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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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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Cultural Turn of the East Asian “Colonial Modern” and March First Movement

윤해동 ( Yun Hae-dong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03월
  • : 7-37(31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1.1


목차

1. 머리말
2. 문화 혹은 문화주의 수용과 동아시아
3. 한국에서의 문화 개념 수용의 맥락
4.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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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중국에서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개념 자체만 보더라도 전통적 한자 개념이나 문명 개념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차대전 종결 이후 ‘문화주의’ 철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일본에서 문화 개념이 실천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자 곧 이어 신문화운동이라는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주의라는 철학적 바탕이 없는 채로, 구문화와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강력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수용된 ‘문화론’은 다시 조선의 전통=‘국수(國粹, nationality)’에 대해 주목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강화하였다. 병합 이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국수보존운동’은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었으나 1910년대 국수보존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명 개념의 지속성 혹은 문화 개념의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의 적극적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3.1독립선언서」로 수렴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과 개조론을 잇는 매개가 바로 문화 개념 혹은 문화론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신문명의 시대 곧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저항권이 용인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 개조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적 연결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3.1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문화의 권리장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사조는 문화론과 결합하여 대단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근대의 성격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3.1운동은 이전의 문명론적 위계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1920년대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근대(colonial modern)’의 상호성이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윌슨·루스벨트적 자유주의 기획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Japan and China’s adoption of the German concept of culture before World War Ⅰ was marked with confusion. Culture, as used in those times, had few distinctions from the traditional concept depicted in the Chinese character for civilization: 文化. This German concept, however, failed to spread into a practical cultural movement in Japan, despite the widespread growth of ‘culturalism’ philosophy after World War Ⅰ. In contrast, the introduction of the German concept of culture into China after the failed Xinhai Revolution catalyzed the New Culture Movement. China, unlike Japan, and with few philosophical groundings adopted ‘the concept of culture’ and developed a strong cultural movement that made struggles with old ways a powerful slogan.
In the case of Korea, the importation of ‘the concept of culture’ into Korea via Japan led to renewed interest in Korean traditions. The concept, at the time, equated to nationality in ways that emphasized Korean characteristics and reinforced national self-awareness. And while the movement to preserve national characteristics prior to Korea’s annexation to Japan carried signs of a new cultural movement, a full development failed to take place in the 1910s (despite Lee Kwangsoo’s activities in ‘spiritual civilization’).
Regardless, the flow of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reconstructionism in world history had great influences on Korea, which culminated in the March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 overarching logic at the time aimed at using civil disobedience to gain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to embark on a new civilization and culture while reordering the world order. Combined with the concept of culture, the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reconstructionism became a powerful weapon. The March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us became a ‘cultural bill of rights’ that ushered in a new era of culture to Korea and the world. In this regard, the March First Movement may be called a ‘struggle for culture.’
The article presents three major shifts in East Asian modernity that the March First Movement encouraged. First, the March First Movement undermined preexisting hierarchies within the civilizational paradigm. Second, the movement was predicated on an “era of culture” endemic of the 1920s. Third, the movement opened new opportunities to further strengthen reciprocity of the ‘colonial modern’ in East Asia and the world, which became part of a new modern society through Wilson-Roosevelt’s post-WWII liberal planning.

UCI(KEPA)

I410-ECN-0102-2019-300-001432471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1
  • : 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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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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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0-30년대 “조선인 군중 소요”와 식민지 군중의 정치동학

저자 : 기유정 ( Ki You J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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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20-30년대 식민 공간에서 발생했던 조선인 군중 소요들을 군중의 정치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설정 위에서 크게 4가지의 개념적 틀에 의거해 분석한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군중을 개인의 '상실'이나 계급 혹은 민족의식의 '결여'라는 근대주의적 주체관에 입각해 접근하는 방법론적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했던 것으로서,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사건의 철학'이라는 이론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식민지 군중의 동학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당시 소요 사태들을 분석했을 때, 1920-30년대 식민지 군중 소요들은 사건의 발발과 전개 발전 그리고 결과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발성과 구경꾼 심리(혹은 욕망) 변이와 이항화라는 동학에 의거해 그 정치가 설명될 수 있다고 접근하였다. 특히, 본 연구는 이 같은 접근의 과정에서 기성 식민지 정치사 연구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례들을 발굴해 사건의 철학이라는 틀 위에서 접근했을 때, 이 같은 역사적 사례가 어떻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시도했다.


