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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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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Composition and Reinterpretation of ‘Jeonbuk Teachers Incident’ in the first half of the 1930s

정호기 ( Jung Ho-gi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8월
  • : 123-152(30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79.5


목차

Ⅰ. 머리말
Ⅱ. 사건의 인지와 수사의 과정
Ⅲ. 검사국의 예심과 재판부의 판결
Ⅳ. 사건의 재구성과 재해석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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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Socialism is a subject that cannot be omitted in understanding and constitut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ti-Japanese movement. The perception of socialist anti-Japanese movements during this period is two-sided. One is denying existence and activity itself. The other is to acknowledge records left in documents and materials as true.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veal that the Japanese colonial era socialist organizational incidents may have been organized according to the needs and purposes of the authorities, and that there is room for interpretation.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he ‘Jeonbuk Teachers Incident,’ which was tried for the socialist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early 1930s. The official name of the incident is ‘Unification Alliance of Chosun Communism Movement.’ The incident began in Imsil, Jeonbuk province, in mid-1933 and ended with a court ruling on October 25, 1935. The investigation and arrest operations over a year have expanded beyond Jeonbuk to eastern Jeonnam and Gyeongsang province, while investigations had also been carried out in other areas.
Police claimed to have grasped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case in the early stages of the investigation. However, records and data show that the case was expanded and cleared by investigating and arresting the socialists and those whom the authorities have been keeping an eye on. The police conducted long-term detention and coercive investigations and formed a single case, which resulted in numerous new organizational incidents. Hundreds of people were taken into custody for questioning, but 42 were referred to a preliminary hearing, while only 32 were found guilty. The outcome of the preliminary trial and trial were no different from the increasingly denying the character of the name ‘Jeonbuk Teachers Incident.’ The court ruled the nature of the case as a movement to rebuild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but the ruling did not contain enough probability to prove it.

UCI(KEPA)

I410-ECN-0102-2021-900-001026223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1
  • :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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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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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駕洛國記」와 '6伽耶' 성립 배경 검증

저자 : 이도학 ( Lee¸ Doha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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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가 절대 부족한 가야사 연구에서 국내 사료인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내용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 가운데 6가야의 시조 誕降卵生說話는 「가락국기」에만 적힌 유일한 기록이었다. 여기서 비롯한 6가야설은 가야 단일연맹설의 근거가 되었다. 문제는 「가락국기」에 적힌 가야의 범위에는 6가야를 훨씬 넘는 諸國들이 산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즉 加羅라는 국명을 지닌 정치체는 김해와 고령 2곳에 불과하였다.
그러면 6가야 시조설화는 언제 성립한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전승에 근거하여 신라 말~고려 초에 정리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곳 호족들이 반신라적인 명분으로 가야를 들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6가야 지역의 호족들 간에는 연대나 유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안라가야가 소재한 함안 지역의 호족은 신라에 대한 절의를 내세우면서 왕건에 대적하였다. 그리고 가야로 인식한 세력은 신라 말에도 2곳에 불과하였고, 시조 탄강설화도 6卵이 아니라 獨卵이 원형이었다. 고려 전기에 편찬된 「구삼국사」에 적힌 列國 가운데 沃沮와는 달리 가야는 수록되지도 않았다. 가야는 옥저보다도 존재감이 없었음을 뜻한다.
「가락국기」에 수록된 6가야는 고려 문종대인 11세기 후반에 왕실의 외척으로 득세하던 인주 이씨 세력과 엮어져 있었다. 수로왕을 공통의 시조로 하는 인주 이씨 세력에 의해 금관가야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6가야와 더불어 넓은 강역을 창출한 것이었다.


In the study of Gaya history, where historical materials were absolutely scarce, the contents of the “KarakGuguki” which was included in the “Samgukyusa” a Korean historical record, accounted for an important portion. Among them, the myth that the first kings of the six Gaya countries came down and were born breaking eggs was the only record written only in the “KarakGuguki”. The theory that six Gaya were created together, including here, provided the basis for the theory that Gaya was a single alliance. The problem is that there were many countries that were well over six Gaya countries scattered in the scope of the Gaya country written in the “KarakGuguki” There were only two political forces named Gaya, or Gara, in Gimhae and Goryeong.
So when was the myth that the first kings of six Gaya were born? It was generally considered to have been organized between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based on the tradition. It is said that the powerful person here mentioned the Gaya kingdom as a justification to oppose Silla. On the other hand, there was no sign of unity or unity among the six Gaya powers. Furthermore, a powerful person of Haman, where Anragaya was located, fought against WangGeon by demonstrating their loyalty to Silla. There were only two groups recognized as Gaya at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and the first king came down from heaven, not six eggs, but only one. Among the countries listed in “GuSamGuksaki” compiled during the early Goryeo Period, Gaya was not included, unlike Okjeo. Gaya means that it had no presence than Okjeo.
The six Gaya, which was included in the “Gorigukgi,” was associated with the Inju Yi Clan, who gained power as a royal family member in the late 11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Munjong of the Goryeo Dynasty. King Suro was created by the Inju Yi Clan, who had a common ancestor of King Suro, to promote the authority of Geumgwan Gaya, along with six Gaya provi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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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삼국 · 통일신라시기 광주 중심지 연구

