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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연구 update

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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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9-7925
  • : 2672-0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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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95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161
민족문화연구
95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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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덕원 ( Kim Deok-w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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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에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는데, 이것을 계기로 김춘추가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나당동맹이 성립하였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변화를 주면서 결국 삼국통일로 이어졌다.
제려연화는 643년에 백제가 고구려에 제안하면서 성립되었다. 목적은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고구려는 신라와의 충돌을 피하고 당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당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은 공통적이었다. 신라는 김춘추의 대고구려외교에 의해서 제려연화를 확인하였다.
643년에 백제는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는데,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3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제려연화는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48년에 김춘추는 청병과 당제의 수용을 위하여 대당외교를 전개하였다. 당시 당태종은 병색이 완연한 상태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춘추는 고구려를 먼저 정벌한 후에 백제를 정벌할 것을 제안하면서 649년에 나당동맹이 성립하였다.
나당동맹의 내용은 군사 동원의 방법과 시기, 그리고 전후 처리 등으로 이루어졌다. 주목되는 것은 김춘추가 당 태종으로부터 칙명을 받았다는 사실인데,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구두 약속이 아니라 공식적인 문서인 조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 태종은 군사적인 계획은 645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시기는 649년에 계획된 고구려 정벌에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후 처리는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후에 '평양이남 백제토지'를 신라에게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의 죽음 이후에 신라와 당의 대내외적인 변화된 상황과 맞물리면서 나당동맹의 내용도 새롭게 변화를 맞게 되었다.


In 642, Baekje captured Daeya castle of Silla. This served as a background that the Silla and Tang Alliance was formed while Kim Chun-chu was carrying out diplomacy policy toward Tang and which resulted in changes in international relations in East Asia and eventually led to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countries.
The coalition between Baekje and Goguryeo was established in 643 when Baekje proposed it to Goguryeo to attack Danghang castle in Silla. The purpose of which Baekje would attack Silla and Goguryeo would defend against the intrusion of Tang, but it had a common goal to prevent Tang from intervening. In 645, when Tang Taizong conquered Goguryeo, the coalition between Goguryeo and Baekje ended.
In 648, Kim Chun-chu developed diplomatics toward Tang due to military request and acceptance of Tang's system. The Silla and Tang Alliance was established in 649, when Kim Chun-Chu suggested that they should conquer Goguryeo first and then Baekje. Kim Chun-chu received an official document, a royal document, from Tang Taizong, not an oral promise to the Silla and Tang Alliance.
Tang Taizong used the same method as when he conquered Goguryeo in 645, and set the time for the planned conquest of Goguryeo in 649. In the post-war process, after conquering Goguryeo and Baekje, he offered to give Silla 'south of Pyongyang the land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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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우락 ( Jeong Woo-la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5-8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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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국역 『龜巖全書』 제작에 즈음하여, 龜巖學 연구를 위한 자료의 범위와 龜巖 李楨(1512-1571)이 한국유학사 발달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던가 하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정과 관련된 자료를 『구암집』을 중심으로 밝힌 뒤, 여기에 기초하여 구암학 연구의 부진 원인, 이정이 한국유학사에서 수행했던 역할, 道統 정립을 위한 노력 등을 두루 다루었다. 이것은 한국유학사에서 거의 잊혔거나, 잊힐 뻔한 이정을 우리 시대에 다시 소환하여, 그에 대한 학술사적 복권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이정은 이황과 함께 中庸學을 바탕으로 도학을 추구하면서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20여 종의 성리서를 출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악정사와 옥천정사를 세워 존현양사를 주도했다. 조선의 지성사는 이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으며, 도통 역시 명확해 질 수 있었다. 즉, 堯舜이 전한 심법이 공맹과 주자를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김굉필→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였다. 이로써 사람들은 이정이 이황과 깊은 사우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이황의 도통이 이정에게 전해진다고 믿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정의 퇴계학파 내에서의 위상 조정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이황이 이정에게 보낸 편지가 140여 통에 이르며, 『도산급문제현록』에 기재된 309명의 제자들 가운데 鄭之雲, 李湛에 이어 세 번째로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이정은 퇴계학파에서 선진 제자였으며, 이황과는 학문적 동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황 스스로도 자신의 학단에서 기대승과 이정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판단하였다. 그들을 重厚하고 仁에 가까워 길을 따르며 궤도를 지켜서 반드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서 본고에서는 이정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고자 했다.


