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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세종 이성의 첫 발굴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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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성의 첫 발굴과 의의

김정기
  • : 한국고대학회
  • : 선사와 고대 6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12월
  • : 271-290(20pages)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세종시의 역사지리적 배경과 이성의 문헌기록
Ⅲ. 2020년 조사된 내용
Ⅳ. 이성 발굴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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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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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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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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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한·중 출토 한경(漢鏡)의 부장배경 비교

저자 : 홍인국 ( Hong¸ In-goo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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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한 중·후기에서 후한 전기에 이르는 기원 전후 100여 년간을 대상으로 중국에서 성행한 漢鏡의 용례를 검토하여 한반도로 유입된 이후에도 매장관습이 유지되어 부장되었는지를 비교해 보았다.
漢代 사람들에게 있어 동경은 일상생활과 밀접한 화장용 도구이자, 길상의 상징물로서 내세적 세계관을 담고 있어 전통적인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전한에서 후한시기의 여러 제후와 왕후의 무덤에는 직경 20cm 이상의 동경이, 중·하위 관리계층은 직경 15cm 전후의 동경을 주로 매납하는 부장양상이 나타났다. 그러한 한경은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유입되는데, 서북한지역과 동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정치체들의 지배층 무덤에서도 유사하게 출토되어 주목된다.
따라서 중국의 漢과 한반도의 지역정치체간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한경에도 제후에게 부여되었던 '권위의 상징'인 위세품의 사회적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특히 기원후 1세기 동남부지역에서는 다뉴경을 대신한 한경이 전한 중·후기에 성행한 용례처럼 종교적 신물이자,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상위계층의 위세품으로 인식하였다.
원래 한반도에는 오랫동안 다뉴경을 제작해 온 전통이 있었는데, 漢으로부터 보급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무기류에 보다 관심이 쏠리면서 식었다가, 전혀 다른 패턴의 세련된 한경이 들어오면서 동경을 다시 선호하게 되었다. 상위계층의 무덤에 부장된 다뉴경은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직접적인 지배의 도구로 사용된 통치의 상징물이었다면, 한경은 중국 전한 중기에서 후기에 나타난 용례처럼 종교적 신물이자,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통치의 획득물로 상위계층의 위세품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점토대토기 문화의 확산과 고조선, 고구려, 한의 관계

저자 : 김남중 ( Kim¸ Nam-j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6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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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출현하여 한반도로 확산된 점토대토기 문화를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한(韓)의 관계, 고구려와 마한의 관계를 다루었다. 중국 동북 지역은 고조선 또는 예맥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집안의 고구려 고분 벽화의 내용, 고구려 발상 지역인 환인·집안 일대에도 점토대토기가 확인된다는 점 등에서 고조선과 고구려는 관련이 깊은 세력임을 알 수 있다. 남한 지역으로 확대된 점토대토기 문화는 토착 청동기 문화와 결합하며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서부 지역에는 선주 점토대토기 문화와 관련 있는 진국이, 만경강 일대에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유입된 준왕계 세력과 관련있는 한(본[本] 마한)이 이루어졌다. 영남 지역은 서남부 지역 점토대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변·진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에 진(진국), 한(마한) 및 진과 한이 결합한 진한은 모두 고조선·예맥과 같은 계통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목지국에 의해 통합된 진한은 영남지역 세력의 대중국 교섭 과정에서 121년 이전에 다시 마한(후[後] 마한)과 진한으로 구분되었다. 중국에서 그들과 꾸준히 교류 관계를 유지한 영남 지역 세력을 진한으로 표기하는 대신 목지국 중심의 다른 진한 세력을 이와 구별하기 위해 마한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 것이다. 마한(후 마한)은 121·122년에 고구려 주도의 현도성 공격에도 참여한바 있다. 다만 이때의 마한은 목지국이 아닌 낙랑 주변의 토착 세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남한 기사를 통해 고구려와 옥저 등 삼한 이외의 세력도 자신들을 한의 범주에 넣었음을 살필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고구려와 마한은 같은 계통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3영주 신라 벽화고분 연구

