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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WEON SAHAK

  • : 강원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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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6-3060
  • : 2713-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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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5)~39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340
강원사학
39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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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도민 ( Kim Do-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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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연구자가 2022년 4월부터 5월까지 세 차례 춘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이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분석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먼저 기념관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전시되고 있는지 분석했다. 특히 에티오피아의 참전기간과 사망자 숫자에 문제가 있음을 밝혔다. 다음으로 이 기념관에서 냉전기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관계사'의 복원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기념관은 이분법적이고 적대적인 냉전적·반공적인 서사에 따라 전시가 구성됐다. 따라서 냉전기 어느 한편에 서지 않았던 비동맹주의를 주도했던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였던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나아가 냉전기 내내 존재했던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생략됐다. 이로써 참전기념관은 한국사회의 오래된 반공주의적 내러티브를 반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문객들에게 이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냉전기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관계는 글로벌한 차원에서 반공주의와 비동맹주의가 충돌하던 장소였다. 따라서 이 참전기념관은 냉전기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관계사를 제시하고, 이를 포함하여 전시관을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처럼 본고가 제시한 전시 분석과 개선 방향이 반영되어, 춘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이 '전쟁과 평화' 관련한 공공역사의 교육현장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Based on the researcher's experience of visiting the 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in Chuncheon three times from April to May 2022, this paper analyzes the contents of the exhibition and suggests directions for improvement. First, this paper analyzed whether the memorial is being exhibited based on historical facts. In particular, it revealed that there were errors in the length of time Ethiopia participated in the war and the number of deaths. Next, the history of the Cold War relationship between Ethiopia and Korea, which was omitted by the 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was presented, and the need for reorganization of the exhibition hall was emphasized. It is expected that the Chuncheon Ethio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Hall will be reborn as an educational site for public history related to 'war and peace' by reflecting the wartime analysis and improvement directions suggested in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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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상순 ( Lee Sang-s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4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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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목받고 있는 공공역사(public history)는 역사서술과 재현이 이루어지는 사회 영역에 대한 논의이다. 대학, 학계의 전문 학술 성과 (academic history)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대학, 연구소, 학회 등 전문 학술연구 영역과 그 외부에서 일어나는 역사 지식의 공적 활용에 관한 형식 총체를 말한다. 그 가운데 대학박물관은 전문적 역사학 연구의 영역과 더 넓은 공공 영역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전문적 학술연구의 성과가 외부로 확산되기에 용이한 내용적, 공간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인문도시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 지원 사업의 하나로서 2010년대 인문학 대중화 사업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 국책 지원 사업이다. 인문도시 사업은 대학의 인문 학술 역량을 사회에 확산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은 2015년 강원도 원주시를 무대로 하여 인문도시 사업에 선정되었고 2018년까지 총 3년간 사업을 수행하였다.
3년의 기간 동안 원주시에 소재한 문화, 사회 단체와의 폭넓은 교류를 바탕으로 매년 100강좌 가량의 인문강좌를 시행하였고 연구재단이 지정한 인문주간 행사를 비롯하여 시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축제와 전시회 등 문화행사를 수차례 개최하였다. 3년간 직, 간접적으로 본 사업에 참여한 사회, 문화단체는 26개 단체에 이르렀다.
공공역사의 주체가 대학, 학술연구공간을 넘어선 다양성과 개방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대학박물관으로서 주관한 인문도시사업은 사업주체가 대학이라는 점에서 공공역사 담론 생성 이전의 전통적인 공적 역사서술재현형식의 형식과 유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인문도시 원주' 사업은 '공공역사' 담론의 실천적 의미로서 그에 부합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서술재현의 형식으로 볼 때 권위적인 대학이 사회를 일방적으로 계몽하는 방식을 넘어서 지역의 역사 주체들과 호흡하며 함께 고민하고 나누었던 '역사하기' 형식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공공역사'가 가진 '공공', '공중', '공유'를 바탕으로 한 '생산'의 개념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ublic history, which has recently been attracting attention, is a discussion about the social domain in which historical descriptions and representations take place. As a concept that contrasts with academic history of universities and academia, it refers to the totality of formalities related to the public use of historical knowledge that occurs outside of professional academic research areas such as universities, research institutes, and academic societies. Among them, university museums have content and spatial excellence that facilitates the spread of professional academic research results as a contact point between the realm of professional historical research and the wider public realm.
