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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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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Changes of The Panathenaia and Meaning between the late 6th and 5th centuries B.C.

김효진 ( Kim Hyo Jin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8월
  • : 207-230(24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79.8


목차

Ⅰ. 서론
Ⅱ. 판아테나이아의 변화
Ⅲ. 판아테나이아 변화의 배경과 의도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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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The paper first addresses changes of the Panathenaia during the Classical period. New athletics which were games for boys and tribes were introduced in the Panathenaia. Public offices newly were formed also. After the Greco-Persian Wars, various buildings in the agora and acropolis were constructed.
Why was developed and extended the Panathenaia during the time? first, Cleisthenes of Athens reorganized the tribalism. The reorganization of tribalism was reflected in athletics and public offices of the Panathenaia. Second, because Athens was the leader of the Delian League, she wanted to cement the friendship between the Delian League. So Athens made full use of the Panathenaia. The hierarchy of allies be revealed in the procession. Finally, Athens tried to emphasize autochthonous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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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1-900-001026258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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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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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 시기와 그 과정

저자 : 조진선 ( Cho Jins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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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은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일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며, 백제 시기에는 월나군, 고미현, 아로곡현, 반나부리현 등이 설치되어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은 인구의 집중과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의 형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암지역은 기원전 8~4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는데, 고고학적으로는 송국리형 주거지와 1,399기에 이르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암지역으로 유입된 새로운 인구집단은 지석묘의 형식과 분포상태로 보아 탐진강유역(장흥군 유치면 일대)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된 점이다. 전쟁인류학적으로 보면, 평등한 부족사회와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는 전쟁 양상이 서로 달라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조합도 다르다.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영암지역의 무기조합은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석검)여서 부족사회의 모습을 보이지만,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는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여서 군장사회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로 보아 영암지역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집중되기 시작한 인구를 바탕으로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되면서 군장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 소국은 이러한 군장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Yeongam is a favorable location at which the formation of Mahan statelets can be studied. Yeongam witnessed a period of population aggregation in the middle of bronze age from ca. 8th to 4th centuries BC, as indicated by the appearance of Songguk-ri type settlements and 1,399 dolmens. These dolmens in Yeongam and the surrounding area suggest that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 new population influx was from the Tam-jin River basin (Yuchi-myeon region).
From a war anthropological point of view,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and a hierarchical chiefdom society where coercive power in infested in their leaders have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s due to their divergent warring patterns. Yeongam in the middle bronze age appeared to be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since the weaponry of this period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such as arrowheads, and melee hilt weapons (such as stone daggers). On the contrary, chiefdom society aspects indicated by a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 that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melee hilt weapons, and melee pole weapons (such as bronze spear and bronze dagger-axe) are observed in the slender bronze age dagger culture during the early iron age at Yeongam.
Judging by the changes in weaponry assemblages, it is highly likely that Yeongam began to become a chiefdom society as coercive power emerged, which was given rise by the growth of the population since the middle bronze age. The Mahan statelets is understood to have historically recorded this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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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완도 법화사지의 성격에 대한 신고찰-고려 후기의 항몽(抗蒙)과 백련결사(白蓮結社), 그리고 송징(宋徵)과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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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완도의 장보고 중심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고려 후기 완도 법화사지의 역사적 현황을 고고 자료, 문헌 자료, 설화 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완도 법화사가 12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1243년에 완도를 '거점 섬'으로 지정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243년 당시 고려의 최이정권은 진도의 용장성에 도성에 버금가는 전략시설을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완도와 압해도 등의 주요 섬을 연결하는 서남해지역 '거점 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1247년에 백련결사의 2대 사주였던 천인과 그의 도반인천책 등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거점 섬' 완도의 전략시설이 조성된 법화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고려의 官人 이영이 유배형을 당하여 완도로 왔고, 이영의 작은아버지 승려 혜일도 완도에 들어왔다. 이는 '거점 섬'으로 지정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이 조성된 직후의 일로서, 당시 완도 법화사가 항몽의 공동체이자 법화신앙의 공동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완도의 설화적 인물 송징은 완도에서 명멸해간 민중영웅들을 다면적으로 대변하는 복합적 캐릭터이다. 따라서 역사화 과정에서 송징이 때로는 장보고로 치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은 나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법화사지 발굴에서 12~13세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에 따라 송징을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historical status of Wando Beophwasa Temple Site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rough a review of archaeological data, literature data, and narrative data in order to reflect on Wando's perception of Jang Bogo-centered history.