This study analyzed the dynamics of civil disobedience and riot behaviors in colonial space during the 1920s and 30s. The research attends to the limitations of modernist analytical approaches that interpret mass participation as a 'loss' of the 'subject' produced through the diminishment of individuality or the blurring of class and national consciousnesses. To this end, this research analyzes colonial mass behavior through the 'philosophy of events,' a recurring theme in the works of post-modernist philosophers like Deleuze. By adopting this theoretical approach, this study provides new findings that explain mass participation in the 1920s and 30s by applying alternative analytical tools and measurements such as the dynamics of contingency, spectator psychology, complex behavioral variation, and factor binomialization. This exploratory work provides an innovative means of interpreting and researching Korea's political history and moves beyond traditional methods, which have often overlooked comparisons between Korea's loose and incidental mass riots and its larger-scale nationalist or socialist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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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6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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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는 다카라즈카에서 조선악극단을 거쳐 위문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조선, 만주국에 걸쳐 순회하는 공연 문화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다카라즈카는 조선의 극단들에게 위문대의 역할모델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문화 권력은 여성 예인을 젠더규범을 통해 순화시키면서 전시체제기의 황군용사라는 남성성을 새롭게 호명하였다. 동시에 그녀들은 일본인 혹은 조선인 황군용사를 직접 찾아가서 무용과 음악을 통해 여성성을 표상하는 위문연예를 수행하였다. 이는 여급과 기생이 만든 위문인형과 위문주머니까지 포함되었다. 위문공연의 관객이자 제국의 남성은 위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동질적으로 상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위문대가 자발적이고 순수했던 오락이나 예능이기보다 문화권력에 의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투영을 위한 매개체로서 전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This article researched tour performances of comfort groups in the colony and empire during wartime. The various comfort groups visited and entertained as a collective and organized unit, providing performances for Korean immigrants in Japan and Joseon, Manchukuo. Takarazuka had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types of comfort groups in Joseon. They entertained Korean men in Joseon who fulfilled the task of construction and war. Those wielding cultural power produced a social narrative that fetishized Korean women in Joseon as good female entertainers during this period. The comfort group conducted unified performances in which they visited mixed groups of Japanese and Korean soldiers to provide 'comfort', which led to their becoming signifiers of femininity. Gisaeng and waitresses reproduced and manufactured such symbols by creating comfort dolls and pouches. The comfort group formed the emotion of the empire's men framed as encouraging entertainment. Furthermore, this means that the imperial ideology trumps the cultural power of pure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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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성대학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와 미군정 초기 대학정책

저자 : 정병준 ( Jung Byung J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5-127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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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크로프츠는 1945년 10월 17일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12월 7일까지 근무했다. 크로프츠는 미군정 학무국 장교 중 뛰어난 학력(시카고대학 석사, 스탠포드대학 박사), 경력(대학 교수), 성장배경(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성장 및 교육) 등을 갖추었고, 또한 경성대학의 재건·복구에 진정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된 크로프츠 대위는 경성대학 이공학부와 법문학부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며, 동양인들에게 대학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주한미군 내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의 재임을 전후해 경성제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경성제대 직원, 학생,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자치위원회와 미군정 학무국, 한국교육위원회 사이에 벌어졌다. 연희전문 출신 백낙준이 경성제대 임시총장이자 법문학부장에 임명되었고, 그를 배척하는 경성제대 출신들의 반대시위가 이어진 끝에 크로프츠가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경성제대와 사립전문의 주도권 경쟁이자 고등교육의 주도권 경쟁이었다.
총장과 학부장 선임문제에 이어 경성대학 교수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교수 선출·임명권을 둘러싼 갈등이자 경성대학의 권력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었다. 이어서 1945년 12월 10~11일 경성대학 총장후보 추천 투표가 이뤄졌고, 학무국과 법문학부 교수진이 합의한 홍명희 대신 공산당원 김태준이 추천되었다.
이 시점에 크로프츠는 경성대학과 한국에 대한 양심적이고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크로프츠는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전출되었다. 이후 지속적 갈등을 겪은 경성대학은 1946년 여름에 이르자 국대안파동에 직면했다. 이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필적하는 교육분야의 대폭풍이었다.


