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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1917~1923)

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Spanish Workers’ Organizations, 1917-1923

황보영조 ( Hwangbo Yeongjo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2월
  • : 353-389(37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2.353


목차

Ⅰ. 서론
Ⅱ.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과 제1차 세계대전
Ⅲ. 3월 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Ⅳ. 11월 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Ⅴ.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에스파냐공산당 창당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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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서 노동자 단체들이 특히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실 그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것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서 에스파냐에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독재가 시작되는 1923년까지로 국한하여 다룬다. 이 시기에 그들의 반응과 그 이유가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1917년 러시아혁명은 3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나뉜다. 그리고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권은 곧 이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을 추진했다. 이 시기 유럽에는 또한 1918년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3월 혁명과 11월 혁명, 코민테른 가입 요구 등이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고유의 혁명 이념과 더불어 그들의 반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에 미친 러시아혁명의 영향은 에스파냐공산당 창당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공산당의 창당 과정을 여기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The Russian Revolution in 1917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European intellectuals and workers. It had the same on the Spanish intellectuals and workers. In particular, the Spanish workers’ organizations was influenced more. Here, we may ask how they did respond and why they reacted so. In this paper, we grope for some answers to these questions.
As a matter of fact, we already know some aspects of their responses thanks to some scholars’ studies. However, the reason why they reacted so still requires a detailed analysis.
As we all know, two subsequent revolutions, in March and November 1917, broke out in Russia. The Bolshevik Regime after the Revolution pushed ahead with the formation of the Comintern. In 1917, Europe was also in World War I that came to an end one year later. The Great War, two different Revolutions, joining the Comintern, etc, as well as a diversity of revolutionary ideas that they had, were important factors that had an impact on the spanish workers’ organizations. The analysis of these factors will also provide a synopsis of the impact of the Russian Revolution in the world of Spanish workers’ organizations.
Frankly speaking, we may say that the specific impact of the Russian Revolution on the Spanish Workers’ Organizations manifested in founding the Communist Party of Spain, in 1921. Therefore, we may get to the heart of the process in this paper.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hbvisio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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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1
  • :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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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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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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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Ryu Ui-mok(1785~1833) contracted influenza on January 7, 1799 at the age of 15. The next day, the family of an elder brother of his family, the family of a younger brother of his father, and families of his father's cousins all contracted it at once when his grandfather returned after going out. A few days later, seven of eight governors including the governor of Gyeongsang Province died. The number of deaths reached 400 in Andong and 63,000 in Seoul.
King Jeongjo(正祖) of Joseon determined that it was a national disaster and crisis, taking on relief works first. He gave an order to relieve people to Jinhyulcheong(賑恤廳) on January 13, 1799 and had Yeoje(厲祭) and Wuije(慰祭) held. These were traditional approaches, but they had much influence on the opinions of the people. He also had the bodies of the deceased due to the infectious disease isolated and buried in private land that was owned by people and purchased by the government for the purpose. The regular spring military campaign was suspended altogether. These measures were taken during a period of approximately 20 days.
Under this miserable situation, interesting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It is difficult to trace the origin of an infectious disease. It must have been even more difficult in the traditional society. The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during a severe infectious disease must reflect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Ryu Ui-mok at age 15 called this cold "Hoyeok(胡疫)" writing down what he heard. He believed that the cold was transmitted from China. The government made fast reactions to the influenza spreading around the nation, and the people seemed to have trusted the government.
(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 jeongu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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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1911년 봉천(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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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With the spread of COVID-19 around the world in December 2019, the prevention measures taken by the governments had a significant impact on slowing the spread of COVID-19 in each country. However, not only the national prevention measures, but also the awareness and behavior of citizens who accept prevention measures are very important. In this regard, this paper examines the spread of plague in the northeastern China, the implementation of prevention measure, and the people's response to plague and authorities' prevention measure during 1910-1911.
After an outbreak of plague on October 25, 1910 in Manchouli(满洲里), the plague spread along the railroad to Heilongjiang(黑龍江) and Jilin(吉林) Provinces. In December, it spread to Fengtian(奉天), the political center of the three northeast provinces, and then to Tianjin(天津), Shandong(山東), and Beijing(北京). In Fengtian(奉天), quarantine stations and hospitals were installed to control the source of the plague, and efforts were made to block the transmission route.
When authorities implemented modern prevention measures, people expressed skepticism about western medications and modern prevention measures, due to their conflict with the Chinese conventional traditions, as well as the economic damage such measures cost. However, after the death of a medical missionary, Jackson, experiments that risked the lives of merchants, and authorities' propagation, the people's skeptical perception and behavior changed. People began to protect themselves by preparing effective prevention measures devices on their own. The people's cooperation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prevention success.
Examining the transition of people's skeptical consciousness and resistance to preventions is very important in their success and the modernization of public health in the northeastern China. In addition, examining people's awareness and effort in preventing the plague would give a strong message for the prevention on COVID-19.
