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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마음의 고고학-향수를 넘어서 성찰로, 잃어버린 마음/행동/태도에 대한 책임의 인문학

Neo-Liberalism and Archaeology of the Mind - Beyond Nostalgia toward Reflection, Humanities of Responsibility on Lost Mind/Behavior/Attitude -

최기숙 ( Key Sook Choe )
  •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 동방학지 16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4년 09월
  • : 245-284(40pages)
동방학지

DOI


목차

1. 전제들: 투명한, 삶의 조건들에 대한 검토
2. 신자유주의의 일상 지배와 파행적 징후들: 역설과 곤경
3.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감성 교육과 책임의 인문학
4. 결론: 일상과 관계의 심미성 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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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징후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에 주목하되, 특히 대학사회(학생/교수)에서 ‘경쟁주의’와 ‘성과주의’가 개인의 인성과 인간관계에 어떠한 파행적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디지털 정보화 사회’의 특성과 맞물릴 때, 어떻게 인간의 삶(품성ㆍ관계ㆍ일상)을 ‘마모시키는지’를 분석했다.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삶을 정향하는 태도는 ‘자기계발의 역설’을 파생시켰다. 또한 디지털 정보화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일종의 인적 자산으로 환치되는 과정에서 ‘소통의 역설’이 발생했다. ‘소통의 역설‘이 ‘스펙 쌓기’의 신드롬이 결합되면서, 시간의 역사성과 직접성, 경험을 전제로 한 인간관계는 활용 가능한 ‘인적 자원’으로, 친밀한 관계성은 ‘정보성’이라는 가치로 변용되었다. 그리고 ‘인맥’의 개념이 일정정도 인간관계를 대체한 것은 인문성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동반했다. 대안적 차원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제기되었지만, 오히려 이는 인문학이 일종의 지식 소비 형태로, 실용적인 자기 계발 지침서의 형태로 소비되는 풍토로 이어져, 본래의 성찰성을 질문할 사회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학적 진단은 과잉상태이지만, 이를 극복할 대안은 빈곤한 편이다. 대항의 형식에 대한 ‘발명’을 권고하거나 개인적 실천, 장소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형성과 가치기준의 제안이 제출되었으나, 대체로 실천의 역할은 개인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인문학이 비평의 언어를 확보하는데 집중했으나 성찰의 언어를 습득하는데 소홀했던 점을 지적하고, 성찰과 책임이 뒷받침된 비평의 학적 태도에 대한 재정립을 제안했다. 전통시기의 생애성찰적 글쓰기를 성찰의 자원으로 삼아 ‘공감-능력’과 ‘성찰-윤리’의 감성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품성의 돌봄에 대한 훈련을 통해, 공생과 협력의 태도를 익히는 관계의 심미성 회복을 제언했다. 이를 통해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었던, 이제는 ‘고고학’이 되려 하는, 마음과 품성에 대한 인식, 성찰, 실천 방법을 제안했다.
This paper analyzes the symptomatic experiences in everyday life which are related to neo-liberalism, especially focusing on a university society (student/professor), how the ‘competition principle’ and ‘outcome principle’ as side effects of neo-liberalism influence individual personalities and human relationships, and how such side effects weaken human life (personality, relationship, ordinary life) when engaged within a digitalized information-oriented society. When students and professors at universities began to adapt themselves to neo-liberalism, it led to the ‘paradox of self-improvement’ (the more they concentrate on self-improvement, the more they self-alienate themselves). In a digitalized information-oriented society, human relationships were substitutes for the human property, were related to a purpose-oriented object, causing the ‘paradox of communication’ (i.e., discord between communicative quantity and quality, an uncorrelated relation between communication speedup and the value of friendship/respect/cooperation). This paper discusses the academic tendencies of neo-liberalism and suggests the following conclusion. First, most analyses focused on diagnosing crises in contemporary society which were influenced by neo-liberalism, but they lacked a strategy or method to overcome the negative effects. Second, most methodologies in the humanities concentrated on the criticism itself, not on reflective behaviors. This paper suggests a reestablishment and the development of reflective critical terms and ways of thinking based on responsibility and practice. Third, this paper analyzes personal terms through traditional writings which are life-reflective texts as a form of historical heritage about humanities. Fourth, this paper insists that universities organize a new humanities educational program to cultivate students` empathetic abilities, and their potential to develop an ‘ethics of reflection’. With these social and educational practical ideas, the university should dedicate itself to promoting in social agents a collaborative attitude, with harmonious symbiotic ideas and an aesthetical perspective toward human society and human beings we well.

UCI(KEPA)

I410-ECN-0102-2015-900-000172296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6728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4-2017
  • :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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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권0호(2017년 09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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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후기 새로운 국가구상의 전통과 『경세유표(經世遺表)』 - 『반계수록』 이래 남인(南人)의 전제론(田制論)과 결부하여 -

저자 : 정호훈 ( Jeong Ho-hu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3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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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는 이전 시기 『반계수록(磻溪隨錄)』과 같은 책에서 시도한 새로운 국가구상의 전통을 계승하며 저술되었다. 필자는 이 두 책에 대한 비교 분석을 통하여 『경세유표』 국가론의 성격이 어떠했던 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작업 과정에서 특히 주목한 점은 국가구상의 핵심을 이루던 전제(田制)의 특징, 그리고 이와 연관되는 국가 성격의 변화였다.
『반계수록』에서 『경세유표』에 이르는 동안새로운 국가구상의 핵심을 이루었던 사안은 사유재산제에 기반한 농업경제·토지제도가 만들어 내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두 책의 저자는 당시 조선의 모든 문제는 지주전호제로부터 비롯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국가를 기획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반계수록』에서는 전 토지를 공전화(公田化)한 공전제를 기반으로 국가 체제를 구상했고, 『경세유표』에서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이 일정한 비율로 균형을 이루는 토지제도가 실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자의 방식은 개개인이 가지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혁명적으로 제한하여 국가가 이를 온전히 관리하는 성격을 지녔다. 후자는 사적(私的) 토지소유를 인정하는 위에서 국가가 경제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공전을 확보, 공전과 사전이 균형을 이루는 체제로 기획되었다. 당대 농업·농민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반계수록』에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을 중시했다면, 『경세유표』에서는 공전(公田)의 확보를 바탕으로 사전(私田)의 확장을 제한하는 한편 상업과 수공업 등 전 산업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주목했다.
『반계수록』에서 『경세유표』에 이르는 동안 논의되고 형상된 새로운 국가상은 조선후기 대변화를 꿈꾸었던 사회 일각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거니와, 국가·사회·인간의 혁신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어떠한 내용,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해갔던 지를 풍부하게 알려준다.


