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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사총> 태평양 전쟁시기 조선인·대만인 참정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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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시기 조선인·대만인 참정권 문제

The Issue of Political Rights of Joseon Poeple and Taiwanese during the Pacific War

이형식 ( Lee Hyoungsik )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사총 10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1월
  • : 387-440(5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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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도조 내각 시기의 참정권 문제
3. 고이소 내각 시기의 참정권 문제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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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내각 시기의 참정권 문제는 주로 제국질서의 동요와 징병제와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버마와 필리핀 독립을 약속한 도조 성명은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인의 독립론을 자극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은 조선독립론을 확산시켰다. 태평양전쟁의 확대와 과달카날 전투 이후 전황이 시시각각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과 대만에 징병제를 시행했지만 그 시행 대가로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에는 일본과 조선 대부분의 정치세력은 동의해 대일협력적인 조선인과 대만인들의 참정권 요구를 억제했다.
참정권 논의는 조선총독 출신의 고이소 구니아키가 내각을 조직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고이소 내각은 정권의 지지기반이 약했을 뿐 아니라 내각의 분열도 심각한 약체내각이었다. 고이소 수상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제국의회 참정권 문제는 내각이 붕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만큼 각의결정 단계에서부터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관할 성청이었던 내무성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다른 성청도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1944년 12월 정치처우개선을 위한 각의결정이 통과된 그 배경과 추진주체에 대해서 고찰했다. 먼저 노르망디 상륙작전, 히틀러 암살계획, 스탈린 성명으로 대표되는 국제관계의 악화이다. 주축국인 독일 패전은 기정사실화되고, 소련을 통해 강화를 모색하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일본을 침략자로 규정한 스탈린 성명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으로 조선에서의 공출할당책임제 및 징용령 실시, 대만에서의 징병제 시행 등 전시동원의 강화는 민심이반과 치안 악화를 초래했다. 미군의 잠수함 공격과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인의 전쟁의지가 추락하고 치안이 악화되었다. 조선은 공습의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공습 하 재만조선인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박해는 연쇄적으로 조선 통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치안 당국과 조선통치관계자는 공습이 조선통치, 전쟁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조선통치관계자들은 재일조선인문제와 참정권문제 해결을 위해 내각 각료, 내무성 관료, 육군, 제국의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내무성은 참정권 문제로 내각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했고, 육군은 전황이 날로 긴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참정권 문제를 적극 지지했다. 이렇듯 참정권문제는 징병제 시행에 대한 반대급부만이 아닌 국제정세의 변화, 전황의 악화, 공습(학살과 반란의 공포), 전시 동원의 강화에 따른 치안 상황 악화라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요인이 작용하였다.
The problem of political rights during the Tojo cabinet period has been discussed mostly with regard to the agitation in the imperial order and the conscription system. Tojo announcement promising the independence of Burma and the Philippines roused the independence theory of Joseon with the war deteriorating, and Cairo declaration by the Allied Forces promising the independence of Joseon made the independence theory of Joseon spread. While the war situation had become worse hour by hour since the expansion of the Pacific War and the Battle of Guadalcanal, the conscription system was implemented in Joseon and Taiwan, yet the guideline that political rights would not be granted in return was agreed by Japan and most of the political power in Joseon, so the demand for political rights by the people of Joseon and Taiwan who were cooperative to Japan was suppressed.
The discussion about political rights was held in earnest when Kuniaki Koiso, a former government general of Joseon, organized the cabinet. However, the Koiso cabinet was a weak one with the feeble foundation supporting the administration and with serious division in it. The matter of the political rights of the Imperial Diet that Prime Minister Koiso had carried forward aggressively faced a lot of opposition from the phase of the cabinet decision even to such an extent as to cause the worries about the collapse of the cabinet. Home Department, the jurisdictional government office, vehemently opposed to it, and other government offices were not favorable, either.
In this thesis, the background and the main agents of the pass of the cabinet decision to improve political treatment in December, 1944, were examined. First, the worsening international relations represented by Normandy Invasion, Hitler assassination plan, and Stalin announcement were investigated. The defeat of Germany as a leading country became a definite fact, and to Japan, which was seeking pacification through the Soviet Union, Stalin accouncement defining Japan as an invader, was such a big shock. Next, The reinforcement of wartime mobilization, for example, the implementation of the collection quota responsibility system and the conscription order in Joseon and the enforcement of the conscription system in Taiwan, resulted in the alienation of public sentiment and the deterioration of public order. As the attack and air raid by American submarines continued in full swing, Japanese will to war dropped, and public order became deteriorated. Joseon wasn’t directly damaged by the air attack, but the law enforcement authorities and those in charge of the rule over Joseon regarded the influence of air attack on the reign over Joseon and war fighting as serious in that the oppression on Joseon people in Taiwan and Japan under air attack could sequentially had a great Impact on the rule over Josen.
Those in charge of the rule over Joseon actively persuaded the cabinet members, Home Officer officials, the army, and the imperial parliament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s of Korean Japanese and political rights. The Home Office took precaution to prevent the collapse of the Cabinet because of the issue of political rights, and the army supported the problem of political rights positively so that it could be of help to the war power with the war becoming fierce day by day. In this way, regarding the issue of political rights, not only the benefit in return for the enforcement of the conscription system, but also the complex and multilayered factors including th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worsening of the war condition, air attack(the terror of massacre and rebellion) and the aggravated public peace following the reinforced wartime mobilization were at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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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5-2021
  • :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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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종묘 친향을 통해 자신의 계승 정당성과 정통성을 과시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종묘 의례 시행의 빈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親臨 절차가 추가적으로 정비되기도 하였다. 국왕이 친림하여 시행하는 誓戒, 傳香祝, 省牲器가 대표적이다. 영조는 明代의 사례나 經傳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에 구상하지 않았던 절차를 정비하거나 이전의 절차를 당대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다. 영조는 친림 전향축, 친림 성생기 절차를 통해 이전에는 국왕이 직접 나서지 않았던 제향 준비절차에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절차의 정비 과정에서 三代의 절차를 참고해서 조선 초엽의 의례를 보강함으로써 자신이 성왕의 통치를 본받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 권위를 바탕으로 제향 참여자들을 감시하고 신칙하였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종묘 제향을 몸소 주도하면서 삼종혈맥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신의 계승정당성을 과시하였는데, 이는 건국 초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2잡지를 통해 본 한말 지식인의 주권인식 연구

