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근역한문학회> 한문학논집

한문학논집 update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 : 근역한문학회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5-1313
  • : 2713-9905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3)~59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673
한문학논집
59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 안어(按語)와 전(傳) 장지완 『규장전운간오』의 비교

저자 : 심경호 ( Sim Kyungh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61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張之琬(1806~1858)의 『張玉山斐然外抄』에 수록되어 있는 奎章全韻刊誤는 정조가 『奎章全韻』의 上聲梗韻에 御名 '祘'을 배속시키고 '省'의 음을 註記했다고 밝혔다. 규장전운간오 는 이외에도 『규장전운』의 편찬 과정, 字序, 字訓, 字形, 韻屬등에 관해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평을 가했다. 그런데 그 상당 부분이 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의 안어와 일치한다. 하지만 장지완은 『규장전운』의 편집이나 교정에 참여한 인물이 아니다. 『규장전운』을 교정한 일이 있는 정약용이 그 사실을 수택본의 天頭에 기록해 두었으나 후대에 지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전운간오 는 장지완의 저술이 아니라 정약용이 별도로 정리해 두었던 원고를 轉錄한 것인지 모른다. 규장전운간오 의 여러 내용이 정약용 수택본 『규장전운』의 欄外按語와 일치한다.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 정조에게 진헌할 목적으로 文獻備考刊誤를 이룬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정약용은 국가 편찬물인 『규장전운』에 대해 '刊誤'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Kyujang Chŏnun Kano (The Corrected Print of Kyujang Chŏnun) from Chang Chiwan's (1806-1858) Changoksanbiyŏnoech'o clarified that King Jeongjo included his own name '祘' in '上聲梗韻' entry and annotated its phonetic value as '省' in Kyujang Chŏnun. In addition, Kyujang Chŏnun Kano made noteworthy reviews for publication process of Kyujang Chŏnun, word order, word meaning, character shape, and rhyme entries. However, the majority of the reviews are identical to the reviews in the association copy of Kyujang Chŏnun which was owned by Chŏng Yagyong. Chang Chiwan, in fact, did not participate editing or correcting for Kyujang Chŏnun. It is presumed that Chŏng Yagyong, who had participated the correcting, wrote the reviews at the head of a page on his association copy, then the reviews were erased afterwards. Kyujang Chŏnun Kano may not be the work of Chang Chiwan, and is the copy of Chŏng Yagyong's personally organized notes. Chŏng Yagyong had compiled Munhŏnbigo Kano in 1800 (24th of King Jeongjo) to present it to the king. In the same manner, it is highly possible that Chŏng Yagyong compiled 'Kano' for the national project of Kyujang Chŏnun.

KCI등재

2안평대군의 『비해당선반산정화(匪懈堂選半山精華)』 편찬과 주해방법

저자 : 노요한 ( Johann Noh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102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왕안석의 시를 애호한 조선의 왕자가 있었다. 바로 安平大君李瑢(1418~1453)이다. 안평대군은 북송 때 정치가이자 시인인 王安石(1021~1086) 시의 정수를 모아 『匪懈堂選半山精華』로 엮고 목판으로 간행했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과 일본 세이기도(成簣堂) 문고 등에 소장된 6권 2책의 이 목판본은 『고사촬요』(1585년경)의 책판 목록에 '경상도 안동'에 책판이 저록되어 있어 안동에서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평대군 자신의 서문과 신숙주의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의 『반산정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으며, 왕안석의 어떤 시들을 담고 있을까. 안평대군은 어떤 텍스트를 저본으로 왕안석의 시를 읽고 있었으며 어떠한 기준으로 시를 선정하였을까. 안평대군이 작성한 주해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때 참조 준거가 된 것은 무엇일까. 본고는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안평대군 편 『비해 당선반산정화』의 편찬 과정, 저본과 작품 선정 기준, 주해 방법에 대해 간략히 논하였다.


