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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현실 update

Journal of Society for Music and Reality

  • : 민족음악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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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2765-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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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음악과 민족(~2020)->음악과 현실(2021~)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3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042
음악과 현실
63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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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민족음악학회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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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민수 ( Kim Min Su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8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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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급변하던 공연문화의 기류 속에서 전개된 1920년대 전통연희공연의 맥락을 거시적 관점에서 재조망해 연구를 진일보시켜 보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간 쇠퇴기로 규정되어 온 것과는 달리 1920년대 전통연희는 극장무대와 더불어 음반발매에 힘입어 판소리명창들의 주도로 성장한 명창대회와 전통음악의 위기라는 인식 속에 결성된 전통음악단체의 활동 등을 통해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었다. 특히 기존 논의에서 1920년대의 광무대는 신파극의 수용으로 전통연희공연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단정했다. 물론 광무대는 신파극과 당대 인기있는 새로운 공연물을 무대에 세우는 등 경영진에 따라 운영의 변화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전통연희공연은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광무대의 흥행을 담보하는 주요레퍼토리로 선택되어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었다. 더불어 1922년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신설된 조선극장은 대중들의 영화관람을 독려하고 영화 배급의 공백기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로서 전통연희를 자주 선보이며 1920년대 신문화에 점차 밀려 설 자리가 축소되고 있던 전통연희공연에 또 하나의 공간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
구극이 극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공연되고 있을 때 1920년대 중후반 판소리명창들의 주도로 시작된 명창대회는 경성의 극장에 한정되어 있던 전통연희공연의 무대를 전국으로 확장하는 데 일조했다. 판소리가 주요레퍼토리였던 명창대회는 1910년대의 전통을 연계하고 있던 광무대의 구극 즉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과 재담 여기에 민속놀이까지 포함한 종합공연형태의 전통연희공연을 이제는 판소리와 기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 위주로 재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명창대회가 부상하던 시기에 공연문화의 급격한 변화가 전통음악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각성 속에 관련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구극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부응한 조선악 또는 조선음악이란 용어를 전면에 내세워 각자가 추구하는 전통음악의 부흥을 위해 활동하며 전통음악의 가치를 제고하고 그 위상을 재정립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명창대회를 기반으로 사실상 전통음악계를 이끌고 있던 판소리명창들은 이 시기 전통음악단체들의 결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1920년대 전통음악의 부흥을 위한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This paper attempted to further study the context of traditional performances in the 1920s, which developed amid the rapidly changing atmosphere of performing culture in response to the demands of the times of modernization, and confirmed the following facts.
Unlike what has been defined as a decline period, traditional performances in the 1920s were actively performed through theater stages, master singing contests led by Pansori masters, and activities of traditional music organizations formed under the perception of a crisis of traditional music. In particular, in the existing discussions, Gwangmudae in the 1920s concluded that traditional performances were greatly dampened by the acceptance of new wave plays. Of course, Gwangmudae University changed its operations depending on the management, such as setting up a new wave play and a new performance that was popular at the time. However, despite such a situation, it can be seen that traditional performances were selected as a major repertoire that guaranteed the success of the wide stage throughout the 1920s and were continuously performed. In addition, the Chosun Theater, which was newly established in 1922 for the purpose of screening movies, frequently introduced traditional performances as a role of encouraging the public to watch movies and providing attractions during the vacuum of movie distribution.
