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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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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The Meaning of Sleep in the Joseon Period: A Content Analysis on Night Time Activities and Sleeps Recorded in Diaries

문현아 ( Moon Hyuna ) , 차승은 ( Cha Seung-eun ) , 은기수 ( Eun Ki-soo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03월
  • : 165-194(30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1.5


목차

1. 서론
2. 일기류에 나타난 수면의 기록과 의미의 해석
3. 조선시대 수면에 대한 해석과 의미
4. 수면에 대한 기록과 그 맥락에 대한 사회사적 독해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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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수면에 관한 연구는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아직까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연구는 『쇄미록』과 『병자일기』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일기 기록에 나타난 잠에 관한 언급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일기자료에서 수면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잠을 기록한 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였다. 특히 일기에서 잠을 기록하는 경우의 시/공간적 맥락을 비추어 볼 때 ‘잠을 잤다’는 기록이 단순히 수면의 유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숙박의 의미, 접대를 하는 의미 등도 있고, 잠을 자는 시간대인 밤, 그리고 밤 시간대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밤 시간대와 연결해서 일기 기록에 담긴 의미를 따라 불면의 상황이나 잠자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를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잠과 밤시간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 행위들을 재구성해서 수면이 발생하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암흑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일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임을 조망하였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활동 중 수면이 갖는 사회관계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 규범의 틀과 맞물려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분석을 시도했다. 이 연구는 기존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수행한 탐색적 연구이지만 수면을 둘러싼 조선시대 일상의 새로운 측면을 접근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Research on sleep in Korean society remains an understudied topic in social and cultural history. This research identifies and analyzes the meanings of sleep as expressed in Joseon period diaries with a focus of entries, accounts, and mentions in Swaemirok and Byeongja-ilgi (Diary of Byeongja Year). Using diary data, we first conceptualized and contextualized the meaning of sleep as used in these texts. Focusing particularly on temporal/spatial contexts in which sleep was recorded, we found that ‘sleep’ not only indicated the presence of unconsciously resting bodies (or somni-related activities), but also served as means of expressing hospitalities and non-sleep related nighttime activities. This study explored the social significance of these accounts and problematized how various events, incidents, and activities mattered especially in cases when expressions of sleep or sleep-related texts were recorded in relation to activities falling outside of nocturnal hours. This research thus revealed how social contexts could alter historical interpretations of human activities as a whole, while exposing Confucian norms of people living and sleeping during the Joseon period. As an exploratory study, this research provides a modest but novel approach to investigating an understudied aspect of everyday life of Joseon society.

UCI(KEPA)

I410-ECN-0102-2019-300-001432299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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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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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융희연간의 통계체계 구축과 농업통계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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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금껏 연구된 바 없는 갑오개혁기부터 보호국기까지의 정부통계에 대한 것이다. 갑오개혁 이래 '통계'는 정부의 일상적 문서행정의 일부로 규정되었으나, 고종 재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전통적 관료제의 보고체계도 여전히 작동했지만, 그런 정보들은 거의 공간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순종 즉위 이후, 일본 세력에 의해서다. 메가타 쥬타로 재정고문부의 인력과 노하우를 물려받은 탁지부가 한발 앞서 통계체계를 구축하고, 인쇄된 숫자의 작은 '쇄도'를 만들었다. 1908년부터 탁지부는 징세기구의, 농상공부는 지방행정기관의 인력을 동원해서, 경쟁적으로 조사를 하고 통계를 집계했다. 탁지부는 재정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 걸친 통계서를 다수 간행했고, 농상공부는 일본인 이민 유치를 위해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제작했다. 물론 초창기의 통계, 특히 농업통계는 매우 부정확·불완전했다. 조사원의 훈련도 없었고 현장에서 표본추출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 같지도 않다. 조사와 통계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조사·통계의 확장이 식민지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점이 큰 한계가 되었을 것이다.


