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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WEON SAHAK

  • : 강원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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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6-3060
  • : 2713-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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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5)~37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322
강원사학
37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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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립에서 공존의 시대로 -13세기 강원지역과 몽골제국의 만남을 중심으로-

저자 : 윤은숙 ( Yoon¸ Eun-soo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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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강원지역은 몽골이 공략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기에 몽골의 4차 침입까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南宋 공략을 위한 준비 성격이 강했던 몽골의 5차 침입은 전쟁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5차 침입의 결과 東州산성과 鳳儀산성 등이 함락되었고 春州道로 연결되는 高麗의 동·서 방어 전선이 무너졌다. 다만, 기마병 중심의 몽골군이 접근하기조차 불가능한 절벽에 가까운 鴒原산성과 寒溪산성 등은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한편, 남송원정에 앞서 고려와 남송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했던 뭉케는 고려왕의 '出陸親朝' 요구를 1256년부터는 '태자 친조'로 항복의 조건을 완화했고, 1259년에 고려가 이를 수용해 태자 王倎을 친조시키면서 30여 년간 지속된 양국의 대립이 종식될 수 있었다.
강원지역은 여·원 관계를 공존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91년 鄕貢進士 元沖甲이 雉嶽城 전투에서 카단軍을 격퇴한 사건을 계기로 카단군을 가볍고 보는 마음이 생겼다. 이후 고려군의 맹추격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연기현 전투 패배 이후 카단군은 전력을 상실한 채 오합지졸로 흩어졌다가 카단의 자살로 반란이 종결되었다. 카단 반란이 고려의 도움으로 종결되자 쿠빌라이는 이례적으로 고려에게 진휼미를 보내고, 포로들에 대한 推刷는 물론이고 체릭 테무르가 훔쳐간 소 값까지 돌려줄 정도로 후대하였다. 나아가 충렬왕을 征東行省左丞相에 임명해 실제적 권한을 주었으며 金印과 공신 칭호도 하사했고, 이를 기반으로 충선왕은 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고려왕은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심에서 그 나름의 위상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It was difficult for Mongol to attack the Gangwon Region consisting of rugged mountainous topography crossing the Taebaek Mountains. Thus, the region was relatively less damaged until the 4th Mongol Invasion. However, the 5th Mongol Invasion strongly characterized by the preparation for an attack on South Song greatly changed the aspects of the war. As a result of the 5th Invasion, Dongju Mountain Fortress and Bongeui Mountain Fortress were fallen, and the East and West Defense Front Line of Goryeo connected to Chunjudo. And yet, Ryeongwon Mountain Fortress and Hangye Mountain Fortress which were like cliffs impossible for Mongol Army centered around cavalry even to approach were able to stop the invasion of the Mongol Army. In the meantime, Mungke who would severe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South Song before his expedition to South Song eased the condition of surrender from 'Chulryuk Chinjo (landing and attending at the Royal Court)' requested by the King of Goryeo to 'Taeja Chinjo (royal prince's attendance at the Royal Court)' from 1256, and Goryeo accepted this in 1259 and let Royal Prince Wang Jeon attend at the Mongolian Royal Court. That could end the antagonism between the two countries, which had continued for about 30 years.
The Gangwon Reg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hanging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Yuan to co-existence. Taking Hyanggongjinsa Won Chung-Gap's repulse of Qadan's Army at the Battle of Chiak Castle as a momentum, the Qadan's Army came to be taken lightly. Later, the Goryeo Army led the battle to victory with fierce traces, and after defeat at the Battle of Yeongi-Hyeon, Qadan's Army lost fighting power and scattered disorderly. The rebellion ended with Qadan's suicide. As the Rebellion of Qadan ended with the help of Goryeo, Khubilai exceptionally sent relief rice to Goryeo and treated it hospitably to the extent that he even returned the price of the cows stolen by Cherik Temur in addition to sending the prisoners back to their home. Further, he gave practical authority to King Chungryeol by assigning him to Jeongdong Haengsang Jwaseungsang (Left Prime Minister of Cheng Tung) and gave him a gold seal and the title of a vassal of merit. Therefore, the status of the King of Goryeo was greatly improved at the Royal of the Empire, and King Chungseon was able to intervene deeply in the politics of the Empire to the extent that he contributed to Mujong Qaishian's enthron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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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30년대 강릉지방 향약시행의 배경 - 하시동 촌약村約을 중심으로 -

