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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기록과 ‘소설들’을 포개어 서울을 다시 읽기 (송은영, 2018, 『서울 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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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소설들’을 포개어 서울을 다시 읽기 (송은영, 2018, 『서울 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 푸른역사)

소준철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09월
  • : 259-271(13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3.7


목차

1. 들어가면서
2. 표지와 구성에 대하여
3. 네 가지 질문: 손정목, 연속성, 중심부-주변부라는 구조, ‘중산층’
4.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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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KEPA)

I410-ECN-0102-2021-300-000237866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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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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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식민지기 여성의 몸에 대한 우생학적 시선의 중층성

저자 : 이영아 ( Lee Young-ah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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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우생학적 시선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생존경쟁 속에서 '적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진화, 우리 국민의 개량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 우등한 자녀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계몽 담론이 유행했다. 이때 우등한 국민 생산을 위해 여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근대적 교육을 통해 단련되고 규율된, 성숙하고 건강한 몸이었다. 1920~3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산아제한론'이 유행하면서 조선에도 여성들의 임신조절, 피임, 낙태 등에 대한 담론이 대두된 것에서 우생학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산아제한론을 통해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권이 넓어질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우생협회의 발족과 잡지 『우생』의 발간으로 우생학에 대한 본격적인 전파와 홍보가 이루어지면서 우생학은 실제 학문, 과학으로서 접근되기 시작했는데, 의학적 사실에 입각한 우생학 지식이 소개되면서 여성의 몸에 과도하게 부여되어왔던 우생학적 책임의 짐이 덜어지게 되었다. 우생 담론은 우등한 국민 생산이라는 명분하에 여성들에게 교육에의 기회와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임신과 출산, 유전에 관한 가부장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는 논리였다는 점에서 '해방'적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이 재생산을 전제로 한 '해방'이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성격 역시 지니고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discourse on eugenics imported into Joseon in the 1900s and 1940s viewed women's bodies. First, the Enlightenment intellectuals from the 1900s to the 1910s argued that our society needed to evolve, and our people need to be improved to become 'fit' for the struggle for survival in the age of imperialism. To do this, women had to produce superior children. Women had to build a disciplined, mature, and healthy body through modern education. In the 1920s, due to the prevalence of 'birth control theory', women demanded permission to control pregnancy, contraception, and abortion. However, birth control was used as a method of negative eugenics that suppressed the birth of unqualified persons. From the mid-1930s,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Eugenics Association and the publication of the magazine, Woosaeng (the name of which means 'eugenic' in Korean), the spread and publicity of eugenics began in earnest, and eugenics began to be treated as a real science and medicine. With the introduction of eugenics knowledge based on medical facts, many myths and misconceptions about women's pregnancy, childbirth, and heredity have been clarified. As such, through eugenics discourse, women were given citizenship, the right to sexual self-determination, and were freed from some gender-biased prejudices regarding pregnancy, childbirth, and heredity. However, it was also a discourse that oppressed women in that it was 'liberation' on the premise of re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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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적합한 몸의 선별과 집단 사이의 위계화 ― 1950~60년대 한미 해외입양 과정에서의 혼혈아의 몸에 대한 지식 생산과 활용을 중심으로