When the traditional play was being steadily performed around the theater, the master singer contest, which began in the mid to late 1920s, helped expand the stage of traditional performances limited to theaters in Gyeongseong nationwide. The master singer contest, in which pansori was the main repertoire of the 1910s, played a decisive role in reorganizing the traditional performance of the Gwangmudae, which was linked to the tradition of the 1910s, into music centered on pansori and music. In addition, by the time of the rise of the master singer contest, related organizations begin to form amid the awakening that rapid changes in performance culture could threaten the existence of traditional music. They promoted the term Joseon music in response to the changes of the times, not the traditional play, and contributed to enhancing the value of traditional music and reestablishing its status. In particular, Pansori masters, who were virtually leading the traditional music industry based on the master singing contest, were directly or indirectly involved in the formation of traditional music organizations during this period and led activities for the revival of traditional music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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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수정 ( Lee Su-Joung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32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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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조선왕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고종의 장례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장례로 거행됐어야 했는데, 큰 공적이 있을 때 내려지는 국장이 부여되었다. 나라 잃은 군주의 장례에 부여된 '국장'이라는 명칭은 일본식 장례를 뜻하며, 일본의 근대식 장례 제도를 조선에 적용한 첫 사례이다. 또 식민지 조선의 관습을 거스를수 없어, 국장은 조선식 전통장례도 활용하였다. 따라서 고종의 장례는 일본식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조선의 구식국장이 혼용되는 방식으로 거행되었다. 조선의 빈전과 혼전에서 일본식 의식이 거행되고, 따로 일본식 발인 행렬을 꾸려 행진을 했다. 장례식장을 건설하여 조선인을 배제한 채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조선에서 금하는 음악을 연주하며 의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장례는 일본 황가와 내각에서 주도했기 때문에 이왕가나 순종은 어떠한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고종의 장례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의식인 조선식과 일본식 신식과 조선식 장례제도와 음악을 살펴보았다. 조선식 국장은 승하에서 발인, 우제, 부묘의까지 약 3년의 기간동안 각종 의식이 거행되었다. 빈전과 혼전, 산릉, 부묘주감을 설치하여 의례를 진행했고, 관련 기록을 남겨두었는데 유교식 예법에 따라 거행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국장의 가장 마지막 의식인 부묘의에 연주된 종묘제례악의 곡명이 <보태화지곡>·<향만년지곡>으로 바뀐 점을 알 수 있었다. 부묘 행차시에 고취악이 연주되었는데 이왕직아악부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와 다른 점은 종묘에서 환궁할 때가 아닌 종묘로 행차할 때 고취악을 연주했다는 점이다.
일본 국장은 크게 두 장소에서 실시되었다. 조선식 의례가 진행되는 공간에 들어와 진행하는 의식과 단독으로 대규모 장례식장을 건설하여 진행하는 장례식이다. 조선식 의례가 진행되는 공간에서는 그때마다 제물과 의물을 교체하면서 병행하였고, 장례식장은 조선을 완전히 배제한 일본식 장례의식이 진행되었다. 의식은 국장봉고의·사뢰의·염장전구전제의·영여발인의·장장제의·염장후권사제의·염장후묘소제의가 있었다. 신도식 의식을 기본으로 하며, 여기에 해군의장이 추가된 형태이다. 발인당일 인천에 정박한 함선에서 조포 발사가 있었고, 발인과 정침 의식에서 일본 육해군 군악대가 의식음악을 연주하였다. 또 국장의식 전반에서 연주되었던 일본 가가쿠는 궁내성 악사와 악기를 직접 보내 연주한 것이었다. 이 음악을 실제적으로 접한 조선인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장례행렬과 의식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 상태를 과시할 수 있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 전환된 점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당시 고종국장을 기점을 확대된 3.1독립운동의 기세를 잠재우려는 제국 권력의 의도가 고종의 장례식에 담겨있다.


Emperor Gojong's funeral, died in 1919, was held as Guk-jang (a national funeral). 'Guk-jang', a title given to a lost monarch, meant a Japanese funeral.
This was the first case of applying Japan's modern funeral system in Joseon. However, Guk-jang was also formed as Joseon's traditional funeral as the traditions of Joseon could not be ignored. Thus, the funeral of emperor Gojong was held in both Joseon and Japan's funeral systems. In feudal society, the king's death had a correlation with the succession of royal authority. The funeral of Gojong, who got the authority taken, had to be held as Japan intended.