There was a prince of Chosŏn who loved Wang Anshi's (王安石) poems: Prince Anp'yŏng. Prince Anp'yŏng compiled Pihaedangsŏn Pansanjyŏnghwa (匪懈堂選半山精華), a selection of Wang Anshi's poems which was published in woodblock prints made up of 6 volumes (卷) in 2 books (冊) with two prefaces of Prince Anp'yŏng himself and Shin Sukju (申叔舟). As the title of this anthology is found in the list of woodblocks in Andong of Kyŏngsang-do province in Kosa ch'waryo (攷事撮要), this book is supposed to be published in Andong.
If so, how was this Pihaedangsŏn Pansanjyŏnghwa compiled, and which poems were included in this anthology? From which text did Prince Anp'yŏng sellect Wang Anshi's poems, and what was his criteria of selection? How did he arrange the annotations for the poems, and what were their references? This paper examines the process of compilation, the original texts and his criteria of poem selection as well as the way of annotation, of Pihaedangsŏn Pansanjyŏnghwa.

KCI등재

3신숙주(申叔舟)시세계에 있어서의 '윤리성(倫理性)'의 문제와 그 파장(波長)

저자 : 김창호 ( Kim Chang-h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3-129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신숙주의 시에서 '윤리성'에 대한 負荷가 시세계의 형성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 가를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변을 거치면서 양심의 가책, 곧 윤리성에 대한 부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립감으로 이어졌다. 그는 세상사를 一括하는 표현이나 넒은 의미 영역에 걸쳐있는 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투식화한 이들 시어는 교제 상황에서 감정의 곡절이나 세세한 심리 표현을 의례적 차원에서 관리한다.
그는 '閑'을 지향했고 '達觀'의 위치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醉興을 통한 윤리적 상흔의 망각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酬唱이나 贈答의 상황에서 명쾌하게 자신의 지향을 제시하거나 상대와의 정서적 합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公的역할의 우산 아래 상투적 표현과 모호한 시어의 구사, 자아 은폐의 경향으로 흐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숙주는 絶句의 마지막 부분에 상대와 함께 하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거나, 限定形의 어구를 통해 상대와의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격상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자아의 왜소화에 따른 불안 심리가 굴절되어 나타난 형태이다. 그의 시에는 영웅적 삶에 대한 의지와 허무감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한다. 시인은 허무감을 느끼지만 작품 맥락에서 이것은 곧바로 영웅적 다짐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구조는 윤리적 각도에서 자신을 점검할 여지를 적게 만든다. 허무감은 윤리적 성찰로 연결될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무감에서 영웅의식으로 리셋되던 궤도가 무너지는 순간, 윤리성의 문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올 수 있다. 영웅의식을 대체할 지향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탄이나 종교에의 귀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만년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성찰적 시의 창작은 이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This study set out to provide explanations about the involvement of the burden of “ethicality” in the creation of a poetic world in Shin Suk-ju's poetry.
Shin Suk-ju was conscience-stricken about the process of changes to the political situations, and it led to his sense of isolation in his relations with others. He used repeatedly poetic words with a broad semantic scope. Solidified as part of a framework, these poetic words managed delicate psychological expressions in a situation of relationship at a formal level. He was oriented toward “tranquility” and expected to reach the state of “philosophical,” but they were out of his reach. In relations with others, his poems had a difficult time proposing clear sincerity or moving toward emotional unity. This explains why his poems created in the process of performing official roles were replaced with his poems with such tendencies as solidified expressions as part of a framework, vague poetic words, and concealment of ego.
Shin Suk-ju would have a close-up for a scene of being with someone at the end of Jeolgu or promote his relations with someone to something special through restrictive phrases. This shows how his anxious psychology according to the shrinking of his ego was refracted. In his poems, there is a coexistence of his will for a heroic life and his sense of futility like both sides of a coin. The poet has a sense of futility, which is converted into a heroic determination in the context of a work right away. This structure reduces the room for the poet to check himself at an ethical angle as a sense of futility is likely to be connected to ethical self-examination. His conversion to Buddhism and his reflective poems in his later years wer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his track of a sense of futility being reset as heroism no longer functioned.

