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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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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Weakness of the History of Thought Found in the March First Movement

백승욱 ( Baek Seung-wook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03월
  • : 39-92(54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1.2


목차

1. 국제 정세 속의 3.1운동
2. 3.1운동 연구 성과와 제기되는 질문들
3. 동아시아의 세계경제 편입의 특수성과 고유의 ‘단절 담론 형성’
4. 5.4운동과 3.1운동: 사상사적 전환의 역사적 차이
5. 3.1운동을 계기로 한 사상사 계보의 형성과 한계
6. 임정법통과 제헌헌법의 ‘상호 알리바이’: 대한민국 헌법의 소급적 임정 법통성과 사상사의 부재
7.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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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3.1운동 이면에 있는 곤경을 ‘사상사의 부재 또는 취약함’으로 해석한다. 이를 위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변동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등장한 ‘단절의 역사 담론’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전개된 사상사적 전환의 노력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관찰점을 검토한다. ① 20세기초 동아시아가 겪은 국제질서의 독특성,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단절의 근대 담론’의 특징. ②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비교. ③ 3.1운동이 형성시킨 사상사적 질문. ④ 임시정부 법통의 질문이 사상사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난점. 분석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패러다임’의 문제를 확인하였는데, 이 패러다임은 ‘우리 민족’의 경계를 한민족과 이를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로 구획하는 대신, 우리 내부에서는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의 상상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plight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as consequent of a disregard for or an absence of thought history. To this end, this research compares Korea’s March First Movement with discourse of historical discontinuity with China and Japan, and examines efforts to both expand and limit ideological transformations in Korea. It engages this in four ways: 1) an analysis of geopolitics of East Asia, which was characterized with ‘discontinuous modernity’; 2) a comparison between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China’s May Fourth Movement; 3) a probe of thought and history and history of thought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4) an investigation of provisional government difficulties raised in relation to the March First Movement. The findings suggest a ‘March 1st Movement paradigm’ that marks boundary lines between woori nara (our country), as Koreans, which functioned as a means of reifying an imagination of identity/ national continuity while under suppressive Japanese imperial rule.

UCI(KEPA)

I410-ECN-0102-2019-300-001432466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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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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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획특집: 한국 우생학의 역사와 오늘

저자 : 박지영 , 현재환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0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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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민족적 체질' 만들기 ― 식민지 시기 조선인 아동 발육 표준 연구

저자 : 박지영 ( Park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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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지금까지 제국주의의 도구로 알려져 온 생물측정학이 식민지 조선에서 피식민자들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탐구한다. 그러기 위해 이 논문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경성제국대학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수행한 아동 발육 표준 연구를 분석한다. 검토 결과에 의하면,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생물측정학을 그것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체질인류학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아동 발육 연구에 적용했다. 그런 선택에는 민족의 체질을 알고 개선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진 조선인 발육 표준은 조선인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기준이자 향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인 의학자들의 생물측정학 연구가 일반적으로 민족의 특질을 선천적이고 인종적인 것으로 묘사하던 것과 달리,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그것을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식민 통치에 저항적이거나 대립적이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식민 당국은 식민 통치의 정당화와 안정화를 위해 조선인 체위향상 정책을 추진했으며,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그 정책의 지원을 받고 또 그에 기여하면서 조선인의 발육에 관한 연구와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서술을 토대로, 이 논문은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생물측정학을 '민족적 체질'을 알고 개선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그 활동은 조선인 사회와 식민 당국의 협력과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how Korean medical specialists used and interpreted biometrics under Japanese rule in Korea. To do that, this paper examines studies on growth standards in the Korean population by Korean researchers in the Department of Hygie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s College of Medicine during the 1930s and early 1940s. The Korean Hygienists applied biometric methodology to research on growth patterns in Korean children, detaching biometrics from the anthropological context where it had been generally used. Their choice reflected a belief in Minjok Gaejoron, the notion that the composition of the Korean nation should be learned about and improved. From that point of view, growth standards were considered as both criteria for distinguishing Koreans from other ethnic groups and an area that could be targeted and developed. This shows that whilst Japanese anthropologists described Korean growth standards as innate and racial, Korean hygienists considered them to be acquired and variable. However, this does not mean that the Korean hygienists resisted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 hygienists contributed to the public health and wartime manpower management policies of the colonial authorities. They received support from the colonial state to study and promote the physical development of Korean children. Based on these observations, this paper argues that the Korean hygienists used biometrics as a tool to learn about and improve 'national composition,' and that such activities were possible through cooperation and compromise between Korean society and the colonial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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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우생'론과 의과학자들, 1945~1964