저자 : 최영주 ( Young-joo Cho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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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광주지역의 삼국시기 중심지와 통일신라시기 무진주의 개발 시기와 양상을 살펴보았다.
광주지역에서 마한 시기에 해당된 유적은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엽으로 편년된다. 유적은 하천의 충적지와 구릉에 입지하여 농경을 기반으로, 토기·제철·옥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적 성격의 복합유적에 해당된다. 그중 하남동유적은 5세기대에 의례적인 성격을 보이는데 구사오단국의 중심지에 해당하며,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의 대상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게 병합된 이후의 사비기에는 광주천 일대의 배후지를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각화동과 운림동고분군의 입지를 통해 고분 관련 집단의 세거지는 산사면 아래의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진주는 현재 금남로 일대로 1917년 지적원도에서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의 무진도독성은 무진주의 방리와 관청을 감싸는 나성으로 장방형의 형태로 추정된다. 범위는 동쪽과 서쪽은 동계천과 광주천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학동, 북쪽은 누문동의 경계로 보인다. 1방은 155m~160m 정도로 보이며, 장축(남북)은 13방~14방으로 약 2,400m 정도, 단축(동서)은 4방~5방으로 약 700m~1,000m 정도로, 전체 규모는 약 6,500m 정도로 추정된다. 무진주는 사벌주와 경주 도심 개발 양상을 통해 보면, 늦어도 7세기 후엽~8세기 초에 정비되기 시작하며 배후산성인 무진고성이 축조되기 이전인 8세기 후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This thesis examines the center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Gwangju and the development period and aspects of Mujinju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The remains of the Mahan period in Gwangju are compiled from the middle of the 3rd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The remains were located on the alluvial land and hills of the river and correspond to the complex remains with the character of a handicraft industry that produces earthenware, iron, and jade based on agriculture. Among them, the Hanam-dong remains showed a ceremonial character in the 5th century, and are believed to have been the center of the Gusaodanguk, and it is likely that it was the site of the parent's home of the King Dongseong of Baekje which was located in Mujinju. It seems that the hinterland of Gwangjucheon Stream was not used during the Sabigi period after the annexation of Baekje. Based on the location of the tombs in Gakhwa-dong and Unrim-dong, it is presumed that the settlements of the tomb-related groups were located in the hilly area below the mountain slope.
Mujinju is currently located in Geumnam-ro, and its shape can be estimated from the 1917 cadastral map. Mujindodokseong Castle in th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is estimated to be the outskirts of the fortress surrounding the Bangri and government offices of Mujinju and in the shape of a rectangle. The range is divided into Donggyecheon Stream and Gwangjucheon Stream in the east and west, and Hak-dong in the south and Numun-dong in the north. One bang is estimated to be about 155m to 160m, and the long axis (north and south) is 13 to 14 bangs, about 2,400m, and the short axis (east and west) is 4 to 5 bangs, about 700m to 1,000m, and the overall scale is estimated to be about 6,500m. Looking at the development of Sabeolju and Gyeongju downtown, Mujinju seems to have begun renovation in the late 7th or early 8th centuries at the latest, and it seems to have been completed in the late 8th century, before the construction of Mujingoseong, a mountain fortress in the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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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간양록(看羊錄)』의 편간 과정과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에 대한 분석

