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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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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9-7925
  • : 2672-0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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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93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128
민족문화연구
93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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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 초 순화(淳化)명 청자에 대한 재조명 ―제작과 전개를 중심으로―

저자 : 오영인 ( Oh Young-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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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순화명 청자의 성격, 제작배경과 의미, 위계를 살피고, 제작이 중단된 이후 태묘 의례용 제기의 추이를 제작 및 수급방식의 변화에 주목하여 논하였다. 중국예서와 제기도는 고려의 제사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988년 성종은 태묘를 5묘체제로 삼아 992년 11월에 건립을 마무리하였다. 성종에게 태묘는 국가근본인 효가 구현되는 공간이었고, 태묘의 건립과 제사를 통해 왕위의 정통성을 공표하고자 하였다. 순화명 청자는 이러한 성종의 의지를 담아 992-993년 태묘 의례를 위해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우수한 제작공력으로 제작된 결과물이자, 『삼례도』를 견본으로 제작되고 명문을 개체별로 표기할 만큼 규격화된 공정과 체계적인 제작방식이 적용된 대상이었다. 960년 물장성에서 개칭된 보천은 장인과 진귀품의 보관을 담당하였고, 배천원산리 가마를 산하에 두어 필요시 장인을 차출하여 순화명 청자를 제작하였다. 993년 이후 순화명 청자의 제작을 비롯해 배천 원산리 가마 역시 운영이 중단되었다. 해당 가마의 운영 중단은 요업상 비효율과 유지의 어려움에 기인하였고, 운영을 중단한 이후 1010년 재차 발발한 거란의 침입에 따른 피해로 왕실의 지원을 받거나 인력의 확보 및 가마 구조의 전환을 통한 재건도 불가능하였다. 1011년 소실된 태묘는 1027년 수리가 마무리되어 의례가 진행되었다. 1029년 태묘 의례용 제기의 확보가 원활히 이행된 배경에는 제기도감의 관할 하에 공물의 형태로 자기제기가 수급되었기에 가능하였다. 992-993년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제작된 순화명 청자는 11세기 이후 용인서리 및 여주 중암리 일대에서 제작된 백자제기에 태묘 의례용 제기의 역할을 위임하였고, 왕실직속 제작체제의 조달에서 공물 납부방식으로 태묘 의례용 자기제기의 제작과 수급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This study sets out to investigate the formative Origin, Production Background, Characteristics, Hierarchy of the Celadon with the Inscription of 'Soonhwa(淳化)' excavated in Hwanghae-do (黃海道) Baechun (白川) Wonsan-ri (圓山里) kiln, to estimate Production and Supply of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ceremonial earthenware in the 11th century. The ritual space of the Goryeo Dynasty was built on the basis of Yeseo (禮書) and Jaegido (祭器圖) imported from Song dynasty. Sungjong(成宗) set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as Five Ancestral Temple in 988, started building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in 989, completed construction in 992. Sungjong (成宗) took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as space to include filial piety, the prop of the country, and intended to reveal Royal authority and authenticity through Ritual in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With intention of Sungjong(成宗), the Celadon with the Inscription of 'Soonhwa (淳化)' was produced using Taejoon (太尊) and Doo (豆) of the northern Song dynasty's Samryedo (三禮圖) as a sample for Ritual in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in 992-993, produced systematically to put together the fabricated parts and to write the inscription 'time-place-use-manufacturer'. Bochun (寶泉) managed master craftsmans and treasure warehouse, the Celadon with the Inscription of 'Soonhwa (淳化)' made in Baechun (白川) Wonsan-ri (圓山里) kiln until 993. Out of operation in Baechun (白川) Wonsan-ri (圓山里) kiln, it was rooted in problem maintaining kiln. In the end, it stopped altogether ending up with less Royal Family's support and the insurance of manpower for regeneration by Kitan's invasion since 1010.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had been burnt down in 1011, was fixed and opened up Ritual in 1027. According to plan, Jaegidogam (儀禮都監) might procure by tribute Ancestral utensil (儀禮器) of pottery for Ritual in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in 1029. After the 11th century, the Celadon with the Inscription of 'Soonhwa (淳化)' delegated a role of Ancestral utensil (儀禮器) for Ritual in Imperial Ancestral Temple (太廟) to white porcelain produced in Yongin (龍仁) Seo-ri (西里) and Yeoju (驪州) Joongam-ri (中巖里) kil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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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중기 의리유학(義理儒學)의 실상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과 왕안석의 신학(新學)을 중심으로―