Gyeong'se yupyo (經世遺表) was written to perpetuate the tradition of the new national construction idea, which books such as Pan'gye surok (磻溪隨錄) had started. This paper examines the nature of the theory of national self-governance through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se two books. It identifies the character of the land system as making up the core of the national idea in the two books, and the change in national character associated with it.
At the core of the new national Concept from Pan'gye surok to Gyeong'se yupyo was the question of solving the problem of an agricultural economy and land system based on an private property system. As the authors of both books believed that all the problems of Chosun originated from the land system, it was natural for them to plan national governance around it.
In the Pan'gye surok, the system was designed in such a way as to make the whole land a common land. On the other hand, In the Gyeong'se yupyo, the state was designed to be built on a land system in which common land and private land were balanced in a certain ratio. The former method revolutionized the private ownership of each individual, and the nation managed it completely. In this national system, the land system would be hidden. The latter method promoted the securing of common land using the economic method to recognize the private property system. In this system, there would be an appropriate balance between shared land and private land, and the private ownership land scheme would not been dismantled by direct pressure from the state power.
To solve the agricultural and farming problem, Pan'gye surok chose to distribute the land to farmers, while Gyeong'se yupyo focused on reducing the tax burden on farmers and promoting all industries, including commerce and handicrafts.
This analysis shows that the national conception had greatly evolved in terms of feasibility from Pan'gye surok to Gyeong'se yu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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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세유표』를 통해서 본 복지국가의 전통

저자 : 김용흠 ( Kim Yong-heum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39-6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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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장구한 기간 우리나라 중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대토지 소유를 해체하여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점유하고 식량 생산을 전담하게 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전제를 시행할 것을 구상하고, 국가가 공전을 마련하여 이러한 원칙을 실천한 뒤, 구일세법을 관철시켜 지주제를 해체하려고 구상하였다.
19세기 삼정 문란의 주범이었던 환곡 제도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제거하여 진휼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장구한 기간국가가 진휼 정책을 통해서 국민을 보호하려 한역사 전통을 계승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곡 제도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원곡이 고갈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상평곡을 설정하였다. 그가 제안한 상평곡 운영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른 미곡의 상품화를 활용하여 미가 조절을 통해서 진휼곡을 확보하려는 전진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민의 자발성을 활용하여 추진하려고 구상하였다.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구일세법을 강조한 것은 소작농들의 자발적인 지대 거부 운동을 유도한 것이었다. 또한 부공제도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공론에 입각하여 운영하려 하였다. 특히 환곡을 리 단위로 분배하자고 제안한 것은 조선후기 사회변동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서민 계층을 활용하여 진휼기능의 실효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향촌을 비롯한 각종 경제 공동체에서 민의공론과 자치 능력을 신뢰하고, 그에 의지하여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정약용은 사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지만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지만 매점매석과 같은 자본의 횡포는 국가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자유 방임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구상한 국가는 그 역할과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In his work Gyeongseyupyo (經世遺表), Jeong Yak-yong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Kingdom of Joseon. As tenant farming had become a severe chronic problem in the 19th century, he tried to collect ownerships from landlords and to distribute the lands to truly active farmers. He applied a moderate version of the well-field system(井田制, an ancient chinese land distribution method) to boost productivity. Per his plan, the government organized public farmlands first, and enforced a strong tax system with the collection of one-ninth of the crop.
Jeong Yak-yong also tried to inherit and to restore the national relief policy (賑恤政策) by purifying the most corrupt―hwangok (還穀)―system. He intended to prevent abuses of the system, and designed sangpyeongok (常平穀) to secure the supply of relief rice.
Although Jeong Yak-yong objected to the privatization of land property, he did not hold socialist ideals. He accepted the market economy model, albeit with governmental intervention rather than adhering to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its role and function, the national organization suggested by Jeong Yak-yong's Gyeongseyupyo can be considered a precursor of today's welfar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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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대 전환기 다산 저술의 출판과 승인 :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저자 : 김선희 ( Kim Seonhee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67-9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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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근대 전환기에 각기 다른 주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다산 정약용 저술의 공간(公刊)에 나타나는 당대의 문제의식과 지향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다산의 저술은 1902년 근대적 출판 기관 광문사(廣文社)를 통해 조선 지식장에 낯선 방식으로 등록되었다. 이들이 다산의 저술을 전통적인 문집 출판 방식과는 달리 연활자를 통해 근대적 출판물로 간행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다산의 사상은 인쇄물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근대 지식장으로 이식되었다. 다산에 대한 학술적 평가와 기대 역시 변화한다. 서양 학술을 학습한 강화학파 이건방은 『경세유표』 안에서 조선의 루소이자 몽테스키외로서의 다산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 다산은 재조(在朝) 일본인 출판업자들에 상업 활동에 의해 지나간 시대의 '고서(古書)' 혹은 '진서(珍書)'로 봉인된다. 재조 일본인들의 상업적 출판활동에 맞서 독자적으로 조선의 문헌을 수집하고 간행했던 것은 조선광문회를 이끈 최남선이었다. 조선광문회의 출판 기획은 이른바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근대 조선의 지적 자원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새로운 계보는 '고서'라는 한정된 이름 아래 성립되었다. 서구 근대성의 관점에서 조선의 지적 자원을 한정 승인하는 경향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이 한정 승인의 효과는 여전히 실학에 관한 현재의 논쟁에 남아 있다.


This paper set out to examine the contemporary general critical views on Dasan's ideas, as well as the publisher's possible intent behind the publication of written works by Dasan Jeong Yakyong, with a focus on the Gyeongseyupyo. Each different group of subjects played a role in the transition from old traditions to modernism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The written works of Dasan were published in 1902 by Gwangmunsa, a modernized publishing company, in a way that was considered unconventional in the intellectual landscape of the Joseon Dynasty. The publication was considered unconventional as the book was published using a modern soft type method, which differed significantly from previous, traditional printing methods. This newly developed process made it possible to release Dasan's thoughts into the modern knowledge field, in which printed materials were distributed to and accessed by the general public. However, from 1910, Dasan's writings were sealed as old books titled "Ancient Texts" or "Rare Books" by Japanese publishers in Korea. At that point, the Joseon Gwangmunhoe had formed a unique plan for the publication of texts: to reconstruct the Joseon Dynasty's intellectual resources under the name of Silhak. Ironically, however, the new genealogy had been established through an obsolete name called "Ancient Texts." The Joseon Gwangmunhoe only approved selected volumes of texts that met the requirements of Western modernity―including Dasan's writings―under the category of Ancient Texts. It was prevalent among publishers of this period to grant restricted approval from a modern, Western perspective with regard to the intellectual resources of the Joseon Dynasty, including Dasan's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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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남 지식인의 정체성: 정치사회변동과 자기 결정성

