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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등재된 경기도 자기소(磁器所)의 입지 특징과 등재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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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등재된 경기도 자기소(磁器所)의 입지 특징과 등재 기준

The Location Characteristics and the Registration Criteria of Jagiso(磁器所) in Gyeonggi Province Examined Through 『The Annals of King Sejong(世宗實錄) 』 and 「Book of Geography(地理志)」

박정민 ( Park Jungmin )
  •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 한국문화연구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6월
  • : 75-107(33pages)
한국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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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경기도 자기소 분포와 입지 상황
Ⅲ. 조선 왕실의 講武와 경기도 내 자기소 등재 군현 의 상관성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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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世宗實錄』 「地理志」를 기준으로 磁器所가 등재된 경기도 郡縣의 입지 특징을 파악하여 경기도 자기소의 등재 기준을 추론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국에 걸쳐 139곳의 자기소를 마련했으나, 전국 모든 군현에 자기소가 등재되지는 않았다. 어떤 목적과 기준에 의해 자기소를 등재한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의 전국 자기소 등재기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道 단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정 등재 기준은 전국에 걸쳐 적용했겠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등재 기준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도에는 廣州牧 등 10개 군현에 총 14개의 자기소가 등재되었다. 경기도 자기소는 대부분 경기도의 동쪽 절반에 해당하는 山地 군현에 자리한다. 이 지역은 대부분 숲이 많아 자기 제작이 용이하고, 조선 왕실이 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정부는 강무장 인근 주민들의 피해와 반발을 줄이기 위해 강무 때 필요한 물자를 해당 지방에 미리 준비했다. 다수의 강무 인원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할 다량의 그릇 역시 반드시 사전에 갖추어야 할 물품이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강무장으로 사용한 군현에 자기소를 등재해서 필요한 그릇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경기도와 왕실간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이자 경기도 자기소 등재 기준에 풍부한 땔감과 왕실의 중요행사 준비라는 요소가 반영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This study deduces the location characteristics in local counties and prefectures(郡縣) of Gyeonggi province, which are recorded ceramics workshop known as Jagiso(磁器所) in 『The Annals of King Sejong(世宗實錄)』 and 「book of geography(地理志)」thereby inferring the criteria of registration for Jagiso in Gyeonggi province.
139 kilns across the country in the early Joseon period. At this time, some kilns were registered as Jagiso. Some kilns were not so.
As for the registration criteria of Jagiso in the whole country, there is a need to first grasp a situation in the unit of province(道). That is because even the registration criteria of having reflected regional particularity will definitely exist even though the specific registration of criteria may be applied across the country.
In Gyeonggi province, totally 14 sites of Jagiso were registered in 10 local counties and prefectures such as Gwangjumok(廣州牧).
Jagiso in Gyeonggi province is mostly situated in mountain area of corresponding to the eastern half of Gyeonggi province. This districts were used as great hunting ceremony field(講武場) by the royal family of Joseon. The Joseon government prepared beforehand for the necessary supplies during great hunting ceremony in the district in order to reduce damage and resistance of local residents living near the great hunting ceremony field. The Joseon government seems to have secured necessary bowls through recording Jagiso in local counties and prefectures of having been used as great hunting ceremony.
This phenomenon is the result that was reflected distinct characteristics between Gyeonggi province and the royal family. In addition the registration criteria of Jagiso in Gyeonggi province can be understood in which even the correlation with the royal great hunting ceremony was refl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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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1-900-00111467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8-4176
  • : 2733-8452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1-2021
  • :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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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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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궤를 통해 본 숙종~영조 연간(1674-1776) 상존호도감 보록 철제입사자물쇠의 시문기술과 금속재료

