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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고전학회> 한문고전연구> 고려말-조선초 경부(經部) 중국서적의 수입과 간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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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조선초 경부(經部) 중국서적의 수입과 간행에 대하여

A Research on Importation and Publication of Chinese Books in the Early Chosŏn Period: Focused on the Category of Confucian Classics

노요한 ( Noh Johann )
  • : 한국한문고전학회
  • : 한문고전연구 40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6월
  • : 195-242(48pages)
한문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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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四書五經大全』의 수입과 간행
Ⅲ. 춘추류 서적의 수입과 간행
Ⅳ. 기타 경부 서적의 수입과 간행
Ⅴ.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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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經部를 중심으로 고려말-조선초에 수입된 중국본과 조선에서의 覆刻ㆍ活印의 사실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세종은 한문고전의 硏鑽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국문물제도의 정비를 통해 문화국가 건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經史子集의 학문 모든 방면에 걸친 고전의 硏鑽을 통해 그 학술문화의 성과를 섭취하였으며, 그 연찬의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국가로서 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가의 문물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곧, 세종은 즉위 후 여러 루트로 고전주해서의 善本을 구하여 이를 활자로 간행하거나 복각하였으며, 서적을 단순히 摹印하거나 복각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연찬을 바탕으로 조선독자의 纂註本들을 새로 편찬ㆍ인쇄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초 유학의 연찬에 사용된 한문고전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 조선에서 다시 편찬ㆍ간행된 고전 주해서의 저본을 이루는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려 때는 서적의 수입이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조선전기에는 명나라 禮部에 咨文을 보내어 欽賜받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초 『사서오경대전』, 『대학연의』, 『자치통감』, 『통감강목』 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입된 서적들이었다. 그와 함께 조선 초에는 고려조에 전래하여 있던 주요 서적의 覆刻도 함께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四書五經大全』, (元)董眞卿 編 『周易會通』, (元)吳澄 撰 『易纂言』, (元)董鼎 撰 『書集傳輯錄纂註』, 鄒季友 音釋 『書集傳』과 『詩集傳』, 集賢殿 受命編 『春秋經傳集解』, 胡安國 傳 『春秋胡氏傳』, (宋)林堯叟 註 『春秋經左氏傳句解』, 李廉 輯 『春秋諸 傳會通』 등을 대상으로 이들 서적의 수입 및 간행 사실에 대해 개괄하였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importation and the publication of Chinese Books in the late Koryŏ and early Chosŏn period focusing on the category of Confucian classics. King Sejong endeavored to realize his ideal of establishing a country of Confucian culture by studying Confucian classics renovating the national cultural system based on that. He struggled to adopt the academic and cultural achievement of Ming China through Chinese classics of the four categories of Jingshi ziji (經史子集, jing-classics, shi-histories, zi-masters and ji-collections) to secure the legitimacy and to organize the cultural system, of newly established country. He sought to obtain the fine copies of Chinese books through several routes not only to publish or reprint them, but to compile and print the wholly new editions with annotations based on study with scholars at Chiphyŏnjŏn Hall.
Then, what were the books that the king and the scholars scrutinized the principle of Confucianism with in the royal lecture at that time? What were the original texts that were used when they edited wholly new editions based on them. Chosŏn court had to send an official letter (咨文) to the ministry Rites (禮部) of Ming China to obtain books which were granted as imperial gifts. It was the only way to obtain books from Ming China though it was relatively easy to import books from Yuan China under relatively few regulations. Sishu Wujing Daquan (四書五經大全), Daxue Yanyi (大學衍義), Zizhi Tongjian (資治通鑑), Tongjian Gangmu (通鑑綱目) that were imported via that route in the early Chosŏn period are the good examples. Along with this, books passed down from Koryŏ dynasty were also republished in the early Chosŏn period. This article examined the importation and publication of Chinese books in the early Chosŏn period including Sishu Wujing Daquan (四書五經大全), Zhouyi Huitong (周易會通), Yizuanyan (易纂言), Shujizhan Jiluzuanzhu (書集傳輯錄纂註), Yinshi Shujizhuan (音釋書集傳), Yinshi Shijizhuan (音釋詩集傳), Chunqiu Jingzhuan Jijie (春秋經傳集解), Chunqiu Hushizhuan (春 秋胡氏傳), Chunqiu Zuoshizhuan Jujie (春秋經左氏傳句解), Chunqiu Zhuzhuan Huitong (春 秋諸傳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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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1-800-001101117

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975-521x
  • : 2765-394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8-2021
  • :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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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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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후기(朝鮮後期) 우이동(牛耳洞)과 우이동(牛耳洞) 승경(勝景) - 홍경모(洪敬謨)를 중심으로 -

저자 : 이군선 ( Lee Goon-se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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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은 서울을 북쪽에 있는 유원지로 유명한 곳이다. 불과 백여 년 전만해도 벚꽃놀이로 유명했던 우이동은 이제 그 원형을 알아보기 쉽지 않을 만큼 변화하여 옛날의 모습은 선인들의 기록으로만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이동에 대하여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은 관암 홍경모이다. 지금까지 우이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이계구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홍경모가 남긴 우이동 관련 기록과 「겸산루팔영」을 통해 우이동의 승경에 대하여 고찰하여 홍경모의 눈에 비친 옛 우이동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다. 『兼山樓八詠』은 「水落朝旭」, 「天冠新月」, 「三角奇峰」, 「牛耳長川」, 「松徑聽濤」, 「花漵觀魚」, 「前山桃花」, 「後園栗林」이다. 이는 겸산루에서 바라본 승경과 겸산루에서 즐길 수 있는 경관을 읊은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조상이 남겨 준 유산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여 가꾸고 이를 기록으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홍경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작은 것에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에서 선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Wuyi-dong is well known for an amusement park located in the north of Seoul. Wuyidong, which was famous for cherry blossom viewing only about a hundred years ago, has changed so much that it is not easy to recognize its original scene, and the old state can only be known from the records of the ancestors. The person who left the most records about Wuyi-dong is Gwan-am Hong Gyeong-mo. Until now, research on Wuyidong has been mainly focused on Egye' 9vales. In this paper, we reviewed the Wuyidong related records left by Hong Gyeong-mo and the superb scenery of Wuyi-dong to show the image of the old Wuyi-dong reflected in Hong Gyeong-mo's eyes. Through this, it is confirmed that the appearance of Hong Gyeong-mo who cared for the legacy left by the ancestors with all his heart and wanted to organize these one by one as a record and inherit it, and that there was the perception about the home of life of the ancestors in the way that even small things are given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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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북동 일대 명승 사적을 노래한 한문학 유산