저자 : 민병웅 ( Min Byeong Wo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8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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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는 한국인 여성과 미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이 증가했다. 기지촌 성노동자의 자녀라는 사실과 이질적인 외모로 인해 혼혈아들은 주변인들로부터 멸시를 경험했다. 한국 정부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통합에 혼혈아들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해외입양을 통해 이들에게 들어가는 사회복지비용을 줄이고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양 과정은 적합한 입양아를 선별하는 일을 동반했다. 혼혈아들의 인종 정보, 신체적 특징, 건강상태 등은 혼혈아들의 입양을 결정하는 판단 근거였다. 이 글은 1950~60년대 초중반 한미 해외입양 절차 과정에서 혼혈아의 몸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한국과 미국의 해외입양 관계자들과 과학계, 의학계 사이의 협력에 주목한다. 기존 연구들은 해외입양이 한국 전쟁 이후 혼혈아들을 한국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한국 사회에 살 가치가 있는 집단을 결정하는 우생학적 성격이 있음을 구조적, 사회 이념적, 제도적 측면에서 강조해왔다. 본 연구는 기존 해외입양 연구들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혼혈아의 몸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해외입양과 학계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해외입양 관계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에 비해 더 입양에 적합한 몸으로 판단되었다고 주장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duction and use of scientific and medical knowledge about Korean 'mixed-blood' children for transnational adoption in the 1950~1960s. It analyzes how adoption agencies in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sought advice from racial scientists in order to judge the adoptability of 'mixed-blood' children in South Korea. Adoption agencies had facilities for orphans and 'mixed-blood' children such as orphanages and hospitals. These agencies provided a resource for producing knowledge of 'mixedblood' bodies and information for scientists. On the one hand, racial scientists utilized the transnational adoption procedure to build a database on the bodies of 'mixed-blood' children. Across the Pacific, American scientists mobilized their knowledge of 'mixed-blood' bodies both to advice adoption agencies and as a strategic tool to promote their political agenda. After World War Ⅱ, American racial scientists underlined anti-racism ideology, renouncing a hypothesis of a hierarchy among different races. By promoting transracial adoption, American scientists hoped to show their new political stance. In conclusion, this paper reveals the blurring of boundaries of disability and mixed-blood categories by analyzing how Korean officials and American scientists produced knowledge about 'mixedblood' children for transnational adoption. In Korea, 'mixed-blood' children were categorized as the 'socially handicapped', which was sub-category of disability. At the same time, American scientists who collaborated with transracial adoption agencies insisted 'mixedblood' children would be more suitable for adoption than disabled children. In other words, both Korean and American actors thought the 'mixed-blood' children were more valuable than the disabled in transnational adoption. In that, they shared the same principle in producing and using their scientific and medical knowledge for 'mixed-blood' children: adop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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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70~1990년대 한국 유전자 산전진단기술 도입 ― 성 감별에서 기형아 공포로

저자 : 최은경 ( Choi Eun K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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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유전자 산전진단기술의 1970년대~1990년대 도입 및 정착 과정을 다룬다. 유전자 산전진단기술 도입을 위한 의학자, 특히 소아과 및 산부인과 의사들의 시도와 담론, 인구보건학자들의 담론을 중심으로 다루되, 그 사회적 반향도 아울러 고찰한다. 1960년대 세포유전학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국내에서도 산전 성 감별의 한 방법으로 양수천자가 시도되었으나 안전성 측면으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1970년대 중반 주갑순, 양영호 등 해외에서 산전 검사를 수련한 이들을 중심으로 산전진단기술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산전진단기술은 성 감별 목적으로 널리 활용되었으며 초음파 기기가 다량 보급되면서 산전진단술은 더욱 각광받았다. 의학자들은 성 감별 목적으로 산전진단기술이 활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한편, 다운증후군을 예로 한 지적장애 또한 산전진단술을 통해 미리 출산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과거에는 지적장애의 유전성이 관건이었다면, 산전 진단술 도입 이후에는 다운증후군을 출산할 수 있는 고위험 정상인 여성의 태아를 미리 검사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인구보건학자들은 산전진단기술을 통한 산전 성 감별은 성비 불균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지만 기형아를 낳을 수 있는 일부 고위험 여성들의 산전 검사는 환영하였다. 1990년대 민주화된 사회를 배경으로 제기된 핵 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도 기형아에 대한 대중적 공포가 자리잡는 데에 기여하였다. 1970년대~1990년대 산전진단기술이 크게 각광받고 보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성 감별 수요, 일반인의 기형아 출산 위험 각인을 위한 의학자들의 노력, 기형아에 대한 공포 등이 작용하였다.