KCI등재

4이이첨(李爾瞻)과 광해군대 한문학의 한 국면

저자 : 심규식 ( Sim Kyusik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1-16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仁祖反正으로 光海君정권의 인사들이 제거됨으로 인해, 약 10년간의 館閣文學은 한국한문학사의 공백기가 되었다. 이 시기 관각문학의 중심에는 文衡을 담당한 李爾瞻이 있었다. 1613년의 癸丑獄事로 禮曹判書에 오른 이이첨은 李白·杜甫에 대한 조선 전기 시학서를 복간하고 李杜의 시 암송을 進士試응시 자격으로 두었는데, 이는 당대 學唐風을 官學에 포섭하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또, 윤리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東國新續三綱行實圖』와 『忠烈錄』을 편찬했다. 이이첨은 四六騈儷文의 창작에 있어서 平仄規式을 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그가 역적으로 사형당했음에도 그의 관각문 일부는 문체의 모범으로서 보존될 수 있었다. 이이첨은 科表양식을 정확히 적용시킨 謝恩表를 지었으며, 討逆敎書에는 簡嚴한 문체로서 정권의 위엄을 선언했다. 한편으로 서적의 序跋文에는 변려문과 같은 四六言의 對句로 이루어졌으나 그 변격의 평측을 활용한 독특한 문체를 사용했다. 이이첨과 광해군대 관각문학은 17세기 초 한국한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As the personnel of King Kwanghaegun's regime was eliminated at the Injo coup, the state literature of ten years became a blank in the history of Korean Sinitic literature. Yi Ich'ŏm, who held the “literary standard,” was at the center of the state literature at the period of blank. Yi fabricated Kyech'ugoksa (the inquisition for high treason in 1613) and was designated as the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He re-printed the early Chosŏn poetics and annotations for Li Bai and Du Fu and set recitation of their poetry as a qualification for civil service exam. These changes imply his intention to embrace Tang style poetry movement of the age into the official learning. Then he published Tonggung Shinsong Samganghaengshilto (The Revised Stories of Five Confucian Virtues in Chosŏn) and Ch'ungnyŏllok (The Record of the Patriot) as ethical propaganda. Yi emphasized the strict rule of tonal patterns for parallel prose. Thus, some of his work could be preserved as a literary model, even though he was executed as the treacherous. His petitions of gratitude for the emperor thoroughly adopted the style of examinational petition, and his royal addresses for the suppression of rebellion used concise and solemn rhetoric to state dignity of the regime. Meanwhile, Yi used distinct literary style, which shows parallels of four-six words but does not follow tonal patterns of parallel prose, in his prefaces and postscripts. Yi Ich'ŏm and state literature in Kwanghaegun's regime demonstrates new perspective on the early 17th century Korean Sinitic literature.

KCI등재

5이계(耳溪) 홍량호(洪良浩)의 고문론(古文論) 연구(硏究)