저자 : 한성훈 ( Han Sung-hoo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99-13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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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있는 이산 1세대 월남민의 정체성을 분석한 글이다. 생애사의 관점에서 비교적 소상한 행적을 알 수 있는 네 사람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분단과 근대 이행에서 그들의 활동이 법치주의와 산업화, 민주주의 사회운동, 그리고 통일운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출신 배경과 학업, 활동 무대, 삶의 지향이 다르지만 '지식인'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개별성으로 볼 때 이런 설정에 편차는 존재한다. 그들은 월남민 전체를 대표하지 않으며 정체성 또한 자아의 형성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사람의 행위를 설명할 때 그들의 행동이 어떤 준거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이 준거에서 그들은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재구성했는지가 중요하다. 구술자료와 자서전, 회고록, 언론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는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s)를 활용해 남북한의 체제 변동과 이산, 개인의 삶에 끼친 영향에 주목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해본다.
정체성은 일제 강점기의 어린 시절과 이북의 교육, 사회주의 체제 이행, 남한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영향을 받는다. 긍정의 방식과 부정의 방식으로 정체성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 이북의 사회주의체제 이행에서 체험한 것과 그 이후의 북한 현실이다. 남한의 정치사회변동과 미국의 존재가 정체성 형성에 끼친 영향도 유사하다.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생애 시기마다 변하며 여러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변형적인 것이다. 인간은 객관적 조건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관적 인식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의 본질은 자기 결정성에 있다. 이것은 구조적 환경에 따른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의 총체성을 이루는 지금의 것을 의미한다.
김태청의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상, 오동선의 경제발전과 공동체 성원으로서 의무, 유태영의 기독교 세계관과 통일운동, 김우종의 사회참여 문학과 휴머니즘은 한국 근대 지식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모두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신뢰, 애정을 잃지 않았다. 김태청과 오동선은 자신들의 계급 성분 때문에 이북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없었다. 장래에 대한 선택의 여지는 협소했고 꿈을 펼치기에 한계가 뚜렷한 사회에서 그들은 체제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생애에서 이런 관점은 그들이 이북을 떠나온 이후 줄곧 유사한 인식을 보여준다. 유태영과 김우종의 삶은 보편적이지 않다. 유태영 목사는 기독교 보수주의와 반공주의에서 벗어나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고 통일운동에 큰 역할을 한다. 그에게 정체성의 전환은 미국에 대한 입장과 신앙에 대한 태도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의 일관된 친일 비판과 문학의 사회참여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확장시키면서 진행된다. 서정주에 대한 비판과 윤동주에 대한 사랑은 휴머니즘의 실천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정체성의 확장을 가져오고 이런 관점에서 휴머니즘은 가장 강력하게 개인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준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identity of the 1st generation of people from North Korea. Focusing on their life history, it studies four people whose actions are public, as their activities are related to the rule of law, industrialization, democratic social movements, and unification movements. Although their academic backgrounds and life orientations differ, they can all be regarded as “intellectuals.” Using ego-documents centered on oral records, autobiography, memoirs, and interviews, this study examines their identity by paying attention to the effects of North and South Korean social changes and disasters, and to their personal lives.
Their identity formation was influenced by their childhood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education of the North, the implementation of the socialist system, and their relocation and settlement in the South. Their identity is not fixed, but it varies from one life cycle to another, and is transformed and influenced by events. The essence of identity in this article is self-determination.
Kim Tae-chung's legalism and liberal democratic ideals, Oh Dong-seon's economic development and belief in the duty of community members, Yoo Tae-young's Christian worldview and unification movement, and Kim Woo-jong's social participation literature and humanism, all reveal Korean modern intellectuals. Pastor Yoo returns to Pyongyang to learn about North Korea and to play a major role in the unification movement. Literary critic Kim Woo-jong's consistent criticism of pro-Japanese analyses and his social participation in literary work proceed to strengthen and expand his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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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기 황해도민의 서해안 피난과 전후 전라남도 정착

저자 : 김아람 ( Kim A-ram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41-17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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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피난의 실상과 피난민의 정착 과정을 규명하였다. 황해도 출신들은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섬으로 우선 피난하였다. 섬에서는 의식주가 해결되기 어려웠고, 위험을 무릅쓰고서 섬과 집을 오가는 특수한 피난 생활을 하였다. 피난민은 생사의 순간을 때때로 마주하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는 등 체념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섬에서 군 수송함(LST)으로 서해안을 따라 목포로 이동하였다. 목포에서 각 지역으로 배정된 사람들은 현지인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서는 원치 않더라도 피난민을 받아들여야했다. 정부와 UNCACK이 피난민 구호대책으로 '난민정착사업'을 시작하자 피난민은 사업장에 모여들었다. 전남 장흥에서는 대규모로 사업장이 조성되었다. 피난민이 이끄는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가 운영하는 사업장에 현지인과 개척단까지 합류하였다. 난민정착사업은 1960년대에 자조근로, 자조정착사업으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이때에도 흥업회는 전국에서 사업을 처음으로 완료하며 장흥 대덕사업장을 성공 사례로 이끌었다. 영암에서는 일제시기부터 호남의 대자본가가 조성한 학파농장에서 사업이 이루어져서 피난민은 주도권이 없었다.
장흥의 흥업회 사업장에는 새로운 농지가 조성되었고, 규정에 따라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두 분배되었다. 농지를 분배 받은 피난민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이 가능하였다. 영암에서는 지역 내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이웃에 본보기가 된다는 목표 하에 피난민들이 더욱 사업에 분발하였고, 1950년대부터 '새마을'로 불리며 다른 마을보다 풍요를 누렸다. 정착사업은 정부가 추진하는 농촌 구호 사업이자 개발 사업이었다. 피난민은 여기서 핵심적인 주체였다. 농지 확대를 통한 식량 증산과 농촌 자조는 국가가 추구하는 성장 기조였다. 피난민의 정착사업은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자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과제를 이행하는 것이었다. 피난민과 현지 지역민은 정착사업을 매개로 복합적인 경계를 형성하였다. 피난민은 차별을 극복하려고 근면한 생활을 실천하거나 공동체적인 결속을 강조하며 정착하였고, 이 과정은 농촌의 전후 복구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This paper studies the reality of evacuation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 process of refugees' resettlement. Refugees who left their homes in Hwanghae-do had lived long sheltered lives on the west coast island. They risked their way back and forth between houses and islands as they had difficulty securing basic food and shelter on the island. The refugees on the island were carried on LSTs and came to Jeollanam-do, at the end of the west coast. Together with the Korean government, UNCACK conducted a "Resettlement project" nationwide, and this project was promoted in Jeonnam. In Jangheung, the refugees became leaders of the settlement businesses and ran businesses, while this was not the case in Youngam as business was conducted on the land of the landowners. The refugees worked diligently to achieve their goal of creating farmlands. The resettlement project was turned into a self-help project in the mid-1960s, and the refugees have been fully settled in Jeollanam-do thanks to the distribution of farmland. The refugees participated in settlement projects actively to create farmland and overcome social discrimination. Therefore, they cannot be excluded from the groups who did their best in the post-war restoration process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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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해방~한국전쟁기 인천 지역 월남민의 정착과 네트워크 형성

