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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 인문과학분야  >  서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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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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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3)~63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472
서양고대사연구
63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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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저자 : 유성환 ( Yoo¸ Sung-hw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간행물 : 서양고대사연구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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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왕권을 체현한 파라오는 단순히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인간 세계에 우주적 질서인 마아트를 구현하고 유지하는 태양신의 대리자였으며 인간을 대표하여 신과 홀로 소통할 수 있는 지상의 현인신이었다. 따라서 왕을 시살한다는 것은 지상의 신을 시살하는 것이었으며 왕의 시해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창조주가 설립한 우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극악무도 한 범죄였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일부 문헌증거들은 국왕을 시해하려는 시도가 이집트 역사에서 여러 차례 존재했었다는 가능성을 시사 혹은 확증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문헌기록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국왕시해 사례와 의미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재구성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다.
본 논문에서는 국왕시해의 시도 혹은 실행의 증거가 언급되어 있는 고왕국 시대 제 6 왕조의 페피 1세·중왕국 시대 제 12 왕조의 아멘엠하트 1세·신왕국 시대 제 20 왕조의 람세스 3세 등 총 3건의 국왕시해 사건에 주목한다. 후대로 갈수록 활용 가능한 문헌증거의 양과 질이 증가함에 따라 람세스 3세의 사례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재구성이 가장 용이하다. 페피 1세의 경우에는 자신이 왕의 측근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웨니라는 귀족의 자전적 기록에 간략하게 언급된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혐의를 재구성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편, 아멘엠하트 1세의 시해 사건은 객관적인 사료로 인정될 수 없는 서사문학 작품에 언급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정황만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람세스 3세의 경우,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후궁인 티예와 그녀의 아들 펜타웨레트 왕자가 시해의 주모자였으며 여기에 실행을 담당했던 집사장 파이바크카멘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궁정 고위 관리들과 궁녀들, 그리고 심지어 군부의 고위 장교들까지 가담한 거대한 시해·반란이라는 것을 당시 작성된 법정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파라오의 시해를 음모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왕비 혹은 후궁을 비롯한 왕가의 일원과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최측근들이었으며 그들의 동기는 하나같이 왕위 계승권의 찬탈이었다. 문헌증거를 통해 드러난 시해음모 사건의 경우 그 실행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실패했으나 대부분의 문헌자료가 통치자에 유리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이런 성격의 문서들만이 폐기되지 않고 보존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 왕을 시살한 후 왕위를 찬탈한 성공한 사례가 존재했을 가능성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Considered to be the embodiment of divine kingship, pharaohs were not only supreme leaders of a united polity but also an epiphany of the Sun God with a sacrosanct obligation to maintain the cosmic order, called ma'at in ancient Egyptian. Moreover, they were the only interface between the divine world up in the sky and the human society down on the earth. In this regard, assassinating a pharaoh was in effect equated with destroying a living god - a heinous crime which would disrupt the cosmic order established by the Creator. Some philological evidence left to us from ancient Egypt, however, indicates that there were attempts to kill pharaohs at different periods in time. This article aims to objectively study the attempted assassinations and present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ose events to modern readers.
Three cases are under scrutiny in this article: (1) Pepy I of the Sixth Dynasty in the Old Kingdom; (2) Amenemhat I of the Twelfth Dynasty in the Middle Kingdom; and (3) Ramesses III of the Twentieth Dynasty in the New Kingdom. A plot to kill Pepy I was hinted at in an autobiography by Weni, who was the royal bodyguard and inspector. It is impossible to identify the event mentioned by the courtier as an assassination attempt due largely to the lack of evidence to buttress Weni's statement. In the case of Amenemhat I, most of the texts alluding to the assassination are literary in nature and they cannot be complemented by historical records. The attempt to murder Ramesses III can be reconstructed in detail based on judicial papyri that recorded the trials held against the conspirators of the so-called "Harem Conspiracy.“
In conclusion, those who attempted to kill their king were (minor) queens, court ladies and palace staffs serving the king in person. The motive behind these treasonous conspiracies was, with no exception, to disrupt the legitimate order of succession to the throne. Those attempts revealed by the philological evidence all failed. However, it should be considered that there could have been some successful cases in which the conspirators removed the king and his designated heir and put another minor prince on the throne, regarding the fact that ancient Egyptians were inclined to record the positive and brushed embarrassing and extraordinary events under the r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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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재욱 ( Park¸ Jaewook )

발행기관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간행물 : 서양고대사연구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6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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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식사는 스파르타인의 삶에 핵심적인 제도였다. 스파르타인이 탁월함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으나, 상고기에서 고전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일반과 스파르타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공동체의 평등과 통합이었다. 스파르타의 여러 제도들과 맥을 같이 하여, 공동식사는 경제적, 규범적, 군사적, 이념적 측면에서 스파르타 사회의 평등성을 증진시켰다. 특히 이 제도는 고대의 도덕적 설명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평등한 자들의 식사 모임이 아니었다. 스파르타는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시민 내부에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공동식사는 빈곤의 이상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을 추구했고,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모임에서 심포지온과 같은 과시적, 차별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그 결과 공동식사는 현실의 불평등과 이념적 평등주의를 매개하여 스파르타 사회의 이중성을 은폐하고 공동체적 평등주의를 강화했다. 나아가 인구 감소와 군제 개편등 스파르타가 변화를 겪던 시기에 공동식사는 15인 식탁공동체를 유지하여 스파르타 폴리테이아의 안정성을 시민 사회에 제공했다.