저자 : 이향배 ( Lee Hyang-bae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0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耳溪 洪良浩(1724-1802)는 영·정조시기에 활동한 소론계 대표문인이다. 어려서 저촌 심육에게 수학한 홍량호는 兩館大提學을 지낸 관각문인이지만 경세치용의 실학적 글쓰기를 통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평소에 박학을 추구하여 경학은 물론, 한자학, 지리학에 이르기까지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다. 학문의 근본을 經術에 두고는 경술을 다시 體와 用으로 나누었다. 性理를 체로, 政事를 용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체용이 원활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典章에 대한 넓은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의 실학적 글쓰기 이면에는 확고한 고문이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이를 문학론의 차원에서 검토해왔지만 본고는 고문론의 관점에서 다시 분석하였다. 홍량호가 단순한 산문작가가 아니라 고문을 추구한 고문가이기 때문이었다.
이치가 象에 붙은 것이 문이며 도의 영화라고 정의한 그는 폭넓은 의미로 문을 설명하였다. 聖人의 문장을 行道와 傳道두 종류로 나누고는 학문을 통해 조화를 형용하고 사물의 변화를 다하는 글쓰기를 주창하였다. 결국 문장이 천하의 공리라고 선언한 그는 깊은 학문을 통해 공적으로 천하에 이치를 밝히는 글을 추구했다.
또한 문을 經緯라고 정의한 그는 도와 기가 錯綜이 되어야 지극한 문장이라 보았다. 도와 기를 기준으로 역대 고문의 흐름을 진단했는데 도기가 착종된 전범이 육경이었다. 진한 당송의 글은 도기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경으로써 도를 중시하고 동시에 緯로써 기가 없다면 문이 될 수 없다면서 기의 배양을 중시했다. 기를 배양하는 방법이 바로 호연지기였다.
홍량호는 육경에 기준을 두고 선진 전한의 문장이 가장 근고하다고 보았다. 先秦 前漢 및 唐宋작가에 대해 학문을 기준으로 비평한 그는 사마천보다는 가의를 가장 높게 평가하였다. 가의가 서한 고문을 창도했다고 본 그는 『가자수언』을 편찬했으며 그의 글쓰기를 추종하였다. 서한시대 재주와 학문을 두루 갖추고 체용을 겸비한 유일한 학자로 가의를 꼽고는 서한시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홍량호의 고문론은 도학가의 문학이론과 진한고문가의 이론을 절충한 특징이 보인다. 이는 진한고문가와 당송고문가의 양대 흐름에서 벗어나 고문의 전범을 육경에 두고 경세치용의 실학적 글쓰기를 위한 새로운 고문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Igye(耳溪) Hong Ryang-ho(洪良浩)(1724-1802) was a writer who belonged to Young Doctrine and was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King Jeongjo. Hong Ryang-ho was a Gwan-gak Writer who studied under Jeochon Shim Yook and served as Yanggwandaejehak(兩館大提學), but left many writings through the practical writing of pragmatic statecraft. He pursued wide knowledge, seeking truth from facts, ranging from classical studies to Chinese characters to geography. He put the foundation of learning to classical writing(經術), and divided it into substance(體) and function(用). At the same time, he explained the principle of the nature(性理) as substance and political affairs(政事) as function, and stressed the need for a broad knowledge of history and literature to ensure substance and function to work smoothly.
Behind his practical writing lies a unique theory of literature. Researchers have reviewed this in terms of literature, but this paper analyzed it in terms of his theory of ancient scripts. It was because Hong Ryang-ho was not just a prose writer, but a writer who pursued ancient style writing.
He defined writing as reason attached to image and manifestation of the Way, and explained writing in a broad sense. He divided sages' writings into two types: practicing the Way(行道) and propagating the Way(傳道), and advocated writing to express harmony through studies and to fulfill change of things. He declared that fine writing should universal truth, and pursued writing that could bring light to truth publicly in the world through deep learning.
He also defined writing as process(經緯) and saw it as fine writing only when the way and the spirit was entangled. He diagnosed the flow of ancient scripts based on the way and the spirit, and found Six Classics as a model where the way and the spirit was entangled. He considered the writings of Qin/Han and Tang/Song Dynasties short of perfection of the way and the spirit. Therefore, he emphasized the cultivation of the spirit, saying that writing is impossible without the spirit as process(緯) despite appreciating the way as rule. He presented Great Spirit as a method of cultivating the spirit.
Hong Ryang-ho saw the writings of the Former Qin and the Former Han most solid, based on the Six Classics. He criticized the writers of the Former Qin, the former Han, and Tang and Soong Dynasties based onacademic standards, giving Ga-ui the highest rating over Sima Qian. Hong Ryang-ho believed that Ga-ui had advocated ancient scripts of West Han, compiled the book 『"Gaja Su-eon』 and followed his writing. He regarded Ga-ui as the only scholar who had both talent and scholarship, also with both substance and function, and evaluated him as the best writer in the Seo Han Period.
Hong Ryang-ho's theory of ancient scripts is characterized by a compromise between the literary theory of moral scholars and the theory of ancient script scholars of Qin and Han. This is a new theory of the practical writing of pragmatic statecraft, with the model of ancient scripts in Six Classics, away from the two main trends of ancient script scholars of Qin and Han, and Tang and Song.