(HK Research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 kimhyunsun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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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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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Thucydides did, however, overlook the issue of what kind of leadership should be required in a situation of war and plague, particularly in a plague disaster. Pericles clearly boosted patriotism and nationalism by appealing to traditional distributive justice, religion, and law, while the plague destroyed the traditional values and ideology that held Athens together. However, many people criticized Pericles' leadership in this regard. One such critic was Euripides, who saw Pericles as nothing more than the insane Heracules. Because Heracles mainomenos is a work that emphasizes the prudence-based leadership required in times of war and plague. Given its long history, the plague had a positive impact by allowing for introspection and insight into what is just and how to live.
(Seoul National University, numeni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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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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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This thesis aims to estimate the population sizes over time each region had during the Bronze Age on the basis of settlement data in the Hyeongsan River and aims to trace the population trends and the social structures as the settlement data that have been accumulated recently.
In estimating the population of the Hyeongsan River basin during the Bronze Age, five square meters has been used as the spatial size a person needs according to the generally used average floor size per a person. According to the population estimation results, the population size of the Late Bronze Age turns out 40.7% of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Although the Late Bronze Age witnessed 60% decrease in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in the Hyeongsan River basin, there had been some variations in the basin. That is, there had been the population increases in the central Gyeongju region and the northern Gyeongju region including the Ahngang basin from the Early Bronze Age to the Late Bronze Age, which is an interesting population trend. It is considered that this population increase in the two areas might be related to the integration of settlements including population nucleation by the emerging center located at Gyeongju area. In addition, it might mean that the settlement structures got bigger and more complex. This phenomenon the population increase in the central Gyeongju area might be the dawn of the emergence of the regional polity consisting of the village clusters or settlement networks called 'euprak' because the population increase could stimulate not only diverse social integrations but also long distance trades.
(Youngnam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 mcjin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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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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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Research on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14th reign of King Jinheung(553) has been studied despite the lack of relevant records.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see the general ideas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However, it is also seen that some parts could not have been thoroughly examined when looking at previous research. For instance, it was hardly considered the impact of international activities, was briskly conducted on the foundation of Hwangnyongsa Temple in the King Jinheung era. Therefore, this research will examine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external context.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literature records and archaeological data, it can be seen that the construction plan for Singung - new palace, which had been finished laying the foundation, was changed its usage to a temple. The temple firstly consisted of a huge building with small buildings on the north side and a wall on the rest of the sides. Then, they gradually built Buddhist sculptures and Geumdang(Goden Hall, 金堂). King Jinheung changed the palace plan into the temple because of the emergence of 'Hwangnyong - yellow dragon.' The emergence of the Hwangnyong could be created by combining the Silla's traditionally auspicious creature 'Yong - dragon' with the Chinese auspicious creature to reveal that king Jinheung dominated the Hangang River basin and took over the power in the competitive relationship with the king Seong(聖王) in Baekje. However, Hwangnyongsa Temple's construction took some time to build as Silla was more focused on stabilizing newly secured territories.
The establishment of the Hwangnyongsa Temple by King Jinheung was related to worshiping Buddhism as a policy of Emperor Wu(武帝) of Liang(梁). Like King Seong in Baekje, King Jinheung intended to reveal the royal authority through Buddhism as Emperor Wu did political actions through Buddhism. One of the cases was that King Jinheung sacrificed his palace to build the Hwangnyongsa Temple. In that respect, the temple can be considered a significant temple since King Jinheung.
(Kyo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schoihi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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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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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a famous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Rome, wrote letters of advice to his son who went to Athens to study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The publication of these letters in three volumes had a great effect on modern Western thinkers, and this is De Officiis (BC 44).
As the ancient culture was revived and regenerated after Renaissance, the British Islands saw re-illumination of classical books, and especially De Officiis was widely spread in English and Scotland both in the original version and in English-translated version of 1534. There was a trend to publish letters of advice to sons or daughters by being modeled after De Officiis, and the representative work of the tendency was Basilikon Doron (1599) by James Ⅵ (1567-1625), King of Scotland. Basilikon Doron is a Greek word meaning 'the royal gift', and it is a conduct book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Prince Henry (1594-1612).
At first, this conduct book was printed for private purpose, so there were only seven books in secret. However, by the time King James succeeded to the king of English after Queen Elizabeth Ι (1533-1603), the attention of this book was spread not only in Scotland but also England and European continent. Even fabricated copies and abridged editions were popular. Finally, Basilikon Doron was officially published in London for general public and translated into Latin, French and German, being distributed throughout English and Europe as a bestseller of the time.
Why do we need to read Basilikon Doron now?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As Basilikon Doron appeared as a conduct book from the king to his son, this book can help to understand king's education and ideal king in those days. In addition, it is an important resource to find out how King James, who was a king and intellectual, recognized his era and kingship. It also gives an opportunity to see a device to express the ideal about his kingship during the period of the conflicts among Divine Right of Kings, 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and authority to depose the King.
This study is intended to focus on political and religious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advent of Basilikon Doron, and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asilikon Doron around 1603 when King James succeeded to thro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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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唐) 태종대(太宗代) 반위(反胃) 치료법의 개발과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질병

