agriculture, need to be understood at a different level from the tradition of Yeondeungjeol. In terms of the origin and succession of Yeongdeung-gut, the related aspects of oral tradition materials seem more important than the written records.

6藏書閣 所藏 朝鮮前期 金屬活字本의 藏書印과 刊行 年代

저자 : 이재준 ( Lee Jae-ju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21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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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의 현황을 파악하고 장서인 분석과 인출시기를 고찰한 것으로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은 모두 58종 86책으로 조사되었다. 장서각 소장 도서 12만점의 0.07%를 차지하는 비율로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의 희소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58종의 서적을 인출하는데 사용된 활자의 종류는 癸未字, 庚子字, 甲寅字(丙辰字), 乙亥字, 乙酉字, 甲辰字, 癸丑字, 丙子字, 庚辰字, 乙亥字體經書字 등 11종으로 庚午字, 丁丑字, 戊寅字 등 3종을 제외한 조선전기에 주조된 금속활자의 표본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金漢哲, 魚世恭, 南袞, 趙世英, 曺倬, 李涵, 李燦, [閔維重], 鄭維岳, 洪光一, 金正喜, 李秉直, 李謙魯, 金元龍, 安春根, 尹錫昌, 朴東燮 등 조선전기부터 현대의 인물까지 17인의 장서인을 분석하고 소장자 정보를 정리하였다.
넷째, 장서인 및 기타 정보를 바탕으로 甲寅字本『史記』ㆍ『朱文公校昌黎先生集』, 乙亥字本『晉書』, 甲辰字本『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 庚辰字本『小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 등 성종 연간부터 선조 연간까지 광범위하게 추정되고 있는 문헌 5종의 인출 시기를 새롭게 고찰하였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collection of Jangseogak Archives and also examines ownership stamps and the date of printing, by investigating metal movable type books of the early Chosŏn period that are held at the archives. The following is a summary of the principal information.
First of all, it is estimated that Jangseogak Archives has a collection of eighty-six volumes which include fifty-eight different types of books. This collection accounts for 0.07% of the 120,000 volumes in Jangseogak Archives, which indicates the scarcity of metal prints during the early Chosŏn period.
Secondly, this study reveals that the fiftyight types of book were printed with eleven kinds of movable type, including Kemi-ja (癸未 字), Kyŏngja-ja (庚子字), Kabin-ja (甲寅字)/Pyŏngjin-ja (丙辰字), Ŭlhae-ja (乙亥字), Kabjin-ja (甲辰字), Kyechuk-ja (癸丑字), Pyŏngja-ja (丙子字), Kyŏngjin-ja (庚辰字), Ŭlhaejache-Kyŏngsŏ-ja (乙亥字體經書 字), and so on. Except for Kyŏngo-ja (庚午字), Chŏngch'uk-ja (丁丑字) and Muin-ja (戊寅字), the Archive holds most of the metal movable type minted in early Chosŏn.
Thirdly, this paper analzyes the ownership stamps of seventeen figures from the early Chosŏn period to the present, including Kim Han-ch'ŏl, Ŏ Se-gong, Nam Gon, Cho Se-yŏng, Cho T'ak, Yi Ham, Yi Ch'an, Min Yu-jung, Jeong Yu-ak, Hong Gwang-Il, Kim Chŏng- hŭi, Yi Pyŏng-jik, Yi Kyŏm-ro, Kim Wŏn-ryong, An Chun-gŭn, Yun Sŏk-chang, and Pak Dong-sŏb, and also organizes the information of these owners.
Fourthly, this paper examines the extensively estimated printing periods of five kinds of books, from the period of King Sŏngjong to the period of King Sŏnjo, with a new approach based on the ownership stamp and other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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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세기 역관(譯官)의 세전 실태에 대한 검토 -『종친록(宗親錄)』을 중심으로-