저자 : 이동환 ( Lee Dong-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120 (8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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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분류개념으로 전장유학, 사장유학, 의리유학, 기저유학을 제시했으며, 고려중기 유학에 대한 지배적인 학설을 비판하면서 나의 신학설을 수립하였다.
최충의 사학 9재학당은 다분히 피상적인 연구에 머물렀던 것을 학당 설립의 배경에서부터 재호 명명의 의미와 그 편성의 논리를 의리유학적으로 접근하여 구명하였다. 공맹이래 유학의 수기·치인의 본령이 불교전성 시대의 관점인 수신(수기)을 불교의 기능, 치국(치인)을 유교의 기능으로 인식해오던 것을 최충은 수기·치인을 일원적으로 통합, 유교의 본령을 복구하고 중국 전도학 그룹의 영향을 받아 유학에 대한 특단의 고양된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공자를 모델로 한 성인신하후보를 배양하는 사학을 설립했는데, 학당의 9개 재호와 그 편성의 논리를 作聖방법으로서의 의리유학으로 보았다.
이 최충의 의리유학의 맹아는 이론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으로 저작을 남기지 못해 뒤이어 송으로부터 전래된 심급높은 의리유학인 왕안석의 신학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 예종·인종 연간을 고조기로 한 신학은 성명도덕논리의 국시로서의 통행과 심급높은 경의학의 흥기로 특징지어지는데, 그동안 학계가 도학의 명제로 알아왔던 성명도덕논리가 왕안석의 사상임을 밝혔고, 경의학은 왕안석의 新義의 영향과, 국학과 과거제의 정비를 통하여 흥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왕안석의 성명도덕론의 난해성과 혼란성으로 인하여 국시가 주로 구두담론으로 통행하다가 무신란 이후 사라지고, 경의학도 초기의 열정이 없어지고 고식화되어 갔다.
무신란 이후의 사장에 나오는 '窮理盡性'·'因性循理'의 어사를 성리학의 명제로 알고 이 시대에 이미 성리학이 상당히 보급된 것으로 아는 학계 일부의 주장에 대해 궁리진성은 당초의 용법대로이지 송대의 성리학적으로 특화된 명제가 아니며, 인성순리는 '순리대로'란 뜻이지 성리학적 性에 근거하여 性卽理나 所當然之理를 따른다는 명제가 아님을 밝혔다. 고려중기까지의 유학은 전장유학과 사장유학이 주도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 의리유학의 정통은 13세기 후반기에 고려에 전래된 주자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종대 정의의 賦에 나오는 리기는 정이의 개념이 아니라 『회남자』에 나오는 노자적 개념임을 밝혔다.


