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단국사학회> 사학지

사학지 update

The Historical Journal

  • : 단국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226-1548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7)~61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466
사학지
61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1<浦項 中城里 新羅碑> 연구의 쟁점과 논의

저자 : 이현섭 ( Lee hyeonseop ) , 전덕재 ( Jeon Deogjae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09 (10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지난 12년간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연구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향후 학계의 합리적인 비문 해석안 도출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현재까지 중성리비와 관련된 논쟁의 주요 쟁점은 크게 3가지로 파악된다. 첫 번째는 비문의 판독과 건립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두 번째는 '敎', '白', '世令', '云' 등과 같은 動詞의 해석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사건의 피고와 원고, 분쟁 대상에 대한 이해 문제이다. 우선 비석의 건립연대에 대한 논의는 1행 5자의 판독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의 경우 해당 부분의 글자를 '中'자로 파악한 뒤 441년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비문의 건립연대를 501년(지증왕 2)으로 파악하고 있다.
두 번째 쟁점은 각 동사의 주어 및 목적어와 관련되어 있다. '敎'와 '白'의 경우 奈麻 관등의 인물들이 '敎'의 목적어가 되는지 白의 주어가 되는지의 문제인데, 이는 '夲牟子'를 職名으로 이해하느냐 人名으로 이해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白'의 목적어는 보통 爭人集團이라고 이해하지만, 일부 연구자는 사건의 내용 혹은 '世令', '云' '奪·還' 등의 동사를 모두 포괄하여 파악하기도 한다. 특히 爭人集團의 성격과 관련하여 '분쟁당사자'와 '公論集團', '職名'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世令'의 주어는 일반적으로 '使人集團'이라고 파악되나 그 구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世'의 해석에 대해서도 '세간' 혹은 '시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云의 주어는 '世令 이하의 지방유력자', '敎 또는 敎集團', '使人集團'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 내용은 豆智沙干支宮(9행 6자)부터 作民沙干支(10행 9자)까지로 파악되나 연구자에 따라 문장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지막 쟁점은 주로 '宮'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차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이다. 일단 다수의 연구자들이 宮을 건물 혹은 가문 등으로 이해하고 분쟁의 피고를 豆智沙干支宮과 日夫智宮으로, 원고는 '牟旦伐', '牟旦伐喙', '牟旦伐喙作民沙干支' 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이를 개인의 재산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豆智沙干支와 日夫智를 원고, 두지사 간궁과 일부지궁을 분쟁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분쟁의 대상은 食邑, 토지, 金鑛, 宮, 作民 등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白口'는 기존 금석문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해석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석은 '白을 강조한 해석'과 '口를 강조한 해석' 그리고 '白과 口를 구분한 해석'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또한 '白口'는 敎의 범주와 관련된 동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어인 使人 果西牟利의 소속과 비문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를 敎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비석 건립의 절차와 연계하여 파악하기도 한다.
이상의 쟁점들은 部名 및 官等制에 대한 이해, 爭人과 지방유력자들의 성격과 같이 당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연구자들마다 상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합리적 비문 해석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신라의 지방통치 실상과 麻立干時期 흥해지역의 성격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동반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This paper is prepared to provide a comprehensive review of the research results of Pohang Jungseong-ri Silla-stele(浦項 中城里 新羅碑) over the past 12 years and a foundation for deriving a reasonable interpretation of inscriptions in the future. To date, there are three main issues in the debate related to the Jungseong-ri stele.
The first is a issus of reading inscriptions and the date of construction. The second is the interpretation of verbs such as 'Gyo (敎)', 'Baek(白)', 'Seryoung(世令)' and 'Wun(云)'. Finally, the third is the issue of understanding the defendant, the plaintiff, and the subject of dispute in the case. First of all, the discussion on the construction date of the stele is directly related to the reading problem of 1st line 5th characters. Some researchers claim that the inscription was built in 441 after identifying the letters of the part as 'Jung(中)', but most researchers identify the construction date of the inscription as 501(2nd year of King Jijeung).