This study explores music and two rituals that can be seen at Gojong's funeral, the Joseon's system of funeral and Japan's system of funeral. The Joseon style of Guk-jang was held in a traditional way. It followed the strict system of funeral which did not include music and was held in a solemn mood. As stated below, this paper explores the contents and music of the ritual held according to each procedure. First procedure to look at is as followed - a morgue that holds soul before a funeral, carrying a coffin to a burial site, and a ritual of soul-temple that serves a mortuary tablet taken from a burial site. 'Bumyo', the last funeral procedure held at Jongmyo, uses 'Jeryeak' (ritual music) and marching music to announce all procedures of funeral are completed. It was pointed out that the name of 'Jeryeak' (ritual music) played at this time was changed. Japan's national funeral was held in two major locations - a ritual held at the space where Joseon-style rituals are held and a large-scale funeral that is held exclusively. In the space where Joseon-style rituals were held, offerings and clothing were replaced each time, whereas the funeral hall was a Japanese funeral that completely excluded Joseon. The Japanese-style funeral system was newly established during the Meiji period in the 19th century. Based on the Shinto ritual, traditional Japanese Kagaku and Western-style military music were used. Musicians were called from the Japanese Imperial household to play Kagaku, and warships and naval bands, sent from Japan, fired artillery and played Western-style military music. It was an audiovisual demonstration of the transition to a modern state. In addition, Gojong's funeral included the intention of the imperial power to silence the March 1 Movement, which was held by Korean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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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유준 ( Choi Yu-Jun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16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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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여러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고향'인 통영(충무)에 대한 짙은 향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후 통영 지역의 문화계에서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를 출범시켜 매년 성공적으로 개최해 오면서 작곡가와 지역이 맺는 강한 정서적 결속력을 실현해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윤이상은 대한민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민중을 생각하는 투철한 민족주의 자이기도 했다. 작곡가의 고향 통영을 둘러싼 지역주의와 한반도를 둘러싼 작곡가의 민족주의는 어떤 관계로 볼 수 있을까? 이 논문은 이렇듯 '고국'과 '고향' 사이의 중첩되면서도 엇갈리는 '사이 영역'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상상적 지리가 수행적으로 형성하는 비판적 힘을 주제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 지역성과 관련한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특히 근대적 국민국가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탐색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몇 가지 이론적 전제를 짚어보면서 '비판적 지역학'의 가설적 논제를 확보한 뒤, 이를 작곡가 윤이상의 삶과 음악, 그리고 그에 대한 비평적 담론에 부분적으로 적용시켜 그 타당성을 점검해 볼 것이다.


Yun Isang showed a deep nostalgia for his "hometown" Tongyeong (Chungmu) in several interviews. After his death, the cultural community in Tongyeong launched the Tongyeo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in honor of him and has successfully held it every year, realizing the strong emotional solidarity between the composer and his hometown. At the same time, however, Yun Isang was also a thorough nationalist who thought of the entire Korean Peninsula, including South Korea and North Korea. What can be seen 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ocalism surrounding Tongyeong, the composer's hometown, and the composer's nationalism surrounding the Korean Peninsula? This article focuses on the "In-Between" overlapping and conflicting between "homeland" and "hometown," and attempts to take on the critical power that these imagined geographies results in. Furthermore, it is intended to focus on deriving alternative thoughts, especially for the modern nation-state, through critical thoughts related to locality. To this end, I will first look at some theoretical premises to secure the hypothetical thesis of "critical local study," and then partially apply it to composer Yun Isang's life, music, and critical discourse about it to check its valid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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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은영 ( Kim Eun-young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208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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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국현대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해방, 분단, 한국전쟁, 정전(전후)을 아우르는 총체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기간은 민족국가수립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좌절된 후 전쟁과 분단이라는 남북한의 역사적 갈등이 응축된 시기이며 국제적으로는 세계냉전으로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시기이다.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대결이 치열했지만 음악가들은 음악계의 단결을 촉구하며 1946년 삼일절 기념음악회를 공동으로 주최했고 『임시중등음악교본』과 해방기념음악회, 전국음악경연대회 등을 통해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을 분기점으로 세계냉전 국면으로의 전환과 그 해, 8월부터 미군정에 의해 좌익활동이 전면금지되면서 좌익예술가들은 지하로 숨게 된다. 1948년은 단정을 둘러싼 내부냉전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냉전의 논리를 남한사회 안으로 내면화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문화예술인 사이의 공모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은 90일간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 기간동안 '문련' 산하의 예술단체가 조직되어 예술가들이 북한군에 부역하였다. 서울 수복 후 '문총'은 부역자 처벌과 종군문화반을 파견해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유지하였다. 한편, 월남음악가들도 자신의 반공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군가보급단에서 활동하면서 체제에 길들여진다.