저자 : 김세린 ( Kim Serine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0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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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숙종~영조 연간 상존호도감에서 제작한 철제입사자물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숙종~영조 연간에는 다른 시기에 비해 상존호의례가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존호를 올릴 때는 여러 의물들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는데 존호를 받을 대상에게 올리기 위해 인장(印章)인 금보(金寶) 또는 옥보(玉寶)를 조성했다. 철제입사자물쇠는 이를 담는 함의 구성 의물 중 하나로 제작되었다. 의례에 들어가는 자물쇠는 다른 기물에 비해 소형이었고, 규모가 작은 제작 공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규범에 맞춰 정교하게 제작하기 위해 자물쇠를 제작하는 전문 장인인 쇄약장, 시장 등을 투입해 형태를 제작했고, 입사장이 문양시문을 담당하게 해 철저하게 제작을 분업화했다. 한편으로는 1770년 이후 보록과 주록, 호갑에 들어가는 자물쇠만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보시장이 등장해 도감 내 쇄약장과 시장의 분화가 확인된다. 아울러 왕실 의례에 사용하는 자물쇠였기에 재료도 국내산 매우 양질의 순도 높은 금속재료를 활용해 제작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개된 현전하는 유물이 많지 않고, 현전하는 유물 중에는 추후 보수해 넣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해당 의궤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자물쇠가 많았다. 이는 연구에 있어 큰 어려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으로 조선시대 금속공예의 양상과 기술에 대한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왕실용 자물쇠에 대한 보다 면밀한 유물 조사와 문헌기록 수집 및 분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과제를 남겼다.


In this paper, a study was conducted on the iron inlaid locks made by the temporary government office of King Sukjong-Youngjo. During the year of King Sukjong and Yeongjo, national events were more active than other periods. When giving a formal name, I had to observe various manners, and I made a gold seal or a jade seal. An inlaid lock made of iron was used as a lock for the box that kept this seal.
The iron inlaid lock that locks the box was smaller than other pieces made in the same place. However, many craftsmen were put in to make this elaborately polite.
The locksmith made the shape of the lock, and the inlay craftsman was in charge of the decoration. And in 1770, a craftsman who specializes only in the keys to lock boxes appeared. This means that the division of labor has been made more thorough. The material used to make the lock is a metal material with high domestic purity.
However, there were not many artifacts open to the public, and many of them did not match the records due to various factors such as repairs. This was one of the research challenges. However, on the one hand, in order to clarify the whole aspect of metalworking and technology in the Joseon Dynasty, a more detailed investigation of the artifacts and the collection and analysis of literature records left the task of being ur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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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영조대 연향의궤 속 도기의 용도와 조달방식

저자 : 한혜선 ( Han Hyesu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1-7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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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세기 조선 영조대 연향 의궤 두 건 『갑자진연의궤(甲子進宴儀軌)』(1744년)와 『수작의궤(受爵儀軌)』(1765년)를 중심으로 도기(陶器)의 용도와 종류, 조달 관사와 방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분석을 통해 왕실에서 연향의례를 준비하는 많은 과정에서 도기가 다양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도기는 주로 사무용, 음식준비용, 장인에게 지급되는 제작도구 등으로 사용되었다. 연향의례에서 사용된 도기는 도동해(陶東海), 도소라(陶所羅), 도관(陶罐), 도소탕이(陶所湯伊), 도자박지(陶者朴只), 대옹(大甕), 중옹(中甕), 족정(足鼎), 토화로(土火爐) 등이다. 이 도기들은 크기에 따라 대소(大小)가 구분되기도 하고, 무엇을 담았는지에 따라서도 여러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연향의례에서 사용된 도기는 공조(工曹)와 공조 소속 와서(瓦署)에서 전담하여 조달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공조 소속 옹장(甕匠)이 조달을 책임지는 구조였지만 이들의 실제 제작까지 도맡았던 것은 아니고 큰 틀에서 세금의 형태로 납부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기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기물은 아니지만 간단하게 의궤만 살펴보아도 왕실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에서 사용된 필수품목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의궤 속 도기의 양상을 살펴보는 작업은 특정 왕실 행사의 준비와 설행(設行) 그리고 마무리까지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하고 복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연구주제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use, types, government office for supply, and method of pottery, focusing on two cases of ritual banquet Uigwe in Youngjo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18th century, such as 『Gapjajinyeonuigwe』 (1744) and 『Sujakuigwe』(1765). Through the analysis, this thesis verified various utilization of pottery in many processes of preparing for royal court ritual banquet. The pottery was mostly used for office use, food preparation, and production tool provided to craftsmen.
The types of used pottery include Dodonghae, Dosora, Dogwan, Dosotangi, Dojabakji, Daeong, Jungong, Jokjeong, and Tohwaro. The Uigwe is classified into small and large depending on its size, and it is stated as many names depending on what has been contained in it. And those potteries were mainly supplied by Gongjo and Waseo affiliated to Gongjo. Especial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potters belonging to Gongjo were in charge of supply. However, they did not handle the actual production. They must be paying in the form of tax to a larger extent.
Even though the pottery is not an article under glaring lights, the brief examination of Uigwe certainly shows that it was an essential item used for various events and daily life of royal court. Like this, examining the aspect of pottery in Uigwe needs to be handled importantly as a research theme that is essential to recompose/restore a series of processes such as preparation, execution, and wrap-up of specific royal court 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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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48년 진찬의궤의 당화준(唐畫樽) 사용의 의의