The letter inscribed tile excavated from Beophwasa Temple Site shows the possibility that Wando Beophwasa Temple was rebuilt in the early 12th century, and Wando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in 1243 and strategic facilities were built in Beophwasa Temple. In 1243, the Choi Yi regime of Goryeo established a strategic facility comparable to that of the capital city in Yongjang-castle, Jindo, and built a “hub island network” in the southwest sea region that connects major islands such as Wando and Abhaedo.
According to the literature data, in 1247, Cheonin, the second boss of the Baeknyeongyeolsa, and his religious friend, Cheonchaek, entered Beophwasa Temple, where strategic facilities of Wando, a “hub island,” were built to avoid Mongolian invasion. And around that time, Lee Young, a Goryeo official, was exiled and came to Wando, and Lee Young's uncle, Monk Hyeil, also entered Wando. It was immediately after it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and a strategic facility was established in Beophwasa Temple. At that time, it shows that Wando Beophwasa Temple functioned as a community of anti-Mogolia and a community of Beophwa faith.
Song Jing, a folktale character in Wando, is a complex character that represents the folk heroes who have been wiped out in Wando in multiple ways. Therefore, in the process of historicalization, it can be said that it is reasonable that Songjing is sometimes replaced by Jang Bogo, or sometimes replaced by Sambyulcho's commander. In that context, it can be understood that as relics from the 12th to 13th centuries have been intensively excavated from the excavation of the Beophwasa Temple Site, several attempts to replace Songjing with a commander of Sambyeolcho are tak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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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산보의 학문과 사상

저자 : 고영진 ( Koh Young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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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는 16세기 전반 대표적인 호남사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5살 때인 1517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나 2년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 賜死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통분하며 낙향하여 무등산 아래 창암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을 경영하고 평생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
양산보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먼저 至治主義의 구현을 들 수 있다. 그는 스승인 조광조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四書 중에서는 『대학』과 『중용』을, 五經 중에서는 『주역』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도연명과 주돈이를 흠모해 서재에 도연명의 「歸去來辭」와 「五柳先生傳」, 주돈이의 「太極圖」, 「通書」, 「愛蓮說」 등을 두고 가까이 하였다.
양산보는 『소학』의 실천에 힘썼으며 「孝賦」와 「愛日歌」등을 저술하고 소쇄원에 愛陽壇을 쌓는 등 효를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의 『소학』과 효 중시 사상은 家學으로 전해 내려져 갔다.
그는 스승의 죽음과 개혁의 실패를 보고 좌절하기도 하였지만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스승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지치를 자신의 주변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사회에까지 넓혀가고 자연 속에서까지 구현하려고 하였다. 『소학』과 효의 실천, 의리의 강조, 소쇄원의 건설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양산보의 또다른 사상적 특징으로는 天人合一論을 들 수 있다. 양산보는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학적 세계관과 우주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북송성리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돈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천인합일론에 기반하고 있다.
양산보가 흠모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은 도연명이다. 그는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는데, 道家的 隱逸之士보다는 엄격한 出處觀을 가진 儒家的 處士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은거하였지만 세상과 등진 것은 아니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시문은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천인합일론에 입각한 物我一體의 사상이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과 자신이 꿈꿨던 이상사회인 지치를 자연에 구현한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도 소쇄옹으로 하였다. 그러나 소쇄는 단순한 쇄락으로서의 내면적 정신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쇄락의 기상을 의미한 강한 실천지향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구체적 형용이 광풍제월이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도연명과 주돈이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소쇄원을 소쇄라는 문학적 기풍과 광풍제월이라는 기상의 결합이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건축물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천인합일,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사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조광조의 사상과 이기심성론 중심의 주자성리학의 중간 단계, 즉 성리학적 우주론 중심의 북송성리학과 친연성이 있었지 않나 생각되며 호남유학사에서는 송순계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소쇄원이 그들 사이의 학문 교류의 장이 되면서 송순계열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산보는 소쇄원을 중심으로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 많은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활발한 문학 교류를 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최고 수준이었는데 양산보와 소쇄원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Yang San-Bo was one of the typical Honam sarim. He entered the Jo Gwang-Jo's school in 15 years old and studied. But his teacher and many Literatis were executed or exiled in the Purge of 1959(kimyo sahwa), he went back home and built Soswaewon(瀟灑園) in Changamchon of Changpyeong province. He lived there until he was dead.