한편, 공동식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견해를 수용한 현대의 다수 학자들에 의해 역설적이게도 스파르타 시민공동체의 해체와 스파르타 국가의 몰락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공동식사의 회비가 국가 부담이 아니라 시민의 사적인 부담이었고, 만약 회비를 납부하지 못하면 시민권을 박탈당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과연 불평등의 심화가 oliganthropia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시민 수의 감소를 의미하는지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공동식사의 회비와 시민권 규정의 연계가 가혹한 것도 아니었고 고전기 내내 문제없이 작동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동식사의 제도가 스파르타의 몰락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The common mess was central institution in Spartan life. Although the Spartans placed a great deal of value on excellence, from the Archaic to the Classical times, a central problem in Greece and Spartan society in general was the (in)equality and unity of the polis. In line with various Spartan institutions, common mess promoted the equality of Spartan society in economic, normative, militaristic and ideological aspects. In particular, unlike ancient moral explanations, this institution was not a meal gathering for the economically equal ones. Sparta, like other polis, had economic inequality among its citizens and was pressured to address it. The common mess pursued the ideal of equality and removed conspicuous and discriminatory elements, which was displayed at the symposion in other polis. As a result, the common mess mediated between the real life inequality and ideological egalitarianism, thus concealing the duality of Spartan society and strengthening communal egalitarianism. Furthermore, at a time when Sparta was undergoing changes such as population decline and reorganization of the military system, the common mess provided the sense of stability for the Spartan citizens by maintaining a table group of 15 people.
On the other hand, common mess was criticized by Aristotle and many modern scholars who accepted his views, ironically, for contributing to the dissolution of the Spartan civic community and the downfall of the Spartan state. The crux of the problem was that the membership due for the common mess was not borne by the state, but rather by the citizens, and if the dues were not paid, citizenship would be deprived. However, it is not clear whether the increase in inequality has caused oliganthropia and whether it means a decrease in the number of citizens. The claim that the institution of common mess contributed to the downfall of Sparta should not be accepted, given that the dues of the common mess was not harsh and the institution worked flawlessly throughout the classic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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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기문 ( Jung¸ Gi-moon )

발행기관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간행물 : 서양고대사연구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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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비롯한 예수의 가족은 예수의 공생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마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이 전하고 있는 기사를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이 견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의 공생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야고보 제1 계시록, 필립보 복음 등은 예수의 형제와 어머니, 자매가 예수의 공생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쿰란 문서의 발견 이후 요한복음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족이 예수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이 논문은 예수의 가족이 예수의 공생애에 참가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전통적으로 예수의 가족이 예수에게 적대했다는 근거로 이용되어온 기사, 즉 마가복음 3:21의 기사를 점검하였다. 일반적으로 3:21은 3:31과 연계해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3:21은 3:20과 연계해서 해석할 때 좀 더 자연스럽다. 이 경우 이 기사는 예수의 가족이 예수와 적대했다는 전통적인 견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면 요한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 대한 상은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와 히브리인들의 복음을 비롯한 외경 복음이 이 견해의 역사성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족이 예수의 공생에 참가했다고 해석할 경우 지금까지 해명하기 곤란했던 문제, 즉 예수의 가족이 예루살렘 교회의 창설자이자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It has been regarded that, far from participating in it, the members of Jesus' family took hostile attitudes towards the ministry of Jesus. The descriptions of the Synoptic Gospels regarding the family of Jesus are supposed to support this view.
