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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19세기 파리 로스차일드은행의 설립과 성장

19세기 파리 로스차일드은행의 설립과 성장

Articles : The Establishment and Initial Development of the Parisian Rothschild Banking House in the 19th Century

문지영 ( Ji Young Moon )
  • : 한국서양사학회
  • : 서양사론 10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0년 03월
  • : 177-205(29pages)
서양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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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12-900-000866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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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서양사
  • :
  • :
  • : 계간
  • : 1229-028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8-2022
  • :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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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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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바빌론 상속법 연구 -재산별 유산상속의 특징-

저자 : 김아리 ( Kim Ari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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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에서는 신바빌론 시대의 상속에 관련된 문헌들을 상속 재산의 종류별로 분류 분석하여 신바빌론 시대의 상속관행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신바빌론 시대의 상속 비율은 일반적으로 장남은 일반 아들보다 2배로 받았고 나머지 아들들은 다 일정하게 1의 비율로 배분받았다. 부동산의 경우 일부는 상속이 되어도 공동의 재산으로 여겨져서 분할되지 않고 관리되는 재산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땅에서 나오는 이득은 상속분의 비율대로 가지고 갔던 것이 확인되었고 개개인들은 공동으로 관리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 역시 부동산을 지참금의 명목으로 상속받았다. 여성에 대한 부동산의 증여는 주로 상류 계층에서 이루어졌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제직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성직록 역시도 상속의 대상이었다. 성직록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남은 2 나머지 아들들은 1의 비율로 배분 받았다. 하지만 성직록의 특성상 동일하게 배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부족 부분에 대해서 다른 금전적 보상을 하는 형식으로 상속이 이루어졌다. 특징적인 것은 성직록은 여성에게 아주 드물게 상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성직록이 기본적으로 성직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재산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산의 소유형태는 일반적으로 개별소유였지만 노예와 같이 개별 혹은 공동소유가 되는 소유형태가 다양한 경우도 존재했다. 가장 많이 여성에게 재산으로 주어진 것은 동산이고 그 중에서도 은이나 가재도구 혹은 가구가 가장 많이 언급이 된다. 금은 드물게 여성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당시 금이 드물게 유통된 것도 있고 희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를 제외한 모든 아들들은 상속권에 관해서는 평등하게 대우되었고 문헌들은 이들 사이에 불평등한 분배가 생기는 경우 다른 방식으로 그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단,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적게 상속받았고, 노예에게서 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승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상속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examine the tradition of inheritance based on Neo-Babylonian texts. Generally, in the Neo-Babylonian period, the first-born son received two portions of their father's property and the other sons received one portion each. Some of the inherited real estate properties were not divided but held in common among the heirs. Even if these properties were controlled in common, profits from the properties were distributed and portioned to the owners separately, and each individual owner exercised their rights. Women also receive real estate as dowry. These practices were exercised mostly among the high social status family. The prebend was distributed according to the same rule that was applied to the real estate. The prebend was seldomly given to women. The meuble properties were given individually to the heirs and could be held in common. The women received mostly meuble property such as silver, household goods, and furniture as a dowry. Gold was also given as a dowry, but it was not common. The first-born son had priority rights when compared to the other heirs. Except for the first son, the other sons shared the rest of the inherited properties evenly. However, there was some discriminations between first marriage children and second marriage children. The children born by slavery women were not entitled to their fathers' properties without certification of the father.
(Institute for Research on Early Civilizations(IREC) / allisa52@yahoo.co.kr)

2고대 도시 로마의 경계 공간(liminal space) 아벤티누스 언덕에 관한 고찰 -기원전 6세기 디아나(Diana) 신전 건설과 역사를 중심으로-