The Humanities City project is one of the humanities support projects of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and it is a national support project that is leading the flow of humanities popularization projects in the 2010s. The Humanities City project aims to spread the university's humanities and academic capabilities to society. Yonsei University Wonju Museum was selected for the Humanities City project in Wonju-si, Gangwon-do in 2015, and carried out the project for a total of three years until 2018.
For three years, based on wide exchanges with cultural and social groups located in Wonju-si, about 100 humanities lectures were held every year. Several cultural events were held. The number of social and cultural organizations that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this project for three years reached 26.
Considering the subject of public history as a being with diversity and openness beyond universities and academic research spaces, the Humanities City Project hosted by the Wonju Museum of Yonsei University is a traditional public historical narrative prior to the creation of public history discourse in that the subject of the project is a university. Formally, it was similar to the method of representation, but it showed a different aspect in content.
The 'Humanities City Wonju' project had elements that correspond to the practical meaning of the 'public history' discourse. In terms of the form of reproducing historical narratives, the format of 'doing history', which was shared with local historical subjects, was applied beyond the method of unilaterally enlightening society by an authoritative university.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it fits the concept of 'production' based on 'public', 'public', and 'sharing' of 'public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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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의 참전 70주년인 2020년을 항미원조 집단기억의 새로운 전환기로 보는데서 출발한다. 격화되는 중미 갈등 속에서 항미원조는 '반미를 핵심으로 하는 저항적 내셔널리즘'을 고취하는 집단기억으로 재소환되었다. 애국과 혁명 중 혁명만을 걷어낸 항미원조의 문화적 재현은 한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악화된 한국사회의 반중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항미원조 집단기억의 새로운 전환 양상을 살펴보는 한편,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한중관계의 회고와 전망에 대한 고민이 집중되는 지금, 양국의 우호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중국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에 내재된 감정구조를 이해하는데도 참고가 될 수 있다.
본고는 참전 70주년 이후 제작된 항미원조 문화콘텐츠의 전반적인 특징을 살펴보고,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장진호(長津湖)> 시리즈와 <저격수(狙擊手)>를 통해 항미원조 집단기억을 통한 내셔널리즘을 추동하는 두 가지 방식과 한계를 고찰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두 거장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는 각각 영화 <장진호> 시리즈와 <저격수>를 통해 항미원조를 모두 '중미전쟁', '승리의 애국전쟁'으로 그려내면서도, 내셔널리즘 재현에 있어서는 '100년의 굴욕과 신중국 수립 이후의 설욕' 그리고 '가국감정(家國情緒)'을 자극하는 것으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주변국을 적대시하는 대항적 민족주의와 국가를 위한 개인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한계가 노출되며, 이는 혁명 이데올로기가 빠졌을 뿐 냉전시기와 다름없이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를 추출하여 대중동원에 활용하고 있다는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제는 달라진 국가적 위상에 맞게, 상대방을 증오하고 '승리'만을 강조하는 대신, 참전한 모든 국가 병사들의 희생과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보편적 인류애와 평화의 서사로 나아가야만 한다.


This paper starts from viewing 2020 as a new turning point in collective memory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the 70th anniversary of China's participation in the war. Amid the Sino-American conflict, this war memory was recalled as a collective memory promoting 'resistance nationalism centered on anti-American sentiment'
First, this paper analyzed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cultural contents produced after the 70th anniversary of the war. After that, this paper analyzed two methods and limitations of driving nationalism through collective memory of this war through the movies < The Battle at Lake Changjin > series and < Sniper >. Two Chinese masters, Chen Kaiger(陳凱歌) and Zhang Yimou(張藝謀), portrayed this war as a "China-American War" and a "patriotic war of victory" through the movies < The Battle at Lake Changjin > series and < Sniper >. However, in terms of the representation of nationalism, there was a difference in stimulating "100 years of humiliation and reveng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Patriotism". But both ways have limitations in emphasizing counter-nationalism, which antagonizes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 unconditional sacrifice of individuals for the country. This narrative style is hard to escape international criticism that the revolutionary ideology of the Cold War era was omitted, and that political messages were extracted according to the needs of the country and used for mass mobilization.