The first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s is the realization of Ideal politics and world. He succeeded to Jo Gwang-Jo's thoughts faithfully. His Study was based on 『Sohak(小學)』 and put emphasis on 『Book of Changes(周易)』. He also respected Tao Yuanming(陶淵明) and Zhou Dunyi(周敦頥) and put books of these two men.
Yang San-Bo made effort to realize the Ideal politics and world from himself to a family, socity and nature. The practice of 『Sohak』 and filial duty(孝), a emphasis of royalty, building of Soswaewon were a evidence of this.
The another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 is the theory of Unification of heaven and human. He has deep knowledge of 『Book of Changes』 and was concerned about the world view and the universal theory of Neo-Confucianism.
The study and thoughts of Yang San-Bo is located between Jo Gwang-Jo's thoughts and Lichi theory(理氣論) of Neo-Confucianism, in other words Neo-Confucianism of North Song(北宋性理學).
Futhermore Yang San-Bo contributed a development of Song Sun's school and he with a activity in Soswaewo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area of literature of Honam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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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황진(黃進) 추서(追敍)와 17세기 기억의 형성

저자 : 김한신 ( Kim Hansh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4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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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黃進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사회에서 전란 초반의 전황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전쟁 발발 직후 호남 방어에 전력을 다했으며, 충청병사에 승진된 이후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삼남의 보전에 초점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고, 황진은 다른 군·민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다. 조선 조정으로 전달된 보고에서 황진이 중과부적임에도 '力戰'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황진 등 전사자에게 상을 내리고 추증했다. 황진의 공훈은 당대를 넘어 17세기 이후 사대부 사이에서 기억되고 기록으로 전승되었다. 황진의 기억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황진이 후손들 사이에서만 顯彰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 그의 기록이 수정, 보완을 거치며 당대를 설명하는 敍事 중 일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황진의 史實은 私撰記錄과 官撰史書에서 병행 수록되어, 그의 면모와 전공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당대사의 실상이 복원될 수 있었다.


Hwang Jin(黃進) can be remembered as one of the most well-known figures who died as a war hero i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in June 1593. During the Joseon period in the seventeenth century, people certainly referred to him whenever they discussed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Right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Hwang Jin did his utmost to defend Jeolla(全羅) and he was later promoted as the Provincial Army Commander of Chungcheong(忠淸兵使) to focus on preserving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 Joseon, namely, Chungcheong, Kyungsang(慶尙), and Jeolla. Eventually, in late June 1593, whe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began, Hwang Jin was killed while fighting bravely with his troops and the people of the castle against the Japanese army. According to the reports sent to the Joseon court Hwang Jin “fought valiantly” until the end(力戰) despite facing an overwhelming number of the enemies. The Joseon court immediately conferred prizes and granted posthumous honours to Hwang Jin and his colleagues. Hwang Jin's meritorious service throughout the war was remembered long after his death and was recorded by some Confucians, the upper class of Joseon since the seventeenth century. Remembering Hwang Jin was crucial not just for commemorating him among his descendants but also for constructing a part of the entire narrative to explain the Imjin Wartime by famous Confucians later on. The historical facts about Hwang Jin were documented in both private and official history, which led to the restoration of the realities surrounding the Imjin War by shedding light on his personality and devotion to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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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해임과 사탕무당제조사업권 추구

저자 : 김희연 ( Kim Hee 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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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해임되는 과정과 그 가운데 알렌이 획득하려 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검토했다. 기존 연구는 알렌의 해임 배경에 대해 그가 루스벨트 정부의 친일, 반러 정책에 반박하고 친러, 반일, 친한 정책을 개진했기 때문이라 해석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입장에서 알렌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해임 전후로 추진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이때 그의 관심은 한국의 독립이 아닌 자국 권익과 개인적 실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알렌이 공사에서 경질되는 배경을 자세히 검토했다. 알렌은 자신이 친러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알렌은 일본측에 협조적으로 움직였고 한국의 보호국화를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해임되었고 알렌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기에 처했다. 이는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모건이 제안한 사탕무당제조사업의 내용과 알렌이 마련한 계약안 내용을 분석했다. 이때 알렌 계약안은 종전에 비해 혜택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이권획득자를 적극 배려한 것으로, 그가 한국에서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충분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동시에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획득하고자 취한 대일협조적 행보들을 살펴보고, 그가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살폈다. 알렌은 이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친화적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개인에 전매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알렌의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다. 귀국 후 서한이나 강연에서 알렌은 그러한 자신의 행적은 모조리 소거하고 자국 정부의 공사관 조기철수를 비판했다.