저자 : 전호태 ( Jeon¸ Ho-ta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9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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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순흥 읍내리벽화분과 어숙지술간(於宿知述干)묘는 삼국시대 신라의 영역 안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이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중앙에서는 제작되지 않았던 고분 벽화가 신라의 변경에서는 만들어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순흥은 장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였던 죽령 이남의 요충지다. 신라의 마립간(麻立干)이 순흥 일대를 순행한 것은 변경의 지방 세력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주면서 국경 방어에 최선을 다하게 하려 함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승려들은 늦어도 5세기 초에는 신라의 변경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묵호자(墨胡子), 아도(阿道) 같은 불교승려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6세기 전반까지 불교 신앙은 신라에서 국가적 차원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불교 신앙을 가진 지방세력도 6세기 전반까지는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신앙을 신라 사회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흥 읍내리벽화분과 어숙지술간묘 벽화는 순흥에 전해진 불교 신앙이 6세기에는 기존의 전통적 내세관을 변화시킬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게 한다. 일부 지방세력은 샤머니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죽은 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 세계나 정토(淨土)에 태어나 새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랐고 이런 소망을 벽화로 표현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 증거가 읍내리벽화분과 어숙지술간묘 벽화이다.
제재의 종류나 회화 양식으로 볼 때 읍내리벽화분 벽화에 그려진 역사(力士)나 해 안의 새, 버드나무 등은 6세기 전반에 유행하던 회화기법으로 그려졌다. 어숙지술간묘 벽화의 연꽃이나 천녀(天女)가 그려진 시기는 6세기 후반이다. 두 무덤의 벽화 모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차례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5세기 후엽~6세기 전엽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본 백제의 친왜정책 의미

저자 : 우재병 ( Woo¸ Jae-p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1-11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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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엽~6세기 전엽경 백제 서해안 항로상의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는 백제 양식 제사 거행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 시기 주목되는 또 하나의 제사 양상은 갑옷, 나이프, 낫 등을 형상화한 소형 석제 모조품의 등장이다. 이 왜 양식 제사는 6세기 전엽경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왜인의 죽막동 제사 참여를 의미하는 고고학적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5세기 후엽경부터는 수장묘 분구 상에 원통형토기를 장식하는 왜의 무덤양식도 백제 서남부지역에서 채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양상은 6세기 전엽경에 최고조에 달한다. 이 시기가 되면, 분구 위에 원통형토기 장식을 시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방후원분이라는 왜의 최고위급 무덤 양식까지도 채용하는 양상이 목격된다.
필자는 이 시기 백제의 최상위급 해안 제사유적과 최상위급 수장묘에서 관찰되는 왜 양식 제사 거행 흔적과 왜의 무덤양식 채용 흔적은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들 왜 양식 제사 거행과 왜의 무덤 양식 채용은 지방 수장 차원에서 시행한 정책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당시 백제의 외교적 역량과 위계화된 사회구조를 고려하면, 백제 중앙의 주도 혹은 관여에 의해 시행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 중앙과 지방이 함께 강화된 친왜정책을 추진한 배경에는 고구려에 의한 서울지역 수도 함락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6세기 전엽 백제 중앙의 친왜정책 강화의 계기는, 고구려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왜와의 외교적 연대 강화가 필요한 상황 속에서, 무령정권과 왜 게이타이(繼體)정권 사이의 긴밀한 친연관계가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하나의 계기는 고구려에 의해 백제가 점령되는 상황을 우려한 왜가 고구려의 파상 공세를 저지할 목적을 가지고 친백제외교를 강화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 게이타이(繼體)정권이 당시 백제 무령정권 보다 더욱 강력한 친백제정책을 시행한 것도 백제의 위기 극복이 왜의 생존·번영에 직결된다는 정치적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5백제의 기와 제작기술과 생산체제의 변화

저자 : 이병호 ( Lee¸ Byong-h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3-14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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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백제 기와 제작기술의 변화가 생산체제의 변화와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성하였다. 2장에서는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을 도성의 변천에 따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백제는 한성기인 3세기 말부터 기와를 제작·사용한다. 4세기 전엽 이후에는 낙랑이나 고구려, 중국 남북조 국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양의 수막새와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평기와가 제작된다. 475년 웅진 천도 이후 백제의 기와제작 기술은 한성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왕궁인 공산성이나 사원인 대통사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평기와의 크기나 제작기술, 수막새 문양이나 접합기술에서 규칙성이 강조된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대통사 創建瓦들은 사비기 기와 제작기술의 바탕이 되며, 신라 흥륜사나 일본 飛鳥寺 창건와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538년 사비 천도 이후 왕궁이나 관청, 사원에는 다수의 기와집이 건립된다. 사비기 왕궁과 사원에서 사용한 기와들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관북리 일대 왕궁 구역의 수막새들은 특정 문양을 고수하면서 장기간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능산리사지·군수리사지·왕흥사지 등 사원에서 사용한 창건기 기와들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문양을 가진 창건와가 새롭게 제작·사용되었다.
3장에서는 기와 제작기술의 변화가 관영 수공업 생산체제와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분석하였다. 백제 한성기의 초기 기와는 제작 기술이나 도구에서 토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토기 공인과 기와 공인의 분화는 평기와 제작에서 모골통 사용이 본격화되고 수막새 제작이 시작되는 4세기 전엽 이후, 특히 낙랑계 기와 제작기술의 유입이 계기가 되었다. 그 뒤 東晉에서 불교가 전래된 후 佛寺 건립이 이루어지면서 기와 생산체제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웅진기 기와 생산체제와 관련해서는 정동리 가마터와 대통사 관련 자료들이 주목된다. 정동리 가마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瓦陶兼業窯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벽돌이 공급된 송산리 6호분 출토 명문전을 보면, 이 무렵에는 벽돌이나 기와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공인 집단이 조직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주 반죽동 출토 기와들은 백제의 기와 생산이 '大通寺' 건립을 계기로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는 대통사라는 본격적인 가람을 조영하면서 官營의 기와 생산체제를 성립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기에는 기와를 제작하는 전문 기술자를 瓦博士로 삼았다. 이들은 사원 조영이나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功德部나 司空部 등 중앙 행정 관서에 소속된 기술계 관료였다. 부여 정암리와 청양 왕진리 가마터는 공방의 집중성과 지속성, 瓦窯의 형태, 제품의 규격성, 소비의 한정성 등에서 官窯의 조건에 잘 부합한다. 飛鳥寺의 창건과 관련된 일본의 문헌기록이나 가마터 발굴 성과는 백제가 588년 이전에 이미 중앙 행정 조직 내에 기와의 需要供給을 관리하는 官窯體制가 성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6백제 사비기 호서지역 고분과 매장의례

