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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섬의 갈대밭: 북한의 갈섬유공업 연구

The Field of Reeds on Silk Island: A Study on North Korea’s Reed Fiber Industry

조은성 ( Cho Eunsung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2월
  • : 173-210(38pages)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비단섬의 시작, 식민지 유산
Ⅲ. 마형옥과 갈섬유 공업화
Ⅳ. 비날론옷의 숨은 기여자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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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를 원료로 뽑아낸 인조섬유인 갈섬유 생산의 공업화는 비날론 공업화와 함께 북한에 풍부한 원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화학부문에서의 자립적 토대를 이룬 성과로 평가돼 왔다. 이 논문은 북한의 갈섬유공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식민지 유산과의 연속성을 밝히고 이어 주체담론의 물질적 매개이기도 했던 비날론으로 만든 옷 생산에도 기여한 측면을 드러낸다. 갈섬유를 세계최초로 공업화했다는 북한의 선전과 달리, 갈을 이용해 인견펄프를 제조하고 스프를 생산하는 공정은 일제가 신의주, 평양 지역에서 이미 시작했었다. 이러한 식민지 유산 속에서 북한의 갈섬유생산 공업화가 이뤄졌지만, 이는 북한의 민족주의적 공식서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갈로부터 뽑아낸 스프직물은 비날론과 혼방되어 양복천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비날론양복천’으로만 불렸다. 갈섬유와 비날론 모두 자체의 원료로부터 생산한 이른바 ‘주체섬유’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북한에서 비날론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상징적 효과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In North Korea, the industrial production of reed fiber has been considered a success story in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foundation for chemistry, since the fiber produced from reeds that are abundant in the North. This paper examines historically how North Korea’s reed fiber industry began and developed while revealing the continuity it had with the colonial legacy as well as the way in which reed fiber contributed to the production of vinalon clothes that were utilized as a material medium of the Juche discourse. Although North Korean propaganda states that the production of reed fiber was first industrialized in North Korea, the process of manufacturing reed staple fiber using rayon pulp produced from reeds star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the regions of Sinŭiju and Pyǒngyang. Based on that colonial legacy, North Korea succeeded in industrializing the production of reed fiber; however, this fact was erased from North Korean official history. In addition, rayon fabrics spun from reed fiber were blended with vinalon to make suit materials, which were called simply “vinalon suit materials” in North Korea. This was because although both reed fiber and vinalon fell into the category of the so-called “Juche fibers” produced from North Korea’s own raw materials, the political and social meaning as well as the symbolic effect of vinalon in North Korea was much greater.
(Kyujnaggak Fellow, International Center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ec288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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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1
  • :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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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唐) 태종대(太宗代) 반위(反胃) 치료법의 개발과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질병

저자 : 박준형 ( Park Jun-hyoung ) , 서영교 ( Seo Young-ky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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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은 기본적으로 隋의 의료체계를 수용하면서도 醫術世家의 秘傳에 의해 분산ㆍ난립된 醫術의 독점을 국가의 의료체계라는 公的 영역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당은 그 의술을 민간에 유포함으로써 점차 의술세가의 독점적 입지를 좁혀 나갔다. 공익을 위한 의술 공개는 당 왕조의 존재 이유를 백성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각인시키는 방법의 하나였고, 이는 초기 왕조의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당 태종대 당나귀오줌을 이용한 반위 치료법 개발은 이러한 의료정책의 결실이었다. 蔣ㆍ許ㆍ巢氏 醫官들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낸 새로운 치료 법은 즉위 초반부터 숙환이 있던 의자왕에게도 주목받았다. 644년 초 의자왕은 당에 파견된 사신을 통해 의사를 알아보았고, 그해 말 입당한 태자 夫餘康信이 당 태종에게 蔣元昌의 왕진을 요청했다. 당시 장원창은 益州道로 파견나가 있었기 때문에 당 태종은 그를 백제에 보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태자를 보내 백제의 신라공격에 대한 입장을 해명하고 신라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의자왕이 645년에 신라를 공격했다. 그해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한 당 태종은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병력을 남쪽으로 분산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무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의 신라 공격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으로 백제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신라가 대당외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점에서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은 의자왕의 질병과 의사 장원창의 왕진 요청 거부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운동 전개 양상에 대한 재검토

