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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청일전쟁기(1894~1896) 주한일본영사의 영사보고와 ‘첩보’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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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기(1894~1896) 주한일본영사의 영사보고와 ‘첩보’ 활용

Utilization of a Consular Report and ‘Intelligence’ of Japanese Consuls in Korea During the Sino-Japanese War (1894~1896)

최보영 ( Choi Bo Young )
  •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 : 동국사학 6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12월
  • : 221-264(44pages)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일본의 영사보고규정 수립과 영사보고
Ⅲ. 주한일본영사의 정보원과 첩보 활동
Ⅳ. 주한일본영사의 거류민 보호와 첩보 활용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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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청일전쟁기 주한일본영사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활용한 실태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항기 일본영사는 한국 내 정보를 취득 · 수합 · 정리하여 영사보고서 또는 첩보의 형태로 주한공사와 본국 외무성에 공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일 본영사의 정보수집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유통과정과 그 활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한국 병탄은 군사력과 외교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전역에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군을 이식 · 이주시켜 상업상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이를 침탈의 토대로 활용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기 혼란한 상황에서는 첩보를 활용하여 거류지의 자국민을 안정화하거나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유리하도록 지원 · 협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본영사의 첩보활동이 한국민의 대일 인식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유익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real condition that Japanese consuls illegally obtained and utilized information targeting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Sino-Japanese War. Japanese Consuls in Korea played a key role in obtaining, collecting, and arranging information in Korea and supplying them to diplomatic ministers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in their own country in a form of reports and intelligence during the open port period. Nevertheless, we have not taken notice of information collectors of Japanese consuls and have not been interested in the distribution process and utilization of the information until now. As a result, the recognition that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was unilaterally done by military power and diplomatic power was dominant. By the way, Japan made different types of people including merchants move and migrate to the whole area of the Korean Peninsula, seek commercial interests, and collect detailed information on Korea so that they could be utilized as the foundation of dispossession. Especially in the chaotic situation of the Sino-Japanese War, the fact that Japan stabilized its fellow countrymen in international settlements by utilizing intelligence or supported and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military to be advantageous for its war was confirmed. Awareness of Korea through these information was the high level that Korean people could not resist on a national scale when Japan annexed Korea in 1910. That is, espionage of Japanese consuls in Korea can be found to be very beneficial to understand Korean people’s recognition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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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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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대 중기 미가와 인구, 그리고 화폐 -건륭연간 미가변동 해외연구 검토-

저자 : 홍성화 ( Hong Sung-hwa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4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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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청대 건륭년간의 물가 상승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여러 학설들을 정리하였다. 초기 彭信威와 全漢昇는 주로 재정 지출과 인구 증가를 각각 원인으로 상정하였다. 그 뒤에는 내재적인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 특히 세계경제와 의 연동 속에서 은유입을 주요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점차 통용력을 얻게 되었다. 다만 건륭년간을 두 시기로 나누어서 1736~1775년은 인구증가가 화폐증가 보다 빠르고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른 시기여서 경제적으로 불황기였으며, B期인 1776~1795년은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르고 농업성장이 인구증가보다 빠른 시기로 호황기라고 보았다. 반면 岸本美緖는 이에 대해서 건륭초기 역시 호황기였다는 논지에 기반하여 이에 반박하였다.
黑田明伸을 비롯하여 폰 글란, 彭凱翔 등의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상당히 많은 경우, 다시 해외로부터의 은유입을 강조하기 보다는 중국 사회의 내부 질서 문제로 다시 복귀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청대 물가 변동의 원인을 단순히 인구증가나 화폐 증가라는 식으로는 물가변동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해했다고 말하기 불충분해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복잡성을 낳은 청대 중국사회가 어떠한 시장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규명해야 할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琉球ㆍ日本関係における冠服と詔勅