This study explores the introduction of genetic prenatal diagnostic technology from the 1970s to the 1990s. It focuses on the ideas and practices of doctors, especially pediatricians and gynecologists, and the opinions of population health experts regarding the technology. It also considers the technology's social repercussions. With the emergence of cytogenetics in the 1960s, several South Korean doctors attempted amniocentesis for sex determination before childbirth, despite safety problems. From the mid-1970s a few gynecologists who trained in prenatal tests abroad, including Ju Gap-soon and Yang Young-ho, led the adoption of prenatal diagnostic technology in South Korea. Early on the technology was adopted for sex determination, a use that became more popular with the growing availability of ultrasound devices. While promoting the technology for sex determination purposes, doctors also argued that Intellectual Disability, such as Down's syndrome, could be prevented through prenatal diagnosis. It was important to avoid inheritance of intellectual disabilities from some disabled women in the past; however, after the introduction of prenatal diagnosis, all women at risk of bearing congenital disabilities could get tested. Population health experts worried that sex determination could cause an imbalance in sex ratios; however, they also welcomed prenatal tests to prevent birth defects.
Meanwhile, with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in the 1990's, concerns about nuclear power stations and environmental pollution began to be widely shared. This attracted attentions about congenital disabilities. From the 1970s to the 1990s, prenatal diagnosis technology was adopted widely in South Korea due to the demand for sex determination and the efforts of doctors and scientists to inform lay people about the risk of birth defects. Moreover, public fear of congenital disabilities also encouraged their adap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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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제주도 초알일 별급과 상속문화의 지역적 특성

저자 : 이옥부 ( Lee Okb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4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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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후기 제주도의 초알일 별급의 관행에 주목하여 제주도 상속문화의 특징과 그 의미를 밝히고,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 배경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초알일 별급은 혼인으로 며느리가 되는 여성에게 재산을 직접 상속하는 관행으로, 제주도를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상속의 유형이다. '왜 제주도에 이 같은 상속의 관행이 나타나는가'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데서 출발한다.
조선후기 제주도에는 자녀들이 결혼할 때 재산 일부를 별급하는 관행이 있었다. 성혼 별급과 초알일 별급이 그것이다. 모두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상속 대상이 다르다. 성혼 별급은 아들과 딸, 사위가 받는 것이고, 초알일 별급은 며느리가 받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자녀가 결혼할 때 재산을 상속하여 축하를 표시하는 일은 육지에서도 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상속이 균분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균분에 며느리가 포함되는 것은 제주도 상속문화에만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초알일 별급은 상속 대상을 며느리로 한정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재산권의 보호와 상속 관행의 유지에 더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로 갈수록 성혼 별급의 비율은 감소한 반면 초알일 별급의 비율이 높아진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와 함께 초알일 별급이 19세기까지 행해진 사실은 제주도의 상속문화에 원칙을 달리하는 두 개의 상속 관행이 공존한 사실은 보여준다. 초알일 별급의 배경이 되는 균분의 원칙과 유교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18세기 중반부터 일반상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차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딸의 재산권은 약화되는데 같은 여성으로 며느리의 재산권은 보장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주도 상속문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초알일 별급은 며느리에게 재산을 상속하던 조선 전기의 상속 관행을 계승한 측면과 몽골 상속문화의 유산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제주인과 몽골인 사이의 광범한 결혼과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이 조선전기에 대거 등장한 사실 등을 배경으로 이 연구는 제주도 상속문화, 특히 초알일 별급에도 몽골문화의 유산 일부가 작동했다고 보고 그 구체적인 역사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This paper aims to clarify and explain historically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Jeju's inheritance culture by analyzing the practice of Choalil Byulgeub (初謁日 別給) on the Isla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Choalil Byeolbyeol is the practice by which property is directly passed down to daughters-in-law. This type of inheritance is rarely seen in regions other than Jeju Island. The study begins by trying to establish why this inheritance practice appeared.
As is well known, it is common on the mainland to celebrate when a child marries by gifting them assets. This type of inheritance is called Byulgeub. However, such Byulgeub can be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equalized inheritance, and the principle by which daughters-in-law in are included in the distribution of inheritance only appears in the inheritance culture of Jeju Island. Choalil Byulgeub limited the inheritance to daughters-in-law, which seems to have been advantageous for protecting property rights and maintaining inheritance practices.
At the same time, the fact that Choalil Byulgeub was carried out until the 19th century shows that two inheritance practices following different principles coexisted in the inheritance culture of Jeju Island. These were the principle of equality and the principle of difference. Furthermore, this shows that the whilst women's property rights as daughters were weakened, the property rights of women as daughters-in-law were strengthened. This can be considered another characteristic of Jeju Island's inheritanc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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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反형평사 소요와 식민지 대중 정치(1923~1930)