저자 : 임호민 ( Im¸ Ho-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4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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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04년 12월 작성된 촌약계입조村約契立條, 1929년 촌약계입조에 추가된 촌약계 입약문, 그리고 1933년 1월과 8월 각각 작성된 정동면죽헌리향약규칙丁洞面竹軒里鄕約規則과 강동면 하시동리 『계록契錄』 자료를 검토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역할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나 세력들에 의해 타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된 향촌사회 조직 재결성 및 운영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연구 목적은 20세기 전반기 향약 시행의 배경, 목적 그리고 향약의 운영상의 변질된 모습을 고찰하는 것이다.
1904년 시행된 『촌약계입조』는 19세기 중반에 시행되었던 향약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 다만 입약의 규약이 더 세분화되었던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3년부터 작성된 『계록』 자료에 의하면, 1930년대 이후 향약 또는 향약계는 향약 진흥회라는 단체의 조직을 통해 기존에 자치적으로 시행하던 향약 조직을 흡수·통합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이르러 전통적인 향약 체계는 변질 및 일부 소멸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향약진흥회 결성을 강요하면서 지방 사회에 대한 통제 또는 장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계록』에 수록된 하시동리향약계 절목의 세부내용이나 추진상황을 보면, 풍속의 교정과 교화, 미풍양속의 장려와는 무관한 노동력의 동원과 애국 및 국방 헌금의 납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는 강연회 개최 등이었다. 특히 1930년대 한국사회에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과 그 세력이 확산되었는데, 조선총독부는 향약진흥회 조직을 통해 그러한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ChonYakgyeIpjo村約契立條 written in December 1904, the ChonYakgyeIpjo added to the ChonYakgyeIpyakmon村約契立約文 in 1929, and the Gyerok契錄 of the Hashidongri in Gangdongmyeon and the Hyangyak rule鄕約規則 of Jeongdongmyeon Jukheonri made in January and August 1933, respectively.
These data are related to the formation and operation of local community organizations implemented to achieve other purposes by people or forces who had a certain role and influence in the Korean Empire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background, purpose, and the degeneration of Hyangyak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ChonYakgyeIpjo, which was implemented in 1904, does not show a significant difference from the HyangYak which was implemented in the mid-19th century, but if it is a difference, it can be said that the rules of HyangYak was further subdivided.
However, according to the Gyerok written from 1933, since the 1930s, Hyangyak has been operated through an organization called Hyangyak -Promotion -Association鄕約振興會. The Hyangyak organization, which was previously self-governing, was promoted in the form of absorption and integration into the Hyangyak Promotion Association. Therefore, by this time, the traditional HyangYak was destroyed.
The Chosun Governor-General attempted to take control of the local society by forcing the formation of the Hyangyak-Promotion-Association under the name of the Rural Development Movement. In particular, the so-called socialist movement spread in the Korean society in the 1930s as an independence movement, but the Chosun Governor-General tried to prevent the spread of such forces through the organization of the Hyangyak-Promotion-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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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5전쟁 시 중공군의 강원지역 전투참전과 세계사적 의미

