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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연구 update

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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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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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9-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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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90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091
민족문화연구
90권0호(2021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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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지훈 시의 예외성과 보편성 ―월정사 시편을 중심으로―

저자 : 김종훈 ( Kim Jong-ho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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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지훈이 스스로 '서경의 자연시'라 말한 1941년 작 월정사 시편을 중심으로, 시에 담긴 고전적인 사유체계를 확인한 뒤 조지훈의 시의 예외성과 보편성을 재고한 시도이다. 월정사 체류 시 창작한 시의 소재는 동양의 순환적 세계가 투영된 자연 대상이 대부분이다. 화자는 내면의 감정 노출을 자제하며 순환적 세계의 자연을 관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의 그는 정치적 발언이 금지된 일제 강점기 전통 문화의 소재에 주목하여 비탄의 감정을 시에 보였다. 이후 그는 1950년 6.25 전쟁, 자유당의 부패 정치, 1960년 4.19 등 한국 현대사의 공통 사건과 관련된 역사 의식과 비판적 감성을 시에 드러냈다.
조지훈은 월정사 시편을 자신의 시적 고향이라 회고한 바 있다. 이때 고향의 의미는 그의 시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원형이라기보다는 한 번 떠나온 뒤 다시 갈 수 없는 본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월정사 시는 그에게 전형이라기보다는 예외였다. 그는 '나그네'처럼 시대를 떠돌며 역사적 사건에 반응하여 생겨난 감성을 시에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냈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후기 시들이 이 연구를 통해 재고되기를 기대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후기 시를 학자와 지사가 휴식의 시간에 쓴 '여기'로서의 시가 아니라 일관되게 나타난 뜨거운 '감성의 변주'로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이 이 연구에서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This study is an attempt to reconsider the exceptionality and universality of Cho Ji-hoon's poems after confirming the classic thought system contained in the poems oof Woljeongsa in 1941, which Cho Ji-hoon himself called 'The Natural Poetry of Description.' The subject matter of the poems created during his stay at Woljeongsa is mostly natural objects reflecting the circular world of the East. The speaker controlled the exposure of inner emotions and showed contemplation of the nature of the circular world. Previously, he showed feelings of grief by paying attention to the subject matter of traditional cultu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where political speech was prohibited. Afterwards, he expressed his poetry,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critical sensibility related to common events in modern Korean history such as the Korean War in 1950, the corruption politics of the Liberal Party, and April 19 in 1960.
Cho Ji-hoon recalled the poems of Woljeongsa as his poetic hometown. It seems appropriate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hometown as an archetype that cannot be returned after leaving once, rather than an archetype that can be found anywhere in his poem. The poem of Woljeongsa was an exception rather than a typical one for him. He wandered through the times like a 'traveler', and expressed the sensibility arising from responding to historical events in various forms of poetry. Here is the point where I hope that his later poems, which have been neglected so far, will be reconsidered through this study. this study will suggest a perspective that can grasp his later poetry not as a 'hobby' written by scholars and intellectuals, but as a consistently appearing hot 'variation of 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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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후 지식인 사회와 조지훈의 위치

저자 : 김건우 ( Kim Kun-w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5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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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에 대한 기존 연구는 대체로, 그의 저작, 즉 시나 시론, 문화론 저술을 하나의 독립적인 텍스트로 간주하고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대상화했다. 또 조지훈의 사유나 사상을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전제하고 사유의 내적 정합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본 연구는 이와 달리, 조지훈에 대한 지성사적 접근을 목표로 한다. 지성사적 접근이란 기본적으로 발화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고 발화 당대의 담론장을 살피는 것이다. 본 연구는 해방 후 약 20년 동안 조지훈이 남긴 발언들을 각각의 맥락에 따라 추적함으로써, 전후 지식인 사회의 변화하는 구도에서 조지훈이 서 있던 좌표를 드러낸다.


