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KCI등재

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Mint bureau the scale and composition of the mint bureau in the era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정일교 ( Jeong Ilgyo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8월
  • : 181-205(25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79.7


목차

Ⅰ. 서론
Ⅱ. 北宋時期 銅錢監의 규모와 監官
Ⅲ. 北宋時期 鑄錢監의 人的構成
Ⅳ. 결론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Most of the mint bureaus of the Song dynasty were affiliated to provinces[州]. For the most part of the coin, that was casting by the mint bureau, were copper and iron coins. However, there were also the other coins that the classification was not clear. In the era of the Han(漢) dynasty, the mint bureaus were established around mountainous area that had a copper mine. On the contrary, the mint bureaus of the Song dynasty were set up on the transportation hubs. That was for the smooth supply of the other materials as well as copper.
In some cases, a mint bureau had thousands workers who cast coins in copper and iron. Generally, there were 3 government officials, who supervised the bureau. There were each 1 to 3 literary and military officials in the large mint bureau. Whereas, in the small mint bureau, there was 1 official or 1 local official. The local official both worked as a local official and as the administrator of the mint. Also, it is different that the composition of the mint bureau’s workers between the era of the Tang(唐) dynasty and the Song dynasty. In the era of the Tang dynasty, the workers of the mint bureau were consist of temporary craftsman and citizens who carries out the duty to their country. On the contrary, in the era of the Song dynasty, they consisted of master craftsmen, general laborers, soldiers, and prisoners. Among them, the soldiers was who had committed a crime. And general laborer who learned skills could become the craftsman. It shows that the coin casting was very hard. In the era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the workers consisted of craftsmen and laborers, and they had been treated well. However, in the Southern Song dynasty, they became poorly paid, and most of them consisted of soldiers and prisoners.
The mint bureau was consisted of officer and many different kinds of workers, the size was also various. The mint bureau played a key role in metal currency circulation in the Song dynasty, especially in the era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UCI(KEPA)

I410-ECN-0102-2021-900-001026243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70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6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한국 고대사에서 용(龍)에 대한 인식의 변천 -왕 신성(神聖) 권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왕의 권위의 변화에 따라 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첫 단계의 왕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王卽天神'의 원초적 신성 이념에 의존하였으니, 이 단계의 용은 그런 '왕즉천신'을 하늘에서 모셔오고 하늘로 모셔가는 신성한 '神乘物'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왕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함께 '王卽佛'이라는 차별적인 신성 권위를 표방하였고, 일단 용은 '왕즉불'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왕이 護法과 護國을 망라하는 '불국토의 주인'으로 인식되면서, 용은 왕을 보좌하는 '불국토의 수호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단계의 왕은 '爲民'을 실천하여 '尊王'의 권위를 확보한다는 유교적 규범을 지향하였고, 이에 따라 용은 왕의 신성 권위를 직접적으로 扶助하는 존재가 아니라 佛僧을 매개로 하여 왕의 호법과 호국의 권능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7세기 동아시아 해양 갈등과 교류 및 교역이 폭증하는 현상과 맞물려 나타났으며, 龍도 天龍이나 地龍보다는 海龍의 존재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왕은 용의 현신'이라는 '王卽龍'의 인식이 대두한다. '왕즉용'의 인식은 마한→백제로 이어지면서 성립하여 후백제의 견훤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왕건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면서 '왕즉용'의 인식은 고려시대에 본격 정착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erception of dragon according to the change in the king's authority.
First of all, the first-stage king relied on the original divine ideology of 'king=god of heaven' that came down from heaven, so the dragon of this stage was recognized as a sacred being that brought such 'king=god of heaven' from heaven and brought it to heaven.
The second stage of the king advocated the discriminatory divine authority of 'king=Buddha' along with transmission and official recognition of Buddhism, and once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a symbol of 'king=Buddha'. In addition, in the case of Silla, as the king was recognized as 'owner of the Buddha's land'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e dragon was also recognized as the 'guardian god of Buddha's land' who assisted the king.
In the third stage, the king aimed for Confucian norms,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indirectly supporting the king's sacred power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rough the medium of Buddhist monks. This shift in perception appeared in conjunction with the 7th century East Asian maritime conflict and the explosion of exchanges and trade, and the dragon also appears more prominent as the dragon of the sea than the heaven or land.
And when it reaches the fourth stage,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meaning that the king is the appearance of dragon. finally emerged.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as it led from Mahan to Baekje, which led to Later Baekje's Gyeon-hwon, and spread to Wang-geon of Goryeo. In addition, as Wang-geon became the last winner,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in earnest during the Goryeo Dynasty.