저자 : 이세영 ( Lee Se-young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77-21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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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한국전쟁기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민들의 정착과정을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인천은 해방 직후부터 다수의 월남민들이 거쳐가거나 머무른 도시였다. 한국전쟁이전에는 평안도민들의 월남이 많았고, 전쟁 와중에는 황해도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해방 정국기, 평안도민을 위주로 한 월남민들은 인천의 좌우 대립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우익 청년단 활동을 통해 월남민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증명하였으며 인천에 정착할 근거를 확보해 나갔다. 평안도민들은 종교와 교육의 두 분야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한말 이래 평안도민에게 기독교는 곧 근대문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평안도민 정체성의 근원이었다. 이들은 인천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장로교회를 설립하고, 교회 인맥에 기반하여 교육 사업을 벌려 나갔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황의 급변 속에서 다수의 월남민이 발생하였다. 인천에는 생활기반을 잃은 다수의 황해도민들이 유입되었다. 황해도 민들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였다. 다행히 인천은 경제적 활력을 지닌 도시였다. 황해도민들은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였고, 전쟁 이후 들어선 미군기지를 통해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황해도민 다수는 전쟁 기간 유격대로 참전하였다. 3년여의 비정규전 경험은 강고한 반공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해산과 동시에 이들은 대개인천에 들어왔고, 이들의 유격대 경험은 황해도민들의 집단기억으로 승화되었다. 인천의 황해도민들은 이른 시기에 동향 조직을 만들고 현재까지도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바, 그들의 마음 속에는 피난과 전투, 정착의 고난이 여전히 쳇바퀴처럼 돌고 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settlement process of the refugees who came to South Korea during the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period, mainly in the Incheon area. Many refugees passed by or stayed in Incheon after the liberation. A lot of Pyungan-do inhabitants came in before the Korean War, while the people of Hwanghae-do flowed in during the war.
Prior to the war, the Pyungan-do people―i.e., the right-wing youth organizations―proved their "loyalty" to the Republic of Korea, and secured grounds for settlement in Incheon. They maintained their identity in the two areas of religion and education. Upon arriving in Incheon, they established a Presbyterian Church and launched educational projects based on church connections.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and the sudden change in the front line drew in a large number of refugees. Many Hwanghae-do residents fled to Incheon. Although they were poor, Incheon was a city with economic potential. They took control of Incheon's commercial areas.
Many of the Hwanghae-do people participated in the war period as irregular military forces. The experience of three years of irregular warfare formed a basis for strong anti-communism. As they were discharged, they usually settled in Incheon, and their guerrilla experience was sublimated into the collective memory of the Hwanghae-do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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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이옥(李鈺)의 관물론적(觀物論的) 사유와 화담학(花潭學)

저자 : 조성산 ( Cho Sung-sa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13-25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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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이옥(李鈺, 1760∼1814)과 소옹(邵雍, 1011~1077)·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사상을 비교해봄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을 가졌는가를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소옹과 서경덕의 사유가 이옥과 같은 소북(小北) 가계의 지식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소옹과 서경덕은 기(氣) 밖에서 따로 궁극적인 원리를 찾을수 없으며, 오직 기를 통해서만 궁극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관물(觀物)이라는 용어로 정의되었다. 이옥에게서도 이 관물론적인 사유가 발견되었다. 이옥이 기의 현상인 정(情)에 관심 가졌던 것은 이것이 궁극적인 원리를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이옥은 관물을 위하여 관인(觀人)→관정(觀情)→관남녀지정(觀男女之情)→관녀(觀女)→관열녀(觀烈女)로 논의를 심화시켜갔다. 이옥은 같은 이유로 현실과 밀착된 언어인 향어(鄕語)와 속어(俗語)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옥에게 향어와 속어는 궁극적인 원리가 자연스럽게 발현된 언어였다. 이옥이 남녀의 정과 향어, 속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상적 배경에는 이와 같은 소옹·서경덕의 관물론적 사유가 자리잡고 있었다.


This article aims to compare Yi Ok's (李鈺, 1760-1814) thinking with that of Seo Gyeong-deok (徐敬德, 1489-1546) to identify common ideas. Through this, it seeks to assess the influence of Seo Gyeong-deok's reasoning on the Sobuk (小北, or little Northerners) faction's intellectuals―such as Yi Ok―in the late Joseon Dynasty. Seo Gyeong-deok believed that the ultimate principle of the universe could only be found through Qi (氣)'s phenomenon, and not outside of it. Therefore, Seo Gyeong-deok argued that the ultimate principle of the universe was naturally derived from Qi's phenomena. This reasoning is echoed in the works of Yi Ok, who was interested in aspects of the Qi's phenomenon such as true emotion, as he considered it the best material for observation of the ultimate principle of the universe. In particular, the natural manifestation of the ultimate principle that Seo Gyeong-deok mentions was expressed in terms of true emotion that, for Yi Ok, was not artificial. For this reason, Yi Ok was interested in local languages and slang. To him, local languages and slang were natural expressions of the ultimate princi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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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감부 시기 인천의 시구개정사업과 시가지 행정