This article traces the history of government statistics from the Gabo Reform (1894) to the protectorate period (1906~1910), a topic which has not yet been studied. Since the Gabo Reform, “statistics” were defined in regulations as part of the government's routine administration, but there was no significant achievement in government statistics during the Gwangmu era (1897~1907). The traditional bureaucratic reporting system still worked, but little information was published. It was from the Yunghee era (1907~ 1910) that change began. However, this change was led by the Japanese. The Ministry of Finance (Takjibu), which inherited the personnel and know-how of Megata Jūtarō's (目賀田種太郞) Bureau of Financial Advisers, established a statistical system one step ahead of other ministries and created a small “avalanche” of printed numbers at this time. Since 1908, the Ministry of Finance and the Ministry of Agriculture, Commerce and Industry (Nongsanggongbu) competitively conducted investigations and compiled statistics. The former mobilized the manpower of the tax collection organization, and the latter mobilized the manpower of local administrative agencies. The Takjibu published a number of statistical periodicals, not only for finance, but also for administration as a whole, and the Nongsanggongbu produced brochures about Joseon to attract Japanese immigrants. Of course, these early statistics, especially agricultural statistics, were very inaccurate and incomplete. The investigators were barely trained, and sampling and investigation at the survey site were unlikely to have been carried out properly. The people had little understanding of surveys and statistics, and above all, the fact that the expansion of surveys and statistics was linked to the progress of colonization would have served as a major lim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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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건당국의 신체 및 사회에 대한 무균화 기획과 질병 낙인의 지속 ― 한센병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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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한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과정과 이유로 인해 10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강고히 지속되었는가를 세균설이라는 의료지식과 이에 근거한 보건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 세균설과 이에 근거한 엄격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과 그 결과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 과정을 선행연구와 의학 보고서 및 논문, 신문자료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드러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과 낙인과 차별은 광복 이후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개발과 사용으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정부와 의료전문가들은 이들을 계속 '환자'로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회에 숨어 있는 신환자들을 색출하여 통제하기 위해 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완치된 이들의 삶을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내부와 사회 내의 균 제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이러한 보건당국의 무균화 기획과 이로 인한 질병 낙인의 지속은 코로나19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현재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where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faced by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in South Korea originated, and the causes and processes that have maintained it for nearly 100 years. It focuses on the medical knowledge of germ theory and the health policies based on it. The introduction of a strict policy of controlling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which was based on germ theory,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this caused is clarified by analyzing various sources of historical data, including previous studies, medical reports, medical papers, and newspaper materials. Both leprosy patient control policies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continued in different forms even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ism. With the development and use of effective treatments, leprosy has become a curable disease, but governments and healthcare professionals have perceived them as “patients” and created new institutions to monitor and control them. In addition, a system was developed to identify and control undetected patients in society. However,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has remained strong, as all these new systems focused only on the removal of bacteria inside the individual's body and within society, rather than considering the lives of those who were completely cured. The history of the 'germ free' project led by health authorities and the resulting persistence of stigma is expected to provide lessons for contemporary Korean society as it deals with the experience of COVI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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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신체제(1972-1979) 하 '좌익수' 전향정책의 역사정치적 성격

저자 : 김동춘 ( Kim Dong-ch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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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사상범, 수감 좌익수에 대한 전향공작은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감옥에서 징벌적 전향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특히 유신 체제에서 전향공작은 더욱 폭력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폭력과 고문까지 가하면서 좌익수들에게 전향을 압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접촉할 수 없는 특별 사동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각은 감옥 밖에서는 물론 감옥 안에서도 주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이들의 비전향 상태에 대해 느낀 '위험'은 실제 정치적 위험보다는 수백 명의 비전향수가 풀려날 경우, 대북 관계에서 남한 체제의 정당성과 대북 이념적 우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신앙 개종을 요구하는 전향 공작은 멀리는 천황제 하의 일본의 전향 정책, 특히 일제 말 전시파시즘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전향공작이 갱생, 사회복귀를 지향하는 사회통합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의 전향공작은 징벌적 성격으로 일관했고, 폭력과 강압에 주로 의존하였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반공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좌익수 대상 전향공작은 '통일'과 '민족해방'의 '진실성'에 확신을 가진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저항에 직면했다.