저자 : 신영주 ( Shin Young-ju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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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성북동을 소개한 옛 문헌을 찾아 분석하고 소개한 것이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춘 나들이 공간이다. 특히 봄철에는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도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 만큼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았기에 적지 않은 한문학 창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기대만큼 많은 시문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이곳이 창작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곧장 창작 소재로 활용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북동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에 한문학 유산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성북동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과거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에 부족하나마 성북동 공간을 시문으로 구현한 한문학 유산을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먼저 여러 문헌 자료를 분석하여 성북동 일대에 존재하는 명승 사적을 조사하여 인문 지리적 성격을 알아보았고, 이어서 관련 한문학 작품 몇 편을 찾아서 소개하였다. 먼저 蔡濟恭이 1784년 봄에 기록한 「遊北渚洞記」와 나들이에 동행한 睦萬中이 기록한 「與樊巖公會游北屯」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성북동이 봄철에 꽃을 즐기는 나들이 공간으로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鄭士龍이 1552년에 창작한 시와 尹愭가 1793년에 창작한 시 「上巳遊北渚洞」을 통해 성북동이 修禊의 장소로 활용된 사실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金鑢가 1815년경에 창작한 「晩春游覽 絶句十二首」를 통해 성북동 주변의 여러 명소가 나들이 코스로 묶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를 토대로 관련 있는 소중한 역사 흔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그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사연들이 복원되어 이 지역의 역사성이 더욱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개발되어 현대의 시민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추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found, analyzed, and introduced old literature that introduced Seongbuk-dong(城北洞). Seongbuk-dong, close to the capital city, is an outing space with a quiet and beautiful natural scenery. Especially in spring, peach blossoms were in full bloom, making people's hearts excited. In addition, it is highly likely that many poets visited and created many literary works. However, there were not as many poems left as expected. Although this place became a space for creation, It was not immediately used as a creative material. Because of this, it seems that the old literary heritage was not actively utilized in the development of cultural contents in the Seongbuk-dong region. Although there is not enough literature on Seongbuk-dong, The need to find and introduce relevant records from past literature is raised. So, even if it is not enough, I attempted to discover and introduce the literary heritage that embodied the Seongbuk-dong space as poetry. First, by examining the historical sites of scenic spots in the Seongbuk-dong area through various literature data, the humanities and geographic characteristics of this area were investigated. Subsequently, several related literary works were introduced. First of all, I introduced the 「遊北渚洞記」 created by 蔡濟恭 in the spring of 1784 and the 「與樊巖公會游北屯」 created by 睦萬中 at the same time. Through this, found out that Seongbuk-dong was very popular as an outing space to enjoy flowers in spring. Next, introduced a poem created by 鄭士龍 in 1552 and 「上巳遊北渚洞」 by 尹愭 in 1793. Through this, found out that Seongbuk-dong was used as a place to 修禊. In addition, introduced the 「晩春游覽 絶句十二首」, created around 1815 by 金鑢. Through this, we found out that the spaces in Seongbuk-dong and surrounding areas were grouped together and loved by people who traveled. Although it is still lacking, I hope that based on this, valuable historical traces related to it will continue to be discovered, and meaningful stories in it will be restored, so that the historicity of the region can be further strengthened. In addition, it is expected that various local contents will be developed so that it can be remembered as a valuable space for modern citiz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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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명덕동(明德洞)

저자 : 백승호 ( Baek Seung-ho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8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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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울 동북 4구 한문학 내러티브 유산 발굴과 확산이라는 기획 아래 樊巖 蔡濟恭과 明德洞을 다루었다. 선행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 논문에서는 선행 연구의 정보를 일부 보완하였고, 방법론적으로 문학 텍스트 연구의 공간 감각을 제고하는 방법으로서 근대 지도 분석 사례를 적용하였다. 내용적 측면에서 明德洞 관련 記文 중심 선행 연구를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明德洞의 당대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한시 자료를 새롭게 소개하였다. 또한 선행 연구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1780년대 蔡濟恭이 明德洞에 은거했다는 대략적인 구도에 대해 그 시기를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특정하였다. 明德洞은 초창기에는 은거 예정지이자 宦路 속 別世界의 휴식처였다. 1780년대 후반기에는 정치적 고난을 피하기 위한 隱居의 장소였다. 이 시기 한시 가운데 당시 도성 밖 외진 산골 속에서 삶을 이루고 사는 백성의 삶과 고통에 공감한 작품의 성취를 주목할 만하다.


This thesis was designed with the discovery and diffusion of Seoul Nothern East 4 wards narrative heritage. BeonAm Chae Jaegong's Myongdeogdong was dealt as an example. Based on the outstanding results of previous studies, this thesis partially supplemented information from previous studies. Methodologically, the case of modern map analysis was applied as a method to enhance the spatial sense of literary text research. In terms of content, in order to complement the previous studies centered on Gi(記) related to Myeongdeogdong, some new Sino-Korean poems that vividly conveys the scenery of Myeongdeogdong was introduced. In addition, the period was subdivided and specified in detail about the rough composition of the 1780s, which was generally used in previous studies. In the early days, Myeongdeogdong was a planned retirement site and a resting place for utopia in the life of a high public servant. In the late 1780s, it was a place of retreat to avoid political hardship. Among the poems of this period, it is worth noting the achievement of a work that sympathized with the lives and pains of the people who lived in remote mountains outside the 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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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폐주(廢主)와 함께 남겨진 사람들 -연산조(燕山朝) 절신(節臣) 기억의 형성과 전개-

저자 : 정용건 ( Chung Yong-g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32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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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문인 사회에서 '燕山朝 節臣'으로 호명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史的 형상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은 유가 이념을 표방하며 건국된 나라로서 자신이 한 번 섬긴 임금에 대한 마음을 변치 않아야 한다는 의리관을 공고히 견지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暴君'이라 일컬어진 연산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인들은 연산군에 대해 절의를 지킨 인물을 찾고자 노력하고 반대로 이를 저버린 인사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 등 '연산조 절신'에 대한 적지 않은 관심과 요구를 보였다.
洪彦忠, 兪起昌, 南褒는 바로 그와 같은 주목과 기대 속에서 '탄생'한 연산군의 절의지사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저마다 다른 성장 배경과 이력을 가졌지만, 중종반정 이후에도 끝까지 옛 임금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은거의 길을 택한 인사들로 기억되었다. 다만 이들이 점유한 '절신'으로서의 지위는 어느 일순간에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후손 및 후배 문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현양 작업에 힘입어 존재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절의 관련 敍事의 정비ㆍ윤색ㆍ조탁 등 치열한 인물 재구성 노력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오해와 와전이 절신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이 있었기에, 연산군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지 않고 자신을 위해 남아 충절을 다한 '節臣'들과 함께 기억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산조 절신에 대한 기억과 그 형상화 양상은 시대를 거듭하며 점차적으로 고조ㆍ확장되어 간 유가적 의리관과 절의에 대한 관심을 배경으로, 부연ㆍ수식ㆍ재조명의 과정을 더해가며 이상적인 '연산조 절신의 像'을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조선 후기 문인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그간 '暴君', '亂政', '士禍', '反正' 등 제한적인 범주에서만 논의되는 경향이 강하였던 '연산군 내러티브'의 발굴과 확산에 있어서도 긴요한 참조점이 된다.


This thesis researched the aspects of the figures who were called “Yeonsangun(燕山 朝)'s loyalist” in the Joseon literary society and their historical shaping process. The Joseon Dynasty, as a country founded by Confucian ideology, particularly emphasized a sense of loyalty that one should not change his mind toward the king he once served. This notion was similarly applied to Yeonsangun who called 'tyrant'. Therefore, the writers of Joseon showed considerable interest for Yeonsangun's loyalist, such as trying to find a person who kept his devotion to Yeonsangun or criticizing the person who went back on him.
Hong Eon-chung(洪彦忠), Yu Gi-chang(兪起昌), and Nam po(南褒) were Yeonsangun's loyalist who were “born” with this background and expectation. Although each of them had different backgrounds and careers, they were remembered as those who chose the path of retirement keeping their loyalty to the former king after Jungjong-banjeong(中宗反正) However, the status as loyalist was not suddenly given at any one moment, but could exist thanks to the long-standing commemorative work of various descendants and junior writers. This entailed the process of fierce restructuring efforts, such as reorganization, embellishment and carving, and sometimes misunderstanding and misrepresentation had a decisive effect on the formation of the loyalist image. But because of this process, Yeonsangun could be remembered along with loyalists who did not go forward to a new era and remained for him.
This memory of Yeonsangun's loyalist and its formation aspect shows the effort of Joseon writers who tried to establish the ideal image of loyalty. In addition, this will be an important reference point for the discovery and spread of the Yeonsangun Narrative, which has been discussed only in limited categories such as 'tyrant', 'tyranny', and 'massacre of scholars(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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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산문(散文) 연구(硏究)