알렌의 해임과 그 과정에서 이뤄진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알렌은 자신의 안위와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세계정세와 관련한 알렌의 인식과 태도 변화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study sheds light on the process by which U.S. Minister Horace N. Allen was dismissed and the concession for manufacturing beet sugar which Allen attempted to secure. Previous studies interpreted that Allen was dismissed because he refuted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pro-Japanese and anti-Russian policies and advocated pro-Russia, anti-Japanese, and pro-Korean policies. This has been one of the grounds for positively evaluating Allen's moves from the Korean standpoint. Allen's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after his dismissal suggests that his interest at that time did not lie in the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but in the American interests and his own personal interests.
This study clarified the backgrounds of Allen's dismissal from the U.S. Minister to Korea. Allen continued to strive to dispel the perception that he was a pro-Russian. He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authorities and predicted Korea's doom to fall into a Japanese protectorate. Nevertheless, Allen was dismissed and he was put in crisis both politically and economically. This situation rendered Allen deeply interested in beet sugar concession.
This study also analyzed the contents of Morgan's proposal and those of Allen's draft contract. In the latter, the benefits have been reduced compared to previous concessions. Still, Allen's draft contract was favorable to the concessionaire. It fully reflected the trial and error he had experienced while promoting various projects in Korea. At the same time, it took the situation into account, where Japan's control over Korea was expected.
Lastly, this study examined Allen's Japan-friendly moves in order to acquire beet sugar concession and explained his leaving from Korea and various remarks after the scheme was frustrated. Allen actively showed friendly attitude towards Japan. Nevertheless, Allen's attempt was frustrated as the Japanese government eventually decided not to grant a concession to any individual. In letters to Koreans or lectures after returning home, Allen eliminated all such pro-Japanese remarks and actions and criticized the U.S. government for the quick withdrawal of her legation.
Allen's dismissal and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exhibit that Allen was a realist who thoroughly pursued his own safety and interests. Changes in Allen's perception and attitude towards both Korean affairs and the international affairs should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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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저자 : 이승일 ( Lee Seung I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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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하의 대만과 조선은 일본을 통해서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이 지역에는 전문 재판기관이 설치되었고, 법률 전문가가 판사와 검사에 임용되었다. 더 나아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을 분리하였고 소송절차법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대만과 조선은 모두 일본의 사법제도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는 대만의 법원조직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대만의 사법제도,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대만의 사법제도의 특징을 연구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Under the colonial rule, Taiwan and Joseon introduced modern judicial system through Japan; with the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professional justice agencies were established in the area, and legal experts were appointed to judges and prosecutors. Furthermore, civil and criminal lawsuits were separated and the Litigation Procedure Act was created. As such, Taiwan and Joseon were both strongly influenced by the Japanese judicial system. In particular,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was created by referring to the court organization of Taiwan, so research on it is necessary. In this study, the judicial system and lawyers of Taiwan were analyzed. Studying the characteristics of Taiwan's judicial system is thought to be useful in understanding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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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 - 오월의 기록>에 담긴 5·18 민주화운동 영상기록물 연구

저자 : 김정아 ( Kim Jung 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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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영상기록물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 자료다. 영상기록물이 역사 자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출처와 제작 배경, 내용을 밝히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오월의 기록>은 80년 5월 광주를 기록한 국내외 영상의 출처, 시간과 장소를 면밀히 파악하여 그날의 진실에 가까운 '5·18민주화운동 영상일지'를 만든다는 기획 의도로 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수집된 5·18 영상기록물의 생산처와 소장처, 제작 배경과 일시,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따라 영상기록물의 내용을 문서 자료, 사진 자료와 교차 분석함으로써 영상기록물이 가진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The 5·18 video record is historical sources that informed the truth of the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trigger for the 1987 democratization movement. In order for video records to serve as historical sources, basic work that reveals the exact source, production background, and contents must be preceded.
