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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 update

Journal of Japanology

  •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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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1134
  • : 2713-7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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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1)~54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730
일본학
54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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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곽인식의 깨진 유리는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었는가? - 1960년대 유리 작품의 배후에 있는 의미에 대하여 -

저자 : 박순홍 ( Park Soonhong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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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한 곽인식의 1960년대 유리 작품을 사회 운동적 측면에 입각해 살펴보았다. 그동안 곽인식이라는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한일의 논자들은 그의 깨진 유리 작품이 훗날 이와 유사한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 이우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주로 논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 필자는 기존의 논의가 모든 예술작품을 양식사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곽인식의 작품이 지닌 의미를 일반화시켰다고 파악하고, 후대의 관점이 아닌 당시 그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논증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사 과정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곽인식이 표면적으로는 예술에서의 전위를 주창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우 이념의 대립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의 모습이 깨진 유리에 투영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곽인식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과거 행적, 즉 한때 총련계 작가들과 함께 통일 운동을 펼쳤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곽인식이 어느 특정한 시점에 가지고 있었던 사회의식을 괄호에 넣고 그의 유리 작품을 바라보게 되면 그러한 작품을 산출시킨 동인은 은폐되고, 그저 실험정신으로 충만했던 예술가상(像)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논자들이 곽인식의 중요성은 재검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간과해 온 이러한 그의 사회 운동적 측면이야말로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곽인식 예술의 사각지대였다는 점을 필자는 제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곽인식을 더욱 넓은 견지에서 냉전 아래 온갖 풍파를 겪은 예술가로 볼 있을 것인지 그 해석의 가능성을 찾는 일은 앞으로 한일의 전후 미술사를 연구하게 될 이들의 몫이다.


This thesis is intended to examine glass works produced by Quac Insik, a Korean-born artist who lived and worked in Japan, in relation to his social involvement during the 1960s. When precedent researchers deal with Quac, they often tended to focus on the significance that Lee Ufan's works which contain some of the similar constituent features of Quac's works, leading to the conclusion that Lee's glass could not have been realized without the influence he had from Quac. However, on the contrary to such prevalent assertion, my thesis argued that Quac's art has been subjected to arranging styles in a chronological order, positing his glass works solely as pioneering pieces of Mono-ha from an art historical perspective. In this regard, my thesis tried to avoid the disposition of sweeping generalization vis-à-vis the art of Quac, discussing what sort of situation he was faced with through the context of the time ― not from the vantage point of the present. What came into light through such investigation was the fact that despite he advocated artistic avant-garde, he was powerless in a continual struggle between political ideals namely communism and capitalism, having no choice but to reflect the present state of himself by breaking sheets of glass.
Even though Quac did not want to reveal his past involvement with the reunification movement for the Korean Peninsula to the public due to the anti-communist National Security Law; to put his social awareness he once had in brackets could conceal the genuine motivation behind the glass works, leaving a mere impression that he was only an innovative and experimental artist. Thus, although many researchers urged that Quac deserves reevaluation for his artistic achievement, this thesis rather pointed out that his importance lies in the hitherto neglected social movement he campaigned to bring peace to the peninsula, which most of them were reluctant to explore further. Whether Quac can be described as an artist who lived through the turbulent period of Cold War in a broader sense is dependent on those who will eager to conduct researches on postwar Japanese and Kore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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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본의 언더그라운드 포크송과 재일코리안 음악의 교차와 변용

저자 : 유영민 ( Yu Youngmin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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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영화 «박치기»의 배경인 '1968년 교토'를 일본 문화의 흐름 안에서, 특히 '68운동'과 간사이 포크송 운동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일본 음악과 재일코리안 음악이 어떻게 교차했는지, 나아가 당시의 경험이 재일코리안 음악 지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돌아온 주정뱅이>로 시작된 간사이 언더그라운드 포크송은 <수험생 블루스> <자위대에 들어가자> <친구여> 등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노래들로 이어졌고, 이 노래들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현장에 자주 등장하며 60년대 저항음악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 재일코리안의 노래 <임진강>도 간사이 포크송 레퍼토리에 합류하게 되는데, 포쿠 쿠루세다즈가 <임진강> 가사를 보편적인 자유와 평화의 노래로 변모시킨 결과였다. 70년대 이후 재일코리안 사회는 원거리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음악 공연을 본격화하고, 나아가 본국과 거주국의 음악 문화를 절합하며 디아스포라 음악의 창작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라이 에이치의 <청하로 가는 길>이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사회적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거주국과 본국의 문화를 모두 풍성하게 일구어내는 기반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는 '박치기' 같은 담론, 다양한 문화와의 교차를 시도하며 강고한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디아스포라 담론이 필요한 때이다.