저자 : 현재환 ( Hyun Jae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5-9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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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70년대 가족계획사업과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측면을 조명하는 연구들 덕분에 해방 이후 한국의 우생학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글은 해방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생물학자들과 의학 전문가들의 활동들을 검토하여 이들이 1945년 이전의 미국 우생학과 전전(戰前) 및 전후(戰後) 일본의 민족위생학(民族衛生学)을 자원으로 삼아 '민족우생' 혹은 '국민우생'을 과학적으로 온당한 분야이자 담론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의과학자들은 적어도 1970년대초까지 우생학을 '건전한 과학'으로 가르치고 홍보했으며, 1950년대에는 동성동본 불혼제 등과 같이 생식과 관련된 사법적 문제에 우생학의 이름으로 개입했다. 특히 권이혁(1923~2020)을 위시한 의학 전문가들은 1950~60년대 사이에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라 우생법을 입안해 '유전병' 환자들의 강제불임수술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의과학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우생학과 우생주의 형성에 맡은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가족계획사업에만 초점을 맞춘 국민우생법안(1964) 입안의 역사를 재고한다. 나아가 한국이 '우생사회'가 되어가는 과정과 그 면모를 드러내려는 최근의 간학제적인 노력에 과학사가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In recent years, interest in South Korean eugenics has grown among social historians, particularly with regards to eugenic aspects of family planning in the 1970s and the Mother and Child Health Act of 1973. Examining the scientific discourse and social activities of biologists and medical researchers from the post-liberation period to the early 1960s, this paper argues that these medical scientists played a crucial role in making “national eugenics” (minjok usaeng) appear to be objective science and legitimate medical policy. Using pre-WWII American eugenic theories and prewar and postwar Japanese ideas about racial hygiene (minzoku eisei), they presented eugenics as a “sound science” and intervened in legal debates concerning human reproduction-related family laws. Furthermore, they continuously pushed for legislation of a eugenics law modeled on the Japanese Eugenic Protection Law (1948), and hoped to legalize the sterilization of people with cognitive disabilities. Through this case study, I demonstrate that History of Science can contribute to the current interdisciplinary effort to revisit the family planning-centered history of Korean eugenics legislation and help uncover the origin of eugenic ideas in South Korean society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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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획특집: 고등교육의 경험과 그 (포스트)식민적 효과들