저자 : 김동정 ( Kim¸ Dong-jeong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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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시 중공군은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외에 자국의 안전과 보호, 그리고 국내반동세력을 제거하고 모택동의 혁명적 신념과 중공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개입을 결정했다. 특히 다섯 차례 공세 중에 3차부터는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국제 전쟁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고 군비경쟁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확대 및 군사화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미국과 중공 간의 우호가 회복될 어떠한 희망도 무기한 사라지게 되었다. 동시에 북한과 중공 양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형제적 혈맹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중국이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서방 군대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제공했고 한반도에서 중공의 성공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얻게 해주었다. 또한 중공이 6·25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소련의 전반적인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실익을 챙긴 중공이라 하더라도 강원지역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6·25전쟁 중 강원지역은 양측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더욱이 강원지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전체제의 희생양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대 중공을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산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어쩌면 중공의 강원지역 참전의 세계사적 의미가 가장 큰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During the Korean War, the Chinese military decided to intervene in the war as a means of helping North Korea, removing its own safety and protection, domestic reactionary forces, and enhancing Motaek-dong's revolutionary beliefs and China's international status. In particular, out of the five attacks, the battle took place around the Gangwon area from the third round. Accordingly, the Chinese military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from October 25, 1950 to July 27, 1953, marking an important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war, leading to arms competition and expansion and militarization of the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In addition, any hope of restoring friendship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has disappeared indefinitely. At the same time, North Korea and China developed into a brotherly blood alliance relationship in the wake of the Korean War.
The Korean War provided China with a golden opportunity to successfully balance with Western troops on the battlefield, and the success of heavy corpor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earned it a position as a powerhous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n addition, China succeeded in receiving overall support from the Soviet Union by participating in the Korean War.
Even the hollow, which took advantage of this, could not escape the framework of the Gangwon region. During the Korean War, the Gangwon region was a strategically important region for both sides. Moreover, it is true that the Gangwon region exists as a product of the socialist camp representing the capitalist public centered on the United States as a victim of the Cold War system at that time and now. It is believed that this may be the biggest meaning of the world history of the participation of the heavy industry in Gangwon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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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양동마을 경주손씨(慶州孫氏) 가문(家門)의 가풍(家風)과 계승

저자 : 차장섭 ( Cha¸ Jang-sup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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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風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문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말한다. 조선시대 가문은 가풍의 확고히 정립을 통해서 세대가 교체되어도 그들만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유지 발전시켰다. 특히 家風은 家學을 통해 전승되었다. 家學은 학문의 전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지만 가풍은 학문전수와 함께 취미와 경세론, 행동거지 등 생활 양식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는 淸德과 忠節을 가풍으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淸德은 德으로 淸白을 실천하는 것이다. 양동마을 경주손씨 가문의 德에 바탕을 둔 淸白의 가풍은 손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러 淸要職을 역임하면서 청백을 몸소 실천하여 관료사회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맑고 덕스러운 삶의 자세는 '淸名'으로서 당대의 호평을 받았으며, 가풍으로서 확립되어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
淸德의 家風은 아들 손소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가문의 전통인 청덕을 계승하여 실천하였다. 손중돈은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청렴한 자세로 참된 牧民의 道를 실천하였다. 특히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을 때는 상주 고을의 백성들은 선정비를 건립하고, 丹密縣에 生祠堂을 건립하였으며, 마침내 청백리의 명부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손덕승이 지방관으로 녹봉과 창고의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휼하고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니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찬양하여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忠節은 나라에 충성하고 국왕에게 절개를 지키는 것이다. 충절이 양동마을 경주손씨의 家風이 된 것은 孫昭가 공신으로 책봉되면서부터이다. 손소의 공신책봉으로 양동마을의 이름이 楊左洞에서 良佐洞으로 바뀌면서 손소 이후 국가에 대한 忠節은 양동마을 경주손씨의 家風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양동마을 경주손씨의 忠節 家風은 국가의 위기에 발휘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이 일어나자 경주손씨 가문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진왜란에는 손소의 玄孫인 孫曄, 孫時, 孫魯, 孫宗賀, 孫魯香 등이 떨쳐 일어나 대대적인 의병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손중돈의 현손 孫宗老가 의병으로 참여하여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양동마을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旌忠閣이 건립되어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흔들리게 되자 양동마을 경주손씨의 가풍은 독립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성리학적인 학문을 계승하면서 국가가 일제에 의해 위기에 봉착하자 국난극복을 위해 孫晉衡, 孫厚翼 등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忠節의 家風을 계승하였다.