저자 : 왕신 ( Wang Che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8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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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를 전후하여 서양 근대 주권개념은 『만국공법』을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전래되었다.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1차 개헌에서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이란 용어가 헌법에 명시된 획기적인 일이다. 이러한 서양 근대 주권 개념이 조선에 전래, 정착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주권 인식은 시기와 계층에 따라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됨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우려했던 사람들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앞장섰다. 이후 한반도 내에 다양한 학회지가 창간되었으며, 여러 논설에서 '주권'이라는 용어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 조완구, 박은식 등 인사들은 후일 임시정부 시기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주권 관련 논설들에서는 당시 지식인들의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헌법』에서 주권 용어 사용 문제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부터 1910년 한일병합 전까지 한반도에서 지식인들이 창간한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서우(西友)』,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등 5가지 잡지를 중심으로 주권 및 관련 용어를 분석함으로써 당시 일부 지식인 계층의 주권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주권이 국가의 구성요소라는 기본 인식이다. 『서우』, 『서북학회월보』, 『기호흥학회월보』 등 5종 학회지에서는 주권이 인민, 토지와 같이 국가 구성의 삼대요소로 다루어진 논설이 많은 편이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국가 구성요소로서의 주권 인식이 기본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주권의 국가와 사회, 정체와 국체 등의 구별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셋째, 일부 지식인들이 주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습득하고 한반도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넷째, 대내적으로 군주주권 인식이 드러났다.