Existing research on Jo Ji-hoon generally regarded his writings, that is, poetry, poetics, and cultural theories as a single independent text, separated from the context and objectified. In addition, there was a tendency to presuppose Jo Ji-hoon's thoughts or ideas as a completed form and focus on the inner coherence of thoughts. Unlike that, this study aims at an intellectual-historical approach to Jo Ji-hoon. The intellectual-historical approach basically considers the context of the utterance and examines the fields of discourse at that time. This study reveals the coordinates where Jo Ji-hoon stood in the changing topography of post-war intellectual society by tracing the remarks made by Jo Ji-hoon for about 20 years after liberation according to each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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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지훈과 혜화전문학교 ―식민지 고등교육 이원 구조와 조선학 학술장을 중심으로―

저자 : 송현지 ( Song Hyun-j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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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지훈 연구에서 늘 논의의 바깥에 위치해 있었던 조지훈의 혜화전문 수학 이력이 그의 학문적 관점 및 방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학술사적 맥락에서 그 상관관계를 논증하고자 한다. 조지훈이 근대 교육기관인 혜화전문에서 학업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전통적 지식인'으로서 그를 규정해온 담론의 논리와 상충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축소·배제되어왔다. 그러나 조지훈이 그의 한국학 논고들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가운데 전통적 학문 방법을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전통적 지식인'이란 틀에 가두어지지 않으며 그의 학문 방법의 기원은 새로이 궁구되어야 한다. 혜화전문은 조지훈이 본격적으로 근대 학제를 경험한 거점으로서 그가 학제 연구라는 방법론을 갖추고 전통과 근대, 민족과 세계 사이의 균형감각을 갖게 된 바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본의 고등교육 이원화 정책으로 인해 단과(單科)로 구성된 혜화전문의 학제는 그가 여러 학문을 넘나들면서도 분과학문들의 전문성을 심화하는 방식의 연구를 하게 하였으며, 종교, 철학, 예술을 중심으로 개설된 이곳의 교과 편제는 그가 이를 세 기둥으로 삼아 민족문화의 체계를 세우는 기틀이 되었다. 한편,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관학 아카데미즘과 연희전문을 중심으로 한 민간 아카데미즘이 경합하였던 1930년대 조선학 학술장에서 혜화전문이 놓인 주변부적 위치는 변증법적 글쓰기라는 그의 특징적인 논리 전개 방식을 낳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변부의 자리에서 그는 두 진영 모두와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을 의식하고 연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각 진영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연구 방법과 관점을 고심하였다. 혜화전문 졸업 후 그가 서양철학에 탐독한 것은 그러한 방편에 대한 모색의 행보로 이해되며 그는 이를 통해 민족과 세계 사이의 균형을 꾀할 수 있었다.


This study aims to validate the correlation between Cho Ji-hoon's attending Hyehwa College, which had been left out from the arguments regarding his studies, and his academic perspectives and methods after seeing that the two sides are closely related. The meaning that he studied at Hyehwa College―a modern educational institute―has been reduced and excluded in the sense that it contradicts the logic of the discourse which had defined him as 'Sun-bi (classical scholar)' and 'traditional intellectual'. However, when seeing that he sought scientific methods and systematic rationality and criticized traditional academic methods, he is not bound by the frame 'traditional intellectual' and the origin of his academic attitude and methods have to be examined in a new manner. Hyehwa College, a foothold where he experienced modern school system, is noteworthy in the sense that it is the background where he equipped with the methodology 'school system study' and found a balance between tradition and modern, ethnic group and world, and special and universal. The curriculum of Hyehwa College which had neither major system nor subject system due to Japan's higher education dualization policy led him to continue the study of intensifying professionalism of academic fields while merging with other fields and the school's subject system focused on religion, philosophy, and art became the foundation for him to establish the system of national culture. Meanwhile, the peripheral position which Hyehwa College was in during the 1930s Joseon studies academic arena in which the Gwanhak academism based on Keijo Imperial University and the private academism based on Yonhee College competed gave birth to dialectical writing―his unique style of logic development. In such a peripheral position, he had no other choice but to keep distance from not only the Gwanhak academism and academism as 'science' but also the private academism, conduct studies while being aware of them, and rack his brains on distinctive study method and perspective. Avidly reading Western philosophy after graduating from Hyewha College is deemed to be taking the path of seeking corresponding measures. When taking into account the dynamism between colonial higher education dual structure and the Joseon studies academic arena, Hyehwa College was the starting point for Cho Ji-hoon who had become 'traditional intellectual' to transform into 'modern intellectual' and the foothold for him to ultimately become 'universal nation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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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4년의 조지훈과 민족문화 프로젝트