저자 : 정준영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95 (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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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학의 장'과 식민지 고등교육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51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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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의 조선학은 국학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학운동'이라는 좁은 렌즈만으로는 조선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학술장이라는 개념을 분석도구로 삼아,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분석과정에서 특히 고등교육과의 관련을 중시했다.
1920년대 벽두 최남선의 조선학선언을 통해 조선학이라는 지평이 서서히 조선사회에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조선인들이 주도하는 조선학은 어문학과 발명학이라는 하위장에서만 새로운 시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1926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본격적인 조선학 연구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대학에 부임한 일본인 연구자와 1929년부터 배출되는 조선인 졸업생 그리고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조선인 해외유학생들이 조선학 붐의 주체가 되었다.
1930년 결성된 청구학회는 본격적인 조선학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가 출현한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제도화된 분과학문을 바탕으로 청구학회가 조선학 전문지식을 본격적으로 생산해내게 되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1930년 이후 어문학, 철학, 민속학, 경제학 등의 인문학과 의학, 발명학, 박물학 등의 이공학 분야에서 조선학 하위 학술장이 족출하게 되었다. 조선학의 장은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화려하게 만개하게 되었다.
이런 하위장의 성립을 토대로 1934년 조선인 중심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인 진단학회가 탄생하였다. 진단학회는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조선연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조선학 전분야의 하위장 연합으로 발족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 우파 그룹이 조선학의 상징으로 실학을 내걸고 조선학운동을 시작한 것은, 이런 과학적 조선연구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조선학의 성립을 자극한 것은 일본의 조선 연구였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조선학 연구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조선인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경성제국 설립과 유학생의 유입이 조선학 형성의 신호탄이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학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하고, 고등교육을 통해 배출된 연구인력은 조선학 연구를 진전시켜 갔다. 식민지기의 고등교육은 조선학을 추동한 자극의 원천이자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Joseon studi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can placed within the tradition of national learning (國學). As such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the full extent of Joseon studies through the narrow lens of the 'Chosunhak Movement'. This article analys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Joseon studies using the concepts of academic fields and sub academic fields, emphasizing Joseon studies' relationship with higher education was emphasized.
In the 1920s, through the declaration of Joseon Studies by Choi Nam-sun, the horizon of Joseon Studies gradually emerged in Korean society. However, during the 1920s, only minor and experimental research in the sub-field of linguistics and 'invention' (that is engineering) was led by Koreans in Joseon studies. Instead, Keijo Imperial University, which opened in 1926, laid the foundation for full-fledged Joseon studies. Japanese researchers who took office at universities, Korean graduates who had studied abroad, and from 1929, Korean graduates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came together at the same time to become the main agents of the Joseon studies boom.
The formation of Cheonggu Academic Society (靑丘學會) in 1930, signaled the full-fledged launch of Joseon studies. The first comprehensive academic society on Joseon studies centered on Japanese researchers appeared. Based on the academic discipline institutionalized at Keijo University, the Cheonggu Academic Society produced expertise in Joseon studies in earnest. As a result, from 1930, the sub-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have been established in humanities such as language and literature, philosophy, folklore studies, and economics, as well as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disciplines such as medicine, 'invention', and natural science. The 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thus came to be in full bloom in the early 1930s.
Based on the establishment of these sub-field, the Jindan Academic Society (震檀學會), a comprehensive society for Joseon studies centered on Koreans, was born in 1934. Paradoxically, the Jindan Academic Society put forward 'scientific Joseon research' as a slogan, and it was able to be launched as a sub-field alliance in humanities of Joseon studies. The reason why the nationalist right-wing group started the Joseon Studies Movement with Silhak (實學) as a symbol of Joseon Studies was this sense of crisis over scientific Jose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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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미션스쿨의 지식인 풍경 ―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8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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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식민지 미션스쿨에 재직 중인 지식인들을 하나의 풍경화로 묘사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풍경화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본다. 하나가 풍경화가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공간, 둘째가 풍경화가 포착하는 특정한 시간대, 마지막으로 풍경화의 구도를 잡아주는 출발점이자 확장선인 소실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비추어 평양에 있었던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사례로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을 풍경화로 그려보고자 한다. 지식인 풍경이라는 이 새로운 방법은 식민지 지식인들을 당대의 시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좀 더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기 위해 고안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이 활동한 공간은 식민지에서는 때 이르게 글로벌하면서도 로컬했다. 지역 유일 사립전문학교였던 숭실전문학교는 평양의 역사와 식민지적 특성으로 인해 인구구성이 비교적 다양했고, 교수들의 학력구성도 제국을 기반으로 글로벌했다. 동시에 평양이 역사적으로 오래 차별받아 온 서북지역이이면서 민족주의와 사립학교의 설립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라는 특성이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들 역시 지역에서의 책무를 기꺼이 맡는 지역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지식인들이 처한 시간대를 보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지식인들의 직선적 시간과 이를 제국주의 국가권력의 시간 쪽으로 끌어당기는 권력의 힘이 충돌하면서 울퉁불퉁한 구부러진 시간대를 살아갔다. 셋째, 지식인들에게 핵심적 역할인 지적 행위를 소실점으로 두고 봤을 때,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은 식민지라는 한계와 전문학교라는 한계 속에서 그들의 학문적 활동을 진행했으며, 여러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술교육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This article paints a landscape painting of intellectuals working at the Colonial Mission College. The author believes that landscape painting includes three elements. The first is the wide space landscape paintings describe, the second is the specific time zone captured by landscape paintings, and the third is the vanishing point. This is the starting point and extension line that defines the composition of the painting. In light of these three elements, the author attempts to paint a picture of intellectuals in colonial mission college using the example of Soongsil College professors in Pyongyang.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space of intellectuals at Soongsil College, a colonial mission school, was both global and local. Second, time at Soongsil College was uneven and curved. The straight time of intellectuals trying to move toward the future collided with the colonial power that pulled it toward the time of state power. Third, with regards to intellectual activity, which is a defining role for intellectuals, professors at Soongsil College conducted their academic activities under the limitations imposed by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institution's status as a vocational school. They tended to focus on technical education as this met the interests of various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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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묵은 술을 새 부대에 ― 고종의 '전제왕권'과 관보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2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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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갑오개혁 때부터 발행된 인쇄 관보는 이듬해 6월에는 일본 관보와 비슷한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근대국가의 관보는 일차적으로 법령을 공표하고 정부 소식을 전하는 매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고종대의 관보에서 법령보다 더 부각된 것은, 규정과 달리 관보 맨 앞자리로 옮겨진 「궁정녹사」였다. 「궁정녹사」는 본래정치와는 별개로 임금과 왕실의 동정, 각종 제사 소식을 싣는 주변적인 꼭지로 설정되었지만, 고종대 관보에서는 “詔曰”이라는 명령 형식을 취한 고종의 정치적 결정, 관리 인사, 각종 상소와 고종의 비답이 상당한 분량으로 이 꼭지를 채웠다. 심지어 고종이 자신의 “무한하온 군권”을 강조한 「대한국국제」를 공포한 것 역시 「궁정녹사」 난을 통해서였다. 「궁정녹사」는 관보 속의 또다른 관보였고, 고종대 관보는 법치의 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제왕권의 과시를 위한 매체였다.