저자 : 이지은 ( Lee Ji-e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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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요청에 따라 현재에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동시에 다중적 주체들이 교차적으로 (때로는 불평등하게) 서로 얽혀 있는 경계 지대(borderlands)”로 이해하는 국경 경관(borderscape)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연구방법이 고대 로마의 아벤티누스 언덕의 역사를 재현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언덕은 도시 로마에서 외부의 산물과 인구, 문화 요소들이 유입되는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장소였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도시 로마로 유입된 인구와 문화들이 지닌 다양한 관습과 가치로 인해 충돌과 대립, 타협과 화해, 수용과 배척, 공존과 융합 등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계 공간, 즉 '사이 공간', '중간 지대', '역동적 장소'의 특성을 아벤티누스 언덕이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내는지에 주목하여 그 역사적 발전 추이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아벤티누스 언덕에서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기원전 6세기 디아나 신전의 건설 배경과 역사를 검토함으로써 역사의 다양한 주체들과 작용하며 여러 가지 역할과 존재의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서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아벤티누스 언덕의 모습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In recent historical research borderscape is understood as “(re)constructed in the present according to the request of the times, and at the same time as borderlands in which multiple subjects are intertwined crosswise (sometimes unequally).” I believe that this new concept and research method may also be useful for reconstructing and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the Aventine Hill in ancient Rome. This hill was a main and representative space where external products, population, and cultural elements entered into the city of Rome. Therefore, this paper focuses on this liminal space where dynamic changes, such as conflict and confrontation, compromise and reconciliation, acceptance and exclusion, coexistence and fusion, did occur, due to the various customs and values of the population and cultures that had flowed into the city of Rome. In particular, by exploring the background and history of the construction of the Temple of Diana in the sixth century BCE on the Aventine Hill, the meaning and importance of the Aventine Hill as a 'borderland' will be reconsidered.
(Jeonbuk National University / jelee02@jbnu.ac.kr)

3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의 신전(Templum Pacis)에 드러난 평화의 메시지

저자 : Bae So Yeon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6-95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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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평화의 신전을 통해 로마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평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그가 그리던 프린키파투스의 청사진을 엿보려 한다. 로마인들은 무력을 통해 이룩한 외부의 평화와 로마 내부의 평화를 구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로마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정체 역시 공화정에서 프린키파투스로 대체되는 등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이분법에 내재한 임의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재위 초기 세운 평화의 신전은 두 가지 평화가 공존하는 청사진을 보여준다. 그가 유대 반란 진압을 통해 획득해 평화의 신전 내 배치한 전리품들은 무력을 통해 얻은 평정(平定)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네로의 황금궁전터에 평화의 신전을 세우고 네로가 홀로 음미하던 예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폭정과 내전이 사라진 로마 내부의 평화 역시 강조했다. 로마 시내 가장 번잡한 지역인 수부라 인근에 정원과 박물관의 특징을 접목한 평화의 신전이 자리 잡으면서 로마인들은 잠시나마 바쁜 일상을 벗어나 녹음을 즐기며 산책하고 문화를 향유할 공간을 얻게 되었다. 본래 이런 종류의 여가(otium)는 로마의 상류층 인사들이 자신들의 개인 소유 빌라에서 누리던 사치였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평화의 신전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신분에 상관없이 자신이 이룩한 평화의 열매를 맛볼 수 있도록 여가의 창구를 넓혀 주었다.


In this paper I aim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peace that Vespasian expected to propagate through the Templum Pacis. Introducing the distinction between military peace and civic peace that the Romans were known to have set, I shed light on the arbitrariness of the dichotomy, which became blurred with the expansion of the Roman Empire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Principate. Vespasian's Templum Pacis illustrated the convergence of military peace and civic peace. By depositing the spoils acquired from the Jewish revolt in the Templum Pacis, Vespasian demonstrated the military nature of the peace that he brought to the Empire. By locating his temple of peace on the previous site of Nero's Domus Aurea and returning the artworks that Nero kept private in his palace to the public, Vespasian hammered home the image of civic peace that he achieved by ending the civil wars in the minds of people. By incorporating the features of garden and museum in his temple of peace, Vespasian provided a space where the people could engage in culture briefly and take a break from the bustle of the metropolis. This kind of leisure (otium) was previously thought to be something that only the elite aristocracy could enjoy in their private villas. Vespasian expanded the venue of otium in the Templum Pacis so that all Romans, whether aristocratic or plebeian, could taste the fruits of peace that he would continue to bring throughout his reign.
(Yongin University / entreaty99@gmail.com)