저자 : 고지혜 ( Ko Ji-hy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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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60년대 조지훈의 학술 활동을 조감하고 당대의 담론 지형 안에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보면서 '학인 조지훈'을 역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1964년에 조지훈은 단독저서 1권과 공동저서 2권을 출간하고 잡지 및 학술지에 3편의 논고를 발표 했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학술지 『민족문화연구』를 창간하고,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 및 출간했다. 이러한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민족이라는 주체의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는 작업, 이른바 '학(學)으로서의 민족문화'를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즉, 조지훈은 '민족지 구축'과 '민족문화사 다시 쓰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민족문화학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러한 작업의 배면에는 면면히 이어 왔어야 할 단일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0년대생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언제나 '일본' 혹은 '식민의 경험'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기에, 결국 조지훈이 몰두했던 것은 식민사학이 그토록 부정했던 '단일한 실체로서의 국가/민족'이 상정되고 작용될 수 있는 지식체계를 만드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탈식민을 위한 욕망'이야말로 학인 조지훈을 추동하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지훈의 탈식민 민족문화학에 대한 구상은 식민지 조선학운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특히 최남선의 학술적 작업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는 조지훈의 작업은 우리 민족문화(사)에 내재해 있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현시키는 학술 활동이야 말로 민족의 독자성과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는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이기도 했다. 즉, 조지훈은 민족을 주체로 하는 '계보의 서사'를 상상하고 창출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작업에는 보편에의 충동, 달리 말하면 한국문화사/문학사에도 형이상(사상)이 있음을 증명해내고픈 욕망이 잠재해 있다. 이는 식민과 탈식민이 교차하고, 분단과 냉전체제 안에서 치열한 담론 투쟁이 일어나던 1960년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며,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고 찾아내야 했던 (한)국학 연구자로서의 자기정립을 향한 의지이기도 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scholar Cho Ji-hoon in terms of historical context by seeing the entire view of his academic activities in the 1960s and estimating the position within the discourse arena of that time. In 1964, Cho Ji-hoon published one single-authored book, two co-authored books, and three research papers in periodical and academic journal, issued the academic journal Korean Culture Studies as the Research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 University, and planned and published An Outline of the Korean Civilization. His academic activities are converged into establishing the project of systemizing 'almost all knowledge' that comprise the life of ethnic group, so-called 'national culture as academic studies'. In other words, he tried to establish national culture studies by 'establishing ethnography' and 'rewriting national culture studies'. There underlain the problem consciousness that tradition and culture of a single race, which should have been passed on continuously, were not properly succeeded. Since the academic activities of Cho Ji-hoon who was born in the 1920s had no other choice but to rely on either 'Japan' or 'colonial experience', he focused on making a knowledge system that can introduce and apply 'country and race as a single substance', which was totally denied by the colonial academia. Such a desire for decolonization was an impetus for him.
When it came to study contents and methodology, he substantially succeeded the academic projects of the 1920s colonial era Joseonhak movement, especially Choi Nam-seon. Here underlain the thinking that academic activities succeeding and manifesting mankind's universal value inherent in the Korean ethnic culture history is the project of identifying race's identity and existence value. This was the historical awareness of the intrinsic development which began to be discussed from the late 1960s. In other words, Cho Ji-hoon aimed to conduct the work of imagining and creating 'description of genealogy' which became the root of nation. Here underlain universality orientation―desire to prove that metaphysics exist in Korean culture and literature history. This is the spirit of the 1960s when colonization and decolonization combined and fierce discourse struggle took place in division and the Cold War and the will toward establishing oneself by researchers of Korean Studies who had to explore and discover 'Korea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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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지훈의 한국사 연구 ―민족 정신사 수립의 길―