This research provides a biographical investigation of Alfred Crofts, his role as the president of Kyongsong University and orchestrator of the high educatio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USAFIK). Crofts was raised and educated in China, got his PhD in Stanford University and taught in universities before the World War II. It also analyzes two significant disputes related to his university-related work in Korea. After being appointed president of the university, Crofts argued for the withdrawal of USAFIK units stationed in colleges at Kyongsong University. Before his appointment, there was a dispute between the Korean employees, students, alumni, and the Education Bureau of USAFIK over the control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after Japan left. When George Paik of Chosen Christian College was nominated as the acting-president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and the dean of Law and Literature College, wide-spread anti-Paik rallies followed, which led to Crofts serving as Kyongsong University's new president. A second dispute was the power struggle between faculty, employees, students, alumni, and the Education Bureau to nominate the president candidate of the only university in South Korea at the time. Eventually, the USAFIK dismissed Crofts due to his liberal views and enthusiasm for the rehabilitation and rebuild of Kyongsong University. However, after Crofts's transfer to Japan in early February 1946, the dispute within the Kyongsong University worsened and eventually helped to instigate a nationwide student strike in the summer of 1946 against USAFIK's plan to create a new university,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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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쟁포로의 또 다른 경계 ―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수용소 연구

저자 : 정찬대 ( Jeong Chand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76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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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 인민군은 각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후 전선이 북상하고 수복기가 되면서 군경에 의한 후방 토벌작전이 본격화됐다. 그리고 수많은 입산자들이 토벌과정에서 빨치산 포로로 분류·처리됐다. 이들은 작전지역 내임시수용소를 거쳐 광주중앙포로수용소로 모두 옮겨왔다.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연구는 거제포로수용소에 편중된 측면이 컸다. 빨치산 연구 역시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생성 과정과 입산 후 활동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전쟁포로로서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떻게 관리됐으며, 이후 포로처리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실태 분석을 통해 이를 면밀하게 살피고 자 했다. 본 논문은 구술 면담자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뤘다. 이를 통해 빨치산포로들의 처우, 감찰, 신문 과정 등을 들여다본 것은 물론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시설도까지 복원이 가능했다. 또 미군 보고서 등의 분석을 통해 광주중앙포로수용소 현황 및 실태 등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1952년 광주중앙포로수용소는 한 차례 명칭이 변경됐다. '포로'라는 이름을 빼 '광주중앙수용소'로 불린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그 배경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초 '민간인 억류자'들이 별도로 분류되지 않은 배경 또한 분석이 이뤄질 수 있었다. 빨치산 포로수용소는 그간 한국전쟁기 포로 연구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 논문은 빨치산 포로를 분석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At the beginning of the Korean War,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quickly occupied and controlled several areas of the peninsula. As the front moved north and the recovery period began, the rear subjugation operation by the military and police began in earnest. Many people who entered the mountain were classified and treated as partizan prisoner of war during the subjugation process. They were transferred to the Gwangju Central POW Camps through a temporary camp within the operation area. Studies on POW camps during the Korean War are often biased towards Geoje POW camp. Partisan research also focused on the creation process of partisan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and their activities after that. This thesis differs from previous studies by concentrating on the 'partisan prisoner of war' itself. The testimonies of interviewer serve as the main source of data. It then explores the treatment, inspection, and interrogation processes of partisan prisoner of war, and investigates the restoration of Gwangju Central Prison Camp facilities. The current state of the Gwangju Central Prison was identified in detail through the analysis of the US military report. In 1952, the name of the Gwangju Central POW Camp was changed. This work focused on this change and traced the background. In this process, the background in which 'civilian internee' were not separately classified at the beginning of the war could also be analyzed. Partisan POW camps have been neglected in Korean War POW research. In that respect, this paper presents another implication in analyzing partisan prisoners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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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7-20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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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This study examines enemy cemeteries created in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hese enemy cemeteries were created in accordance with the Geneva Conventions. However, though the US Army was not a signatory to the Convention, it soon joined after entering the war, which led to a graves registration system for those killed in action and for the repatriation of remains. Therefore, it was not until around September 1950, when graves registration was systematized to some extent, that the enemy remains were first buried in some areas of US Army Cemetery in Busan. Furthermore, the Enemy Cemetery Number 2 was built and started operation in December 1950. At the same time, as UN Military Cemetery was created, the existing US Army Cemetery was converted into the Enemy Cemetery Number 1 in mid-April 1951. While numerous 'transfer of remains of the dead' took place after the signing of a repatriation agreement in 1954, the number of burials in the Busan enemy cemeteries was 8,602, including 1,691 in the 1st Enemy Cemetery, 5,459 in the 2nd Enemy Cemetery, and 79 in the Memorial Temple, accounting for 2/3 of the total repatriated remains. The remains buried in these enemy cemeteries include not only North Korean and Chinese People's Army, but also South Korean soldiers. There were also many civilian internees of different nationalities buried in these cemeteries. Although many were transferred during the verification process, foreigners were also included. These enemy cemeteries in Busan, where most of the enemies' remains were buried, was not simply a graveyard for the enemy. It was a graveyard with complex significance, for it was not merely one for Korean soldiers but also one that held civilians and foreig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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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투사 중심 재현을 넘어선 한국전쟁의 대안적 전시 ―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와 < 허락되지 않은 기억(RESTRICTED) >을 중심으로