This study aims to provide specific explanations about the scope of materials for the research of Guam studies and the roles of Guam Lee Jeong in the development of Confucianism in Korea on on the occasion of Guamjeonseo's publication in Korean. For this purpose, the study examined Lee Jeong's materials with a focus on Guamjip and dealt with the causes of poor efforts in the research of Guam studies, Lee Jeong's roles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n Korea, and his efforts for the establishment of Dotong (道統) based on them. It was an attempt to reinstate him into the academic history by summoning him, who was almost forgotten or about to be forgotten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n Korea, to the contemporary times.
Lee Jeong published approximately 20 Neo-Confucian books to pursue moral philosophy based on Jungyong studies with Lee Hwang and spread it across the society and took the lead in worshiping great scholars by setting up Seoyak and Okcheon Seowons. His efforts made the history of intelligence in Joseon anew finally and Dotong clear. In other words, they demonstrated that Simbeop delivered by Emperors Yao and Shun was inherited by Confucius, Mencius, and Zhu Xi and transmitted in Joseon by Kim Goingpil, Lee Eon-jeok, and Lee Hwang. People believed that Lee Hwang's Dotong was transmitted to Lee Jeong based on their profound colleague relations.
There is a need to adjust Lee Jeong's status in the Toigye School. Lee Hwang sent approximately 140 letters to Lee Jeong and placed him in the third spot after Jeong Ji-woon and Lee Dam among his 309 pupils in Dosangeupmunjaehyeonrok. This shows that Lee Jeong was one of the advanced pupils in the Toigye School and formed academic comrade relations with Lee Hwang. Furthermore, Lee Hwang himself considered Gi Dae-seung and Lee Jeong as very important figures in his learning group, saying that they were dignified and close to benevolence and made it sure that they would take the same path by following a path and sticking to a track. Taking these circumstances into account, the present study attempted to shed new light on Lee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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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송수환 ( Song Soo-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3-11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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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울산 의병장 이경연의『제월당실기』는 1909년 10대손 이석정이 편찬하였다. 여기에 실린 「용사일록」에는 1592년 4월 21일∼25일 함월산성에서의 의병창의, 지휘부 구성과 결진, 5월 5일의 경주의병 합류와 병영성 함락, 15일의 신흥사승병 합류와 군량미 제공이 실려있다.
일부 향토사 연구자들이 이들 기록을 논거로 하여 임진왜란 중 전국 최초의 의병 창의, 왜군 수천 명을 격퇴하고 수백 명을 격살한 병영성 승전, 신라 이래 울산 호국 사찰의 최초 승병 참전으로 포장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를 기화로 창의의병 후손들이 관변의 협조하에 선조를 현창하는 사업을 벌이는 등 역사 왜곡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용사일기」는 이경연 자신의 일기가 아닌, 10대손 이석정이 족조 이동영이 찬술한 「족조제월당공유사」와 「천재심공유사」를 바탕으로 하여 조작한 것이다. 이것은 함월산성의 울산의병에 관한 기록이 모두 허구임을 말해주고 있다. 조작한 울산의 병 관련 기록은 후대의 각종 기록에 실려 사실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를 감안하여 학계에서는 지역사학계의 역사 왜곡에 대처해야 할 때이다.


『Jewoldang Silgi』 (霽月堂實紀) written by Lee Gyeong-yeon (李景淵), the leader of righteous army in Ulsan during the Imjin War, was compiled in 1909 by Lee Seok-jeong, a 10th-generation descendant. The 「Diary in the years of Imjin war」 (龍蛇日錄) that was published here includes the voluntary creation of righteous army at Hamwol Mountain Fortress from April 21 to 25, 1592, the organization of the command and gathering for battle, the joining of Gyeongju righteous army and the capture of Byeongyeong Fortress on May 5, the joining of monk soldiers from Sinheung Temple on the 15th, and providing military rice.