This paper explores how music of Koreans in Japan and Japanese music intersected at the time and space of the film Pacchigi, “1968, Kyoto”, with the emphasis on ′68 Movement (Protests of 1968) and Kansai Underground Folk Song Movement. Additionally, it examines how those intersections have transformed the musical landscape of Koreans in Japan since the 1970s.
Kansai Underground Folk Songs began with the song Drunkard Returns followed by protest songs, such as Exam Student Blues, Let's Enter the Self-Defence Forces, and My Friends. The song of Koreans in Japan Imjin River was also included in the repertoire for the anti-war movement, as the famous folk group Folk Crusaders transformed its lyrics with universal messages of freedom and peace. Since the 1970s, Koreans in Japan have enthusiastically performed long-distance nationalism through their music. Furthermore, they have articulated musical cultures of their homeland and host society, which led to the creation of diasporic music represented by Road to Chongha by Arai Eiichi.
The deep understanding of and concern for diasporas are necessary for solidarity with minorities and cultivation of various cultures in their host societies and homelands. In Korean society, too, diaspora discourses will be greatly helpful for intersecting with other cultures and going beyond national bound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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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이니치 코리안 극단 '타이헨'의 미학연구 - 「꽃은 향기로워도」와 「황웅도잠복기(記)」를 중심으로 -

저자 : 이성곤 ( Lee Seung-gon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7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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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재일코리안 극단 타이헨(態變)의 공연미학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타이헨은 재일코리안 2세 김만리를 중심으로 1983년 오사카에서 결성된 극단이다. 극단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인 김만리는 1953년 11월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여 기대를 모았으나 3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30살이 되던 1983년에 극단 타이헨을 창립하여 이후 대표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지금까지 60여 편의 작품을 쓰고 연출했다.
타이헨은 창단 당시부터 장애인의 사회활동과 재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복지적 차원의 예술활동과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전통적인 예술의 시각에서 '추하다'고 간주되어 온 신체장애인의 신체나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을 표현력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미를 낳기 위한 도전을 해오고 있다. 유럽에서는 “미의식 자체를 밑으로부터 변혁할 신체표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애 그 자체를 표현력으로 전환한다는 그들 특유의 표현 미학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는 기존의 무대 예술에서 요구되던 재현성과는 다른 '재현 불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연극평론가 니시도 고진은 「황웅도 잠복記」 한국 공연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통해 재일코리안으로서 “김만리의 피 속에는 역시 일본인과는 다른 감성과 가치관이 흐르고 있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상상력은 일본연극하고는 어딘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충격과,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단언한다. 재일코리안 극단으로서 극단 타이헨이 재일코리안 극단이라는 아이덴티티 속에만 자신들을 정의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If the founder of any organization is disabled, it is common to see his/her artistic works in the light of welfare or rehabilitation for the disabled. Taihen, from its start in Osaka in 1983, has challenged to create neo beauty by sublimation the unnaturalness of the body or movements of the disabled.
This paper is the study on the performance aesthetics of the Zainichi Korean theater company Taihen(態變), founded in Osaka in 1983. Man-ri Kim, its artistic director, and founder is the second generation of Zainichi Koreans. He was born in Osaka in November 1953, has written and directed over 60 works as an artistic director since 1983.
Although Man-ri Kim is a person with a disability himself, Taihen clearly drew a line from the welfare dimension and transformed what's been considered 'ugly' into expressive power. In Europe, it was evaluated as “a body expression that will transform the aesthetic consciousness itself from the bottom up”. It is the result of their unique expressive aesthetics, which converts a disability that no one can imitate into expressive power. This can be said to be an expression method based on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the representation required in the existing stage art.
Japanese theater critic Kojin Nishido said, “In the blood of Man-ri Kim, different emotions and values ​​from those of the Japanese are flowing through the message supporting the Korean performance of 「Hwang Woondo Lacquer」. The imagination that comes out of her there is something different from Japanese theater.” And that imagination, he asserts, “It will provide an opportunity to contemplate the impact and drama that has never been seen before.” This is also the reason why Taihen, a Korean-Japanese theater company, does not define itself only in the identity of a Zainichi Korean theater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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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본 영화에서 재현된 재일코리안 이미지 변용 - 재일코리안 감독의 작품을 중심으로 -