저자 : 기유정 ( Ki You J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8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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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23년 진주 형평사 창립과 함께 1930년대 초까지 주로 남한 지역 내 농촌 사회에서 지속되었던 일반 주민들과 형평사원들 간의 충돌들 중 개별 사례를 제외한 집단 충돌과 이에 따른 소요 사례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본 연구는 반형평사 소요에 대한 기존 연구의 접근이 형평사 운동을 중심으로 그것의 의미를 반형평사 논리 해석의 중심축으로 활용함으로써 반형평사 소요 자체가 독자적인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의미화되지 못했던 연구 현황의 저변에 식민지 대중과 이들의 집단 행위에 대한 근대주의적 인식틀과 그 정치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고 비판 근대주의적 관점 위에서 반형평사 소요의 동학을 새롭게 개념화해보고자 시도했다.


This article studies the conflict between the Hyeongpyeongsa movement and local residents that occurred between 1923 and 1930. In this study, I start from a critical view of existing research on the anti-Hyeongpyeongsa riots and protests. I suggest that the approach of previous studies is a result of their dependence on a modernist understanding of colonial period collective behavior. So, in this article I study an anti-Hyeongpyeongsa riot according to an antimodernism approach to mass politics which treats collective behavior as an existential struggle toward self-preservation. To this end, there are four topics to the article's re-examination of the anti-Hyeongpyeongsa riot: its structure and form of existence, its expression, how it exerted power, and the relationship it had with its op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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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8민중항쟁에서 시민군의 조직과 활동 ― 시민군의 무장이 가능한 이유 및 역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저자 : 최정기 ( Choi Junggi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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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루어졌다. 5·18 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둘째, 일부 시민들의 무장과 시민군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즉자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정치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것인가?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당시의 정세 및 현장에서의 분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980년 당시 한국 사회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과 폭력 친화적인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또 10·26 이후 만들어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군의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흐름이 만들어졌고, 군의 집단 발포에 총을 든 저항도 가능해진 것이다.
둘째, 무장 시민들의 무장 투쟁 및 시민군이라는 호칭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태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하며, 그렇게 볼 경우 시민군은 자연발생적인 저항에서 무장조직의 결성으로, 항쟁의 주변에서 항쟁지도부로, 즉자적인 분노에서 목적을 가진 저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목적지를 상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시민군의 변화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find answers to the following two questions. First, How was it possible for citizens to organize an armed resistance during the May 18 People's Uprising? Second, was the civilian army and resistance of some citizens with guns simple immediate action or has political and sociological meaning?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reason why it was possible for citizens to resist with arms during the May 18 People's Uprising was a combination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the situation at that time, and anger at the scene. In 1980, Korean society had a strong desire for Western democracy and a violence-friendly culture. In addition, after the expectations for democratization that emerged after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hee on October 26 were thwarted, the citizens' sense of relative deprivation was great. In this situation, a flow of resistance to the inhumane violence of the military was created, and armed resistance to the military's use of deadly force became possible.
Seco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armed struggle and the term civilian army should be identified as dynamic, and in that case, the civilian army was changing from a spontaneous resistance to the formation of armed organizations, from the periphery of the uprising to the leadership of the uprising, from self-imposed anger to purposeful resistance. The destination of this change cannot be assumed. However, as can be seen from that direction, the changes in the civilian army at that time were part of the process of creating a new form of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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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국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으로서의 삶 ― 관계지향적 개인화를 중심으로