저자 : 이상규 ( Lee Sang-gyu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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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에 간행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 문무 2품 첩(妾)의 증ㆍ현손 대에 잡과(雜科)에 응시한다는 조항은 조선왕조의 잡과 지망생을 충원하기 위한 방침의 결정판이었다. 본래 양인(良人) 자제뿐 아니라 양반 자제들도 잡과 생도에 입속하게 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신분 의식이 굳어짐에 따라 양인 자제들도 잡과 응모를 기피하였고 성종~연산군대에 천첩 자손들이 중인 관서에 입속하게 되었다. 기존 양첩(良妾) 소생들이 반대하였지만 마침내 천첩(賤妾) 소생도 잡과 관서에 입속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역관(譯官)을 비롯한 의관(醫官), 음양관(陰陽官), 율관(律官) 등의 중인 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였고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통설이었고, 장서각 소장『종친록(宗親錄)』에 기재된 역관, 의관, 관상감 관원, 율관 등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역시 기존 통설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잡과 내에서 역관의 세전은 같은 전공으로 또는 다른 전공으로든 2대에 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드물게 3대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미진한 느낌이 있어 16세기의 잡과단회방목(雜科單回榜目)을 수집하여 역관 인명을 찾고 그것을 다시 같은 시기의 실록에서 역관 인명을 찾았다. 더 나아가 중종대부터 광해군대까지 연행록에서 역관 인명을 찾았다. 잡과단회방목에 나온 역관 인명이 실록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었고 실록에서 나온 인명이 연행록(燕行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3대 이상의 역관 세전은 없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역관을 발판으로 해서 무과(武科), 생원(生員) ㆍ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신분적 성장을 도모하는 형편이었다.
아직 아버지 할아버지가 역관이면 손자 대에서 역관을 포함한 기술 관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는 아니었다. 약간의 사회적 유동성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역관 세전은 천녕현씨 가계, 남양홍씨 중인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광해군 시기부터 나타난다. 16세기 역관의 세전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 요인의 해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임진왜란시 영천성(永川城) 수복 전투와 그 의의

저자 : 장준호 ( Jang Jun-ho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9-8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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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은 경상좌도의 巨鎭인 경주부와 대구진과 접하고 있는 곳으로 교통상의 중요한 요지였다. 특히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대구와 영천을 지나고 있어, 영천은 대구와 함께 내지 방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조선의 지방 군사 체제인 익군체제와 진관체제 하에서 영천은 내륙 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을묘왜변 이후 군사체제가 제승방략으로 변경됨에 따라 영천은 경상좌도 내륙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군사적 위치를 상실하였다.
임란왜란 초기 영천은 일본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후속 일본 장수가 영천성에 주둔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 활동으로 경상우도에서 의병 창의가 이어졌고, 이들이 경상우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다. 한편 경상좌도 영천에서도 권응수ㆍ정세아ㆍ정대임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 의병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절제를 요청하여 의병 창의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권응수를 중심으로 한 영천의 의병부대는 주변 지역에 격문을 보내 合陣을 독려하였고, 인근 지역 의병장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더 나아가 관군 장수들이 합류하면서 조직과 병력을 보다 강화하였다. 영천 의병부대는 1592년 7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영천성 탈환 작전을 돌입하였다. 영천의 의병장들은 지형과 지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천성 내부의 일본군의 동향을 충분히 파악하였다. 또한 火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성 밖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는 방법으로 일본군의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권응수를 중심으로 한 영천의 의병진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영천성 수복 전투는 임진왜란의 전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 임진왜란기 최초로 일본군에게 빼앗았던 邑治를 탈환한 전투였다. 둘째, 경상좌도의 의병 창의와 활동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셋째, 일본군의 兵站線을 교란하고 일본군의 점령 정책에도 타격을 가한 전투였다. 이처럼 영천성 수복 전투는 경상좌도에서 조선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에 충분했고, 경상좌도의 거진인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초전으로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영천성 수복으로 영천이 갖는 군사적 중요성이 재차 부각되었고, 이후 경상좌도 방위 활동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3남명(南冥)ㆍ퇴계학(退溪學)의 교차와 절충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형제의 삶과 학문-

저자 : 김학수 ( Kim Hak-su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7-13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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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론적 관점에서 볼 때, 김정룡ㆍ정견 형제는 김담수에 의해 확립된 '서계가학'이라는 종적 지식과 '영남학[퇴계ㆍ남명학]'이라는 횡적 학문을 수렴함으로써 굴기한 인재들이었다. 이 점에서 형제는 서계가문이 낳고 영남이 기른 인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형제는 자신을 육성한 종횡의 지식과 학문의 수혜자로 만족하지 않고 치열한 자기 계발을 통해 크게는 조선, 작게는 영남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촉구하는 자극제로 역할했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의미는 컸다.
지금까지 김정룡의 역사적 위상이 문과합격자 통계처리 대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김정견의 경우 한강ㆍ우복문인 현황표에 이름이 등록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면, 이제는 이들 형제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7세기 영남의 사림사회에 김정룡ㆍ정견 형제가 반듯하게 존재하며 시대적 역할에 충실했고, 그것은 그들만의 특출함 때문이 아니라 자녀교육에 평생을 부심했던 아버지의 애착이 있었음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논고의 작은 성과이다.