Some local historians are using these records as an argument to distort history by exaggerating it as the nation's first voluntary creation of righteous army during the Imjin War, the victory of the Byeongyeong Fortress that repulsed thousands and slaughtered hundreds of Japanese soldiers, and the first military participation of monks from the Ulsan temple to defend their nation since Silla. Beginning with this, the results of historical distortion are being revealed, such as the descendants of the righteous army carrying out a project to commemorate the ancestors with the cooperation of the officials.
However, the 「Diary in the years of Imjin war」 is not written by Lee Gyeong-yeon himself, but it was manipulated by Lee Seok-jeong, the 10th-generation descendant, through modification and amplification based on the records of Lee Gyeong-yeon and Simhwasn (沈渙) written by his far ancestor, Lee Dong-yeong (李東英). This reveals that the records of the Ulsan righteous army of Hamwol Mountain Fortress are fictional. But the manipulated records related to Ulsan righteous army are being published in various records of later generations and spreading as facts. Taking this into account, it is time for the academic community to deal with the historical distortions of the local history 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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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은지 ( Kwon Eun-j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4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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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允容(1792-1865)은 『字類註釋』의 작자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여러 저술을 남겼음에도 『자류주석』 외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본 논문은 정윤용의 여러 저술 가운데 『北路紀略『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과 내용을 살피고 이를 토대로 『북로기략』의 서술적 특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北路紀略』은 정윤용이 그의 사촌 형인 정원용을 따라 1829-1830년 함경도 지방으로 갔을 때 이곳을 돌아보고 지은 저술이다. 그동안 『북로기략』은 북방 관련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북방 관련 자료로 언급되는 등 그 중요성은 일찍부터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한 차례의 연구 성과가 나온 이후로 40여 년간 이에 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고는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북로기략』 연구에 관한 기초작업으로 우선 『북로기략』의 구성과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북로기략』의 서술적 특성을 1) 함경도 지역에 대한 인식 提高 2)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 자신의 견해 표출 3) 北方의 변화된 實狀 기록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북로기략』에는 백두산 지변의 지형, 大澤의 원류, 백두산 정계비를 비롯하여 함경도 지방의 전반적인 정보, 豐沛之鄕으로서의 함경도의 위상을 보여주는 태조와 선대들의 사적과 유적, 북방 지역 주변 민족에 대한 내용, 임진왜란 때 함경도 지역의 의병활동, 이 지역의 특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북로기략』은 다른 북방 관련 저술과 비교하면 그 양과 내용이 풍부하여 조선 후기 북방 관련 저술 가운데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Jeong Yun-yong is well known as the author of 『字類註釋』, but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other than that. This paper examines the composition and content of Jeong Yoon-yong's 『北路紀略』. And based on this, we examine narrative characteristics revealed in 『北路紀略』. 『北路紀略』 was written by Jeong Yun-yong in the Hamgyeong-do region between 1829 and 1830, and has been mentioned several times as important northern data. However, no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this for more than 40 years since one research result came out.
This paper felt a sense of problem here and first examined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北路紀略』. Narrative characteristics revealed here were considered by dividing them into three categories: 1) raise awareness of the Hamgyeong-do region 2) use a variety of data to express one's opinion 3) a record of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North Hamgyong Province.
『北路紀略』 compared to other northern-related writings, the amount and content are abundant, so it can be said that it is very valuable among northern-related writ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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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인성 ( Yang In-se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7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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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주목한 연구이다. 달레의 조선 천주교회사 편찬 배경과 시기, 편찬 과정에서 그와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들의 교류를 검토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가 조선에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도 살펴보았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달레는 질병으로 1867년 프랑스에 귀국하였다. 그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맡게 된 일은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 다블뤼의 문서 정리였다. 달레는 다블뤼의 문서를 정리하면서 조선과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달레는 다블뤼의 조선 천주교회사 편찬 작업도 이어나가게 되었다. 달레가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시작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1872년이 아니라 1868년경이었다.