The policy of conversion for political prisoners in South Korea continued regardless of changes in government. The policy of conversion developed up to using the naked violence after the approval of the Yushin constitution. Why did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demand written confessions of conversion from leftist prisoners and even resort to violence to secure them? As they were incarcerated in special prisons where even other prisoners could not contact them, political prisoners' ideologies could not affect any other segments of society. The 'danger' that the Park Chung-hee regime anticipated was not a real political one, but a threat to its ability to assert comparative superiority over North Korea. The regime worried that if hundreds of political criminals were released with unconverted pro-North-Korean positions, that would threaten the superiority or honor of the South Korean system in the context of its competition with North Korea. The Park Chung-hee government's conversion policy originated from Imperial Japan's system of Peace Preservation Law and Tenno, both of which compelled thought criminals to convert from a rebellious 'religion' to a state-religion, anticommunism and capitalist ideology. While the Japanese conversion policy had focused on reeducation and rehabilitation, South Korea's persisted in punishing or asking for total surrender from leftist prisoners. That kind of policy could not triumph over the stubborn authenticity and inner sense of morality possessed by the leftist political priso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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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사회학사(제도사)의 주요 변곡점으로서 1975년의 의미 ― 충남대학교 사회학과의 설치와 그 파급 효과에 대하여

저자 : 김필동 ( Kim Pil-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5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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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서 사회학과는 1946년 서울대학교의 개교와 함께 처음 설치되었으나, 다른 대학으로의 확산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설치되었던 학과의 폐과도 이어져서 1974년까지 사회학과가 있는 대학은 전국에 5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5년 충남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이듬해부터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사회학과의 설치가 이어졌고, 1979년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1980년대 초 사회학과의 수는 전국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75년 충남대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것은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에 대해 학문적 호감을 갖고 있던 박희범 총장이 낙후되어 있던 충남대 개혁의 방법론의 하나로 사회과학의 기초 학문인 경제학과와 사회학과의 설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 총장은 우수한 교수진의 충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1976년부터 다른 주요 국립대학에 사회학과가 설치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런 파급 효과는 일부 사립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사회학은 1975년에서 1983년 사이에 제도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한편 1975년은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정책적 대응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점에서 나타난, 지방대학 육성이라는 대학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사회학이란 학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요가 제고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동의 조건 하에서, 향후 일어날 연쇄 반응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선례의 축적은 1980년대 초 대학팽창의 시기에 주요 사회계 학과 중에서 사회학과의 증설이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Sociology was first established at Korean university in 1946 with the opening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but the spread to other universities was very slow. As a result, there were only five universities nationwide with sociology department until 1974. However, from 1975, when the sociology department was established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the number of sociology departments began to increase, first mainly at major national universities outside Seoul, then across the country in the early 1980s after political upheavals in 1979 and 1980.
The sociology department was established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in 1975 because President Park Hee-beom, an economist who had academic affinity for sociology, pushed for the establishment of economics and sociology departments, the basic social sciences, as a methodology for university reform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In addition, Park devoted himself to recruiting excellent faculty members. The establishment of Chungnam National University's sociology department opened the door for the establishment of sociology departments in other major national universities after 1976, and this ripple effect affected some private universities too. As a result, sociology was able to greatly expand its institutional foundation between 1975 and 1983.
Meanwhile, 1975 was also the time when a fundamental change in university policy - the fostering of local universities - emerged. This was a period when changes in the socio-economic structure of Korean society were accelerating and social policy responses were progressing rapidly. It was also a time when social awareness and demand for sociology increased. Ther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sociology department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was the first step in a chain reaction driven by structural change. The accumulation of precedents led sociology to have the highest rate of expansion among major social science departments in the early 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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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포퓰리즘, '국민주권'의 변형을 지향하는 정치이념

저자 : 윤종희 ( Yoon Jong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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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후,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을 촉발한다.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우려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대부분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것에서 비롯된다. 기존 연구들은 포퓰리즘으로 지칭되는 사례들에서 공통의 특성을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개념을 정의한다. 그런데 이 같은 방식은 너무도 많은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외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기하학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 발생원인에 반영하여 개념을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의 적대적 대립물로 구성된 현실의 '인민'이 주권자임을 주장하면서 대표제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정치이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기 때문에 대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볼 수 있다.