저자 : 박준형 ( Park Jun-hyoung ) , 서영교 ( Seo Young-ky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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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은 기본적으로 隋의 의료체계를 수용하면서도 醫術世家의 秘傳에 의해 분산ㆍ난립된 醫術의 독점을 국가의 의료체계라는 公的 영역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당은 그 의술을 민간에 유포함으로써 점차 의술세가의 독점적 입지를 좁혀 나갔다. 공익을 위한 의술 공개는 당 왕조의 존재 이유를 백성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각인시키는 방법의 하나였고, 이는 초기 왕조의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당 태종대 당나귀오줌을 이용한 반위 치료법 개발은 이러한 의료정책의 결실이었다. 蔣ㆍ許ㆍ巢氏 醫官들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낸 새로운 치료 법은 즉위 초반부터 숙환이 있던 의자왕에게도 주목받았다. 644년 초 의자왕은 당에 파견된 사신을 통해 의사를 알아보았고, 그해 말 입당한 태자 夫餘康信이 당 태종에게 蔣元昌의 왕진을 요청했다. 당시 장원창은 益州道로 파견나가 있었기 때문에 당 태종은 그를 백제에 보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태자를 보내 백제의 신라공격에 대한 입장을 해명하고 신라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의자왕이 645년에 신라를 공격했다. 그해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한 당 태종은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병력을 남쪽으로 분산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무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의 신라 공격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으로 백제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신라가 대당외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점에서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은 의자왕의 질병과 의사 장원창의 왕진 요청 거부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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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운동 전개 양상에 대한 재검토