The second issue is related to the subject and object of each verb. In the case of 'Gyo(敎)' and 'Baek(白)', it is a matter of whether characters such as the group of Nama(奈麻集團) are the objects of 'Gyo(敎)' or the subject of Baek(白), which is depends on whether they understand of 'Bonmoja(夲牟子)' as an official title or as a personal name. The object of 'Baek(白)' is usually understood as the group Jaeng-in(爭人集團), but some researchers understand as the content of the event or include verbs such as 'Seryoung(世令)', 'Wun(云)', and 'Tal·Hwan(奪·還)'. In particular, in relation to the character of group of Jaeng-in(爭人集團), a view to understand as 'group of dispute', 'arbitration committee', and 'official title' was suggested, and group of Sa-in(使人集團) is generally understood as the subject of 'Seryoung(世令)', but various opinions were raised about the composition of people. There are also conflicting views on the interpretation of 'Se(世)' as 'world' or 'that time'. There was a view that the subject of 'Wun(云)' was 'the local ruling class recorded after Seryoung(世令)', 'Gyo(敎) or group of Gyo(敎集團)', and 'group of Sa-in(使人集團)'. The contents range of 'Wun(云)' are generally understood from Dujisaganjigung(豆智沙干支宮)(9th line, 6th characters) to Jakminsaganji(作民沙干支)(10th line, 9th characters), but the opinions about the sentence structure are divided depending on the researcher.
The last issue is a problem that derived mainly from understanding of what 'Gung(宮)' is. First, many researchers not only estimated 'Gung(宮)' as a building or family, but also understand that the defendants in the dispute are 'Dujisaganjigung(豆智沙干支宮) and Ilbujigung(日夫智宮)'. Simultaneously, the plaintiff is understood 'Modanbeol(牟旦伐)', 'Modanbeolhwe(牟旦伐喙)', 'Modanbeolhwejakminsaganji( 牟旦伐喙作民沙干支)' and so on. On the other hand, it is also understood as an individual property. In this case, 'Dujisaganji(豆智沙干支) and Ilbuji(日夫智)' are identified as the plaintiffs, and 'Dujisaganjigung(豆智沙干支宮) and Ilbujigung(日夫智宮)' are identified as object of dispute. The opinions were presented that the subject of the dispute was Sigeup(食邑), farmland, gold mine, Gung(宮), Jakmin(作民) and so on. Since 'Baekgu(白口)' can't be found example in any existing epigraph of Silla, various opinions have been presented on its interpretation. Researchers' interpretations on that word can be categorized into 'interpretation that emphasizes Baek(白)', 'interpretation that emphasizes Gu(口)', and 'interpretation that distinguishes between Baek(白) and Gu(口)'. Also, 'Baekgu(白口)' can be said to be a verb related to the category of Gyo(敎). Depending on the affiliation of the subject Sa-in Gwaseomoli(使人 果西牟利) and how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inscription, 'Yakhusegaengdoinjayeojungjoe(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 may be included in the Gyo(敎). And some researchers have understood that the sentence was part of the ceremonial erecting of the stele.
The above issues arise because each researcher has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situation of the time, such as understanding of name of Bu(部名) and Official-Rank(官等) System of Silla, and the characteristics of Jaeng-in(爭人) and the local ruling class. Therefore, in order to derive a reasonable interpretation of inscriptions, it can be seen that it is necessary to fully review the fact of Silla's local governance in the late 5th and early 6th centuries and the nature of the Heunghae area during the Maripgan(麻立干)-period.

