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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19세기말~20세기초 전라도 강진 병영지역의 환(煥) 사용 실태와 메커니즘 - 박약국(朴藥局) 장부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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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20세기초 전라도 강진 병영지역의 환(煥) 사용 실태와 메커니즘 - 박약국(朴藥局) 장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Use of Hwan in the Barracks of Gangjin, Jeolla Province in the Late 19th ~ Early 20th Century - With a focus on the books possessed by the descendent family of Park's Pharmacy -

김덕진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8월
  • : 97-121(25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79.4


목차

1. 머리말
2. 약국 장부 속의 환 사용
3. 자산 장부 속의 환 사용
4. 환 거래의 메커니즘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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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The barracks of Gangjin had developed commerce and a nationwide network, thus starting to use Hwan earlier than other areas. As a consequence, Park's Pharmacy used Hwan frequently to purchase medicinal stuff and do a financial transaction in the late 19th century. Its pharmacy or asset books contained approximately 60 cases of Hwan traces or details. It set about 2% of the principal as the transaction fee of Hwan and gave about five days around a market day to collect its Hwan in line with the nationwide situation. The size of Hwan was small with fewer than 100 nyangs in overwhelming cases, which was different from findings of previous studies reporting 200~1,500 nyangs. The percentage of Hwan transactions with the distant Yangnyeong Market in Daegu was higher than that with the market of nearby Jangheung town, which indicates that the size of Hwan was dependent on the credit rating.

UCI(KEPA)

I410-ECN-0102-2021-900-001026218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1
  • :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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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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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세기 초 만주(滿洲) 한인(韓人)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저자 : 박정현 ( Park¸ Jung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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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는 20세기 초 간도협약과 만몽조약 전후 시기 만주 한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연구했다. 1915년 滿蒙條約 체결 이후 중국과 일본은 만주에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다. 중국과 일본은 크게 세 부분에서 서로 충돌했다. 1) 한인의 국적문제와 중국 귀화문제, 2) 한인에 대한 재판관할권 적용 범위, 3) 간도지역에 토지 商租權 적용문제였다.
중국은 자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외국인인 한인을 통제해야 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면서 한인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한인政策은 일본과 외교 마찰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적, 정책적 수단으로 단속했다. 이러한 방식은 눈에 띄는 차별이나 압력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일상적이었다. 만주 현지에서는 지방관리들과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압박이 현실로 나타났다. 만주 한인문제는 만주사변 전까지 한인과 중국인 사이의 최대 갈등이 되었다


In this paper, we studied how the Chinese government's policies toward Koreans in Manchuria changed before and after the Gando(間島) Convention and the Manmong Treaty in the early 20th century.
After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the migration of Koreans to Manchuria was started due to natural disasters in northern Korea, the exploitation of government officials, and poverty. After the Japan- Korea Treaty, Koreans emigrated to Manchuria to escape poverty and Japanese rule. The Koreans in Manchuria became a problem to be solved among Korea, China, and Japan after the Japan-Korea Treaty.
After the conclusion of the Manchuria-Mongolia Treaty in 1915, China and Japan became even more prominent in Manchuria. Due to the ambiguous provisions of the Treaty, China and Japan have argued over the cancellation and application of this treaty. China and Japan collided with each other in three major parts. 1) The issue of naturalization of Koreans to China, 2) The issue of application of jurisdiction to Koreans, 3) The issue of application of the rights of renting land through negotiation to the Gando area.
China recognized that naturalizationof Koreans to China, which should effectively govern Koreans, is the best way to do it. Therefore, if possible, China implemented a policy to naturalize many Koreans to China, and Japan desperately prevented the naturalization of Koreans.
In addition; Japan tried to hold a court and administrative event for Koreans on behalf of China because of its great influence in Manchuria. As a result; Japan tried to invalidate the Gando Convention and apply the Manchuria-Mongolia Treaty. However; if the jurisdiction and administrative power of China were transferred to Japan; China could no longer maintain the sovereignty of the Manchurian region; and China made efforts to maintain the Gando Convention. In addition; the revocation of the Gando Convention was also affected by the land ownership of the Gando Koreans; and China and Japan argued fiercely over this.
China had to control foreign Koreans in its territory; Manchuria. However; the number of Koreans in Manchuria exceeded 1 million in the late 1920s; and it was difficult to unilaterally control it due to diplomatic friction with Japan. While avoiding diplomatic friction with Japan; the Chinese government contemplated how to persuade and control Koreans. Therefore; the Chinese government cracked down on Korean-Americans by legal and policy means as long as they did not cause diplomatic friction with Japan. This method could not create any noticeable discrimination or pressure. However; in the private sector;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of Koreans by Chinese were commonplace. In Manchuria; local officials and Chinese pressure on Koreans has become a reality.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s in Manchuria has aroused the anger of Koreans; and in Chosun; persecution by overseas Chinese has called for protests by the Chinese government. The two problems were raised separately in different regions; but were closely linked to each other Japan used the conflict between Koreans and Chinese to take advantage of Korean colonial rule and the Manchurian issue. The Korean-Chinese issue in Manchuria was the biggest cause of conflict between Koreans and Chinese before the Manchurian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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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의 인식변화 추이 - 「인민일보(人民日報)」와 「광명일보(光明日報)」를 중심으로 -