저자 : 주혜정 ( Joo Hye-jeong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9-10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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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후 일본 영화에서 재현된 재일코리안의 이미지가 어떻게 시대별로 변용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전후 일본사회가 '단일민족주의'를 주장하며 국가 정비에 들어가자 재일코리안도 스스로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영화에서는 재일코리안의 이미지는 '차별'적인 존재로 부각 되면서 일본인 감독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로 인한 다문화주의가 확산되자 재일코리안은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영화에서는 재일코리안은 일본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일본 사회를 비판하면서 자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을 넘어서 2000년대에 들어서자 우파 여론들이 힘을 이끌며 재일코리안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재일코리안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의미를 찾는다. 영화적 재현은 마이너리티의 삶을 주류와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 파괴된 가정을 이해하며 보살피는 이야기로 재일코리안이 아닌 보편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 일본사회에서 우익 단체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정치적 성향도 과거로의 회귀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또한 재일코리안의 영화도 과거로의 회귀적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회귀는 제국주의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회귀라면, 역사적 고통을 겪었던 재일코리안의 경우는 일본사회가 행했던 기억의 망각 즉, 역사를 기반으로 한 현실 인식에 대한 반동의 경고로서의 회귀라고 할 수 있겠다.


This study speculated on how 'zainichi' images reproduced were changed in Japanese movies after wars according to times. As Japanese society began to refurbish national systems, asserting 'homogenous nationalism, zainichi were inspired to promote identity and historical awareness. The zainichi images were produced as discriminative beings by Japanese directors in movies of that time. As multiculturalism has spread over due to globaliszation since 1980s, zainichi began to insist the equal rights with Japanese people. In the movies, zainichi intended to independently live while criticizing Japanese society as discriminative beings. Between the late 1990s and the early 2000s, the right-wing party began to criticize zainichi, they were provoked to search for the universal value of human in the movies. The movies reproduced gave a focus on universal life including stories on living together between the non-mainstream and the mainstream, and care of destroyed families, not those on zainichi, As right-wing groups' chorus of concern is growing, it seems that politics is returning to the past trend. It seems that the zainichi movies are also returning to the past. However, if Japanese society'e return is towards imperialism, zainichi's return is oriented as as alarm against oblivion of Japanese society, that is, oblivion of reality based on historical su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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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 홋카이도의 민중사발굴운동과 한인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운동