저자 : 안동교 ( Ahn¸ Dong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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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姜沆, 1567-1618)이 17세기 벽두에 남긴 『간양록(看羊錄)』은 조선의 도학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실학자로 알려진 인물들에게도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간양록』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17세기 중반에 『간양록』이 간행 보급된 이후, 이 책은 어떤 특정계층에만 국한되지 않아 조선의 유학자라면 두루 읽은 일종의 역사와 문화의 교양서였다.
현재 강항을 제향 하는 내산서원(內山書院)에는 1658년 목판본 『간양록』이 간행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 『간양록』이 소장되어 있다. 그간 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의 구성과 필사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 필사본의 전승 과정과 필체 분석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였다.
필자는 이 필사본이 두어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필사본이 합사본(合寫本) 형태로 꾸며진 것이고, 필사자는 강항을 포함하여 4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또 필사본 『건거록(巾車錄)』에서 목판본 『간양록』으로 제목·목차·내용·체제 등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이 내산서원 필사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he “Ganyangrok(看羊錄)” written by Kang Hang(姜沆, 1567-1618) in the beginning 17th century, did not only affect Chosun's Taoist, but also influence the figures known as Silhak scholars in many ways. In addition, the records of the communications officer that have visited Japan also mention the contents of the “Ganyangrok”. After the publication of “Ganyangrok” in the mid-17th century, this book was a kind of historical and cultural refinement read by Chosun Confucian scholars, not limited to any particular class.
In Naesan Seowon, which is currently sacrifice to Kang Hang, the manuscript “Ganyangrok”, which appears to have been written before the woodblock edition “Ganyangrok” was published in 1658, is in the collection. In the past, learned circles have conducted research on the composition of the manuscript and Scribe, but failed to provide a clear answer. Therefore, I came up with a few meaningful achievements throug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and handwriting analysis of this manuscript in order to complement the incomplete parts.
I estimated that this manuscript was made in the form of a pair of manuscripts on a couple of occasions, and that Scribe was about four, including Kang Hang. In addition, I think that the process of changing the title, table of contents, contents, and system gradually from the manuscript “Geongerrok(巾車錄)” to the woodblock edition “Gangyangrok(看羊錄)” can be confirmed through this manuscript of Naesan 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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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곡성 합강삼절(合江三絶)의 건립자와 역사적 함의

저자 : 박정하 ( Park Chung-h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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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합강은 섬진강과 옥과천의 물길이 만나는 지역으로 합강삼절은 합강지역에 자리잡은 합강정, 관이정, 무진정을 말한다.
정자의 주인이나 연대 등이 지리지에 나타난 정황과 씨족들의 계보를 수록한 족보(보첩)의 기록과 매우 상이한 면이 많이 나타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향토사적 측면이나 학문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대부분의 자료들이 이 같은 지리지 등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 바로잡지 않으면 향후 후진이나 연구자들에게 혼선을 가져다 주게 된다.
본고에서는 각종 관찬, 사찬 지리지와 정자를 설립한 가문의 족보를 면밀히 검토하여 본 결과 많은 오류를 발견되었다.
삼강삼절 중 합강정은 1545년도를 전후한 시기에 유경안이 처음으로 설립했으며 그 위치는 옥과면 합강리 산 14-2번지 일대이며, 관이정 1530년대 윤부가 건립했으며 그 위치는 합강리 산 192-3번지인 것으로 파악되고, 무진정의 건축연대는 1751년이 아닌 1629년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특별한 점은 첫째, 합강삼절은 남원윤씨 문효공파 가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명문가와 혼인을 통해 수많은 인맥을 형성, 이들을 통해 전국적인 명사들이 찾아와 교유하면서 정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합강삼절은 조선시대 최대의 강변 유원지로 절경을 이루어, 주변을 다스리는 관장들이 찾아와 향음을 베풀고 교류하면서 「합강선유가」라는 가사문학을 양태 했다는 점이다. 셋째, 합강삼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누란의 위기 봉착되자 정자를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서 의병으로 나가 충성하는 진원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담론이 생성된 곳이다는 점이다.
이처럼 합강정, 관이정, 무진정은 서로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상통하는 표식, 즉 아름다운 절경, 국가에 대한 충성심, 끈끈한 가문의 인맥이라는 이라는 배경이 '합강삼절'이라는 표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섬진강의 옛 지명인 순자강 유역 즉 합강에서 곡성읍 지역까지 합강삼절을 비롯해 약 20여개의 정자가 줄띠를 이루며 자리 잡고 번성했지만, 현재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편으로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Gokseong Hapgang is an area where the waterways of the Seomjingang River and Ogwacheon Stream meet, and HapgangSamjeol refers to Hapgangjeong, Gwaneijeong and Mujinjeongjeong Pavilion located in Hapgang area.
There are many differences in the history of the genealogy, which contains the circumstances of the pavilion's owner or regiment and the genealogy of the clan. Correcting this is very important in terms of local history and academia. In particular, most of the data cite such geographical data, which, if not corrected, could lead to further backwardness or confusion among researchers.
A close examination of the genealogy of various government-conglomerate, sachan geography, and the family that founded the pavilion found many errors.
Among the three syllables, it was first established by Yoo Gyeong-an around 1545 and its location is located around 14-2 mountain sites in Hapgang-ri, Okguam-myeon. It is believed that Yunbu built it in the 1530s and its location is 192-3 Hapgang-ri. The architectural age of Mujinjeong is judged to be 1629, not 1751.
What's special is that first, Hapgang Samjeol was established around Nam Won-yoon's family of Munhyo-Gongpa. Through marriage with famous families, numerous connections were formed, and through them, the name of the pavilion became widely known as a result of Second, Hapgang Samjeol was the largest riverside amusement park in the Joseon Dynasty, where the heads of government officials who controlled the area visited the area to perform incense and interact with each other. Third, Hapgang Samjeol was the epicenter of loyalty by standing up and serving as a medical soldier when the country faced a yellow crisis, including the Imjin War and the Byeongja Horan War.
The reason why Hapgangjeong, Gwaneijeong and Mujinjeong seem to be separate from each other is that they actually have a connection with each other: beautiful scenery, loyalty to the nation, and a strong family connection, which is why they are represented as "Hapgang Samjeol." Although about 20 pavilion, including Hapgang Samjeol from Hapgang to Gokseong-eup, the former designation of the Seomjingang River, have flourished in a row, research on the Seomjingang River has to be carried out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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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 후기 태안이씨 의관 연구 - 사맹공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훈평 ( Park Hun Pye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6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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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이씨 사맹공파는 조선 후기 기술직 관료를 구성하는 주요한 가계의 하나이다. 조사된 가계 내의 의관은 총 65명이었다. 선행연구에서 조사된 57명에 새로 8명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본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첫째, 의관 가계로서 17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고, 19세기에도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가계 내 의관은 1672년 의과에 급제한 인물이 처음이었다. 18세기 중반, 내의를 3명이나 배출하면서 의관 가계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18세기 중후반은 활동한 가계 내 인물이 의관이 19명에 달한다. 19세기는 점차 고위직에 오른 의관이 줄었지만 배출 의관의 수는 비슷하였다.
둘째, 사조 분석을 통해보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가계 내 세전 양상이 잘 나타난다. 사조 중에 의관이 없는 경우는 5례로 전체의 7.81%에 불과하다. 생년에 따른 활동 시기를 감안하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가계 내 세전 양상이 두드러진다.
셋째, 가장 많이 종사한 의학 관청은 전의감이었다. 해당 의관 중에 전의감이 최종 관력인 이는 42명으로 65.6%에 달한다. 『해혹변의』를 저술하게 된 배경도 이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다. 의관 가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가계 내 후진의 의과 대비에 더욱 노력했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 영조와 순조 때 의과의 급제 연령은 다른 의관 가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았다. 즉 세전 양상이 두드러진 시기에 급제 연령이 낮게 나타났다. 사맹공파 내에서 영정조기에 비하여 순조 대에 급제 연령이 높아졌다가 고종대에 다시 감소하는 추이도 세전과 급제 연령의 연소화와 관련시켜 볼 필요가 있다.