저자 : 황아영 ( Hwang Ah-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5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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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潭 金時讓(1581~1643)은 조선 중기 청백리로 이름난 문신이다. 宣祖 14년 (1581)에 태어나 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부모님을 여의고, 선조 38년(1605년)에 문과에 등제하면서 光海君과 仁祖를 모셨다. 하담은 임진왜란과 丁卯胡亂, 丙子胡亂과 같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시, 필기와 함께 많은 산문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산문 작품들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미진한 상태이다. 하담의 문학관을 알기 위해서는 시와 필기뿐 아니라 산문 작품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하담 김시양의 산문에 나타난 주제의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전까지 옳다고 여겼던 성리학이 무너지고 소중화라 자부하였던 가치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목도하였다. 일반적인 서민, 하층민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 것이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대부였다면 성리학과 소중화라는 사상만을 중시하였을 텐데, 김시양은 사대부이지만 유배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할 수 있었고, 이후 인조대에 관직에 돌아와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서 유연한 사고와 대처를 강조하였다.
또한 김시양은 임금과 신하로서의 태도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였는데, 특히 임금에게는 강한 임금을 요구하였고, 신하에게는 책임감을 강조하였다.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威儀를 가지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소인들을 두렵도록 다스려야 하며, 신하는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자신이 맡은 일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함을 여러 번 언급하였다. 그리고 하담은 자신이 맡은 직책과 임무에 관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 대한 높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하기에 하담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었고, 진퇴에 관하여도 소신껏 임금에게 아뢸 수 있었다. 이는 하담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 점과도 관련이 있다. 공적인 일에 관한 글은 물론이고, 친구와 주고받은 글에서도 공과 사를 구분하여 글을 적고 있음이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이 하담의 산문 작품은 시와 필기와는 또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하담의 산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하담 김시양은 조선 전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기의 여러 가지 대내외적 영향을 받아 시, 산문, 필기 문학에서 다양한 글쓰기를 선보인 인물이므로 다각적 접근의 과정을 거친 뒤에 김시양 문학에 나타난 통일된 가치관과 의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17세기 그리고 조선 중기 문학사에서 김시양의 문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의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조선 중기 사회와 문학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지길 기대해 본다.


Hadam Kim Si-Yang(1581-1643) is a famous incorrupt government officer in the mid of Chosun period. He entered the government office in 38th year of king Seonjo(1605), then served for King Gwanghaegun and King Injo. Hadam had wrote many prose works along with poems and essays during the difficult invasion times of the country such as Imjin-waeran, Jeongmyo-horan and Byeongja-horan. In order to understand his literary views and values, it is important to study his proses as well as poetry and essays. However, his proses have yet to be done much research.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investigate the thematic consciousness shown in the prose literature of Hadam Kim Si-yang.
Through Imjin-waeran and Byeongja-horan, Hadam witnessed that the Neo-Confucianism, which had previously been considered right, was collapsed, and its sub-sinocentrisme did not help him at all. If Hadam were a commoner or low-class man, he would not have high expectations for the Neo-Confucianism. On the other hand, if he was a high-class of official, he would have only valued the thought of the Neo-Confucianism and sub-sinocentrisme. However, Kim Si-yang was a senior officer, but he remained in exile, so Hadam was able to objectively assess the situation and reality of state of affairs. Hadam later returned to government posts during the King Injo era and took on various important duties with emphasizing flexible thinking and management.
In addition, Hadam frequently mentioned an attitude between a king and an officer. He requested powerful royal authority from the king, and emphasized responsibility from an officer. He mentioned that a king should have his status as the king and rule over men fearfully who disturb the country. Then, he repeatedly mentioned that an officer should carefully offer his opinion to the king and take strong sense of responsibility for his duties.
Hadam also expressed his high confidence and pride in doing his best in his position and duties on his proses. In reality, he stated his opinions confidently and proudly and he offered his opinions to the king with his faith at retirement. The aforementioned is related to Hadam's thorough distinction between public and private affairs. He wrote separately between public and private matters not only in writing about public affairs, but also in writings with his friends.
In summary, the prose works of Hadam have a different theme than his poetry and essays. As Hadam inherited the traditions of the early Chosun period, he also showed various writings in poetry, prose, and essays under various internal and external influences of the mid Chosun period. Therefore, this paper enables to investigate the unified values and thoughts shown in Hadam Kim Si-yang's literature with a process of multi-lateral approach. And, this paper reveals the status and significance of Hadam Kim Si-yang's literature in the 17th century and the mid Chosun of literature history. Through this Hadam study, we believe to enrich our understanding of society and literature in the mid Chosu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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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허목이 찬술한 조식 선생 '신도비'논란에 대한 고찰

저자 : 조주희 ( Cho Joo-hee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7-18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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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도입과 함께 전래된 유학은 혈연공동체의 생활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보편화하여 도덕·윤리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를 제공하였다.
문화란 자연 상태에 있는 정신적·물질적 실체를 인간이 가공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문화생산의 촉매제로는 문자에 의해 정리된 학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한 사회에 특정 학문이 정착되면 그 학문이 통치의 이념을 제공하여 사회변동이 일어나고 사회변동은 문화 변화를 일으킨다는 학문과 사회와 문화 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이 패러다임의 틀에서 미수 허목이 찬술한 '남명 조식의 신도비'인 『덕산비』에 대한 논란을 사회·문화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 고려 말에 도입되어 왕조교체의 명분을 제공하여 사회 변동을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혈연공동체의 생활 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제시하여 불교와 도교를 멀리하는 문화변동을 일으켰다. 실학은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공리공담에 치우친 성리학을 개혁하여 實事求是의 논증을 중시함으로써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를 태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허목이 찬술한 『덕산비』가 신도비의 원래 취지인 揚善隱惡 보다는 자신의 의도인 陽尊陰擠를 각인하여 놓았다는 논란을 정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후손의 효심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문화변동을 가져왔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얻은 망자에게 주어지는 은전으로, 망자가 학문 연구를 통해 고고한 인품과 깊은 학문을 지녔었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과 가문 그리고 망자가 속한 학파에게 긍지를 안겨주는 영광스러운 특전이었다. 이러한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남명 조식 (1501~1572)의 신도비문 찬술 역시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에게 청문하였다. 1617년에 세워진 정인홍의 『남명선생신도비』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훼철되고, 그 이후에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에게 청문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이후 서양학문의 전래와 함께 1685년에 세워진 허목의 『덕산비』가 남명에 대하여 양선 은악 보다는 양존음제의 경향이 짙다고 하여 조씨 문중과 노론이 한편이 되어 1926년에 훼철하였다. 그 후에 진주향교의 남인계 유림이 소송을 제기하여 5년간에 걸친 소송 끝에 조식 후손이 승소함으로써 250년 동안 계속된 허목의 『덕산비』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게되었다.
이 논문은 조식의 신도비 청문 과정과 立碑 과정에서 후손의 孝보다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학문의 정착, 사회의 변동, 문화의 변화라는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탐구하였다.