49세기 전반 카롤루스 왕조와 변경 귀족 집단의 관계 -셉티마니아 변경백 베르나르두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차승현 ( Cha Seung Hy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6-127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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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왕조는 믿을 수 있는 귀족들을 활용하여 급격히 팽창해나가는 왕국을 통치했다. 길렐무스 일족의 가장 먼 조상 테오도리쿠스는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사위가 된 이후에 측근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길렐무스는 제국 남부 변경의 지배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길렐무스는 자신의 관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했는데, 이는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제국 변방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렐무스의 아들들은 820년대 중반부터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베르나르두스는 셉티마니아와 에스파냐 변경백령을 지배하는 동시에 루도비쿠스 1세의 최측근이 되어 제국의 2인자로 부상했지만 황후와의 간통 혐의로 총애를 상실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한 루도비쿠스 1세는 길렐무스 일족이 지배하던 제국 남부에 왕권을 확립하려 했지만, 왕가의 내분으로 인해 군주의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기에 베르나르두스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복권된 베르나르두스는 이전보다 더 많은 영토를 손에 넣었으나 루도비쿠스 1세 사후 서프랑크왕이 된 카롤루스 2세와 충돌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이 같은 길렐무스 일족의 흥망성쇠는 9세기 전반 프랑크 왕국 변경의 귀족집단이 중앙권력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으며, 830년부터 시작된 왕가의 내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심한 부침을 겪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The early Carolingian rulers used reliable aristocrats to dominate a rapidly expanding kingdom. Thierry, the most distant ancestor of the Guillaume family, became an entourage of Charles Martel by the marriage, and his son Gillaume emerged as the ruler of the southern border of the empire. Because Charlemagne had such great authority over the empire's periphery, he was unable to transfer his positions to his children.
In the middle of 820s, Guillaume's sons began reclaiming their father's legacy. Particularly, Bernard took control of Septimania and the Spanish Marche while simultaneously becoming Louis the Pious' chamberlain and rising to the second position in the empire. However, he rebelled when he lost Louis' favor on charges of adultery with the empress.
After suppressing the revolt, Louis the Pious tried to establish the kingship in the southern part of the empire ruled by the Guillaume family, but the sovereign's authority was greatly weakened due to internal conflict of Carolingian dynasty. As a result, he had no choice but to compromise with Bernard. Temporarily, Bernard gained more territory than before, but died in a clash with Charles the Bald, son of Louis the Pious.
The rise and fall of the Guillaume family shows that in the first half of the 9th century, the aristocracy on the border of the Frankish kingdom was not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central power and suffered severe ups and downs as it was directly affected by the royal feud that began in 830.
(Korea University / cha.seunghyun@gmail.com)

5기억의 반노예제, 희망의 반노예제 -노예제 폐지 이후 중국 이민자 문제와 반노예제 운동의 분열-

저자 : 하아랑 ( Ha Ara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8-157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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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예제가 폐지된 직후에 중국인 이민을 둘러싸고 발생한 반노예제 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을 탐구하면서, 그간 이들을 결집시켜왔던 자유노동 이데올로기가 역설적으로 그 분열의 핵심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랄프 왈도 에머슨이 제시한 인간사회를 양분하는 두 개의 세계관, 즉 과거에 종속된 채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기억의 집단”과 미래지향적이고 낙관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희망의 집단”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분열 양상을 분석한다. “기억의 반노예제주의자들”은 중국인 이민이 자유노동 체제를 질식시키고 결국 미국의 진보를 가로막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이민 토착주의의 선봉에 섰다. 한편 “희망의 반노예제주의자들”에 따르면 중국인 이민자들은 서부 개발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것이며, 잔존한 흑인 강제노동의 악습을 타파할 자유노동 체제의 수호자였다.
이 글은 중국인 이민을 둘러싼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분열 양상을 제시함으로써,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믿음과는 달리 노예제 폐지가 사회의 모든 부정의와 악을 일소하는 완전무결한 해법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유노동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던 노예제폐지론자들은 노예제가 폐지되기만 한다면 미국은 노예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번영의 미래로 순조롭게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이들은 산업자본주의의 도래가 야기한 노동의 불안정화, 서구열강의 비서구권을 향한 제국주의적 팽창 등의 다양하고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낯선 문제에 봉착했을 때, 노예제폐지론자들은 자유노동의 수호라는 목적을 위해 중국 이민자 문제에 대한 상반된 해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controversy among antislavery activists over Chinese immigration after the Civil War. This article argued that the free labor ideology, which was once the ideological lynchpin of the American antislavery movement up until the abolition of slavery, had evolved into serving as a political wedge in the post-emancipation period by using Ralph Waldo Emerson's framework of “the party of memory” versus “the party of hope.” In the controversy over the Chinese question, some antislavery veterans sided with the anti-immigration nativists, concerned that the unfree Chinese “coolie slaves” might destroy the hard-earned free labor system in postbellum America. Other antislavery activists, more optimistic about their country's goodwill and ability, welcomed the Chinese newcomers as free-labor partners who could help Americans develop the western land, eradicate the vestiges of slavery, and promote diverse cultures in the United States. Prior to the Civil War, the free labor ideology made the claim that once slaves were emancipated, the American republic would inevitably advance toward a more promising future of freedom and wealth. After the Civil War, American society faced a new set of issues brought on by the emergence of industrial capitalism and imperialist expansion, many of which were frequently seen in the context of slavery, such as “wage slavery,” “coolie slavery,” and “women slavery.” These new forms of slavery were intertwined with the Chinese question. As the controversy over Chinese immigration revealed, the antislavery movement and ideology did not end with the abolition of slavery.
(Seoul National University / arangha@gmail.com)