Samaeng(司猛)-gong(公)'s ancestry of Taean Lee clan is one of the major clans that make up medical bureaucrats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 were 65 medical bureaucrats in the household surveyed. In addition to the 57 people investigated in the previous study, 8 additionally were discovered. Through this study,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drawn.
1) As a medical bureaucratic family, it began to be formed in the late 17th century, enjoyed its heyday in the mid to late 18th century, and It maintained a certain position even in the 19th century. The first medical bureaucrat in the household was the first to enter Medical state examination in 1672.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t produced three royal doctors and established a solid position as a medical bureaucrat. In the mid to late 18th century, there were 19 medical bureaucrats who were active in the household. In the 19th century, while the number of medical officials who had risen to high positions gradually decreased, the number of medical officials discharged was similar.
2) Through the analysis of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maternal grandfather, from the late 18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pattern of inheritance within households is well seen. Among the four ancestors, there were no medical officials in 5 cases, accounting for only 7.81% of the total. Considering the period of activity according to the year of birth, the pattern of pre-tax in households is prominent in the late 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3) The most engaged medical office was Jeoneuigam. Among the officers, the Jeonui-gam was the final official, accounting for 65.6% of the 42 people. The background that led to the writing of HaeHokByeonUi can be thought of in connection with this. As one of the means to maintain the status of the medical family, it is possible that they made more efforts to prepare for Medical state examination of the junior in the household.
4) At the time of King Yeongjo and Soonjo, the passing age of Medical state examination was relatively low compared to other periods. In other words, when the hereditary pattern was prominent, the age of passing grades was 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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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9 직후 내각책임제 개헌논의와 '보수합동'