However, several scholars have tried to correct this view, because the Nag Hammadi Text, which was discovered in 1945, contained sources which were contradictory to the traditional view. For example, the Gospel of Philip and the First Revelation of James stated that the family of Jesus, such as the mother,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supported Jesus in the ministry of Jesus. Furthermore, the discovery of the Qumran documents enhanced the historical value of the Gospel of John.
In this paper, I have tried to rethink the traditional view. First, I have tried to correct the misinterpretation of Mark 3:21, which were regarded as evidence for the traditional view. We should connect Mark 3:21 to Mark 3:20, instead of Mark 3:31, because the subject of Mark 3:21 is not the family of Jesus but the followers of Jesus. Second, I have examined the historicity of the descriptions of the Gospel of John regarding the family of Jesus. The Gospel of John reveals the acts of the family of Jesus with regard to his ministry.
If we accept the possibility of the participation of the family of Jesus in his ministry, we can explain more reasonably the fact that the members of Jesus' family were the founders and key members of the Jerusalem Church. So we should rethink our opinions in relation to the attitudes of the family of Jesus with respect to his 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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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성목 ( Cho Sung-mok ) , 반기현 ( Ban Kee-hy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간행물 : 서양고대사연구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1-1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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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기 4세기 로마의 베게티우스가 저술한 『군사론』이 중세 유럽의 정치, 종교, 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다. 특히, 『군사론』의 핵심 개념들이 군사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세 유럽 사회의 군주, 성직자, 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그 가치와 효용성을 인정받았기에 근세로 유의미하게 전달될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 이를 위해 먼저 베게티우스와 『군사론』의 핵심내용에 대해 다루고, 다음으로 『군사론』이 중세 유럽의 군주, 성직자, 문인들에 의해 어떻게 인용되었고 수용되었으며 활용되었는지를 다루며, 마지막으로 『군사론』의 영향을 받아 저술된 작품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는지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중세 유럽 사회의 군주, 성직자, 문인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군사론』을 자신들의 저술에 인용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폭넓게 활용하였다. 군주들은 『군사론』에서 관료 조직과 군대를 잘 통제하는 방법과 군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한 조언을 얻어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려 했고, 성직자들은 설교에 필요한 옛 지식을 얻거나 수도사들을 잘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내려 하였으며, 문인들은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사론』에 담긴 고대 로마의 베게티우스의 사상은 중세 유럽의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유의미하게 근세로 이어질 수 있었다. 16세기 초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군제개혁을 주도했을 때, 베게티우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군사론』이 천년에 달하는 중세를 거치면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했다.


This article concretely illuminates the influence of the De Re Militari written by Vegetius in the 4th century on Medieval European politics, religion, and literature. In particular, it demonstrates that the key concepts of his De Re Militari were significantly transmitted to the Early Modern military thinkers, because those ideas were never limited to military, but were also recognised for their values and benefits to rulers, clergy and writers in Medieval European societies. To that end, in this paper, first, the life of Vegetius and the key contents of his De Re Militari are summarised, and then how the De Re Militari was quoted, accepted and utilised by the rulers, clergy and writers in Medieval Europe is elaborated, and finally, based on the circumstances at the time, for what purposes their works were used are analysed. The Medieval European rulers, clergy and writers cited Vegetius' De Re Militari in their writings, accepted its main ideas, and widely used them. Seeking advice from the text, the rulers widened their knowledge regarding how to properly control their officials and soldiers, and on what ruling qualities they should have in order to strengthen their authority. The clergy used it to obtain ancient knowledge necessary for preaching and to know how to control the monks properly, and the writers used it to describe vivid battle scenes. Through their various utilisation, Vegetius' military thoughts of ancient Rome in his De Re Militari influenced not only the military, but also the politics, religion, and literature of Medieval Europe, and could be significantly maintained until the Early Modern period. In the early 16th century, Machiavelli was deeply influenced by Vegetius when he led the military reform in Firenze. This was possible because the De Re Militari continued to exert its influence in the European societies even through the millennium of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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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진

발행기관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간행물 : 서양고대사연구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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