More than 70 years later, the Korean War has yet to emerge as a public stage in East Asia. Now, in line with China's high national status, instead of hating the other side and emphasizing only "victory," it must move toward a universal narrative of humanity and peace that can embrace the sacrifice and pain of all the soldiers of the country who particip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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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건우 ( Kim Kun-w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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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해·삼척지역에서 조사된 횡혈계 묘제를 분석하고, 횡혈계 묘제의 등장과 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횡혈계 묘제는 내부구조의 속성 조합을 통해 8개의 형식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각 형식은 변화양상을 토대로 4단계로 설정할 수 있으며, 출토된 토기류(고배, 개, 부가구연대부장경호)로 보아 중심연대는 6세기 초엽에서 7세기 말엽으로 편년된다. 동해·삼척지역은 原三國時代에서 三國時代로 이어지는 묘제가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2세기 전엽부터 5세기 전엽까지 존속한 취락유적과의 관계를 통해 횡혈계 묘제의 등장을 추론할 수 있다. 취락유적은 기존의 연구에서 '悉直國'의 문화로 파악하고 있고,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간접지배의 형태로 신라와 관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간접지배 관계에서 점진적인 변화 양상이 수반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등장한 횡혈계 묘제는 신라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신흥 집단의 출현을 나타낸다. 가장 이른 시기에 조영된 동해 구호동고분군과 추암동고분군은 신라의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의 전환을 나타내며, 동해·삼척 지역은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볼 수 있다. 아울러 505년(지증왕 6) 직접지배의 산물인 悉直州의 설치와 軍主의 파견은 동해·삼척지역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가지는 고분군이 확인되지 않는 까닭으로 볼 수 있다.


In this article analyzed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in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and looked into the appearance and meaing of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can be classified into 8 types through the combination of attribute of the internal structure. Each type can be set in 4 stages based on the change aspect, and the central era is from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to the end of the 7th century based on the earthenware excavated(mounted dishes, half-spherical lids, the long-necked jars with stand). In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there are not has been confirmed yet to be connected burial system from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However, it is possible to infer the emergence of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through the relationship with the settlements that continued from the early 2nd century to the early 5th century. The settlements have been identified as the culture of 'Siljik-guk(悉直國)' in previous studies, and if you look at the Samguksagi(三國史記), it is highly likely that they had a relationship with Silla in the form of indirect rule.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which sudden appeared without any gradual change in the indirect control relationship, is represents the emergence of a new group closely related to Silla. The Guho-dong and the Chuam-dong tomb clusters in Donghae, built at the earliest period, represent the transition from indirect control to direct control of Silla, and Donghae Area can be seen as outposts for this. In addition in 505(year 6 of Jijeung maripgan) as a result of direct rule the installation of Siljik-ju(悉直州) and the dispatch of ruler can be attributed to the reason that the tomb clusters with an overwhelming position of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are not ident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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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규운 ( Kim Gyu-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3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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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지역 고분의 현황과 활용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현재 강원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의 수는 약 이외의 타지역에 비해서도 적지 않은 숫자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특히 지표조사에 그친 고분군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그 양적인 지표에 비해 질적인 지표인 현황을 살펴보았을 때, 아직까지 미진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분을 활용함에 있어서 내부 구조와 고분이 가지는 성격 및 특성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확인되었다. 