저자 : 김광열 ( Kim Gwang-yol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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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후 일본 역사학계의 민중사연구 동향, 1970년대부터 홋카이도에서 전개된 민중사발굴운동과 한인 강제동원희생자유골 발굴운동, 그리고 2000년대 초의 초국적 시민운동 등을 검토하여 그들의 상호 관계성을 밝히고 그 주체들이 추구한 바와 그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전개된 민중사연구는 일본사회의 저변에 있던 일반 민중의 이념이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에 성과가 있었으나, 메이지기의 중앙집권화의 과정에서 동화를 강요당한 소수민족이라든지, 제국주의 영토확장의 결과로서 이주 및 동원으로 일본열도에 존재했던 식민지 조선이나 중국 출신자들은 고려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당시 일본사학계에서 주목한 '민중'에는 다수자 위주의 '국민'을 기준으로 한 내셔널리티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1970년대부터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사발굴운동은 다른 모습이 확인된다.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운동은 메이지시대 홋카이도의 개척 과정에서 희생된 민중의 존재를 발굴하는 작업 이외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홋카이도의 군수사업체에 동원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해에도 주목하였다. 그 계기로서 당시 홋카이도에서 실시되었던 '조선인 강제노동강제연행 진상조사'와의 만남이 있기는 했으나,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사발굴' 범위에 전쟁동원으로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도 포함시켰다. 그러한 민족을 초월한 민중사운동의 진보적 변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단체가 1976년에 설립된 소라치민중사강좌였다. 이 단체는 1980년부터 벽지인 슈마리나이에서 조선인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이라는 육체노동을 동반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이 1990년대에는 한국 및 재일코리안 청년들과 함께 하는 국경을 초월한 '한일 공동워크숍' 및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켰다. 즉 소라치민중사강좌를 중심으로 전개된 강제노동희생자 유해발굴운동은 1970년대 홋카이도 민중사발굴운동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실천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운동은 2003년 2월에 설립된 초국적 초이념의 새로운 시민단체 '강제노동강제동원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으로 귀결되었다. 홋카이도포럼의 활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동 지역의 진보적 시민들이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한 민중사발굴운동과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rends in the study of people's history in post-war Japan, and the excavation of the remains of forced labor victims in Hokkaido,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transnational civic movement in the early 2000s to reveal their interrelationships, what their subjects pursued, and what the significance of the movement.
The study of people's history in Japan since the 1960s has been successful in highlighting the ideology or role of the general population at the base of Japanese society, but did not include ethnic minorities forced to assimilate during Meiji's centralization or colonial Joseon or Chinese. In other words, there was a nationality based on the majority-oriented “people” in the “people” that the Japanese historical community of Japanese history at the time. On the other hand, the Excavation Movement of people's history, which began in Hokkaido in the 1970s, was different.
In addition to discovering the victims of the Meiji invasion of Hokkaido, the Okotsuk People's Lecture also noted the damage of Koreans and Chinese mobilized by Hokkaido's company investigators during the Asia-Pacific War from the late 1970s. As an opportunity, there was a meeting with the “Korea Compulsory Labor Force Investigation” conducted in Hokkaido at the time, but the fact that members of the Okhotsk People's Lecture voluntarily included Koreans and Chinese victims of war in the scope of “People's Discovery” was a level of national awareness.
A group strongly influenced by the progressive changes in the popular history movement was Sorachi People's Lecture established in 1976. In order to practice the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the organization launched a movement in Shumarinai, in 1980 accompanied by physical labor called the excavation of the remains of Korean forced laborers. In the 1990s, it developed a new form of “Korea-Japan Joint Workshop” and “East Asia Joint Workshop.” In other words, the excavation movement of the remains of forced labor victims centered on Sorachi people's history Lecture opened a new horizon by actively inheriting and practicing the values of the Hokkaido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in the 1970s.
Their movement resulted in a new transnational hyper-ideal civic group, the Hokkaido Forum, which was established in February 2003 to consider victims of forced labor. The activities of the Hokkaido Forum can be said to be the result of the experience accumulated through the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and forced mobilization victim excavation movement, which was conducted across national borders since the late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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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정부에 의한 재일코리안에 대한 육아지원 배제 문제를 둘러싼 헌법소원의 의의와 과제