저자 : 송인희 ( Song Inhee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32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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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조선의 왕실 연향에는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19세기 초부터 이루어진 왕권 강화의 노력이 새로운 정재(呈才)로 가시화 된 한편, 연향의 상차림 규모와 기물 사용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기물의 변화는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재질과 조형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거나, 중국산 자기로 추정되는 당기(唐器)의 사용 규모와 범위가 확대된다는 점에서 중국자기의 애호와 사치 풍조가 확산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19세기 전반 왕실 연향에서의 중국 자기류 사용 증가와 관련해 주목되어 온 것은 1828년부터 새로운 정재 일부에서 꽃을 담는 용기로 쓰이다가, 1848년에 이르러 연회의 중심 영역인 전각 앞을 장식하는 기물로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1848년 이래 '당화준(唐畫樽)'의 사용은 이제까지 의궤 도식의 분석을 위주로 연회의 성대함을 보이는 화려한 기물 정도로 파악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내내 권위의 상징으로 왕실 연회에 자리했던 용준(龍樽)을 대신한 만큼 그 사용에 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1848년 진찬에 당화준이 중심적인 장식물로 나타나게 된 맥락을 파악하고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해당 의궤 뿐 아니라 19세기 전반 연향 관련 의궤를 재점검했고, 전반적인 기물의 사용상 내에서 당화준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또한 도식(圖式)에 보이는 문양의 특징을 동시기 조선과 중국의 도자 문화와 함께 고찰해 그 의미를 조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19세기 전반 조선 왕실의 고급 기물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동시에, 19세기 조선의 물질문화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a new, distinguishing phenomenon emerged in the royal banquets of the Joseon dynasty. While the reformation of music and dance performances in 1828 exemplifies the efforts to strengthen the monarch authority, the gradual change in the use of utensils has also been identified through the royal protocols of the early 19th century. It is particularly noteworthy that the usage of Chinese porcelain expanded from table-utensils to feast hall decorations and it became evident from the banquet in 1848.
Since their first appearance only as part of the newly introduced court dances in 1828, Chinese flower vases, recorded as Danghwajun, were placed in a pair at center stage of the banquet in 1848. Previous studies identified them merely as an eye-catching object of the sumptuous feast and primarily focused on the stylistic analysis of illustrations in the protocols of royal banquets around the time. However, Danghwajun in 1848 requires an in-depth investigation of its usage and style, as this Chinese vase replaced the blue-and-white porcelain jar with dragon design which had long been a symbol of regal authority in the royal ceremonies of the Joseon dynasty.
By scrutinizing relevant accounts in the royal protocols, this paper explores the context surrounding the appearance of Danghwajun as major part of the royal decoration in 1848. Stylistic analysis of the design aims to appreciate its value in the complex ceramic culture of the time. In doing so, this paper illuminates the significance of Danghwajun connoting the attitude of the royal house toward the items for their high-ranking events and further attempts to understand the burgeoning material culture in Joseon during the early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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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왕실 연향용 주기(酒器)의 종류와 운용체계 -의궤의 기용도(器用圖)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구혜인 ( Koo Hyei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83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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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후기 왕실 연향용 주기가 구성된 배경, 종류와 조형 그리고 소비와 수급체계를 살펴본 논문이다. 현전하는 유물이 드문 연향용 주기를 조사하기 위해 조선후기 의궤 기용도를 주로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당시 공예문화에서 주기가 갖는 성격과 의미를 파악했다. 주기는 왕실 연향을 상징하는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왕실 연향 절차에서 진작하는 순간이 의례의 핵심이고 왕실 구성원의 위차를 예를 통해 드러내는 중요한 기회이자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조선후기 연향의궤 속 기용도의 시작은 조선전기 국가전례서의 준작도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또 의궤 속 주기 중에서 잔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명칭의 수가 총 34개에 이를 만큼 다양하다. 각각의 명칭 안에는 기종, 구성, 재질, 장식 등의 풍부한 정보들이 조합되어 있다. 그 중에서 서배와 옥잔은 잔의 위계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연향용 주기의 공급과 사용양상에 대해 살펴본 결과 내하, 호조, 상의원 그리고 주원 등에서 주기가 조달되었다. 그리고 참석자의 위계에 따라 주기의 종류, 재질, 색 등이 엄격하게 구분되는데, 이에 비해 다정과 시접반의 기물들은 참석자 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This article is a thesis that examines the background, types and format, and consumption and supply and demand systems of the liquor vessels of the royal family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s a result of the survey, the beginning of Kiyongdo in the Yeonhyangui-gwe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found in the Junjackdosul of the national rituals in the early Joseon period. In addition, cups occupy the largest number of cycles in Uigwe, and the names are varied enough to reach a total of 34. In each name, the information such as model, composition, material, decoration, etc. are combined. Among them, Seobae and Okzan occupy the core in the hierarchy of the cup.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supply and usage patterns of liquor vessels, the liquor vessels were supplied from Nae-Ha, Hojo, Sanguiwon and Juwon. In addition, the type, material, and color of the liquor vessels are strictly classified according to the hierarchy of the particip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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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한제국기 유림의 존성운동(尊聖運動)과 그 의미