저자 : 송한용 ( Song Han 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6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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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정부 및 중국공산당의 인식을 「인민일보」와 「광명일보」의 기사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몇가지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시기적으로 신중국 성립부터 중일 국교가 정상화되는 시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익화 문제와 중일 간 센카쿠/댜오위다오의 분쟁이 본격화하기 이전 시기, 일본의 우익화가 강화되고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 실시되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중국의 만주사변 인식은 역사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나 필요성 그리고 국제적 상황 특히 중ㆍ일 간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있고, 기념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강화되고, 중국이 국력에 자신감을 회복한 이후, 중국은 애국주의교육을 강조하면서 만주사변을 애국주의의 중요한 교재로 삼았다. 또한 만주사변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맹세의 도구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analyzed the perceptions of the Chinese government and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on the Manchurian Incident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rough articles in the People's Daily and the Guangming Daily. Through this, several characteristics was identified.
First of all, the period can be divided into three: the period from the establishment of a new country to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Japan; the period before the Cultural Revolution ended and Japan's historical distortion, right-wing issues, and the Senkaku/Diaoyu dispute between China and Japan began in earnest; the period Japan's right-wing was strengthened and China's patriotic education was implemented.
Next, It can be seen that China's recognition of the Manchurian Incident is not recognized as history itself, but is recognized and commemorat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domestic political situation or necessity,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especially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Finally, since the mid-1990s, Japan's rightward shift was strengthened and China regained confidence in its national power. China began to emphasize patriotic education, and at this time, the Manchurian Incident was used as an significant textbook for patriotism. It was also confirmed that the war against Japan was used as a tool to pledge allegiance to the Chinese Communist Party, centered on the Manchurian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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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베 고보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나타난 일본과 만주 : 경계선 위의 짐승들은 연대할 수 있는가