저자 : 허설화 ( Xu Xue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6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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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제도나 구조적 상황의 부산물로 바라보는 기존의 연구시각에서 벗어나, 신세대 농민공의 '개인'으로서의 삶을 규명할 수 있는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중국사회의 '관계지향적 개인화'와 맞물려 낳은 결과로 바라본다. 중국 농민공의 개인화 실천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탈전통화 시기'와 2000년대 초·중반부터 현재까지의 '도시민화 시기'의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950-70년대의 농민공은 집단경제조직과 가족공동체에 의해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이 결여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90년대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을 계기로 농민공은 탈집단화하여 삶의 형태의 '개인화'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 농민공은 비록 '개인' 형태로 도시에 진출했지만 관계적 네트워크 차원에서는 여전히 전통 농촌공동체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 네트워크는 2000년대 초·중반 '도시민화 시기'에 진입하면서 그 기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도시에서 농민공의 신분 지위와 취업 여건이 호전됨에 따라, 농민공은 전통 가치와 관계적 네트워크에서 점차 분리되어 나와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발현하여 '자신의 삶(a life of one's own)'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도시민화 시기' 농민공은 짧은 기간 내에 압축적인 방식으로 도시의 근대화를 체감하고 제도적, 사회적 안전장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다양한 생애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여 위험인식이 높다. 따라서 이 시기 농민공은 주체성 인식이 강화됨과 동시에 불안감도 증폭되고 개인은 유기적 연대의 (재)구축을 통해 안정감을 확보하려는 공동체 지향성을 발현한다. 신세대 농민공들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주체성과 공동체성 사이에는 필수적인 긴장이 항상 유지되고, 양자의 상호 작용은 신세대 농민공의 삶 전반을 관통한다. 즉,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의 삶은 일견 비자발적, 비합리적인 무질서한 움직임으로 보이지만 이들 행위 배후에는 개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현실적인 삶의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다.


This study seeks to offer an alternative approach to understanding the lives of Chinese migrant workers. It deviates from existing research by employing a microscopic perspective and treating the new-generation migrant workers as individuals rather than as the by-product of institutional or structural situations.
In this study, the marginal lives of the new gener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are approached as a result of interlocking with the 'relationship-oriented individualization' of Chinese society. The individualiz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can be divided into two stages: the 'detraditionalization period' from the 1950s to the early 2000s and the 'urbanization period' from the early and mid-2000s to the present. Specifically, rural migrant workers from the 1950s to the 1970s initially lacked 'individual' subjectivity due to collective economic organization and family community. However, from the 1980s to the 1990s, rural migrant workers separated from collectivization and reached the 'individualization' of their life forms. It is noteworthy that although rural migrant workers entered the city as 'individuals', they were still closely connected with the traditional community network. This relationship network began to weaken as rural migrant workers entered the 'urbanization period' in the early and mid-2000s. During this time, rural migrant workers have been able to show their subjectivity as 'individuals' and pursue their own lives. On the other hand, under an imperfect system and social stability mechanism, they have also been exposed to various risks. In other words, the rural migrant workers' awareness of subjectivity has strengthened, while their anxiety has risen. Therefore, individuals adopt the community orientation to secure stability through (re)construction of organic solidarity. There is always an essential tension between subjectivity and community-ness in the consciousness of the new gener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and interaction with each other runs throughout their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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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음악사회학과 음악현상학 ― 후설과 슈츠를 중심으로

저자 : 김광기 ( Kim Kwang-k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29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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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음악에 대한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음악 현상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던 두 사상가들, 슈츠(Alfred Schutz)와 후설(Edmund Husserl)의 사상을 추적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두 학자의 분석에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는 “내적 시간”을 준거로 해 그들이 어떻게 음악 현상의 본질에 접근했는지를 살피려 한다. 이를 통해 음악현상학과 음악사회학의 발전에 있어 후설의 공과 한계를 분명히 하고, 명실상부하게 음악현상학과 음악사회학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슈츠의 사상을 면밀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슈츠의 “유사 동시성”개념을 통해 음악현상에서 그가 포착한 사회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것은 음악의 다단계적원칙, 비동일성, 즉흥성의 특징과 함께 논의될 것이다. 슈츠에 따르면 악보의 음표와 각종 음악 기호들이 결코 음악을 대변할 수는 없다.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이들은 악보가 갖고 있는 본래적인 애매모호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특정 음악이 공연되는 동안 그 장소와 그 시간에만 해당하는 그런 음악을 함께 만들어간다. 악보의 허술함을 메워주는 것은 바로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슈츠의 음악사회학이 그리고 그것에 모태가 된 노에시스-노에마 구조를 강조한 후설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race and compare the ideas of Alfred Schutz and Edmund Husserl, two thinkers who explored the phenomenon of music and sought to discover its essence. Although Husserl did not deal with music per se, his analysis of timeconsciousness and the explanation of notes (or sounds) and melodies discussed therein strongly influenced on Schutz and the later phenomenology of music. Schutz elaborated and developed the phenomenology of music based on Husserl's analysis of time consciousness, adding a heavy emphasis on sociality. In the process, he outlined the essentials of sociology of music and laid the groundwork for its development. This paper scrutinizes how both Schutz and Husserl approached the essence of the musical phenomenon in terms of “inner time” and made this the key framework for their analyses. This will allow us to closely examine Schutz's ideas and grasp the limitations of Husserl's work for the development of phenomenology and sociology of music. The notes and various musical symbols in a score can never represent the music itself. Based on the inherent ambiguity and openness of musical scores, those who perform and listen to music together create music that is appropriate specifically to the place and time that a particular piece of music is being performed and appreciated, i.e., in situ. It is the members who are participating in the performance who fill in for the limitations or ambiguity of the score. This is the perspective foundational to both Shutz's sociology of music and the Husserlian noetic-noematic (noesis-noema) structure that inspire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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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송석하가 쓴 최초의 논문, 조선화폐사