저자 : 김지형 ( Kim Ji Hy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8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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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직후 내각책임제 개헌은 민주당 주도 하에 일사천리를 진행되었다는 통설과 달리 자유당과 이승만, 이기붕 등 여권에서 먼저 제기된 사실을 우선 주목하였다. 이른바 '정국 수습책'으로서 제시된 내각제 개헌론은 자유당의 입장에서 볼 때, 국회 해산을 방지할 강력한 명분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전통적 당론이었던 내각제를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특히 자유당 혁신파와 민주당 구파를 중심으로 '보수합동'의 원리에 따라 개헌논의의 주도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이 점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중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이 초기 보수합동의 균열을 야기한 측면이 있으나 이승만의 4.26 하야에 이어 4.28 경무대 퇴거라는 가시적 조치가 나타나면서 장면과 신파의 입장은 '현 국회 내에서의 개헌'으로 바뀌었고, 이후 내각제 개헌이 본격 추진되었다.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보수합동 의식의 배경에는 3.15와 4.19의 원인을 이승만·자유당 독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중심제라는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였으며, 바로 이 점이 내각제 개헌론의 맹점이었다.
개헌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보수합동의 모순점들도 확인된다. 부정선거사범에 해당하는 자당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담보로 몽니를 부렸으며 민주당은 속수무책으로 자유당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공소 만기를 하루 넘겨 개헌안이 통과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애초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의 원흉인 자유당과 공조하는 순간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개헌 통과 후 7.29총선을 거쳐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보수합동의 정치사적 귀착점에 도달했으나 불과 열달 만에 5.16쿠데타로 전복됨에 따라 내각책임제 구현의 이상도 함께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사적 결과는 '권력 집중의 방지'를 명분으로 한 내각제 개헌이 그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견인한 보수합동이라는 가치의 당위성마저 의미 부여하기 곤란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The amendment to the Parliamentary Cabinet System, which was made immediately after April 19, 1960, was completed very quickly over 46 days. The Liberal Party which is responsible for the March 15 unfair election, began discussing the constitution of he Parliamentary Cabinet System first, and the Democratic Party also actively conducted it. In particular, the phenomenon of cooperation between the Liberal Party's revolutionary party[Hyeogsinpa] and the Democratic Party's former party[Gupa] was greatly observed, and it became the basic driving force for the amendment of the cabinet system to the end.
The theory of amendment to the cabinet system spread further with the agreement of Vice President-elect Lee Ki-poong, who was the main culprit in the unfair election, and Syngman Rhee. The April 26 Resignaion[Haya] was possible in this context, and the transitional cabinet Heo Jeong, who was in charge of the government afterwards, also stably supported and supported the amendment of the cabinet system. The Democratic Party's constitutional amendment solidarity, which used to be an opposition party based on the tradition of the cabinet system and the ruling party forces was in fact strong intent to reorganize political power through a “conservative union” and to operate the National Assembly in a stable manner by conservative forces.
However, in the process of promoting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the interests of the Free-Democratic parties constantly clashed in the political reality. It was to reveal that the two parties' cooperation to amend the constitution was based on a fundamental contradictory relationship. The logic of the conservative union for the amendment of the cabinet system was based on the diagnosis that Syngman Rhee's 12 year dictatorship was caused by the presidential system, and it was bound to fall into the trap of overlooking the mistakes of the Liberal Party including Rhee. That was the biggest problem with the amendment of the cabinet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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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로컬에서 1991년 5월투쟁을 다시 보기 :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김봉국 ( Kim¸ Bong Gu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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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1년 5월투쟁을 서울지역의 경험이나 정치적 성패 차원의 논의에서 벗어나 '광주'라는 로컬의 위치와 감성적 주체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았다. 광주지역은 5·18의 경험과 감성의 자장 속에서 5월투쟁에 직면했다. 80년 '5월 청산'의 문제가 지연된 상태에서 5·18 문제는 지속적으로 지역민의 사회인식과 실천에 (무)의식적 영향을 미쳤다. 91년 5월투쟁 당시 투쟁의 리듬과 강도와 지속성이 다른 지역과 달랐던 배경에는 이처럼 지속된 5·18의 상흔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낳은 분노가 연이은 '열사'들의 죽음에 응답했기 때문이었다. 5월투쟁은 지역민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적 삶을 정지시키고 구조화된 삶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경험공간을 제공했다. 특히 애도와 투쟁의 리미널한 시공간은 지역민들에게 80년 5월의 '해방공동체'를 떠올리고 경험하게 했다. 또 하나의 5월로 경험되었던 5월투쟁은 광주시민에게 '5월 청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패'나 끝이 아닌 계속되어야 할 투쟁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결국 광주지역의 사례는 91년 5월투쟁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위치와 문맥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91년 5월투쟁에는 에른스트 브로흐(Ernst Bloch)가 '비동시성의 동시성(die Ungleichzeitigkeit des Gleichzeitigen)'이라고 말했던 바와 같이, 여러 시간대가 중첩되어 흐르고 있었다.


This article revisited the May 1991 strugg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motional subject and the local location of 'Gwangju', away from discussions on the level of experience or political success or failure in the Seoul area. The Gwangju area faced the May struggle amid the memories and emotions of the May 18 Democratization Movement. While the issue of 'May liquidation' in 1980 was delayed, the May 18 issue continued to (un)consciously affect the social awareness and practice of local residents. The reason for the fact that the rhythm, intensity, and continuity of the struggle at the time of the May Struggle in 1991 was different from that of other regions was that the sustained trauma of May 18 were located, and the anger produced by it was in response to the deaths of the “martyrs” in succession. The May Struggle provided local residents with an experience space where they could suspend their daily lives and dismantle or subvert the boundaries of structured life. In particular, the liminal time and space of mourning and struggle made the local people remember and experience the 'liberation community' in May 1980. The May Struggle, which was experienced as another May, has a strong tendency to be perceived by Gwangju citizens as a process of continuing struggle, rather than as a 'failure' or an end in a state where the issue of 'May liquidation' has not been resolved. In the end, the case of the Gwangju area suggests that the May 1991 struggle unfolded in different locations and contexts depending on the region. Also, for this reason, in the May 1991 struggle, as Ernst Bloch said, 'the simultaneity of asynchrony', several time zones overlapped and flo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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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청대 의약시장의 상업화와 '매약'