KCI등재

215세기 전라도 조운선의 침몰과 그 대책

저자 : 한정훈 ( Han Jeong H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3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전라도의 세곡이 국가재정 수입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만큼 전라도 조운선의 안흥량에서의 침몰 사고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였다. 그래서 사고 직후에 '육운 이납', '태안 운하 공사', '사선의 활용' 등 침몰 방지를 위한 여러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육운 이납은 전라도 세곡을 기존의 조창이 아닌 충청도·전라도의 또 다른 지점에 육운하는 방식으로 고려시대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수송방식이었다. 태종과 세종 연간 10년 남짓 동안 일시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사람과 우마(牛馬)의 피해로 인해 조운 정책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육운 이납의 영향으로 16세기 초엽의 중종 때에 영산창이 없어지고 법성창이 전라하도의 유일한 조창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침몰 방지책으로 잘 알려진 태안 운하 공사는 빈번히 실패하였다. 비록 공사가 성공하였더라도 인공 수로에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러 번 옮겨 싣는 방식은 전라도의 대규모 세곡의 수송방식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또한 이들 침몰 대책에 비해 일정한 효과를 거둔 사선의 활용은 조운선의 침몰 대책이기보다 '관선 조운'의 폐단을 보완하는 조운 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15세기에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실효성의 논란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운영 기반의 확충, 규정 및 조직의 보완과 같은 조운제 정비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침몰 사고 직후에 반복하여 논의된 점은 전라도 조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As grain paid as taxes in Jeolla-do served as a key source of revenue for the state treasury, the sinking of tax carriers at the Anheung Headland was a huge loss for the state. Thus, after an accident, various countermeasures including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and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ere discussed in order to counteract these sinkings.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involved the transportation of grain by land to a different location in Chungcheong-do and Jeolla-do rather than to existing tribute granaries. This was temporarily implemented for just more than 10 years during the reigns of Taejong and Sejong but failed to be established as shipping policy due to the harm done to humans as well as oxen and horses. As a result of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the Yeonsan granary disappeared by the reign of Jungjong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 the Beopsung granary established itself as the only tribute granary in Jeolla-hado.
Known as the representative countermeasure against sinkings, the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failed every time. Even if construction were to have succeeded, transporting the large amount of grain from Jeolla-do by loading it onto small boats on an artificial waterway would have been inadequate. Furthermore,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ith their limited effectiveness in contrast to the other countermeasures against sinkings, served rather as a shipping policy that made up for the harm done by 'shipping by government owned ships' rather than as a real countermeasure against the sinking of tax carriers.
While these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in the 15th century failed to be properly executed due to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ir effectiveness, basic measures necessary to the overhaul of the shipping system, such as the expansion of operating infrastructure and the supplementation of regulations and organization, did indeed receive attention with regard to their importance. Although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failed to achieve as huge an effect as expected, the fact that they were repeatedly discussed immediately after sinkings reveals the status of Jeolla-do shipping.