4박창화(朴昌和)(1889~1962)의 궁내성 촉탁 활동

저자 : 정욱재 ( Jeong Uk-jae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7-15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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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궁내청에서 발견된 '박창화 자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그의 촉탁 활동의 일단을 밝히고자 하였다. 『화랑세기(花郞世紀) 』의 위작자로 학계에 널리 알려진 박창화는 1920년대 이후 약 20년을 일본에 체류하면서 약 10년 가까이 궁내성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박창화 자료'는 비록 1937년 10월 초순부터 12월 초까지의 짧은 기간의 활동만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가 궁내성 도서료 촉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당시 궁내성 도서료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간본(朝鮮刊本)의 정리ㆍ조사하는 일환으로 조선간본의 상호 대조(對照)ㆍ검교(檢校)를 위해 1937년 10월 초순 이후에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파견되었고, 그는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138종 1,080책의 조선간본을 열람하며 상세히 조사하였다.
'박창화 자료'는 도쿄에 있는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조선본을 조사ㆍ열람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로 그가 온축한 학문적 지식도 알려주는 자료이다. 특히 고활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서지학 연구사적 관점에서 박창화를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박창화 자료'는 그동안『화랑세기』 진위논쟁에서 벗어나서 박창화의 개인 활동에 주목하여 그의 새로운 면을 밝히는 개인 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박창화 자료'는 여전히 일본 궁내청에 한국학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 관련 자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제주 영등굿의 기원에 대한 재고찰

저자 : 강문종 ( Kang Mun-jong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5-172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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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굿의 기원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제주의 풍속 내용 중에 2월 1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지는 '燃燈節'과 1602년에 제주인 문계명이 구연하고, 이를 김상헌이『남사록』에 기록한 연등절 관련 전설에서 찾았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대로 영등굿의 기원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시풍속의 성격을 갖고 있는 연등절(燃燈節)과 영등굿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대로 2월1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지는 귀덕과 김녕 등의 마을에서의 제사와 애월에서 행해졌던 약마희(躍馬戱), 그리고 각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연행된 행사 및 제주 각 각의 가정에서 자유롭게 행해지는 잔치 등은 세시풍속으로서의 연등절(燃燈節)에 행해지는 다양한 퍼포먼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연행되는 영등굿의 문헌적 기원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구분하고, _남사록_에서 전해지는 연등절(燃燈節)관련 전설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이는 구비전승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기록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술문화의 영역에서 그 기원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槎', '躍馬戱', '燃燈 및 燃燈節', '燃燈神' 등을 영등굿의 내용과 제차 등과 무리하게 연결시켜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연관된 퍼포먼스가 설령굿의 형태였을 지라도 모두 제주 고유의 연등절(燃燈節)의 전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바람과 어로 그리고 농경의 영역에서 이어진 영등굿의 전통은 연등절의 전통과는 다른 층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등굿의 기원과 계승의 부분에서는 기록문헌보다 구비자료와의 관련 양상이 더 중요해 보인다.

6藏書閣 所藏 朝鮮前期 金屬活字本의 藏書印과 刊行 年代

저자 : 이재준 ( Lee Jae-ju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21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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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의 현황을 파악하고 장서인 분석과 인출시기를 고찰한 것으로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은 모두 58종 86책으로 조사되었다. 장서각 소장 도서 12만점의 0.07%를 차지하는 비율로 조선전기 금속활자본의 희소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58종의 서적을 인출하는데 사용된 활자의 종류는 癸未字, 庚子字, 甲寅字(丙辰字), 乙亥字, 乙酉字, 甲辰字, 癸丑字, 丙子字, 庚辰字, 乙亥字體經書字 등 11종으로 庚午字, 丁丑字, 戊寅字 등 3종을 제외한 조선전기에 주조된 금속활자의 표본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金漢哲, 魚世恭, 南袞, 趙世英, 曺倬, 李涵, 李燦, [閔維重], 鄭維岳, 洪光一, 金正喜, 李秉直, 李謙魯, 金元龍, 安春根, 尹錫昌, 朴東燮 등 조선전기부터 현대의 인물까지 17인의 장서인을 분석하고 소장자 정보를 정리하였다.
넷째, 장서인 및 기타 정보를 바탕으로 甲寅字本『史記』ㆍ『朱文公校昌黎先生集』, 乙亥字本『晉書』, 甲辰字本『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 庚辰字本『小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 등 성종 연간부터 선조 연간까지 광범위하게 추정되고 있는 문헌 5종의 인출 시기를 새롭게 고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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