During the Gabo Reform, the government in Korea began to be publish a government gazette. The government gazette of the modern state is primarily a medium for promulgating and publishing laws and delivering government news. However, in the King Gojong Era, “The Royal Events” section, which was originally only a secondary concern, was given a prominent position. Originally, “The Royal Events” section covered the daily life of the king and the royal family and ancestral rituals. However, during the King Gojong Era, this section reported on the emperor's rule rather than the news of the court's event. Through this section, King Gojong even promulgated the Constitution of the Korean Empire which emphasized his “infinite sovereignty”. The government gazette in King Gojong Era was a medium for the display of aut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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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한 연구 ―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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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해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위문대/군예대는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전국 각지에 걸쳐 순회하였으며, 관객들에게 위문연예라는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위문공연은 상이군인과 산업전사 같은 기표를 통해 남성성을 찬양하면서 반공사상과 계몽의식을 반복적으로 함양하기도 했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악극단과 연예계의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 문화 형식 등이 계승되면서 재구성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다. 위문대/군예대 안에는 기생과 접대부를 포함하는 여성 예인이 참여하였다. 그녀들은 무용과 음악을 통해 위문연예를 수행하면서, 가두에 진출하여 위문금까지 모금하여 헌납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위문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도, 남성성을 보완하기 위해 여성 신체가 비/자발적으로 전유되었던 서비스 노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looks at the continuity between performances given for troops in Korea before and after liberation, focusing on military arts troupes and what were known in Korea as “comfort groups”.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oured all over the country, undergoing various transformations and providing the audience with a visual spectacle. The shows praised masculinity through symbols such as disabled soldiers and industrial warriors, while cultivating an anti-communism and enlightenment consciousness. Key aspects of these performances were inherited and reconstructed from the musical theater troupes and the entertainment industry of colonial Joseon, including the human resources, networks, cultural forms. Female entertainers, including gisaengs and waitresses, participated in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hey even raised money for condolences by performing dance and music in the street. This can be seen as service labor in which the female body was involuntarily/voluntarily appropriated to supplement masculinity, creating an everyday culture of “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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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군부 정권의 가속 통치와 '3S 정책'

