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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연기설화: 『화엄연기』에마키를 중심으로
元曉の『金剛三昧經論祿起』話
김임중
연민학회 2014.02
연민학지 21권 229-277(49pages)
UCI I410-ECN-0102-2015-800-000358464

원효(617∼686)의 종교활동을 보면, 혼자서 연구를 거듭하여 經·律·論의 삼장(三藏)과 대승, 소승의 경전을 통달하여 불교를 종합적으로 체계화 한 ‘화쟁사 상(和諍思想)’을 이루어 한국불교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게다가 신라의 화엄종을 선양하여 그 영향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의 화엄종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효 가 저술한 수 많은 저서 중에서 중국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권의 저서가 있다. 하나는 『금강삼매경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승기신론소』이다. 『금강삼 매경』에 관해서는 선종의 창시자 보리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의 영향을 받아 7세기 후반, 즉 唐 초기 중국에서 성립한 위경(僞經)이라고 하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다. 중국의 불교학자는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아무런 주석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원효의 저서 『금강삼매경론』이 현존하는 유일한 주석서이다. 쿄토(京都)의 코잔지(高山寺)에서 소장하는 『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에마 키는 현재 일본의 국보이고, 묘에(明惠)는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의 종조」로서 뛰어난 필체로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화엄연기』‘원효그림’의 문장에 의 하면 신라국왕의 왕비가 중병에 걸려 있을 때 무녀의 진언에 의해 신라의 칙사가 묘약을 구하기 위해 당에 파견되어, 그 도중에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을 전해 받는다. 신라의 국왕은 원효에게 칙명을 내려 『금강삼매경』의 주석서를 만들어 설 법하게 하였다. 그 뒤 왕비의 병은 깨끗이 완치되어 원효는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현존하는 『금강삼매경』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이 『금강삼매경』을 원효는 절 강당에서 설법을 한 것이 아니라 붓과 벼 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고 수레에 타고 이 경을 강의하고 집필하였다고 전해지 고 있다. 말하자면 원효는 『금강삼매경』에 쓰여 있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이라는 관계를 소의 두 뿔(角)과 비유하여 이 경에는 본시이각(本始二覺)의 깨달 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소』3권이 중국으로 전해지자, 너무나 뛰어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보살이 쓴 것이라고 찬탄하 며 『금강삼매경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일본의『화엄연기』에마키에 쓰여져 있는 『금강삼매경론』연기설화 에 대해서, 원효의 저서가 일본에 수용하게 된 경위에 주목하면서, 찬녕(贊寧)의 『송고승전』과 『삼국유사』등에 기술된 원효전과 서로 다른 점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자 한다.

元曉(617∼686)の宗敎活動は、獨自に硏究を重ね、經?律?論の三藏と大 乘、小乘すべての經典に通曉し、佛敎を綜合的に體系化した「和諍思想」を創り あげ、韓國佛敎の土台を築いた。さらに新羅の華嚴宗を宣揚し、その影響は日 本ばかりでなく中國華嚴宗にも及んでいる。とくに、元曉の著書の中で中國佛敎 に大きな影響を與えたものが二つある。一つは「金剛三昧經論」であり、他の一つ は「大乘起信論疏」である。「金剛三昧經」に關しては、禪宗の開祖達磨の「二入 四行論」の敎えを援用し、7世紀後半、すなわち初唐の頃に中國で成立した偉經 であるといわれるが、定かではない。中國佛敎者はこの「金剛三昧經」に何一つ註 疏を書かなかったので、元曉の注釋書が現存する唯一のものである。 京都の高山寺藏「華嚴祿起」(國寶)は、元曉と義湘という二人の云記と說話を 題材としたもので、日本?中國 でもない新羅の高僧元曉と義湘を「華嚴宗の祖師」 として、優れた筆致で文學的に描いているのである。「華嚴祿起」「元曉繪」の詞書 によると、新羅國王の王妃が惡病に苦しんだので、巫女の進言により新羅の勅使 が方藥を求めて唐へ派遣され、その途中で龍王から「金剛三昧經」を授けられる。 新羅の國王は元曉に勅命を下し、「金剛三昧經」の疏を作って講するようにし た。その後、王妃の病は癒え、元曉は時の人□に尊敬されたという。これが現存 する「金剛三昧經」である。「宋高僧云」には、この「金剛三昧經」を元曉は寺院の 講堂で說いたのではなく、筆と硯を牛の二つの角の間に置き、牛車に乘ってこれ を講義し、かつ書いたのであると云えられる。つまり、元曉は「金剛三昧經」が說 く「本覺と始覺」という關係を牛の二角(覺)と譬え、この經には本始二覺の悟りが 隱れていることを暗示したわけである。この元曉の「金剛三昧經疏」三卷が中國に 云えられると、あまりに見事な出來ばえなので、これを菩薩が書いたものであると 感心し、「金剛三昧經論」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本稿では、「華嚴祿起」繪卷に描かれている「金剛三昧經論」の祿起說話をめ ぐって、元曉の著書の日本における受容の問題に注目しながら、「宋高僧云」と 「三國遺事」などに語られる元曉云との相違点を中心に檢討したいと思う。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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