저자 : 심정명 ( Sim Jeongm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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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주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는 주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고생담에 기울어 있거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채 만주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귀환 체험을 다룬 방대한 수기들은 귀환자 개개인의 피해와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 논문에서는 만주국의 붕괴와 함께 홀로 남겨져 일본을 향해 가는 소년 규조를 주인공으로 한 아베고보의 소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를 분석하면서, 귀환을 다룬 문학이 이 같은 내셔널한 서사에 자그마한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본 논문 또한 이작품이 일본인인 규조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고난을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귀환문학이라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단, 이때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목적지로 설정된 '일본'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 가이다. 규조에게 일본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상상한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을 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규정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그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주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그때그때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바꾸어 나가는 고세키토라는 인물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자의적 특징들은 민족들 간의 지배ㆍ피지배 관계와도 겹쳐져 있다. 즉 이 작품에서 규조가 갈구하는 일본이란 만주의 황야나 규조와 고 같은 '짐승'들과 대비되는 문명이자 만주국이 붕괴하기 전의 일상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이상적인 고향으로서의 일본은 존재하지 않고, 경계선상에서 '짐승'으로 살아가는 규조와 고는 일본으로 가는 밀수선을 타고서도 결국 일본에 상륙하지 못한다. 본 논문에서는 또한 이 작품이 규조와 고의 관계나 규조와 중국인소년의 관계를 통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벗어나서 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였다. 규조와 고는 선양에 도착하기까지 기묘한 동행을 계속하고, 그것은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제목에 있듯 '고향'을 향하는 복수형의 '짐승들'에 주목할 때, 이 작품에서는 규조의 실패한 관계 맺기를 통해 귀환이라는 경험을 내셔널한 서사로 회수하지 않는 귀환문학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When talking about Manchuria's memories in Japan, it has been criticized for drawing nostalgia for Manchuria, mainly leaning toward the hardships of returning to Japan amid the chaos of defeat and lacking awareness of colonial rule. In particular, the vast number of handwriting dealing with the return experience was often centered on the damage and sacrifice of each returnee. In this paper, we analyzed Abe Kobo's novel Beasts Head for Home, a story of a boy named Kyuzo left alone with the collapse of Manchuria, seeking the possibility that literature on returning could bring small cracks to such a national narrative. Like previous studies on Beasts Head for Home this paper also starts with seeing it as a kind of 'return literature' in that it depicts the process of Kyuzo, as a Japanese, going through difficulties to return to his hometown. However, what is important is what 'Japan', which is set as the destination in the novel, represents. For Kyuzo, Japan exists only as an image learned and imagined through textbooks, so he constantly continues to define Japan and Japanese in the process of heading home. What the work shows through this is the fact that the national identity and the contents that is considered to constitute it are arbitrarily combined. And it is evident in a character named Kosekito, who freely speaks the language used in Manchuria and changes national identity whenever he needs. In addition, in this work set in Manchuria, these arbitrary characteristics overlap with the dominant- subjugated relationship between ethnic groups. In other words, in this work, Japan, which Kyuzo longed for, is something civilized that contrasts with Manchuria's wilderness or “beasts” like Kyuzo and Ko, and is imaged as a daily life before the collapse of Manchuria. However, Japan as such an ideal hometown does not exist, and Kyuzo and Ko, who live as “beasts” on the border, cannot eventually land in Japan even if they take a smuggling ship to Japan. In this paper, it was also noted that this work raises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can be solidarity beyond national identity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Kyuzo and Ko or between Kyuzo and a Chinese boy. Kyuzo and Ko continue their strange companionship until they arrive in Shenyang, and it is not just a relationship that uses each other. When paying attention to the plural “beasts” heading toward “home,” as the title suggests, and Kyuzo's failed relationship, we can read the possibility of 'returning literature' in this work that does not reduce the experience of returning to the national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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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수 삼고리고분군 출토 토기의 변천양상과 그 의미

저자 : 박성배 ( Park¸ Seong-b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2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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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고리고분군은 1995년 처음 조사된 이후 장수지역을 대표하는 가야유적으로 동촌리ㆍ삼봉리고분군과 더불어 큰 틀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삼고리고분군 묘제 및 출토유물에 대한 세세한 변천 과정과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 가운데 보고서가 간행된 유구를 중심으로 부장유물의 특징과 변천양상을 파악하였다. 고분 출토유물은 크게 재지계, 대가야계, 백제계, 신라계로 구분되어진다. 대가야계 토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여 유적의 상대편년과 특징 그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분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5세기 전후로 목곽묘 단계가 확인되며, 이후 석곽묘 단계로 발전되다가 6세기 중ㆍ후엽부터는 토광묘 단계로 변화한다.
목곽묘 단계는 비교적 이른 시기 발형기대와 유개식 장경호, 고배 등이 확인되어 장수지역 가야문화의 시작이 한 단계 앞서게 되었다. 수혈식 석곽묘 단계에서는 유입된 대가야토기를 재지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충실히 모방한 토기류를 생산한 것과 재지계+대가야계 양식이 결합한 토기의 생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가야지역의 중심지(고령)와 함께 주변지역에 위치한 가야세력(함양ㆍ산청ㆍ합천) 등과 교류 양상이 있었음을 파악하였다. 토광묘 단계에서 백제화된 묘제의 장축방향과 부장유물을 간소화하는 박장 양상이 파악된다.
이러한 변천과정은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다시 석실분으로 변화하는 일반적인 가야지역 고분 문화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세기 중ㆍ후엽에 석곽묘 이전 단계에 삼고리세력이 사용한 토광묘(목곽묘)다 다시 주 묘제로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수 삼고리고분군은 5세기~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조영되었고, 무덤과 출토유물 등의 변천 과정을 통해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Since the Jangsu Samgo-ri Tombs were first investigated in 1995, research has been carried out in a broad framework along with the Dongchon-ri and Sambong-ri Tombs as representative Gaya relics in the Jangsu region. As a result,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detailed transition process and characteristics of the burial body and excavated artifacts of the Samgo-ri Tombs.
Therefore, in this study, the characteristics and transition patterns of buried relics were investigated, focusing on the reported relics among the relics investigated so far. The relics excavated from the tombs are largely divided into the local-type, Daegaya-type, Baekje-type, and Silla-type. Daegaya-type earthenware was selected for analysis and the relative age and artifacts of the remains were identified. Looking at the transition process of tomb groups based on this, the stage of wood coffin tombs was confirmed around the 5th century, and then it developed into the stage of stone wall tombs. From the middle and late 6th century, it changes to the pit burial stage.
At wood coffin tomb stage, bowl-shaped pottery, the long-necked jar with lid-type, the mounted dish were confirmed at a relatively early stage, and the beginning of the Gaya culture in the Jangsu region is one step ahead. At the pit type stone wall tombs stage, pottery that faithfully imitates the inflowed Daegaya pottery based on the local production facility is produced, and pottery that combines the local + Daegaya form is also being produced. In particular, there was a pattern of exchange with the Gaya forces (Hamyang, Sancheong, and Hapcheon) located in the center of the Gaya region (Goryeong) and the surrounding areas.
In the pit burial stage, the long axis direction of the Baekje burial body part and pattern to simplify, shabby funeral the burial relics are identified. This transition process is different from the general culture of tombs in the Gaya region, which changes from wooden coffin tombs to stone wall tombs and back to stone-chamber tombs. In the middle and late 6th century,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peculiar phenomenon of returning to the earthen tombs used by local powers before the stone wall tombs.
Through this, the Jangsu Samgorio Tombs were constructed during the period from the 5th to the 6th centuries, and through the transition process of tombs and excavated relics, the unique cultural aspect of the region is expressed. In addition, it was found that exchanges with a wide range of surrounding areas continued for a long time through excavated re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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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구려의 건국과 현도군