The KBS documentary “Video Archive-10 Days in May” was produced with the intention of creating a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Video journal' that allows users to access the truth of the day by checking the exact time and place as much as possible.
In this paper, the production and collection of 5·18 video records collected during the program production process, the background, date of production and contents are summarized. And according to the flow of the documentary, the contents of the video record were cross-analyzed with document data and photo data to reveal histor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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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상왕(商王)의 출정(出征)과 '방인(方人)'의 여정

저자 : 이성원 ( Lee Sung W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7-28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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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는 공방, 토방, 강방, 주방, 인방 등 중원 외곽의 강력한 방국들과 주기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하였고 필요한 경우 상왕은 군사적 출정을 하였다. 이들 지역은 상읍으로부터 500~800킬로미터 거리였기에 이러한 군사적 출정을 다녀오려면 두 달 혹은 석 달이 시간이 소요되는 장도의 원정이었다. 상왕의 출행은 정례적인 卜旬 복사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일간격으로 행해지는 점복을 기록한 복순 복사에서 상왕이 상읍 이외의 지역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소재지를 기록함으로써 상왕의 이동 경로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복순 복사에 의하면 상대 후기 상왕이 동남 회하유역으로 잦은 원정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경유지에서 복순 복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이라도 상읍의 출입에는 방위, 택월, 택일 등의 신탁이 허락해야 출입 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생포된 방인들은 상왕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여정을 보여준다. 특히 강방의 강족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검토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생포되어 상읍까지 수백 킬로의 험난한 장도를 감내하며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비록 살아서 상읍에 도착하여도 그들 대부분은 벌제의 식을 통해 제사의식의 희생이 되었다. 즉 그들은 고향을 떠나 와서 이승이 아닌 저 피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 외의 방인들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훼손되는 육형을 받아야 했고, 남은 여생동안 불구가 되어 내밀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According to oracle bone scripts, Shang dynasty often waged war against strong nations around central China, called Fang[方], for examples Gong Fang [方], Tu Fang [土方], Qiang Fang [羌方], Zhou Fang[周方], Ren Fang[人方], etc. Sometimes the king of Shang dynasty went to war in person. It was a long expedition to take two or three months at least because it was five or eight hundred kilometers from those nations to Shang. The fact that the king made a journey can be found in the augural scripts which had been written after an fortune forecast for coming ten days, called Bu Xun [卜旬]. Wherever the king might be, he had to perform 'the ten days forecast'. So when he performed the forecast outside the capital city, he had to write where he was on an oracle bone. According to those scripts we can find the itinerary of the king, especially outside the capital city. It was very important for even king to decide which direction, which month, and which day depended on oracle bone forecast in going out or entering the capital city.
On the other hand, compared to that of king, the itinerary of foreigners who had been captured alive in the battle with Shang showed a dramatic contrast. Captured in the battle, they were escorted to Shang hundreds of kilometers away. It was for the first time for them to make a long journey, though it must be a terribly tortured journey to death. Even if they were alive after a tortured journey, they had to meet the more tragic fate. Most of them had to be decapitated as a sacrifice for natural gods and ancestral gods in the ritual ceremony of Shang. A human sacrifice was usual and culminating in Shang dynasty. If they were alive, the rest of them had to be punished to cut the part of their body, for examples a penis, a leg, a nose, skins, etc, and had to serve a kind of shamanistic 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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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송시기 전쟁이 화폐에 끼친 영향 -단평입락(端平入洛) 시기 회자(會子)의 발행량을 중심으로-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0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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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시기의 재정은 赤字였고 이러한 적자재정의 主要 原因은 막대한 軍費 지출에 있었다. 즉 南宋 건립이후 金과의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량의 軍隊를 유지해야만 했었고 이것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남송조정이 적자재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우선 군비의 지출을 줄이고 세금 수입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남송조의 실제정황과는 符合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송조정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방법은 紙幣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것이다.