In this study, the dispute stemming from the cenotaph erected in memory of Nammyeong (Cho Sik's nickname), and its subsequent destruction leading to a lawsuit between the Namin (southern people) faction and the descendents of Cho Sik was examined through a sociological lens. The writing on the cenotaph was also a cause for dispute between Namin and the descendents of Cho Sik, as well as between Namin and Noron (another faction).
Cho Sik was active in the 16th century during the early development of neo-Confucianism. Neo-Confucianism in Joseon was centered around familial blood ties which determined norms for the whole community and the ruling ideology for the nation state. These neo-Confucian norms pervaded in all facets of society, including kinship communities, wider society, and culture. These norms also permeated in mental or intellectual outputs such as artworks and symbolic systems such as linguistic rules. All these in the Joseon era were included under the umbrella of the concept of culture, with culture being defined as the mental and physical aspects of nature as it is created by humans, and that which is transformed or created as new.
The academic discipline called Confucianism also contained the term culture as the concept of a human mental output leading to new creations. Neo-Confucianism was a philosophy that added metaphysical reasoning to early Confucianism, and was introduced in late 13 century Goryeo by Ahn Hyang, thus playing a critical role in the creation of a new culture in the dynastic transition period.
Neo-Confucianism rejected the doctrines of Buddhism and Taoism as empty, characterizing them as a destructive force of familial and societal ethics and discipline, as Buddhism tended toward eschewing the secular world and Taoism favored seclusion. Buddhist and Taoist doctrines were effectively rendered a taboo paving the way for neo-Confucianism to take root in the culture, and as a result, causing a great societal change.
From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until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Realist School (Shilhak) of Korean Confucian academic tradition was established, and its practitioners reflected upon the exclusionary and intolerant nature of neo-Confucianism. They also stressed the importance of pragmatism and carefully analyzed and debated each and every proposition they faced. Accordingly, the 喪葬祭禮, or Confucian rituals, was elevated to the status of an academic discipline.
However, the rituals outlined in the Sangjangjerye became the source of intense struggle among the political factions behind closed doors, thus leading to social change which in turn caused cultural change.
The establishment of the Shindobi, which was used as a means of strengthening the class system, became the subject of profound studies, and the focus of a power struggle between factions, including Yesong surrounding funeral rites of a queen's mother, served as the catalyst for great social change. When viewed through this lens, the sociological meaning of Heo Mok's cenotaph erected for Cho Sik entitled “Deoksanbi” is revea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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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만시(挽詩)와 교류시(交流詩)에 드러난 의식(意識)의 일고찰(一考察)

저자 : 노윤숙 ( Rho Yun-so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3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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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湖 李瀷(1681~1763)은 조선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를 살면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친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재야 학자로서 많은 글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에는 선비로서의 의식, 시대에 대한 고민과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익은 평생 동안 학자로서 다양한 호기심과 학문적 열정을 바탕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시문과 논저를 모아 발행한 『星湖全集』은 이익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중 挽詩와 交流詩를 중심으로 그의 시적 면모를 살펴보았다. 『星湖全集』에 수록되어 있는 이익의 만시는 전체 시의 약 20%가 넘을 정도로 양이 많다. 만시는 죽음에 대한 시로 죽음 앞에서 고인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게 되는데 남다르게 많은 양의 만시를 지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주목된다. 이익은 만시에서 그가 교류하는 인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고인의 삶을 보여주었고 특히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의 삶을 발견해주었다. 그는 철학자로서 죽음을 단지 슬픔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뜻을 펴지 못했던 인물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만시를 통해 진정한 선비(眞儒)의 삶을 밝혀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많은 만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은 이익 스스로 학자로서 선비 의식을 실천하는 다짐의 과정이었다. 이익의 만시에 드러나는 고인의 학자적 경향과 더불어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儒仙의 면모를 지향하는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유자이면서도 신선과 같은 맑고 깨끗한 인품을 가진 이들의 삶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이익의 인생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익의 교류시에서는 대상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폭넓고 다양한 인간 관계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인간상, 그의 삶의 방향을 살펴보고 시를 통해 나타나는 의식과 시적 감성을 고찰해 볼 수 있었다. 임지로 떠나는 이들에게 주는 시에는 이별의 마음과 더불어 관리로서의 역할을 당부하며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인식, 이에 대한 개선을 당부하는 선비 의식과 백성을 걱정하는 애민 정신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를 살아가는 재야 학자로서의 고민과 포부, 노력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교류시 중 인간 이익의 모습이 드러나는 그리움의 감성이 담긴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감성은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풍취를 드러내며 인간 이익의 시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회화적인 흥취로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면서도 절제된 시적 감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익의 만시와 교류시를 중심으로 시세계의 특징과 다양한 면모들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17세기 후반 재야 학자로 삶을 살아간 이익의 감성과 시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This study aimed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displayed in the condolatory poems and exchanged poems of Seongho Yi Ik (1681-1763). A central figure of the Namin Silhak (Korean pragmatic philosophy) school, Seongho Yi Ik lived the 18th century, the prime time of the late Chosun Dynasty culture, while inheriting the tradition but also reading the signs of changes and dedicating his whole life to academic exploration for opening a new age. He left behind many texts as an out-of-office scholar, and his works reflect the consciousness as a classical scholar and the concerns and thought on the era.
Yi Ik has worked as a lifelong scholar based on his diverse curiosities and academic passion, and The Complete Works of Seongho (Seonghojeonjip) published with a collection of his poetry, prose, and written books could be called a definitive compilation of the Yi Ik thought. Among those, his poetic aspects were examined with a focus on condolatory poems and exchanged poems. In The Complete Works of Seongho, numerous Chinese poems, encompassing 631 titles and 1178 pieces, remain, and these confirm that he expressed his emotions and shared his mind with others through such poems. A great deal of existing studies primarily discussed the thought and philosophy of Yi Ik, but this study looked into another aspect differing from the existing image of Yi Ik by resorting to the expression of emotions through poems. His broad and varied personal relationships can be found in the condolatory poems and poems of relational exchanges that particularly occupy a large number among his poems; this was used to examine the human character he pursued and his life direction and to consider the consciousness and poetic sensitivity shown across the poems.
The condolatory poems of Yi Ik included in The Complete Works of Seongho are copious enough to exceed 20% of the entire poetry. As poems about death, condolatory poems portray the lifetime of the deceased before death in a compressive manner, and the fact that he composed an unusually high number of condolatory poems holds a notable significance. In these poems, Yi Ik exhibited the life of the deceased through concrete and various expressions about the individual he was exchanging with and especially discovered the lives of unknown individuals. As a philosopher, he possessed a perspective that did not merely view death as sadness and lamented over how individuals, who could not achieve their will despite having remarkable talent, failed to stand out in the world. Yi Ik could write so many condolatory poems because he sought to reveal the life of a true classical scholar through them, and this was the process of his determination to practice scholarly spirit as a learned man himself. Along with conveying the academic tendencies of the deceased, the condolatory poems of Yi Ik offered a glimpse into the conscious realm of seeking aspects of a Taoist-like Confucianist scholar who is pursuing the world of a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By presenting the lives of those who are Confucianists, and concurrently, have a clear and pure character like a mystic Taoist hermit, the poems demonstrate the life of Yi Ik and a single phase of the life he desired to follow.
Meanwhile, in the exchanged poems of Yi Ik, a wide variety of personal relationships can be identified through the relations with subject individuals, which allowed an examination of the human character he pursued and the directions of his life, as well as a contemplation of the consciousness and poetic sensitivity indicated by the poems. The poems given to those who are leaving to their posts reveal a heart of parting, in addition to his awareness of grasping the reality with a request to fulfill the role as a government official, the scholarly spirit of pleading improvement of life, and the affection for the people that keeps him worried over them. These illustrate the concerns, aspirations, and efforts of an out-of-office scholar living through the late Chosun Dynasty. Next, works embodying a sentiment of yearning with a portrayal of the human side of Yi Ik were centrally examined. The sensitivity displayed in his poems manifests a candid yet quaint elegance and further accentuates the poetic aspect of human Yi Ik. His poetry has the characteristic of expressing like painting with a picturesque pleasure, all the while rendering a restrained poetic sensitivity.
This study attempted to unveil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etry world and various aspects around the condolatory poems and exchanged poems of Yi Ik, and through this, it could examine the sensitivity and poetic dimensions of Yi Ik who lived life as an out-of-office scholar in the late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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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담녕(澹寧) 홍의호(洪義浩)의 「자각이십영(紫閣二十詠)」 연구(硏究)