This paper suggests the terms of Confucianism for Decrees and Regulations (典章儒 學), Confucianism for Verse and Prose (辭章儒學), Confucianism as Philosophical Thought (義理儒學), and Confucianism for Basis and Foundation (基底儒學), for the classification of Confucianism, and also raises a new theory on Confucianism in the mid-Koryŏ period criticizing preceding researches.
First of all, as for the Kujae Haktang (九齋學堂, Nine Hall Institute), a private school established by Ch'oe Ch'ung (崔沖), which has been rather insufficiently researched, this paper demonstrates the background of its establishment, the meaning of the each name of the nine halls and its logic of organiz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Confucianism for principles and righteousness. Ch'oe Ch'ung combines together the concept of Xiushen (修身, cultivating one's moral character) and Zhiguo (治國, governing a country well) in terms of Confucianism to recover the original meaning of the terms which has been understood separately in the prism of prevailing understanding in the period of Buddhism that Xiushen is related to Buddhism and Zhiguo to Confucianism. He establishes a private school with his considerable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which was deeply influenced by the pre-Dao Learning scholars, to cultivate the retainer-candidates who pursuit to be a sage-like person modeling after Confucius. This paper proves that nine names of the rooms of the school and its logic of organization is related to the way of being a sage in terms of Confucianism as Philosophical Thought.
The germinating Confucianism as Philosophical Thought formulated by Ch'oe Ch'ung, however, did not have such sound theoretical foundations that it was eclipsed by the New Learning suggested by Wang Anshi from the Song dynasty. This New learning reaching its prime in the reign of King Yejong and Injong is characterized by two phenomena: a widespread thesis on Xingming Daode (性命道德, the nature and the fate, the way and the virtue) as a national academic policy, and a rise of a relatively high level of the Jingyixue (經義學, learning on the meaning of the Classic). This paper elucidates that the theory on Xingming Daode during that period, which has been recognized as a proposition of Dao Learnings, was in fact originated from Wang, and Jingyixue burgeon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New Learning with the improvement of national school and the state examination system. However, the theory suggested by Wang is so complex and intricate that the discourses mostly occurred in the verbal form and disappeared after the Military Officers' Revolt in 1170.
This paper rebuts the contention that Neo-Confucianism was already pervasive in this period, predicat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phrases such as Qiongli Jinxing (窮理盡性, probing the principle and exhausting the nature) or Yinxing Xunli (因性循理, following the fate and the principle) in literary writings after the Military Officers' Revolt are propositions of Neo-Confucianism, and suggests that the proposition Qiongli Jinxing should be understood in its original meaning, not under the rubric of Neo-Confucianism. In the same vein, this paper also argues that Yinxing Xunli here simply means 'to follow the natural flow', that it does not relevant to the proposition of Neo-Confucianism at all, i.e. to follow “the principle that is what ought to be' (所當然之理) or 'the nature is principle' (性卽理), based on the Xing (性) discourse in the Song period. Confucianism for Decrees and Regulations and Confucianism for Verse and Prose were dominant until the Mid-Koryŏ Period. Therefore, the orthodoxy of Confucianism as Philosophical Thought in Korea was derived from the doctrines Zhuzi xue (朱子學) that was imported to Koryŏ in the late 13th century. Furthermore,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the concept of Li (理) and Qi(氣) that appears in a fu (賦, rhapsody) work by Chŏng Yi (鄭義) in the reign of King Kojong is based on that of Laozi (老子) from Huainanzi (淮南子), not that of Cheng Yi (程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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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교의 예학적(禮學的) 탐구를 통한 효(孝) 사상 고찰