저자 : 김성한 ( Kim Sung-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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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 武帝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沃沮城을 치소로 하여 玄菟郡을 설치하고, (제1현도군), 沃沮와 濊貊 지역을 그 영역으로 했다. 기원전 75년 직전 遼東의 烏桓이 반란을 일으키자, 前漢은 三輔 및 郡國의 불량소년과 죄지은 관리를 징발하여 遼東에 주둔하게 하고 遼東에 玄菟城을 쌓고 현도군을 옮겨와 (제2현도군) 烏桓의 침입에 대비했다.
제2현도군은 토착세력인 句驪가 위치한 지역에 자리했기 때문에 句驪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을 句驪縣이라 하고 郡의 治所로 삼았다. 토착세력인 句驪는 前 漢으로부터 처음에는 縣級인 '侯'로 대우받았다가, 桓帝 때 烏桓이 투항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桓帝의 뒤를 이은 元帝 建昭 2년(B.C. 37)에 郡級인 '王'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으로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句驪는 前漢으로부터 '高'를 姓으로 사여 받아 국호를 句驪에서 高句驪로 변경했을 것이며, 前漢은 高句驪王에게 그 신분에 걸맞게 鼓吹伎人과 朝服을 사여했던 것이다. 이때 玄菟郡의 句驪縣도 高句 驪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전한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漢書』 地理志에 高句驪로 기재되었던 것이다.
그 뒤 고구려는 新나라를 건국한 王莽이 자신을 징발하여 匈奴를 정벌하려 하자, 기원후 12년 무렵 이에 반항하여 제2현도군의 경계를 벗어나 자립했다. 新나라의 뒤를 이은 後漢은 자립한 高句驪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王'의 호칭을 인정하고 제2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幘溝漊라는 작은 城을 쌓아 高句驪로 하여금 歲時에 朝服과 衣幘을 가져가게 했던 것이다.