2공주지역 출토 백제 기와의 특징과 전개양상 검토

저자 : 김고운 ( Kim Go-woo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1-159 (4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글에서는 공주지역 출토 백제 수막새와 암막새, 연목와를 중심으로 형식분류와 편년을 설정하고, 이를 토대로 백제 기와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공주 공산성, 정지산유적, 추정 대통사지를 중심으로 형식분류를 진행한 결과, 수막새는 총 5형식 17개 소유형으로 구분된다. 암막새는 총 2형식 3개 소유형, 연목와는 총 2형식 4개 소유형으로 분류되었다.
공주지역 백제 기와는 대략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를 세분하면 다시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까지로, 웅진으로 천도한 시기이다. 판단 융기형을 보이는 연화문수막새만 관찰되며, 공산성과 정지산유적에서 출토된다. 이는 한성기 와례와 문양·기술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급박한 상황에서 천도가 이루어진 만큼 한성기 기와 제작 전통이 웅진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중국 남조와 적극적인 대외 교류를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당시 남조의 제와술이 유입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2단계는 대통사 창건연대인 527년 ~ 사비 천도 이전인 6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중국 남조 양나라와 본격적인 기술 교류가 이루어진 시기로, 무령왕대부터 성왕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통사 창건 당시에는 양의 제와술이 대폭 수용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전 단계와 비교하였을 때, 수막새의 형식과 그 제작기법에서 변화 양상이 확인될 뿐만 아니라 마루수막새, 암막새, 연목와 둥 새로운 종류의 기와가 출현하고 있다.
3단계는 사비 천도 이후인 538년부터 7세기 전반까지이다. 이 단계에는 공주지역에서 사비기 부여·익산지역에서 유행하던 수막새와 암막새, 연목와가 출토되고 있어 새롭게 기와가 제작되었다기보다는 부여·익산지역으로부터 공급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사비 천도 이후에도 공주지역이 백제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운영되었고, 주요 건물에 대한 유지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공주지역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약 64년간 자리매김하였다. 백제는 비록 고구려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상황과 맞물려 웅진으로 천도하였으나, 짧은 시기동안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되찾으면서 사비 천도 이후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중국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물질문화의 유입을 이끌어 내는데, 제와술 방면에서는 중국 남조의 기술적 특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새롭게 제작된 웅진기 기와는 이후 사비기까지 이어지며 백제 와전 문화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This study aimed to classify types and analyze the aspects of changes focusing on the Baekje roof tiles in Gongju area, and consider characteristics and genealogy of roof tiles of the Ungjin Baeje Period roof tiles based on the aforementioned. Remains where Baekje roof tiles were unearthed in Gongju are 3 sites including Gongsan Fortress, Jeongji Mountain and Daetong Temple.
As a result of analysis, Baekje roof tiles in Gongju area are supposed to be used from the late 5th century to the early 7th centuiy, which can be subdivided into 3 phases again. The first stage is from the late 5th century to the early 6th century which is the time of transferring the capital to Ungjin after the capture of Hanseong. Convex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the stage are all the ones with embossed petal patterns where were unearthed from the remains in Gongsan Fortress and Jeongji Mountain. It appears that production tradition of roof tiles during the Hanseong Period failed to be inherited to Ungjin as the capital was transferred in urgent situation after the capture of Hanseong in the year of 475. As Baekje was promoting an active exchange with the Southern Dynasties of China, however, it is assumed that roof tile production skills of the Southern Dynasties of those days were introduced during the process.
The second stage represents 527, the year of establishment of Daetongsa Temple to the early 6th century prior to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Sabi. During the stage, full-fledged technical exchange with the Yang Dynasty of China was made. As compared with previous stages, changes in types and manufacturing method of convex roof-end tiles are confirmed with new appearance of roof tiles such as convex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concave roof-end tiles, rafter-end tiles etc.
The third stage is from 538, the year after transfer of the capital to Sabi to the early 7th century. In the stage, concave roof-end tiles and rafter-end tiles as well as convex roof-end tiles that were very popular in Buyeo·Iksan area are unearthed, showing that roof tiles were provided from Buyeo·Iksan area. It appears that Gongju area was operated as one of key bases of Baekje even after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Sabi, and maintenance and repair of main buildings were also conducted.

3조선 후기 肅宗의 關王廟행차와 의미

저자 : 김우진 ( Kim Woo Ji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87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중국에서 형성된 關王廟는 壬辰倭亂을 계기로 16C말 조선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性理學을 중시하던 조선 조정은 관왕묘의 미신적인 성향에 대해 매우 거부감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자 자연히 조선 조정은 관왕묘를 방치하고 관리에 소홀하였다. 그러던 관왕묘는 17C말 숙종대를 거치며 그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당시 청과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정체불명의 선박[荒唐船]과 해적의 접근 등 대외적인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숙종은 백성에게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킬 계기가 필요했고, 관왕묘를 그 매개체로 착안했다. 숙종은 관왕묘를 행차하여 詩文을 내리고 致祭와 보수를 명령하였으며, 관우에 대한 국왕의 儀禮를 결정하는 등 관우 숭배 의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숙종의 관왕묘의 행차는 관우에게 국가적 武神이라는 지위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무사들의 士氣를 향상시키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The Shrines of King Guan[關王廟] which prevailed in Ming China were first introduced to Joseon by the Ming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Joseon in the 16th century. After the war ended, the neo-Confucian court of Joseon, which had a strong aversion to the Daoist cult of Guan Yu, laid aside the cares of the shrines. The significance of the Guan Yu shrines, however, suddenly increased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the late 17th century. As the external crisis heightened due to the frequent appearances of pirates and ships of unknown identities, King Sukjong, in need of momentum to promote loyalty of the people, utilized these shrines of the god of war. The king, repeatedly expressing his will to promote the cult of Guan Yu, visited the shrines, dedicated his own odes, ordered the facilities to be repaired, made sacrifices, and established the royal rites for the cult of Guan Yu. King Sukjong's official visits to the shrines were cleverly designed political act for raising the morale of the troops, promoting loyalty of commoners, and pursuing the peace and prosperity of the state by assigning this half-mythic Chinese hero the power and national status of god of war.

