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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추(劍秋) 박녕희(朴寧熙)의 독립운동 배경과 항일무장투쟁

Park, Young Hui' Independence Activities and armed struggle against Japan

이성우 ( Lee Sungwoo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2월
  • : 97-131(35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2.97


목차

Ⅰ. 머리말
Ⅱ. 독립운동의 배경과 만주망명
Ⅲ. 192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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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영희의 독립운동 배경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박영희의 독립운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의 계승성, 한말 충남지역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지역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한 이는 홍주의병장 이세영과 이상린이었다. 이들은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충남 부여 은산에 신명의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박영희는 신명의숙에서 이들과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만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영희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군정서 사령부 부관과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맡아 대한군정서군을 양성했고, 이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해 승전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중소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통의부 부관을 맡았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밀산으로 돌아와 대한군정서 재건에 주력했다. 그는 현천묵ㆍ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에도 참여했다. 박영희는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1925년 3월 신민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중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국했다.
This study is on Park, Young Hui’s life and his independence activities at Manchuria. Park, Young Hui’s independence activities are important due to continuity and success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activities for restoring national rights at Chungnam area and independence activities at Manchuria. Lee, Se Young and Lee, Sang Lin instilled national consciousness to Park, Young Hui and led him to participate in independence activities. After failing the raising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at Hongju, Lee, Se Young and Lee, Sang Lin founded the SinMyeongUiSuk at Eunsan, Buyeo to cultivate people of talent. Park, Young Hui was a student of the SinMyeongUiSuk, and exiled to Manchuria and and participated in the anti-Japanese struggles.
Park, Young Hui graduated the SinHeugMuGwnaHakGyo and participated in the DaeHanKunJeogSeo. In the DaeHanKunJeogSeo, he was an aide-de-camp and trained soldiers, ans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Qingshanli with them. After the Battle of Qingshanli, he moved to Milsan and became an aide-de-camp of the DaeHanTongUiBu. After the tragic incident at JaYuSi, he returned to Milsan and tried to rebuild the DaeHanKunJeogSeo. In March, 1924, he organized the DaeHanDokLipKunJeogSeo with Hyn, CheonMuk · Kim, Gyu Sik, and participated in Kim, Jwa Jin’s DaeHanDokLipKunDan. As the representative of the DaeHanDokLipKunDan, he participated in the SinMinBu and contributed to organize 3Bu(ChamUiBu, JeongUiBu and SinMinBu). He trained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as a security commander of the Sin-Min-Bu, an instructor at the Seong-Dong military academy and a chairman for the military education. He arrested and died at Vladivos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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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1
  • :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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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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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저자 : 서호준 ( Seo¸ Ho-j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 (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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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이래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응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간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기법을 어떻게 하면 역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연구의 목적이라할 수 있다.
사실 역사학은 방대한 사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 데이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관성을 추구하는 빅데이터와 인과성에 대한 탐문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간에는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빅데이터의 위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으로 역사연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역사연구는 한층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간의 접목을 위해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약75년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경향을 크게 7개 시기로 구분하여 텍스트 마이닝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하였다. 빅데이터 기반 분석결과를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에 관한 기존의 논의결과와 비교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분석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논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최근으로 올수록 그 정확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국가사의 활성화 정도를 직관적으로 논의하는 경우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보충적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은 기본적으로 키워드(노드) 분석을 위한 것이므로 문장단위 분석이나 고차원적인 개념분석에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사실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요망되는 고대사 연구를 계량적으로만 분석한다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반 연구는 이와 같은 단순 계량적 접근을 넘어 사료나 연구경향 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키워드 도출을 통해 가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네트워크내 키워드들의 위상과 영향력 그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증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긴 하였지만, 본 연구가 제시한 분석의 프레임 자체는 양질의 후속연구를 태동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Since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ppeared as a hot topic at the Davos Forum in 2016, various academic fields have been in a hurry to respond to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Interest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is also increasing in the humanities field including history, but it is thought that the response to this is still sluggish.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a link between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nd history, and more specifically, how to incorporate big data techniques into the field of history, especially ancient Korean history
In fact, historical science has the longest character of data science in that it uses vast historical sources for research.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it will not be easy to find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big data seeking correlation and history studies aiming to investigate causality.
However, this view overestimated the status of big data, and it was thought that if big data was used only as a tool for conducting historical research, historical research could be carried out more efficiently.
This study performed big data-based text network analysis to combine such big data with research on ancient Korean history.
The research trend of Korean ancient history, which spans about 75 years from independence to the 2010s, is largely divided into 7 periods, and attemped text mining and social network analysis. The results of analysis based on big data were compared with the results of previous discussions on the research trend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fact, if the research on ancient history, which requires close and careful consideration of historical sources, is analyzed only quantitatively, it can be seen as a risk of distorting the historical truth.
However, the big data-based research went beyond such a simple quantitative approach to construct a virtual network by deriving keywords for historical sources or research trend papers to understand the status and influence of keywords in the network and their relationship to each other.
Although some limitations have been exposed during the demonstration process, the frame itself of the analysis presented by this study is expected to function fully as a link to initiate quality follow-up studies of good quality.
(Korea Credit Guarantee Fund / hora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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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고승비 음기의 문도 검토 -경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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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 고승의 문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고자 고승비 음기를 살폈다. 선봉사대각국사비 음기, 운문사원응국사비 음기, 중수용문사기 음기, 인각사보각국존비 음기 등 4 사례의 문도 직명을 살펴본 결과, 다양한 직명의 문도를 확인하였고, 크게 법손[사법제자, 부법제덕], 집사제자, 세속제자[수법유경사대부] 등의 부류가 있었다.
다양한 직명의 유래를 추적한 바, 고승의 강회, 담선 활동 및 승정제도, 승록사, 결사 등과 연관하여 그 고승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문도 중에서도 법손주지가 수법제자의 학풍을 유지하면서 문도 형성에서 중심이었다. 집사제자 문도 형성은 고승의 승정 관여와 연관되었다. 승정제도가 성립된 靖宗代를 기점으로 이러한 문도의 분열 이동이 많아지면서 사원 소속이 명시되는 등 종파분쟁의 조짐도 보였다. 승단이 확장되면서 결사 운동과 관련하여 세속제자도 문도로 기재되었다.