저자 : 박진한 ( Park Jin-ha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53-28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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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대화재 이후 인천에서는 일본 거류민단의 주도 하에 조계 외곽의 일본인 거류지를 대상으로 시구개정사업이 시행되었다. 시구개정사업은 러일전쟁을 전후해 무계획적으로 팽창된 일본인 거류지 일대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천항의 경쟁력 약화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야말로 시구개정사업을 추진하게 만든 근본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부선, 경의선 개통에 따른 물류수송망의 변화와 용산 일대의 대규모 개발 등으로 신규 인구의 유입마저 정체되자 거류민의 영구적인 정주를 위한 주거환경 개선은 시급히 해결해야할 현안으로 인식되었다.
이사청의 협조를 얻어 거류민단에서 주도한 조선정 일대의 시구개정사업은 현재 우현로에 해당하는 축현-궁정 도로개수사업으로 귀결되었다. 거류민들은 도로개수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업비 일체를 한국정부에 전가하면서도 개수된 도로와 하수도의 유지·보수 업무를 인천부윤이 아닌 거류민단에서 직접 관할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실상 시구개정사업비는 메가타 총세무사, 미야기 인천세관장과의 교섭을 통해 세관 설비 확충을 위한 탁지부소관의 세관설비공사비 일부가 전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거류민단은 궁정 일대의 외국인 지주들과 협정서를 체결해 토지세 등을 감면해주는 대신 도로 행정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이사청은 『도로취체규칙』 등을 비롯해 도로 이용 및 유지에 관한 일련의 규칙을 제정함으로써 한국정부를 대신해 개항장일대의 시가지 행정체계를 수립했다. 그 결과 조계 외곽의 잡거지이자 '조선지계(朝鮮地界)'에 해당하는 일본인 거류지 일대의 도로 관리업무는 사실상 이사청과 거류민단의 소관이 되고 말았다.


After the great fire of March 1907 in Incheon, a city street improvement project was implemented. Under the lead of Japanese residents, it targeted Japanese residence in the outskirts of the settlement. The city street improvement project was designed to reorder the Japanese residence area, which had expanded planlessly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However, on another level, the fundamental factors that promoted this city improvement initiative were the weakened competitiveness of Incheon port and anxiety about the future.
The city street improvement project organized by the residents of the Joseonjeong area with the cooperation of the removal administration led to the Chukhyeon-Gungjeong road improvement project, which currently belongs to Uhyeonro. In the road improvement process, the residents showed an ambivalent attitude: they sought to manage the maintenance work or the improved roads and sewers directly instead of Incheon Buyun, while shifting the business expenses onto the Korean government. In reality, the city improvement expenses were integrated with some of the customs facility work managed by the land survey division to expand the customs facility through negotiations between the Megata Inspector General of Customs and the Migagi Incheon Custom Collector. Accordingly, the residents received sole authority over the road administration, instead of reducing the real-estate tax, etc. in agreement with foreign land owners. Moreover, the removal administration established an open port area administrative city system instead of the Korean government by enacting the rules of road use and maintenance, including「Road Control Regulations」, etc. As a result, the road management of the Japanese neighborhood which belonged to “Joseonjigye (朝鮮地界)” as well as of the mixed neighborhood in the outskirts of the settlement actually fell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removal administration and 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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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말 '동양' · '아시아' 담론과 '민족'의 발견

저자 : 홍정완 ( Hong Jeong Wa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83-31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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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조선에 나타난 '동양'·'아시아' 담론, 특히 인종주의적인 삼국제휴론 등에 대해 기존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의 수립을 저해하는 요인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한말(韓末) 인종주의적 동양 담론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살펴볼 경우, 그것을 단지 근대적인 '민족'의 발견이나 민족국가의 형성을 저지했던 요인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의화단운동을 거치며 조선에서 더욱 확산되었던 인종주의에 입각한 “멸종(滅種)”의 위기의식은 '왕조의 쇠락'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종족(種族), 주민집단의 존멸(存滅)을 표상하게 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동포민족(同胞民族)”이라는 표현을 출현케 하였다. 나아가 러일전쟁을 겪고 국망(國亡)의 위기의식 속에서 황인종으로서의 '종(種)'을 넘어서 국가의 명운과 결부된 형태의 '종(種)' 혹은 국가와 구분되는 주민집단으로서 “민종(民種)”, “민족(民族)”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집단적 주체로서 '민족'의 발견 과정에 생물학적 인종 담론이 갖는 매개적 역할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명개화론에 입각하여 동아시아 삼국제휴론을 전개했던 논자들의 경우 “천청(賤淸)” 의식에서 배태되어 있듯이 문명화에 이르지 못한 조선을 문명국(일본)이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러일전쟁 이후 그들의 삼국제휴론 속에는 일본에 의한 한국의 문명화 논리가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견지했던 '근대문명주의'적 관점은 자기문화에 대한 멸시적 태도와 직결된 것이었고, 대내·대외적인 양 방향에서 식민주의적 태도를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변법론에 입각하여 동아시아 삼국제휴론을 전개했던 논자들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자국에서 지속되어 왔던 문화에 대해 재발견, 재의미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문명화를 추구했던 변법론자들 또한 인종경쟁론과 같은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탈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안적인 '문명론'을 체계화하지는 못했지만 한·청·일의 삼국제휴론 그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은 비교적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일본에 의존하여 현재의 위기를 극복한다는 관점에 대해 상대적으로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청'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일정한 의미부여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변법론적인 수용태도 또한 '문명화'의 논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속되어 왔던 자문화'에 대한 재전유를 시도함으로써 근대국가로의 전환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의 문제와 함께 새로운 해방성의 방향을 재구성해 나가는 것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The consciousness of an "extinction"-related crisis based on racism, which was wide spread in Joseon after the Uihwadan Movement, led to the emergence of the expression "countrymen's nation," which carried a different undertone from the "fall of the dynasty." After the Russo-Japanese War, the need to make Joseon a protected state became visible. Withe the awareness of a crisis threatening the country of falling, meanings of "tribe" as connected to the fate of the country began to emerge over the boundary of the Mongoloid "species." The expression "Minjong (民種)" also emerged to designate the species formed by the resident group that was distinguished from the state. Therefore, when studying the process of discovery of the "nation" in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there should be a focus on the mediating role of the discourse on biological race.
The theory of solidarity between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which was developed based on the theory of civilization, posits that a civilized country (Japan) should lead Joseon, which was not considered civilized based on the consciousness of "Cheoncheong (賤淸)." After the Russo-Japanese War, the theory of solidarity between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further reinforced the idea that Japan was helping Joseon turn into a civilized country. Whereas The advocates of the Byeonbopron (變法論), who sought progressive civilization in the middle of attempts to rediscover their own culture and to grant it new meanings, had a relatively negative response to the idea that Joseon should overcome its current crisis by simply depending on Japan, and they continuously emphasized the existence and roles of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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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10년대 매일신보의 쇄신과 보급망 확장