저자 : 이문기 ( Lee Moon-key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5 (6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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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전개 양상을 재검토하여 선행연구에서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하는데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의 국채보상 발의는 「취지서」로 작성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다. 종래에는 「취지서」가 1종만 작성된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1월 말에 작성된 「1차 취지서」와 이를 윤문·교정하여 2월 상순에 다시 작성한 「2차 취지서」의 2종이 있었다.
둘째, 발의와 취지문의 배포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에 큰 진전이 없자, 대구의 운동 추진세력은 운동 전담 단체를 새로 조직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 조직된 단체는 '대구금연상채회'와 '대구민의소'였는데,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는 단체로서는 전국 최초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대구민의소'는 대구군민대회를 주최·진행하기 위한 만들어진 실행단체였으며, '대구금연상채회(얼마 후 '대구단연상채회'로 개명됨)'가 대구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핵심 단체였다.
셋째, '대구민의소'는 두 번에 걸쳐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두 번의 군중집회는 이후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넷째, 대구는 여성들이 전국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밝혔던 장소인데, 종래에는 활동의 중심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식 단체가 아니며, 실제로 대구에서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는 그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였다.

3검추(劍秋) 박녕희(朴寧熙)의 독립운동 배경과 항일무장투쟁

저자 : 이성우 ( Lee Su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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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영희의 독립운동 배경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박영희의 독립운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의 계승성, 한말 충남지역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지역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한 이는 홍주의병장 이세영과 이상린이었다. 이들은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충남 부여 은산에 신명의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박영희는 신명의숙에서 이들과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만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영희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군정서 사령부 부관과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맡아 대한군정서군을 양성했고, 이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해 승전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중소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통의부 부관을 맡았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밀산으로 돌아와 대한군정서 재건에 주력했다. 그는 현천묵ㆍ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에도 참여했다. 박영희는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1925년 3월 신민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중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국했다.

41920년대 북경지역의 흥사단원과 민족운동

저자 : 조규태 ( Cho Kyu-t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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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0년대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안창호 등 흥사단원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흥사단원과 그 조직인 천진지부와 북경단소, 그리고 흥사단원이 전개한 실력양성운동과 대 독립당 조직 활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1922년 중반 천진지역에 와서 유세를 벌이자 천진에서 교민단체를 이끌던 평안도 인물 김위택, 주현칙, 박일경 등 평안도계 인물들이 흥사단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흥사단 천진지부를 조직하였다. 천진지부의 지부장은 김위택, 총무 겸 재무는 주현칙, 간사는 박일경이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후 좌절 후 안창호, 안정근, 김승만 등은 1924년초 북경 서구 海甸에 해전농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소를 배경으로 흥사단소를 마련하고 흥사단의 북경지역의 班을 편성하였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하던 흥사단원들은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과 유학생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원들은 1924년부터 1926년 중반까지 임시정부, 의열단, 기타 독립운동단체와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신에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인격의 양성과 물력의 양성을 통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운동, 지식의 배양, 도덕의 수양, 분투적 수련 등을 통해 인격을 양성하고자 하였고, 해전농원의 운영을 통해 경제적 실력을 쌓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겸애적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반공주의와 반소주의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노선은 북경의 창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가 중심을 이룬 혁명사로부터 우경적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26년 9월 경에는 한국재생동맹회로부터 참정권운동파와 자치운동파라는 비판을 받고, 독립운동계로부터 오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의 대표인 안창호는 1926년 9, 10월 경부터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인 원세훈과 협의하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인 안창호, 이탁, 김광천, 박관해, 배인수, 등은 1926년 10월 10일부터 28일까지 북경 지역의 대표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갖고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안창호는 1927년 1월 만주의 길림에 가서 강연회를 통해 참정권 운동과 자치운동을 비판하고, 당시로서는 독립운동노선만이 조선 민중의 하나밖에 없는 독립운동노선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립 운동세력의 대통합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세력의 이탈로 대독립당의 결성이 어려워지자 1930년 1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 글은 1920년대 중반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독립운동노선과 이에 대한 반대세력의 동향을 규명해내었다. 그리고 1926년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이 대독립조직북경촉성회의 결성에 참여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5비단섬의 갈대밭: 북한의 갈섬유공업 연구