6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전사자 숭배 -플랑드르 지역의 군인묘지를 중심으로-

저자 : 최호근 ( Choi Ho-ke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8-193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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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근대 민족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전사자 숭배 현상이 갖는 의미를 독일의 사례를 통해 파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의 근대적 기념에서 전환점이 된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플랑드르 지역에 조성된 네 개의 독일 군인묘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확인된 독일의 전사자 숭배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일차대전 관련 독일 군인묘지에는 패전의 경험이 구조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패전국의 지위, 재정적 궁핍, 승전국이 강요한 제약 등으로 인해 독일은 자국의 기념문화 전통 속에 깃들어 있던 고전주의적 요소보다는 게르만족 특유의 중세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잔디와 참나무 위주의 간소한 묘역 설계, 묘역 일대에 다양한 꽃을 심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 다듬지 않은 거석을 중심 기념물로 활용하는 방식은 독일의 전통적인 정원문화 및 매장문화와 관계가 깊었다. 셋째, '죽음의 국가화' 경향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독일의 군인묘지에서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이러한 특징들에 근거하여 마치 기념문화에서도 '독일의 특수한 길'이 있었던 것처럼 과도하게 해석하는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일차대전 직후에 조성된 군인묘지에 관한 한, 주요 서구 국가들과 독일 사이에 차이점보다는 유사성이 더 많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일차대전과 관련된 군인묘지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적 성격을 띤 세속의 사원으로서 기능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was to determine the meaning of the worship of the fallen soldiers in the development of modern nationalism. To this end, four German military cemeteries built in the Flemish region shortly after World War I were assessed. There are three characteristics of German worship of fallen soldiers confirmed through this research.
First, the experience of defeat is structurally imprinted in the German military cemetery. Due to multiple constraints, Germany was forced to actively utilize the Germanic medieval elements rather than the classical elements. Second, the simple design of the cemetery was deeply related to Germany's traditional garden and burial culture. Third, the trend of “nationalization of death” was more pronounced in German military cemeteries than in Britain and France.
Nevertheless, this article disagreed with the interpretation as if there was a “special German path” in the commemorative culture. As far as military cemeteries built shortly after World War I were concerned, there were more similarities than differences between major Western countries and Germany. They functioned as secular temples with political characteristics in any European country.
(Korea University / hchoi21@korea.ac.kr)