달레는 다블뤼의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을 방문한 경험도 없었으므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동료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보냈고 자료와 조선의 제도, 조선어 등의 정보를 제공받았다. 그는 이와 같은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조선 천주교회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1874년 프랑스에서 『한국천주교회사』가 간행되자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들은 한글 번역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중국어 번역서인 『고려주증』을 한글로 번역하려 했다가 프랑스어 원서를 번역하기로 했다. 번역 작업은 1885년경부터 1900년대 초까지 선교사들이 분담하였다. 한글 번역서는 출간되지 않았고 『경향잡지』에 연재되었다. 이처럼 『한국천주교회사』 편찬에서 번역에 이르기까지의 전(全) 과정이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일부만 번역되던 『한국천주교회사』는 1981년에 한글로 완역되었다.


This article is taking note of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of Charles Dallet. The background and the time of compilation, and the interaction between Dallet and catholic missionaries of Joseon during the proceedings are reviewed. The process of introduction of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to Joseon and its translation into Korean is also examined.
Dallet who had worked as a missionary in India went back home to France in 1867 because of illness. In the central office of the MEP(l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he came to take charge of the arrangement of documents of Daveluy, a catholic missionary of Joseon. With this work Dallet widened his understanding of the Joseon and the catholic church of Joseon. This also paves the way for him to take over the compilation of the catholic church history of Joseon which had been worked by Daveluy. Dallet started the work on the compilation of the catholic church history of Joseon around the year of 1868, not in 1872 as it is known so far.
Dallet worked on the compilation of the catholic church history of Joseon basing on Daveluy's documents, but without any experience of visit to Joseon he had a difficulty. Therefore Dallet sent a letter to his colleagues, catholic missionaries of Joseon, then he was offered materials and information on the Joseon system and language. With this help of the missionaries he could complete the compilation of the catholic church history of Joseon.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was published in France in 1874, and the catholic missionaries of Joseon pursued to make its Korean version. At first, they tried to translate the Goryeojujeung, the Chinese version of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into Korean. But they changed their plan to translate the original book in French into Korean. Missionaries divided up the translation work from around 1885 to early 1900s. The Korean version was not published in a book form but published serially in the magazine, Gyeonghyangjapji. From the compilation work to translation of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the entire process was accomplished by French missionaries.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which had been translated only a part of it was translated in full in Korean in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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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수연 ( Kim Soo-yo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1-19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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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소설 <태원지> 속 유교적 사유는 비-유교적 사유와 상호구성적으로 작동한다. 유교의 '천명(天命)' 개념이 표층 서사를 관통하지만, 구체적 세계 구상의 바탕에는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의 사유 실험에서 주목한 서양의 항해 일주, 고대의 대구주설, 청나라의 고증학적 천문수학 등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운동의 수용은 숫자 감각에 의한 서사 구성과 지리 상상, 일주의 상상력과 다원의 세계관으로 구현된다.
<태원지>의 숫자 감각은 인물과 지리의 구체화에 기여하여 허구적 캐릭터와 가상세계에 논리적 실감성(實感性)을 제공한다. 일주의 상상력은 항해 도중 동해→서해의 전위(轉位)로 장면화되며 지구지원(地球地圓)에 대한 이론적·경험적 흔적을 드러냄으로써, 허구 작품을 논리적 세계로 인식하게 한다. <태원지>의 일주는 동일 공간으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질적으로 다른 유사 공간으로의 이동을 상상한다. 그렇게 하여 도착한 태원은 중원의 대칭적 다원 세계이자, 역사적·문명적 신화 시대로 재귀한 '태초의 중원'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태원지>에는 조선후기에 경합하는 '지식장'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동시에 지적운동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서사적 사유 실험의 태도도 발견된다. 이것은 조선후기 문화틀에 대한 재검토의 기회와 계기를 제공하고, 소설이 역동하는 지적 환경에 열린 자세로 동참했던 정황을 보여준다. 소설은 시대의 문화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기존의 문화적 교양에 일방적으로 압도당하지 않는다. 소설은 자기시대의 문화틀이 재구성되는 현장에 참여하며, 확장성이 높은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고민하는 실험장으로 역할 할 수 있는 것이다.


