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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지역 삼국시대 횡혈식석실묘의 구조특징과 축조주체 검토

A Study on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and building groups of horizontal-style stone chamber tombs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of Gyeonggi region

김진영 ( Kim¸ Jinyoung )
  • : 단국사학회
  • : 사학지 60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12월
  • : 23-82(60pages)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삼국 횡혈식석실묘의 구조특징
Ⅲ. 삼국 횡혈식석실묘 번별기준
Ⅳ. 삼국 횡혈식석실묘의 축조주체 검토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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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지역은 삼국이 모두 영유하였던 지역으로 삼국의 횡혈식석실묘가 공존하였고, 박장에 구조적 동질성이 강하여 축조주체 변별에 어려움이 많아 삼국의 고분문화 규명에 상당한 오류를 초래하였다. 그렇기에 경기지역 삼국시대 횡혈식석실묘 중 축조주체 귀속에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는 석실묘의 구조적 차이를 검토하여 축조주체를 명확히 하였다.
기존 축조주체 관련 연구성과와 더불어 입지와 석실의 평면형태, 규격성, 축조방법, 장법 등을 보다 면밀히 검토한 결과, 기존 연구에서 한성기 백제석실로 비정한 것은 고구려·신라와의 묘·장제 차이가 뚜렷하여 재론의 여지가 적은 반면, 신라 석실로 보고된 상당수 석실은 고구려 영역기에 조영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아울러 축조주체 논란이 지속되었던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은 가락동 3호와 5호를 제외하고는 신라 석실임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연구결과를 통해 경기지역에 이식된 삼국의 고분문화가 더욱 선명해졌고, 고분을 통해 경기지역을 영유하였던 삼국의 지배양상과 사회구조를 구체화하는데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The Gyeonggi region was an area occupied and contested by all the Three Kingdoms of Silla, Goguryeo, and Baekje, thus the horizontal tombs of the Three Kingdoms coexist. Due to the lack of burial relics and strong structural homogeneity, however, there were considerable errors and difficulties in the identification of the tomb's origins. Therefore, the structural differences of each stone chamber tomb that had room for reconsideration were clarified among the horizontal stone chambers of the Three Kingdoms era in Gyeonggi.
After a closer examination of the location and the floor plan, standard dimensions, construction method, and funeral methods of the stone chamber, along with the research findings related to the existing construction sites in previous studi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Baekje stone chamber tombs and burial mounds of Goguryeo and Silla was clear, so there was little room for reconsideration. However, in Deokeun-dong in Goyang, Deoksori in Namyangju, Soha-dong No. 3 in Gwangmyeong, Seondong-ri Nos. 5 and 6 in Gwangju, Eobiri in Yongin, Ichiri No. 9 in Icheon, and Nos. Na-7 and 8 in Eumseong's Munchon-ri, many of the stone chambers previously reported as Silla stone chambers were found to have been built in the Goguryeo occupation time. In addition, the tombs in Garak-dong and Bangi-dong, where the controversy over who built them continued, further consolidated their status as Silla stone chamber tombs, except for Garak-dong Nos. 3 and 5. Through the results of studies such as this, cultures of the Three Kingdoms transplanted in the Gyeonggi region has become clearer, and it is expected that errors in estimating the governance pattern and social structure of each of the Three Kingdoms that had occupied the area through the tombs may be minim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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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석기시대 입지 환경에 따른 따비의 제작방법 -암사동·운서동 유적 출토품을 중심으로-

저자 : 김영준 ( Kim¸ Youngju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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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신석기시대에 구릉지와 충적지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되는 따비의 제작기술 차이를 확인하고, 이러한 차이가 왜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한강 본류역에는 지형상 구릉지와 충적지에 신석기시대 주거지 유적이 확인되며, 이들 유적에서는 대표적인 뗀석기로 따비가 공통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행연구들은 따비의 형태분류가 중심이어서 이들 유적 출토 따비를 하나의 범주로 분류하여 입지 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기술적 측면을 소홀히 다루었다.
충적지를 대표하는 암사동 유적 출토 따비의 경우 돌감으로는 돌결면이 발달하지 않은 조직이 치밀한 자갈돌 각섬암과 응회암을 이용하였고, 구릉지를 대표하는 운서동 유적 출토 따비의 경우 돌결면이 매우 발달한 모난돌 편암을 이용하였다.
입지환경 별 따비의 밑감은 암사동 유적의 경우 너비격지를 운서동 유적의 경우 모난돌 조각을 이용하여 따비 제작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제작기술의 차이는 결국 입지환경에 따른 사용방법에 차이, 즉 장착 유무에서 기인하였다고 판단된다. 충적지 유적인 암사동 유적 따비는 장착없이 사용된 도구로 파악되며, 구릉지 유적인 운서동 유적 따비는 목제에 장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따비임이 제작기술에서 확인된다.