After the global financial crisis, populism spreads around the world, sparking debates about the future of democracy. Some fear that it will destroy the values and order of democracy, while others expect that it will help realize 'true' democracy. Most of these conflicting evaluations stem from the vague definition of populism. Existing studies define the concept by deriving key characteristics from representative cases. However, this method includes too many political phenomena in the category of populism. Instead, this study, according to the method of geometry, defines a concept based on the structural (generating) cause. Populism can be defined as a political ideology that seeks to overthrow representative democracy while claiming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 as a real substance constructed through hostility to the 'elite'. It actually denies the principle of popular sovereignty. Populism, therefore, can be seen as a serious threat to the democratic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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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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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중국에서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개념 자체만 보더라도 전통적 한자 개념이나 문명 개념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차대전 종결 이후 '문화주의' 철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일본에서 문화 개념이 실천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자 곧 이어 신문화운동이라는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주의라는 철학적 바탕이 없는 채로, 구문화와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강력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수용된 '문화론'은 다시 조선의 전통='국수(國粹, nationality)'에 대해 주목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강화하였다. 병합 이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국수보존운동'은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었으나 1910년대 국수보존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명 개념의 지속성 혹은 문화 개념의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의 적극적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3.1독립선언서」로 수렴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과 개조론을 잇는 매개가 바로 문화 개념 혹은 문화론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신문명의 시대 곧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저항권이 용인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 개조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적 연결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3.1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문화의 권리장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사조는 문화론과 결합하여 대단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근대의 성격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3.1운동은 이전의 문명론적 위계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1920년대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근대(colonial modern)'의 상호성이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윌슨·루스벨트적 자유주의 기획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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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저자 : 백승욱 ( Baek Se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9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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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3.1운동 이면에 있는 곤경을 '사상사의 부재 또는 취약함'으로 해석한다. 이를 위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변동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등장한 '단절의 역사 담론'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전개된 사상사적 전환의 노력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관찰점을 검토한다. ① 20세기초 동아시아가 겪은 국제질서의 독특성,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단절의 근대 담론'의 특징. ②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비교. ③ 3.1운동이 형성시킨 사상사적 질문. ④ 임시정부 법통의 질문이 사상사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난점. 분석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패러다임'의 문제를 확인하였는데, 이 패러다임은 '우리 민족'의 경계를 한민족과 이를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로 구획하는 대신, 우리 내부에서는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의 상상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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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회적 저항경험은 어떻게 교육주체 형성으로 이어졌는가 ― 삼일운동과 교육주체 형성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2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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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중등학생들이 어떻게 교육주체로 형성되어 갔는가를 탐구하였다. 학생들이 교육주체로 형성되는 데는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이 맡았던 독립선언서 배포, 읽기, 쓰기, 그리고 공적 말하기와 같은 문해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해학습자로서 중등학생들은 삼일운동 당시에는 학교가 소재한 대도시에서 출신지역으로 귀향하여 대도시와 출신지역을 잇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자결과 인류공영의 정신을 접한 학생들은 삼일운동 후 학교로 돌아가 그들에게 일상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였던 교육문제로 1920년대 내내 학교와 일제당국에 맞서 동맹휴학을 벌였다. 동맹휴학 운동을 위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공적인 말하기와 글쓰기를 전개했다. 각종 성명서와 지지성명을 통해 학교 간, 학교와 사회단체 간, 조선과 일본 사이를 연결했다. 교육 아닌 것(비(非)교육)에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 교육을 주창하였다. 삼일운동부터 1920년대까지 지속되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암기하고 주해하고 평가받는 문해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생성하는 문해활동을 체험하며 교육적 주체로 형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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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운동과 기념일의 역사화