저자 : 김민환 ( Kim Min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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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쟁기념관의 전시를 상대화하기 위해 기획된 두 전시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와 < 허락되지 않은 기억(RESTRICTED) >의 내용을 소개하고, 전시 기획의 과정 및 실제 전시 과정에서 발생한 쟁점과 사회적 '소란'과 논란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기념관의 전시는 군인의 관점에 기반해서 전투사 혹은 전사(戰史)로서 재현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 두 전시는 전쟁포로와 민간인이 겪은 전쟁 체험을 부각하려고 시도했다. 관점의 전환 자체가 한국전쟁이 전시로서 재현될 때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민간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절대로 발발하면 안 되는 사건임이 강조되었다. 이 두 전시를 통해 전시 장소의 상징성이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전시로 다루는 방식, 전시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 등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 '금기'의 일단이 드러나기도 했다.


This work introduces the contents of the two exhibitions, Prison of War, Yearning for Peace and Memory Not Allowed (Restricted), which were designed to relativize the War Memorial of Korea. This research examines the issues that occurred during the exhibition planning process and the actual exhibition, as well as social 'turbulence' and controversies. Although the exhibitions at the War Memorial of Korea tend to represent the Korean War as 'the history of battle' based on the soldier's point of view, these two exhibitions attempted to highlight the war experiences through the experiences of prisoners of war and civilians. The change of perspective itself had the effect of making familiar things 'unfamiliar'. It was also emphasized that, from a civilian's point of view, war was not an option but an event that should never happen. Through these two exhibitions, one part of our society's taboo on the Korean War was revealed, such as the symbolism of the exhibition site, the way the theme of the Korean War was treated as an exhibition, and the boundaries of what should not be revealed in the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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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70년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과 교관의 교육 경험 다시 읽기

저자 : 윤충로 ( Yoon Chung-r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1-28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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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교육은 새마을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던 문화적 기제인 동시에 그 자체가 대규모 국가동원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 교육의 중심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었다. 이 연구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교육을 통해 국가의 의도가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되는 미시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관 2명의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이들의 교육 경험과 일상, 연수원 교육의 특성을 재구성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교관의 활동 공간이었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특징을 검토했다. 둘째, 연수원 '교관되기'와 '교육 일상'을 교관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셋째. 교관의 교육 업무를 그들의 '노동 경험'으로, 그리고 연수원 교육을 일종의 '집합적 열광'의 구축과정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또한 교관의 상징적 의미와 교육의 효과를 살펴봤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은 국가의 대중정치, 대중동원 방식, 이와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동의기제 형성과 그 한계의 구체적 일면을 보여준다.


Saemaul education was a cultural mechanism that suggested the vision of Saemaul Undong, and it was a large-scale national mobilization exercise. In the 1970s, the epicenter of Saemaul education was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 This study examined the microscopic process in which the state's intentions were transmitted to Saemaul leaders through the education offered at the institute. Using the oral histories of two former institute instructors, I reconstructed their experiences in daily life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stitute's education. This article contains three parts. First, I review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 which was the instructors' space of activity. Second, I reconstructed “becoming an instructor” and “daily education life” at the institute based on the instructors' oral testimonies. Third, I re-read the instructors' teaching as their 'labor experience', and the institute's education program as a process of building a kind of 'collective effervescence'. And I also examined the symbolic meaning of instructors and the effects of education. The Saemaul Leadership Training Institute's education shows the state's mass control politics, mass mobilization, and one aspect of the specific process of creating a mechanism for consent from below, and its lim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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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95년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나타난 '정신질환자'의 정의 ―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변화