KCI등재

6『열수문황(冽水文簧)』과 정약용(丁若鏞)의 변려문 인식

저자 : 신윤수 ( Shin Yunsoo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14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冽水文簧』은 丁若鏞(1762~1836)이 아들들에게 자신의 변려문을 한데 모으게 하여 엮은 책이다. 그는 自序에서 젊은 시절 몰두했던 변려문에 대한 후회를 담아 이를 엮었다고 밝혔다. 정조 연간 문장가이자 비평가, 관료로서 활동한 정약용의 변려문 인식은 '古文'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에서 변려문이 어떤 위치를 가졌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다.
정약용의 '후회'는 단순하지 않다. 변려문 자체나 존재 가치 전부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변려문은 사명 등 용도에 맞게 작성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자신의 변려문 몇 작품을 문집에 따로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의 반성적 회고는 변려문 전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實'을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성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기교에 지나치게 공력을 요구하는 변려문, 그 중에서도 특히 科文을 반성한 것이다. 취실과 경세의 문장을 짓고자 했던 정약용은 『冽水文簧』을 통해 기예가 되어 버린 科文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을 남긴 것이다.


The 『Lieshuiwenhuang(冽水文簧)』 is the Jeong Yak-yong(1762~1836)'s own pianliwen(騈儷文) collection complied by his sons. Jeong Yak-yong said that he collected it with regrets about pianliwen(騈儷文), which he was immersed in as a young man. His perception is an essential material that can examine the position of pianliwen(騈儷文) in a period when guwen(古文) was the mainstream.
Jeong Yak-yong's repentance was not simple. He was able to enter the government and earn King Jeongjo's confidence because of his writing ability. His regretful retrospect was made under the pursuit of actuality(實). He regretted and reflected on himself about pianliwen(騈儷文) that skill-oriented, especially civil official examination's. He wrote a kind of letter of apology about civil official examination's and the composition examination(製述) through the 『Lieshuiwenhuang (冽水文簧)』.