저자 : 김웅기 ( Kim Woongki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15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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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10년대 초부터 제기되어 온 국내거주 한국국적 재일코리안에 대한 복지수혜권 배제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내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국내에서 육아하는 재일코리안 여성들은 자신이 정체성의 근거로 삼은 일본 특별영주자격을 자녀에게도 물려 주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 점이 빌미가 되어 보육료를 비롯한 내국인 대상 육아지원정책에서 배제됐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당연히 외국인이 대상이 되는 다문화가정 지원에서도 배제된 것이다. 재일코리안이 한국국적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국인, 외국인, 재외동포를 막론하고 사실상 유일하게 완전히 권리에서 소외된 재일코리안 여성들은 육아지원정책의 적용을 촉구하며 2015년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원고 측 주장의 핵심은 평등권 침해다. 국내에 장기거주하는 재외국민이 의무 측면에서 내국인과 납세나 병역 등 동일하게 부과됨에도 불구하고 복지수혜권이라는 권리 측면에서는 배제되는 현상이 법적 근거가 취약한 행정당국의 재량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육아지원정책의 공동주관부처인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권고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국민감정을 앞세워 시정을 거부했다.
헌법재판소는 원고 측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행정당국 측의 평등권 침해를 판시했다. 불합리한 차별이라는 점에 대해 재외국민의 권리의무관계, 이중국적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근거로 거론되었고 재외국민의 불분명한 '국내 영주 의사'라는 근거가 모호한 보건복지부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재일코리안의 국내지위문제는 유일하게 구 종주국에 거주하며 여전히 '제국'의 영향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특수한 재외동포 집단이라는 사실을 국민국가 대한민국이 예외적 존재로 수용하지 않는 데 기인된다고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재외동포법을 비롯한 제도설계에 있어 자발적 경제이민이 거주국에서 권리 확대를 위해 취득하는 영주권과 재일코리안의 일본 특별영주자격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일제강점의 피해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This thesis discusses issues raised by ROK's exclusion against Zainichi Koreans from its welfare, particularly childcare programs. The problem is that these Zainichi Koreans were being excluded from any type of welfare, not only the one for Korean nationals but also that for foreign residents. Such a situation derives from the fact that the support excludes overseas Koreans with ROK nationality. Two completely marginalized Zainichi females filed a constitutional petition against the nation in 2015.
The core of the plaintiffs' argument is an infringement of equal rights. It was at the discretion of administrative authorities, which possess weak legal grounds, that excluded Zainichi Koreans from civil rights. Although the government imposed national duties on all Korean nationals, it restricts civil rights against overseas nationals.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and the Ministry of Education, co-hosts of the childcare support program, evaded amending their stances, with vague public sentiment despite the 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s recommendation to correct it. However, such administrative practices were not accepted by ROK's Constitutional Court in January 2018.
The court fully accepted the plaintiffs' claim and ruled that the authorities violated the right to equality.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s claim that the exclusion is justified based on 'overseas Koreans' vague will to reside in ROK' was not accepted.
Such unfair administrative practices are the result of the ROK's institutional design of the overseas resident policy. The fact that Zainichi Koreans are the only overseas Korean group not free from the legacy of the Japanese empire is overseen. In other words, the framework of ROK's overseas Korean policy does not reflect Zainichi Koreans' unique backgrounds. In short, the legacy of the Japanese empire is not critical for consisting ROK's national identity in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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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재조일본인 귀환과 한일회담 청구권 문제의 재조명

저자 : 박경민 ( Park Kyung-min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9-18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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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45년 패전 이후 미국에 의해 재조일본인들의 한반도 소재 사유재산이 몰수된 문제를 두고 조선통치 출신자의 대응 결과가 일본정부의 대일강화조약과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염두에 둔 대책 마련과 상호 관련성을 맺으며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거기서 산출된 식민통치 실적의 '숫자'와 관련된 국내보상 문제와 한일회담의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정치과정,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문제로 인해 양국이 정면충돌하여 교섭 결렬에 이르는 경위를 재조명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첫째, 해방공간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본다. 둘째, 본국 귀환 이후 일본사회에서 기존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의 대상으로 내몰린 그들의 행동이 일본정부의 정책구상과 맞물리는 양상, 셋째, 그들 조선통치 출신자들과 일본정부의 공동결과물이 한일회담 청구권 문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그리고 실제 교섭현장에서 활용되는 장면까지 미시적으로 복원한다. 이를 통해 1945년 패전 후 재조일본인들의 본국 귀환부터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에 이르는 연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한일관계의 갈등요인 중 하나인 '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한 의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This study reveals the process by which the colonial ruler's measures in relation to the private property of Japanese residents on the Korean Peninsula after Japan's defeat in 1945 and the Japanese government's measures considering 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 and ROK-Japan talks, establish a correlation and converge to one point. In the process, this study examines the domestic compensation issue related to the performance statistics on colonial rule, the political process surrounding the claims issue arising from ROK-Japan talks, and finally, the rupture in ROK-Japan negotiations caused by a head-on conflict on these issues.
Therefore, in this paper, we first look at the perception and response of the Japanese who were defeated in the liberation space. Second, their actions, which have been subject to criticism of colonial rule in Japanese society since their return to Japan, are in line with the Japanese government's policy initiative. Third, the joint results of these Japanese and Japanese governments will be micro-resilient from the policy-making process of the claim issue of ROK-Japan normalization negotiations and from the scene of actual negotiations. Through this, the government aims to draw significance for “personal claims,” one of the factors of conflict between ROK and Japan today, by revealing the continuity of Japanese people return to their home countries after the def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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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森崎和江の詩「ほねのおかあさん」の背景考察 ―分裂する「わたし」と『からゆきさん』への結実―