저자 : 노대환 ( Noh Daehwa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7-22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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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대한제국기에 일부 유림이 중심이 되어 전개했던 尊聖運動을 고찰한 연구이다. 존성운동은 호서의병에 참여했던 유림이 주도한 유학 진흥운동이다. 이들 유림은 국모 시해와 같은 패륜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문명개화론이 확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학이 부진하기 때문이라고 보아 성균관 제도의 복구 등을 통해 유학을 재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1899년 고종이 우리의 종교인 유교를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조령을 내리자 유림은 이에 고무되어 존성을 위한 출판 작업에 나서 1900년에 『尊華錄』, 1903년에 『大東正路』를 간행하게 되었다.
존성운동은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이 피탈되기 전에 시도된 유학 진흥을 위한 유림의 적극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1년 대대적으로 척사운동을 전개한 이후 유림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고종이 황제 지위에 오르자 고종에게 큰 기대를 걸고 존성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고종은 유학을 진흥하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존화록』과 『대동정로』가 각각 호서유림과 영남유림이 주도로 편찬되는 등 유림도 결집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존화록』과 『대동정로』의 내용은 전통 유학을 고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결과 존성운동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에 실망을 느껴 사상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유림이 속출하였다. 존성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도 여러 인사들이 계몽주의자로 전신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연구 과제이다.