전쟁 후 한국음악계는 미국과의 우호를 증진하는 한편, 미국무부 및 민간재단의 원조로 음악가들의 미국 연수와 미국음악가의 내한공연, 한국음악계의 재원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교섭력이 악단의 권력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자격조건이 되었다. 정부는 반공의 문화적 냉전을 수행한 음악가들을 여러 제도를 통해 포상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대일협력 과오는 무마되었고 제도권 음악권력이 유지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This study started from the awareness of the need for a holistic perception that encompasses liberation, division, the Korean War, and the armistice (before and after), which is the origin of modern Korean music history.
This period is the time when the historical conflict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war and division, was condensed after the public's desire to establish a nation-state was thwarted. Moreover, this period is when the U.S had a world-wide influence due to the Cold War. After liberation, the ideological confrontation between the left and right was fierce, but musicians co-hosted the 'March 1 Independence Day Memorial Concert' in 1946, calling for unity in the left and right music industry. However, in 1947 when the world faced the Cold War, art activities became unable due to terrors made by the radical groups of the left and right, and in August of the same year Left-wing artists hid underground as left-wing activities were banned by the U.S. military.
In 1948, the internal cold war surrounding single government of the South broke out violently, leading to the Jeju Movement and the Yeosu-Suncheon demonstration. The Rhee Syng-man government internalized the idea of the Cold War into South Korean society, and in this process, complicity between the government and cultural artists was formed. Meanwhile, when the war broke out, Seoul was occupied by the North Korean military for 90 days, during which an art group under Munryeon was organized and artists worked for the North Korean military. After the restoration of Seoul, the “Munchong” maintaine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by punishing those who worked for the North and sending a military culture class. On the other hand, musicians who defected from the North were also tamed by the system, working in military song distribution groups to prove their anti-communist ideology.
After the war, the Korean music industry promoted friendship with the United States, while planning American training for musicians and performances by American musicians with the aid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and private foundations. In this process, the bargaining power with the U.S. became an important qualification condition for the musical society to gain authority. The Korean government rewarded musicians who performed Cold War music and maintained vested interests, and in the process, the mistakes of pro-Japanese music were elimi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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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차선희 ( Sunhee Cha ) , 유승지 ( Seungji Ryu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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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경우 각국의 문화유산을 담은 교육용 피아노 작품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자국인이 창작한 작품들이 교육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교육용 피아노 작품 창작과 활용이 아직 미흡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카고에 소재한 세종문화회는 2004년부터 한국 음악적 특징을 담은 교육용 피아노 작품을 지정곡으로 채택하는 세종음악경연대회를 진행하여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까지 한국 문화를 소개해오고 있다.
경연대회는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4개 부문으로 구분되어 진행되었고, 지난 18년간 이 경연대회의 피아노 지정곡으로 채택된 작품은 총 60곡, 이 작업에 참여한 작곡가는 30명으로 나타났다. 지정곡의 분석 결과 작곡가들은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한국 전통 민요나 전래동요의 선율을 활용하거나 전통 음계 및 장단을 활용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학생의 수준별 특징을 고려한 다양한 작품이 발굴된 것,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참가자들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지닌 작품을 소개한 것은 이 경연대회의 중요한 성과로 여겨졌다.
이에 연구자는 앞으로 국내에서도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교육용 피아노 작품 창작이 활성화되고 세계적으로 우리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개선방안으로 1) 음악경연대회 및 급수자격검증시험의 지정곡으로 사용, 2) 교육과정 개선과 인식의 전환을 통한 작곡가 양성, 3)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국내 음악 교육계가 위와 같은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한국적 정체성을 담은 교육용 피아노 작품들이 세계화되는 작업이 속히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In many foreign countries, educational piano works containing their own identity are actively created, and the works by native composers are being used in the educational field. In Korea, however, there is a lack of creation and utilization of educational musical works composed by Koreans. In efforts to remedy this, the Sejong Cultural Society, located in Chicago, has been introducing Korean culture to foreigners and Koreans since 2004, by holding the Sejong Music Competition.
The competition is divided into four sections: Kindergarten, Elementary, Middle, and High School, and participants must perform commissioned works featuring Korean musical characteristics. Over the past 18 years, total 60 works have been designated for this competition, and total 30 composers have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of commissioned works. In order to create ones that reveal Korean identity, the composers borrowed the melodies of traditional Korean folk songs or traditional children's songs, or utilized traditional scales and rhythms. In particular, it was considered an important achievement of the competition that various works were created taking into account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tudent's level, and that not only Koreans but also participants of various nationalities introduced works with Korean identity.