To understand the association of master monks` students this thesis studies their back-epitaph in Goryeo. By exploring the students` official names there were many kinds which were dharma-son, manager-pupil, general student.
With chasing the origin of the status names the disciples were related to high monks` activities and Buddhist institutions and associations. Among the followers the dharma-son chief was the dharma-keeping disciple and core-student. Manager-pupils were combined with the masters` intervention of Buddhist administration. After Jeongjong(靖宗) who constructed the priest administration the followers divided and sect-conflicts showed. Enlarging sect-group secular persons were registered on the learning disciples with the relation of association movemen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hkm@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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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 의종대 왕제(王弟) 대녕후(大寧侯) 사건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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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寧侯 사건은 의종대 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차자인 대령후를 지지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의종은 이러한 관계로 태자 시절부터 대령후와 왕위 계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의종은 인종의 지지와 정습명의 보좌로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즉위 초부터 정안 임씨와 대령후를 견제하였다. 대령후의 견제는 즉위 초인 동왕 5년부터 재위 후반기인 동왕 21년 '流矢의 變'으로 이어졌다.
의종의 측근인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와 그 족당인 정서·최유청·임극정·이작승 등을 참소하여 유배와 좌천시켰다. 이어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의 세력 기반을 점차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의종은 다른 동모제인 익양후(명종)와 평량후(신종)도 의심하였다. 그만큼 王弟는 의종대 국정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The Post Incident Daelyeonghu had a significant impact on Uijongdae a political phase. The mother of Uijong Gong-yetaehu, wanted to establish her second, Daelyeonghu, as the Prince. For this reason, Uijong completed with the Daelyeonghu to succeed to throne since the day of Prince.
However, he ascended the throne with the support of the race and the throne of Jeong-seubmyeong. Therefore, Uijong checked the Empress Gong-yetaehu and Daelyeonghu from the beginning of the throne.
In Particular, the Daelyeonghu Post was checked, from the Dongwang 5th year of the King' crown to the second half of his reign, 'yusiui byeon' the Dongwang 21st year of King's regin. Uijong' side poles Jeong-ham and Kim Jonjoong destroy the foundations of power after the Daelyeonghu by driving exile and relegstion by driving Jeong-seo· Choi Yoo- chong· Im Geuk- jeong, the family members of the Daelyeonghu, as a counterfeit.
Uijong's check against Daelyeonghu is because the other monarchs, IK Yang- hu and Pyeong nyang- hu, approached as threats to the Kingship.
Furthermore, these royal trends acted was the Jeongbyeon of Gyeongin-nyeon. served as an important variabl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jangs20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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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읍지(邑誌)와 방목(榜目), 호적(戶籍)을 통해 본 대구 출신 급제자들

저자 : 한상우 ( Han¸ Sa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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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구에서는 몇 명의 문과급제자들이 배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이후 편찬된 대구의 邑誌, 市史, 榜目과 대구부호적대장 등을 활용하여 대구 출신 급제자들을 확인하였다. 읍지와 시사, 방목을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대구 출신 급제자들은 총 79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료들마다 급제자들의 명단과 정보가 상이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대구에 거주한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1681년부터 1876년까지에 걸쳐 남아 있는 대구의 호적에서 17세기 후반 이후의 급제자들과 그 가족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읍지와 방목 속 대구 급제자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로 대구에 거주했더라도 읍지에서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즉, 대구 출신 급제자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실제 대구 거주 여부뿐 아니라 다면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 급제자 확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잦은 이주였다.


This study finds the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civil exam who resided in Taegu during the Chosŏn Dynasty. The information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of Taegu was collected from gazetteers published in 1768, 1832, 1924, 1995 Taegu and the rosters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As a result, this study makes the list of 79 successful candidates of Taegu. However, it is interesting that records and lists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in each source are different. This study traces the successful candidates in the Taegu household registers published from 1681 to 1876 to check their residence in Taegu and finds that gazetteers recorded the successful candidates selectively. One reason for the selective record is the frequent migration of successful candidates. The migration cases of the Sunch'ŏn Pak family, the most successful family in the civil exam in Taegu, show us that even successful candidates were apt to leave their hometown due to their political attitude and reputation in local society. This is why difficult to ascertain how many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civil exam Taegu produced for 500 years.
(Dept. of History, Ajou University, hansw@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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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전반 호패법 시행 과정 연구