저자 : 조형열 ( Cho Hyong-yerl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6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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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학문을 민족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했던 조지훈은 신칸트학파의 영향 아래 한국학과 한국사 연구에 들어섰다. 한국사는 한국학을 구성하는 핵심이었으며 그의 실천의 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조지훈은 전통을 계승의 대상이자 가치 창조의 주체로 삼아 민족주체성을 바로 잡고자 했고, 한국사의 체계화를 모색했다. 또한 한국사의 독자성을 찾고 세계사와 견주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자연적·외적 조건에 인한 영향을 조화·융합하면서 한국사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원효의 철학과 동학사상을 이와 같은 전범으로 내세웠으며 한국사를 보는 주체적·개성적 시선을 갖는 것이 '한국적' 방법이라고 집약했다.
조지훈의 한국사 연구 영역은 문화사, 그 가운데 정신사(精神史)에 해당했다. 그는 민족이 조선 세종대에, 민족의식은 왜란·호란을 거치며 형성된다는 것을 시작으로, 실학운동-홍경래의 난-삼정 소요-갑신정변-동학혁명-갑오경장을 통한 민족의식 발달사를 체계화했다. 또한 독립운동도 정신사의 범위로 끌어들여 3·1운동-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 등 민중의 독립투쟁을 높게 평가했고, 사회주의도 민족의식의 범위 안에서 수용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조지훈의 한국사 서술은 민족의식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규범적·윤리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는 사회 모순으로 인한 역사발전을 강조한 당시 소장 연구자의 내재적 발전론과 차이가 있었다. 조지훈은 한국학이 처음으로 공론화되던 1960년대 초에 한국사 연구를 통해 한국학의 역사적 흐름을 확인하고, 정신사 연구의 경험을 통해 한국학의 방향을 모색했다. 따라서 조지훈의 한국사 연구는 민족 중심 한국학과 민족문화운동의 설계도로서 의미가 있었다.


Cho Ji-hoon, who understood his scholarship as part of the national cultural movement, began to study Korean history under the influence of neo-Kantians. Korean history was the core of Korean studies, and an important means of revealing his practical consciousness. Cho Ji-hoon wanted to make tradition the target of succession and the subject of value creation, and rectify the national identity, and sought to systematize Korean history. He also attempted to find the identity of Korean history and compare it with the world history, and believed that Korean history would develop through harmonization and convergence with natural and external conditions. He thought of Wonhyo's philosophy and the thought of Donghak as examples thereof, and said in summary that having the subjective and individualistic viewpoint of Korean history is the 'Korean' method.
The research area of Cho Ji-hoon's Korean history corresponded to cultural history, and particularly, intellectual history. Having started with the formation of the nationality under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the formation of national consciousness during the Japanese and Manchu invasion, he systematized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the Silhak Movement, Hong Gyeong-rae's Rebellion, the Samjeong Riot, the Gapsin Coup, the Donghak Revolution, and the Gabo Reformation. He also includ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range of the intellectual history, and thought highly of people's struggle for independence, e.g. the March 1st Movement, the June 10th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 and tried to accommodate socialism within the scope of national consciousness. Cho Ji-hoon's description of national consciousness had a strong normative and ethical personality that gives absoluteness to national consciousness,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internal development theory of the young researchers of those days who emphasized the development of history due to the contradictions in our society. Cho Ji-hoon verified the historical genealogy of Korean studies through the research of Korean history in the early 1960's when Korean studies came under the spotlight for the first time, and sought for the direction of Korean studies through the experience of studying intellectual history. As a result, Cho Ji-hoon's study of Korean history became the blueprint of the nation-centric Korean studies and national cultura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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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경덕왕(景德王)의 사망 시기에 대한 시론(試論)적 재고찰(再考察)