남송과 金 間의 계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가 필요하자 회자의 발행량도 점점 증가하여 開禧北伐 後 회자의 발행량은 1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비록 회자의 발행량이 증가하였다 할지라도 회자와 교환하는 金, 銀, 銅錢 등의 準備金이 충분하였다면 회자의 가치하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234년(端平 元)에 남송은 蒙古와 연합하여 金을 멸망시키고 승리하였지만 몽고로부터 전쟁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金을 멸망시킨 후에 남송조정은 三京收復을 목적으로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그렇지만 이 전쟁의 실패로 남송과 몽고는 전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은 것은 없다하여도 조금이나마 재정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시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理宗 친정초기에 진행하였던 두 번의 戰役은 재정에 큰 손실을 주었다. 端平入洛 이후에 남송조정은 이전보다 많은 군비를 지출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결국은 회자의 발행량이 4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회자가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사회경제활동에 큰 문제였고 남송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端平入洛 後 會子의 가치가 하락하는 추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남송과 몽고가 연합하여 金을 멸한 이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宋과 蒙古는 平和 時期였다. 하지만 南宋이 三京을 수복하기 위하여 蒙古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端平入洛의 결과는 매우 비참하여 이후 남송의 재정 적자는 더욱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會子의 發行量을 늘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端平入洛은 宋과 蒙古의 全面 戰爭의 도화선이 되었다. 端平入洛은 晩宋時期기에 會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e Southern Song dynasty had to cope with chronic financial loss. The main cause of the financial loss was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The Southern Song government had to maintain so many troops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金]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It was a huge drain on the national finances. The Song's government should cut down their military spending and impose new taxes[賦稅 收入] for filling in the losses. But the policies did not fit in the situation of the Song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adopted the easiest way, it was the issuing a large amount of paper money.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needed a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and the amount of issuing Huizi for the war was constantly increased. After the campaign to retake the north in 1206[開禧北伐],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one hundred million min[緡]. In spite of the increasing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if the reserve for exchange like as gold, silver, bronze and so on was enough, the value of Huizi might not have been decreasing. In the first year of Duanping[端平 元年, 1234], the Song dynasty confederated with Mongol and destroyed the Jin dynasty. However, the Song dynasty didn't obtain any reward from Mongol. The Song dynasty again made preparations for a war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三京收復]. The campaign was failed and it led to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 Song's government lost the opportunity to recover the national finances.
In the early stage of military expedition[親政] of Emperor Lizong[理宗], the two military campaigns imposed a heavy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fter the Mongol invasion, the Song government had to expend more military spending than before. Finally,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four hundred million min. The depreciation of Huizi caused lots of socio-economic problems, it caused a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nd the fall in the value of Huizi became more serious than before.
After the collapse of the Jin dynasty, the Song dynasty and Mongol enjoyed a small period of peace and rest. But the Song dynasty again made the war with Mongol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 As the result of the Mongol Invasion, the vicious circle that the growing the fiscal deficits of the Song dynasty led to the expansion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reiterated. The Mongol invasion became a trigger to bring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refore, the Mongol invasion was the largest factor to affect Huizi in the late of the Song dynasty[晩宋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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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여성: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저자 : 김진아 ( Kim Geen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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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여성 고등교육을 이끌어 갔던 엠마 윌러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의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과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등교육 1세대 여성들은 여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 고등교육 확장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 윌러드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은 미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는 참정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해 왔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이들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사 연구 일체가 '영웅적 서사' 혹은 '비극적 서사'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통해 여성의 삶을 논의하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교육 활동이란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가정 안에서의 양육 활동을 가정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공적 활동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엠마 윌러드의 교육관이나 정치관, 여성관,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각종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초지일관 여성의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공화국의 여성 시민을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In this paper, I discussed the expansions of women's higher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meanings in women's history. For this work, I particularly investigated Emma Hart Willard's educational experiences in leading women's higher education. The first generation of women, who received higher education in the 19th century, became educational workers and led educational reforms after graduating from Female Seminaries or Academies. Despite such activities, their educational achievements were not well-noted, as they had conservative viewpoints of the suffrage movements, which have been remembered as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activities in American women's history. However, negative viewpoints toward Emma Hart Willard were grounded in the polarized frameworks of women's histories: Heroic narrative versus Tragic narrative. In this paper, I argued that educational activities were appropriate ways to prolong traditional domestic works; and these were also good strategies for women to participate in public work. Rather than pointing out the limitations of her perspectives on women, education, and politics, I highlighted the fact that Emma Hart Willard wanted to grow female citizens of the early Republic by focusing on particular areas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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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국왕조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외교 변화