e year after destroying Gojoseon, in 107 BC, Emperor Wu of the Western Han Dynasty, established Hyeondo (Xuantu) Commandery (First Hyeondo Commandery) with Okjeo Fortress as its ruling place, and put Okjeo and Yemaek under its jurisdiction. Shortly before 75 BC, when the Wuhuan of Liaodong revolted, the Western Han drafted delinquent youths and criminal officials from the metropolitan and provincial areas into the army and stationed them in Liaodong. It also relocated Hyeondo Commandery to Liadong (Second Hyeondo Commandery), with the construction of Hyeondo Fortress there to prepare against the invasion of the Wuhuan.
As the Second Hyeondo Commandery was located in the area where the Guryeo, the indigenous tribe, resided, the area was named Guryeo County after this tribe and made the ruling place of the commandery. Guryeo was initially treated as a “hu,” which was equivalent to a county, by the Western Han, but as the Wuhuan surrendered during the reign of Emperor Huan, it was promoted to a “wang” (principality) that corresponded to a commandery in recognition of its contribution to the victory in 37 BC (second year of Jianzhao) during the reign of Emperor Yuan who succeeded Emperor Huan. This may be the reason why it is recorded in Samguk 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that Goguryeo was founded in 37 BC. Around this time, the Guryeo was given “Go as their surname from the Western Han and changed their country's name from Guryeo to Goguryeo, with musicians and performers granted by the emperor in celebration or its elevated status. At this time, the name of Guryeo County in Hyeondo Commandery was also changed to Goguryeo County, which appears in the “Treatise on Geography of the Book of Han that describes the situation of the late Western Han.
Then, when Wang Mang, the founder of the Xin Dynasty, tried to subjugate the Xiongnu by mobilizing the people of Goguryeo, it rose up against the policy around 12 AD and became independent outside the boundaries of the Second Hyeondo Commandery. The Later Han Dynasty that succeeded the Xin Dynasty, recognized the title of wang” to maintain relations with the independent Goguryeo, and built a small fortress called Chaekguro Fortress on the eastern border of the Second Hyeondo Commandery where it bestowed o&cial uniforms, clothes and headwears on the people of Goguryeo at special occa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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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저자 : 심정현 ( Sim Jeong H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9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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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King Gwanggaeto ordered King Jangsoo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Yakraehanye due to the “吾慮舊民轉當羸劣”. King Jangsoo did not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completely on due to the “慮其不知法則”. Both kings might well know that the royal tomb management system had been well established, that the old people might be weakened and that Yakraehanye did not welll know about the rules. Nevertheless, King Gwanggaeto attempted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by means of the order, while King Jangsoo re-used the old people, although he knew King Gwanggaeto's intention. In short, the two kings had different positions as far as the royal tomb managers were concerned. After all, King Jangsoo organized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the old people and Shinraehanye, not Yakraehanye, not following his preceding king's order completely.
King Jangsoo drafted the conquered local people called 'Shinraehanye' for the royal king tomb managers. Based on the regions where they were drafted, we may well know about the administrative units in the southern districts of Goguryo. Shinraehanye people were drafted based on the units of Baekje castles that had been occupied at the 6th year of Youngrak. Hence, it is deemed that Goguryo ruled the old Baekje territory south of Han River based on the castles.
Wolpyeongdong remain, Namseonggol fortress and Dogidong fortress located m Gyeonggi-do were located uniquely towards Baekje. After AD 475 when Hanseong was fell, it is argued that Goguryo would advance even to Daejeon or that it advanced to Cheongwon region to build and use Namseonggol fortress temporarily, or that King Anjang personally advanced to Daejeon. The researcherjudges that the defense facilities south of Gyeonggi district could not long be defended against Baekje or combined forces of Baekje and Shilla. All in all, as well seen in collapse of Hanseong castle, murder of King Moonju and death of King Samgeun only 3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it is estimated that Goguryo would occupy the area around Miho River. Later, during King Dongseong's reign, Goguryo's defense facilities would be withdrawn, and thus, the basin of Anseong River would be the border between Goguryo and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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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항의 『강감회요』 편찬과 사학사적 의의

저자 : 박인호 ( Park¸ In-h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2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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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은 명·청대에 『자치통감강목』의 체재를 본받아 여러 시대를 다루는 통사적 형태로 역사서를 만들면서 대중적 역사서의 서술 형태를 취한 책이다. 강항이 편찬한 『강감회요』는 『자치통감강목』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강지의『통감절요』와 유우익의 『서법』과 윤기신의 『발명』 등을 추가하여 종합한 우리나라에 희귀한 강감류 사서이다. 『강감회요』의 구성은 모두 17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의 대부분은 상, 하로 나누어져 있다.
『자치통감강목』은 『자치통감』의 정통 처리, 간지와 연기 표기, 시비와 득실, 관점자 서술, 도덕이나 덕치 서술 등에 오류가 많다고 생각한데서 편찬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강감회요』는 이러한 『자치통감강목』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강감회요』가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제시하였던 서술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교조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강감회요』는 형식면에서는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강감의 형태를 가지면서도 강목에 대한 서법과 발명 주석서를 합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사학사적으로 중국에서 강목에 대한 광범위한 회집에 들어가고 있는 시기에 발맞추어 16세기 조선에서 강항의 『강감회요』가 나온 것은 조선의 주자학적 역사학이 독자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Ganggam took the form of a narrative of a popular history book in Ming and Cheong dynasties by making a history book dealing with all the times based on the form of Jachitonggamgangmok. Ganggamhoeyo compiled by Kang Hang is a rare type of Ganggam in Korea, which adds the comprehensive compilation of Gang Ji's Tonggamjeoryo, and Yu Woo-ik's Seobeob, and the Yoon Ki-shin's Balmyong. The composition of the lecture is all 17 volumes.
The Jachitonggamgangmok started from the idea that there are many errors in explaining the indicating the age and the reign of the king, the dispute and the gain, the description of the viewpoint, and the description of morality and virtue described in Jachitonggamgangmok. The Ganggamhoeyo based on the contents of the Jachitonggamgangmok, had the same consciousness of the problem of the Jachitonggamgangmok. However, there was a distance to apply it to the dogmatically while accept what is said in the Jachitonggamgangmok's introductory notes.
In the form of the book, Ganggamhoeyo was compiled in the form of a chronologically describing.
This book was compiled by summarizing all the books that were compiled in annotation about the Jachitonggamgangmok. In the historical history, Ganggamhoeyo came out in Joseon in line with the time to collect and compile a wide range of books that comment on the Gangmok in China. This shows that the historiography based on Zhuzi studies in Joseon in the 16th century has secured its ow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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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글가사 「임계탄」을 통해 본 '신임계 대기근'