저자 : 설현지 ( Seol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1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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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 전반의 변화를 논의하였다. 본고에서는 광해군대와 인조대 호패법의 논의와 시행, 중단 과정을 살폈다.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였다. 이는 전쟁으로 유실된 백성들의 거주지와 국역을 다시 정해주고, 국가의 개별적 백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었다. 호패법은 조선 초부터 시행하고자 한 법이었지만, 置廢를 반복하다가 숙종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호패법은 고려말기에 도입된 제도로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호패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인조대까지 이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호패법은 중단되었지만, 인조대 호패법 시행으로 정해진 각종 규칙들은 『호패사목』으로 남아서 숙종대 호패법 시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선조대 후반부터 인조대까지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그 사이에 일어난 다양한 논의를 살핀 후, 『호패사목』을 통해서 호패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호패법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법이었기에,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호패법으로 인해 새롭게 군역의 의무가 생겼기 때문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도 敎生考講에 탈락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지만,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서는 호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부 백성과 유생들의 반발에도 호패법은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호패법의 시행을 위해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호패사목』이다. 『호패사목』의 내용은 오가작통법, 단자식, 운영 규정과 특수민의 호패에 관한 것들이다. 단자식을 봤을 때 조선 정부는 관료-관료 예비군-군역 대상자로 분류해 백성들을 파악했음을 확인하였다. 『호패사목』을 통해 조선 정부가 호패법으로 군역을 보충하고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임진왜란 후 무너진 국가 질서와 세금 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시행하고자 한 제도였다.