저자 : 김학선 ( Kim Hak-s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5-30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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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Screen, Sex, Sports)란 용어는 보통 우민화 정책을 지칭하는데, 대한민국의 1980년대를 특징짓는 표현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신군부 정권의 '3S 정책'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3S'는 당시 자율화·자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라는 의견이 맞서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신군부 정권의 가속화 열망에서 비롯된 가속 통치의 측면에서 '3S 정책'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가속통치란 인접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정통성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 미래를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워 사회 가속화를 촉진하는 통치행위를 가리킨다.
신군부 정권은 2번의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했으므로 정당성 확보가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황은 예전과 같은 고속성장을 보장할 수 없었다. 신군부 정권은 정치·경제 안정화에 주력하면서 속도 조절 담론을 통해서 고속성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적 시점에서 해결하자는 논리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며 가속 정치를 시행했는데, 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3S'다. 신군부 정권은 '3S 정책'을 통해서 삼중의 속도-과거와의 단절 속도, 자본의 회전 속도, 속도에의 몰입과 속도 경쟁의 자유가 일상화되는 속도-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의 가속화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3S 정책'이란 곧 '3S' 소비책을 의미하는데, 신군부 정권은 '3S'에 대한 소비 진작을 통해서 정치·경제적 당면과제를 해결하고, 정권의 정당성과 국민 동원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했다. 본 글에서는 '3S'의 구체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당시 신군부 정권이 펼친 '3S 정책'을 정리하고, 그로 인해 '3S'가 1980년대 시공간에서 산업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신군부의 스크린 정책은 영상 산업, 유흥·향락 정책은 성 산업, 스포츠 정책은 스포츠 붐과 관련해서 논의한다.


South Korea in the 1980's is often characterized by the term “3Ss” (Screen, Sex, Sports). 3Ss culture is often assumed to have been the result of a conscious state policy to “dumb-down” society. However, some contend that this interpretation misrepresents the nature of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or argue that 3S culture emerged naturally as a result of growing autonomy and liberalization. This article seeks to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the 3S policy, arguing that it can be seen as the result of “accelerated government”. Accelerated governance stemmed from the New Military Group's desire for acceleration, and refers to governing behaviors in which the ruling power promotes social acceleration because it has not obtained legitimacy from the adjacent past or present.
Since the New Military Group usurped the government through two military coups, securing legitimacy was a priority. However, political instability and the economic depression meant it could not even guarantee that growth would match the pace of previous years. Through the 3S policy, the new regime instead tried to realize its aspiration for acceleration by speeding up in three ways―in the rate of disconnection from the past, the speed of capital rotation, and the rate at which immersion in speed and speed competition became commonplace.
The 3Ss policy refers to the 3Ss consumption policy. In order to determine the concrete reality of 3S, this article summarizes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and its attempts to govern by stimulating consumption of the 3Ss. This explains how the 3Ss established itself as an industry in the space and time of the 1980s. The new regime's entertainment and pleasure policies, screen policy, and sports policy, are discussed in relation to the video industry, the sex industry, and the sports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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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80-90년대 발전국가 전환기의 부실기업 처리 ―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

저자 : 오형석 ( Oh Hyu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7-3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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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발전국가 전환의 불균등성이라는 맥락에서 1980-90년대 대표적인 부실기업인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를 분석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정부는 여러 방면에서 이전의 전형적인 발전국가의 면모를 탈색하려 했다. 그 와중에 큰 규모의 기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부 대응은 각각 상이했다. 1985년 국제그룹 사례에서는 정부가 해체를 직접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계열사별 인수업체 선정까지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그룹이라는 개별 기업의 부실이 국가적 차원의 부실로 심화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정부의 직접개입은 민간 자율이라는 경제 정책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기의 방지라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모순은 1997년 한보그룹 위기 상황에서 기업주, 정부, 은행이 서로 다른 판단을 하여 한보를 부도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가 무개입으로 일관한 가운데, 기업주 정태수의 은행관리 거부라는 돌발상황이 발생했고, 은행은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던 가운데 청와대 한보 부도 결정이라는 오보를 즉각 수용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97년 1월 한보 부도 이후의 결과는 대기업의 연쇄 도산이었다.