또한 지표조사 이후 석실의 내부가 노출된 채 방치된 사례도 확인되어 향후 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전자의 경우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춘천지역에 밀집된 고구려 고분의 특성을 살려 '춘천의 고구려 고분 탐방'이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초보적인 단계의 방안이기는 하나 결국 중요한 것은 점 단위의 복원보다는 면 단위로 고분의 성격과 특징을 살리는 방향으로 복원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분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여 후대에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복원하는 방향으로의 복원이 필요하며, 단순히 봉분의 형태로 덮기보다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이에 초보적인 단계의 제안을 통해 고분의 구조와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할 것을 제시하였다. 문화유산을 보존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반인들과 함께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Many remains have been excavated in Gangwon Area so far. Howe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general utilization plan because the ruins of the village are identified at a high rate. Nevertheless, a large number of tombs are identified in Gangwon-do, with about 850 tombs excavated. These tombs are remains with excellent visibility and are judged to have great value for use. However, in terms of utilization, it is considered that the qualitative indicators are still insufficient compared to the quantitative indicators of ancient tombs in Gangwon Area. Therefore, it was suggested to improve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tomb in a direction that can be well preserved through a proposal at an a rudimentary stage.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ways to use cultural heritage with the general public, away from recognizing it only as an object of pre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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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성주 ( Han Seong-j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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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460년(세조 6)에 일어난 조선의 여진 정벌인 '경진북정' 전후 홍윤성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진북정'은 모련위의 추장이었던 낭발아한을 조선이 처벌하자, 그의 아들 아비거가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의 변경을 침입한 것에서 기인하였다. 세조는 여진인들의 침입이 격하되자 홍윤성을 조전원수로 삼아 함길도로 파견하였다. 세조는 홍윤성을 파견하면서 그에게 내구마와 금으로 용을 그린 안장, 주홍의 말다래, 홍모영의 장식을 하사하였다. 이는 세조가 자신을 대리해서 홍윤성을 파견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權臣인 홍윤성을 파견함으로써 도망간 여진인들을 안정시켜 돌아오게 하고, 배반한 여진인들을 귀순시켜 두만강 유역에서 조선과 여진과의 싸움이 확전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윤성은 세조의 방책에 따라 여진인들을 적극적으로 귀순시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의 활동으로 투항·귀순한 자들을 서울로 상경시키기도 하였다. 세조는 아비거가 조선을 침입하다가 죽고, 홍윤성의 여진 초무가 성공을 거두자, 여진 정벌을 일시적으로 중지하였다.
그러던 중 明은 조선의 낭발아한에 대한 처벌을 문제시하고 여러 차례 칙서와 사신을 보내며 조선을 압박하였다. 이때 여진인들은 명의 조선 압박을 이용해 조선에 한편으로는 귀순하고, 한편으로는 침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세조는 明使가 모련위 지역에 머물고 있음에도 신숙주와 홍윤성을 파견하여 여진에 대한 정벌을 실행하였다. 당시 정벌의 총지휘관은 신숙주였고, 부지휘관은 홍윤성이었으며, 이들은 총 8,300명의 군사를 4로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종성을 출발하여 여진인들의 거주 지역을 기습 공격하고 4일 만에 귀환하였다.
'경진북정'으로 조선군은 여진인 430여 명을 죽이고, 9백여 채의 집과 재산을 불태웠으며, 죽이거나 사로잡은 우마가 1천여 마리에 이르는 등 이전 3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보다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경진북정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조의 권신인 신숙주와 홍윤성을 각각 정벌의 책임자와 부책임자로 파견하여 장수들에게 정벌의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고 실천하였다. 둘째, 이 정벌은 문신들이 지휘관이 된 최초의 여진 정벌로, 이들은 당시 공을 앞세워 성급한 정벌을 주장하던 무신들을 제어하면서 여진 지역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여 준비하였다. 셋째, 조선의 군사 행동이 단기간에 전 군사가 전방위로 기습 공격하고 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세조가 무인의 자질과 무재를 가진 홍윤성을 파견함으로써 자신을 대리화시키고 신숙주를 보완하게 함으로써 문무 양측면에서 정벌의 성과를 이끌어내었다.


The sudy reviewed activities of Hong Yoon-seong at the time around 'Gyeongjin Bukjeong(庚辰北征, conquest to northern area in the year of Gyeongjin)' which was one against Jurchens occurred in the 6th year of Sejo(1460). 'Gyeongjin Bukjeong(庚辰北征)' was caused by the invasion of Abigeo(阿比車) and other Jurchens to border area of Joseon. His invasion was stimulated by his father's death. Joseon killed his father Nangbalahan(浪孛兒罕) who was the chief of Moryeonwi(毛憐衛). Sejo sent army under command of Hong Yoon-seong, Jojeonwonsoo(助戰元帥) to Hamgildo against their increasing invasion. Sejo gave him Naeguma(內廏馬), saddle with painted dragon in gold, scarlet saddle flap, and decoration of Hongmoyeong(紅毛榮). This means that Sejo sent Hong Yoon-seong instead of him.
Sejo sent Hong Yoon-seong, a powerful courtier to let fled Jurchens return and betrayed Jurchens surrender. This aimed to prevent expansion of war between Joseon and Jurchens in Tumen river basin. Hong Yoon-seong actively made Jurchens surrender and return to home according to plan of Sejo. Some of the Jurchens were sent to the city of Hanyang to live there. Sejo temporarily stopped conquest to Jurchens because Abigeo died during invasion to Joseon and Hong Yoon-seong succeeded placating Jurchens.