저자 : 反町真寿美 ( Sorimachi Masumi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0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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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論文では、森崎和江の詩「ほねのおかあさん」に注目し考察を行った。「ほねのおかあさん」は、森崎の妊娠時の体験に基づき創作されたものである。「わたし」という一人称から、当時の森崎がこぼれ落ちているという感覚に襲われた思いが綴られている。身ごもった喜びが身体に満ちあふれていながらも、戸惑い、打ちのめされ、泣いている「ほねのおかあさん」に森崎の姿が投影されている。さらにこの詩は、森崎個人の姿を映す鏡であると同時に、子どもをその身に宿した女が自称することのできる言語が日本社会に存在していないという「女の孤独」をも描いている。
そして「ほねのおかあさん」は、ルポルタージュ『からゆきさん』発表までの道筋を作った作品でもある。森崎はこの詩を介して「からゆきさん」の娘であった友人と出会ったためである。友人は「女の商品化」の様相を幼い頃から間近で見ていた。よって、女性の性や生が、単に愛や生命を宿した喜びのみに彩られ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身をもって知っていたのだ。森崎と友人は、「女」であることや「朝鮮生まれ」という共通点を持ち合わせてはいたものの、そこには歴然とした格差が横たわっていた。友人は、森崎がそれまで知らずにいたもの──女たちが置かれている「現実」を森崎に見せようとし、「ほねのおかあさん」を越える詩の誕生を切望していた。
その後森崎は「からゆきさん」であった女性たちへの聞き書きを行うようになる。「からゆきさん」の郷里を訪ね話を聞く作業が、その土地に根差した方言を使いながら生きる人びとの姿を森崎に見せ、そのことばを内面化させる機会を与えた。また、「ほねのおかあさん」から繋がるあらゆる経験は、朝鮮体験に沈んでいた森崎へ、日本で生きる道や覚悟をもたらしたとも考えられる。それほどこの「ほねのおかあさん」は森崎にとって重要な詩であると言えるのだ。


In this paper we focus on the poem 'Hone-no-Okaasan' by Kazue Morisaki. This poem is based on Morisaki's experiences during her pregnancy. Morisaki expresses the feeling that 'I', her existence, has slipped away from her body. The poem is a projection of Morisaki's confusion, overwhelm and tears, while her body is filled with the joy of carrying a child. The poem is not only an expression of Morisaki herself, but also of the loneliness of women in Japanese society, where a woman carrying a child has no words to call herself.
The poem “Hone-no-Okaasan” also paved the way for the publication of the reportage “Karayuki-san”. It was through this poem that Morisaki met his friend, the daughter of “Karayuki-san”. Morisaki's friend had witnessed the “commodification of women” at close quarters from an early age. As such, she knew that women's sexuality and life was not only coloured by love and the joy of living. Although Morisaki and her friend had some things in common, such as being female and born in Korea, they had clear differences. The friend tried to show Morisaki the “reality” of the situation of women, which Morisaki did not know, and longed for the birth of a poem that would surpass “Hone-no-Okaasan”.
Morisaki then began to write interviews with the women who had been “Karayuki-san”. Visiting the hometowns of the “Karayuki-sans” and listening to their stories was an opportunity for Morisaki to see people living in the local dialect and to internalise their language. It was also an opportunity to internalise the language. This is why “Hone-no-Okaasan” is such an important poem for Mori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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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제강점기 '징병제 도입'과 문인의 역할 - 『국민문학(國民文學)』에 나타난 징병제 담론을 중심으로 -