저자 : 서정화 ( Seo Jeong-hw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1-14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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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예학에서, 계승자를 의미하는 宗子·宗孫은 孝子·孝孫과 같은 말이며, 제왕이라 해도 자신이 부모를 계승하지 않았다면 孝心의 유무와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孝子가 되지 못한다. 受命·創業之君의 자리에 오른 것이, 부모나 선조의 뜻을 받들어서 오른 것인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오른 것인지에 따라, 사망 후 부여되는 諡號에 '孝' 자가 포함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한다.
효도와 선조 제사는 '유교 사상'과 '유교 의례'의 관계이고, 효도와 삼년상은 '유교 사상'과 '인륜적 정서'의 관계이다. 즉 효는 본질의 문제이고, 제사는 그가 진정한 후계자 다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외형적·대외적 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또, 3년의 喪은 자식이 끈끈한 親의 관계 속에 있었던 부모를 잃은 충격과 상심을 조금씩 진정시켜 가는 과정의 시간들이다.
자녀가 부모를 가깝고 극진하게 봉양하며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품속에서 받은 사랑과 보살핌에 의한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상호적인 인륜(윤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부모가 품었던 대의적인 뜻과 일삼았던 일을 계승한 계승자를 의미하는 효는, 개개인의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수용되는, 사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In study of Confucian Rites, the words of Jongja (宗子: the eldest son of the head family) and Jongson (宗孫: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meaning a successor are the same as filial son and filial grandson, and even a king cannot become an official filial son regardless of whether he has filial love or not if he hasn't succeeded his parents. Depending on whether one becomes crowned as a king beginning a new regime, such as Yi Seong Gye (李成桂), following the will of one's parents or ancestors or just on one's own, 'Hyo (孝: filial piety, filial son)', is included into or excluded from the posthumous name granted after one's death.
Filial piety and ancestral rites are in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 ideology and Confucian rites, and filial piety and three years of mourning (三年喪) are in the relation of Confucian ideology and the emotions of humanity. In other words, Hyo is the matter of essence, and ancestral rites are just the means of external expression that he is a true inheritor. In addition, the three years of mourning is the time as the process for a son or a daughter to gradually relieve the shock and pain of heart from losing their parent with whom they were in a close relationship of qīn (親: associating with, cherishing and loving).
A son's or a daughter's feeling close to one's parents, supporting them sincerely and loving them are natural emotions from the love and care from their parents, and are in the area of reciprocal ethics. Hyo, which means a successor inheriting the will of one's parents for great cause and what they used to do, is in the area of ideology accepted by the choice following each individual's beli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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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注李太白詩)』의 조선시대 수용 양상(Ⅰ) ―전·중기를 중심으로―

저자 : 임준철 ( Lim Jun-Chul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204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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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에서의 이백 시 수용 연구 일환으로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백시집 판본이자 주석서인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조선 전·중기 수용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백은 우리 한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지만, 개별 문인들이 어떤 책을 통해 수용하였던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다. 이 글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 이백 시 주석서 및 시집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여 다음 네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판본 간 수록된 내용에 차이가 있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검토한 결과 조선 중기까지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내용이 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점은 이 책이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백 이해에 주요한 준거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둘째, 『分類補注李太白詩』와 다른 이본 계열이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발견되었다. 조선 전기 金安老가 『希樂堂稿』에 自註할 때 활용한 이백 시는 현재 전하는 異本들과도 차이가 있다.
셋째, 『風騷軌範』과 같은 이백 시 선별 작업에 『분류보주이태백시』가 기준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풍소궤범』에선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분류방식을 제한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대체로 새로운 방식으로 이백 시를 재분류하였다.
넷째, 조선 중기 『지봉유설』과 『오산설림』의 이백 시 비평 내용을 통해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주석이 이 시기까지 이백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本注라고 말한 것은 모두 楊齊賢이나 蕭士贇의 주석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수광과 차천로는 주석의 문제점들도 함께 지적하였으며 나름의 주석을 추가하기도 했다. 『지봉유설』의 경우 명나라 唐汝詢의 『唐詩解』 같은 새로운 이백 시주석이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Classified and Annotated Poems of Li Taibai(CAPL: 分類補 注李太白詩)", the earliest commentary that is currently in existence, was accepted in the early and mid-Joseon period. This is a part of the study on the acceptance of Li Bai(李白)'s poetry in Korea. Li Bai is one of the writers who had a great influence on our Sino-Korean literature, but it has not been specifically verified through what books individual writers accepted. In this article, the following four conclusions were reached by approaching this issue, focusing on the acceptance of "CAPL", which had a great influence since the early Joseon Dynasty.
First, I reviewed several editions of works that differ in the contents.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contents of "CAPL" were mainly accepted until the mid-Joseon Dynasty. It proves that this book served as a major criterion for the understanding of Li Bai to the lierati in Joseon Dynasty.
Seco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a series of editions that differ from "CAPL" were introduced. The poem Kim Anro (金安老) quotated to annotate " Heelakdanggo (希樂堂稿)" is different from the various other editions present until now.
Third, it was confirmed that "CAPL" set the standard for selection of Li Bai poetry such as "Pungsogwebum(PSWB: 風騷軌範)", "PSWB" accepted the classification method of "CAPL" in a limited way, to reclassify Li Bai's works in a new way.
Fourth, through and "Osanseollim (五山說林)" and"Jibongliuseol (芝峯類說)" , it was confirmed that CAPL's annotation was the most basic and important tool to understand Li Bai works until that period. What they call “original annotation” were comments of Yang Qixian (楊齊賢) or Xiao Shiyun (蕭士贇). However, Lee Soo-kwang (李睟光) and Cha cheon-ro (車天輅) also pointed out problems of annotations and even added their own annotations. "Jibongliuseol (芝峯類說)" even suggested Tangruxun (唐汝詢)'s "Tangshijie (唐詩解)" as an alternative to "CA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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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홍자성(洪自誠)의 정체와 『채근담(菜根譚)』의 주제의식 ―휘주(徽州) 상인(商人)과 연관하여―