저자 : 장신 ( Jang Shin ) , 임동근 ( Yim Dongku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80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317-35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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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정책 홍보 수단,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매일신보의 역할을 평가하였다. 이를 위해서 매일신보의 발행 부수와 보급망의 변화를 추적하였다. 특히 1912년 매일신보의 지면 쇄신배경과 그 결과를 다루었다.
총독부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혁신 이전 매일신보는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항일'에서 '친일'로의 논지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1911년 10월 조선신문의 한글판 발행은 매일신보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조선신문은 전국지를 표방하였고, 경성일보에 이은 제2의 신문이었다. 조선신문은 안정된 지국망을 바탕으로 가격과 편집, 기사량 등에서 매일신보를 능가하였다.
매일신보는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통합하고 활자도 바꾸었다. 읽을 거리를 보강하고 사회면의 비판기사를 강화했다. 이런 지면의 개혁과 함께 분매소와 지국 등의 보급망을 적극적으로 확장하였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도 독자를 신문구독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1914년 말에 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2만부에 육박했다. 1916년 4월엔 조선신문 한글판이 폐간하였다. 이제 매일신보는 유일한 전국적 한글신문이었다.
총독부는 1914년에 군을 통폐합하고 면제를 강화하는 지방행정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총독부의 정책을 알리려고 헌병경찰이 직접 나서던 관행이 비로소 사라졌다. 아울러 2만부 발행으로 총독부의 기관지로서 매일신보는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This study assesses the role of the Maeilshinbo as a publicity medium for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To this end, we tracked the circulation of the Maeilshinbo and the changes in its distribution network. In particular, we examined the motivations behind the 1912 design update and its results.
Despite the full support of the “Governor-General,” before its renovation, the Maeilshinbo's readership was decreasing. Its shift from an "anti-Japanese" to a "pro-Japanese" orientation was a crucial factor, and the publication of the Korean edition of the Chosonshinmun in October 1911 added to the crisis. The Chosonshinmun was launched as a national newspaper and became the second newspaper after the Kyeongseongilbo. With its stable distribution network, the Chosonshinmun outperformed the Maeilshinbo in terms of price, zoning, number of editions, volume of articles, etc.
To overcome this situation, in 1912, the Maeilshinbo integrated the two Korean editions that were mixed with Chinese characters, and wrote them in Hangul only. More interesting and critical articles were also added to the Society section. With this renovation, the Maeilshinbo expanded its distribution network actively. The outbreak of World War I certainly increased the number of newspaper readers. As a result, by the end of 1914, the Maeilshinbo was printing nearly 20,000 copies a day.
That same year, the Governor-General reorganized the local administration to reduce the number of gun and to strengthen the status of the myeon. The MP Police no longer needed to be at the forefront of government policy announcements. This became the role of the Maeilshinbo, which had a distribution of 20,000 copies. In April 1916, the closure of the Chosonshinmun made the Maeilshinbo the only nationwide Korean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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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1897년 7월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토론회와 연설회의 도입을 통해 협회를 정치단체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토론회를 조직하는 실무적 차원에서 협회 조직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해군장교 로버트의 통칭 Robert`s Rules of Order (1876)를 초역한 『議會通用規則』(1898)을 통해 서양의 토론문화를 소개한다. 1898년 4월 12일자 『독립신문』에 「의회통용규칙」에 관한 광고가 최초로 등장하지만 이듬해 그 광고는 지면에서 사라진다. 그 후 「의회통용규칙」의 판매광고가 러일전쟁을 거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이듬해인 1906년 5월 31일자 『황성신문』에 다시금 등장하고, 『대한자강회월보』에의 전재, 해를 거듭하여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광고가 재등장한다. 이처럼 이 시기에 「의회통용규칙」의 판매 및 유통의 흔적이 여러 지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해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와 연설회와 같은 民會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통제력의 약화와 이 시기 전후 보호국 상황의 타개 혹은 이용을 위한 지식인들의 민회 조직의 활성화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Robert`s Rules of Order는 나가미네 히데키에 의해 번역된 『官民議長必携』(1880)의 형태로 메이지 일본에 소개된다. 『관민의장필휴』에는 호소카와 준지로의 「序」가 붙어 있는데, 이것에는 “公共之事”를 “成俗”하지 못한 일본인이라는 시선이 확인되며, 윤치호의 시선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관민의장필휴』의 번역에는 역자의 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원문의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의회통용규칙」은 『관민의장필휴』와는 달리 역자 윤치호의 판단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이 취사선택되어 번역이 되어 있다. 「의회통용규칙」의 번역의 주안점은 민회의 설립에 대한 방법, 그 會를 통한 의안제출과 표결 등의 議事 결정과 임원·회원·위원의 선출·역할·권한·처벌 등의 민회운영에 놓여 있다. 「의회통용규칙」이라는 텍스트의 번역은, 민회라는 소사회에 참여하는 회원들에게 그 조직·운영과 합리적 의사 결정의 과정을 이해·학습시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 「의회통용규칙」을 통한 계몽의 프로젝트의 최종적 목표는 조선인들에게 그 대사회/국가로서의 조선의 운영 원리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윤리를 이해·실천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번역된 텍스트인 「의회통용규칙」은 공공적 의사결정 문화의 번역이자 소개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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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은 1929~1936년에 「조선고전해제」(이하 「해제」)·「양명학연론」(이하 「연론」)과 같은 조선근세학술의 정리와 「오천년간 조선의 얼」과 같은 조선역사연구를 수행했다. 「연론」은 두 과제의 접점에 해당하는 시기에 연재되었다. 선행연구는 「연론」이 근대학문의 대안으로서 양명학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고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국학·조선학이라는 위당의 종지, 조선근세학술정리 기간과 「연론」의 연재기간, 1930년대 지식인들에게 시의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연론」은 전통학문의 비판적 성찰·정리를 통해 그 유산을 당대 사회에 선택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이며, 위당이 조선학운동을 제창하기 직전의 과도기적 서술로 보인다. 본고는 위당의 학적배경이 전통학문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연론」의 의도와 의의를 허학 대 '실학'의 구도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전통지식인에게 '실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허실론을 중심으로 「연론」을 분석하는 것이 「연론」의 이해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연론」은 주자학자와 당대학자의 학문이 주체성 없는 외물탐구에 빠진 허학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주체라는 기준 속에서 외물탐구가 이루어질 때, 주체에게 실효가 있는 학문이 된다고 보았다. 위당은 이러한 학문을 실학으로 인식했고, 「연론」은 '실학'의 사례 중 하나로서 양명학을 설명하는 한편, 독자적인 근세조선학을 설명하고자 했다. 위당이 조선학운동을 제창하기에 앞서 「연론」을 연재한 것은 근세조선학 계보의 보충문제와 학문적 주체성에 대한 강조를 위한 의도 때문이었다. 「해제」에서 위당은 근세조선학이 3가지의 뿌리를 지녔다고 천명했지만, 양명학적 흐름은 보충이 필요하였다. 위당은 양명학의 계보화를 통해 근세조선학의 계보를 구체화하고, 기원을 상향시켰다. 아울러 중국양명학과 조선양명학의 등가성을 설명하고, 동아시아 양명학에서 하곡학문의 주체성·독자성을 밝혀, 근세조선학의 특징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계곡·담헌을 양명학자로 편입시켜 근세조선학의 학문적 주체성을 강조하고, 시대적 과제에 부응한 '실학'적 학풍이 근세조선에 내재했음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위당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주체적이고 조선적인 서구학문을 할 것을 요구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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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조의 정형률