Then Ming Dynasty(明) raised issue regarding death of Nangbalahan and pressed Joseon by sending a Royal letter and envoys several times. Jurchens surrendered to Joseon, But on the other hand, they invaded Joseon, using pressure to Joseon from Ming. In the end, Sejo sent Shin Sook-ju to conquer Jurchens though an envoy from Ming stayed in Moryeonwi(毛憐衛). Then times, the commander for the conquest was Shin Sook-ju and the vice-commander was Hong Yoon-seong. There were 8,300 soldiers in total composed of Four direction army. They started in Jongseong, suddenly attacked the area where Jurchens lived. It took only 4 days from the start of the conquest till return.
Joseon army recorded military achievements better than existing three conquests through 'Gyeongjin Bukjeong'. That is, killed 430 Jurchens, burned about 900 houses including property, about 1,000 horses including cow live or dead. The reasons of success of Gyeongjin Bukjeong' are as follows.
First, Sejo's strong willingness to conquer was shown to the generals by appointing Shin Sook-ju and Hong Yoon-seong as commander and vice-commander respectively. Second, The conquest to Jurchens was the first one by a commander with the position of civil minister. The organization of such personnel made it possible to control military ministers who insisted hasty conquest for the purpose of their performance. Therefore, thorough preparation was possible, making deep study on Jurchens area. Third, Soldiers of Joseon made sudden attack with all forces for short period and then, withdrew. Finally, Sejo showed himself though not participating in the conquest, by sending Hong Yoon-seong with quality and skill as military man. And Sejo led performance of conquest in the aspects of literary and military by supplementing Shin Sook-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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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임호민 ( Lim Ho-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18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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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전기 강릉지방에 입향한 안동권씨 추밀공파 가문이 조선후기까지 명가로 그 지속성을 유지해 온 배경과 과정, 대내외적인 사회적 지위 유지의 지속성, 재도약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입향 초기 안동권씨 추밀공파는 통혼을 통해 가문을 성장시켰고, 이후 권연 등의 출사는 가문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가문의 지역적 기반은 지역 내 명문가와의 통혼 확대와 출사, 그리고 향촌사회의 활약을 통해 지속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통혼과 같은 족적 토대는 유지하였으나 과거 합격자 배출의 단절은 가문의 위상을 정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체되었던 명문가가 재도약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권계학과 그의 아들 권한위의 출사, 그리고 그의 아들 권한옥과 손자 권도와 권박의 사마시 입격과 출사였다.
특히 관직에서 퇴임한 후 낙향한 권계학은 족적 기반만 유지하던 가문의 침체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권계학과 권한위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청렴결백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당시 강릉 향촌사회의 향론은 율곡-우암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론 강조되었던 조선후기 청풍당 가문 종인들은 노론 성향의 기조로 보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실리적인 측면도 강조하였다.


This paper identifie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Andong Kwon family, who entered Gangneu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aintaining its continuity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the persistence of maintaining internal and external social status,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re-emergence, and the role of the community.
In the early days of entering the village, Andong Kwon's Privy Gongpa grew his family through marriage, and after that, the employment of Kwon Yeon and others served as an opportunity to grow the family to the next level.
Since then, the regional foundation of the family has maintained continuity through the expansion of marriage with prestigious families in the region, employment, and the activities of the local community.
However, although it maintained the same foot foundation as Tong-hon, the disconnection of successful applicants in the past resulted in stagnating the status of the family.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background behind the re-emergence of the stagnant prestigious family was Kwon gye-hak and his son Kwon han-wi, and his sons Kwon han-ok, Kwon do, and Kwon bak's entry into Samashi. In particular, Kwon gye-hak, who returned to his hometown after leaving offic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overcoming the stagnation of the family, which maintained only the foundation of the clan. Kwon gye-hak and Kwon han-wi, were recognized as clean bureaucrats on the central political stage. At that time, the local theory of Gangneung Hyangchon society emphasized the Neo-Confucian order leading to Yulgok-Uam.
However, the members of the Cheongpungdang fami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emphasized this Neo-Confucian justification, seemed to have a Noron tendency, but also emphasized practical aspects in practical ma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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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원정식 ( Won Jeong-s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2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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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언에서 종족 관련 핵심 용어가 사용되는 사례가 적어도 62편으로 전체 120편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명대 종족 인식의 확산과 그 필요가 반영된 결과였다.