저자 : 안대회 ( Ahn Dae-ho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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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晩明 시기 淸言 작가 洪自誠의 출신지와 스승을 새롭게 추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菜根譚』의 주제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오랫동안 정설처럼 굳어진 泗川省 成都출신으로서 楊愼의 제자라는 설을 수정하여 安徽省 徽州의 歙縣에 본적을 둔 부유한 鹽商 가문 출신이며, 같은 지역 염상 가문 출신의 유명한 문인인 汪道崑의 제자로 추정하였다. 홍자성이 明淸 시대에 가장 큰 상인집단이었던 徽州 商人의 의식을 지닌 지식인이었고, 해당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던 왕도곤의 학맥과 인맥, 지역색의 영향권에서 활동하였음을 밝혔다.
『채근담』 초간본의 前集과 後集을 분석하여 왕성한 상업문화를 꽃피운 휘주 상인의 경영문화와 지역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경영문화와 인간관계, 리더쉽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면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주요한 청언집과 대비하여 『채근담』에는 현실에서 도피하며 은둔하는 청언 일반의 사유가 약하게 나타남을 확인하였다. 영욕과 득실, 시시비비와 이해관계로 뒤엉킨 현실을 세상의 본질로 이해하고,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헤치고 살아가는 자세를 인생의 본모습으로 보는 적극적 처세관을 살펴보았다.
특히 『채근담』에서 가혹한 현실 환경, 대인관계, 인정세태를 부각하여,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세상을 견디고 헤쳐나가는 방법을 제시한 점은 당대 상인의 현실을 은연중 반영하였다고 보았다. 이 논문에서 밝힌 내용은 홍자성과 『채근담』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This study newly examined the birthplace and teacher of Hong Zicheng, a writer of aphorisms in the late Ming dynasty, and revisited the theme of Caigentan. This study overturned the long-established theory that Hong Zicheng was from Chengdu, Sichuan Province, and was a student of Yangshen. Instead, this study posited that he was from a family of wealthy salt merchants based in Shexian Country, Huizhou in Anhui Province and that he was a student of Wang Daokun, a well-known writer who was also from a salt merchant family in the same region. This study showed that Hong Zicheng was an intellectual with the consciousness of Huizhou merchants, who comprised the largest merchant group in the late Ming dynasty. This study further found that Hong Zicheng was active in the academic, personal, and regional circles of Wang Daokun, who was an intellectual leader of the region.
By analyzing the first half and latter half volumes of the first edition of Caigentan, this study identified that the book reflected the business culture and regional atmosphere of the Huizhou merchants, who created a flourishing commercial culture. This paper further interpreted that the merchants' business culture,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leadership experience were naturally found in the book. Compared to other books of aphorisms, Caigentan does not strongly display the reasoning for escaping reality and living in seclusion, as is the case for many books of aphorisms. Instead, the book understands reality as being entangled with glory and shame, right and wrong, and personal interests, and its outlook towards life is positive as the book defines the true face of life as the attitude to actively overcome difficulties and live in reality.
This study concluded that Caigentan unintentionally reflected the reality the merchants faced during the period by emphasizing the harsh reality, interpersonal relations, and public sentiment and presenting ways to stay vigilant and endure and survive in the world. The findings of this study would provide an opportunity to view Hong Zicheng and Caigentan in a whole new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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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군정기 귀속농지 처리와 중앙토지행정처