저자 : 김진희 ( Jin Hee Kim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67-9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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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시조의 율격단위를 규명하고 이어 시조의 상대적 음수율 및 대우적(對偶的) 병렬률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시조의 정형률을 밝혀 보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전제를 먼저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첫째, 시조의 리듬규칙은 율격뿐 아니라 병렬률을 통해 함께 고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둘째, 음운자질을 기준으로 할 때 시조의 율격은 음수율에 속하며 율격은 상대적으로 느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본고에서 살펴본 시조의 정형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조의 율격단위로서 마디는 콜론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율격 휴지에 의해 나뉘는 통사적 단위로서, 그 길이는 단어보다 크고 문장보다 작은 범위에서 다양하다. 그리고 또 다른 단위로서 반행은 마디 두 개가 모인 것으로, 동질성과 이질성을 갖춘 시조의 중요한 율격단위이다. 둘째, 반행의 음수율적 규칙은 '앞마디<뒷마디'로 나타나는데, 마지막 반행에서만은 시상의 종결을 위해 '앞마디>뒷마디'로 규칙이 역전된다. 그리고 행의 음수율적 규칙은 '전반행<후반행'으로 나타나는데, 마지막 행에서만은 역시 시상의 종결을 위해 '전반행>후반행'으로 규칙이 역전된다. 셋째, 위와 같이 시조의 율격은 율격단위의 음절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율격단위 간 음절수의 상대적 규칙을 통해 형성되는 상대적 음수율이다. 넷째, 시조에서 병렬은 특히 초·중장의 반행 간 리듬을 강화하는 보충적 장치로 쓰인다. 시조의 리듬규칙은 이렇듯 반행과 반행 사이, 행과 행 사이에서 동일성과 차이성의 중층적 패턴을 통해 형성된다. 이러한 시조의 정형률은 지나친 단순화와 고정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시조 리듬의 규칙적 요소를 세심하게 밝혀줄 때 온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열린 율격론을 지향하는 '공리적(公理的) 방식[axiomatic]'의 율격론은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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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한(參韓) 인식의 연원과 통일전쟁기 신라(新羅)의 천하관(天下觀)

저자 : 윤경진 ( Kyeong Jin Yoo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95-13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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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에서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이 수립되는 전제로서 三韓에 대한 인식의 연원을 살펴보고, 통일전쟁기 주변국에 대한 인식을 검토한 것이다. 三韓은 본래 중국 사서(史書)에서 한반도에 있던 세 韓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이들이 소멸한 후에는 중국 동쪽에 존재한 역사 단위를 총칭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본래 삼한과 구분되었던 고구려(高句麗)와 그 이전에 존재하던 고조선(古朝鮮)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唐은 외교적 관점에서 삼국의 화해를 도모하면서 三韓을 통해 삼국의 역사적 동질성을 강조했지만, 신라는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자신의 역사를 三韓으로 표현하는 사례가 보이지만, 대체로 후대의 인식이 소급된 것이다. 외침에 시달리던 신라는 이를 이념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천하관이 표현된 것이 구한(九韓)으로, 구이(九夷)의 관념을 토대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九韓은 신라에 내공(來貢)하는 존재로 규정되기 때문에 신라 자신을 포함하는 (三韓一統意識)과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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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의 육왕학(陸王學) 비판에 대한 인식형성 배경과 그 목적

저자 : 남윤덕 ( Yoon Deok Nam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33-15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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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1762~1801)은 정조(正祖)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경(京)·향(鄕)의 학풍이 다양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가학(家學)으로 내려온 한원진(韓元震)의 호론적(湖論的) 학풍을 계승하였다. 특히 윤행임은 주자학 내부에서 논란이 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의 입장을 견지한 반면 洛論의 입장은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다. 윤행임의 육왕학 비판의 주된 목적은 주자학 내부에서 벌어진 호락논쟁에 대하여 호론으로의 체제정립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방법적 수단으로 육왕학 비판을 활용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주자학자들의 육왕학 비판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과는 차이를 보인다. 육왕학 비판에 대한 윤행임의 인식형성은 한원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윤행임은 육왕학의 대표적 학자인 陸九淵과 王守仁 그리고 왕수인의 제자인 왕간(王艮), 안균(顔鈞) 등의 '존덕성(尊德性)', '미발이발(未發已發)', '심즉리(心卽理)', '치량지(致良知)', '불교적(佛敎的) 논리'를 비판하고, 이러한 양명좌파에 대한 학설을 통해 호락논(湖洛論)의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순선(純善)과 유선악(有善惡)의 문제'·'성범동이(聖凡同異) 문제'에 대하여 육왕학적 논리를 결부시켜 낙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윤행임의 낙론비판은 호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육왕학 같은 외부의 적보다 주자학 내부의 논리가 자칫 육왕학의 논리로 들어가 주자학 내에서의 분열을 초래할 여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윤행임의 이 같은 육왕학 비판은 18세기 후반 중앙학계에서의 주자학과 육왕학 간의 일반적 비판논리와는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당대 학술과 사상사의 일면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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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 고전소설의 『전등신화』 수용 연구 -전기소설과 몽유록을 중심으로-