저자 : 渡辺美季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9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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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 동유라시아 세계에서는 中國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성립하여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中華'의 皇帝와 '夷狄'의 首長 사이에 맺어진 上下/君臣 관계를 기축으로 구상된 것으로 中華皇帝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夷狄首長에게 여러 물품을 頒賜하였다. 여기에서 중심이 된 물품은 皇帝의 명의로 발급된 詔令文書나曆· 王印· 冠服(冠과 服)으로 이외에도 본인의 글씨나 工藝品 등이 頒賜되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무엇보다도 양자의 君臣關係를 상징하는 '증표'였는데, 다른 한편으로 당사자 간의 이용에 머무르지 않고 이차 · 삼차적인 수용 · 이용 · 소비가 전개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본고에서는 17세기초 이후에 중국(明淸)에 朝貢하면서도 일본(德川政權)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던 琉球를 중심으로 琉球와 일본 관계에서 '皇帝의 頒賜品'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었고 어떻게 이용 · 소비되었는지를 冠服과 詔勅(詔書와 勅諭)를 예로 하여 일본의 사례(히데요시 冊封 시의 頒賜品) 와 비교하면서 검토 · 고찰하였다. 이로부터 琉球가 中華世界에서 갖는 자신의 지위를 일본에게 강조하여 일본에서의 자국 평가나 존재감을 높이는 도구로서 '皇帝의 頒賜品'을 활용하고 있던 것을 지적하였다.

3청(淸) 칙사(勅使)· 통관(通官)에의 조선 호피 · 표피 사여와 무역

저자 : 서인범 ( Seo In-beom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9-14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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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후금 조정에 公禮單을 바치는 외에도 胡差(혹은 金差)에게 별도의 私禮單을 지급하였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에게도 별도의 예단을 지급한 적이 있었다. 후금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예단을 강제하였던 것이다.
청조 성립 이후 勅使 편성은 정사 · 부사 각 1명, 通官 수 명, 提督 등으로 구성 되었다. 칙사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날까지 수차례의 宴會가 베풀어졌고 그 때마다 조선은 그들에게 예단을 지급하였다
특히 호피보다는 표피가 예단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청조가 성립한 이듬해 정사 · 부사에게 각각 호피 6장, 표피 29장이 지급되었으나, 태종 홍타이지가 죽고 順治帝가 등극하자 호피 1장, 표피 14장이 경감되었다. 황제의 등극을 자축하는 동시에 조선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선정을 베푼다는 의식에서 이러한 조치가 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에도 칙사 2명에게 표피 각 1장씩, 칙사 이하 都給禮單으로 정사 · 부사 각각 10장씩이 지급되었으나, 건륭제가 등극하자 각각 5장씩으로 줄어 들었다.
강희제의 조선이 바치는 歲幣 품목 중 紅豹皮의 全免, 건륭제의 칙사에게 공예 단으로 지급하는 표피의 半減 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 한편에서 통관들은 都求請· 別求請 명목으로 다량의 표피를 확보하였다.
통관들을 위시해 칙사 · 提督, 瀋陽의 황실과 八旗들도 표피 무역에 뛰어들었다. 진상과 예단용 표피가 감소하자 그 부분을 보충할 목적으로 강제성을 띤 무역이 행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던 조선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칙사나 통관이 요구하는 물품이 끝이 없어 이들이 거쳐 간 州· 郡은 피폐할 정도였다.