저자 : 방경희 ( Bang Kyounghee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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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인 1895년부터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대만에서는 1943년이 되어서야 징병제 실시계획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징병제는 이보다 일 년여 빠른 시기인 1942년에 징병제 실시계획이 발표되었고 이후, '징병제 도입'은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의 배후에는 조선 측의 적극적인 '징병제 요망 운동'이 있었고, '징병제 요망 운동'은 1920년대부터 주창되었던 '참정권 청원 운동'과 긴밀하게 연동하고 있었음을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양자의 연관성과 각 운동의 요망, 청원의 논리를 검토하여 참정권의 허상과 징병제 도입의 실제를 파악하고, 이러한 '징병제 도입'을 선전, 선동, 홍보하는 역할을 하였던 당시 문인들의 활동상을 문예지 『國民文學』을 통하여 추적함으로써 그들의 구체적 활동과 그 실제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당시 문인들의 활동과 역할이, 조선인 일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그 파급력은 어떠하였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In Taiwan, which had been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since 1895, before World War II, it was not until 1943 that the conscription system was announced. However, the conscription system in Joseon was announced in 1942, a year earlier than this, when the plan to implement the conscription system was announced. Surprisingly, however, the study found that the Joseon side's active 'conscription demand movement' was behind this fact and that the 'conscription demand movement' was closely linked with the 'suffragette petition movement' that had been advocated since the 1920s. Therefore, in this thesis, by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the demands of each movement, and the logic of the petition, we understand the illusion of suffrage and the reality of the introduction of the conscription system, and the activities of writers at the time who played a role in propaganda, instigation, and publicity of the introduction of the conscription system. By tracing the award through the literary journal 『Nation Literature』, we intend to investigate their specific activities and their actualities. Through this, we intend to examine how the activities and roles of writers at the time had an impact on the general Joseon people and what kind of ripple effect they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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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본의 스포츠를 통해 구축된 '일본'

저자 : 오현석 ( Oh Hyun-suk )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간행물 : 일본학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1-247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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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일본사회에서 스포츠를 통해 '일본'라고 하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축되고 있는 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본고에서는 이론적 배경으로 스테레오타입에 관한 논의를 검토하였다. 본고에서는 스포츠를 통해서 전달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스테레오타입으로 간주하였고, 이를 통해서 일상생활과 스포츠를 통해 전달되는 '일본'과의 접합이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본고는 현실과 스포츠 사이에서 전달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이미지, 본고에서 강조한 스테레오타입이 어떠한 국가적 담론 구축과 연결되어 가고 있는 지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일반 국민이 스포츠를 관전하거나 시청하면서 자국에 대한 응원이나 열광은 익명의 타인과의 동질감을 구축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차별이나 갈등이 망각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일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미지에 귀속되어 자국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고취를 이끌어 내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본고에서 스포츠에 전달되는 스테레오타입이 현실과의 접합에서 일종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들의 내용을 고려하면, 스포츠를 통해 구축되는 '일본'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과정의 결과는 내셔널리즘의 재생산이라고 하는 스포츠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함을 암시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the image of 'Japan' is being built through sports in Japanese society. In this study, the discussion on stereotypes was reviewed as a theoretical background. In this study, the image of 'Japan' transmitted through sports was regarded as a stereotype. In addition, the discussion was developed from the position that the junction with transmitted through daily life and sports performs an ideological function. This study examined how the image and stereotype of 'Japan' transmitted between reality and sports are connected with the construction of a national discourse. As a result, cheering or enthusiasm for one's own country while watching or watching sports may build a sense of unity with anonymous others, and also perform the function of forgetting discrimination and conflicts that exist in everyday life. In addition, this process is naturally attributed to an image called 'Japan' and performs an ideological function to inspire the identity of one'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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