저자 : 엄태식 ( Tae Sik Eom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55-18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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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의 전기소설과 몽유록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고전소설의 『전등신화』 수용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본론에서는 우선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의 현황을 파악하되, 선행 연구에서 언급된 부분들은 가급적 제외하였다. 그 결과 「설공찬전」·「하생기우전」·「운영전」·「동선기」·「하생몽유록」·「강도몽유록」·「달천몽유록」·「포의교집」·「김영철전」·「삼한습유」·「삼해지」 등의 소설이 『전등신화』를 수용한 지점들을 새롭게 논하였다. 다음으로 『전등신화』 수용의 사적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는데, 한국 고전소설의 『전등신화』 수용 국면은 17세기를 기준으로 하여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15~16세기로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은 『금오신화』이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주요 서사 단락과 화소들을 가능한 한 『전등신화』의 자장 안에 묶어두려 했는데,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전등신화』를 통해 『금오신화』를 독해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의를 읽어내도록 하기 위한 서사 전략이었다. 둘째 시기인 17세기에는 『금오신화』와 같은 방식으로 『전등신화』를 수용한 소설은 더 이상 창작되지 않았고, 『전등신화』의 영향도 이전 시기에 비해 감소하였다. 17세기는 한국 고전소설이 우리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수립해 나간 시기였던바, 『전등신화』는 한국소설로는 『금오신화』와 『기재기이』 이외에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당시에 소설 작가들이 작품 창작에 참조할 수 있었던 훌륭한 텍스트였던 것이다. 셋째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이 시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소설 작자와 독자 사이에 『전등신화』에 대한 지식이 더욱 보편화되었고, 『전등신화』의 향유 계층도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등신화』의 독서 경험 역시 한문소설과 국문소설 모두에서 확인된다. 조선 시대 『전등신화』의 유통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전등신화구해』인데, 특히 『전등신화구해』의 주석들은 조선 후기 소설 작자들의 소설 창작에 있어서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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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제국의 과학과 동아시아 정치: 1910~11년 만주 페스트의 유행과 방역법규의 제정

저자 : 신규환 ( Kyu Hwan Shin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89-21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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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년 만주 페스트의 유행은 제국주의 열강과 동아시아 각국 모두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페스트 방역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배를 확대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 각국은 주권의 보호와 국가체제의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만주방역의 교두보였던 하얼빈에서 중국정부는 독자적인 방역대책을 구상했고, 영국유학파인 伍連德을 그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오연덕은 서구 과학주의를 상징하는 세균설과 현미경을 적극 활용하여 페스트의 전염경로를 확인하고, 폐페스트 이론으로 만주 페스트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오연덕은 제국의 도구였던 의과학 지식으로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연덕이 지역사회, 의과학계, 정부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갖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선페스트 이론을 중심으로 서구 중심적 과학주의를 구축해 온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은 새로운 폐페스트의 등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이론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페스트 방역대책은 각국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중국정부는 만주방역을 위해 선페스트 이론에 기초한 일본의 법령을 모방하였는데, 이는 의과학 지식의 생산과 법제적 실천 사이에는 여전한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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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현대 환경윤리의 전개와 동아시아의 생명 사상

저자 : 박소정 ( So Jeong Park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221-24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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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윤리는 철학의 하위 분야로서 20세기 중후반이 되어서야 생겨난 새로운 학문 영역이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히 빠르게 확대되어왔다. 이제까지 환경윤리와 관련한 수많은 학술연구가 이루어졌을 뿐 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 교육 과정에도 필수적인 내용으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이다. 환경윤리가 학문 영역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초기 과정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사상 전통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폭발적인 지지와 열띤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윤리에 대한 주류 담론에서 동아시아 사상의 자리는 제한적이며, 나아가 환경윤리가 실제 교육 과정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사상은 종종 소외된다. 본 논문은 이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생태적 민감성을 길러준다고 인정되었던 동아시아의 전통이 어째서 정작 환경윤리를 가르치는 기본적인 교과목에서는 배제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동아시아 담론에서 주목해야 할 복합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이에 싱가포르에서 “환경윤리와 중국사상”이라는 교과목을 개발하고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생명 사상이 현대 환경윤리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탐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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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자유주의와 마음의 고고학-향수를 넘어서 성찰로, 잃어버린 마음/행동/태도에 대한 책임의 인문학

저자 : 최기숙 ( Key Sook Choe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245-28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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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징후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에 주목하되, 특히 대학사회(학생/교수)에서 '경쟁주의'와 '성과주의'가 개인의 인성과 인간관계에 어떠한 파행적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디지털 정보화 사회'의 특성과 맞물릴 때, 어떻게 인간의 삶(품성ㆍ관계ㆍ일상)을 '마모시키는지'를 분석했다.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삶을 정향하는 태도는 '자기계발의 역설'을 파생시켰다. 또한 디지털 정보화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일종의 인적 자산으로 환치되는 과정에서 '소통의 역설'이 발생했다. '소통의 역설'이 '스펙 쌓기'의 신드롬이 결합되면서, 시간의 역사성과 직접성, 경험을 전제로 한 인간관계는 활용 가능한 '인적 자원'으로, 친밀한 관계성은 '정보성'이라는 가치로 변용되었다. 그리고 '인맥'의 개념이 일정정도 인간관계를 대체한 것은 인문성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동반했다. 대안적 차원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제기되었지만, 오히려 이는 인문학이 일종의 지식 소비 형태로, 실용적인 자기 계발 지침서의 형태로 소비되는 풍토로 이어져, 본래의 성찰성을 질문할 사회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학적 진단은 과잉상태이지만, 이를 극복할 대안은 빈곤한 편이다. 대항의 형식에 대한 '발명'을 권고하거나 개인적 실천, 장소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형성과 가치기준의 제안이 제출되었으나, 대체로 실천의 역할은 개인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인문학이 비평의 언어를 확보하는데 집중했으나 성찰의 언어를 습득하는데 소홀했던 점을 지적하고, 성찰과 책임이 뒷받침된 비평의 학적 태도에 대한 재정립을 제안했다. 전통시기의 생애성찰적 글쓰기를 성찰의 자원으로 삼아 '공감-능력'과 '성찰-윤리'의 감성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품성의 돌봄에 대한 훈련을 통해, 공생과 협력의 태도를 익히는 관계의 심미성 회복을 제언했다. 이를 통해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었던, 이제는 '고고학'이 되려 하는, 마음과 품성에 대한 인식, 성찰, 실천 방법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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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회인문학과 매개적 보편의 모색: <기획서평> 백영서, 『사회인문학의 길』, 창비, 2014

저자 : 김항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간행물 : 동방학지 167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285-290 (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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