저자 : 김미화 ( Jin Mei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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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고종의 승하와 因山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민중은 고종을 애도하기보다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주목할 것은, 행진과 만세 부르기라는 시위방식이 본래 군주의 탄신일 축하행사를 통해 보급된 의례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이후 행렬과 만세 연호는 식민지기 대중시위 방식의 원형이 되고, 매년 3.1운동을 기념하려는 시도 자체도 독립운동의 일부가 된다. 임시정부는 3.1절, 국치일,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을 기념하면서, 일본제국의 시간질서에 대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달 넘게 지방별로 일어난 많은 시위가 '3.1'이라는 하나의 날짜로 묶였다. '만세'의 다의성이나 폭력시위의 존재는 잊혀졌다. 1919년 3.1운동은 한국 국민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이고, 3.1절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최초의 국민적 기념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후대의 기념일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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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저자 : 문현아 ( Moon Hyuna ) , 차승은 ( Cha Seung-eun ) , 은기수 ( Eun Ki-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5-1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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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수면에 관한 연구는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아직까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연구는 『쇄미록』과 『병자일기』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일기 기록에 나타난 잠에 관한 언급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일기자료에서 수면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잠을 기록한 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였다. 특히 일기에서 잠을 기록하는 경우의 시/공간적 맥락을 비추어 볼 때 '잠을 잤다'는 기록이 단순히 수면의 유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숙박의 의미, 접대를 하는 의미 등도 있고, 잠을 자는 시간대인 밤, 그리고 밤 시간대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밤 시간대와 연결해서 일기 기록에 담긴 의미를 따라 불면의 상황이나 잠자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를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잠과 밤시간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 행위들을 재구성해서 수면이 발생하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암흑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일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임을 조망하였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활동 중 수면이 갖는 사회관계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 규범의 틀과 맞물려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분석을 시도했다. 이 연구는 기존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수행한 탐색적 연구이지만 수면을 둘러싼 조선시대 일상의 새로운 측면을 접근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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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역사인구학 지표로 살펴본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 1734~1910

저자 : 우대형 ( Woo D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59 (6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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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가격의 단기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당대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간주된다. 단기적인 생산충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흉풍의 단기적 변화에 대해 사망률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생존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조선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면, 단기적인 생산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였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있었다면 사망률 민감도는 점차 둔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1734~1910년 간 곡물가격의 연간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곡물가격과 사망률 시계열은 兩班家와 그 친족집단이 남긴 쌀값 자료와 족보로부터 구하였으며, 모형은 시차분포모형을 사용하였다. 추정 결과, 미가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19세기 초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둔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본 논문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다가 개항 또는 20세기 식민통치의 시작과 함께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는 기존 연구의 주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19세기 초 최저점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으며, 그 증가가 20세기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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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말 식민지기 통영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새로운 추모의례 조직

저자 : 이진욱 ( Lee Jin-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1-28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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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은 '민족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한말 이후부터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이 실제 활동하였던 통영 지역은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 연구는 한말 식민지기 통영의 새로운 추모의례인 '탄신제(誕辰祭)'의 출현에 주목하였으며, 이 시기 통영 지역사회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문화적 상징을 둘러싸고 여러 집단들이 보여준 문화적 대응의 양상과 그 의의를 논의하려 한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통제영이 폐지될 즈음 통영에서는 탄신제가 거행되고 '충무공 생신계(生辰稧)'가 조직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통영 충렬사에 전승되고 있는 『충무공대감생신계좌목(忠武公大監生辰稧座目)』을 분석하여 계의 구성원들이 결성 초기부터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엘리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폐쇄적 멤버십을 유지한 생신계는 통영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새롭고 다양한 계층과 충무공에 대한 그들의 기대도 아울러 포섭하려 하였다. 생신계는 1919년 여러 단체를 규합해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統營忠烈祠永久保存會)'를 조직하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를 주도하였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가 지역사회에서 확대되고 다층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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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행기 정의를 통해 본 일본 한센인 운동, 1946~2009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 오하나 ( Oh Ha 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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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0년 가까이 지속된 「나예방법」에 의하여 한센병시설에 일평생 수용당해야만 했던 한센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사회의 노력을 이행기정의 개념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이행기정의를 응보적 정의, 회복적 정의, 변혁적 정의로 구분하고, 일본 한센인 운동을 크게 ① 이행기 정의 실현 예비기, ② 응보 및 회복적 정의 실현기, ③ 회복 및 변혁적 정의 실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국면인 법 개정 및 폐지 운동기는 아직 이행기 정의 개념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변혁적 정의가 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이 시기에 당사자 단체가 형성되었고, 전문가 집단이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국면인 배상청구소송기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가 동시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소송을 통하여 행정부 및 입법부의 잘못이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사과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센병문제기본법 제정기는 회복적 정의와 변혁적 정의가 동시에 추구되는 시기였다. 피해회복의 개념을 더욱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한센인에 대한 유사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명시함으로써 사회문화적 구조에 대한 변화를 추구했다. 일본의 한센인 운동 사례를 통해 이행기 정의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으며, 실천적으로는 정의를 성취하는 단발적인 사건보다는 운동의 축적된 역사적 경험이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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