Accordingly, the researchers felt the need to explore ways to promote the development of educational piano works containing Korean identity in Korea, and suggested the following improvements: 1) use designated works for music competitions and graded music exams, 2) cultivate composers through curriculum improvement and perception change, and 3) create database construction and promotion through various platforms. The study will provide an opportunity for the Korean music education community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these tasks, and we look forward to quickly implementing the globalization of educational piano works with Korea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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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혜 ( Kim Seonghye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8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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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재 대취타에 사용하고 있는 악기 중에 '나각(螺角)'이란 악기의 명칭이 과연 바람직한 용어인지에 문제를 제기하여 올바른 용어 정립을 위해 시도한 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헌에 기록된 '나(螺)'와 '나각(螺角)'의 사례를 각각 검토하였다.
그 결과 '나(螺)'라는 악기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500년을 거쳐 근대 1902년까지 문헌에 그림과 함께 기재된 주된 명칭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1493년에 편찬된 『악학궤범』이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종묘의궤』와 잔치 관련 여러 의궤 속에 악기 그림과 함께 기록된 명칭은 '나(螺)'였다. 그러므로 '나(螺)'란 명칭은 1123년부터 근대까지 약 800년간 사용된 용어임을 확인하였다.
한편, '나각(螺角)'이란 명칭은 조선 중기에 '나(螺)'와 '각(角)'을 교대로 분 데서 비롯된 용어다. 즉 '나각교취(螺角交吹)'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그런데 18세기 정조 때부터는 기존의 명칭인 '나(螺)'와 조선 중기에 생성된 '나각(螺角)'이란 명칭이 혼재되기 시작했다. 특히 같은 문헌 내에서 두 용어를 혼용한 사례는 100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된 명칭은 '나(螺)'였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를 통과하면서 고착화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기존의 명칭인 '나(螺)' 대신에 '나각(螺角)'이란 용어를 주요 낱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각'을 주요 악기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왕 직아악대에서 편찬한 『조선악개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시기는 1917년이다. 이렇게 칭한 이유는『조선악개요』의 집필자들이 전문성이 부족하여 생긴 오류로 파악하였다.
'나각'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도 어느새 100년이 지났다. 이미 굳어진 명칭이니 그냥 사용해도 무관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지금껏 그래 왔다. 그런데 '나'를 '나각'이라 칭했을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螺)'인 경우와 '나각(螺角)'인 경우 모두 '나각'으로 번역하여 변별력이 없는 것이 문제다. 특히 '나각교취'인 경우 나와 각 두 가지 악기를 뜻하지만, 이에 대한 변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문제로 인하여 '각(角)'의 존재가 묻히고 삭제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다. 셋째는 한 가지 기사 안에서 '나'와 '각'이 동시에 등장할 경우에 '나'를 나각이라 칭하지 않고 이때는 '소라'로 번역하여 일관성이 없는 것도 문제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나'란 명칭을 사용한 역사는 800년이지만, '나각'이란 명칭의 사용은 짧게는 100년 길게는 200년이다. 여기서 짧게 100년은 1917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한 것을 뜻하고, 200년은 1800년 전후부터 1900년 전후까지 나와 나각을 혼용했기 때문에 100년이 더 추가된 기간이다. 이렇게 보면 소라로 만든 관악기의 주요 명칭은 '나'이고 후대에 별칭으로 생긴 것이 '나각'이다. 역사가 오래된 주된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역사가 짧고 별칭이며, 일제 때 전문성이 결여된 집필자들에 의해 사용된 용어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상의 문제는 '나각'을 '나'로 바로 잡아 칭하게 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최근 100년 동안 사용한 '나각'이란 용어를 이제 '나(螺)'로 바로 잡아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This thesis is about finding out whether the name, nagak(螺角), an instrument currently employed for daechwita, is correct and attempting to find a correct name for the instrument. For that purpose, every record that has 'na(螺)' and 'nagak(螺角)' has been examined.
It turned out that 'na(螺)', the instrument name, has started to be used since the Goryeo Dynasty. Throughout the 500 years of the Joseon Dynasty till 1902, 'na(螺)' was identified as the name for the instrument in the records with illustrations. In particular, 'na(螺)' was used with illustration both in Akhakgwebeom published in 1493 and Jongmyouigw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fore, it's safe to say that 'na(螺)' had been the official name for the instrument since 1123 till the early 20th century.