Joseon society faced a major change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壬辰倭亂). Joseon discussed changes in the overall system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This article wanted to examine the discussion, implementation, and suspension of Hopae in the Gwanghaegun and King In-jo. The Hopae Act was a law that required all men over the age of 16 to wear HoPae. This law was designed to reestablish the residence of the people lost in the war and strengthen the individual rule of the nation. The HoPae Act was intended to be implemen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was completely established in King Suk-jong after repeating the period of persecution.
The HoPae Act was introduced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and was repeatedly implemented and abolished. Discussions on the Hopae law continu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continued until the reign of King In-jo. Although the HoPae Act was discontinued after First Manchu Invasion in 1627(丁卯胡亂), various rules about Hopae established by the King Injo. Ho-Pae Act remained as "Ho-Pae-Sa-mok"(號牌事目) and greatly influenced the implementation of the Ho-Pae Act of King Sukjong. In the main article, the Ho-Pae Act was implemented through the "Hopae Samok" after examining the implementation and suspension of the Ho-Pae Act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to King Injo and various discussions that took place in the Ho-Pae Act was implemented.
The Ho-Pae Act was the easiest law to identify the people individually, so the government actively tried to implement the Ho-Pae Act. However, the Ho-Pae Act led to the resistance of the people who were newly obliged to serve in the military.
"Hopae Samok" is a historical material containing regulations on the enforcement of the King Injo's Hopae Act. The contents are about organizing five houses(五家作統), terminal types, operating regulations and special class. Based on the official formula, it was confirmed that the Joseon government identified the people by classifying them as bureaucrats, candidates of bureaucratcy, and military personnel. The "Hopae Samok" shows that the Joseon government wanted to supplement its military service with the Hopae Act and identify the people individually. The Ho-Pae Act was intended to restore the state order and tax system that collaps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shj56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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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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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purpose and the negotiation activities in Hanyang of Qing Dynasty's Envoys dispatched to Jose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Qing Dynasty's Sahaeng(使行) toward Joseon was investigat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requested an end to the Qing's request for conscription through Sahaeng(使行) in April and September 1637. In October 1637, the Qing dispatched an envoy to Joseon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ithout Joseon's resquest, and the Qing dynasty's envoys negotiated with Joseon focusing o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Naturalized jurchen(向化人), Chinese(漢人), Joseon people who captured by the Qing tried to come back Joseon(走回人). The issue of repatriation was an important negotiation issue even in later Sahaeng(使行) toward Joseon. It can be said tha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most urgent task of Joseon was the resolution of the issue of conscription. However, what the Qing dynasty considered important was the maintenance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a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Besides exemption from conscription, Joseon's other concern is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In September 1637, Joseon requested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 but was rejected by the Qing Dynasty. In February 1639, an envoy was sent with a request for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crown prince, and it was also expected that the crown prince could return to Joseo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After that, Injo's illness also made it a reason to request the crown prince to return to Joseon. However, from Qing's point of view,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the crown prince was a procedure that could settle a hierarchical relationship of Joseon and Qing Dynast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Qing Dynasty mentioned the installation of Crown Prince before Joseon's request.
In November 1639, the Qing dynasty's envoy who came for the monument of Samjeondo(삼전도비) stayed in Hanyang until December 5 and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ll work was completed on December 8th. From the Qing point of view, the monument of Samjeondo was regarded as a symbolic space for the success of the Manchus and the victory of the war to Joseon. From the point of view of Joseon, it was the result of the defeat and a symbol of obedience to the Qi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the Qing dynasty dispatched a envoy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discussed the standard of treatment for the Qing dynasty's envoy. At first, it was intended to use the rules of treatment for Tangcha(唐差), but it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reatment for Ming dynasty's envoys(明使).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this time seemed to be satisfied with the reception of Joseon. In October 1637, the reception to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as the first step in making the reception of Qing dynasty's envoys regular.
In September 1639, the reception for Qing dynasty's envoy who is named Mandaerhan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previous treatment for Qing dynasty's envoys. It was because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差官) who came to visit King Injo. Joseon viewed Mandaerhan 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who came under the emperor's orders, but the lowest level department(접대소) was installed to entertain Mandaerhan. This is different from the case of the reception for officials who were temporarily dispatched and served the Ming emperor's orders. It can be said that this was influenced by the the reception for Jin dynasty's envoys, and the antipathy towards Qing was reflected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 of Mandaerhan in September 1639 and Maputa in November 1639 is another point worth noting. King Injo did not go out for greeting the two envoys. In September,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so there was no need for Injo to greet according to the ceremoni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a precedent that Injo did not greet envoy on the excuse of his illness from November 1639. Afterwards, Joseon recorded cases in which the king did not greet envoy and made it a custom.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lixiaoqing03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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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저자 : 이재현 ( Lee Jae-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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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This study identifies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The period ranges from the time of King Yeongjo's accession to the throne to around the time of Sinyu Daehun. The regional range was centered on Andong and around Andong such as Yean, Yeungyang and Yeunghae. The regional range is in line with the extent to which key figures reside within the Lee Hyeon-il's followers.
King Yeongjo promoted Tangpyeong policy(蕩平策) after his ascension, and many political events took place, including the Eulsa Regime Change in 1725(乙巳換局), Jeongmi Regime Change in 1727(丁未換局), Musin Revolt(戊申亂), Kiyucheobun(己酉處分), Sibguhagyo(十九下敎), Hondongaebyeok(混沌開闢), Gyeongsincheobun(庚申處分), until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led Tangpyeong regime. However, in the case of Namin group of Yeongnam, he failed to recover after Gabsul Regime Change in 1694(甲戌換局), and thus had little rol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Furthermore, relevant to Musin Revolt put the entire region at risk of being defined as "Rebellion." In general, it was understood that the political cause of Namin group of Yeongnamwas completely destroyed due to Musin Revolt.
However, Namin group of Yeongnam centered on Andong was appointed because of King Yeongjo's consideration after Musin Revolt. Kim Seong-tak was a representative figure. However, Namin in Andong were intertwined with Lee Hyun-il's followers at that time. If Lee Hyun-il is not innocent, They were always likely to be branded as 'the remnants of the year of Gisa'. In 1737, Kim Sung-tak's banishment due to Yeongjo's anger while explaining Lee Hyun-il shows the weak political foundation of Namin in Andong.
Due to the ripple of the Kim Seong-tak's banishment, there was confrontation between Namin and Noron over the construction of Hagdong Seowon in Andong. Noron, who had a weak power in Andong, push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under the support of the government office, but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was thwarted by Namin's physical force. King Yeongjo gave relatively lenient treatment to Namin in this case.
King Yeongjo's attitude showed King Yeongjo's intention to reign as 'Master King(君師)' on the party platform. However, despite King Yeongjo's intentions and consideration,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began to stagnate in the 1740s, which meant that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group of Yeongnam had stagnated.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orpsel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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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기철의 통일운동 역정과 생애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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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195,60년대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김기철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우익계열 단체를 통해 정치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나, 북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46년 3월 월남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 민족자주연맹에 몸담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기철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출마 때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 조봉암과 서상일이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혁신정당을 창당할 때 김기철은 창당 추진을 위한 핵심인물로 활약했고,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 후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58년 진보당사건 당시 검찰이 진보당의 이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고, 당국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으로 진보당 관계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일시 정치 사회운동의 장을 떠났던 김기철은 4월혁명으로 혁신계의 활동공간과 기회가 확보되자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세력의 이합집산 와중에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통일사회당을 거치면서 역시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 그가 구상했던 통일안을 좀 더 구체화한 중립화통일방안을 내세워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실시한 혁명재판에서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기철은 1963년 3공화국 출범 뒤 단행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한 후에도 당 내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거의 전 생애를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하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김기철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적 사회건설이었다.


This study set out to discuss Kim Gi-cheol that devoted his entire life to the unification movement as an active member of reformist parties such as the Progressive Party and the Socialist Party for the National Unification in the 1950s and 1960s. He began his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in a right-wing organization in his hometown of Hamheung, Hamgyeongnam Province right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and defected to South Korea in March, 1946 to avoid the suppression of the North Korean regime. Since then, he engaged in activities to set up a unified government in the Left-Right Coalition Committee and the National Independence Federation and participated in the South-North Joint Conference in 1948 in the process.
In 1952 in the middle of the Korean War, he joined the election polling committee formed to support Cho Pong-am that ran for a presidential election, forming his relations with Cho in full scale. When Cho and Seo Sang-il formed a reformist party in conjunction with reformist figures in 1955, he played an essential role to push the party forward and lavished his financial supports on it. After the formation of the Progressive Party, he devised his own unification plan that placed importance on international solutions for the issues of North and South Korea as the president of the Research Institute for Unification Issues. His plan was, however, used as a material to prove that the Progressive Party worked to benefit the nation's enemy by the prosecutors in the Progressive Party incident of 1958 and then as a pretext to cancel the registration of the Progressive Party by the authorities.
Individuals involved in the Progressive Party scattered around after Cho's death penalty, and Kim left the field of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temporarily. Once the progressive forces secured spaces and opportunities for their activities after the April Revolution, he resumed his political activities. As the progressive forces repeated the process of meeting and parting, his active involvement focused on unification issues in the Socialist Mass Party(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party) and the Socialist Party for the National Unification. He also voiced his opinions with his neutralization-based unification plan that was a further detailed version of his old unification plan at various venues of public debates.
Kim received a prison sentence for his involvement in the "Central Unification Socialist Party Incident" at the revolutionary trial by the military regime after the May 16 military coup. After serving his sentence, he was released with a special pardon by the Third Republic founded in 1963. He then joined the New Democratic Party in 1971 and was put in charge of unification issues. Devoting almost his entire life to the issues of divided Korea and its unification after its liberation through his inquiry, research, and activity efforts, Kim Gi-cheol was oriented toward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establishment of a democratic society.
(Kyungpook Natioanl University /zadoo9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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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진(天津) 죄범습예소(罪犯習藝所)의 건설과 '근대' 감옥의 탄생