In the novel < Taewonji > in the late Joseon Dynasty, Confucian and non-Confucian thought work mutually. Although Confucianism's concept of 'destiny [天命]' penetrates the superficial narrative, the concrete world conception is based on the experience of voyages in the West, the Daegu theory of the ancient Chuyeon, and the archaeological astronomy mathematics of the Qing dynasty, which has been focused on intellectual experiments since the 18th century, are getting involved. The acceptance of this intellectual movement is realized through narrative composition based on a sense of number, geography imagination, imagination around the world, and a multi-dimensional worldview.
< Taewonji > is active in the use of numbers to the extent that it is said to be a novel made up of numbers. It embodies figures and imaginary geography with numerical information and images. This provides realistic impressions and logical realism to fictional characters and virtual worlds. < Taewonji > is a scene of natural displacement from the East Sea to the West Sea during the voyage, and by narrating the imagination of the circumnavigation, it reveals the mathematical logic and empirical worldview of round earth, and recognizes fictional works logically and empirically. However, the circle of < Taewonji > is not a simple physical cycle, but is connected to a symmetrical plural world that moves to the same space with a different order and character. Taewon, which arrived in this way, is a symmetrical plural world of Jungwon, and has the character of 'the beginning of the Jungwon', which is historically and civilly located in ancient times.
< Taewonji > reflects the competitive knowledge field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the attitude of narrative thought experiments that do not passively accept the intellectual movement is also found. < Taewonji > provides an opportunity and experience to reexamine the cultural framework of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was taken for granted, by narratively adapting the thought experiment that causes tension in the existing cultural framework. It also shows the circumstances in which nove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participated in thought experiments with an open attitude to the dynamic intellectual environment. A novel cannot be completely free from the cultural framework of the times, but it also does not unilaterally accept the existing cultural culture. The novel participates in the field where the cultural framework of its time is reconstructed, and can serve as a place of experimentation to contemplate new thoughts through highly scalable popular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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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재현 ( Park Jae-hy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1-22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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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친일 승려로 알져진 郭法鏡(1877-?)의 행적 연구를 통해 친일-항일 구도를 전제한 연구방법의 문제점과 한계를 조명하였다. 곽법경은 9년 동안 위봉사와 금산사 주지를 겸한 호남불교계의 거두였고, 일제강점기 조선불교계의 양대 기구였던 조선불교중앙총무원과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양쪽 모두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다. 또 통도사와 범어사 등 영남지역 불교계와 경성 禪學院과의 관련성도 확인된다.
곽법경의 행적에는 賣佛 사건 등 친일적 행위가 뚜렷이 확인되지만, 항일 민족주의 경향으로 알려진 기관이나 기구에서 활동한 정황도 포착된다. 이렇게 서로 상치되고 모순된 행적은 민족주의나 제국주의 혹은 친일- 항일의 구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국 근대불교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학술연구에서 사전 구도의 문제점은, 구도에 걸리지 않는 자료는 도외시하게 만들며 결국 연구방법과 범위를 한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곽법경의 경우 친일-항일의 구도를 내려놓고 보면 그는 그냥 현실타협적, 실리추구적, 권력지향적 인물로 보일 뿐이다.