3박정희 정권기 전통 사상에 대한 인식 변화와 국민윤리 교육

저자 : 신항수 ( Sin Hangsu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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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70년대를 전후한 한국 전통 사상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것이 교육에 반영되는 과정을 고등학교 국민윤리 과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전통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민족주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북한과의 체제 대결에 승리할 수 있는 전통에 주목하면서 전통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종홍은 한국 사상사를 성실본위의 무실사상의 흐름으로 정리하였으며, 국민교육헌장에서 효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 1970년대에는 3차 교육과정이 고시되면서 민족주체성과 전통이 부각되었다.
3차 교육과정의 핵심으로 부각된 전통은 민주주의와 반공의 근거로 규정되었다. 국민윤리에서 한국 전통사상 서술의 분량도 늘었으며, 공산주의와 서구문화는 민족 전통과 배치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2차 교육과정에 따른 1971년의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는 전통 사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반면 3차 교육과정의 국민윤리 교과서는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사상을 오늘날 되살려야 할 유산으로 평가하였다. 1975년에 출간된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는 성실과 경애를 한국 전통 사상의 핵심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그였던 박종홍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1979년에 출간된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는 성실과 경애 이외에 충효를 한국 전통 사상의 핵심으로 규정하였다.
3차 교육과정 국민윤리 교과서에 규정된 한국 전통 사상은 실제 한국 유교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 교육을 통해 주입된 일본 유교의 전통과 국체사상의 개념을 한국의 전통으로 소개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기 강조되던 민족주체성의 한 단면이었다.

4북한의 역사 교육체계 확립과 민족해방운동사 인식

저자 : 김재웅 ( Kim Jae-wo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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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북한에서도 역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과제와 직결된 중대 관심사였다. 북한의 정치인들은 자국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해 그들이 직접 참여한 항일투쟁의 경험에 주목했다. 그것은 그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영예로운 소재였다. 따라서 어느 시기의 역사보다도 민족해방운동사를 비롯한 최근사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연구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역사 교육체계가 재건되는 과정과 민족해방운동을 둘러싼 사관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은 북한 역사학이 발원하고 그 성격이 형성되는 양상을 드러낼 수 있다. 오늘날 독자적 학문 영역에 위치하기보다 정치적 목표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는 북한 역사학의 성격 형성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그 시원을 추적하는 일은 현시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5중국 고대 재이설(災異說)의 기원과 성립

저자 : 홍승현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1-19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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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災異를 하늘[天]이 不德한 君主에게 내리는 譴責으로 이해하는 災異說의 근저 및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董仲舒에 의해 완성된 재이설은 독창적인 것이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재이설을 근간으로 종합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 흐르는 天에 대한 敬畏와 敬德的 태도는 흔히 儒家의 天命思想과 道德政治에 기반하고 있다고 이해되었다. 하지만 천명을 내리는 人格的 至上神의 존재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유가 문헌이 아닌 『墨子』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물론 유가의 초기 문헌인 『詩』와 『書』에는 군주의 정치적 成敗에 따라 福祿과 재앙을 내리는 강력한 지상신인 天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문헌이 후대 유가의 정치적 이상이 투영된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西周 및 春秋 시기 제작된 靑銅器 銘文에 따르면 천이 전쟁과 같은 재앙을 내려준다는 내용은 서주 중기 이후에나 등장하는데, 그나마 그것은 통치자의 도덕적 행위와 관련을 맺지 못한 상태다. 요컨대 商周시기 인간에게 재해를 내리는 인격신은 존재하였지만 통치자의 도덕적 행위 여부에 하늘이 반응하여 복록과 재앙을 내린다는 관념은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가 행하는 통치 행위의 성패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는 하늘은 『묵자』에서 출현한다. 하늘은 천자의 善惡에 대해 상과 벌을 내리는데, 그 벌은 질병과 재난, 절기에 맞지 않는 이상 현상 등이다. 그러나 『묵자』에는 여전히 재이설의 또 다른 요소인 敬德的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묵자』에서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전제는 도덕이 아닌 公利였으며, 재해를 없애는 방법은 하늘과 귀신에 대한 경건한 제사로 묘사될 뿐이다.
사실 초자연적인 존재를 의심했던 孔子를 始祖로 하는 유가에게서 하늘을 절대적인 힘을 가진 주재자로, 또 그 하늘이 인간의 활동에 대한 감시와 징벌을 담당한다는 이론이 나오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에 의해 선한 사회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孟子는 그 가능성을 절대의 능력을 가진 主宰神으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군주들을 도덕에 의해 교화하기 위해 '도덕에 의한 天命의 수령'이라는 관계 공식을 만들어 내게 된다. 군주의 자격을 세습이 아닌 도덕적 功績에 의해 인정받게 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들은 천명을 받고 유지하기 위해 경덕적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비로소 재이설의 기본 요소가 마련된 것이다.