저자 : 이정연 ( Yi Jungye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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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95년 '정신보건법'의 제정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정신질환자의 정의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를 고찰한다. 약 25년간의 정신보건정책 역사는 정신보건법의 제정·개정 과정과 정신보건사업의 변화를 토대로 분석된다. 이를 기반으로 정신질환자의 정의변화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정신보건법 제정 직후까지 정신질환자는 주로 만성적인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서 전문기관의 격리 입원이 필요한 자들로 규정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뿐 아니라 정신질환의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일상적인 정신관리가 필요한 사람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신질환자', '정신장애자', '기능저하 정신질환자'라는 개념이라는 혼재했다. 이후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만 지칭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정신보건정책은 대상과 방식이 분리되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증진'의 이중적 관리체제로 분화되었다. 지역의 통합적 관리체제 속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었고 전 국민 대상의 정신건강증진사업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적 정의변화에도 불구하고 '강제입원의 대상자'라는 내포적 정의는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강제입원의 정당성은 정신보건정책의 법제화와 제도화 속에서 권리, 보호, 돌봄의 논리를 통해 유지되었다.


This study examines changes in the definition of 'person with mental illness' in public health since the enactment of the Mental Health Act in 1995. For 25 years, changes on mental health policy have been based on revisions of the Mental Health Act and historical changes in mental health services. This research locates these definitional changes in three periods. Until just after the enactment of the Mental Health Act, mental illness primarily referred to people with chronic severe mental illness that required hospitalization at specialized medical institutions. By the 2000s, however, this definition expanded to include people with severe illness, people susceptible to mental illness, and those in need of daily mental management. Various concepts such as 'a person with a mental illness', 'a person with a mental disability', and 'a person with dysfunctional mental illness' were mixed during this period. Later, the definition of a person with mental illness was narrowed to refer only to those with severe illness. The mental health policy was also differentiated into a dual management system of 'mental illness' and 'mental health promotion'. Through the regionally integrated management system, surveillance and control of people living with mental illnesses were strengthened, and mental health services for all citizens were expanded. Despite changes in the denotative definition of a person living with mental illness, the connotative definition stipulating 'subject to compulsory hospitalization' remained as part of the working definition for a long time. The legitimacy of compulsory hospitalization was founded on a logic of rights, protection, and care and legislated, institutionalized in mental health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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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의 배우자관 ― 여성지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을 중심으로

저자 : 방미화 ( Fang Meihua ) , 예성호 ( Rui Shenghao ) , 김흠 ( Jin Xi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3-37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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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에 대한 텍스트 마이닝 분석을 중심으로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지향의 '역행'현상에 고찰하였다. 1960~1970년대 조선족 여성들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은 노동자, 군인 등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인 1980~1990년대에는 공무원, 사업가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사업이 있는 남자,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배우자 선택관의 변화는 국가의 경제체제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체제 하의 여성들의 취직난, 경제체제 변화에 부응한 남성들의 창업, 나아가 1980~1990년대 조선족 여성들의 이중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변화 등 요소들이 맞물려 여성들은 사업이 있거나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면서 자신들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지향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여성들이 사업심이 강하고 사업이 있는 배우자를 선호한 것은 결코 혼인에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남성에 의탁하여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사회에 진입하면서 여성들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해 부의 축적을 욕망하는 등의 시대적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 성 역할의 강화 내지 지속은 조선족 여성들이 젠더 정체성 수행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문화는 단번에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들의 행위에 의해 지속, 해체, 생성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변화되는 것이다.


This paper uses text mining methods to analyze Yanbian Women's < Ojakgyo >. It also investigates the “retrograde” phenomenon of Korean women's traditional gender division of labor after reform and liberalization. During the 1960s and 1970s, Korean women chose to marry workers and soldiers. However, starting in the 1980s, more women became civil servants and entrepreneurs and preferred men with stable careers and, presumably, with greater ambitions. This change of mate selection coincided with national economic changes. After the reform, it was difficult for women to acquire desirable employment, and men's entrepreneurship became a new systemic way to adapt to market changes. In particular, between the 1980s and 1900s, Korean women faced a double burden of finding a job and adjusting to the rise in male-centered entrepreneurism. They had to deal with a new social consciousness that expected them to seek ambitious men while maintaining traditional divisions of labor and fulfilling their familial responsibilities. However, women did not simply forego all independence and rely on men to live; women became important actors in consumer society. The accumulation of wealth and living richer lives became crucial values for them. Such pursuits became the rising raison d'etre of the times. Yet, gender roles remained cemented in tradition and Korean womens' belief that spousal responsibilities reaffirmed their Korean identity. Despite today's turn toward a new, more liberal era, parental culture, while influenced considerably, remains a persistent phenomenon that maintains much of its earlier forms but with minor adjustments to account for systemic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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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도론(獨島論) ― 군사주의를 넘어서