In this paper, the problems and limitations of the research method premised on the < Pro-Japanese/Anti-Japanese > structure were highlighted through a study on the conduct of Gwak Beop-gyeong (郭法鏡, 1877-?), known as a representative pro-Japanese monk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r nine years, he served as the head of both WeiBongongsa (威鳳寺) and Geumsansa (金山寺) Temple, and was in a position to represent both the Chosun Buddhist Central Office (朝鮮佛敎中央總務院) and the Joseon Buddhist Central Academy (朝鮮佛敎中央敎務院), two major organizations in the Joseon Buddhist communi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though pro-Japanese behavior is clearly confirmed in his track record, it also captures the circumstances of his activities in institutions and organizations known for anti-Japanese nationalism. Such contradictory behavior could not be explained in the pro-Japanese/anti-Japanese structure, or it has been explained to the extent of conversion or renunciation. His deeds show a section of Korean modern Buddhism that cannot be explained by the pro-Japanese/anti-Japanese structure.
The problem with prior composition in academic research is that data that does not depend on the composition is ignored and ultimately the research method and scope are limited. In the case of Gwak Beop-kyung, if you put this composition down, he just appears to be a negotiating reality, practicality-seeking, and power-oriented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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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동우 ( Kwon Dong-w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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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계 종교 가운데 '교파신도'가 근대 한국사회에 유입되고 포교를 전개했던 양상에 대해 『조선총독부관보』를 중심으로 지역별, 시기별 분포의 현황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교파신도 각 교파의 '조선포교'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현재 일제강점기 일본계 종교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개괄적인 연구에 머물러 있는데, 그 가운데 교파신도 관련 연구는 기초자료의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여 오류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교파신도의 시기별·지역별 분포 양상을 도표로 제작하여 각 교파별 특징을 살펴본 후, 이들의 포교 양상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드러난 점은 첫째 교파신도의 조선포교가 생각보다 조선 내 각 지역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 교파신도 조선포교의 대부분은 조선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는 『조선총독부관보』를 중심에 두고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종교에 관한 잡건철』, 『조선(朝鮮)에 있어서 종교 및 향사일람(享祀一覧)』과 기타 관공서의 기록, 교단 내 자료, 언론기사 등을 종합 검토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일본계 종교의 조선포교 양상에 대한 윤곽을 그려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thesis generally arranged the current status of distribution by region and period regarding aspects that 'Sectarian Shinto' among Japanese religions was introduced into modern Korean society and developed the propagation in it by focusing on “The Official Gazette” pu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propagation of each sect of Sectarian Shinto in 'Korea' based on this. 
The current studies on Japanese religions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generally stay at general ones. But studies on Sectarian Shinto exposes the errors and limitations as the baseline data have not properly been analyzed. So, the study is meaningful as the basic study for deepening Sectarian Shinto and Japanese religious studies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refore, the study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by sect of Sectarian Shinto by compiling a chart about their aspects of distribution by period and region and then gave shape to their aspects of the propagation by classifying them into one another. 
The points which are clearly unveiled through the analysis are as follows: First, Sectarian Shinto's propagation did not penetrate deeper into each area in Korea than thought. Second, the existing argument that most of Sectarian Shinto propagated religion targeting Japanese people who lived in Korea could again be found. Third, the comprehensive review of “Statistical Yearbook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The Documents Binding Book about Religion”, “The Lists of Religions and Events in Korea”, the records of other government offices, the materials in the order, and the news articles with “The Official Gazette” as the center could be found to have the possibility of outline details of the propagation of Japanese religions in Korea in the Japanese colony era.

KCI등재

저자 : 장명선 ( Jang Myung-s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1-30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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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는 1921년부터 간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는 1930년대 중반에 만주국 정부로부터 만주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간도지역을 관할한 연길교구는 1939년도에 복음화율이 1,74%로 당시 조선의 전체 7교구 중에서도 가장 교세가 컸던 교구였다. 그리고 연길교구 각 본당 부속학교인 해성학교는 간도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조선인 대상의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 중에서 학생수가 가장 많았는데, 이는 연길교구가 추진한 교육 사업과 가톨릭 운동의 성과였다.
그렇다면 베네딕도회가 간도에서 교육 사업을 통해 교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인들의 교육계 시각에서 본다면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식민지상황에서, 만주국 성립 전후 연길교구의 선교활동은 선교지와 지역민의 특성을 고려한 문화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지역민들의 서구 근대문화와 모국어 교수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여 시작된 일종의 '자선사업'이었다.