저자 : 전경수 ( Chun Kyung-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10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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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는 민속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논문은 "경주 읍지"에 관한 내용으로서 1926년 11월 8일 동아일보에 게재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원고에서 그러한 사실보다 앞서는 송석하의 논고를 소개하려고 한다. 1922년 부산상업학교의 동창회지에 소개된 송석하의 글은 "조선화폐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현재가지 이 분야의 저서나 논고들은 송석하의 "조선화폐사"와 관련된 글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송석하의 글이 지방의 고등학교 동창회지에 실렸다는 소재불리성과 관련된 것 같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송석하는 동경상과대학으로 진학하였다. 울산지역의 대지주이자 사업가였던 그의 부친의 희망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부친의 희망은 장남이었던 송석하가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송석하는 동경상과대학을 중퇴하였고, 학업을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사호가 없었다. 이것이 해방후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할 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송석하 비원의 국립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직은 성립할 수 없었다.
조선화폐사에 관한 송석하의 글은 이 분야 연구의 선구적인 업적으로서 인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까지는 전혀 송석하의 글이 언급되고 있지 못하다. 송석하는 그의 짧은 글 속에서 조선의 우편사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국화폐연구사와 한국우표연구사에서 송석하의 이 소문이 선구적인 업적으로 언급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This paper aims to identify the first article published by Sohng Suk-ha, a well-known Korean folklorist. It had been thought Sohng's first article was 'Kyungju Town Chronicle' published on Nov. 3, 1926 in the Dong-A Newspaper. However, this paper author uncovers an article by Sohng on the history of Korean currency published in the Alumni Journal of Pusan Commercial School in 1922 whilst Sohng was a student at Tokyo Commercial College. It appears Sohng had been reading old Korean books and collecting information about old Korean currency. This may be evidence that Sohng, rather than wanted to become a banker and/or businessman after graduation, had academic ambitions. Sohng was the first son of a major landowner and businessman, entered high school to learn about commerce and business in Pusan and studied these subjects further at Tokyo Commercial College, probably strongly supported by his father, who hoped his son would follow in his footsteps as a businessperson. There seems to have been to be a serious conflict later between father and son, and Sohng eventually became a folklorist rather than following his father's wishes.
At present there are no books or articles on the history of Korean currency that mention or reference Sohng's 1922 article. It has so far been neglected in that field. The author hopes Sohng's article will be recognized as the first trial in the field of historical Korean currency. In his short article he also discussed the history of the postage stamp in Korea and should be considered a pioneer in this field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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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의 장기 부르주아 혁명 한 세기 ― 불균등 결합발전으로 본 '3·1혁명'에서 '촛불혁명'까지