저자 : 윤태양 ( Yun Tae-ya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19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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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三國史記』에 실린 景德王의 사망 시기를 재론했다. 『冊府元龜』에는 766년 3월·4월 壬子일에 '新羅王 金獻英'이 파견한 사절이 보이며, 일간지 또한 정확하다. 그런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古記 등에서 경덕왕이 765년 사망했다고 한 것과 어긋난다. 그러나 이를 따를 경우 惠恭王의 책봉이 지나치게 늦는 점, 당시의 유교적 정치 담론에 입각해 볼 때 사망한 父王의 명의로 사절을 보내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책부원귀』의 기사를 부정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古記 등 異傳의 발생 경위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경덕왕이 765년 6월 양위하여 767년 전후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볼 때 「異次頓 殉敎碑(栢栗寺 石幢記)」와 『三國遺事』의 萬佛山 기사가 국내·외에서 양위 이후 경덕왕의 활동을 알려주는 단서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차돈 순교비」에서는 766년 일어난 어떠한 사건이 확인되는데, 이를 이차돈 추모 사업으로 연결 지은 설을 따라 경덕왕이 이를 이용해 法興王과 眞興王의 故事에 유비하여 경덕왕에서 혜공왕으로의 왕위 승계를 정당화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상기한 766년의 사절이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만불산의 전달 주체로 유력하며, 이를 통해 당의 호의를 얻어 滿月太后의 책봉 등에 우호적인 조건을 마련한 것으로 보았다. 경덕왕은 자신의 후계 혜공왕을 위해, 生의 말년까지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I refocussed on the date of death of King Gyeongdeok in this paper. Following Cefuyuangui (冊府元龜), 'King of Silla Kim Heonyeong (新羅王 金獻英, King Gyeongdeok)' sent an envoy in march·april 'Renzi (壬子)' of 766. This sexagenary date matches well with reality. But it doesn't match with the records including 'Old Record (古記)' on the death of King Gyeongdeok, which said as he died in June 765. But we can find the problems that the investiture of King Hyegong (惠恭王) is abnormally late if we follow those records, and it is awkward to think King Hyegong concealed his father King Gyeongdeok's death and sent an envoy in the name of him. Therefore, I follow the record of Cefuyangui, but suggest the view that the different traditions appeared because of King Gyeongdeok's abdication and royal succession of King Hyegong in June 765, and King Gyeongdeok's death around 767.
I also used the “Monument to the Martyrdom of Yichadon (異次頓 殉敎碑)” and a record on Manbulsan (萬佛山) in Samgukyusa (三國遺事) to review this time. “Monument to the Martyrdom of Yichadon” shows that a Buddhistic memorial ceremony was done in 766. I guess by supporting this project King Gyeongdeok endeavored to justify the royal succession of King Hyegong as a one which reminded of royal succession from King Beopheung (法興王) to King Jinheung (眞興王). Moreover, I tried to reveal that Manbulsan would have been delivered to Daizong of Tang (唐代宗) at that time. This effort might have made an advantageous condition to receive investiture on Queen dowager Manweol (滿月太后). I think, so, King Gyeongdeok tried to make a favorable political background for his son, King Hyegong, even in the latest days of hi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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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전기 공노비의 선상(選上) 입역(入役) 규정 연구

저자 : 소순규 ( So Soon-kyu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2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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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제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중앙의 각사에 선상, 입역하는 선상 노비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기존 연구를 통해 조선의 공노비제 운영양상, 납공노비 및 선상입역 노비의 부담, 입역 규정의 정비 과정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 노비의 부담과 입역 규정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재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초 선상노비들의 입역 규정의 정비과정과 그 과정에 따른 노비들의 부담을 추적해보았고, 기존 연구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하였다.
태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된 선상 규정에 따르면, 선상은 지방에 거주하는 奴에게 부과하였고, 이들에게는 봉족 婢 2명이 지급되었다. 선상하는 자들은 모두 3번으로 나누어 윤차 입역하도록 하였고, 일반적으로 입역 기간은 6개월이었다. 그러나 이들 노비들의 소속된 각사의 노비보유 상황에 따라 이들 노비들의 번차는 천차만별이었고, 이에 따른 부담도 제각각이었다. 단종때 이르러 이들 선상노비들의 번차는 대폭 확대되어 지방은 11번, 경기는 13번으로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선상노비들은 5년 내지 6년에 6개월을 입역하도록 변화하였다. 이러한 수는 성종대 이르러 다시 7번으로 축소 조정되었고, 해당 내용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한 번의 입역기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하였다.
한편으로 선상 입역에 대한 대립도 꾸준히 일어났다. 애초 대립을 금지하던 조정은 성종대 이후 대립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이에 대한 대립가를 국가에서 공정하도록 하였다. 당시 국가의 공정가는 1개월 입역가로 면포 2필이었으나, 실제 민간에서 통용되는 입역가는 이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에서 1개월 입역가는 2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 국가 공정가의 입역가가 사회적 관행으로 자리잡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There are many studies on the service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However, there are not relatively many studies on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each central capital bureau and their service. Aspects of operation of the official salve system and the arrangement process of the obligation and service regulations of tribute-paying slaves,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and service slaves in the Joseon dynasty were clarified through the existing studies. However, the obligation and service regulations of these slaves leave place for reconsidering several things. This thesis traced the arrangement process of the service regulations of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ir obligations according to the process and drew the conclusions that are somewhat different from those of the existing studies.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of the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that were arranged in earnest since the reign of Taejong of Joseon,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were imposed on the slaves (奴) who reside in local areas and two female slaves, the sustainers, were provided for them. The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serviced three times taking turns and generally, the service period was 6 months. However, these slaves' turn was various according to the situations that each capital bureau had them. Accordingly, their obligations were various. The number of service of the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was changed to 11 times for the local areas and 13 times for Gyeonggi in the reign of Danjong of Joseon as it was drastically increased. Accordingly, the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serviced for 6 months per 5 or 6 years. This number was again reduced and changed to 7 times in the reign of Seongjong of Joseon and the relevant contents were recorded in National Code (Gyeongguk daejeon). A service period shortened from 6 months to 3 in the reign of Jungjong of Joseon.
Meanwhile, there continued to be payment for military service substitution about service of the slaves selected and sent up to the capital. The royal court that had put a ban on payment for military service substitution at first legally allowed it since the reign of Seongjong of Joseon and made the state decide payment for corvee service on the basis of public opinions. The then official price of the state was 32 meters of cotton cloth as the service price of one month. The service price that was actually used in non-official circles was the level that exceeded this. However, seeing that the service price of one month is 32 meters of cotton cloth in the materials that show the situations of the late 16th century, it can be thought that the service price of the national official price was social cus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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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왕실 회화(繪畵)의 '공공성(公共性)' ―민(民)을 그린 그림을 중심으로―