KCI등재

3『동사강목』의 후고구려 인식

저자 : 홍창우 ( Hong Changw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6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보이는 후고구려ㆍ궁예 관련 정보를 분석하여 인식의 양상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이다. 먼저 안정복이 자신의 벗인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궁예와 후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정복은 조선 前代의 통사를 저술한 『동사강목』의 저자였으므로, 그가 특정한 역사적 대상을 향해 깊은 관심을 보인 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들이 주로 『동사강목』에서 '정통'과 관련이 있는 나라의 문제에 치중했다면, 정통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무통'의 문제에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우선 궁예와 후고구려가 '도적'과 '무통' 국가로 설정된 양상과 계기를 살폈다. 그 결과 궁예는 '도적'이라는 점이 『동사강목』 도처에서 강조되었고, 그의 후고구려는 단군ㆍ기자를 시작으로 하여 마한, 문무왕 9년 이후의 신라, 태조 19년 이후의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들이 부정적으로 서술된 이유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안정복은 '정통' 국가인 신라를 넘본 후고구려와 궁예에 정통과 군주로서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를 위한 배려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춘추대의'에 기반을 둔 명분질서의 탐색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통론'의 관점에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이 답습되었던 것과 함께, 『동사강목』 내에 궁예와 견훤을 우리 문적의 소멸 주체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기록의 문제이긴 하지만, 고려시대의 경우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의 문제를 거론했던 주체들이 궁예나 견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는 조선시대 식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견해인데, 별다른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후고구려나 후백제 모두 역사서 편찬이나 기록물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기왕의 성과를 감안했을 때, 막연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추정하였다. 난세의 시기에 한낱 도적에 불과한 이들에게 불합리한 누명이 씌워진 것이다.
궁예나 견훤의 처지에서 본다면 굉장히 억울할 이와 같은 설명은 사건의 발생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간극이 제법 크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식의 주체와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의 계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여기에서 분기된 자유분방한 역사적 인식의 양상을 『동사강목』을 매개로 살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hn Jungbok's Dongsa-Gangmok recognized Later-Goguryeo and Gungye. First, through the letter Ahn Jungbok sent to Lee Gahwan, we were to confirm his interest in Gungye and Later-Goguryeo. The fact that Ahn Jungbok showed a deep interest in a specific historical object was the first thing that stood out. Therefore, it was thought that it was necessary to consider the problem of 'legitimate dynasty'[正統], which stands at the opposite point of 'illegitimate dynasty'[無統].
To this end, first of all, we looked at the patterns and opportunities for Gungye and Later-Goguryeo to be set up as 'Dojeok'[盜賊] and 'illegitimate dynasty'. As a result, the fact that Gungye was a 'Dojeok' was emphasized everywhere in Dongsa-Gangmok, and it was confirmed that his Later-Goguryeo was not included in the category of 'legitimate dynasty' and became a target of criticism. However, the reason they were described negatively wa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revious era. Ahn Jung-bok did not give 'legitimate dynasty' and status as a monarch to Later-Goguryeo and Gungye, who opposed the 'legitimate dynasty' of Silla.
In addition, we also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of Gungye and Gyeonhwon as the subjects of extinction of our literature in Dongsa-Gangmok. This case was a special opinion seen among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can seen that it was not based on any particular literary basis. In particular, considering the previous achievements that both Later-Goguryeo and Later-Baekje were not negligent in compiling history books or producing records, it was presumed to be an idea derived from vague 'prejudice'.
This explanation, which would be very unfair from the perspective of Gungye or Gyeonhwon, may be possible because the gap between the time of the incident and the subject looking at it is quite large. Therefore, this article could confirm that the trigger for evaluating historical facts varies according to the subject of perception and the historical background in which he is placed.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the free-spirited historical perception branched here was examined through the Dongsa-Gangmok.

KCI등재

4함경도 방곡령 실시와 배상을 둘러싼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의 동향(1889~1893)