저자 : 전경수 ( Chun Kyung 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9-43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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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독도에 관련된 군사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군사주의적 인식을 해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발발로 인하여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급선회하였고, 미국은 그때부터 군사적인 차원에서 태평양체제를 운영해왔고, 연합군의 일본“점령” 통치를 겪으면서 태평양체제에도 일련의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작금 미국은 대중국/대러시아 용의 군사적인 인도태평양체제를 확립하였다. 즉 과거의 태평양체제가 인도 태평양체제로 전환함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화에는 미일적대의 관계로부터 미일동맹의 관계로 변화한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과거의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밀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일관계의 변화가 독도 영유권이라는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예측적 관찰에 대비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부차적인 목적이다.
1900년 독도의 영유권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포고령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일언 반구도 않고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노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대한제국의 동해안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강압적 협약을 맺었다. 노일전쟁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문을 작성하였다. 그 과정에는 일본해군의 수로부장을 역임하였던 키모츠키 카네유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하는 것이 본론의 일부이다. 본고에서 독도론의 배경에 깔린 군사주의를 논하는 전반부에 해당되는 내용인 키모츠키의 역할과 노일전쟁 중의 일본해군의 군사적 활동을 살펴본다. 독도의 영유권에 얽힌 두 번째의 군사주의적 맥락은 미국해군과의 관련성에서 논증된다. 일본에서 변호사 업무의 경험을 갖고 있는 윌리엄 시볼드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미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였고, GHQ의 일본점령 통치기간에는 외교국장을 역임하였다. NARA에 보관된 GHQ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미해군이 작성한 지도는 점령후 일본의 영토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축소된 지도를 제시하였다. 그 속에 표기된 독도는 “Korea”의 소속으로 명기되어 있다. GHQ의 초기 자료에도 일본영토의 표기에 있어서 최소원칙은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GHQ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본고에서 지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직전에 윌리엄 시볼드는 “타케시마”는 일본영토라는 의견서를 제출하였음도 확인되었다.
변화된 태평양체제를 배경으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미국과의 군사적·외교적 관계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제 변화된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미일관계가 밀접한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독도 영유권의 문제가 어떠한 지위에 놓일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독도의 영유권에 개입되어 온 군사주의적인 상황들이 앞으로 전개가능한 군사주의적 변화체제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할지에 대해서 심사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와 관련된 군사주의에 개입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영유권 외교를 전개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sovereignty of Dokdo (Takeshima in Japanese) through an analysis of the militarism that started with the island's controversial position as a territorially disputed area. With the outbreak of war in East Asia in 1941, US-Japan relations took a hostile turn. The US created a so-called 'Pacific system' founded on geopolitical militarism. This system is moving towards a new 'Indo-Pacific system' militarized against the PRC. Japan's role has consequently grown heavier, and its status increasingly mimics what the US had with its Pacific system. The Korean government declared sovereignty over Dokdo in 1900, while Japan neglected the island. At the time, Japan was preparing for war against Russia. Japan thus forced Korea to accept a treaty to use Korean territory for military bases and military communication facilities. Japan declared sovereignty over Takeshima (Dokdo) during the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in 1905. The Japanese Navy purportedly prepared a declaration with General Kimotsuki Kaneyuki as the key person in charge of hydrographic measurement in the sea. This author considers him an initiator who promulgated sovereignty over Takeshima through discussions with fishers in Okinoshima. Such is the case of Japanese militarism related to sovereignty over the island. The second case was related to the US military during its occupation of Japan after World War II. The US Navy created a map for occupation in 1944. Though the GHQ applied the minimum principle to analyze their political data when it previously denoted Japan's territory, the map clearly indicates Dokdo as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document kept the prime position even while William Sebald was a high-ranking officer in Navy Intelligence and in charge of GHQ's foreign affairs after the war. He submitted his memorandum about Japanese sovereignty over Takeshima before the San Francisco treaty between USA and Japan in 1952. I would say that this could be the 2nd case of militarism related to sovereignty over Dokdo.
There must be a closer relationship between the USA and Japan concerning their militarism, especially with this new Indo-Pacific system. This author would like to point out that this changing system from the Pacific one to an Indo-Pacific one potentially affects the sovereignty over Dokdo favorable to Japan with US support agains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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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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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중국에서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개념 자체만 보더라도 전통적 한자 개념이나 문명 개념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차대전 종결 이후 '문화주의' 철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일본에서 문화 개념이 실천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자 곧 이어 신문화운동이라는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주의라는 철학적 바탕이 없는 채로, 구문화와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강력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수용된 '문화론'은 다시 조선의 전통='국수(國粹, nationality)'에 대해 주목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강화하였다. 병합 이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국수보존운동'은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었으나 1910년대 국수보존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명 개념의 지속성 혹은 문화 개념의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의 적극적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3.1독립선언서」로 수렴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과 개조론을 잇는 매개가 바로 문화 개념 혹은 문화론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신문명의 시대 곧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저항권이 용인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 개조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적 연결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3.1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문화의 권리장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사조는 문화론과 결합하여 대단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근대의 성격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3.1운동은 이전의 문명론적 위계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1920년대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근대(colonial modern)'의 상호성이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윌슨·루스벨트적 자유주의 기획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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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저자 : 백승욱 ( Baek Se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9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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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3.1운동 이면에 있는 곤경을 '사상사의 부재 또는 취약함'으로 해석한다. 이를 위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변동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등장한 '단절의 역사 담론'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전개된 사상사적 전환의 노력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관찰점을 검토한다. ① 20세기초 동아시아가 겪은 국제질서의 독특성,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단절의 근대 담론'의 특징. ②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비교. ③ 3.1운동이 형성시킨 사상사적 질문. ④ 임시정부 법통의 질문이 사상사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난점. 분석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패러다임'의 문제를 확인하였는데, 이 패러다임은 '우리 민족'의 경계를 한민족과 이를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로 구획하는 대신, 우리 내부에서는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의 상상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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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회적 저항경험은 어떻게 교육주체 형성으로 이어졌는가 ― 삼일운동과 교육주체 형성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2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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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중등학생들이 어떻게 교육주체로 형성되어 갔는가를 탐구하였다. 학생들이 교육주체로 형성되는 데는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이 맡았던 독립선언서 배포, 읽기, 쓰기, 그리고 공적 말하기와 같은 문해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해학습자로서 중등학생들은 삼일운동 당시에는 학교가 소재한 대도시에서 출신지역으로 귀향하여 대도시와 출신지역을 잇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자결과 인류공영의 정신을 접한 학생들은 삼일운동 후 학교로 돌아가 그들에게 일상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였던 교육문제로 1920년대 내내 학교와 일제당국에 맞서 동맹휴학을 벌였다. 동맹휴학 운동을 위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공적인 말하기와 글쓰기를 전개했다. 각종 성명서와 지지성명을 통해 학교 간, 학교와 사회단체 간, 조선과 일본 사이를 연결했다. 교육 아닌 것(비(非)교육)에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 교육을 주창하였다. 삼일운동부터 1920년대까지 지속되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암기하고 주해하고 평가받는 문해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생성하는 문해활동을 체험하며 교육적 주체로 형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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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운동과 기념일의 역사화