This paper is a study that reviewed the Confucian promotion movement led by some Yurim during the Korean Empire. Confucian scholars judged that the main reason for the occurrence of the murder of Empress Myeongseong and the spread of the theory of civilization enlightenment was due to the decline of Confucianism. Therefore, they argued that Confucianism should be reinforced through restoration of the Sungkyunkwan system. In response to this request, Gojong issued an ordinance in 1899 stating that our religion, Confucianism, should be revealed. Inspired by this, Confucian scholars were encouraged to work on publishing to promote Confucianism, published 『Zonhwaroke』 in 1900 and 『Daedongjeongro』 in 1903.
The respect movement is noted in that it was Confucian scholars's last attempt to promote Confucianism during the Great Korean Empire. Confucian scholars did not show much movement after the massive retaliatory movement in 1881, but when King Gojong ascended to the status of emperor, they held high expectations on King Gojong and launched a campaign to promote Confucianism. Contrary to expectations, however, Gojong did not take any measures to promote Confucianism. Confucian scholars were not able to show their cohesion, and the contents of 『Zonhwarok』 and 『Daedongjeongno』 remained at the level of adhering to traditional Confucianism. As a result, the respect movement ended without any practical effect. Disappointed by this, Confucian scholars seeking an ideological transformation appeared. Among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Confucianism promotion movement, several persons became enlightenmentists. Confirming this movement is a new research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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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조선의 사치 담론에 대한 여성의 대응과 의의

저자 : 권미경 ( Kwon Migyou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5-24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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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주도의 담론에서 여성은 종종 사치 소비의 주체로 비난받아 왔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여성도 그러했다. 특히 모던걸 이미지 속의 근대 여성은 그들의 외모를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사치 소비의 주체로 지목받았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았다.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담론에서 여성이 사치 소비의 열성적 주체로 비난받는 현상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여성의 대응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 등의 사료를 살핀 결과, 여성들은 자신을 향한 사치 담론에 침묵하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기획하여 주도한 민족주의적 사치 배척 운동의 능동적 주체로도 활약했는데, 이는 지배 논리에 대한 동조인 동시에 여성의 사회 참여와 신장된 권력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또한 사치 담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반응으로, 여성들이 담론장에 직접 등장해서 자신들을 둘러싼 사치의 비난과 오해를 적극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본고는 이를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가능성으로 해석했다. 이상의 발견과 해석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사치 담론에 대한 여성의 능동적 역할과 전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In male-led discourse, women have often been accused of luxury consumption. So did women in colonial Korea. Modern women in colonial Korea were consistently blamed for luxury consumption and were morally criticized in the luxury discours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women responded to this dominant discourse produced by males. After reviewing the historical data from newspapers and magazines at the time, it was concluded that women were not silent on the luxury discourse toward them. The reasons for this are as follows. First, women also played an active role in the nationalist anti-luxury consumption movement planned and led by men. This was interpreted as an agreement to the dominant discourse and a phenomenon showing women's participation in society and increased power. Second, as a more direct response to the luxury discourse, women appeared directly in the discourse to actively refute the criticism and misunderstanding of the luxury consumption surrounding them. This paper interpreted this as the possibility of women as active subjects who could crack the governing ideology. Based on the above findings and interpretations, it was possible to find the active role of women and the possibility of subversion in the luxury discourse in colonia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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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근대 화전가 속 놀이문화의 재현 양상과 그 의미 -1950~7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유정선 ( Yu Jeongsu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9-28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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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20세기 이후 화전가의 통시적 흐름 속에서 1950년대가 변곡점이 된다고 보고, 1950년대~70년대 화전가의 작품 세계를 고찰하였다. 이는 화전가가 쇠퇴해간 향방을 탐색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시대추정이 가능한 작품 15편을 대상으로, 작품의 구성과 놀이문화의 재현 양상을 분석하였다. 1950~70년대 작품에서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규방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부자유한 삶의 애로사항을 술회하고 있다. 반면에 친정방문을 통하여 놀음에 참가하고 있는 작품이 등장하고, 도입부에서 개인의 이력을 술회하면서 시작하는 작품들이 출현하고 있는 점은 달라진 점이다.
또한 1950~70년대 화전가에서는 이전과 달리, 준비과정에서 놀이 장소의 상징성이나 물자의 경제적 동원력을 비중 있게 재현하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놀이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재현된 놀이는 '춤추기'와 '인물비평'이다. 놀음의 분위기도 절도와 품격 있게 노는 것을 추구하던 것에서 바뀌어 유쾌하고 분방하게 노는 것을 추구한다. 위계와 서열의식을 중시하며 결속과 화합을 다졌던 데에서 보다 소극적인 태도로서의 '원만하게 놀기'로 바뀌어 있다. 이러한 놀음의 분위기와 인물비평의 재현은 마을과 문중의 집단적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개개 성원들의 개성에 주목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1950년대에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지역사회에서 문중의 사회적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문중 또는 마을의 공동체 의식에 기반한 화전놀이가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의의는 퇴색한다. 위계와 서열로 대변되는 공동체 의식의 약화는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놀이의 분방함과 다양함을 가져왔다. 반면에 문화적 교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화전가의 무게중심이 놀이적 요소로 옮아간 것을 보여준다. 이후 화전가에 투영되어왔던 놀이적 요소는 관광이 대신하였으며, 문화적 요소는 개인의 자율성이 중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가 대체해간 것으로 보인다.