저자 : 이문기 ( Lee Moon-key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5 (6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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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전개 양상을 재검토하여 선행연구에서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하는데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의 국채보상 발의는 「취지서」로 작성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다. 종래에는 「취지서」가 1종만 작성된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1월 말에 작성된 「1차 취지서」와 이를 윤문·교정하여 2월 상순에 다시 작성한 「2차 취지서」의 2종이 있었다.
둘째, 발의와 취지문의 배포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에 큰 진전이 없자, 대구의 운동 추진세력은 운동 전담 단체를 새로 조직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 조직된 단체는 '대구금연상채회'와 '대구민의소'였는데,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는 단체로서는 전국 최초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대구민의소'는 대구군민대회를 주최·진행하기 위한 만들어진 실행단체였으며, '대구금연상채회(얼마 후 '대구단연상채회'로 개명됨)'가 대구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핵심 단체였다.
셋째, '대구민의소'는 두 번에 걸쳐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두 번의 군중집회는 이후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넷째, 대구는 여성들이 전국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밝혔던 장소인데, 종래에는 활동의 중심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식 단체가 아니며, 실제로 대구에서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는 그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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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검추(劍秋) 박녕희(朴寧熙)의 독립운동 배경과 항일무장투쟁

저자 : 이성우 ( Lee Su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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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영희의 독립운동 배경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박영희의 독립운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의 계승성, 한말 충남지역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지역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한 이는 홍주의병장 이세영과 이상린이었다. 이들은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충남 부여 은산에 신명의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박영희는 신명의숙에서 이들과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만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영희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군정서 사령부 부관과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맡아 대한군정서군을 양성했고, 이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해 승전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중소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통의부 부관을 맡았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밀산으로 돌아와 대한군정서 재건에 주력했다. 그는 현천묵ㆍ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에도 참여했다. 박영희는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1925년 3월 신민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중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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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20년대 북경지역의 흥사단원과 민족운동

저자 : 조규태 ( Cho Kyu-t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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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0년대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안창호 등 흥사단원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흥사단원과 그 조직인 천진지부와 북경단소, 그리고 흥사단원이 전개한 실력양성운동과 대 독립당 조직 활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1922년 중반 천진지역에 와서 유세를 벌이자 천진에서 교민단체를 이끌던 평안도 인물 김위택, 주현칙, 박일경 등 평안도계 인물들이 흥사단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흥사단 천진지부를 조직하였다. 천진지부의 지부장은 김위택, 총무 겸 재무는 주현칙, 간사는 박일경이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후 좌절 후 안창호, 안정근, 김승만 등은 1924년초 북경 서구 海甸에 해전농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소를 배경으로 흥사단소를 마련하고 흥사단의 북경지역의 班을 편성하였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하던 흥사단원들은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과 유학생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원들은 1924년부터 1926년 중반까지 임시정부, 의열단, 기타 독립운동단체와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신에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인격의 양성과 물력의 양성을 통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운동, 지식의 배양, 도덕의 수양, 분투적 수련 등을 통해 인격을 양성하고자 하였고, 해전농원의 운영을 통해 경제적 실력을 쌓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겸애적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반공주의와 반소주의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노선은 북경의 창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가 중심을 이룬 혁명사로부터 우경적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26년 9월 경에는 한국재생동맹회로부터 참정권운동파와 자치운동파라는 비판을 받고, 독립운동계로부터 오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의 대표인 안창호는 1926년 9, 10월 경부터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인 원세훈과 협의하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인 안창호, 이탁, 김광천, 박관해, 배인수, 등은 1926년 10월 10일부터 28일까지 북경 지역의 대표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갖고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안창호는 1927년 1월 만주의 길림에 가서 강연회를 통해 참정권 운동과 자치운동을 비판하고, 당시로서는 독립운동노선만이 조선 민중의 하나밖에 없는 독립운동노선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립 운동세력의 대통합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세력의 이탈로 대독립당의 결성이 어려워지자 1930년 1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 글은 1920년대 중반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독립운동노선과 이에 대한 반대세력의 동향을 규명해내었다. 그리고 1926년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이 대독립조직북경촉성회의 결성에 참여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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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비단섬의 갈대밭: 북한의 갈섬유공업 연구