저자 : 서현주 ( Seo¸ Hyun-ju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1-18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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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비기 호서지역 고분(석실묘) 중 비교적 양호한 자료를 중심으로 고분의 축조과정, 고분군 내 석실묘의 조영 양상, 매장방식, 유물의 부장 등 남겨진 고분과 매장의례의 특징을 검토하고, 단편적이나마 이에 반영된 의미를 파악해보았다.
백제 사비기 호서지역의 석실묘는 상당히 많이 확인되며, 동일 고분군 내에서 고분의 변화 양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석실묘의 구조뿐 아니라 단세대의 매장방식, 유물의 부장양상에서도 웅진기 요소가 사라지고 관복 관련 장신구 등이 확인되면서 통일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사비기 석실묘는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띠며, 백제 중앙의 직접지배가 지방 곳곳에 미쳤음을 보여준다. 각 고분군 내에서 葬地 선정과 함께 봉분의 규모, 석실묘의 가공정도 등이 차이를 보이므로 고분을 축조할 수 있는 계층 내에서 서열화도 뚜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기 후반 석실묘의 매장방식은 합장에서 단장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장법의 변화는 고구려 석실묘와 관련되는 동하총 등의 영향 하에 점차 늘어나는 석실묘의 축조를 위해 큰 석재 확보 등의 부담을 줄이고, 실묘와 함께 시행되고 있던 2차장인 빈을 축소하여 장례에 드는 기간과 비용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현실적인 이유에서 매장의례를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비기에는 석실묘 내 토기 부장도 축소되거나 소멸되는데 이는 개별 고분이나 고분군에서 제의가 지속되지 않은 것과 관련되며, 분묘제사를 위한 제의공간이 개별 고분이나 고분군이 아닌 사찰로 이동해가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판단된다.

7의령 보천사지 석조미술의 특징과 의의

저자 : 이서현 ( Lee¸ Seo-hyu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1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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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 보천사지는 삼층석탑과 승탑이 남아 있어 고려전기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지만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 사찰의 연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본 논문은 최근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보천사지의 내력에 대해 검토해 보고 2기의 석조미술의 양식특징을 살펴 건립시기를 재검토하였다. 보천사지는 급경사 산사면이 남북으로 마주하고 중리천이 흐르는 계곡 중간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지형으로 인해 가람배치가 동향일 것으로 추정되어 왔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파악된 건물지와 축대 등의 유구와 삼층석탑의 위치를 검토한 결과 기존의 분석과 달리 사찰의 진입동선은 남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발굴조사 결과 “統和卄九年崇嚴寺”銘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보천사의 전신으로 보이는 숭엄사라는 사찰이 1011년 중창되었으며, 봉림사의 말사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보천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정형양식을 충실히 따른 석탑으로 그동안은 상층기단 탱주가 생략된 특징에 의해 신라계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석탑의 전체적인 양식은 통일신라 정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층기단부의 변화는 통일신라 석탑의 다양한 변화 양상 중 하나로 출현한 것으로 파악하고 고려석탑의 양식 변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선행하는 단계로서 9세기 말에 건립된 신라석탑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보천사지 승탑은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 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부 표현에서 차이는 있지만 영암사지 적연국사탑, 유마사 해련탑과 양식적 친연성이 높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14년 건립된 적연국사탑과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보다는 치석수법과 표현이 간략화되고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보다는 늦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1011년 숭엄사 중창에 영향력을 행사한 고승의 승탑으로 11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천사지 승탑에서 보이는 적연국사탑과 양식적 친연성은 두 사찰 모두 봉림산문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8부여 가림성 발굴조사 성과

저자 : 성현화 , 이미현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7-23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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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양주 대모산성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 -10차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저자 : 여성민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9-26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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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종 이성의 첫 발굴과 의의

저자 : 김정기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1-290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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