저자 : 방현아 ( Bang Hyun-a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6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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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澹寧 洪義浩(1758∼1826)의 「紫閣二十詠」과 紫閣洞을 고찰한 글이다. 南人 文人인 洪義浩에 대해서는 연행록을 중심으로 한 논저들이 있지만 그가 남긴 巨帙의 작품에 비해 아직까지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그가 외직에서 관직생활 하던 때를 제외하고 한양의 남산자락 紫閣洞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澹寧은 1815년(58세) 2월경 南山의 鑄洞으로 거처를 옮겨 閑居하였는데 그곳은 紫閣洞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1817년 여름 紫閣洞에 소유한 含翠堂, 頗好道齋, 居然我屋, 秋夢軒과 주변의 枕雨樓, 約山亭, 後彫堂 그리고 각종 나무와 화훼의 승경까지 20題를 선정하여 그 景觀을 노래하였다. 국토와 자연에 대한 애착과 고향 丹邱와 같은 洞府의 동경은 實景을 통한 仙境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또한, 허목의 篆書 含翠堂(보물 제592-2호)을 통해 洪秀輔와 洪義浩의 예술작품에 대한 수장취미와 후세에 남긴 先見을 엿볼 수 있다.
「紫閣二十詠帖」의 跋文에서 자연의 뛰어난 곳에 사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자 함이 아니요, 산 속에 사는 진면목을 기록하여 본인의 즐길 거리를 기록하여두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는 저작의도를 알 수 있다. 紫閣洞에서 閑居하며 그가 추구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터전의 '實際眞景', '山居眞面目', '實光景'의 묘사와 현실에서 自足하는 삶이었다. “詩拙, 畵又拙”이라 하여 詩 외에도 紫閣洞의 眞景을 그림으로 그려 實景圖를 향유하고자 하는 진솔한 면모와 예술적 취향을 드러냈다. 終南山의 幽處는 문학적 창작과 예술적 승화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紫閣二十詠」은 18세기 다양하게 서울을 조망하는 작품들이 19세기까지 이어져 그 奇勝을 노래하고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대부들이 경영하던 別墅와 주거에 대한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約山亭의 主人 許霖, 後彫堂의 主人 韓秀運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고구할 수 있는 자료이며 眉叟의 篆書 含翠堂과 洪義浩의 卜居 등 건축과 조경을 묘사한 문학과 예술의 한 편린을 볼 수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JaGakYiSipYoung(紫閣二十詠)」 written by Dam-nyeong Hong Eui-Ho and Jagak-dong(紫閣洞) where he lived. There are several papers about Hong Eui-Ho, a Nam-in literati and his envoy to Ching but compared with many volumes of his works, there has not been much research on him. This paper aims to look at his life while living in Jagak-dong, located in the skirt of Namsan, in Hangyang, capital district, except the time when he served as a local government office.
Dam-nyeong moved to Namsan Judong(鑄洞), called Jagakdong(紫閣洞) in Feb. 1815 (age 58). In the summer of 1817, he wrote 20 poems by selecting the beautiful places where he owned in Jagakdong such as Hamchuidang, Pahodojae, Geoyeonaok, Chumongheon and Chimuru, Yaksanjeong, Huchodang and the spectacular sceneries of various trees and flowers. His affection for the land and nature and the longing for his district like his hometown, Dangu were represented by the image of enchanted scenery through real view. In addition, through Jeonseo Hamchuidang(篆書 含翠堂) (National treasury no. 592-2) of Heo Mok, we can get a sense of his hobby of collecting the art works of Hong Su-bo(洪秀輔) and Hong Eui-ho(洪義浩) and the foresight of leaving such works behind.
In the preface of 「Jakakyisipyoungcheop(紫閣二十詠帖)」, we can find his intention of writing "I am not writing to boast of my living in the place with beautiful natures but to satisfy myself just by recording the true face living in the mountain and my pleasure to enjoy it.". What he tried to pursue was the description of 'real true scenery', 'true view of living in the mountain', real beautiful scenery' for the place around himself and his satisfying life in reality. Besides his poetries, he also revealed his sincerity and artistic taste to enjoy real landscape paintings by drawing the beautiful scenery of Jagakdong, namely “Sichol (詩拙), Hwawoochol (畵又拙)”. The calm place of Jongnamsan away from the village became a space for literature creation and artistic sublimation.
「Jakakyisipyoung」 shows the fact that many works overlooking the view of Seoul and describing spectacular scenery diversely in the 18th century continued to the 19th century and a section of Byulseo(別墅) and dwelling managed by the gentry class at that time. In addition, this work is a good material to research unknown literati such as Heo Lim (許霖), owner of Yaksanjeong, Han Soo-un(韓秀運), owner of Huchodang and we can look at a piece of literature and arts through Jeonseo Hamchuidang(篆書 含翠堂) of Misu(眉叟) and fortuneteller's shop of Hong Eui-ho hat described architecture and landsca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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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면천유배기 한시 일고(一考)

저자 : 李東宰 ( Lee Dong-j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1-30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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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養 金允植은 내우외환에 처한 조선 말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외교관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많은 저술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처신 등으로 인해 '長樂老'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치·외교사적 위상 못지않게 문학에의 성취에 대한 평가도 우리 문학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데 필요하다.
김윤식은 1887년 정권을 잡은 민비와의 갈등으로 면천에 유배되어 9년여를 살았다. 그는 정치적 패배로 인해 면천의 영탑사로 유배형을 당했지만, 유배지 면천에서의 생활은 면천군수를 비롯한 지인들의 경제적 도움과 위문으로 비교적 여유롭게 생활하며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김윤식은 1887년 6월 유배지인 면천에 와서 1894년 2월 강화유수로 부임하기 위해 면천을 떠날 때까지 생활하며 『沔陽行吟集』이라는 시집과 『續陰晴史』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의 시집인 『沔陽行吟集』에는 243제 419수의 시가 실려 있고, 『續陰晴史』에는 자신의 일상사와 당대의 사회상이 기록되어 있다. 『沔陽行吟集』의 시는 그가 처음으로 겪은 정치적 패배로 인한 상실감이 극대화된 시기로 그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가 드러나 있다. 시의 내용은 유배지인 면천 영탑사 주변의 풍경을 시화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지인들과 시주를 일삼으면서도 楚囚者로서의 遣悶과 소회를 시화하였고, 자신의 가정적 처지와 경세관을 실천하고자하는 의지로 인한 갈등을 드러냈으며, 유배가 길어지면서 귀향의 갈망을 드러냈다.