저자 : 조은성 ( Cho Euns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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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를 원료로 뽑아낸 인조섬유인 갈섬유 생산의 공업화는 비날론 공업화와 함께 북한에 풍부한 원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화학부문에서의 자립적 토대를 이룬 성과로 평가돼 왔다. 이 논문은 북한의 갈섬유공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식민지 유산과의 연속성을 밝히고 이어 주체담론의 물질적 매개이기도 했던 비날론으로 만든 옷 생산에도 기여한 측면을 드러낸다. 갈섬유를 세계최초로 공업화했다는 북한의 선전과 달리, 갈을 이용해 인견펄프를 제조하고 스프를 생산하는 공정은 일제가 신의주, 평양 지역에서 이미 시작했었다. 이러한 식민지 유산 속에서 북한의 갈섬유생산 공업화가 이뤄졌지만, 이는 북한의 민족주의적 공식서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갈로부터 뽑아낸 스프직물은 비날론과 혼방되어 양복천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비날론양복천'으로만 불렸다. 갈섬유와 비날론 모두 자체의 원료로부터 생산한 이른바 '주체섬유'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북한에서 비날론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상징적 효과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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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송대 천주지역의 조선업

저자 : 김대식 ( Kim Dae-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5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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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는 대외정세의 혼란에 대한 방비와 국내 상업과 해상무역의 발달 등을 이유로 중국사에서 조선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다. 국가적인 지원과 수요를 바탕으로 송대 조선업은 관영과 민영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조선소가 번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지역이 중국 대륙의 남동해안에 있는 복건지방의 천주지역이다. 당시에 천주 일대는 전국에서 조선업이 가장 발달했고 성능이 좋은 선박을 건조하는 지역으로 정평이 났었는데, 이는 천주가 조선업의 측면에서 상당한 역사적 배경과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주는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여타 지방과 달리 조선업이 발달할 만한 외적 요인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송대에 나타나는 명성만큼이나 천주는 일찍이 앞선 시기부터 조선업이 발달해왔으며 대형 선박을 지을 준비가 돼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천주 일대 대부분 면적을 차지하는 광대한 산림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선박재로 적합한 나무들이 산림 곳곳에 분포했기에 조선업 발달 요인으로써 주요한 물적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송대 이후 더욱 활발해지는 연해 지방의 해상무역은 천주 일대의 농민에서 황족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조선업을 이용하게 했다. 이들은 직접 선박을 만들거나 장인에게 위탁하고, 이도 안 되면 선박의 일정공간을 빌리기까지 해서 상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조선업은 좁게는 천주를 위시한 복건의 경제활동을 변화시켰으며, 넓게는 우수한 선박으로 해상무역의 규모까지 확대한 중요한 요인이다. 천주 일대에서 건조된 선박들은 원양에서도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으며, 여타 선박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항해속도는 무역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했다. 또한, 선박의 대형화는 막대한 화물을 실을 수 있게 해서 천주 일대 상인들의 이윤 증대를 불러왔다.
천주민들의 경제활동에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해온 천주의 조선업은 산림의 풍부한 선박재를 기반으로 발달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당말부터 촉발된 해상무역의 열풍에서 결실을 봤다. 이처럼 천주를 송대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시킨 요인은 조선업이었고, 그런 천주의 조선업이 가능했던 것은 산림자원이기에 조선업과 산림은 천주 발전의 주요한 내적 요인이자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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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세기(1219~1278) 몽골―고려 관계 재론 - 소위 '륙사(六事)' 요구와 그 이행 문제를 중심으로 -