71970-1980년대 소련 장애인들의 조직적 권리운동

저자 : 고가영 ( Ko Kayo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4-231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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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소련 장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운동을 다룬 글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이동권을 침해당한 장애인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살펴보았다.
제정 러시아시기부터 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관심을 가진 장애인들은 주로 전쟁터에서 장애를 입은 참전군인들이었다. 그런데 전후 새롭게 전개된 냉전체제 하에서 체제 경쟁에 돌입한 산업현장에서 장애를 입는 노동자들이 다수 발생했다. 노동의 효율성을 강조한 소련에서 이들은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이동에 장애를 입은 이들을 중심으로 1978년 5월 20일에 '소련 장애인 권리보호 주도그룹'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소련 내 장애인들의 상황에 대한 정보 수집 및 공유, 장애인들의 복지 개선을 요구하는 소련의 장애인 관련 행정기관에 장애인들의 복지 개선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발송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장애인 관련 국제기구와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소련 장애인 권리보호 주도그룹'은 사미즈다트(지하출간물) 형태의 『뷸레텐』이라는 저널을 통해 소련 사회의 장애인 상황에 대한 자료들과 회원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 내용 등을 알렸다. 이 저널은 소련 내에서 유포되었을 뿐 아니라, 해외의 인권운동 단체들로도 보내졌다.
이러한 조직적인 장애인들의 활동에 대해 소련 당국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했으며, 결국 이 단체는 1980년대 초반에 해체되었다. 사회 내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이러한 소련 사회의 경직성은 현실 사회주의 실패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movement for the rights of disabled people in the Soviet Union in the late 1970s and the early 1980s. This article examines the activities of people with disabilities who were deprived of their freedom of action.
From the time of Tsarist Russia to World War II, the disabled people who were the subject of national attention were mainly veterans with disabilities on the battlefield. However, there were many workers with disabilities in the industrial sites that entered the systemic competition under the newly developed Cold War system after World War II. Accordingly, on May 20, 1978, the Initiative Group for the Defense of the Rights of the Disabled in the USSR was formed mostly by those with mobility impairments. The goals of this organization included gathering and disseminating information about the state of the disabled in the Soviet Union, petitioning the Soviet administrative body responsible for their welfare, enlisting the aid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expressing solidarity with other groups working to improve the welfare of the disabled.
To that end, the “Initiative Group for the Defense of the Rights of the Disabled” published data on the situation of the disabled in the Soviet Union in the form of “Samizdat” (underground publication) in the journal Buletten. The journal was not only circulated domestically, but also sent to the human rights organizations abroad.
This series of organized activities of the disabled was suppressed by the Soviet authorities in various ways. Their activities were eventually disbanded in the early 1980s due to government repression. The rigidity of Soviet society, which did not contain diverse voices, seems to have been one of the causes of the failure of socialism in reality.
(Seoul National University / kkynow@hanmail.net)

8예카테리나 2세(김민철, 이승은 역), 『예카테리나 서한집』(읻다, 2022), 260pp. (서평)

저자 : 김용환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2-239 (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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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응종,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푸른역사, 2022), 643pp. (서평)

저자 : 김대보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0-247 (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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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서경,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 프랑스 제3공화정, 1885-1914』 (마농지, 2022), 598pp. (서평)

저자 : 민유기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8-254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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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로마의 성 폭력과 권력, 지배 담론 -루크레티아 성폭행 사건을 중심으로-

저자 : 최혜영 ( Hae Young Choi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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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세 말 육체와 성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규율 메커니즘

저자 : 유희수 ( Hee Soo Lew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31-5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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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형제도 비판론의 전개(1760-1795)

저자 : 장세룡 ( Se Yong Ja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59-8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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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미셀 푸코와 몸의 역사

저자 : 고원 ( Won Koh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89-10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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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리인가 범죄인가? -제정러시아 말기의 낙태논쟁-

저자 : 기계형 ( Kye Hyeong Ki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109-14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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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루이 16세 재판과 죽음

저자 : 주명철 ( Myoung Cheol Jou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149-17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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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파리 로스차일드은행의 설립과 성장

저자 : 문지영 ( Ji Young Moo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177-20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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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나로드니끄(Narodnik)"에서 "싸모스찌이니끄(Samostiinik)"로 -쉬체르비나의 까자끄 이데올로기와 까자끄 정체성의 보편주의적 전환-

저자 : 구자정 ( Ja Jeong Ko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207-2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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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누가 산업화의 비용을 지불했는가? -제정 말 산업화 시기 러시아 흑토지대에서 시장관계의 발전과 농민 경제상황의 변화-

저자 : 양승조 ( Seung Jo Ya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239-27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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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육군 장교단의 양적 팽창과 인적(人的) 재편성

저자 : 강창부 ( Chang Boo Ka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275-31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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