4지역 문화유산의 초등학교 역사교육 활용 방안 연구 -경기도 양주시를 중심으로-

저자 : 박지영 ( Park Jiyoung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45 (5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지역 문화유산과 학교교육의 연계방안은 다양하게 연구되어 왔으나, 학교 밖에서 문화유산 교육을 하고 이를 실제 적용한 사례에 대한 연구는 미비하였다. 본고에서는 지역을 경기도 양주시로 한정하고, 양주시 문화유산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2015 개정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분석하고, 지역 내 매장문화재 조사증가에 따른 자료 축적을 통해 지역 문화유산교육의 필요성을 연구하였다. 이후 경기도 양주시의 역사·지리적 특성을 서술하고 양주시 문화유산을 시대별·유형별로 분석하였다. 양주시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시대별 문화유산과 유형별 문화유산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이를 활용한 역사교육이 가능하였다. 끝으로 문화재청 공모사업 지역문화재활용사업(양주관아지 생생문화재)에서 실시한 초등학교 교육프로그램 사례를 분석하였다.
지역 문화유산의 교육적 활용방안은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하는 인간상을 구현하였고 역사교육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자기 고장의 문화유산을 배우는 과정에서 친근감을 느끼고 거부감 없이 역사를 받아들이며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진로와 삶을 개척하는 자주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둘째, 이론으로 터득하기 힘든 문화유산을 현장에서 쉽게 습득하며 교양있는 사람이 되고 문화유산의 예술성 탐구를 통해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셋째, 학생들이 애향심을 가지고 지역에 융합되어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양주시 문화유산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최종 목적은 양주를 잘 알고 지역을 사랑하는 신(新)양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추후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한 교육적 활용은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의 범위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Although the methods of connecting the local cultural heritage with the school education have been examined in diverse ways, few preceding studies discussed the ways to educate the elementary students on their local cultural heritages outside of school. Thus, this study was aimed at discussing the ways to use the cultural heritages of Yangju-si for the elementary history education in association with the elementary curriculum.
To this end, the researcher reviewed the 2015 Amendment of National Elementary Curriculum and thereupon, examined the needs for the education on the local cultural heritage,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survey about the buried cultural assets had been increasing. Then, the researcher described the historical and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Yangju-si, Gyeonggi-do and thereupon, analyzed its cultural heritages by age and type. Since Yangju-si is reputed for its historical cultural assets distributed evenly, it is deemed possible to use the cultural assets for the elementary history education. Lastly, the researcher analyzed the case of the elementary history education program operated by a local cultural assets project (Yangju office site revival project) corp., sponsored by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The educational use of the local cultural heritage was found to help foster the creative convergence talents pursued by 2015 Amendment National Curriculum and have the following effects in term of the elementary history education. First, the elementary students would accept the history with no sense of refusal in the process of learning the history about their community, and thereby, would grown into self-reliant persons who have established an ego-identity and endeavor to explore their own future career and life. Secondly, the elementary students would easily acquire the knowledge about the cultural assets that can hardly be learned only through theory. Thus, they would grow into men or women of culture, being creative. Thirdly, the elementary students would love their community more, being merged into it, living together with others. Ultimately, the final goal of using the cultural heritage for the elementary history education is to bring up new Yangju citizens who know better about Yangju and love it. It is hoped that the educational use of the local cultural heritage would develop into not only the school education program but also into the adults' education or the life-long education.

1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