저자 : 최윤정 ( Choi Yoon-j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312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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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219년부터 1278년까지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몽골의 요구와 고려의 대응 속에서 소위 '六事'의 실체를 구명함으로써 양국 간30여 년 전쟁의 원인과 1278년 충렬왕의 친조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몽골의 요구가 '六事'로 불리게 된 계기는, 대칸이 된 쿠빌라이가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안남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6가지 사항'이 안남의 거부로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그 개별 항목이 그대로 형해화되어 14세기 이후 '六事'라는 개념으로 고착화 된 결과였다. '助軍'은 '六事' 중 한가지 항목이 아니라 '六事'의 실체가 助軍으로, 복속국에 군대와 물자를 내어 전쟁을 돕도록 요구한 것이다.
'六事'가 곧 '助軍'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몽골이 六事를 요구한 시기와 고려가 그것을 이행한 시기를 살펴보면, 1219년의 '형제맹약'은 공물징수를 핵심으로 하는 '우호적 불평등관계'였다는 점에서 六事가 요구되지 않았다. 1231년에 진입한 몽골과 고려는 강화를 맺었지만 동진을 치는데 조군하라는 요구는 무신권력이 강화를 파기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30여년 간의 파괴적 전쟁은 助軍, 즉 '六事' 이행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였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고려에 '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1232년처럼 고려조정 내의 갈등을 야기시켜 무신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즉위 초의 약정을 무효화시켜 동녕부를 설치하였고, 복위 후에도 원종은 여전히 '六事'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즉 각 몽골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78년 쿠빌라이와 충렬왕의 만남은 고려가 '六事' 이행을 약속하고 실행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助軍을 거부하였고,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助軍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요컨대,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에 '六事'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1278년부터 '六事'를 이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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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영국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 문제

저자 : 남철호 ( Nam Cheol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3-35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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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19세기 영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이민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빈곤과 직업,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이질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였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영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 집단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이들을 빈곤한 하나의 동일 집단으로 평가,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하였다. 아일랜드인을 범죄, 도시 문제, 그리고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내모는 것 또한 잘못된 여론에서 비롯된 19세기 영국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그릇된 성심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정착과 직업, 그리고 노동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더 생각나게 한다. 아일랜드 이민자는 여러 분야의 직종에서 영국인과 큰 갈등 없이 삶을 영위하였다.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종교적 이질적 집단 형성과 종교적 갈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민자의 영국 내 정착과 적응의 문제가 더 실재적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의 미사와 예배 참석 방법 등에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점으로 모국인과 아일랜드 이민자 사이에 문제의 소지를 낳았다. 가톨릭은 이민자와 영국인을 구별하거나 이민자를 추방하는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가 관용적인 태도로 서로 화합하고 조절하는 행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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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러시아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1917~1923)

저자 : 황보영조 ( Hwangbo Yeongj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3-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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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서 노동자 단체들이 특히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실 그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것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서 에스파냐에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독재가 시작되는 1923년까지로 국한하여 다룬다. 이 시기에 그들의 반응과 그 이유가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1917년 러시아혁명은 3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나뉜다. 그리고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권은 곧 이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을 추진했다. 이 시기 유럽에는 또한 1918년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3월 혁명과 11월 혁명, 코민테른 가입 요구 등이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고유의 혁명 이념과 더불어 그들의 반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에 미친 러시아혁명의 영향은 에스파냐공산당 창당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공산당의 창당 과정을 여기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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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일연방공화국에서 이주민의 정치적 참여: 1973년 쾰른 포드공장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저자 : 이용일 ( Lee Yong-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1-4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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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3년 쾰른 포드공장 터키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다. 이것은 주체적인 이주민의 존재를 독일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휴가에서 늦게 복귀한 300명의 터키인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조치였다.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에 미온적이었고, 그것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 반대로 돌아섰다. 파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독일인들과 터키인들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사측과 노동자평의회의 협업 속에서 독일인들의 파업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것이 양측의 유혈충돌로 이어졌다. 결국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파업이 종결되었다. 여러 명이 부상당했고, 추방과 해고가 뒤따랐다. 파업의 결정적인 실패원인은 독일인 노동자들과 터키인 노동자들의 분열에 있었다. 그것은 민족적 패러다임의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기인했다. 파업을 통해 터키인 노동자들은 그것의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손님과 주인을 구별 짓고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했던 이 오래된 권력구조에 미미하지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치적 참여로서 포드공장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독일 이주민의 역사, 더 나아가 독일 연방공화국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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