연길교구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는 성경과목을 비롯하여 모든 교과목을 각 민족의 모국어로 가르치면서 신교육과 신문화 교수를 통해 근대적 가치관을 지닌 그리스도교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으로부터 아동들을 보호하겠다는 교육방침하에 종교교육을 통하여 지육(智育)과 덕육(德育)을 병행하는 교육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인 학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In the 1930s, Catholicism was the most influential religion in Kando. The proportion of evangelization of the Diocese of Yenki was 1.74%. Its influence of a religion was the most conciderable of all the seven dioceses of Korea. Their mission schools have taught the most number of students of any other western mission school in Kando.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were like something of a philanthropic enterprise. Because they started by accepting the request of local people to teach them for literacy. In the missionary schools of the Diocese of Yenki, the missionaries taught all the disciplines and the Bible in Korean. They hoped to cultivate Christians with modernized value judgment through modern educations and through their teachings of modern culture.
According to the educational policy of protecting children from communist ideology, the Benedictines chose an educational way to go hand in hand with the teaching of intellectual knowledge and with moral education. This is the reason why the Benedictine missionary schools were able to obtain the favor of the parents of Korean pupils.

KCI등재

저자 : 장영민 ( Chang Young-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1-3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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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50년대에 미국의 국제정보교육교환법(PL 402)에 의하여 한국과 미국 간에 시행된 교육교환 프로그램의 정책과 시행 과정을 고찰하였다. 사업의 목적은 한·미 간 상호이해를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정부의 대외정책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미국정부의 재정적 외교적 지원으로 10년 동안 약 500명에 가까운 한국인과 미국인이 태평양을 건넜다. 교육교환 프로그램은 크게 학자 프로그램과 비학문 사업으로 나뉘었다. 한국의 학문과 지식을 미국식으로 변경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전자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1950년 3월에 교육교환 첫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전쟁으로 파행을 맞이하였다. 정전 이후 프로그램의 운영은 회복되었으나, 예산 변동이 심하여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학자 프로그램의 기본적이며 장기적 목적은 학생과 학자를 미국 대학에 파견하여 지식과 학문을 배워서 한국에 이식하도록 한다는 것이었고, 전후에는 고등교육의 전후복구가 단기적 목적이 되었다. 젊은 대학교원을 대학원에 학생으로 파견하여 교육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었고, 파견 인원이 가장 많았다. 대개 중견 교수였던 연구학자와 강사가 뒤를 이었으나, 소수에 불과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학자 프로그램 파견자 선발 정책이 변하였다. 그 결과 중견 교수보다는 영어 실력을 갖춘 젊은 교수가 한층 선호되었고, 지방 소재 대학에서도 파견자를 선발하였다. 비학문 프로그램인 지도자와 전문가 프로그램은 미국정부 대한정책의 현실적 수단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는 국회의원, 법학자와 법조인, 언론인을 집중적으로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교육교환 프로그램은 미국정부의 정책대로 장기적으로 학계를 비롯한 각 분야의 엘리트를 형성함으로써 한국인의 삶과 사회의 구조를 미국식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This study mainly examined the policies and changes in the educational exchange program implemented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in the 1950s under the U.S. Information and Educational Exchange Act of 1948 (PL 402). In particular, it focused on the scholar program that played a major role in changing Korean academics and education to the American system. The PL 402 was one of the important factors that reorganized society and the national system in the American way in Korea and changed the lives of Koreans. The first project began in 1950, but it was disrupted by the Korean War. The program recovered after the war, but in the 1950s, the size and budget were in an unstable state of fluctuation. The scholar program was a long-term plan to send students and scholars to American universities to learn knowledge and discipline. As the core program was to send young professors as graduate students, the number of dispatched students was the largest, followed by a small number of research scholars and lecturers. However, the leader and expert program was most valued as a practical means of the US government's policy toward Korea. In the late 1950s, the policy of selecting the grantee of the scholar program changed. As a result, young professors with English proficiency were preferred to senior professors, and scholars were also selected from local univer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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