저자 : 조병식 ( Cho¸ Byung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7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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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光緖30년(1904)에 건설된 중국 최초의 신식 감옥인 天津罪犯習藝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죄범습예소를 전통 감옥에서 근대 감옥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천진의 경우 '근대' 감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감옥학자였던 오가와 시게지로오(小河滋次郞)의 고대/'근대' 감옥을 판별하는 3가지 기준을 차용하였다. 첫 번째 기준인 수감 대상에 있어서 천진 죄범습예소 건립 당초 기결수와 부랑자들을 함께 수감하였는데, 성격이 상이한 집단을 한 공간에 수감한다는 점에서 전통 감옥의 雜居와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光緖32년(1906) 遊民習藝所가 설립되어 부랑자 수용 시설이 별도로 마련되면서 죄범습예소는 기결수만을 감금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번째 기준인 감옥의 목적과 관련해서 천진죄범습예소는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통 감옥의 목적에서 탈피하고 수감자의 갱생과 출소 후의 생계 도모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생과 방범에 중점을 둔 감옥 건축물이 건조되었고, 직무에 따라 관리 인원의 직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죄범습예소 내 총 6곳의 공장을 설립하여 수감자들이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기준인 경비 조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州縣에 할당한 수감자 비용은 죄범습예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비용이었지만 연체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죄범습예소에서는 수감자들의 역량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추진하였다. 죄범습예소의 공장화에 대한 直隷總督 袁世凱의 경고가 있었으나 죄범습예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천진 죄범습예소는 오가와 시게지로오의 3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를 충족하였다. 그리고 경비 조달의 문제는 천진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근대' 감옥을 표방하여 설립된 模範監獄 또한 동일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진 죄범습예소는 '근대' 감옥으로의 과도 기적 존재라기보다는 '근대' 감옥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analyzes and investigates the character of the Tianjin Criminal Workhouse(TCW), the first new style prison in China built in 1904. Previous studies considered the Criminal Workhouse as a transitional institution from a traditional prison to a modern prison, but in the case of Tianjin, it had the characters of a “modern” prison. To prove this point, this article borrowed three criteria for distinguishing traditional/modern prisons by Ogawa Shigejiro who was a prominent penologist at that time. The first criterion is who was detained. At the outset of the TCW, the convicted and the vagrant were imprisoned together. It was similar to the characteristic of traditional prison in that groups of different features were detained in one space. However, the Vagrant Workhouse, which accommodated only the vagrant, was established in 1906, and the TCW became a space where only the convicted were confined. The second criterion is the purpose of the prison. The TCW sought to break away from traditional prisons pursuing “retaliation for crimes” and to rehabilitate the convicted and prepare their livelihood after their release. To this end, new buildings were built with an emphasis on hygiene and crime prevention, and the positions were subdivided according to the roles of personnel. Furthermore, six factories were operated in the TCW so that inmates could learn handicraft. However, the financial problem, which is the third criterion, was not solved. In particular, the detention costs which were essential for the operation of the TCW and allocated to each counties were often unpaid. For this reason, the TCW used the inmates' abilities to actively promote the production and sale of goods. Even though Yuan Shikai, the Zhili Governor-General, warned that the TCW would be transformed into a factory, but it was an avoidable choice for the stable operation of the TCW. In short, the TCW met two of the three criteria of Ogawa Shigejiro. The cost shortage was that the TCW could not be solved alone, and the Model Prison established under the guise of a “modern” prison also faced the same problem. Therefore, the TCW was a starting point for “modern” prison, rather than a transitional institution for “modern” prison.
(Seoul National University/ pumkpie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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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고대 성곽 공방전에 관한 군사 공학적 전략론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1-4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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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프론티누스와 베게티우스의 글을 군사 공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프론티누스는 군지휘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이 있으므로, 베게티우스는 고위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이들의 글이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성곽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전략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비교, 분석했다.
프론티누스의 글은 적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공성전 중에서도 포위전에 관한 전략을 상세히 서술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포위전은 아군에게도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아군에게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고, 적을 경계해야 하는 심리적인 긴장도 상당하다. 또 그가 활동하던 1세기에 로마군은 포위전만 한 것이 없고, 공격전 위주로 전쟁했다. 따라서 프론티누스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지휘관이어서 실질적인 전략을 서술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의 글은 당대의 전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베게티우스의 글에는 공격적인 전략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 있다. 4세기의 전투 사례들을 볼 때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하든 공격전을 펼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공격전을 강조한 당시의 상황이 베게티우스의 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의 수성전 전략도 전략의 현실성과 유익성 면에서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빈도를 볼 때 그의 수성전 전략은 그렇게 활용 가치가 높은 전략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게티우스 글의 유익성은 로마군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공격전에서 두드러진다.