In this thesis, I considered that the 1950s became an inflection point in the synchronic flow of hwajeonga after the 20th century, and examined the world of hwajeonga in the 1950s and 1970s. This is also a work to explore the direction of the decline of hwajeonga. To this end, 15 works that can be estimated of the times were analyzed and the composition of the works and the representation of the play culture were analyzed.
In the works of the 1950s and 1970s, female writers are still living in a space of Gyubang, reminiscing about the difficulties of their unfreezing life. On the other hand, works that participate in noreum through parental visits are appearing, and the fact that works that start by retrieving personal history in the introduction are appearing which is a different point. In addition, unlike before, in the 1950s and 1970s, the symbolism of the place or the economic mobilization power of the place was not reproduced in a significant way, unlike before.
In the full-fledged play part, the plays that were mainly reproduced are 'dance' and 'character criticism'. The atmosphere of play is also changed from the pursuit of theft and dignity of playing, and pursuing to play cheerfully and liberally. It has been changed from having solidarity and harmony by placing an emphasis on hierarchy and sense of rank to 'playing smoothly'. This means that compared to the attitude that emphasized the positive sense of community, the attitude has changed to a passive attitude.
Reproduction of this atmosphere of noreum and character criticism has resulted in paying attention to the individuality of individual members rather than emphasizing the collective identity of the village and the clan.
In the 1950s, modernization was promoted in earnest, and the social influence of literati in the local community was weakening. Accordingly, the cultural significance of Hwajeonnori based on the community consciousness of the clan or village fades. The weakening of the sense of community, represented by hierarchy and rank, emphasized individual individuality and brought a sense of predicament and diversity in play. On the other hand, the function of satisfying the needs of cultural education has weakened. Accordingly, it shows that the center of gravity of the Hwajeonga has shifted to a playful element. Since then, tourism has replaced the elements of play that have been projected onto the Hwajeonga, and the cultural elements seem to have been replaced by a new popular culture that emphasizes individual aut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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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문화의 무형문화유산적 특징과 의미 -만경강과 동진강을 중심으로-