KCI등재

7조선 후기 송두신문(送痘神文)의 창작 양상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5-253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 후기에 송두신문이 지속적으로 창작된 현상에 주목하여, 송두신문의 등장 배경과 내용, 송두신문의 창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에 두창이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앗아가자, 민간에서는 두창을 섬기는 풍습이 만연했다. 이로 인해 이전에는 시문의 주된 제재가 되지 못했던 '두창'이 본격적으로 시문의 전면에 등장했는데, 이현석의 「聖痘歌」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숙종이 재위 중에 두창에 걸렸다가 낫자, 이현석은 「성두가」를 지어 두창을 '聖痘'로 신격화하고 두창의 공능을 칭송했다. 이현석의 「성두가」는 이후 송두신문 계열 작품의 창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조선 시대 유자들은 굿을 벌여 두신을 섬기는 풍속을 비판했지만, 두창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두신의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나오게 된 문학적 양식이 송두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유자들은 송두신문을 통해 두신의 존재와 두신의 영험함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은 두신을 보는 관점에서는 차이를 보였으나, 공통적으로 두신의 존재와 공능을 인정하고 두신을 제대로 배송하는 방법은 무당굿이 아니라 시문을 지어 전송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즉 조선 시대 문인들은 두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무당굿이 아닌 제문으로 전송함으로써, 두창에 대한 주술적 대응 방식을 활용하되 미신에 빠졌다는 비판은 면하려 했던 것이다. 송두신문은 두창이라는 공포의 질병을 마주한 문인들이 유가적 이상과 현실적인 대응 사이의 괴리를 좁히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창작된 송두신문은 祭神文의 일종으로서 서두부-전개부-종결부라는 3단계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때 두창의 순조로운 진행이야말로 두신을 공경히 배송하는 핵심 근거인 만큼, 대부분의 송두신문에는 병증의 규칙적인 진행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한편, 송두신문은 작자의 삶에 대한 성찰을 표현하는 문학적 장치로 활용되기도 했다. 유희와 윤기는 송두신문을 변주하여,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두신'을 소재로 삼아 인간 사회의 禍福과 窮達에 대한 성찰을 드러냈다.
현재의 관점에서 송두신문을 보면, 조선 시대 문인들이 두신에게 복을 비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송두신문의 창작은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나름의 논리로 전염병의 유행을 설명하고, 그러한 해석을 토대로 두창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I noted the continuous creation of the Songdusinmun in the late Joseon Dynasty. So this paper is aimed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contents of the Songdusinmun and the meaning of the creation of the Songdusinmun.
Smallpox was a fear disease that claimed many lives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a result, the practice of serving a god of smallpox was widespread in the private sector. Not only among the general public, but also among the family members of the nobility and the royal family, the shamanic ritual was held to serve the god of smallpox. As shaman rituals to worship the god of smallpox became popular, 'smallpox', which was not the main theme of the poem, became a theme of the poem. Lee Hyun-suk's “Seongduga” is the first literary expression of the sacredness of smallpox. Lee Hyeon-seok wrote “Seongduga” to celebrate King Sukjong's recovery from illness. Lee Hyeon-seok praised smallpox in his work. Lee Hyun-seok's “Seongduga” had a direct and indirect influence on the creation of the Songdusinmun.
During the Joseon Dynasty, Confucian scholars criticized the shaman rituals to worship the god of smallpox. But in the absence of a sure cure for smallpox, it was hard to deny the existence of the god of smallpox. The Songdusinmun is the literary style that emerged from this contradiction.
Writers of the Joseon Dynasty tried to reasonably explain the mystical forces of the god of smallpox through the Songdusinmun. For example, Chae Ji-hong identifed the god of smallpox as “the energy of yin and yang that goes back and forth”. Kang Pil-sin identified the god of smallpox as the ghost who cannot receive ancestral rites. Most other writers believed that there was the god to be incharge of smallpox, because smallpox' symptoms were carried out regularly. Although they differed from the perspective of seeing the god of smallpox, they generally acknowledged the mystical forcesr of the god of smallpox, and argued that the way to properly worship the god of smallpox was to send the god off by making poems, not by the shamanic style.
The Songdusinmun, which was created against this backdrop, consists of three stages: the beginning, the development, and the ending. The opening part describes the existence of the god of smallpox, the development part describes the progress of smallpox, and the ending part sends the god of smallpox off. As smallpox's smooth progress is the key reason for the worship the god of smallpox, most the Songdusinmun beautifully depict the regular progress of the disease. On the other hand, the style of the Songdusinmun transformed into literature to reveal writer's philosophy of life.
From the current point of view, it can be considered unreasonable for writers of the Joseon Dynasty to lean on the god of smallpox and pray for their blessings. However, considering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the Songdusinmun and its contents, the continuous creation of the Songdusinmun cannot be dismissed as unreasonable acts. The creation of the Songdusinmun was part of the efforts of writers in the Joseon Dynasty to explain the epidemic with their own logic and overcome the fear of smallpox.