저자 : 박한민 ( Park Han 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3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는 함경도 지역의 방곡령 실시와 관련하여 지방관과 상인, 지역에 파견된 관리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한 양상과, 이들의 활동이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곡물 유통과 판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둘러싸고 지방관과 지역 상인이 보인 반응은 방곡령 실시가 단순히 외세 침탈로부터 곡물 유출을 막고 지역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함경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일 양국은 관원을 현지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임응호를 판핵관으로 파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지역민들은 함경감사와 관련이 있는 현직 관리들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며 몸을 사리고, 일본 상인과의 곡물 거래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판핵관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조병식의 지시를 받아 비위를 몰래 조사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조정에서 임응호를 탄핵하고 구금시키는데 활용되었다. 외무성에서는 이시이 기쿠지로를 원산에 파견하였다. 그는 현지 상인들과 면담하고 장부를 조사하면서 손해배상으로 청구한 금액이 적정하고 타당한지 조사하였다. 조사 중 원산 재류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액에 다소 증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체 배상액을 재산정하여 제출하도록 지도하였다. 함경감사 조병식을 비호한 조정의 유력자는 민응식이었다. 민응식은 방곡령에 대한 배상 반대론을 주장하였고, 외아문 독판의 교체를 주도하였다. 일본공사관 측과 접촉한 대원군은 조정 내 분위기와 정보를 일본 측에 흘리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조일 간 교섭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만회해 보려 시도하였다. 함경도의 방곡 시행과 배상 교섭에는 지방과 중앙의 여러 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면서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방곡령 시행과 배상 교섭은 조정 내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동된 내정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ivities of local governments, merchants, and investigators dispatched to the region who responded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in rela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in Hamgyeong province, and their impact on central politics and local communities. The reaction of local governments and local merchants over the profits from grain distribution and sales cannot be understood as simply to prevent grain outflow from foreign invasion and to protect the local economy. In order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Korea and Japan government dispatched officials to Hamgyeong province. In Joseon, Lim Eung-ho was dispatched as an inspector. During the investigation, local people were forced to spare themselves and avoid trading grain with Japanese merchants, fearing the possibility of retaliation by incumbent officials related to Cho Byung-sik, the governor of Hamgyeong province. While the investigator worked in the area, some secretly investigated the irregularities under the direction of Cho. The information they collected was later used to impeach and detain Lim in the mediation.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dispatched Ishii Kikujiro to Wonsan. Ishii interviewed local merchants and investigated the books to see if the amount claimed for damages was appropriate and reasonable. During the investigation, he confirmed that it was somewhat difficult to prove the extent of damage claimed by the Japanese merchants in Wonsan, and instructed them to re-assign and submit the whole amount for compensation. Min Eung-sik was the leading figure in Joseon politics defending Cho. Min was against the compensation for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led the replacement of minister of Foreign Office. After contacting the Japanese legation officials, Daewongun attempted to redeem his political influence by using stalled negoti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leaking the information within the government to the Japanese side. In the compensation negotiations following the implementation of Grain Export Prohibition, various local and central forces intervened deeply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greatly affecting the grain trade in the local community. It can be seen that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compensation negotiations were a domestic issue closely linked to political forces in the cabinet.

KCI등재

5일제강점기 경학원(經學院) 강사(講士)의 위상과 활동

저자 : 정욱재 ( Jung Uk-j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74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일제강점기 경학원 강사(講士)의 선정과 시기별 활동의 특징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경학원 강사는 경학원의 공식적인 직제에 포함되지 않은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사의 선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910년대~1920년대 경학원 강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되었고, 선정된 사람들은 명망과 학문이 높은 인물들로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설득과 회유를 받았다. 이를 강하게 저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굴복하여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위정척사론으로 유명한 학파의 제자와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었다. 1930년대부터는 유림이라 볼 수 없는 인물들도 경학원 강사로 선정되었고, 이 흐름은 전세체제기인 194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경학원 강사는 명예직으로 월급은 없고 연수당과 여비만 지원받았다. 또한 1930년대까지 경학원 강사의 임기는 규정되지 않아 본인이 스스로 사임하지 않은 이상 사실상 종신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우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경학원 강사는 공식 직제인 경학원 부제학ㆍ대제학이 될 수 있었다. 일부 경학원 강사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거나 중추원 참의가 경학원 강사로 임명되는 등 경학원 강사는 단순 명예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원 강사의 주 임무는 석전제 거행ㆍ순회강연ㆍ시문 기고로 일제강점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특히 경학원 강사의 순회강연은 유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경학원잡지』 등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한 경학원 강사는 일본 천황과 일제의 침략전쟁 등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는 등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주창하여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적ㆍ물적 희생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황도유학'을 추종하여 전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을 단절시키는 한편, 한국 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는 폐해를 남기는 데 일조하였다.