저자 : 조은성 ( Cho Euns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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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를 원료로 뽑아낸 인조섬유인 갈섬유 생산의 공업화는 비날론 공업화와 함께 북한에 풍부한 원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화학부문에서의 자립적 토대를 이룬 성과로 평가돼 왔다. 이 논문은 북한의 갈섬유공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식민지 유산과의 연속성을 밝히고 이어 주체담론의 물질적 매개이기도 했던 비날론으로 만든 옷 생산에도 기여한 측면을 드러낸다. 갈섬유를 세계최초로 공업화했다는 북한의 선전과 달리, 갈을 이용해 인견펄프를 제조하고 스프를 생산하는 공정은 일제가 신의주, 평양 지역에서 이미 시작했었다. 이러한 식민지 유산 속에서 북한의 갈섬유생산 공업화가 이뤄졌지만, 이는 북한의 민족주의적 공식서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갈로부터 뽑아낸 스프직물은 비날론과 혼방되어 양복천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비날론양복천'으로만 불렸다. 갈섬유와 비날론 모두 자체의 원료로부터 생산한 이른바 '주체섬유'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북한에서 비날론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상징적 효과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6중국 송대 천주지역의 조선업

저자 : 김대식 ( Kim Dae-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5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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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는 대외정세의 혼란에 대한 방비와 국내 상업과 해상무역의 발달 등을 이유로 중국사에서 조선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다. 국가적인 지원과 수요를 바탕으로 송대 조선업은 관영과 민영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조선소가 번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지역이 중국 대륙의 남동해안에 있는 복건지방의 천주지역이다. 당시에 천주 일대는 전국에서 조선업이 가장 발달했고 성능이 좋은 선박을 건조하는 지역으로 정평이 났었는데, 이는 천주가 조선업의 측면에서 상당한 역사적 배경과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주는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여타 지방과 달리 조선업이 발달할 만한 외적 요인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송대에 나타나는 명성만큼이나 천주는 일찍이 앞선 시기부터 조선업이 발달해왔으며 대형 선박을 지을 준비가 돼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천주 일대 대부분 면적을 차지하는 광대한 산림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선박재로 적합한 나무들이 산림 곳곳에 분포했기에 조선업 발달 요인으로써 주요한 물적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송대 이후 더욱 활발해지는 연해 지방의 해상무역은 천주 일대의 농민에서 황족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조선업을 이용하게 했다. 이들은 직접 선박을 만들거나 장인에게 위탁하고, 이도 안 되면 선박의 일정공간을 빌리기까지 해서 상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조선업은 좁게는 천주를 위시한 복건의 경제활동을 변화시켰으며, 넓게는 우수한 선박으로 해상무역의 규모까지 확대한 중요한 요인이다. 천주 일대에서 건조된 선박들은 원양에서도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으며, 여타 선박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항해속도는 무역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했다. 또한, 선박의 대형화는 막대한 화물을 실을 수 있게 해서 천주 일대 상인들의 이윤 증대를 불러왔다.
천주민들의 경제활동에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해온 천주의 조선업은 산림의 풍부한 선박재를 기반으로 발달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당말부터 촉발된 해상무역의 열풍에서 결실을 봤다. 이처럼 천주를 송대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시킨 요인은 조선업이었고, 그런 천주의 조선업이 가능했던 것은 산림자원이기에 조선업과 산림은 천주 발전의 주요한 내적 요인이자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713세기(1219~1278) 몽골―고려 관계 재론 - 소위 '륙사(六事)' 요구와 그 이행 문제를 중심으로 -