This study analyzed the writings of Frontinus and Vegetius from the perspective of military engineering. Since Frontinus has practical experience as a military commander, and Vegetius has experience as a high-ranking administrator, their writings are said to have influenced future generations. Focusing on the battle for the castle that they commonly discuss, the strategies they claim and the strategies used in actual battles were compared and analyzed.
Most of Frontinus's writings were about siege warfare attacking the enemy. During the siege, he detailed the strategy for the encirclement warfare. From a strategic point of view, the siege was a difficult combat method for the Roman army. Establishing a encirclement imposes considerable physical labor on the Romans, and there is also considerable psychological tension to guard against the enemy. Also, in the first century when Frontinus was active, the Roman army fought mainly in attack. Therefore, the evaluation that Frontinus was a military commander with combat experience and described a practical strategy is wrong. It can be seen that his writings did not reflect the battle situation of the time at all.
Vegetius' writing has a lot of information about offensive strategies. In the case of battles in the 4th century, most of the battles were offensive, whether attacking after establishing a encirclement or immediately. This means that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emphasizing offensive warfare was reflected in Vegetius's writings.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his strategy of a castle defense battle was valid in terms of the practicality and profitability of the strategy. However, when looking at the frequency of actual battles, his strategy was not so valuable to use. The usefulness of the Vegetius writings stands out in the most frequent strikes of the Romans.
(Keimyung University / jejs@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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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唐) 태종대(太宗代) 반위(反胃) 치료법의 개발과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질병

저자 : 박준형 ( Park Jun-hyoung ) , 서영교 ( Seo Young-ky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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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은 기본적으로 隋의 의료체계를 수용하면서도 醫術世家의 秘傳에 의해 분산ㆍ난립된 醫術의 독점을 국가의 의료체계라는 公的 영역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당은 그 의술을 민간에 유포함으로써 점차 의술세가의 독점적 입지를 좁혀 나갔다. 공익을 위한 의술 공개는 당 왕조의 존재 이유를 백성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각인시키는 방법의 하나였고, 이는 초기 왕조의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당 태종대 당나귀오줌을 이용한 반위 치료법 개발은 이러한 의료정책의 결실이었다. 蔣ㆍ許ㆍ巢氏 醫官들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낸 새로운 치료 법은 즉위 초반부터 숙환이 있던 의자왕에게도 주목받았다. 644년 초 의자왕은 당에 파견된 사신을 통해 의사를 알아보았고, 그해 말 입당한 태자 夫餘康信이 당 태종에게 蔣元昌의 왕진을 요청했다. 당시 장원창은 益州道로 파견나가 있었기 때문에 당 태종은 그를 백제에 보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태자를 보내 백제의 신라공격에 대한 입장을 해명하고 신라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의자왕이 645년에 신라를 공격했다. 그해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한 당 태종은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병력을 남쪽으로 분산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무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의 신라 공격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으로 백제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신라가 대당외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점에서 645년 백제의 신라 공격은 의자왕의 질병과 의사 장원창의 왕진 요청 거부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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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운동 전개 양상에 대한 재검토

저자 : 이문기 ( Lee Moon-key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5 (6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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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전개 양상을 재검토하여 선행연구에서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하는데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의 국채보상 발의는 「취지서」로 작성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다. 종래에는 「취지서」가 1종만 작성된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1월 말에 작성된 「1차 취지서」와 이를 윤문·교정하여 2월 상순에 다시 작성한 「2차 취지서」의 2종이 있었다.
둘째, 발의와 취지문의 배포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에 큰 진전이 없자, 대구의 운동 추진세력은 운동 전담 단체를 새로 조직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 조직된 단체는 '대구금연상채회'와 '대구민의소'였는데,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는 단체로서는 전국 최초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대구민의소'는 대구군민대회를 주최·진행하기 위한 만들어진 실행단체였으며, '대구금연상채회(얼마 후 '대구단연상채회'로 개명됨)'가 대구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핵심 단체였다.
셋째, '대구민의소'는 두 번에 걸쳐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두 번의 군중집회는 이후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넷째, 대구는 여성들이 전국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밝혔던 장소인데, 종래에는 활동의 중심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식 단체가 아니며, 실제로 대구에서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는 그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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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검추(劍秋) 박녕희(朴寧熙)의 독립운동 배경과 항일무장투쟁

저자 : 이성우 ( Lee Su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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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영희의 독립운동 배경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박영희의 독립운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의 계승성, 한말 충남지역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지역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한 이는 홍주의병장 이세영과 이상린이었다. 이들은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충남 부여 은산에 신명의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박영희는 신명의숙에서 이들과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만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영희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군정서 사령부 부관과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맡아 대한군정서군을 양성했고, 이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해 승전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중소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통의부 부관을 맡았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밀산으로 돌아와 대한군정서 재건에 주력했다. 그는 현천묵ㆍ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에도 참여했다. 박영희는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1925년 3월 신민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중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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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20년대 북경지역의 흥사단원과 민족운동