This study gave an overview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lection and activity of the instructors (Gangas) of Kyunghagw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by period.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t that was not included in the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of Kyunghagwon. And ye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selection of the instructors, attaching importance to those of Kyunghagwon. In the 1910s-1920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selected unilaterally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ose selected were figures with high reputation and study, who got strong persuasion and concili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ome strongly resisted while others finally yielded and participated, some of whom were disciples of famous schools through the theory of Wijungchugsa (Defending Orthodoxy and Heterodoxy), and there were even figures who had done the independence movement. Since the 1930s, even the figures who could not be considered Confucian scholars were selec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nd this flow was further strengthened in the 1940s, which was a state of wa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ition, who did not receive monthly pay except for annual allowance and travel expenses. In addition, until the 1930s, as the term in office was not prescribed fo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it was a tenured post unless the instructor resigned. Sinc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avorably treated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those whose ability was recognized could become Kyunghagwon Boojehak and Daejehak, which belonged to its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Som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appointed as Jungchuwon officials, or Jungchuwon officials were appoin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cordingly,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had a status that could not be regarded as a simple honorary position.
The main missions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holding Seokjeonje, having a lecturing tour, and contributing poetry and prose, which continued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era. Especially, the lecturing tour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as mostly concerned with the contents to justify and praise Japanese colonial rule, using the doctrine of Confucianism, which sometimes were published in Kyunghagwon Magazine. In addition,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ted as a mere tool of Japanese colonial rule, e.g. composing Sino-Korean poetry praising the Japanese emperor and the Japanese imperialist war of aggression. Especially, entering the 1940s, they coerced colonial Korean people into a voluntary human and material sacrifice for the Japanese invasion war, advocating the so-called 'Whangdo Confucianism.' Following 'Whangdo Confucianism,' they broke off from the high-level Confucian ideas achieved in the previous age while contributing to leaving the evil of cutting off from the developmental flow of Korean Confucian ideas.

KCI등재

6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저자 : 박동찬 ( Park Dong C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20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51년 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후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에 유엔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말까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는 '전쟁 전 상황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지평지구 전투의 패배로 제4차 공세에 실패했다. 그들은 공세의 목표인 대전∼안동 선 진출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위 38도선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아야만 했다.
지평지구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 전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군은 '전쟁 전 상황에서의 휴전'이라는 전쟁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공산군은 제4차 공세의 실패로 인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공산군이 계획하던 '춘계공세로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즉 '완전 승리' 구상이 파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가 유엔군의 전쟁전략을 '철군 < 휴전'으로, 공산군의 전략을 '승리 < 휴전'으로 확실히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는 대외적으로 휴전을 적극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북위 38도선에 형성된 전선 상황이 그들에게 더 이상 '군사적 완전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했다.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통한 휴전'만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향후 전쟁 양상은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행동 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in 1951 was the first victory achieved by the UN forces in the face of a massive communist offensive after the Chinese entered the Korean War. As a result of this battle, the UN forces switched to a counterattack and advanced to the line linking Munsan∼Dongducheon∼Chuncheon∼Hyeonri∼Yangyang by the end of March. This meant 'recovery of the pre-war situation'. On the other hand, the communist forces failed in the 4th offensive due to the defeat in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They failed to advance to the Daejeon∼Andong line Which was the target of the offensive. Rather, They had to face the consequences of being pushed to the 38th parallel.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can be found in the changes in the war strategies of the UN and communist forces. The UN forces were one step closer to achieving the war goal of a ceasefire in the pre-war situation, and the communist forces had to switch to defense due to the failure of the 4th offensive. This meant that the plan for complete victory through the spring offensive planned by the communist army from December 1950 to January 1951 was broken. Also, This meant that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region played a role in making sure that the UN forces' war strategy was transformed into a 'withdrawal < truce' and the communist army's strategy into a 'victory < truce'. At that time, the communist army did not actively advocate a ceasefire externally, but the frontline situation formed at the 38th parallel made it impossible to guarantee them a “complete military victory” any longer.
As a result of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District, both the UN and communist forces came to realize that a truce through negotiations was the best way to end the war. It can be said that the future warfare showed a pattern of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 to gain the superiority of negotiations.