The name, 'nagak(螺角)' derives from the practice of blowing 'na(螺)' and 'gak(角)' alternately in the mid Joseon Dynasty. Exactly speaking, it originated from 'nagakgyochi(螺角交吹).' However, the existing name, 'na', and the one formed around the mid Josun dynasty, 'nagak(螺角)' started to be mixed up in the 18th century when the King Jeongjo ruled. For about a hundred years, two names were used together even in the same documents. However, the preferred name was 'na(螺)'.
There was a significant change in the practice as the country went through the Japanese occupation. 'nagak(螺角)' started to replace 'na(螺)' as the main name for the instrument. It was first seen in Joseonakgweyo compiled by Yiwangjikaakdae in 1917. The reason for this mistake may have resulted either from the lack of expertise on the part of the authors or from the Japanese intervention.
It has been almost 100 years since the name 'nagak' started to be used. Some people probably think that it's too much to make a fuss about a name which has been used and accepted for about 100 years. However, a few problems may surface from the misuse of the name. For example, if both 'na(螺)' and 'nagak(螺角)' found in the documents of the Joseon Dynasty as well as in the Goryeo Dynasty were called 'nagak',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different instruments would be difficult, just like 'nagakgyochwi', the name of which indicates both instruments, and thus causes confusion. Secondly, the misuse of the name may result in obliterating the existence of 'gak(角)' and getting rid of it completely. Thirdly, the names are not consistent in translation. For example, when both 'na' and 'gak' appear in a document, 'na' tends to be translated as 'sora'. Lastly, the 'na' had been used for about 800 years, while 'nagak' was for about from 100 to 200 years. If 'nagak' is estimated to have been used for 100 years, it is presumed to have been used since 1917. If the period when 'na' and 'nagak' were used together is taken into account, then 100 years more could be added to the estimation, making it 200 years, because both started to be used together from the early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In short, the instruments made of conch had mostly been called 'na' and, then, far later, it started to be called 'nagak' as a nickname. It shouldn't be overlooked that the original name which has the longest history was replaced by the one made either by those whose expertise were questionable or by the Japanese intervention. However, the aforementioned problem can be simply corrected by restoring 'na' to its place. In conclusion, the writer suggests that the name, 'nagak', which has been used for 100 years so far, should be corrected to 'na'.

KCI등재

저자 : 나유진 ( Na Youjin )

발행기관 : 민족음악학회 간행물 : 음악과 현실 6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1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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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연극, 영화, 뮤지컬, 무용, 애니메이션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콘텐츠에서 변용 양상을 보인다. 그만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주는 권위가 인정된다. 특히 미국에서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중 본고에서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주목하여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적 변용 양상을 살펴보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새로운 문화적 코드와 결합하여 여러 문화 장르로 재창조되고 있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음악은 웅장한 음악과 풍부한 선율 그리고 극적인 구성이 잘 표현되어 있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재즈를 중심으로 팝과 하이테크와 같은 대중음악이 두드러지게 연주되어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14세기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무대로 두 연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반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초연되어 인종차별과 갈등 현상으로 변용되었다. 두 작품은 연인간의 사랑 관계, 인종간의 갈등 관계 등 개인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일정한 교 훈을 주고 있다. 그 속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Shakespeare's play < Romeo and Juliet > has changed in almost all fields, including drama, movies, musicals, dance, and animation. This recognizes the authority of Shakespeare's work. In particular, it has been made into a musical in the U.S. and is loved all over the world. Among them, this article focuses on < West Side Story > and examines the modern transformation of < Romeo and Juliet >. < Romeo and Juliet > is being recreated into a variety of cultural genres by combining new cultural codes. The musical < Romeo and Juliet > features lyrical melodies that express magnificent music, rich melodies, and dramatic composition. < West Side Story > features pop and high-tech pop music centered on jazz, combining traditional and modern music. < Romeo and Juliet > tells the love story of two lovers set in Verona, Italy in the 14th century, while < West Side Story > premiered as a Broadway musical in the 20th century and turned into racism and conflict. The second movie not only teaches personal problems such as love relationships and race conflicts, but also teaches social lessons. Music accounts for a large proportion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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