저자 : 정성미 ( Jeong Seongmi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3-32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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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강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각종 개발 사업과 강 문화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자료가 강과 관련하여 시간, 공간, 주제의 다면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 연구는 강과 인간과의 관계를 무형문화유산적 관점에서 해석해보았다. 강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면담조사를 토대로 그들이 강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관념을 무형문화유산 속성에 비추어 분석하고 핵심적인 가치를 찾아보았다. 특정 지역을 관통하며 흐르는 강은 친환경적 개발의 대상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삶과 문화가 가치 있게 조사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강 문화는 고유의 생태계와 통시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다양하게 반영되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강 문화라고 해서 강과 바다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합수 지점과 바닷물의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 구간의 사례를 통해서 확인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중요한 자원으로 바라보고,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자연과의 상호조화를 이루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지속해온 사회문화적 속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It is necessary to change the perception of river culture. What are some approaches to understanding river culture?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various development projects and river culture? Can the data surveyed on people living near the river enable a multi-faceted approach to time, space, and themes related to the river? This study analyzed the relationship between rivers and humans and their influence on life from the perspective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Based on interviews with people living near the river, the idea of remembering and recognizing the river was analyzed in the light of the attributes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nd its core values were searched. Rivers flowing through a specific area should be investigated and documented in value, as well as eco-friendly development, and the life and culture of the area. This is because river culture can be understood in the process of variously reflecting human behavior with its own ecosystem. In addition, it was confirmed through the case of the Tidal River section that is affected by seawater that the river culture should not be divided into a dichotomy between the river and the sea. Academic research that can contribute to realizing a rich and prosperous culture should be conducted, seeing it as an important value resource that contains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region. In other words, research is needed to pursue mutual harmony with nature and pay attention to the socio-cultural attributes that have been shared and sustained amon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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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석기시대의 기후 변동과 석기 조성의 변화

저자 : 이기성 ( Yi Kisu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4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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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문화 변동을 설명하는데 있어 기후 변화는 큰 기제로 인식되어 왔다. 구석기시대의 종말과 신석기시대 시작까지의 공백기, 동남해안과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문화 등장의 시간적 차이, 신석기시대 중기에 확인되는 유적입지의 변화와 농경의 확산, 신석기시대 후만기의 유적의 해체 등, 신석기시대 문화의 시간적인 흐름에 있어 중요한 획기로 여겨지는 것들은 직간접적으로 기후변화와 연동되어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문화 변동 중, 가장 큰 획기로 이야기되는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의 내륙 지역으로의 유적 입지 변화와 그에 따른 농경의 수용 및 확산이며, 농경의 수용 및 확산의 증거를 석기의 조성변화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검토에서는 기후 변동과 농경의 수용 그리고 석기 조성의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찾기는 어렵다. 농경의 수용 등은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다양한 적응전략의 산물일 수 있으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신석기시대 석기의 성격상, 농경 수용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이야기되는 타제석부의 등장을 반드시 농경의 증거만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물론 신석기시대 기후 변동이 당시의 사회, 생업경제 등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 인과관계에 대한 접근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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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 미술에 호명된 고구려 고분벽화 -해방 이후-1970년대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저자 : 송희경 ( Song Heekyu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3-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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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는 한반도의 국혼이 담긴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강력한 국가의 아름다운 묘장 미술로 인식되어 왔다. 한국미술 통사에 수록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살펴보면, 해방 직후에는 일본 고대 문화에 영향을 준 민족 미술로, 1960-70년대에는 우리 그림의 시작점이자 동아시아 고대 회화사의 연결고리로 기술됐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양화 창작 분야에서 민족성 확립과 현대성 추구를 위한 창작의 해법으로 활용됐다. 특히 이응노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조형성을 채색화의 대안이자 추상의 양식적 근원으로 보았다. 또한 1970년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방식, 특히 안료의 재질을 분석하여 동양화 채색에 응용하는 방법론이 발표됐다. 수묵화에 경도된 창작 경향을 극복하고 채색화의 우수성을 표명하여 동양화의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가 연구된 것이다. 이는 현대 미술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동양화단이 여타 장르와의 차별화를 표명하고자 전통을 소환하는 습속을 알려준다. 이렇듯 고구려 고분벽화는 민족성 담론에 부합하는 범본으로, 한국미술사 서술의 시작으로, 동양화의 현대성을 이룩하기 위한 창작의 해법으로 적극 호명됐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간직한 미술사적 의의와 풍부한 조형성을 입증할 수 있는 현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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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등재된 경기도 자기소(磁器所)의 입지 특징과 등재 기준