Unyang Yun-shik Kim, has left behind many writings and achievements in various activities as a man of thought, politician, and diplomat in the late Joseon Dynasty faced with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s, but he was negatively evaluated as 'Jangrak-ro' because of his behavior in conforming to reality. However, the evaluation of his achievements in literature as well as his status in the political-diplomatic history he left behind is necessary to correctly establish our history of literature.
Kim Yun-shik lived for nine years after exile to Myeongcheon in a conflict with Queen Min, who took power in 1887. Due to his political defeat, he was exile sentenced to Yeongtapsa-temple in Myeongcheon, but the life in the place of exile in Myeongcheon was relatively leisurely with various writing activities for the help and consolation of Myeongcheon county governor and other acquaintances.
Kim Yun-shik came to Myeongcheon, the place of exile in June 1887, and lived until he left Myeongcheon in February 1894 to be appointed as Ganghwa Yusu (government post), and he left a collection of poetry called 『Myeonyanghaengeumjip』 and a diary called 『Sokeumcheongsa』. His collection of poetry, 『Myeonyanghaengeumjip』, contains 419 poems in 243 subjects, and in his 『Sokeumcheongsa』, his own daily life history and his contemporary society are recorded.
The poems of 『Myeonyanghaengeumjip』 belonged to a period in which his sense of loss due to political defeat for the first time was maximized, revealing his sincere inner world. The contents of the poems also portrayed the landscape around the place of exile, Yeongtapsa-temple at Myeongcheon, but while working mainly with acquaintances with the poems and drinks, he visualized in his poems what he felt when he as an exile saw and heard the people. He revealed the conflict caused by his own family situation and his willingness to practice the view of statesmanship, and as the exile lengthened, his will to return home was revea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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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동랑(冬郞) 한치원(韓致元)의 초중년기(初中年期) 한시(漢詩) 고찰 -무인(武人)과 시인(詩人) 사이의 소회(所懷)-

저자 : 김영죽 ( Kim Young-jo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5-33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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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시인 한치원과 그의 시작품에 대한 분석과 고찰을 주로 한다. 한치원의 시문집은 그가 무관의 길로 접어들기 전의 詩會에서 만난 이들과 수창한 시와 任官이후 직무를 수행하면서 임소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동랑 한치원의 시 현황은 다음의 자료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부친 韓益相의 『自娛』 권4~권5에는 弱冠 즈음의 시가, 『冬郞集』과『蘇谿集』에는 1840년 이후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소계집』은 편간이 시대순으로 되어 있어, 그의 행력을 고구하기에 편하다. 『동랑집』은 시대순 편간은 아니지만 필사본인 『소계집』이 비해 일정의 교정을 거친 목판본이라는 장점이 있다.
한치원은 주로 부친, 仲兄 韓致肇와 동행하여 그들의 인적 관계망을 기반으로 한 詩作 활동에 주력했는데 초기에는 白社, 西社 등에 초치되거나 풍양 조씨 일문의 사교장인 묵계 산장, 燕巢亭의 시회에 참여한 모습이 포착된다.
필자가 대상으로 삼은 저자의 행력 구간은 초년과 중년 사이의 작품으로, 한치원의 행력과 시작품을 통해 당대를 살아간 중간계층의 내적 균열의 지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인과 작품의 특정한 구간을 우선시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병조참판을 지낸 그의 부친 한익상과 19세기 말~20세기 초라는 혼란의 시기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육군 참장까지 두루 역임했던 아들 한 진창과의 연결 지점에 그의 이력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 문화사적 관점의 고찰, 한치원의 교유망과 유관자료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The main book mainly analyzes and examines the 19th century poet Han Chi-won and his beginnings. Han Chi-won's poetry collection is filled with poems that he met at the Poetry Association before entering the path of no crown, and poems that are presumed to have been written at a place while performing his duties after 이후.
The current status of Dongrang Han Chiwon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following data.
His father's poems, Vol. 4~Vol. 5 include poems from around 1840, and poems from around 1840. In particular, "Sogyejip" is composed of periodicals, making it easier to sweeten his career. "Dongrangjip" is not a periodical edition, but it has the advantage of being a woodblock edition that has undergone a certain period of correction compared to the manuscript "Sogyejip".
Han Chi-won, accompanied by his father and 와했는데, focused on poetry based on their personal network, and was initially seen focusing 白社 and 西社 companies or participating in poetry sessions of Mukgye Mountain and 의, the social centers of the Pungyang Cho clan.
The author's journey, which I targeted, is between early and middle age, and the primary goal is to look at the inner cracks of the middle class who lived in the era through the history and beginnings of Han Chi-won.
This is limited to prioritizing certain sections of the poet's work, but it also started with speculation that his history was involved in the connection between his father Han Ik-sang, who served as a military chief, and his son Han Jin-chang, who served as governor of Jeolla, Chungcheong, and Gyeongsang provinces. This part requires consideration of social and cultural historical perspectives, close consideration of the educational prospects and related materials of Han Chi-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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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주 공산성 공북루(拱北樓) 제영시일고(題詠詩一考)

저자 : 李東宰 ( Lee Dong-j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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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공산성의 문화적 위상을 살펴보기 위한 기초 연구의 일환으로 공산성에 있는 공북루 제영시의 현황과 작품세계를 살펴보아서, 공북루의 문화사적 가치를 찾고 문화관광에 활용하는데 기여하였다.
공주 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있는 승경의 공간으로 백제시대에는 왕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의 감무가 있었던 곳으로 공북루 외에도 여러 누정이 있다. 공북루는 1603년 충청도 관찰사 柳根이 공산성 안에 충청도의 감무를 조성하면서 북쪽 금강 변에 세운 누각으로 關防의 기능 이외에 遊息과 餞別의 공간이었다.
공산성 공북루 제영시는 1603년 柳根이 공북루를 낙성하고 지은 이후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지어졌으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원문정보서비스에 탑재된 DB에 88題 94수가 색인된다. 공북루 제영시의 형식은 5언절구 2제 2수, 5언율시 12제 13수, 7언절구 20제 23수, 7언율시 54제 56수 등으로, 7언율시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최초의 공북루 제영시인 유근의 시가 7언율시였고, 이 시를 후대의 문인들이 많이 次韻하여 지었기 때문이다.
공산성 공북루 제영시의 내용은 공북루의 승경을 읊은 시가 24수이고, 여로의 회포를 드러낸 시가 36수이며, 遊息의 정서가 드러난 시가 26수, 회고의 정서를 드러낸 시는 남인계열의 문인들에 의해 이괄의 난을 소재로 한 시로 8수가 있다. 이는 공북루가 백제의 궁성이자, 고려와 조선시대 행궁인 공산성의 城樓로서 금강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승경의 공간이고,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나 사절들의 휴식 및 접대 장소였으며, 시인묵객들이 머물며 여로의 고단함을 토로할 수 있는 津樓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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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창연담(晴窓軟談)』의 합리적 분석(分析)과 재구(再構)를 위한 연구