저자 : 정동준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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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에서 6세기 백제와 중국왕조의 외교를 다루면서, 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49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후경의 난과 제위쟁탈전으로 인하여 555년 이후에야 석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이 사신은 혼란하였던 양의 몰락한 상황을 파악하여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백제는 이후 양과 진에 사신 파견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60년대 이후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그 주기가 정치·군사적 기대와 반비례하였기 때문에, 주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가 567년에야 북조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것은 백제 내부의 사정으로 사신파견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550년대 이전까지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동위의 우호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550년대 이후에 백제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있었고 고구려와 북제의 불화라는 상황 때문에 사신 파견이 가능하였지만, 560년대에 신라가 먼저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550년대에는 북제가 최강국이었기에 가장 접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대내적 요인 때문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북조에 대한 외교에서는 성과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589년 백제는 수의 통일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황제에게 무도를 하였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무도는 군주에게 종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585년부터 의례에 도입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여전한 충성의 표시인 동시에 백제가 수의 '관념적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백제가 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빠른 대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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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초기 나주선의 톤수 추정과 검증

저자 : 김성준 ( Kim Sung-june ) , 김경옥 ( Kim Kyeong-o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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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나주선은 이제까지 발굴된 한선 가운데 최대선으로 추정된다. 선행연구에서는 나주선을 전장 32-42m에 이르는 초대형선이나 고려시대 초마선으로 추정했다. 문헌상 고려의 배는 누선, 초마선, 과선, 일본원정선 등 4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선은 여진족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동북방면에서 활용되었던 군선이고, 일본 원정선은 일본을 공략하는 데 이용된 배다. 발굴된 지역을 고려하면 나주선이 과선이나 일본 원정선일 개연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나주선을 고려의 조운에 이용된 초마선으로 가정할 경우 왕건의 누선일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 발굴선과 기타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추출함으로써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만곡종통부와 저판재를 바탕으로 나주선의 크기를 추정해보고자 했다. 2에서는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선박의 사례를 살펴보고, 3에서는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저판재와 만곡부재를 통해 저판장을 가정한 뒤,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적용해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추산해 나주선의 톤수를 계산해보고, 이를 검증해 보았다.
연구 결과 나주선은 총톤수 230총톤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저판장은 22m, 저판폭(저판재 9장)은 6.81m, 상갑판장 31.46m, 상갑판 폭 12.34m, 깊이 4.97m(만곡부재 포함 외판재 7열)가 된다. 이 연구는 잔존한 소량의 부재를 활용한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주선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시 활용한 누선일 가능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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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저자 : 김봉곤 ( Kim Bongg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1-9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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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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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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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저자 : 정호기 ( Jung Ho-g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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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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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웹사이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의 스토리텔링 연구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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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이하 '진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성된 하시마 섬의 역사 스토리의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실'은 옛 하시마 도민들의 구술을 주되게 활용한 여러영상물들의 배치를 통해 지옥섬 하시마의 '이미지'를 벗겨내면서 일체감의 코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려운 시절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노동했던 1940년대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 속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는 일본인도 함께 겪은 전쟁의 공동 피해로 변형되며, 침략전쟁의 피해자로서 조선인 노동자는 하시마 탄광업을 '지탱했던[supported]' 필수요소 중 하나로 전환되었다. 궁극적으로 '진실'의 스토리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지켜온 긍정적 역사라는 이미지 창출로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통해 구축 중인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지들 중 강제동원 피해 시설들의 전체역사 해설에 원형의 콘텐츠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또한 최근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오픈과 함께 사실상 일본의 전체역사 해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하시마에 관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1940년대 하시마의 일상과 노동 실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실증 작업과 함께 그간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구술자가 겪은 전쟁과 동원, 군수산업과 노동, 징용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방법의 개발이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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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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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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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저자 : 김효진 ( Kim Hyo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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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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