저자 : 정일준 ( Chung Il J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4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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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19년 '3·1혁명'에서 2016년~2017년 '촛불혁명'까지 100년에 걸친 봉기의 역사를 '100년의 장기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한국은 식민지, 전쟁,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포함한 대전환을 100년 만에 이루었다. 한국은 '따라잡기 발전' 또는 '압축 현대성'을 성취했다. 아직 분단체제가 건재하며 '북핵위기'와 빈부격차 확대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가 총체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이자 민주국가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동맹을 맺고 추진해온 국가형성과 변형과정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발전을 최신의 자본주의 발전이론과 부르주아 혁명이론 재해석에 입각해 재조명할 좋은 시점이다. 이는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서 한국 근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미 자본주의 선진국이다. 그런데 한국의 불균등 결합발전경로는 서구 선진국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도달한 사회의 내부구성도 상이하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제국주의와 결합한 선진국들이라면, 한국은 식민지에서 이탈한 경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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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아시아 발전전략과 경제민족주의의 역사적 변동 ― 분기와 수렴의 지역적 동학

저자 : 박상현 ( Park Sa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7-8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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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유럽의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던 시기부터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전략과 경제민족주의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본다. 특히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가들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수출주도 발전전략은 상당 부분 경제민족주의에 근거했는데, 그런 경제민족주의는 19세기로 소급되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역사적 진화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종속적 통합과 식민화라는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강제된 수출경제'는 지역 내에서 강한 민족주의적 반작용을 낳았다. 2차 세계전쟁 이후 냉전질서의 형성은 '탈식민화'와 새로운 민족형성이라는 과제와 결합되는데, 그 과정에서 다수의 국가에서 '자강'을 추구하는 경제민족주의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반면 일본을 필두로 안보를 미국에 의존했던 나라들은 경제민족주의를 미국시장을 목표로 하는 수출주도 공업화와 결합시켰다. 1990년대 냉전질서의 해체 속에서 중국을 비롯한 후발 수출국가들이 경제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세계화'를 수용하면서 수출전략으로의 수렴이 발생했다. 특히 2000년대에 수출을 통해 고도성장을 누린 중국에서는 후기 제국시대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민족주의가 출현했는데, 2008~09년 금융위기 이후 이 같은 경제민족주의가 지역적·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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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거리의 치안권력과 '선도'의 통치기술 ― 1960년대 청소년보호정책과 부랑아·우범소년

저자 : 유진 ( Yu Ji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5-12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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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60년대 청소년보호정책의 맥락에서 나타난 우범소년 선도 담론과 통치기술을 통해 부랑아에 대한 치안권력의 작동방식을 분석하였다. 1960년대에는 성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청소년의 특수성이 강조되고 이들에 대한 보호와 선도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수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소년범죄와 청소년기에 대한 전문지식 담론의 결합은 청소년을 국가와 민간이 연합하여 선도해야 할 통치대상으로 소환해냈다. 1964년 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의 설립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청소년보호정책은 치안국이 속한 내무부가 주도하였고 거리의 '문제소년'에 대한 가두보도와 우범관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대 청소년보호정책은 전사회적인 아동·청소년의 복지증진과 선도를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선별적 선도사업 대상으로 실체화된 것은 부랑아와 가두직업소년과 같은 도시하층민 청소년들이었다. 이 시기에 부랑아와 전재고아의 연결고리는 점차 약해지고 가출청소년으로서의 부랑아 표상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학교와 공장이라는 조직화된 규율장치의 관리에서 벗어나 도시공간을 점유한 가두직업소년은 도시치안을 담당하는 공권력의 시선에 직접 노출되는 존재로서 우범성과 결부되었다. 이들을 통칭하는 '우범부랑소년'은 자활하는 모범직업소년, 학교와 가정의 규율에 순응하는 모범학생과 구별되는 특수범주인 동시에, 본원적으로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청소년기의 자연적 특성을 응축적으로 체현한 대표범주이기도 하였다. 1960년대의 청소년보호정책은 특정 집단을 선도되어야 할 대상으로 호명함으로써, 범죄의 씨앗을 품은 타락한 '습성'을 지닌 존재로 낙인찍는 동시에 그러한 습성을 제거하여 갱생과 자활의 길로 인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격려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를 관리하는 치안권력이 수행했던 선도의 통치기술은 부랑아·가두직업소년을 우범자로 관리하면서 도시하층민 청소년의 노동양식과 생존방식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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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가와 엘리트 변호사 ― 서울제일변호사회에 의한 내부 지위 경쟁과 사회적 폐쇄(1960~80)