저자 : 강민구 ( Kang Min-koo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1-8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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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欽의 『晴窓軟談』은 이전 시기의 시화서 편찬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당시의 활발한 시화집 편찬의 풍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 선조의 명으로 『海東詩賦選』 편찬에 참여하였던 것도 『청창연담』의 편찬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신흠이 『청창연담』의 편찬에 적극 활용한 도서는 『容齋隨筆』·『詩人玉屑』·『文獻通考』·『西湖遊覽志』·『山堂肆考』·『唐詩品彙』·『唐詩拾遺』이다. 다만, 그것들을 참고 문헌으로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청창연담 上』은 총40則에서 당나라 시인 45명과 그들의 작품에 대하여 논평하였고, 『청창연담 中』은 총42칙에서 중국 시인 43명과 그들의 작품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그리고 『청창연담 下』는 총70칙에서 중국 시인 6명과 우리나라 시인 59명, 총 65명과 그들의 시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그중 중복된 인물을 제외하면 당나라 시인이 56명, 남북조 시인이 4명, 송나라 시인이 18명, 원나라 시인이 3명, 명나라 시인이 7명, 고려의 시인이 4명, 조선의 시인이 55명으로. 총 147명이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상·중·하에는 모두 신흠의 무게 있는 詩論이 적소에 안배되어 있다.
『청창연담』에서 이루어진 비평은 시론·작품론·작가론·풍격론·텍스트론이 망라되고 있다. 특히 『청창연담 하』는 조선 시인들의 詩話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신흠이 오랜 기간 청요직에 재직하면서 수집한 풍부한 견문이 자료로 활용된 것이라고 하겠다.
『청창연담』을 분석한 결과 그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중국과 우리나라의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논평하였다.
2. 동일 주제로 시를 묶고 논평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3. 무게 있는 詩論을 제시하여 한문학 비평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4. 조선 詩壇의 상황과 경향을 개괄 정리하였다.
5. 亡失 작품을 보존하고 있다
6. 작품의 원형을 알 수 있게 하였다.
7. 생동감 있는 詩話로 조선의 문학 환경을 잘 알 수 있게 하였다. 반면, 『청창연담』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1. 비평 대상의 배열이 산만하다.
2. 일부 則은 분리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재조정해야 한다.
3. 비평의 범주가 착종되어 있다.
4.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사의 작품과 일화를 다량 수록한 반면 꼭 실어야 하는 시인과 작품이 누락되었다
5. 僞作이 포함되어 있다.
6. 出典 名, 作家 名, 作品名을 비롯하여 자구의 오류가 산재한다.
『청창연담』의 각종 문제점들은 여타 시화서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청창연담』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정본화 작업의 경험과 방법은 여타 시화서의 정본화 작업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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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덕지역 시인 송남수 연구

저자 : 정경훈 ( Jung Kyung-h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7-11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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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潭 宋柟壽(1537~1626)는 宋希甲(? ~ ?), 琴巖 宋夢寅(1586~1612), 四友堂 宋國澤(1597~1659) 등과 함께 회덕의 대표적 문인으로 알려졌고 특히 송희갑, 송몽인과 함께 회덕 3대 시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윤근수, 이정구, 권필, 김상용, 유근, 정온, 정구, 이호민, 이안눌, 신흠 등 조선 중기 최고의 문사들과 교유를 하며 300여 편의 한시를 남긴 인물이다. 송남수의 시는 『箕雅』에 수록될 정도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송시열과 김창협은 송남수의 시적 특장을 조목조목 밝혔고, 특히 김창협은 송남수의 시를 '眞詩'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송시열과 김창협이 지적한 송남수의 시적 경향은 아름다운 산수 기행을 통한 감흥과 관직 생활이후의 한거와 시주의 흥취, 회덕으로의 은거를 통한 회고와 감회였다.
송남수는 계룡산, 관동, 영동, 금강, 형강, 갑천 유람을 하며 감흥을 시로 표현하였고 60세에 관료 생활을 마치고 미련 없이 회덕 고향에 내려와 90세의 나이로 졸할 때까지 琴書와 詩酒를 즐기며 관료생활 때 못했던 흥취를 누렸다. 송남수는 졸수의 나이인 90세까지 생존한 인물로 관료 생활을 제외하고 70년 가까이를 회덕에서 생활했다. 그는 은퇴 이후 시주의 감흥을 잠시 즐기기도 했지만 마지막 인생을 송담의 작은 연못으로 옮겨 은거하면서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를 통해 여러 감회를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비록 중앙 정계의 현달한 관료, 전국적인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시인의 명성을 떨친 인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청도 회덕의 서인 본거지에서 송희갑, 송몽인과 함께 회덕 3대 시인으로 지칭되기에 충분한 성과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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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관서유록(關西遊錄)』에 나타난 지역 형상화 양상과 그 의미

저자 : 남윤덕 ( Nam Yoon-de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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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明의 『關西遊錄』은 관서지역 내 누정과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에 대한 感評을 기록한 일차적인 유록의 성격과 평안도지역에 대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그 정황 관계를 살펴 그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제공하는 등의 현실 인식도 반영하고 있다. 『관서유록』은 역사 기술을 통해 그 사료적 가치성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역사와 문학이 결합된 모습으로 사실감 있게 드러난다. 류치명은 묘향산의 유래, 동방에 문명을 전파한 기자, 황성, 송나라 휘종과 흠종, 그리고 오랑캐의 오국성 등 그 옛날 역사적 사실 묘사에서 북방지역의 역사인식과 소중화 의식이라는 조선 유학자의 사상을 가감 없이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관서지역의 대표 누정이나 강학공간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소회와 감정을 진솔하고 담담한 어조로 표현해 내기도 했다. 류치명의 『관서유록』은 단순한 유람에 대한 기술이 아닌 유학자로서 관서지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성찰의 시간도 갖는 등 여러 의미와 의도에서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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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韓國) 죽지사(竹枝詞) 자료(資料) 집성(集成)의 필요성과 의미 -그 방법론을 겸하여-

저자 : 김영죽 ( Kim Young-jo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7-17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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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枝詞는 중국에서 기원한 문학 형식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시인들이라면 함께 공유했던 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죽지사의 개념과 변천 양상은 『歷代竹枝詞』의 前言과 『淸代海外竹枝詞』의 序, 『竹枝詞發展史』 등에 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본고에서는 자료 집성 필요성의 제기에 앞서 죽지사 기원, 형식과 명칭(同體異稱)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죽지사는 唐-宋-元-明-淸代를 거쳐서 여러 가지 칠언사구 외에도, 六言/五言四句의 형식으로 창작되었기에 七言四句만의 단선적 비교 속에서는 '죽지사의 형식은 이러한 것이다.'라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지사는 강한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여 그 공간을 구성하는 物的, 人的 정보를 가장 간명하고도 특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초기의 小詩의 형태에서 장편의 연작시나 조시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간다. 이 외에도, 독자를 의식한 작자의 주가 첨부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명대와 청대, 조선에서는 후기 죽지사에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죽지사 자료 집성은 무엇보다 관련한 기존 연구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 가능하게 한다. 작자층은 물론이고, 그들이 작품의 소재로 삼은 지역의 특색, 시대에 따른 변화 양상이 동일한 題下에서 변주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죽지사가 다량 제작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종의 '경향성'이 감지되는데 이것이 과연 기존 연구에서 지적한 소외된 지식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계층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방대한 자료 집성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풀리는 문제이다.
집성의 기준은 여전히 일방향으로 정해지지 않았고, 집성 과정 또한 한 개인 연구자가 수행해 내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죽지사 자료 집성에 있어 그 선별 기준과 취합 방식, 합리적 구현 등 대한 문제를 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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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불가 경전의 구결 전승과 유가 구결의 분화에 관한 고찰

저자 : 신영주 ( Shin Young-ju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19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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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우리 선인들이 한문 학습과 연구를 위해 오래전부터 사용해왔고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차자표기 구결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고려 초에 각필로 점과 선을 그어서 완성한 구결과 한자의 점획을 생략하여 墨筆로 표기한 구결이 있는데, 상호 연관성과 성립 시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 자토 구결의 기능이 석독을 위한 것에서 음독을 위한 것으로 변화된 요인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 초조본 『유가사지론』과 『舊譯仁王經』과 재조본 『瑜伽師地論』 등의 사례를 견주어보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불가에서 경전 연구를 위해 구결을 활용하여 경문을 분석하고 이를 구결을 통해 후대에 전승하여 학술 전통의 계승을 이루어낸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울러 유가에 기반을 둔 학술 지식인들이 유가와 불가가 대립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불가와 구별되는 새로운 조합의 구결을 활용하게 된 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구결 분화에 차별화 전략이 내재했을 가능성도 함께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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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고려말-조선초 경부(經部) 중국서적의 수입과 간행에 대하여