저자 : 김덕진 ( Kim Deok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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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1733년ㆍ신해ㆍ임자ㆍ계축ㆍ에 장흥에 대기근이 들었다. 이 실상을 장흥의 한 선비가 「임계탄」이란 가사로 읊었다. 원인은 가뭄, 홍수, 해일, 병충해였다. 이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사람이 죽고 마을이 텅 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환곡ㆍ군포 등의 세금 납부를 독촉하였고, 재결을 통해 드러났듯이 재해지역에 대한 재정지원도 게을리 하였다. 지방행정을 담당한 수령과 양반 및 향리들은 기아자 선발과 진휼곡 확보 등 진휼업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에 급급한데다 관리감독 기능마저 마비되어 총체적 문란이었다. 이 결과 절망적 상황과 인륜 부재 및 치안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사실을 장흥에 살고 있는 한 선비가 가사, 시, 그림으로 남겼다. 목적은 무능과 부정으로 점철된 실상을 고발하여 재발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天時泰運의 세상을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최종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창작품들의 최종 귀결처는 국정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었다.


A great famine happened in Jangheung in 1731~1733(Sinhae, Imja, and Gyechuk). The reality of the famine was depicted by a Confucian scholar of Jangheung in his Gasa work Imgyetan. The causes of the famine included drought, flood, tsunami, and damages by blight and harmful insects. As a consequence, food ran out, people died, and villages were emptied out. The government, however, pushed the villagers to pay taxes such as Hwangok and Gunpo and neglected financial supports for areas affected by the disaster, which was evidenced by Jaegyeol. Suryeongs, nobility, and Hyangris in charge of local administration were not good at relief works such as identifying victims of the famine and securing relief grain. Furthermore, they were busy with meeting their own selfish interests and desires and left the management and supervision functions paralyzed. It was a total disorder. The consequences included desperate situations, absence of humanity, and crisis of public order. These facts were captured in Gasa, poems and paintings of a Confucian scholar living in Jangheung. His goals were to prevent the recurrence of the reality by reporting how it was filled with incompetence and corruption and further see a world of Cheonsitaewoon by ensuring the application of his report to policies. The final destination of his creative works was the king, the supreme leader of government administration, even though it is not known if they actually reache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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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후기 밀양변씨 의관 연구 - 효량공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훈평 ( Park Hun Pye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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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변씨 효량공파는 조선후기의 의학 관료를 구성하는 대표적 가계였다. 조사된 가계 내의 의관은 총 88명이였다. 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도출해냈다.
첫째, 의관 가계로서 17세기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 이후19세기 후반까지 전성기로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효량공파 가계 내 의관은 변이근ㆍ변이형 형제가 처음이었다. 정조 순조 대에 활동한 의약동참의 변관해와 변지순은 숭록대부와 정헌대부가 되면서 의관 가계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하였다.
둘째, 사조 분석을 통해보면, 의관 가계로서의 세전 양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효량공파의 경우 사조 중에 역관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 효량공파는 조선후기 주요한 역관 가문의 하나로서 후손들이 의과에만 치중하지 않고 역과로도 출사하였다.
셋째, 대부분의 의학 관료는 삼의사에 속하였다. 최종 관력이 삼의사에 해당하는 이들은 총 86명으로 전체(88명)의 97.72%이다. 이는 가계 내 인물이 의학을 본업으로 할 경우 대부분 삼의사에서 근무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후기 의관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넷째, 내의원에서의 가계 위상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더 높아졌다. 효량공파 내의원 입사자는 19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변화된다. 주요한 입속방법이 19세기중후반 의약 동참의와 내침의에서 내의로 바뀐다. 내의원의 三廳이 모두 의술이 높은 이들이지만 삼청의 첫째는 내의라는 점에서 효량공파 출신들의 내의원 내위상이 더 높아졌다.
다섯째, 의학 관료는 19세기 전반 이후 의과 중심으로 배출되었다. 가계 내 양의사 입사자는 순조 때를 기점으로 하여 혜민서에서 전의감 중심으로 변화된다. 또한 내의는 의과 출신자여야 했으므로 전의감 중심으로의 관력자 변화와 내의중심으로의 내의원 입속과는 연관된다.