저자 : 김미화 ( Jin Mei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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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고종의 승하와 因山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민중은 고종을 애도하기보다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주목할 것은, 행진과 만세 부르기라는 시위방식이 본래 군주의 탄신일 축하행사를 통해 보급된 의례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이후 행렬과 만세 연호는 식민지기 대중시위 방식의 원형이 되고, 매년 3.1운동을 기념하려는 시도 자체도 독립운동의 일부가 된다. 임시정부는 3.1절, 국치일,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을 기념하면서, 일본제국의 시간질서에 대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달 넘게 지방별로 일어난 많은 시위가 '3.1'이라는 하나의 날짜로 묶였다. '만세'의 다의성이나 폭력시위의 존재는 잊혀졌다. 1919년 3.1운동은 한국 국민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이고, 3.1절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최초의 국민적 기념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후대의 기념일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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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저자 : 문현아 ( Moon Hyuna ) , 차승은 ( Cha Seung-eun ) , 은기수 ( Eun Ki-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5-1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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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수면에 관한 연구는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아직까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연구는 『쇄미록』과 『병자일기』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일기 기록에 나타난 잠에 관한 언급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일기자료에서 수면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잠을 기록한 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였다. 특히 일기에서 잠을 기록하는 경우의 시/공간적 맥락을 비추어 볼 때 '잠을 잤다'는 기록이 단순히 수면의 유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숙박의 의미, 접대를 하는 의미 등도 있고, 잠을 자는 시간대인 밤, 그리고 밤 시간대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밤 시간대와 연결해서 일기 기록에 담긴 의미를 따라 불면의 상황이나 잠자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를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잠과 밤시간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 행위들을 재구성해서 수면이 발생하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암흑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일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임을 조망하였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활동 중 수면이 갖는 사회관계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 규범의 틀과 맞물려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분석을 시도했다. 이 연구는 기존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수행한 탐색적 연구이지만 수면을 둘러싼 조선시대 일상의 새로운 측면을 접근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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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역사인구학 지표로 살펴본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 1734~1910