KCI등재

7페르시아 전쟁 이후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 -사제직과 성소 변화를 중심으로-

저자 : 김효진 ( Kim Hyo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는 엘레우시스를 대표하는 종교 의식이었으나,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에는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범 그리스적인 종교 행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여러 사제직 중에 가장 중요한 신관직은 히에로판테스와 다둑코스를 들 수 있는데, 히에로판테스는 에우몰포스 씨족에서, 다둑코스는 키리케스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히에로판테스의 역할은 입교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둑코스의 역할을 소 미스테리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보면, 이러한 사제직들은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 공식적인 역할이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일정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둑코스를 배출한 케리케스 씨족은 친 아테네적 성향을 다수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 미스테리아를 관장하는 사제로 선택된 사제 가문은 케리케스였다. 또한 케리케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 치세 전에 아티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다둑코스의 역할을 한 때는 아테네인들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케리케스 가문은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테네는 긴밀한 관계성을 통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성소의 변화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되었고 엘레우시스나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복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키몬을 시작으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아테네 정치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재건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텔레스테리온의 규모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어벽에 해당되는 페리볼로스가 새롭게 세워졌는데 매우 견고하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데메테르 성소인 엘레우시니온도 변화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벽을 건축했다. 이외에도 트립톨레모스의 성소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잇는 '신성한 길'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으며 이는 아테네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한 측면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물러나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분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레우시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불안한 측면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엘레우시스 사람들을 친아테네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여러 폴리스에 아테네가 데메테르 여신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시혜를 다른 폴리스에 전하는 민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The Eleusinian Mysteries were a religious ritual that represented Eleusis. And after Eleusis was incorporated into Athens, it was reborn as a pan-Greek religious ceremony under the influence of Athens. Of the many priesthoods of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most important priesthood were Hierophant and Daduchos. Hierophant came from the Eumolpidae families, and Daduchos from the Kerykes families. It's believed that the role of Hierophant appears to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the initiation ritual, and the role of the Daduchos was closely related to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From the inscription, these priesthoods appear to have established their official roles since the incorporation of Eleusis into Athens, and in some respects they appear to have changed.
In particular, the Kerykes which produced the Daduchos, had pro-Athenian tendencies. The Kerykes was chosen to preside over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which appears to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time of Peisistratos. It is also shown that the Kerykes families migrated to the Attica region and lived there before the reign of Cleisthenes. The role of Daduchos had been shared with the Athenians at one time. Looking at these points, it is believed that the Kerykes families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Athens, and that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Eleusinian Mysteries through its close ties.
If we look at the change in the sanctuary, the Persian War left most of Greece in ruins, and Eleusis and Athens were no exception. After the Persian Wars, the Athenians were interested in restoring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Athenian politicians sought to reconstruct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in particularly, It is estimated that the size of the telesterion had been very large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As the sanctuary grew in size, a new peribolos, the defensive wall, was erected, and it was very solid. The Eleusinion, the sanctuary of Demeter in Athens, also changed, growing in size and building new walls. In addition, a temple of Triptolemos was newly built and the 'the sacred way' between Athens and Eleusis took shape.
These changes will be closely related to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ituation in Athens after the Persian Wars. After the Persian Wars,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his can be seen in the context of Athens' interest in and involvement in the Eleusinian Mysteries. With the retreat of Persia, Greece continued to turmoil between Athens and The Peloponnesian League. In this situation, Eleusis was a region that was strategically important but also had an unsettling aspect. Because of those reasons, Athens may have used the Eleusinian Mysteries to increase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o make people of Eleusis get acquainted with Athens. It also appears that through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Athenians wanted to be seen in the various poleis as people who had received the favor of Demeter and to pass on this benefit to other poleis.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6세기 중국왕조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외교 변화

저자 : 정동준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에서 6세기 백제와 중국왕조의 외교를 다루면서, 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49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후경의 난과 제위쟁탈전으로 인하여 555년 이후에야 석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이 사신은 혼란하였던 양의 몰락한 상황을 파악하여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백제는 이후 양과 진에 사신 파견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60년대 이후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그 주기가 정치·군사적 기대와 반비례하였기 때문에, 주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가 567년에야 북조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것은 백제 내부의 사정으로 사신파견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550년대 이전까지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동위의 우호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550년대 이후에 백제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있었고 고구려와 북제의 불화라는 상황 때문에 사신 파견이 가능하였지만, 560년대에 신라가 먼저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550년대에는 북제가 최강국이었기에 가장 접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대내적 요인 때문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북조에 대한 외교에서는 성과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589년 백제는 수의 통일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황제에게 무도를 하였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무도는 군주에게 종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585년부터 의례에 도입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여전한 충성의 표시인 동시에 백제가 수의 '관념적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백제가 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빠른 대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KCI등재