삼언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필멸의 세계와 불멸의 세계라는 공간을 설정하고, 필멸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인과율을 통해 불멸의 세계와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조상 - 나 - 후손'으로 이어지는 종족의 세계와 유사했다.
삼언에서는 영생불사 및 불멸의 세계에서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이에 도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공언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福'의 획득을 강조했다. '복' 가운데는 '자손 많은 것'을 비롯하여 관직, 재산, 건강과 장수 등이 있고 그 복을 얻는 최선책 역시, 수행, 선행, 공덕 쌓기였는데, 이들은 모두 종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삼언에서 종족은 필멸의 세계와 불멸의 세계를 결합한 조직이자 믿음의 세계였다. 조종은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보우하고, 후손은 조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복을 받고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제사를 지내주는 후손이 없다면 죽어서도 제사를 받지 못하는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에 후손의 확보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그 대책으로 첩 들이기, 데릴사위 삼기, 양자 들이기, 외손자 나누어 갖기 등을 소설 형식으로 제시했다. 또 선영은 조상의 유해를 보존하고 정기적으로 조상을 추념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사당은 조상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두고 일상적으로 조상과 같이 사는 공간으로, 종족을 영속시키는 물질적 기초였다. 이에 삼언에서는 선영과 사당에 대한 안정적 유지가 조상을 지키고 종족을 영속시키는 현안이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덤을 새로운 종족 형성의 출발점이자 상징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삼언의 작가들은 이러한 종족 인식과 종족 이야기를 120편 곳곳에 배치하여 이야기를 흥미 있게 만들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The ideology and lifestyle of the Clans permeated the Ming Dynasty society like air. Political instability and socioeconomic liquidity increased in the Ming Dynasty. Securing the social safety net has become the most important task for everyone. The state power sought to ease restrictions on the people's right to perform ancestral rites and expand clan ethics to the foundational society. Various clans were activated, ranging from the Emperor's or gentry's clans to the common people's clans below. There were at least 62 cases in which key terms related to clan were used in Sanyan, accounting for more than half of the total 120. This was the result of reflecting the spread of the ideas of clans and its need.
Looking at Sanyan as a whole, the space of the mortal world and the immortal world were set. The lives of people living in the mortal world are ultimately combined with the immortal world through causality. This composition was similar to the world of clans connected by 'ancestors - I - descendants'.
In Sanyan, life in a world of eternal immortality and immortality was set as the the highest value. However, Sanyan declared that it was virtually impossible to reach this. Sanyan emphasize the realistically possible acquisition of 'Fu(福)'. Among the 'Fu(福)', there are "many descendants", government posts, property, health, and longevity. These were all key elements of forming and maintaining a clan. The best way to achieve 'Fu(福)' was also to practice, do good deeds, and build merit. These were all in accordance with causality and were important virtues for clan formation and development. From the first story of Sanyan, in return for his good deeds, it cited cases of passing the test and promotion, becoming rich, acquiring offspring, and the couple's happily aging together, and presented cases of death, disgrace, and extinction for evil deeds.
In Sanyan, the clans was an organization and a world of faith that combined the mortal world and the immortal world. People believed that when their ancestors died, they became ancestors and protected their descendants. People believed that descendants could be blessed and protected by continuously performing ancestral rites. People believed that without descendants who performed ancestral rites, they would become wandering ghosts who could not receive ancestral rites even when they died. As a result, securing descendants became the most important task for everyone. As a countermeasure against this, Sanyan presented the form of a novel, such as making a concubine, making a son-in-law, making an adopted son-in-law, and sharing a grandchild.
The tomb was a space where the remains of ancestors could be preserved and regularly remembered. A shrine is a space where ancestors' portraits or memorial tablets are enshrined and they live together on a daily basis. These were all material bases that perpetuated the clan. Sanyan clearly stated that maintaining these stable is a pending issue that protects ancestors and perpetuates the clan. Even in Sanyan, the tomb was described as a symbol of forming a new clan.
The writers of Sanyan placed these ideas of clan and stories of clan in the composition of many of the 120 novels. Through this, the story development was urgent and interested. In addition, they tried to fulfill their will to "awake the world" through this.