저자 : 최윤정 ( Choi Yoon-j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312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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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219년부터 1278년까지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몽골의 요구와 고려의 대응 속에서 소위 '六事'의 실체를 구명함으로써 양국 간30여 년 전쟁의 원인과 1278년 충렬왕의 친조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몽골의 요구가 '六事'로 불리게 된 계기는, 대칸이 된 쿠빌라이가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안남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6가지 사항'이 안남의 거부로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그 개별 항목이 그대로 형해화되어 14세기 이후 '六事'라는 개념으로 고착화 된 결과였다. '助軍'은 '六事' 중 한가지 항목이 아니라 '六事'의 실체가 助軍으로, 복속국에 군대와 물자를 내어 전쟁을 돕도록 요구한 것이다.
'六事'가 곧 '助軍'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몽골이 六事를 요구한 시기와 고려가 그것을 이행한 시기를 살펴보면, 1219년의 '형제맹약'은 공물징수를 핵심으로 하는 '우호적 불평등관계'였다는 점에서 六事가 요구되지 않았다. 1231년에 진입한 몽골과 고려는 강화를 맺었지만 동진을 치는데 조군하라는 요구는 무신권력이 강화를 파기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30여년 간의 파괴적 전쟁은 助軍, 즉 '六事' 이행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였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고려에 '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1232년처럼 고려조정 내의 갈등을 야기시켜 무신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즉위 초의 약정을 무효화시켜 동녕부를 설치하였고, 복위 후에도 원종은 여전히 '六事'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즉 각 몽골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78년 쿠빌라이와 충렬왕의 만남은 고려가 '六事' 이행을 약속하고 실행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助軍을 거부하였고,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助軍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요컨대,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에 '六事'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1278년부터 '六事'를 이행하게 되었다.

8영국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 문제

저자 : 남철호 ( Nam Cheol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3-35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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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19세기 영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이민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빈곤과 직업,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이질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였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영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 집단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이들을 빈곤한 하나의 동일 집단으로 평가,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하였다. 아일랜드인을 범죄, 도시 문제, 그리고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내모는 것 또한 잘못된 여론에서 비롯된 19세기 영국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그릇된 성심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정착과 직업, 그리고 노동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더 생각나게 한다. 아일랜드 이민자는 여러 분야의 직종에서 영국인과 큰 갈등 없이 삶을 영위하였다.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종교적 이질적 집단 형성과 종교적 갈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민자의 영국 내 정착과 적응의 문제가 더 실재적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의 미사와 예배 참석 방법 등에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점으로 모국인과 아일랜드 이민자 사이에 문제의 소지를 낳았다. 가톨릭은 이민자와 영국인을 구별하거나 이민자를 추방하는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가 관용적인 태도로 서로 화합하고 조절하는 행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9러시아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1917~1923)

저자 : 황보영조 ( Hwangbo Yeongj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3-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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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서 노동자 단체들이 특히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실 그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것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서 에스파냐에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독재가 시작되는 1923년까지로 국한하여 다룬다. 이 시기에 그들의 반응과 그 이유가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1917년 러시아혁명은 3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나뉜다. 그리고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권은 곧 이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을 추진했다. 이 시기 유럽에는 또한 1918년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3월 혁명과 11월 혁명, 코민테른 가입 요구 등이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고유의 혁명 이념과 더불어 그들의 반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에 미친 러시아혁명의 영향은 에스파냐공산당 창당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공산당의 창당 과정을 여기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10독일연방공화국에서 이주민의 정치적 참여: 1973년 쾰른 포드공장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저자 : 이용일 ( Lee Yong-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1-4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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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3년 쾰른 포드공장 터키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다. 이것은 주체적인 이주민의 존재를 독일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휴가에서 늦게 복귀한 300명의 터키인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조치였다.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에 미온적이었고, 그것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 반대로 돌아섰다. 파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독일인들과 터키인들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사측과 노동자평의회의 협업 속에서 독일인들의 파업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것이 양측의 유혈충돌로 이어졌다. 결국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파업이 종결되었다. 여러 명이 부상당했고, 추방과 해고가 뒤따랐다. 파업의 결정적인 실패원인은 독일인 노동자들과 터키인 노동자들의 분열에 있었다. 그것은 민족적 패러다임의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기인했다. 파업을 통해 터키인 노동자들은 그것의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손님과 주인을 구별 짓고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했던 이 오래된 권력구조에 미미하지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치적 참여로서 포드공장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독일 이주민의 역사, 더 나아가 독일 연방공화국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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