저자 : 최지희 ( Choi Jihe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1-26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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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이후의 중국의 대도시에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을 내려주면 환자가 약포로 가서 약재를 고르고 미리 제조된 매약(賣藥)을 사는 의약분업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그만큼 대중이 매약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즉 명청대의 의료 환경에서 약포와 매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9세기 이후에는 상인이 전문적으로 약포를 경영하고 매약을 판매하였다. 상인이 운영하는 약포에서는 일상생활의 갖가지 질병과 관련된 약을 제조했고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약품의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청대 후기 전염병이 유행하고 전란이 빈번하던 시기에는 이에 맞는 전염병 치료나 외과 치료와 관련된 약품의 종류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청대 사회에서 매약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상품이기도 했고 약포들은 매약이라는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사용했다. 약포는 약목을 출판하여 약포에서 생산하는 매약이 항상 검증된 좋은 약재를 쓰고 옛 약방을 준수하여 제조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약단이나 벽보같은 수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청말 근대 매체가 들어온 이후에는 신보와 같은 신문이 새로운 광고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In the Ming- Qing cities in China, once doctors had examined and given prescriptions to patients, the patients went to the pharmacy to select and buy pre-made medicines. This kind of separation between the prescription and distribution of pharmaceuticals gradually settled during the Ming-Qing China. Since then, the public's dependence on drugs has increased significantly. Hence, the pharmacy and medicine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medical environment of the Ming-Qing Society. After the 18th and 19th centuries, merchants professionally carried medicinal herbs and sold patent drugs. The drugstore, run by merchants, manufactured drugs related to various diseases in daily life and tried to satisfy the societal demand for medicines at that time. While infectious diseases were prevalent and war was frequent in the late Qing society, the types of drugs related to infectious disease or surgical treatment were incorporated accordingly. In the Qing society, drugs were not only aimed at treating diseases, but also a kind of product, and drugstores used various methods to advertise products called drugs. Pharmacists emphasized that their patent medicines always used proven superb medicinal herbs and were manufactured according to rules based on reliable traditional methods. They also used means such as pamphlets and posters. Although newspapers became a new advertising means after the arrival of modern media, but traditional advertisement methods, such as traditional prescriptions and the use of provincial medicinal herbs, were still persuasive. Trust in patent drugs and traditional advertising elements seems to have continued for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and to have still been influential in the late Qing's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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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기선(汽船)의 내지(內地) 진출과 청말(淸末)의 양선(洋船) 정책 - 19세기 말 프랑스 소형기선(小型汽船)의 내지항행(內地航行) 논쟁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정 ( Kim¸ Hyun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5-30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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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860년대 중반 소형기선의 내지항행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측과 총리아문, 상해당국의 논쟁을 중심으로 청말 양선의 내지항행에 대한 청정부의 입장과 대처를 분석해 보았다. 19세기말 서양과의 조약 체결에 따른 통상항 개항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청정부는 양선의 非통상항, 즉 內地로의 접근을 금지함으로써 대응하였다. 천진·북경조약 체결 이후 북경의 總理衙門은 재차 양선의 非通商港, 즉 內地(interior)로의 접근 및 교역을 일절 금지하였다. 즉, 양선은 오로지 통상항만 왕래하면서 교역할 수 있었다.
1865년 북경에서 프랑스공사 벨로네가 기선의 내지항행 허용을 요청하였을 때, 총리아문은 충돌사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완곡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리고 상해통상대신 이홍장을 위시한 상해당국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기선의 내지항행 금지를 견지하고자 했다. 상해당국은 이 문제가 國家稅釐, 商民生計와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라 여겼고 이는 총리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프랑스측 역시 물러서지 않고 조약 규정과 프랑스의 사례, 그리고 양선업의 화상 이익을 들어 기선의 내지항행 허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뒤를 이어 상해통상대신에 부임한 증국번은 무엇보다 내지의 민선업으로 영위하는 商民의 생계를 내세워 기선의 내지항행에 반대하였고, 결국 청조중앙과 지방당국의 지속적인 반대 속에서 기선의 내지항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청말의 통상항 개항은 일견 그때까지 닫혀 있었던 중국이 서양에 개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정부가 양선을 통상항에 묶어둔 정책에서 생각해본다면, 통상항은 양선교역에 대한 제한이 관철되는 장소로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This research aims to analyze Qing Government's response to the inland navigation of the foreign vessels in the late Qing Dynasty, focusing on the debate between the French Minister, the Tsungli Yamên and the Shanghai Authorities over the inland navigation of the small steamers in the mid-1860s. In the new phase of opening of treaty ports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treaty with the West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Qing government responded by banning foreign vessels from access to non-treaty ports, that is the interior(內地). After the signing of the Treaties of the Tientsin(1858) and Peking(1860), the Tsungli Yamên of Peking once again prohibited access and trade to the interior of foreign vessels. In other words, foreign vessels including steamer could trade only through treaty ports.
In 1865, when French Minister Henri de Bellonet requested permission for the French small steamers to sail inland, the Tsungli Yamên expressed concern about the crash and euphemistically opposed it. In close cooperation with the Shanghai Authorities, including the Superintendent of Southern ports, Li Hung-chang, the Tsungli Yamên sought to maintain a ban on the inland navigation of steamers. The Shanghai Authorities considered it to be a major issue directly related to the National tax revenue(國家稅釐) and livelihood of the native vessels(商民生計).
But the French Minister also did not back down calling for the inland navigation of steamers, citing treaty provisions, the French case, and native merchant interests of business of foreign vessels. However, the Zeng Guo-fan, who succeeded Li Hong-chang in the Superintendent of Southern ports, opposed the inland navigation of steamers, citing the livelihood of the people living as the business of native vessels and eventually it was not allowed to do so amid constant opposition from the Peking Government and the Shanghai Authorities. At first glance, Qing China, which had been closed until then, seems to be finally open to the West. However, the Qing Government took the policy of binding the foreign vessels to the treaty ports, so the treaty ports have the meaning as the place where restrictions on the trade of foreign vessels are enfor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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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방역과 자유 사이에서 : 1721년 영국 방역법의 형성과 개정