2경기지역 삼국시대 횡혈식석실묘의 구조특징과 축조주체 검토

저자 : 김진영 ( Kim¸ Jinyoung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82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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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지역은 삼국이 모두 영유하였던 지역으로 삼국의 횡혈식석실묘가 공존하였고, 박장에 구조적 동질성이 강하여 축조주체 변별에 어려움이 많아 삼국의 고분문화 규명에 상당한 오류를 초래하였다. 그렇기에 경기지역 삼국시대 횡혈식석실묘 중 축조주체 귀속에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는 석실묘의 구조적 차이를 검토하여 축조주체를 명확히 하였다.
기존 축조주체 관련 연구성과와 더불어 입지와 석실의 평면형태, 규격성, 축조방법, 장법 등을 보다 면밀히 검토한 결과, 기존 연구에서 한성기 백제석실로 비정한 것은 고구려·신라와의 묘·장제 차이가 뚜렷하여 재론의 여지가 적은 반면, 신라 석실로 보고된 상당수 석실은 고구려 영역기에 조영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아울러 축조주체 논란이 지속되었던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은 가락동 3호와 5호를 제외하고는 신라 석실임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연구결과를 통해 경기지역에 이식된 삼국의 고분문화가 더욱 선명해졌고, 고분을 통해 경기지역을 영유하였던 삼국의 지배양상과 사회구조를 구체화하는데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3고려와 중국 북방 요장 출토 상감자기의 상관성 재검토

저자 : 홍보경 ( Hong¸ Bokyoung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3-11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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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자 상감장식은 고려 특유의 도자 장식기법으로 알려져 있어 그 기원에 대한 연구가 20세기 이래로 다수 진행되었다. 연구 초기에 고려 도자 상감장식은 금속기 등의 기타 공예품의 장식기법을 모방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90년대 들어 중국 북방지역 요지에서 상감자기가 확인되면서 고려와 중국 북방지역 도자 상감장식의 관계가 주목을 받았고, 고려 상감자기 제작에 중국 북방지역 요장의 영향이 있었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국내에서 고려와 북방지역 상감장식의 관계와 기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비하다. 이에 필자는 고려자기 상감장식과 비슷한 시기 중국 북방지역 자기 상감장식의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본고에서는 먼저 고려 시원기 상감자기와 만당시기 중국 황보요 상감자기를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양자 모두 시원적 성격이 강하며, 황보요의 흑지백상감자는 고려 초기 요지에서 출토된 일부 상감자기와 시문방식이 유사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서로 시문된 기종이 다르고 문양내용 상에 차이가 있어 이 외의 유사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흑지백상감자기 보다 이른 시기에 다른 성격의 상감자편이 확인되어 그 이전에 이미 상감자기를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도자 상감장식은 중국 북방지역과 한반도에서 우연한 계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12∼13세기 고려 상감청자와 중국 혼원요 청자상감의 비교를 통하여 혼원요 청자상감은 고려의 청자백상감과 외관상 유사해 보일 뿐, 시문기법 상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혼원요 청자상감이 백상감 기법만을 이용하는 것에 반해 고려 전성기 상감청자는 여러 시문방식을 활용해 혼원요 청자상감과 다른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고려와 중국 북방지역의 도자 상감장식을 비교해 본 바 서로 관련성을 찾기 어려웠다. 양자의 비교만으로 고려 상감장식의 기원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본 연구가 기존에 제시되었던 고려와 중국 북방지역 자기 상감장식의 관계에 대한 재검토가 되기를 바란다.

4고려 말~조선 초 백자의 위상(位相)변화와 배경

저자 : 김귀한 ( Kim¸ Kwiha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4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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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세종대 이후 백자의 소비가 확대되는 배경을 백자의 위상 강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 말∼조선 초 자기의 중심은 청자였다. 백자는 청자에 비해 품질이 낮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1410∼1420년대 청자는 그릇의 전면에 문양을 빽빽하게 시문하는 등 장식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백자는 백토(白土)가 매장된 일부 지역에서만 제작되었다. 고려 말과 비교하여 품질 또한 개선되지 못하였다.
조선 초 조정은 명에 진공(進貢)하는 금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명으로부터 금은을 면공(免貢)받고자 조선에서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행히 1429년 조선의 의도대로 금은은 면공되었다. 이후 세종은 명 사신에게 금은기를 소비하지 않음을 선전(宣傳)해야 했다. 물론 조선 왕실은 계속 금은기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금은기의 대체재(代替財)를 마련할 필요성 또한 절감하였다. 금은기는 당시 소비되던 기명 가운데 가장 위계(位階)가 가장 높았다. 따라서 금은기의 대체재는 금은과 동등하거나 금은 다음으로 위계가 높은 재질로 제작된 그릇이 선택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세종대는 명 선덕제가 청화백자를 사여하는 등 중국 백자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명과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선덕제의 반사품(頒賜品)은 왕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다. 세종에게 있어 선덕제의 하사품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면서도 명과의 외교 관계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의도로 백자를 어기(御器)로 선택하였다.
세종이 백자를 어기로 채택한 후 백자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은 변화되었다. 백자의 위상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최고 권력자와 동일한 재질의 그릇을 소비하려는 욕구로 인해 백자의 수요는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430년대부터 경질백자(硬質白磁)가 제작되었고, 1440년대는 비교적 뛰어난 품질의 백자가 생산될 수 있었다.