Hyolyang(孝亮)-gong(公)'s ancestry of Miryang Byun clan was a representative family line that made up medical bureaucra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 were 88 medical bureaucrats in the household surveyed. In this study, the following arguments were derived.
1) As a medical bureaucracy, it began to form in the mid-17th century, and maintained a certain status as a heyday from the midlate 18th century to the late 19th century. Byun li-geun(卞爾瑾)and Byun li-hyeong(卞爾珩)were the first medical bureaucrat in the Hyoryang-gong's ancestry. Uiyagdongcham-ui(讓藥同參醫)s Byun Gwan-hae(卞觀海)and Byun Ji-soon(卞之浮), who were active in the dynasty of King Jeongjo and Sunjo, became Sunglogdaebu(崇祿大夫) and Jeongheondaebu(正意大夫), solidfying their position as medical bureaucrats.
2) Through the analysis of four ancestors(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maternal grandfather), a medical bureaucracy does not appear well. This is because in the case of Hyolyang-gong's ancestry, there are many interpreters in four ancestors. As one of the major interpreter famili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ir descendants did not only focus on medicine, but also worked as a interpreter.
3) Most of the medical doctors belonged to three medical offices(Naeuiwon, Jeoneuigam, Hyeminseo). There are a total of 86 persons whose final government office under these offices, 97.72% of the total (88 persons). This means that most people in the household could work at a sam doctor if their main occupation was medicine. It reflects the reality that medical bureaucra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not simply based on skills.
4) The family status in Naeuiwon has risen since the mid-19th century. A person who enters Naeuiwon of Hyolyang-gong's ancestry changes as of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In the mid to late 19th century, the main method of entry changed from Uiyagdongcham-ui and Naechim-u《內緘醫)to Naeui.
5) Medical bureaucrats have been discharged mainly from medical state examination since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Starting from the reign of King Sunjo, the entrants to the two medical offices change from Hyeminseo to Jeonuig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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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제강점기 나주협동상회의 설립과 운영

저자 : 한규무 ( Hah Kyu-m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0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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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협동상회는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1929년 4월 설립하고 6월 개점한 협동조합ㆍ소비조합의 성격이 섞인 상점이었으며 고권(股券)을 발행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신간지회의 경제활동으로서 실제로 설립ㆍ운영된 흔치 않은 사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신간나주지회의 사업으로 출발했기에 일제의 탄압도 이어졌다. 상회장 김창용은 1930년, 이사장 양장주는 1931~1932년 일제에 검속되었고, 1930~1931년일제는 협동상회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협동상회는 적어도 1937년까지는 주민들의 큰 호응과 가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8년 폐쇄되었다.
협동상회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7년 창립된 신간나주지회에서 이 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했는데, 각지의 신간지회 활동 중 이 같은 사례는 흔치 않다. 둘째, 나주에 진출한 일본인 상업자본과 맞서 조선인들의 호응을 받으며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셋째, 협동상회 건물은 나주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신간회 관련 사적 6개 중 하나라고 한다. 따라서 근대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도 크며, 그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다.


Naju Cooperative Store was a store that mixed the characteristics of cooperatives and consumer associations established in April 1929 by the Naju Branch of the Singanhoe and opened in June, and was operated on a membership basis. This is interesting in that it is a rare case actually established and operated as an economic activity of the new branch.
Since it started as a project of the Naju Branch of the Singanhoe, Japanese oppression continued. Boss Kim Chang-yong was arrested by Japanese imperialism in 1930, Chairman Yang Jang-ju was arrested by Japanese imperialism in 1931 and 1932, and Japanese imperialism searched for the Cooperative Store between 1930 and 1931. Nevertheless, the cooperative council continued to develop at least until 1937 with great response and approval from the residents, but it was closed in 1938 due to the Japanese oppression that caused the Sino- Japanese War in 1937.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Cooperative Store is as follows. First, the Singanna Branch, founded in 1927, established and managed this council, and such cases are rare among the activities of Singanhoe in various places. Second, against Japanese commercial capital that entered Naju, it received favorable responses from Koreans and achieved considerable performance. Third, the building of the Cooperative Store is designated as a registered cultural property in Naju City, and it is said to be one of the six existing historic sites related to Singanhoe. Therefore, it is of great value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and it also means restoring it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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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국왕조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외교 변화