저자 : 주의돈 ( Euidon J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3-33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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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21년 제정된 영국의 방역법과 그것의 의학적 토대를 제공한 리처드 미드(Richard Mead)의 저술, 그리고 방역법의 핵심적인 조항을 둘러싼 논쟁과 그 조항의 폐지를 살펴본다. 1720-3년 마르세유를 시작으로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영국인들은 1665-6년의 런던 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을 떠올리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의회는 흑사병의 유입을 막기 위해 그리고 흑사병이 영국에 들어왔을 경우 그 확산을 막기 위해 1721년 1월에 새로운 방역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영국의 탁월한 의사 미드는 방역법의 이론적 토대와 실무적 지침을 제공하였다. 1721년 방역법의 특징은 영국 내로 흑사병이 유입되었을 경우 이전에 비해 매우 적극적인 조치 - 격리병원으로의 감염자 강제 이송, 방역선 설치를 통한 감염지역으로부터의 이동 제한 - 를 취하도록 규정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1721년 방역법 중에서 위의 적극적인 조치를 규정한 조항들이 여전히 프랑스 남부에서 흑사병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연구에서 폐지의 주요한 이유로 간주되는 것은 흑사병 위협의 감소, 영국 상인들의 상업적 이해관계, 월폴(Robert Walpole) 내각과 반대파 사이의 정쟁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요소들이 방역법 일부 조항의 폐지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만 기존 연구가 간과해 온 요소에 주목한다. 그것은 방역법 반대파의 정치공세 이면에 존재했던 부유층의 특권의식이다. 반대파는 방역법의 일부 조항이 강압적이기 때문에 영국민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상 그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생계에 대한 염려 없이 감염지역으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부유층뿐이었다. 따라서 국내 방역 대비책을 규정한 조항의 삭제에는 부유층의 특권의식을 대변한 의회 의원들이 영향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흑사병이 영국으로 유입되지 않고 1720-3년의 위기가 지나갔지만, 만약 흑사병의 유입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면 1721년 방역법의 일부 조항 폐지는 특권 의식에서 비롯한 뻐아픈 실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Quarantine Act enacted in 1721, Richard Mead's writings 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act, the controversy over its major clauses of the act, and their abolition. When plague spread from Marseille to Southern France, the British panicked, being reminded of the Great Plague of London in 1665-6. Parliament passed a new act for quarantine in January 1721 to prevent plague from entering Britain and to stop the spread of plague in case of its arrival. A leading British doctor of the time, Mead provided the theoretical basis for the act as well as practical guidance to fight plague. The characteristic of the Quarantine Act 1721 was that it stipulated more vigorous measures than before: forced removal of the infected to the pesthouse and the regulation of travel from the infected area by drawing a cordon sanitaire. The interesting thing is that the clauses stipulating the vigorous measures were repealed at a point of time when plague was still active in Southern France. Existing studies argued that among major reasons for the abolition were the decrease of the threat from plague, the commercial interest of British merchants, and the political conflict between the Walpole ministry and its opposition party. This paper acknowledges that these factors played some roles in the abolition, but emphasise the factor overlooked by the existing studies. It was a sense of privilege behind the opposition party's political attack. The opposition party argued that the clauses were oppressive and infringing on the British liberties. However, the liberties could be enjoyed only by a small number of rich people. For example, those who could flee from the infected area without worrying about maintaining their livelihood were the wealthy only. Thus the abolition of the clauses stipulating quarantine measures within the country was driven by the members of parliament who spoke for the sense of privilege of the rich. Fortunately for the British, the crisis of 1720-3 passed without plague entering Britain, but if plague had cost a large number of lives at the time, the repeal of the clauses of the Quarantine Act 1721 would have remembered as a painful mistake shaped by a sense of privi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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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국왕조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외교 변화