6청대 길림의 팔기 관병과 호랑이 진공

저자 : 김선민 ( Kim Seon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9-24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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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길림의 주방팔기와 주둔 관병에 대한 설명은 중국 동북지역에 관한 대부분의 개설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길림·흑룡강 지역에 순차적으로 장군아문이 설치되고, 각지에 주방이 세워지고 관병이 주둔하게 되는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청대 동북에 관한 기존 연구는 대체로 한인과 기인의 관계, 기인의 토지 경작, 한인 문화의 확산 등 한인의 시각에서 팔기제도와 기인을 분석해왔다. 특히 청대 동북의 팔기 주방이 이 지역의 부족민을 통합하여 “청조의 다민족 통일국가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부각시키고, 길림과 흑룡강의 팔기 주방이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하고 동북 변강을 보호했으며 이 지역을 내지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주방 팔기가 지역 사회를 안정시킴에 따라 동북에서 인구와 개간 토지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길림의 주방에서 팔기 관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아직 많지 않다.
『琿春副都統衙門檔』의 만문 사료에는 길림의 팔기 관병들에게 토지경작 뿐만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가 특별히 중시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무수히 많다. 길림장군, 닝구타부도통, 훈춘협령이 주고 받은 공문에 따르면, 19세기까지 길림의 팔기 관병에게 동물을 사냥하여 황실에 진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내지의 직성과 달리 길림의 주방 팔기 관병들에게는 사냥의 의무가 더해져 있었다. 이들은 사냥을 통해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하고, 동시에 사냥 실력을 바탕으로 길림의 자연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잡아서 황실에 바쳐야 했다. 국가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한 길림의 거주민들을 팔기로 편제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다시 이들의 활쏘기와 말타기 실력을 이용하여 길림의 자연을 통제했다. 팔기는 청이 길림의 인적자원과 자연자원을 이용하고 통제하는 핵심 기구였다.

7중일전쟁 발발 이전 베이핑의 시영버스와 관광사업

저자 : 홍영미 ( Hong Young-m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3-27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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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진흥은 난징국민정부 시기 내내 베이핑 도시발전전략의 주제어였다. 대중교통은 도시 기반시설의 중요한 구성요소이자 관광 진흥을 위한 선결과제이기에 대중교통이 베이핑의 도시관광과 도시발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1934년에 『베이핑 유람구 건설계획』에서 '대중 관광버스'의 도급 계획을 밝혔던 시정부는 전차와 민영 장거리 여객버스 등 기존 대중교통의 개선만으로는 관광객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시영버스의 운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창설된 버스관리처는 1935년 8월부터 교외 2개 노선과 시내 2개 노선을 운행하였는데, 영업 수익이 꾸준했던 교외 노선과 달리 초반 영업이익이 부실했던 시내 노선은 시장이 교체된 후 적자 등의 이유로 11월부터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버스관리처는 교외를 중심으로 관광노선을 개발하고 영업범위를 넓혀나가며 베이핑의 관광 진흥과 도시 경제 활성화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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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도시(城市) 基層 사회의 국가-사회 관계를 1950년대 上海市의 주민 자치조직 居民委員會를 중심으로 탐색한다. 특히 선행 연구에서 규명해주지 못했던 거민위원회의 구성, 기능, 권한을 상세히 조망하여 중국공산당의 상해시 기층 사회의 운영에 대한 청사진을 분석하였다. 상해시 당정은 1952년 區 이하 里弄의 주민조직의 典型으로 居民代表會議의 간접 선거 방식으로 居民委員會를 수립했다. 거민위원회는 하부에 문교, 복리, 위생, 조해, 우무, 치안보위의 6개 전문위원회를 두고 지역의 복지를 증진하는 걸 기본적인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 조직은 당-정부에 의해 기층 사회(society)에 속한 자치조직으로 정의내려졌다. 실제로 거민위원회는 지역의 복지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 지원을 국가로부터 전혀 받지 못하고 주민들로부터 모금에 의존해야 했으며 거민위원회 위원들에게는 노동의 대가인 급료가 지불되지 않았다. 또한 거민위원회는 당-국가의 정책이나 대중운동을 보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행에 공권력이나 법적 위력이 수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주민 자치조직으로서의 성격에 앞서 하부 전문위원회의 절반 이상이 지역 공동체가 아닌 당-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봉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거민위원회는 또한 영리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공공 비용을 공영기업 대신 징수했는데 이런 모습은 자치조직이라기보다 국가의 행정 조직 및 기관에 가까운 모습이다. 자치조직과 국가 기구로서의 모습이 혼합된 1950년대 상해시 거민위원회는 기존의 연구가 제시한 국가-사회 관계의 유형 중 '과립조직' 혹은 '거버넌스'에 부합한다. 당-정부의 명확한 주도권 아래 국가와 사회가 함께 지역 사업 제반을 추진해가는 관계가 상해시 리농에서 확립되었던 것이다. 거민위원회의 詳細에 대한 고찰을 통해 추가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은 1950년대 상해시 리농의 국가-사회 관계는 정책 및 대중운동의 추진에 역점을 두고 지역의 복지는 최대한 지역의 자체적인 역량에 의탁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중국 사회에게 부여된 자치는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경감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9중국 근현대의 동북변경과 발해사 연구