5용재 이종준의 생애와 추숭에 대한 연구

저자 : 임근실 ( Lim¸ Geun-sil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1-16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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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재 이종준의 생애와 사후 추숭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종준은 성종과 연산군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희생된 인물이다. 그는 가학(家學)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은 후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였다. 그는 무오사화에 희생되어 유배형을 받아 귀향을 가던 중 다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가솔들은 안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고, 이후 그의 가문은 향촌 내부의 활동에만 주력하였다.
이종준은 언로(言路) 활동과 문명(文名)으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관료였다. 이종준은 시서화(詩書畵)에 재주를 가져 많은 일화를 남긴 문인(文人)이었다. 또한 이종준은 『유산악부(遺山樂府)』·『유양잡조(酉陽雜俎)』 등의 서적을 간행하고, 경상도 지도를 그렸으며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를 저술한 학자였다. 그리고 이종준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남효온(南孝溫)·권오복(權五福)의 친우였다.
이종준의 사후 추숭 과정은 그의 신원(伸冤)과 추증(追贈), 묘소 정비와 묘도문자(墓道文字) 저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의 설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종준은 16세기에 신원·복관이 되었고, 17세기에 추증되었다. 이종준의 묘소 정비와 묘도문자 저술은 주로 17세기에 이루어졌다. 묘소의 봉분을 다시 세우고 묘제(墓祭)를 지냈으며, 묘도(墓道)를 다시 세웠다. 이 시기에 묘표음기(墓表陰記)와 묘갈명(墓碣銘)도 작성되였다. 다음은 이종준을 제향하는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柏麓里社)의 설립이었다. 경상도 안동의 금계리에 건립된 금계리사(金溪里社)는 경광서원으로 발전하여 이종준과 장흥효(張興孝)를 제향하였다. 경상도 봉화의 백록리사는 이종준과 그의 동생인 이홍준을 함께 제향한 사우였다. 백록리사는 이후 봉화지역의 향현(鄕賢)을 계속적으로 추향하는 지역의 대표적인 사우였다. 이종준을 추숭하는 마지막 사업은 문집의 발간이었다. 사화로 인하여 가문이 위태로워진 이종준의 유고는 순조시대에 와서야 수습되어 간행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정리되었기 때문에 산일된 문장이 많았고, 문집이 완비되기까지 재간과 삼간을 거치며 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완비되었다.

6독립운동의 성과와 계승

저자 : 한시준 ( Han¸ Seeju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7-20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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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을 기점으로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1945년 이전시기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와 싸운 것만 아니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를 변화 발전시킨 것들이 수없이 많았고, 이러한 경험들이 해방 후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거둔 성과가 적지 않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해 4월 11일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새롭게 건립한 국가(대한민국)였고, 정부(임시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의 역사가 크게 뒤바뀌었다는 점도 있다. 단군의 고조선 이래 1910년까지 이어져 오던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전제군주제의 역사가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운동을 통해 마련된 것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였지만, 이들은 3년만에 물러났다. 미소 양군이 물러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43년 카이로회의에서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거두어낸 성과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생성된 정신적 자산도 있다. '독립정신'이다. 독립정신은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고 도전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일본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흔히 독립운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비유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바위를 부수려고 도전하였고, 결국 바위는 부숴졌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 그리고 현재의 국회와 국군은 모두 독립운동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한 것이다. 국회도 해방 후 새롭게 설립한 것이 아니다. 1919년 4월 11일에 설립된 임시의정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군도 마찬가지다. 흔히 국군의 뿌리는 미군정에서 설립한 국방경비대에 있는 것으로, 국군의 주체는 일본군 출신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군정은 건군을 추진하면서 일본군 출신 이응준의 자문을 받았지만, 일본군을 내세우지 않았다. 광복군을 내세웠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랬다. 초대 국방부 장관과 차관에 이범석과 최용덕을 임명하였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광복군 출신들을 연이어 임명하였다.
해방 후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가 크게 변화 발전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로 계승되고 발전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그리고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 시대에 살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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