저자 : 정동준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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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에서 6세기 백제와 중국왕조의 외교를 다루면서, 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49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후경의 난과 제위쟁탈전으로 인하여 555년 이후에야 석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이 사신은 혼란하였던 양의 몰락한 상황을 파악하여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백제는 이후 양과 진에 사신 파견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60년대 이후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그 주기가 정치·군사적 기대와 반비례하였기 때문에, 주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가 567년에야 북조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것은 백제 내부의 사정으로 사신파견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550년대 이전까지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동위의 우호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550년대 이후에 백제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있었고 고구려와 북제의 불화라는 상황 때문에 사신 파견이 가능하였지만, 560년대에 신라가 먼저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550년대에는 북제가 최강국이었기에 가장 접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대내적 요인 때문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북조에 대한 외교에서는 성과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589년 백제는 수의 통일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황제에게 무도를 하였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무도는 군주에게 종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585년부터 의례에 도입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여전한 충성의 표시인 동시에 백제가 수의 '관념적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백제가 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빠른 대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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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초기 나주선의 톤수 추정과 검증

저자 : 김성준 ( Kim Sung-june ) , 김경옥 ( Kim Kyeong-o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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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나주선은 이제까지 발굴된 한선 가운데 최대선으로 추정된다. 선행연구에서는 나주선을 전장 32-42m에 이르는 초대형선이나 고려시대 초마선으로 추정했다. 문헌상 고려의 배는 누선, 초마선, 과선, 일본원정선 등 4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선은 여진족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동북방면에서 활용되었던 군선이고, 일본 원정선은 일본을 공략하는 데 이용된 배다. 발굴된 지역을 고려하면 나주선이 과선이나 일본 원정선일 개연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나주선을 고려의 조운에 이용된 초마선으로 가정할 경우 왕건의 누선일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 발굴선과 기타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추출함으로써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만곡종통부와 저판재를 바탕으로 나주선의 크기를 추정해보고자 했다. 2에서는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선박의 사례를 살펴보고, 3에서는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저판재와 만곡부재를 통해 저판장을 가정한 뒤,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적용해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추산해 나주선의 톤수를 계산해보고, 이를 검증해 보았다.
연구 결과 나주선은 총톤수 230총톤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저판장은 22m, 저판폭(저판재 9장)은 6.81m, 상갑판장 31.46m, 상갑판 폭 12.34m, 깊이 4.97m(만곡부재 포함 외판재 7열)가 된다. 이 연구는 잔존한 소량의 부재를 활용한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주선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시 활용한 누선일 가능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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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저자 : 김봉곤 ( Kim Bongg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1-9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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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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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기말~20세기초 전라도 강진 병영지역의 환(煥) 사용 실태와 메커니즘 - 박약국(朴藥局) 장부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덕진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2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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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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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저자 : 정호기 ( Jung Ho-g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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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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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웹사이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의 스토리텔링 연구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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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이하 '진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성된 하시마 섬의 역사 스토리의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실'은 옛 하시마 도민들의 구술을 주되게 활용한 여러영상물들의 배치를 통해 지옥섬 하시마의 '이미지'를 벗겨내면서 일체감의 코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려운 시절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노동했던 1940년대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 속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는 일본인도 함께 겪은 전쟁의 공동 피해로 변형되며, 침략전쟁의 피해자로서 조선인 노동자는 하시마 탄광업을 '지탱했던[supported]' 필수요소 중 하나로 전환되었다. 궁극적으로 '진실'의 스토리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지켜온 긍정적 역사라는 이미지 창출로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통해 구축 중인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지들 중 강제동원 피해 시설들의 전체역사 해설에 원형의 콘텐츠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또한 최근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오픈과 함께 사실상 일본의 전체역사 해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하시마에 관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1940년대 하시마의 일상과 노동 실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실증 작업과 함께 그간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구술자가 겪은 전쟁과 동원, 군수산업과 노동, 징용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방법의 개발이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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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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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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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저자 : 김효진 ( Kim Hyo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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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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