저자 : 정동준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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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에서 6세기 백제와 중국왕조의 외교를 다루면서, 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49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후경의 난과 제위쟁탈전으로 인하여 555년 이후에야 석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이 사신은 혼란하였던 양의 몰락한 상황을 파악하여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백제는 이후 양과 진에 사신 파견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60년대 이후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그 주기가 정치·군사적 기대와 반비례하였기 때문에, 주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가 567년에야 북조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것은 백제 내부의 사정으로 사신파견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550년대 이전까지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동위의 우호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550년대 이후에 백제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있었고 고구려와 북제의 불화라는 상황 때문에 사신 파견이 가능하였지만, 560년대에 신라가 먼저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550년대에는 북제가 최강국이었기에 가장 접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대내적 요인 때문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북조에 대한 외교에서는 성과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589년 백제는 수의 통일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황제에게 무도를 하였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무도는 군주에게 종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585년부터 의례에 도입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여전한 충성의 표시인 동시에 백제가 수의 '관념적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백제가 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빠른 대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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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초기 나주선의 톤수 추정과 검증

저자 : 김성준 ( Kim Sung-june ) , 김경옥 ( Kim Kyeong-o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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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나주선은 이제까지 발굴된 한선 가운데 최대선으로 추정된다. 선행연구에서는 나주선을 전장 32-42m에 이르는 초대형선이나 고려시대 초마선으로 추정했다. 문헌상 고려의 배는 누선, 초마선, 과선, 일본원정선 등 4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선은 여진족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동북방면에서 활용되었던 군선이고, 일본 원정선은 일본을 공략하는 데 이용된 배다. 발굴된 지역을 고려하면 나주선이 과선이나 일본 원정선일 개연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나주선을 고려의 조운에 이용된 초마선으로 가정할 경우 왕건의 누선일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 발굴선과 기타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추출함으로써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만곡종통부와 저판재를 바탕으로 나주선의 크기를 추정해보고자 했다. 2에서는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선박의 사례를 살펴보고, 3에서는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저판재와 만곡부재를 통해 저판장을 가정한 뒤,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적용해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추산해 나주선의 톤수를 계산해보고, 이를 검증해 보았다.
연구 결과 나주선은 총톤수 230총톤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저판장은 22m, 저판폭(저판재 9장)은 6.81m, 상갑판장 31.46m, 상갑판 폭 12.34m, 깊이 4.97m(만곡부재 포함 외판재 7열)가 된다. 이 연구는 잔존한 소량의 부재를 활용한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주선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시 활용한 누선일 가능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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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저자 : 김봉곤 ( Kim Bongg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1-9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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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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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기말~20세기초 전라도 강진 병영지역의 환(煥) 사용 실태와 메커니즘 - 박약국(朴藥局) 장부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덕진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2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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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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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저자 : 정호기 ( Jung Ho-g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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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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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웹사이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의 스토리텔링 연구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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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이하 '진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성된 하시마 섬의 역사 스토리의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실'은 옛 하시마 도민들의 구술을 주되게 활용한 여러영상물들의 배치를 통해 지옥섬 하시마의 '이미지'를 벗겨내면서 일체감의 코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려운 시절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노동했던 1940년대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 속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는 일본인도 함께 겪은 전쟁의 공동 피해로 변형되며, 침략전쟁의 피해자로서 조선인 노동자는 하시마 탄광업을 '지탱했던[supported]' 필수요소 중 하나로 전환되었다. 궁극적으로 '진실'의 스토리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지켜온 긍정적 역사라는 이미지 창출로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통해 구축 중인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지들 중 강제동원 피해 시설들의 전체역사 해설에 원형의 콘텐츠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또한 최근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오픈과 함께 사실상 일본의 전체역사 해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하시마에 관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1940년대 하시마의 일상과 노동 실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실증 작업과 함께 그간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구술자가 겪은 전쟁과 동원, 군수산업과 노동, 징용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방법의 개발이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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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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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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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저자 : 김효진 ( Kim Hyo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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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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