4732년 발해(渤海)와 당(唐)의 전쟁(戰爭) 과정 재검토

저자 : 임상선 ( Lim Sang-su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8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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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渤海의 唐 登州 공격으로 시작된 발해와 당의 전쟁은 여기에 新羅도 참여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발해와 당의 갈등의 요인인 黑水靺鞨 문제와 大門藝의 唐으로 망명의 시기 판별은 흑수말갈의 入唐 시기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册府元龜』의 기록에 의하면, 발해와 당의 전쟁 이전에 흑수말갈이 마지막으로 입당한 시기가 開元 18년(730) 5 월이므로, 발해 武王의 흑수 토벌과 대문예의 당 망명은 그 이후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대문예의 처리를 둘러싸고 발해와 당 간에 國書가 교환된 시기는 이때로부터 개원 20년(732) 登州 공격 이전 大姓取珎 등의 발해 사신이 마지막으로 입당한개원 19(731)년 10월까지이다.
발해 무왕이 「敕渤海王大武藝書」 1首를 접수하고 당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맞선 대응의 결과가 당이 발해를 침입할 때의 전진 기지인 登州 지역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최근 발견된 韦俊의 墓誌에 의하면, 발해의 등주 공격이 은밀히 진행되었고, 발해가 공격한 곳은 자사 위준이 근무하던 登州였다. 발해가 唐을 공격하게 된 원인으로는 흑수말갈을 둘러싼 대립, 대문예에 대한 양국의 상반된 인식, 발해국의 王位와 연관, 그리고 8세기 전반 발해를 비롯한 당, 거란, 돌궐 등의 국제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가 登州 공격 이후 당에 사신을 다시 파견한 것이 개원 23년(735) 3월이다. 이때 日本國 사신과 함께 武王이 그 동생인 蕃을 보내 당에 入朝하였다. 발해의 '背德'과 '誤計'가 언급된 「敕渤海王大武藝書」 2首와 4首는 개원 23년(735) 3월 전후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해와 당은 개원 23년(735) 무왕이 그 동생인 蕃을 보내 入朝하고, 당도 이를 수용하면서 교류를 재개하게 되었다.

5조보와 실록

저자 : 김경수 ( Kim Kyung Soo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1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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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에는 군주의 동정과 인사 내용 및 국정 시행사,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승정원에서 발행된 일종의 관보로, 오늘날의 신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조보는 국정 시행사가 지방 소읍까지 전달되어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통을 위한 언론 기능을 수행했다. 비밀주의 원칙에 따라 볼 수 없었던 사초에 비해, 공개성이 담보된 조보는 당대 역사와 정국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자료였다. 무엇보다 『실록』 편찬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사초와 동일하게 인식되었음을 증명한다. 조보와 실록의 연관성과 사학사적 의미 부여가 가능한 이유이다.

6청일전쟁기(1894~1896) 주한일본영사의 영사보고와 '첩보' 활용

저자 : 최보영 ( Choi Bo Young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1-26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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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청일전쟁기 주한일본영사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활용한 실태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항기 일본영사는 한국 내 정보를 취득 · 수합 · 정리하여 영사보고서 또는 첩보의 형태로 주한공사와 본국 외무성에 공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일 본영사의 정보수집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유통과정과 그 활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한국 병탄은 군사력과 외교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전역에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군을 이식 · 이주시켜 상업상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이를 침탈의 토대로 활용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기 혼란한 상황에서는 첩보를 활용하여 거류지의 자국민을 안정화하거나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유리하도록 지원 · 협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본영사의 첩보활동이 한국민의 대일 인식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유익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7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상해(上海)-국내(國內)간 교통· 통신망

저자 : 김은지 ( Kim Eun-jee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5-30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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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국내에 대해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였다. 국내를 대상으로 한 활동은 어느 한 부서에 국한되지 않고 내무부, 교통부, 군무부, 재무부, 지방선전부를 통해 전개되는 것으로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국내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해와 국내를 오갈 수 있는 안전한 교통망과 통신망이 구비되어야 했다. 이를 담당한 부서는 교통부로 국내에 임시교통사 무국과 관할 교통사무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중국과 국내의 경계에 있는 안동현 내 안동교통사무국이 설치될 수 있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의 설치는 안동현 내 이륭양행과 쇼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상해와 국내 각지를 오가는 중간 거점으로서 그 몫을 해냈다. 많은 임시정부원들이 이곳을 통해 국내로 들어가거나 상해로 되돌아왔다. 임시정부원이 이용한 잠입 경로에는 커다란 특징이 있다. 주로 출신지역을 기준으로 목적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안동교통사무국 관할 지국으로는 의주교통지국, 선천교통지국, 평양교통지국, 사리원교통지국이 있었다. 이는 경의선 철길을 따라 설치된 것으로 임시정부의 철도를 따라 통신망을 구축하고자 한 결과이다. 또한 해당 지역 내 비밀결사를 이용 하여 안전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교통지국을 설치했다는 특징도 있다. 다량의 임시정부 문서들을 국내로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안동교통사무국으로 송달해야 하였다. 안동교통사무국에 도착한 문서들은 관할 지국으로 전달되어 국내 각지에 배달되었다. 이러한 선전물은 임시정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다양한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선전물이 되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임시정부를 신뢰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8만주국 시기 '한인 개척민' 이주 설계자 윤상필의 생애와 활동 : 제국주의 일본과의 협치와 굴종