저자 : 성희란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5-38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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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의 발해사 연구는 1770년대 학자들에 의해 영고탑(寧古塔) 지역의 옛 성터가 발해 상경용천부임을 고증함에 따라 개시되었다. 청말 동북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받았고 당시 관인·학자들은 이에 대응하여 변강방어를 목적으로 동북사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해사도 함께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발해사 연구가 본격화되고 전문저서가 나타난 것은 청이 멸망한 후 그 유신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김육불이 『발해국지장편』을 탄생시킴으로써 1930년대 초에 발해사 연구는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동북지역이 일본에게 함락된 후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부터 발해사 연구는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동북 지역·변강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동북 지역·변강연구는 학술적인 측면보다는 현실 정치적인 가치가 컸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고고활동을 필수로 하는 기본건설 방침 하에 동북지역의 발해왕릉에 대한 조사가 전개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발해사 연구의 맥이 거의 끊어졌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실시됨에 따라 동북지역 학자들은 발해사에 대한 연구를 재개하였다. 통일적 다민족국가이론에 근거하여 진행된 동북 지역·변강연구의 일환으로서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소수민족정권·기미주부였다는 견해에 일치를 보이고 있다.

10태평양 전쟁시기 조선인·대만인 참정권 문제

저자 : 이형식 ( Lee Hyoungsi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7-440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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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내각 시기의 참정권 문제는 주로 제국질서의 동요와 징병제와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버마와 필리핀 독립을 약속한 도조 성명은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인의 독립론을 자극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은 조선독립론을 확산시켰다. 태평양전쟁의 확대와 과달카날 전투 이후 전황이 시시각각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과 대만에 징병제를 시행했지만 그 시행 대가로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에는 일본과 조선 대부분의 정치세력은 동의해 대일협력적인 조선인과 대만인들의 참정권 요구를 억제했다.
참정권 논의는 조선총독 출신의 고이소 구니아키가 내각을 조직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고이소 내각은 정권의 지지기반이 약했을 뿐 아니라 내각의 분열도 심각한 약체내각이었다. 고이소 수상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제국의회 참정권 문제는 내각이 붕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만큼 각의결정 단계에서부터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관할 성청이었던 내무성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다른 성청도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1944년 12월 정치처우개선을 위한 각의결정이 통과된 그 배경과 추진주체에 대해서 고찰했다. 먼저 노르망디 상륙작전, 히틀러 암살계획, 스탈린 성명으로 대표되는 국제관계의 악화이다. 주축국인 독일 패전은 기정사실화되고, 소련을 통해 강화를 모색하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일본을 침략자로 규정한 스탈린 성명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으로 조선에서의 공출할당책임제 및 징용령 실시, 대만에서의 징병제 시행 등 전시동원의 강화는 민심이반과 치안 악화를 초래했다. 미군의 잠수함 공격과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인의 전쟁의지가 추락하고 치안이 악화되었다. 조선은 공습의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공습 하 재만조선인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박해는 연쇄적으로 조선 통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치안 당국과 조선통치관계자는 공습이 조선통치, 전쟁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조선통치관계자들은 재일조선인문제와 참정권문제 해결을 위해 내각 각료, 내무성 관료, 육군, 제국의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내무성은 참정권 문제로 내각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했고, 육군은 전황이 날로 긴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참정권 문제를 적극 지지했다. 이렇듯 참정권문제는 징병제 시행에 대한 반대급부만이 아닌 국제정세의 변화, 전황의 악화, 공습(학살과 반란의 공포), 전시 동원의 강화에 따른 치안 상황 악화라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요인이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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