This paper analyzes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and the Hanbo bankruptcy case of 1997, both of which are representative instances of corporate insolvency in South Korea.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show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uccessfully using a strategy of active market intervention to prevent the spread of insolvency. However, the bankruptcy of Hanbo in 1997 suggests that this strategy was extremely limited. In the Hanbo crisis,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s evaluation of the situation differed, and consequently each took different actions. The result was the Hanbo Group's bankruptcy. This was not only an undesirable outcome for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 but also led to series of large corporations going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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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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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중국에서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개념 자체만 보더라도 전통적 한자 개념이나 문명 개념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차대전 종결 이후 '문화주의' 철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일본에서 문화 개념이 실천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자 곧 이어 신문화운동이라는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주의라는 철학적 바탕이 없는 채로, 구문화와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강력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수용된 '문화론'은 다시 조선의 전통='국수(國粹, nationality)'에 대해 주목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강화하였다. 병합 이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국수보존운동'은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었으나 1910년대 국수보존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명 개념의 지속성 혹은 문화 개념의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의 적극적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3.1독립선언서」로 수렴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과 개조론을 잇는 매개가 바로 문화 개념 혹은 문화론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신문명의 시대 곧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저항권이 용인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 개조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적 연결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3.1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문화의 권리장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사조는 문화론과 결합하여 대단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근대의 성격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3.1운동은 이전의 문명론적 위계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1920년대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근대(colonial modern)'의 상호성이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윌슨·루스벨트적 자유주의 기획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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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저자 : 백승욱 ( Baek Se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9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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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3.1운동 이면에 있는 곤경을 '사상사의 부재 또는 취약함'으로 해석한다. 이를 위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변동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등장한 '단절의 역사 담론'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전개된 사상사적 전환의 노력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관찰점을 검토한다. ① 20세기초 동아시아가 겪은 국제질서의 독특성,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단절의 근대 담론'의 특징. ②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비교. ③ 3.1운동이 형성시킨 사상사적 질문. ④ 임시정부 법통의 질문이 사상사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난점. 분석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패러다임'의 문제를 확인하였는데, 이 패러다임은 '우리 민족'의 경계를 한민족과 이를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로 구획하는 대신, 우리 내부에서는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의 상상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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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회적 저항경험은 어떻게 교육주체 형성으로 이어졌는가 ― 삼일운동과 교육주체 형성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2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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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중등학생들이 어떻게 교육주체로 형성되어 갔는가를 탐구하였다. 학생들이 교육주체로 형성되는 데는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이 맡았던 독립선언서 배포, 읽기, 쓰기, 그리고 공적 말하기와 같은 문해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해학습자로서 중등학생들은 삼일운동 당시에는 학교가 소재한 대도시에서 출신지역으로 귀향하여 대도시와 출신지역을 잇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자결과 인류공영의 정신을 접한 학생들은 삼일운동 후 학교로 돌아가 그들에게 일상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였던 교육문제로 1920년대 내내 학교와 일제당국에 맞서 동맹휴학을 벌였다. 동맹휴학 운동을 위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공적인 말하기와 글쓰기를 전개했다. 각종 성명서와 지지성명을 통해 학교 간, 학교와 사회단체 간, 조선과 일본 사이를 연결했다. 교육 아닌 것(비(非)교육)에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 교육을 주창하였다. 삼일운동부터 1920년대까지 지속되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암기하고 주해하고 평가받는 문해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생성하는 문해활동을 체험하며 교육적 주체로 형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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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운동과 기념일의 역사화