저자 : 류일환 ( Ryu Il-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3-2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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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한국에서 농지개혁의 첫 단계로 귀속농지 매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농지분배 뿐 아니라 금융지원과 경영지도까지 겸하는 전담기구를 만들려 하였다. 농업금융과 농촌지도에 관한 제도와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라도, 농지분배 '후속조치'로서의 이러한 기능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농지개혁 추진조직이 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1946년 번스안에는 금융조합이 운영기관으로서 매각된 귀속농지에 대한 관리·감독을 맡는다는 구상이 있었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토지개혁 논의에서 미군정은 한미간 채널을 통해 토지행정기구 구상을 관철하려 하였다. 금융지원과 경영지도까지 맡을 독립적인 전담행정기구가 토지개혁 전반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도입법의원 산업노농위 측의 생각은 달랐고, 그래서 양측의 입장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조정 과정을 거쳤다. 그 절충의 결과가 과도입법의원에 제출된 토지개혁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결국 유산되었고, 1948년 3월 미군정은 그들의 원래 의도를 그대로 담은 법령 173호를 공포하여 중앙토지행정처를 설치하고 귀속농지를 처리하였다.
중앙토지행정처는 미국 농업안정국(FSA)을 모델로 한 조직이었다. FSA는 뉴딜정책시기 만들어진 기구로, 소작인 농지 구매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FSA의 이 프로그램은 기존 농업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소작인들을 위해 설계된 제도였고, 영농·가계 계획에 대한 지도·감독과 금융지원을 결합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미군정은 귀속농지 처리에서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에서도 행정처가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이를 위해 그들이 취한 방법은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예인 신한공사는 이러한 구상에 참여하면서 존립을 도모해 나갔다.


The U. 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carried out the sale of vested farmland as the first step in land reform in South Korea. In the process of discussing this, they emphasized the role of the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at would take charge of not only farmland distribution but also 'follow-up measures' such as credit services and management guidance. They believed that this administrative organization should perform these functions in order to prevent farmers from becoming tenant again, even before the agricultural credit and rural extension system was established.
The 'Bunce Plan' of 1946 included the idea that the Federation of Financial Associations(FFA) would take charge of the management and supervision of the sold farmland as an administering agency. In 1947, when the South Korean Interim Legislative Assembly(SKILA) discussed land reform, the US side tried to carry out their plan to create an land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rough the Korea-US Liaison Committee. They thought that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at would provide credit services and management guidance during the repayment period should take charge of the land reform program. But, the SKILA committee took the position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grant these functions to the land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ey also had a plan to separately enact legislation for agricultural cooperatives. The land reform bill submitted to the plenary session of the SKILA was the result of a compromise between these two positions. However, this bill was eventually aborted, and the USAMGIK promulgated Ordinance No. 173, which reflects their original intentions, established the National Land Administration(NLA) and carried out the sale of vested farmland.
The NLA was modeled after the US Farm Security Administration(FSA). The FSA was a New Deal agency created in 1937 and operated the tenant purchase program. It was characteristic of this program to combine farm purchase loans with guidance and supervision of government agent. The USAMGIK was planning to convert the New Korea Company(NKC) to create the NLA, and to perform these functions not only in the sale of vested farmland but also in land reform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The NKC, the successor of th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took part in this plan and prepared a way to maintain its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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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제 조선통치자의 한일회담에 대한 상상력 : 이승만 정권 말기, 장면 내각, 박정희 정권 초기