저자 : 조규태 ( Cho Kyu-t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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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0년대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안창호 등 흥사단원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한 흥사단원과 그 조직인 천진지부와 북경단소, 그리고 흥사단원이 전개한 실력양성운동과 대 독립당 조직 활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1922년 중반 천진지역에 와서 유세를 벌이자 천진에서 교민단체를 이끌던 평안도 인물 김위택, 주현칙, 박일경 등 평안도계 인물들이 흥사단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흥사단 천진지부를 조직하였다. 천진지부의 지부장은 김위택, 총무 겸 재무는 주현칙, 간사는 박일경이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후 좌절 후 안창호, 안정근, 김승만 등은 1924년초 북경 서구 海甸에 해전농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소를 배경으로 흥사단소를 마련하고 흥사단의 북경지역의 班을 편성하였다. 북경지역에서 활동하던 흥사단원들은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과 유학생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원들은 1924년부터 1926년 중반까지 임시정부, 의열단, 기타 독립운동단체와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신에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인격의 양성과 물력의 양성을 통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운동, 지식의 배양, 도덕의 수양, 분투적 수련 등을 통해 인격을 양성하고자 하였고, 해전농원의 운영을 통해 경제적 실력을 쌓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겸애적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들은 반공주의와 반소주의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노선은 북경의 창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가 중심을 이룬 혁명사로부터 우경적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26년 9월 경에는 한국재생동맹회로부터 참정권운동파와 자치운동파라는 비판을 받고, 독립운동계로부터 오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북경지역의 흥사단의 대표인 안창호는 1926년 9, 10월 경부터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인 원세훈과 협의하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인 안창호, 이탁, 김광천, 박관해, 배인수, 등은 1926년 10월 10일부터 28일까지 북경 지역의 대표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갖고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안창호는 1927년 1월 만주의 길림에 가서 강연회를 통해 참정권 운동과 자치운동을 비판하고, 당시로서는 독립운동노선만이 조선 민중의 하나밖에 없는 독립운동노선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립 운동세력의 대통합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세력의 이탈로 대독립당의 결성이 어려워지자 1930년 1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 글은 1920년대 중반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북경지역 흥사단원의 독립운동노선과 이에 대한 반대세력의 동향을 규명해내었다. 그리고 1926년 북경지역의 흥사단원이 대독립조직북경촉성회의 결성에 참여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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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비단섬의 갈대밭: 북한의 갈섬유공업 연구

저자 : 조은성 ( Cho Euns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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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를 원료로 뽑아낸 인조섬유인 갈섬유 생산의 공업화는 비날론 공업화와 함께 북한에 풍부한 원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화학부문에서의 자립적 토대를 이룬 성과로 평가돼 왔다. 이 논문은 북한의 갈섬유공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식민지 유산과의 연속성을 밝히고 이어 주체담론의 물질적 매개이기도 했던 비날론으로 만든 옷 생산에도 기여한 측면을 드러낸다. 갈섬유를 세계최초로 공업화했다는 북한의 선전과 달리, 갈을 이용해 인견펄프를 제조하고 스프를 생산하는 공정은 일제가 신의주, 평양 지역에서 이미 시작했었다. 이러한 식민지 유산 속에서 북한의 갈섬유생산 공업화가 이뤄졌지만, 이는 북한의 민족주의적 공식서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갈로부터 뽑아낸 스프직물은 비날론과 혼방되어 양복천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비날론양복천'으로만 불렸다. 갈섬유와 비날론 모두 자체의 원료로부터 생산한 이른바 '주체섬유'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북한에서 비날론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상징적 효과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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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송대 천주지역의 조선업

저자 : 김대식 ( Kim Dae-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5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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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는 대외정세의 혼란에 대한 방비와 국내 상업과 해상무역의 발달 등을 이유로 중국사에서 조선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다. 국가적인 지원과 수요를 바탕으로 송대 조선업은 관영과 민영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조선소가 번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지역이 중국 대륙의 남동해안에 있는 복건지방의 천주지역이다. 당시에 천주 일대는 전국에서 조선업이 가장 발달했고 성능이 좋은 선박을 건조하는 지역으로 정평이 났었는데, 이는 천주가 조선업의 측면에서 상당한 역사적 배경과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주는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여타 지방과 달리 조선업이 발달할 만한 외적 요인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송대에 나타나는 명성만큼이나 천주는 일찍이 앞선 시기부터 조선업이 발달해왔으며 대형 선박을 지을 준비가 돼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천주 일대 대부분 면적을 차지하는 광대한 산림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선박재로 적합한 나무들이 산림 곳곳에 분포했기에 조선업 발달 요인으로써 주요한 물적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송대 이후 더욱 활발해지는 연해 지방의 해상무역은 천주 일대의 농민에서 황족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조선업을 이용하게 했다. 이들은 직접 선박을 만들거나 장인에게 위탁하고, 이도 안 되면 선박의 일정공간을 빌리기까지 해서 상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조선업은 좁게는 천주를 위시한 복건의 경제활동을 변화시켰으며, 넓게는 우수한 선박으로 해상무역의 규모까지 확대한 중요한 요인이다. 천주 일대에서 건조된 선박들은 원양에서도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으며, 여타 선박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항해속도는 무역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했다. 또한, 선박의 대형화는 막대한 화물을 실을 수 있게 해서 천주 일대 상인들의 이윤 증대를 불러왔다.
천주민들의 경제활동에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해온 천주의 조선업은 산림의 풍부한 선박재를 기반으로 발달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당말부터 촉발된 해상무역의 열풍에서 결실을 봤다. 이처럼 천주를 송대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시킨 요인은 조선업이었고, 그런 천주의 조선업이 가능했던 것은 산림자원이기에 조선업과 산림은 천주 발전의 주요한 내적 요인이자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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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세기(1219~1278) 몽골―고려 관계 재론 - 소위 '륙사(六事)' 요구와 그 이행 문제를 중심으로 -