KCI등재

8조선후기 문인들의 시축제작 참여양상과 관계 맺기 - 조인영(趙寅永)의 '추흥창수(秋興唱酬)'를 중심으로 -

저자 : 신민섭 ( Shin Min-seob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시축제작 참여양상을 살펴보고 조인영의 '추흥창수'를 통해 당시 문인들이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시축을 제작하였고, 활용했으며, 관계 맺기를 시도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詩軸간 雅趣의 경쟁은 조선후기 시회문화의 새로운 이슈가 되었다. 한편, 황화수창이 중단된 이후 詩는 국가적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이유로 문인들의 作詩수준은 저하되어, 비록 詩會를 열고 시축을 제작한다 하더라고 아취를 담보할 수 없었다. 이에 문인들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시회와 무관한 외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끌어들이기'였다.
申緯(1769~1845)는 1833년 2~3월 사이에 『秋興唱酬卷』의 序文을 작성했다. 이 시축에는 趙萬永, 趙寅永, 李止淵, 李紀淵, 權敦仁, 趙秉鉉, 李復鉉등 7인이 杜甫의 「秋興」 8수의 韻字를 차운한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조인영 그룹이 당시 서산에 머물고 있었던 신위에게 시축을 보낸 이유는 『추흥창수권』의 8번째 자리를 채우라는 의도였다. 시축이 제작된 '추흥창수'는 1832년 9월, 東岩에 위치한 조인영의 別墅에서, 杜甫의 「秋興」 8수의 운자를 차운한 시가 제작된 시회이다. 추흥창수를 통해 제작된 시축이 『秋興唱酬』로서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유일본(이하 고려대본)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대본에는 조만영, 조인영, 이지연, 이기연, 권돈인, 조병현, 이복현, 趙秀三, 姜溍 등 9인의 詩가 수록되어 있다.
신위가 전달받은 시축과 고려대본의 차이점은 조수삼, 강진의 존재 여부다. 고려대본을 살펴보면 조수삼, 강진은 추흥창수 참여자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위가 전달받은 시축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는 시축이 완성된 1832년 10월 이후부터, 신위의 서문 작성 시기인 1833년 2~3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The paper was to describe the purpose of participation aspect of making a verse scroll in the late Joseon literati and to examine formation of relationships through Cho In-young's 'ChuheungChangsu'.
A competition of elegance in a verse scroll was new issue in poetry club in the late Joseon. Meanwhile, since then suspending of Hwanghwasuchang, literati's ability of writing poem was downgraded. So elegance in a verse scroll was not guaranteed. On this, Literati sought for winning the competition of various measure, one of them to happen attraction of external personnel of irrelevant poetry club.
Shin Wi(申緯, 1769~1845) wrote preface of 『ChuheungChangsu』 in February and March 1833. This verse scroll contained poetry that Cho Man-young(趙萬永), Cho In-young(趙寅永), Lee Ji-yeon(李止淵), Lee Gi-yeon(李紀淵), Kwon Don-in(權敦仁), CHo Byeong-hyeon(趙秉鉉), and Lee Bok-hyeon(李復鉉) was made by Tu Fu(杜甫, 712~770)'s a rhyming word of 「Chuheung(秋興)」. The reason why Cho In-young's group send verse scroll to Shin Wi was meant to be filled in eighth.
A poetry club so called 'ChuheungChangsu' was held by Cho In-young's villa at Dong Am in September 1832. 『ChuheungChangsu』 was housed in a library of Korea University. But this verse scroll contained poetry made by Cho Man-young, Cho In-young, Lee Ji-yeon, Lee Gi-yeon, Kwon Don-in, CHo Byeong-hyeon, Lee Bok-hyeon, Cho Soo-sam(趙秀三), and Kang Jin(姜溍), then verse making is the same as before.
The difference between Shin Wi's verse scroll and a collection of K.U. is presence of Cho Soo-sam and Kang Jin. Although two guys related in participant of 'ChuheungChangsu', disappeared without trace in Shin Wi's verse scroll. This case was from October 1832 to February and March 1833.

KCI등재

9기해년 통신사행과 한일 문사의 시론 및 시 비평

저자 : 이효원 ( Lee Hyo Won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19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7세기 말 임술사행에서 新井白石의 등장으로 촉발된 일본 한시에 대한 통신사의 관심은 18세기 초 소라이학파의 등장과 더불어 고조된다. 특히 기해년 사행의 필담창화집에는 양국 문사들이 이상으로 삼는 시론과 관련한 필담이 증가했다. 또 시선집 및 비평서에 대한 언급이나 통신사에게 자신의 시를 비평해줄 것을 청하고 이를 출판하는 등 시 비평에 대한 관심 역시 증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사들은 주로 당시와 명시를 존숭하고 송시를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조선 문사들은 당시를 으뜸으로 치면서도 송시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통신사가 명시를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은 데 비해, 일본에서는 소라이학파의 영향으로 명시를 한시 학습의 첩경으로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었다. 기해년 사행의 필담과 시 비평에는 당시 변화하는 일본의 문풍이 잘 드러난다. 양국 문사들은 추구하는 시론와 관련해서 활발하게 필담을 나누었고, 통신사는 일본 문사의 시집에 평어를 쓰고 일본 문사가 이 평어를 읽고 다시 평어를 다는 등 양국 문사 사이에 활발한 시 비평이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한일 문사의 문학 교류의 양상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검토하였다.