저자 : 박경민 ( Park Kyung-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29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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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통치자가 해방 후 한일 양국관계의 근간인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어떻게 인식했었는지를 복원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생각하기에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지, 한일관계에서 일관되게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낸다. 아울러 이승만-기시 정권기 한일관계부터 주목해보면 과연 그들에게 한일회담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이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일본정부와 협력해서 한반도 소재 재산 규모를 조사한 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정부의 대한청구권 주장, 그리고 구보타망언까지 지탱하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한일회담에 확실히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의 교섭 결렬부터 4년 반 만에 회담을 재개하고자 기시 정권은 한국측이 요구한 대한청구권과 구보타망언의 철회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한일회담에서 조선통치자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점차 외교교섭에서도 배제되며 한일회담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통치자들이 보인 일본정부의 대한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한일회담 시기 양국관계에 대한 그들의 전망을 살펴본다. 그리고 조선통치자들이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주목한 '미국 책임론'을 실제 교섭의 진척 상황과 대비시켜서 그들의 한일회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치자들이 시종일관 한일관계에서 중요시했던 부분이 역설적으로 '국민감정'이었다는 점 또한 밝혀보도록 한다.


This paper is aimed at restoring how former Japanese colonial elites perceived the South Korea-Japan normalization negotiations, the foundation of today's Korea-Japan relations. Through this, they find out what caused the Korea-Japan relationship not to be normalized properly and what was consistently important in the Korea-Japan relationship. In addition, if we pay attention to the Korea-Japan relationship between Rhee Syng-man and the Kishi administration, we can also see whether they had a lasting influence on the Korea-Japan talks. As it is well known, they worked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to investigate the colonial assets on the Korean Peninsula, which provided a decisive basis for the Japanese government's claim against Korea and supporting even its absurd remarks.
In this sense, their influence was definitely working on the Korea-Japan talks. However, in order to resume the talks four and a half years after the 1953 collapse of negotiations, the Kishi administration accepted the withdrawal of the right to claim the Korean government demanded. As a result, the influence of former Japanese colonial elites in the Korea-Japan talks decreased sharply, gradually excluded from diplomatic negotiations, revealing the limitations of the perception of the Korea-Japan talks. This paper examines the Japanese government's policy evaluation and prospects for Korea-Japan relations shown by former Japanese colonial elites in these processes. And we would like to point out the limitations of their perception of the Korea-Japan talks by contrasting the criticism of the US, which former Japanese colonial elites noted as a factor that hinders normalization of Korea-Japan relations, with the progress of actual negotiations. In addition, despite the limitations of this perception, we will reveal what former Japanese colonial elites constantly valued in Korea-Japan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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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유한의 형상에서 무한의 존재로 ―이형곤 추상화의 종교적 해석―

저자 : 박종천 ( Park Jong-c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5-348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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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예술은 작가의 개성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창작을 넘어서서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예술적 수행이 될 수 있다. 이형곤의 추상화는 시간과 공간이 드러내는 유한의 형상을 초월하여 무한의 존재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예술적 수행으로서 명상미술의 새로운 장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존재 의식으로 실존적 현상으로부터 존재의 근원으로 역행하는 명상 혹은 수행으로써 우주의 근원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 사라지고 온 우주가 저절로 하나가 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혹은 '존재-의식-지복'의 신비를 풍류, 불교, 힌두교, 기독교, 장자 등의 종교적 주제들을 상기시키는 예술적 영성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명상이자 신비적 종교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Religious art can be an artistic performance that expresses the ultimate reality. Because it transcends artwork that express the artist's individual ideas. Hyung-gon Lee(이형곤, 1966-)'s abstract paintings have transcended the finite form of phenomena revealed by time and space, and opened a new realm of meditation art as an artistic self-realization in contemporary Korean abstract paintings. His works provide an intuitive insight into the ultimate reality of the universe as a meditation as art that goes backwards from the finite phenomena to the infinite origin of Being with the consciousness of 'tranquil enlightened process' (寂寂惺惺). They are artistic works that remind the mystery of 'inactive naturalness (無爲自然)' or 'Sat(Being)-Chit(Consciousness)-Ananda(Bliss)', in which subject and object disappear and the whole universe becomes one by itself, through In that it is expressed in spirituality, They can be said to be an artistic meditation and a mystical religious art in that they represent important artistic spirituality expressed by religious themes according to Pungryu (風流), Buddhism, Hinduism, Christianity, and Zhuangzi.

KCI등재

9『동평위공유고(東平尉公遺稿)』 해제

저자 : 김준형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1-360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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