저자 : 김주용 ( Kim Joo Yong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3-33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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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필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였다. 탁월한 능력과 체력을 겸 비한 그는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그 가 군인이자 행정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의 일이다. 중국 패잔병의 공격을 받은 한인들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는 1935년 군복을 벗고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민들은 그의 손끝으로 만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영민하고 비범한 인재였던 윤상필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의 오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외면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96 · 25전쟁과 한국 보건의학계 및 보건학의 형성

저자 : 이동원 ( Lee Dong-wo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9-37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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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 · 25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보건의학계와 보건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보건의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주로 1960년대 이후를 주목했는데, 이는 일정하게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6 · 25전쟁의 영향력과 1950년대의 변화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6 · 25전쟁 이후 보건 의학계와 보건학의 형성 과정을 미군정과 유엔군 및 한국정부의 공중보건(Public Health) 활동과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인 의사들의 활동 속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한범석, 윤유선, 백행인, 주인호, 김인달, 양재모, 권이혁, 구연철, 김명호, 방숙, 박재빈 등 한국인 의사들이 한국 보건의료체계 형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의 학부나 경성, 세브란스, 대구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여 일본식의 '이론 중심 교 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6 · 25전쟁을 계기로 현장에서 임상 경험을 쌓았고, 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임상 중심 교육'이라 할 수 있는 미국식 보건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이들은 195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서울의대의 미네소타 프로젝트 보다 더 앞서서 미국식 보건학을 적극적으로 수용, 도입하면서 보건의학계의 1세대로서 주요 의과대학의 예방의학교실 및 보건대학원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미국식 공중보건학(public health)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계기는 보건진료소 및 보건소의 확산과 이를 뒷받침한 공중보건원의 창설이었 다. 1953년 9월 공중보건원(School of Public Health, Korea)의 창설은 전국 단위에서 크게 증가한 보건진료소와 보건소를 뒷받침할 보건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중보건원을 통해 미국식, 혹은 WHO식 '공중보건' 개념이 전파 되었고, 이렇게 전파된 '공중보건' 개념은 보건진료소 및 보건소에서의 보건의료 임상 활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현되었다. 따라서 공중보건원은 한국의 보건의학계가 기존의 일본식 '공중위생' 개념을 바탕으로 미국식 '공중보건' 개념을 수용하여 한국식 보건학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10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시기 회서(淮西) 번진(藩鎭)의 성격 -오소성(吳少誠)의 태도를 중심으로-

저자 : 정병준 ( Cheong Byung-ju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5-41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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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왕의 난 이후 정원 시기(785~805)에 淮西節度使 吳少誠이 보인 태도를 통해 당시 번진체제의 기본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오소성은 할거 번진 이면서도 다른 할거 번진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즉 기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 기보다는 주변으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매우 공격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다른 할거 번진들도 기존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오소성은 그 행동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덕종도 오소성에 대해서는 다른 대응을 하였다.
정원 15년(799) 8월 오소성이 陳許 번진을 공격하자 마침내 10월 덕종이 17개번진에게 오소성 토벌을 명하였다. 그 안에는 할거 번진인 成德· 幽州· 魏博· 淄靑도 있었는데, 이는 번진들에 대한 당시 덕종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소성에 의한 혼란을 틈 타 네 번진도 언제든 세력 확장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듬해(800) 5월 당군이 오소성에게 대패하자 산남동도절도사 우적이 남쪽의 漢水 남쪽 지역을 점거할 뜻을 품었는데, 이는 당조와 번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 누 구든 반역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전선이 조금 교착되자 같은 해(800) 10월 오소성이 갑자기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토가 자칫 다른 번 진에게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덕종의 오소성 토벌 실패는 아직 조정이 할거 번진을 제압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당시 할거 번진의 세력은 조정보다 우위에 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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