Poetry criticism was active between Korean and Japanese writers during the exchange in 1719. Japanese writers asked Choseon writers to criticize their poems and published them. Japanese writers mainly regarded Tang poetry and Ming poetry as important, and Song poetry was rejected. On the other hand, Tongshinsa insisted on learning both Tang and Song poetry. Through exchanges in 1719, we can see the changing situation of literary circles in Japan. Writers of Choseon and Japan talked about the poetry they pursued. Tongshinsa criticized Japanese poetry, and the Japanese read it and criticized it again. This is the first phenomenon that emerged during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Choseon and Japan.

KCI등재

10『상서(尙書)』 강의(講義)를 통해서 본 정조(正祖)의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에 관한 인식과 해석 방식에 대하여

저자 : 이영준 ( Lee Young-june )

발행기관 : 근역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논집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21-359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弘齋全書』의 『尙書』 講義를 통해 程朱性理學에 관한 正祖의 인식 및 해석과 이해를 개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조는 君師를 자임하여 文治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1778년에 규장각을 문화정책의 추진 기관으로 재구성하고 1781년 抄啓文臣制度를 신설하였다. 經史 講義는 이 초계문신을 재교육하는 과정에 진행된 것이며 이 조문과 조대를 수합한 것이 바로 「경사강의」이다. 『弘齋全書』에 수록된 이 「경사강의」는 정조의 條問과 초계문신 및 지방 유생들의 條對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경사강의」는 일종의 經典解釋學자료로서, 경학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학문적 성과, 그리고 강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을 종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조는 梅賾本 『古文尙書』의 위작 문제, 人心과 道心의 이해, 道學의 관건으로서 欽과 敬의 이해 등 『상서』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어떠한 조문을 내렸으며 어떠한 조대를 취하였을까. 또 강의를 통해 표명한 정조의 학문 방법론으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본고는 『상서』 강의를 통해 정조의 정주성리학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This paper explores king Chŏngjo's understanding of Cheng-zhu xinglixue (程朱性理學, Cheng-zhu Neo-Confucianism) appeared in the Shangshu Jiangyi (尙書講義, the Lectures on the Book of Documents). After succeeding to the throne, king Chŏngjo endeavored to conduct state affairs under the principle of civil order (文治) that he reconstituted the Kyujanggak (奎章閣, Royal Library) as an institution for promoting cultural policy in 1778. He also newly established the system of Ch'ogye munsin (抄啓文臣, the invited scholar-officials) and conducted Kyŏngsa kang'ŭi (經史講義, the Lectures on the Confucian Classics and History) to reeducate these members of Ch'ogye munsin. The results of the series of lectures were compiled as the voluminous texts of the Kyŏngsa kang'ŭi.
The Kyŏngsa kang'ŭi is one of the important resources of Confucian hermeneutic in the late Chosŏn period that it not only demonstrates King Chŏngjo's interests on study of the Classics (經學) and his academic achievements, but also synthesizes the understanding of the Confucian Classics of the Ch'ogye munsin scholars attended the Royal lecture during the period. If so, what questions did king Chŏngjo give regarding the various issues, for example, the questions of the Old Text (古文) Shangshu which was regarded as inauthentic, “forged” (wei 僞), the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hip between renxin (人心) and daoxin (道心) as well as jing (敬) and chin (欽) etc., and what answers did he choose? Can we figure out king Chŏngjo's methodology of study of the Classics from the texts? This paper overviews king Chŏngjo's understading of Cheng-zhu xinglixue and Confucian Classics on the whole through his questions and answers of the invited scholar-officials.

12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