저자 : 노요한 ( Noh Johann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5-24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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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經部를 중심으로 고려말-조선초에 수입된 중국본과 조선에서의 覆刻ㆍ活印의 사실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세종은 한문고전의 硏鑽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국문물제도의 정비를 통해 문화국가 건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經史子集의 학문 모든 방면에 걸친 고전의 硏鑽을 통해 그 학술문화의 성과를 섭취하였으며, 그 연찬의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국가로서 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가의 문물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곧, 세종은 즉위 후 여러 루트로 고전주해서의 善本을 구하여 이를 활자로 간행하거나 복각하였으며, 서적을 단순히 摹印하거나 복각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연찬을 바탕으로 조선독자의 纂註本들을 새로 편찬ㆍ인쇄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초 유학의 연찬에 사용된 한문고전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 조선에서 다시 편찬ㆍ간행된 고전 주해서의 저본을 이루는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려 때는 서적의 수입이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조선전기에는 명나라 禮部에 咨文을 보내어 欽賜받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초 『사서오경대전』, 『대학연의』, 『자치통감』, 『통감강목』 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입된 서적들이었다. 그와 함께 조선 초에는 고려조에 전래하여 있던 주요 서적의 覆刻도 함께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四書五經大全』, (元)董眞卿 編 『周易會通』, (元)吳澄 撰 『易纂言』, (元)董鼎 撰 『書集傳輯錄纂註』, 鄒季友 音釋 『書集傳』과 『詩集傳』, 集賢殿 受命編 『春秋經傳集解』, 胡安國 傳 『春秋胡氏傳』, (宋)林堯叟 註 『春秋經左氏傳句解』, 李廉 輯 『春秋諸 傳會通』 등을 대상으로 이들 서적의 수입 및 간행 사실에 대해 개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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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19세기 서학중원론(西學中源論)의 전개와 그 함의 -서학(西學)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대응논리-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3-26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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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명말청초 이래 중국을 왕래한 조선의 사신들에 의해 전래된 서양의 학문, 곧 서학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대응논리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지식인들의 인식논리로 여전히 현재적 의미가 있다.
당시 조선학계에서는 서구의 문명이라도 뛰어난 과학기술은 배워야 한다는 논리만큼이나 선진적인 기술은 배우되 사회질서, 도덕실천과 관련된 이단 사상은 수용할 수 없다는 道器의 분리수용론이 강렬하게 제기되었다. 서구 문명에 대한 대응의 층차가 매우 다양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응논리 가운데 흥미로운 논점 가운데 하나가 西學中源論이다.
서학중원론은 발전된 서양의 과학은 중국의 고대문명에서 기원했다는 명말청초 중국 학자들의 주장으로 자문화 중심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에 대한 수용논리로 개발된 것이다. 서학중원론의 역사적 진실성은 매우 희박할 뿐 아니라 그 논리적 허술함은 간과할 수 없는 허점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접변의 과정에서 거의 150년 이상 서학중원의 논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지식과 인식의 완고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과학과 문명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학문대상으로서의 인식논리, 학문의 목표와 방법론의 문제, 문화정체성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이문명에 대한 정확한 인식, 변화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은 새로운 문명과 상대에 대한 열린 시각과 정당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체의 확립도 고립이 아니라 변화상을 온전히 접수하면서 이룩될 때 더욱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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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체(人體) 혈(穴) 자리 명의(名義)의 한자학적(漢字學的) 연구(硏究) -건축물(建築物)과 유관(有關)한 혈(穴)자리를 중심으로-

저자 : 이호직 ( Lee Ho-jik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9-3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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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인체의 오장육부가 체표면에 보내는 반응점이며 치료혈인 경혈을 발견하였으며 각 혈자리에 한자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이름을 부여하였다. 漢字는 갑골문, 금문, 전서, 예서, 해서의 단계를 거치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였는데, 또한 경혈명에 쓰인 한자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고려된다. 현재 경혈명에 쓰인 名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자가 가지는 六書의 원리와 形, 音, 義의 분석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인체의 361개 혈자리 중에 건축물과 유관한 한자를 선별하였다. 地倉(위경4번)혈의 倉, 靈臺(독맥10번)의 臺, 天牖(삼초경16번)의 牖, 極泉(심경1번)의 極자등이 있는데, 현재 사용하는 한자는 자형이나 자음이 본래와 달라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므로 혈자리가 가진 名義를 파악하기 위해 허신의 『설문해자』를 기본으로 여러 전적뿐 아니라 한의학에서 제시하는 名義와 비교 분석을 하였으며 聲部와 字形을 중심으로 고대자형의 분석을 통한 자형연변과 자음, 자원을 살펴보았다.
地倉혈은 입의 입 꼬리 가장자리에 있는데 '地'는 땅의 기능과 안면부에서 입이 天, 地, 人에서 地에 해당되는 위치를 고려하였고 '倉'은 地倉혈이 胃경락에 속하고, 胃가 곡식의 저장고라 이름 한 것이다. 靈臺혈에서 '靈'은 심장이며 '臺'는 형성자로 臺가 관리 감독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고대 건축물에 비유하여, 인체에서 심장이 높은 위치에 있고 우리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능과 같아 지칭하였고, 天牖혈에서 '天'은 그 혈이 귀의 옆에 있고 '牖'는 귀를 고대 창문의 기능에 비유해 지은 것이다. 極泉혈은 그 혈이 겨드랑이 아래에 있어 처마의 형태라 '極'이라 하였고, 泉은 샘처럼 처음 시작하는 곳이라서 이름 하였다.
인체의 혈자리에 쓰인 한자의 形, 音, 義와 자원을 분석하여 정리한다면 한자학과 한의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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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중등 고전문학 작품 '남성적-여성적 어조' 지도의 문제

저자 : 구태운 ( Goo Tae-un ) , 송하온 ( Song Ha-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5-3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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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교육과정에서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어조' 학습은 화자가 처한 상황내지 시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와 같이 성별에 따라 어조를 유형화하는 것은 작품 분석에 있어 큰 이견 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남성적-여성적 어조의 이분적 구도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 현장 학생들의 실질적인 질의를 통해 상기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현행 교과서 및 교사용 지도 자료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성별 속성의 고정된 이해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우리 문학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였다.
문화화된 성별 속성을 통한 이분적인 어조의 구별방식은 현대 중고교 학생들의 질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남성의 속성과 여성의 속성을 더이상 문화적 보편성이나 전통성에 기대어 수용하지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다수의 교과서나 문제집에서는 우리 문학에서 기초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거장의 시들을 성별 속성에 따라 분석하고 있다. 가령 여성적 어조는 부드럽고 섬세하며 애절함이나 그리움의 정서가 두드러질 때 사용되며, 남성적 어조는 거칠고 호탕한 분위기나 시어 사용 및 단정적이고 강렬한 정서가 나타날 때 사용된다.
해당 이분적 구도는 일차적으로 성별과 특정 정서가 대응되는가에 대해 관습적 측면을 배제하면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예로부터 문학 분석에 사용되었던 정통 방식이라고도 볼 수 없다.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무엇이 남성적인 것인지', 또는 '무엇이 여성적인 것인지' 역으로 추가적인 설명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도의 효과도 떨어진다. 해당학습법이 지속된다면 학생들이 성장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고정 관념을 내면화하게 되는 부정적 결과 또한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문학 감상에 있어 남성적-여성적 어조의 이분적 구별 대신 부드러운 어조, 단호한 어조 등과 같이 화자의 '정서 자체'를 평가하는 표현의 지도가 보다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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