저자 : 고연희 ( Kho Youen-he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7-24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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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회화 문화 가운데 '공공성'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그림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연구는 우리나라 民의 日常的 노동 農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稼穡艱難圖, 四民圖, 四時農功圖 등으로 불리는 화제가 역사적으로 중시되며 그려진 양상, 자연재해와 같은 非常時의 民이 겪었던 참담한 고통을 보고하는 流民圖, 安民圖, 保民圖 및 類似-流民圖로 분류될 만한 賑民圖와 飢民圖 등이 제작된 양상을 정리하고 논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내내 국왕과 신료들은 民의 實狀을 정확히 알고 배려해야 하는 책무감을 가지고, 이러한 그림 문화를 중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실에서 백성의 모습을 그린 그림 제작을 종종 요청하였고, 신료들은 이러한 그림을 올리는 것을 충성스런 행적으로 여겼다. 사회적으로 낮은 民間 계층의 어려운 사정을 최고 권력계층인 임금이 알도록 하는 이러한 그림들은, 민간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슬픔의 공감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진휼의 정책을 펼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조선 사회의 전통 속에서 서로 다른 계층들이 고통을 함께 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共生의 가치관이 어떻게 그림 문화로 현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The paintings that show clearly the values of publicness at the Joseon court were the paintings which describe the sufferings of the people. These paintings, such as painting of the hard time of farming and silk-worming, painting of wandering people in a drought or wars, were usually made for the purpose of informing the king of the true state of the people. After seeing these paintings, the kings of Joseon felt the sorrow of their hearts and thought about policies that helped the people.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the function of reporting the true state of the people was highly estimated by the kings and subjects who were responsible for caring for the difficulties of the people. Thus, these paintings are representative examples showing the values of publicness in the Joseon court. All the classes of Joseon recognized and sought to solve pain together in the traditions of this culture of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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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18세기 환자(還上)의 취모보용(取耗補用)과 전환(錢還)의 등장