저자 : 박천웅 ( Park Chunwo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6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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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엘리트 지위와 변호사 자격의 정당성을 기준으로 국가사법부에 참여할 수 있었던 변호사와 그렇지 못했던 변호사들을 구분했던 서울제일변호사회의 집합적 행위를 분석한다. 이 연구는 전문직 협회의 등장, 지위 경쟁, 사회적 폐쇄, 국가 변호사 교환 관계 등과 관련된 이론적 자원의 검토와 관보 및 신문 자료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변호사 사회 내부의 상이한 논리 구조와 4·19혁명과 5·16쿠데타 등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이 서울제일변호사회의 창설이라는 변호사 사회의 분열로 귀결되었는지를 보인다. 그리고 서울제일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사법부 고위 법관을 배출하고 퇴직한 고위 법관들이 제일변호사회로 돌아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1960~70년대 한국 변호사 사회가 변호사와 비변호사를 구분하는 하나의 경계를 뚜렷이 하면서도 또 그 속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구별되었던 점이 이 분석을 통해 드러난다. 이 연구는 서울제일변호사회의 분리란 변호사 사회 내부에서 법원 및 검찰 고위직과 동질적인 엘리트와 그렇지 못한 비엘리트의 경계를 긋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논문은 내부 지위 경쟁이 사회적 폐쇄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과 식민지 시기 통용되었던 시험의 위신이 해방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었다는 역사적·경험적 함의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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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냉전기 한국의 베트남전쟁 '읽기'와 '상상지리' ― 1970년대~1980년대를 중심으로

저자 : 윤충로 ( Yoon Chung-r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7-20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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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냉전기, 특히 1970년대~1980년대를 중심으로 베트남전쟁(혁명)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각과 수용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첫째, 한국의 베트남 근현대사 '겹쳐읽기' 방식, 둘째, 냉전의 상상지리·사상지리를 둘러싼 길항·갈등·충돌의 역학, 셋째, '사례에 의한 동원'을 통한 베트남혁명의 한국적 모방·재현의 방식에 주목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베트남전쟁(혁명)에 대해 한국의 국가·사회가 만들어온 시차(視差)와 상상지리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냉전의식이 지배하는 '오른손잡이 사회'였다. 그러나 그 토대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베트남전쟁(혁명)에 대한 냉전적 시각에 대항해 비판적·탈냉전적 시각을 제시한 리영희, 한국에서 베트남혁명의 '재현'을 꿈꿨던 1980년대 변혁운동은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베 수교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일방적 상상지리를 관계의 역사로 바꾸는 계기였다. 현재 한국의 시민운동은 베트남전쟁을 냉전이나 혁명이 아닌 인권·평화의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이는 '냉전의 그늘'을 해체하며 나가는 '불안정한 모색'이며, 한국과 베트남 양자가 함께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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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90년대 강남문화와 상류층의 '신성적 자기계발론' ― 강남 상류층 교회의 신념(belief) 분석

저자 : 이정연 ( Yi Jungye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9-255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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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 한국의 계층 간 차이는 경제적 자산뿐 아니라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뚜렷해졌다. 상류층의 거주지로서의 강남에서는 상류층만의 생활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강남 상류층의 주된 커뮤니티로 기능하면서 팽창한 두 교회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들 교회의 설교 텍스트 분석을 통해 강남이라는 상류층의 거주공간에서 탄생한 '신성적 자기계발론'을 밝혀낸다. 대표적인 강남의 상류층 교회로 손꼽히는 두 교회에서 형성되는 자기계발론은 자신에 대한 지적 사유와 각성, 자기실현의 실천,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이는 지나친 성공주의에 대한 경계로 특징지어진다. 상류층의 교회에서 강조되는 지적 사유와 깨달음은 종교적 신비주의와 체험주의를 몰아냄으로써 지성주의적인 생활문화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하위층의 종교에서 두드러지는 육체적 영역의 신과 자신들의 지성적 영역의 신을 구별짓는 힘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와 성찰, 자기완성적 노력, 그리고 속물적인 성공주의에 대한 경계는 상류층의 생활문화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종교적 논리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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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울 탄생기』의 이전과 이후: 서울 연구의 난관과 고민들

저자 : 송은영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3-285 (1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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