KCI등재

저자 : 金斗鉉 ( Kim Du-hy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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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안휘성 북부에 위치한 봉양부 사례를 중심으로, 水利開發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水利問題를 水運水利와 農田水利로 구분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農田水利라는 관점에서 淮河中流域의 鳳陽府에서 시행한 水利事業의 목적과 그 양상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鳳陽府는 지리적 특성은 강수량이 부족한 지역과 多雨地域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淮河가 관류하고 있고, 강수량이 적은 지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수재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즉 거리상 황하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하의 유수량을 줄여주는(減水河) 각 支流와 淮河가 합류하는 지역에 위치했다. 따라서 황하가 운반하는 대량의 토사가 하상에 침적하여, 河道가 지속적으로 막히는('淤塞') 지역이었다. 河道의 '막힘'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 결과 배수문제를 야기하여 增水期나 暴雨가 내리는 시기에 쉽게 범람하여 빈번한 수재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빈번한 자연재해의 발생은 이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량의 토사 퇴적층이 형성됨으로써 토질이 척박해지고, 이것이 빈번한 수재 발생과 맞물리면서 일반 농민들의 농업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했으며, 결국 생계가 막연해진 이들은 외지로 끊임없이 유망할 수밖에 없는 생존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수리사업의 중점은 자연스럽게 재해예방이라는 목적에 치중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지역에서처럼 공적 혹은 사적인 수리시설의 축조를 통해 圍田·圩田 등을 개발하는 현상도 존재했지만, 잦은 토사의 퇴적과 이로 인한 河道의 소멸이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與水爭地'현상은 지배적인 수리개발 양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배수로의 확보와 이를 보호할 제방의 수축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함풍 5년(1855) 황하의 河道가 북쪽으로 변경되면서 배수로 확보 문제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말 국가재정난의 심화로 인해 수리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봉양부 지역의 수리개발의 양상은 지형적 특성의 영향으로 인해 재해예방 목적이 1차적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여타 지역의 수리개발과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meaning of water conservancy development, focusing on the case of the Fengyang Prefecture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Anhui Province. In general, water conservancy is divided into Water transport(水運水利) and Farmland irrigation(農田水利), but in this paper, the purpose and aspects of the Water conservancy business implemented by the Fengyang Prefecture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Huai River Middle Basin have been looked at.
Fengyang Prefecture is geographically characterized by a boundary line that separates less rain region(過雨地域) and raining region(多雨地域). Although it belongs to the less rain(過雨) area, it was an area where floods occurred frequently. In other words, despite being quite far from the Yellow River in terms of distance, it was located at the confluence of each tributary streams(支流) and Huai River(淮河), which reduced the flow of the Yellow River. Therefore, it was an area where a large amount of soil carried by the Yellow River was deposited on the river bed and the waterway was continuously blocked ('淤塞'). The 'blockage(淤塞)' of the waterway obstructed the flow of water, and as a result, it caused drainage problems, and it easily overflowed at the time of flooding, which became a factor causing frequent floods.
Frequent natural disasters have had a profound impact on this community. As a large amount of sedimentary layers are formed, the soil becomes barren, and this, coupled with the frequent floods, caused general farmers to lose their enthusiasm for agriculture. In the end, these people, whose livelihoods became vague, created an environment for survival in which they could not help but continue to be promising.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focus of the water conservancy project in this area was naturally focused on the purpose of disaster prevention. That is, as in other regions, there was a phenomenon of developing Weitian(圍田) and Wutian(圩田) through the construction of public or private repair facilities, but due to the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frequent sedimentation of soil and the disappearance of waterways, the phenomenon of '與水爭地' does not seem to have been the dominant hydraulic development pattern. It is thought that the most urgent task in this area was securing a drainage canal and shrinking the embankment to protect it. In particular,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the issue of securing drainage channels was highlighted as an important national task in the 5th year of Xianfeng (1855) as the Yellow River's waterway was changed to the north. However, due to the deepening of the national financial crisis in the late Qing Dynasty, the water conservancy project did not proceed smoothly, so the intended purpose could not be achieved.
Summarizing the above facts, in the aspect of hydraulic development in the Fengyang Prefecture, it can be said that the primary purpose was to prevent disasters due to the influence of the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This aspect can be seen as showing the difference from the hydraulic development in other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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