저자 : 김미화 ( Jin Mei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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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고종의 승하와 因山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민중은 고종을 애도하기보다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주목할 것은, 행진과 만세 부르기라는 시위방식이 본래 군주의 탄신일 축하행사를 통해 보급된 의례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이후 행렬과 만세 연호는 식민지기 대중시위 방식의 원형이 되고, 매년 3.1운동을 기념하려는 시도 자체도 독립운동의 일부가 된다. 임시정부는 3.1절, 국치일,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을 기념하면서, 일본제국의 시간질서에 대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달 넘게 지방별로 일어난 많은 시위가 '3.1'이라는 하나의 날짜로 묶였다. '만세'의 다의성이나 폭력시위의 존재는 잊혀졌다. 1919년 3.1운동은 한국 국민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이고, 3.1절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최초의 국민적 기념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후대의 기념일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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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저자 : 문현아 ( Moon Hyuna ) , 차승은 ( Cha Seung-eun ) , 은기수 ( Eun Ki-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5-1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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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수면에 관한 연구는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아직까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연구는 『쇄미록』과 『병자일기』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일기 기록에 나타난 잠에 관한 언급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일기자료에서 수면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잠을 기록한 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였다. 특히 일기에서 잠을 기록하는 경우의 시/공간적 맥락을 비추어 볼 때 '잠을 잤다'는 기록이 단순히 수면의 유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숙박의 의미, 접대를 하는 의미 등도 있고, 잠을 자는 시간대인 밤, 그리고 밤 시간대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밤 시간대와 연결해서 일기 기록에 담긴 의미를 따라 불면의 상황이나 잠자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를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잠과 밤시간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 행위들을 재구성해서 수면이 발생하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암흑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일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임을 조망하였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활동 중 수면이 갖는 사회관계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 규범의 틀과 맞물려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분석을 시도했다. 이 연구는 기존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수행한 탐색적 연구이지만 수면을 둘러싼 조선시대 일상의 새로운 측면을 접근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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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역사인구학 지표로 살펴본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 1734~1910

저자 : 우대형 ( Woo D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59 (6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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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가격의 단기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당대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간주된다. 단기적인 생산충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흉풍의 단기적 변화에 대해 사망률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생존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조선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면, 단기적인 생산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였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있었다면 사망률 민감도는 점차 둔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1734~1910년 간 곡물가격의 연간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곡물가격과 사망률 시계열은 兩班家와 그 친족집단이 남긴 쌀값 자료와 족보로부터 구하였으며, 모형은 시차분포모형을 사용하였다. 추정 결과, 미가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19세기 초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둔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본 논문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다가 개항 또는 20세기 식민통치의 시작과 함께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는 기존 연구의 주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19세기 초 최저점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으며, 그 증가가 20세기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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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말 식민지기 통영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새로운 추모의례 조직

저자 : 이진욱 ( Lee Jin-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1-28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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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은 '민족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한말 이후부터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이 실제 활동하였던 통영 지역은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 연구는 한말 식민지기 통영의 새로운 추모의례인 '탄신제(誕辰祭)'의 출현에 주목하였으며, 이 시기 통영 지역사회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문화적 상징을 둘러싸고 여러 집단들이 보여준 문화적 대응의 양상과 그 의의를 논의하려 한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통제영이 폐지될 즈음 통영에서는 탄신제가 거행되고 '충무공 생신계(生辰稧)'가 조직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통영 충렬사에 전승되고 있는 『충무공대감생신계좌목(忠武公大監生辰稧座目)』을 분석하여 계의 구성원들이 결성 초기부터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엘리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폐쇄적 멤버십을 유지한 생신계는 통영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새롭고 다양한 계층과 충무공에 대한 그들의 기대도 아울러 포섭하려 하였다. 생신계는 1919년 여러 단체를 규합해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統營忠烈祠永久保存會)'를 조직하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를 주도하였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가 지역사회에서 확대되고 다층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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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행기 정의를 통해 본 일본 한센인 운동, 1946~2009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 오하나 ( Oh Ha 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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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0년 가까이 지속된 「나예방법」에 의하여 한센병시설에 일평생 수용당해야만 했던 한센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사회의 노력을 이행기정의 개념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이행기정의를 응보적 정의, 회복적 정의, 변혁적 정의로 구분하고, 일본 한센인 운동을 크게 ① 이행기 정의 실현 예비기, ② 응보 및 회복적 정의 실현기, ③ 회복 및 변혁적 정의 실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국면인 법 개정 및 폐지 운동기는 아직 이행기 정의 개념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변혁적 정의가 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이 시기에 당사자 단체가 형성되었고, 전문가 집단이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국면인 배상청구소송기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가 동시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소송을 통하여 행정부 및 입법부의 잘못이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사과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센병문제기본법 제정기는 회복적 정의와 변혁적 정의가 동시에 추구되는 시기였다. 피해회복의 개념을 더욱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한센인에 대한 유사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명시함으로써 사회문화적 구조에 대한 변화를 추구했다. 일본의 한센인 운동 사례를 통해 이행기 정의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으며, 실천적으로는 정의를 성취하는 단발적인 사건보다는 운동의 축적된 역사적 경험이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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