저자 : 최윤정 ( Choi Yoon-j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312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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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219년부터 1278년까지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몽골의 요구와 고려의 대응 속에서 소위 '六事'의 실체를 구명함으로써 양국 간30여 년 전쟁의 원인과 1278년 충렬왕의 친조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몽골의 요구가 '六事'로 불리게 된 계기는, 대칸이 된 쿠빌라이가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안남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6가지 사항'이 안남의 거부로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그 개별 항목이 그대로 형해화되어 14세기 이후 '六事'라는 개념으로 고착화 된 결과였다. '助軍'은 '六事' 중 한가지 항목이 아니라 '六事'의 실체가 助軍으로, 복속국에 군대와 물자를 내어 전쟁을 돕도록 요구한 것이다.
'六事'가 곧 '助軍'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몽골이 六事를 요구한 시기와 고려가 그것을 이행한 시기를 살펴보면, 1219년의 '형제맹약'은 공물징수를 핵심으로 하는 '우호적 불평등관계'였다는 점에서 六事가 요구되지 않았다. 1231년에 진입한 몽골과 고려는 강화를 맺었지만 동진을 치는데 조군하라는 요구는 무신권력이 강화를 파기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30여년 간의 파괴적 전쟁은 助軍, 즉 '六事' 이행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였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고려에 '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1232년처럼 고려조정 내의 갈등을 야기시켜 무신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즉위 초의 약정을 무효화시켜 동녕부를 설치하였고, 복위 후에도 원종은 여전히 '六事'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즉 각 몽골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78년 쿠빌라이와 충렬왕의 만남은 고려가 '六事' 이행을 약속하고 실행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助軍을 거부하였고,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助軍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요컨대,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에 '六事'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1278년부터 '六事'를 이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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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영국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 문제

저자 : 남철호 ( Nam Cheol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3-35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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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19세기 영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이민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빈곤과 직업,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이질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였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영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 집단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이들을 빈곤한 하나의 동일 집단으로 평가,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하였다. 아일랜드인을 범죄, 도시 문제, 그리고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내모는 것 또한 잘못된 여론에서 비롯된 19세기 영국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그릇된 성심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정착과 직업, 그리고 노동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더 생각나게 한다. 아일랜드 이민자는 여러 분야의 직종에서 영국인과 큰 갈등 없이 삶을 영위하였다.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종교적 이질적 집단 형성과 종교적 갈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민자의 영국 내 정착과 적응의 문제가 더 실재적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의 미사와 예배 참석 방법 등에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점으로 모국인과 아일랜드 이민자 사이에 문제의 소지를 낳았다. 가톨릭은 이민자와 영국인을 구별하거나 이민자를 추방하는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가 관용적인 태도로 서로 화합하고 조절하는 행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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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러시아혁명과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1917~1923)

저자 : 황보영조 ( Hwangbo Yeongj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3-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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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서 노동자 단체들이 특히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실 그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것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서 에스파냐에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독재가 시작되는 1923년까지로 국한하여 다룬다. 이 시기에 그들의 반응과 그 이유가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1917년 러시아혁명은 3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나뉜다. 그리고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권은 곧 이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을 추진했다. 이 시기 유럽에는 또한 1918년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3월 혁명과 11월 혁명, 코민테른 가입 요구 등이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 고유의 혁명 이념과 더불어 그들의 반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 노동자 단체들에 미친 러시아혁명의 영향은 에스파냐공산당 창당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공산당의 창당 과정을 여기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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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일연방공화국에서 이주민의 정치적 참여: 1973년 쾰른 포드공장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저자 : 이용일 ( Lee Yong-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1-4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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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3년 쾰른 포드공장 터키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다. 이것은 주체적인 이주민의 존재를 독일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휴가에서 늦게 복귀한 300명의 터키인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조치였다.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에 미온적이었고, 그것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노조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 반대로 돌아섰다. 파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독일인들과 터키인들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사측과 노동자평의회의 협업 속에서 독일인들의 파업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것이 양측의 유혈충돌로 이어졌다. 결국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파업이 종결되었다. 여러 명이 부상당했고, 추방과 해고가 뒤따랐다. 파업의 결정적인 실패원인은 독일인 노동자들과 터키인 노동자들의 분열에 있었다. 그것은 민족적 패러다임의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기인했다. 파업을 통해 터키인 노동자들은 그것의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손님과 주인을 구별 짓고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했던 이 오래된 권력구조에 미미하지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치적 참여로서 포드공장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독일 이주민의 역사, 더 나아가 독일 연방공화국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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