저자 : 우대형 ( Woo D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59 (6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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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가격의 단기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당대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간주된다. 단기적인 생산충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흉풍의 단기적 변화에 대해 사망률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생존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조선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면, 단기적인 생산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였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있었다면 사망률 민감도는 점차 둔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1734~1910년 간 곡물가격의 연간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곡물가격과 사망률 시계열은 兩班家와 그 친족집단이 남긴 쌀값 자료와 족보로부터 구하였으며, 모형은 시차분포모형을 사용하였다. 추정 결과, 미가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19세기 초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둔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본 논문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다가 개항 또는 20세기 식민통치의 시작과 함께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는 기존 연구의 주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19세기 초 최저점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으며, 그 증가가 20세기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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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말 식민지기 통영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새로운 추모의례 조직

저자 : 이진욱 ( Lee Jin-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1-28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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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은 '민족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한말 이후부터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이 실제 활동하였던 통영 지역은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 연구는 한말 식민지기 통영의 새로운 추모의례인 '탄신제(誕辰祭)'의 출현에 주목하였으며, 이 시기 통영 지역사회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문화적 상징을 둘러싸고 여러 집단들이 보여준 문화적 대응의 양상과 그 의의를 논의하려 한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통제영이 폐지될 즈음 통영에서는 탄신제가 거행되고 '충무공 생신계(生辰稧)'가 조직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통영 충렬사에 전승되고 있는 『충무공대감생신계좌목(忠武公大監生辰稧座目)』을 분석하여 계의 구성원들이 결성 초기부터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엘리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폐쇄적 멤버십을 유지한 생신계는 통영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새롭고 다양한 계층과 충무공에 대한 그들의 기대도 아울러 포섭하려 하였다. 생신계는 1919년 여러 단체를 규합해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統營忠烈祠永久保存會)'를 조직하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를 주도하였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가 지역사회에서 확대되고 다층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KCI등재

8이행기 정의를 통해 본 일본 한센인 운동, 1946~2009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 오하나 ( Oh Ha 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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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0년 가까이 지속된 「나예방법」에 의하여 한센병시설에 일평생 수용당해야만 했던 한센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사회의 노력을 이행기정의 개념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이행기정의를 응보적 정의, 회복적 정의, 변혁적 정의로 구분하고, 일본 한센인 운동을 크게 ① 이행기 정의 실현 예비기, ② 응보 및 회복적 정의 실현기, ③ 회복 및 변혁적 정의 실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국면인 법 개정 및 폐지 운동기는 아직 이행기 정의 개념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변혁적 정의가 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이 시기에 당사자 단체가 형성되었고, 전문가 집단이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국면인 배상청구소송기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가 동시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소송을 통하여 행정부 및 입법부의 잘못이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사과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센병문제기본법 제정기는 회복적 정의와 변혁적 정의가 동시에 추구되는 시기였다. 피해회복의 개념을 더욱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한센인에 대한 유사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명시함으로써 사회문화적 구조에 대한 변화를 추구했다. 일본의 한센인 운동 사례를 통해 이행기 정의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으며, 실천적으로는 정의를 성취하는 단발적인 사건보다는 운동의 축적된 역사적 경험이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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