저자 : 박정민 ( Park Jungmi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5-1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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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世宗實錄』 「地理志」를 기준으로 磁器所가 등재된 경기도 郡縣의 입지 특징을 파악하여 경기도 자기소의 등재 기준을 추론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국에 걸쳐 139곳의 자기소를 마련했으나, 전국 모든 군현에 자기소가 등재되지는 않았다. 어떤 목적과 기준에 의해 자기소를 등재한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의 전국 자기소 등재기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道 단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정 등재 기준은 전국에 걸쳐 적용했겠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등재 기준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도에는 廣州牧 등 10개 군현에 총 14개의 자기소가 등재되었다. 경기도 자기소는 대부분 경기도의 동쪽 절반에 해당하는 山地 군현에 자리한다. 이 지역은 대부분 숲이 많아 자기 제작이 용이하고, 조선 왕실이 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정부는 강무장 인근 주민들의 피해와 반발을 줄이기 위해 강무 때 필요한 물자를 해당 지방에 미리 준비했다. 다수의 강무 인원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할 다량의 그릇 역시 반드시 사전에 갖추어야 할 물품이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강무장으로 사용한 군현에 자기소를 등재해서 필요한 그릇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경기도와 왕실간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이자 경기도 자기소 등재 기준에 풍부한 땔감과 왕실의 중요행사 준비라는 요소가 반영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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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시대 추고경차관 제도의 운영

저자 : 허문행 ( Heo Moonhae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9-13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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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추고경차관推考敬差官 제도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에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앙에서 경차관敬差官으로 불리는 관원이 파견되었다. 경차관은 국가의 재정, 군사,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는데, 추고경차관은 지방에서 발생한 강상범죄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특별수사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추고경차관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5세기 중반으로 19세기까지 약 250건의 활동사례가 확인된다. 추고경차관은 표류자의 수색, 도적의 체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주로 강상범죄綱常犯罪의 조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강상범죄는 왕실王室 혹은 친족親族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가리킨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은 국가와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리학性理學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강상사건은 통치이념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강상사건을 더욱 엄격하게 다스리는 한편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추고경차관을 파견하였다.
추고경차관은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서 사건의 정황을 조사하고 연관된 사람들을 직접 심문했으며 죄인에게 최후 진술을 받아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추고경차관의 파견이 증가하면서 활동에 필요한 규정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추고경차관에게 발급된 「추고경차관 재거사목推考敬差官齎去事目」에는 임무와 권한이 기록되어 있다.
추고경차관 제도를 통해 조선시대 국가의 지방 강상범죄에 대한 인식,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 경차관의 임무와 권한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경차관의 성격을 밝히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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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직공원 조성과 사직단을 둘러싼 '개발'과 '문화재보호' 담론의 대립 -일제시기부터 1960년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수자 ( Kim Sooja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7-17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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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및 사직공원은 해방 이후에도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중 하나이다. 일제시기 사직단의 훼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직단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 외에도 사단과 직단, 두 단만 남기고 나머지 시설물들을 철거, 원형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만든 것, 그리고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신성시되었던 제의공간을 위락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사직단의 원형은 일제가 패망되고, 해방된 이후에도 6.25 전쟁 등 시대 상황의 급변 등으로 방치된 채 복원되지 못하였다. 특히 1960년대는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에 밀려 사직단의 중심 요소들이 더욱 축소되거나 변형되었다. 사직정문은 도로건설계획에 의거, 보행자 및 운전자들의 운행을 위해 이전되면서 사직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직단 복원 관련 논의들은 현재뿐 아니라 해방 이후 1960년대의 '개발'과 '문화재 보호' 담론의 대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기 변형된 공간들의 복원 및 정체성 확립을 둘러싼 담론의 고찰은 탈식민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인식을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직공원 및 사직단의 정체성 회복을 둘러싼 논의들은 큰 틀에서 '민족' 담론과 '개발' 담론의 대립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왜곡, 변형된 상징공간의 정체성 회복 과정의 지난함을 살펴보는 데도 유용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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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Current Trends and Prospects for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in Russia

저자 : Mozol T. , Pokholkova E.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187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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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국불교사 연구를 일단락 짓다 -정병삼, 『한국 불교사』 (푸른역사, 2020)-

저자 : 박광연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1-197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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