저자 : 임성수 ( Im Seong-s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1-29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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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上는 풍년에는 農糧이, 흉년에는 賑資가, 적이 침입하면 兵糧이 되는 국가의 핵심 저축이었다. 운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분을 감안하여 元穀의 10%를 징수하던 耗穀은 17세기 이후 會錄法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재정에 활용되었다. 지방관의 廩料나 祭需와 같은 필수 경상비를 책임졌던 還上의 재정적 기여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특히 18세기 이후 저치미의 감소와 은결 색출로 지방관청의 수입이 대폭 감소하자, 耗穀의 규모를 넘어 元穀까지도 재정에 투입되었다. 부족한 경비는 늘었지만, 取耗補用이 가능한 還上는 오히려 줄어가는 상황에서 지방관에게는 극적인 타개책이 필요했다. 이 모든 제약을 해결해준 것이 錢還이었다. 錢還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지방관청에 유리했다. 첫째, 곡식이 없어도 분급이 가능했다. 錢還은 동전을 분급하여 가을에 곡식을 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元穀이 남아있지 않아도 분급할 수 있었고, 가을에 쌀을 받아 元穀을 채울 수 있었다. 둘째, 還上의 耗穀은 10%에 불과했지만, 錢還은 그보다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지방관청에서는 대부분 봄에 2냥 남짓을 지급하고, 가을에 쌀 1석을 징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소 100%에서 최대 250%까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고작 10%에 불과했던 耗條에 비하여 가히 엄청난 수익률이었다. 영조 말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錢還은 강력한 禁令에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정조 즉위 뒤에는 전국 군현과 監兵營, 중앙군문까지 퍼져나갔다. 다만, 18세기까지는 還上가 소진되지 않은 지역도 많았고, 정부의 단속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錢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Hwuan-Ja (還上) was a relief system for famers in spring. Hwuan-Ja (還上) was operated by lending rice in the spring when food was low and receiving 10% interest in the fall. However, the nature of the Hwuan-Ja (還上) has changed since the interest rate of 10% (耗穀) began to be used for local finance. Hwuan-Ja (還上) was responsible for the current costs of local finance. As local government began to use more than interest income, the saved rice gradually decreased. Eventually, local government lent coins instead of rice in the spring and received rice in the fall. This is called a Jeon-Hwuan (錢還). The transition had two main advantages in local finance. First, it was possible to operate without stockpiling rice. This was the biggest advantage for local governmen, where stockpiles were decreasing at the time. Second, interest income was much higher than previous methods. Interest income, formerly only 10 percent, more than doubled the principal. These operations were a heavy burden on farmers, but local government pushed ahead to raise funds. Jeon-Hwuan (錢還), which was implemented in some areas, spread nationwide as early as the late 18th century.

KCI등재

10고소설의 공사관(公私觀) 연구를 위한 시론 ―공·사 구분과 논의 방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저자 : 최영 ( Choi Yo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5-32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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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公'과 '私'의 균형 변화라는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고소설에 접근하기 위한 시론적 논의이다. 이를 위하여 '영역'과 '관계'에 따라 유형화를 진행하고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였다. 영역은 身, 家, 國, 天下로 구분된다. 작품의 분석은 인물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어떤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했느냐를 확인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때 각 영역은 '이중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관계가 더해졌을 때 작품이 어떤 층위에서 公·私의 문제에 주목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공사관의 역사적 변화를 바탕으로 구분 기준의 '유동성'을 검토하였다. 公·私를 나누는 기준은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에 포함된 가치나 태도의 우선순위가 특정 조건에서 변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동성이 균열을 만든다. 이 균열은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당위와 선택의 불일치, 체제로부터 부여받은 이름과 주체적인 행동의 불일치 등으로 드러난다. 모종의 불일치를 포착할 때 당위를 의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위에 대한 의심 속에서 公·私의 이분법이 은폐하고 있던 이질적인 존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공·사의 이분법이 지속되는 것을 막는다. 사적인 것이라 치부되었던 요소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고, 동시에 '공'의 경직성을 완화시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를 滅私奉公에서 活私開公으로의 이행으로 보았다.


This article is a trial discussion to approach the accusations of the late Joseon Dynasty in terms of the balance of 'Public' and 'Private'. To this end, the classification was carried out in accordance with the 'the social area' and 'the relationship' and the related issues were reviewed. The social areas are divided into self (身), family (家), kingdom (國), and the world (天下). The analysis of the work begins with the identification of which areas the person was given a certain name in and in which relationships the conflict arose. At this time, since each area has a duality, it is possible to talk about which level a certain work focuses on the issues of Public and Private when specific relationships are added.
Next, the 'fluxability' of the classification criteria was reviewed based on historical changes in the conception of public/private. At this point the standard with which Public, Private are appraised will depend on the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 The priority of values or attitudes contained in tradition changes under certain condition. This fluidity creates cracks. This crack is revealed to be a mismatch between the character's justification and choice. Furthermore, the crack is revealed to be a mismatch between the name given by the system and the self-reliance. When aware of these discrepancies, it can be raised questions about the system.
In the midst of doubts about justification, private and disparate beings that were covered up by the dichotomy of Public and Private appear in earnest. It re-recognizes factors that are considered private. At the same time, To prevent the Public from becoming rigid and keep it alive and moving. This paper sees this as a transition from 'excising Private to serve Public' to 'letting Private live to open up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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