2고려 초기 나주선의 톤수 추정과 검증

저자 : 김성준 ( Kim Sung-june ) , 김경옥 ( Kim Kyeong-o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0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004년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나주선은 이제까지 발굴된 한선 가운데 최대선으로 추정된다. 선행연구에서는 나주선을 전장 32-42m에 이르는 초대형선이나 고려시대 초마선으로 추정했다. 문헌상 고려의 배는 누선, 초마선, 과선, 일본원정선 등 4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선은 여진족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동북방면에서 활용되었던 군선이고, 일본 원정선은 일본을 공략하는 데 이용된 배다. 발굴된 지역을 고려하면 나주선이 과선이나 일본 원정선일 개연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나주선을 고려의 조운에 이용된 초마선으로 가정할 경우 왕건의 누선일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 발굴선과 기타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추출함으로써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만곡종통부와 저판재를 바탕으로 나주선의 크기를 추정해보고자 했다. 2에서는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선박의 사례를 살펴보고, 3에서는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저판재와 만곡부재를 통해 저판장을 가정한 뒤,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적용해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추산해 나주선의 톤수를 계산해보고, 이를 검증해 보았다.
연구 결과 나주선은 총톤수 230총톤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저판장은 22m, 저판폭(저판재 9장)은 6.81m, 상갑판장 31.46m, 상갑판 폭 12.34m, 깊이 4.97m(만곡부재 포함 외판재 7열)가 된다. 이 연구는 잔존한 소량의 부재를 활용한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주선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시 활용한 누선일 가능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KCI등재

3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저자 : 김봉곤 ( Kim Bongg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1-9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KCI등재

419세기말~20세기초 전라도 강진 병영지역의 환(煥) 사용 실태와 메커니즘 - 박약국(朴藥局) 장부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덕진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21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KCI등재

5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저자 : 정호기 ( Jung Ho-g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KCI등재

6웹사이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의 스토리텔링 연구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9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일본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이하 '진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성된 하시마 섬의 역사 스토리의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실'은 옛 하시마 도민들의 구술을 주되게 활용한 여러영상물들의 배치를 통해 지옥섬 하시마의 '이미지'를 벗겨내면서 일체감의 코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려운 시절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노동했던 1940년대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 속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는 일본인도 함께 겪은 전쟁의 공동 피해로 변형되며, 침략전쟁의 피해자로서 조선인 노동자는 하시마 탄광업을 '지탱했던[supported]' 필수요소 중 하나로 전환되었다. 궁극적으로 '진실'의 스토리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지켜온 긍정적 역사라는 이미지 창출로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통해 구축 중인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지들 중 강제동원 피해 시설들의 전체역사 해설에 원형의 콘텐츠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또한 최근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오픈과 함께 사실상 일본의 전체역사 해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하시마에 관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1940년대 하시마의 일상과 노동 실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실증 작업과 함께 그간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구술자가 겪은 전쟁과 동원, 군수산업과 노동, 징용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방법의 개발이 과제가 될 것이다.

KCI등재

7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KCI등재

8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저자 : 김효진 ( Kim Hyo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0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한국문화연구
42권 0호

KCI등재

역사교육논집
80권 0호

KCI등재

대동문화연구
118권 0호

KCI후보

청람사학
35권 0호

KCI등재

조선시대사학보
101권 0호

KCI등재 SCOUPUS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35권 1호

KCI등재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KCI등재

조선시대사학보
99권 0호

KCI등재

조선시대사학보
89권 0호

KCI등재

백제학보
40권 0호

KCI등재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KCI등재

지역과 역사
50권 0호

KCI등재

한국학논총
57권 0호

Public History & Museum
4권 0호

현대사와 박물관
4권 0호

KCI등재

대동문화연구
117권 0호

KCI등재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KCI등재

선도문화
32권 0호

KCI등재

역사교육논집
79권 0호

KCI등재

백제연구
75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