A family tradition(家風) refers to a specific lifestyle that has been hand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within a family. During the Joseon Dynasty, family clans maintained their specific lifestyles across generations through establishing their strong family tradition. Family traditions are similar to family learning, whose chief purpose was to hand down knowledge but transcend it by including other elements such as hobbies, administration theory, proper manners, and behaviors.
The Gyeongju Son Family of Yangdong Village in Gyeongju is a fine example of family tradition transfer. The core value of the family tradition has been on cheongduck(淸德; family virtues through a life of integrity and righteousness). This virtue of that family started with Son Sa-Seong, who set an example of incorruptible government employees while he served as high-ranking officers in several important government posts. His dignified and virtuous attitude and lifestyle, which others highly praised and revered, were set as the family tradition and handed down to posterity.
The family tradition of cheongduck was carried out by Son Sa-Seong's son, Son So, who served as an official in a local government. Son Jung-don, Son So's son, also practiced cheongduck virtue while serving as a local government official. When he served as the regional governor of Sangju, the town's people erected a monument and a pantheon commemoration of his virtue. His name was finally registered in the list of the incorruptible government employee. Son Duk-Seung from the Gyeongju Son family, who also served as an official of a local government, spent his salary and distributed reserved grain for the starved poor people of the town he resided. In return, the townspeople erected a monument in his honor.
Another core virtue of the Gyeongju Son family is loyalty, which means keeping fidelity to the King. This family virtue began with Son So's installation as the King's meritorious subject. With his installation, Yangdong Village's name was changed from 楊左洞 to 良佐洞.
The virtue of loyalty in the Gyeongju Son family was well exercised when the nation was in jeopardy. The Gyeongju Son family actively participated in civilian army activities in both wars of Imjinwaeran and Byeongjahoran. Dur ing Imjinwaeran, Son So's great-great-grandchildren Son Hyeop, Son Si, Son Noh, Son Jong-Ha, and Son No-Hyang joined the civilian army to fight against the invading Japanese army. Upon Byeongjahoran Son Jung-don's great-greatgrandchildren died a glorious death on the battlefield against Cheong Dynasty army. A monument was established in his honor in Yangdong Village.
The loyalty in the Gyeongju Son family continued as liberation and independence efforts when our country was invaded and colonized by Japan. Son Jin-Hyeong and Son Hu-Ik from the Gyeongju Son family, who used to devote themselves to the study of Neo-Confucianism, succeeded to the Gyeongju Son family's virtue of loyalty, instantly committing themselves to the causes of the nation's independence movement when the war brok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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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릉 오금집의 오금법(안쏠림) 고찰

저자 : 최장순 ( Choi¸ Jang-s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3-132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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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건축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가구재 가운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부재인 기둥에는 오금법과 귀솟음, 배흘림, 민흘림 등과 같은 기둥 치목기법(治木技法)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들 치목기법의 하나인 오금법은 기둥을 건물 안쪽으로 쏠리도록 기울여 세우는 독특한 기법으로 궁궐의 주요 정전이나 사찰의 주불전과 같은 큰 건물에서 오금법을 적용하여 세운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강릉오금집과 같이 규모가 작은 일반 민가에서 오금법을 적용한 사례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이에 관한 연구도 규모가 큰 주요 건물의 오금법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 관점에서 간혹 있었으나, 아직 구체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규모가 큰 건물에서도 오금법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데 하물며 강릉오금집과 같이 규모가 작은 민가의 오금법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다고 하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강릉 오금집과 같이 규모가 작은 민가에서 적용된 오금법은 자칫 소홀히 다루면 잘못을 저질러 옛 기법을 말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간혹 듣는 이야기로 현장에서 전통 건축 수리에 종사하는 기술자나 기능자들이 이러한 기법의 내용을 잘 몰라 오금의 기법을 변형이나 애초의 잘못으로 판단하고 수리 때 원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기둥을 수직으로 똑바로 세우는 예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문화재 수리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강릉오금집은 민가에 적용된 오금법을 파악하기 위한 적합한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연구 의의도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강릉 오금집에서의 오금의 개념과 오금법에 의한 기둥 세우기를 살펴보고, 오금 처리기법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제시하였다.


Among the various wooden structure materials used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pillars, which are important members of the standard, have been created with columnar trimming techniques, such as the Ogeumbeop, the gwisoseum, baeheulrim, and minheulrim method.
One of these techniques dealing with wood materials, the Ogeumbeop, is a unique technique in which the pillars are tilted toward the inside of the building. It is easy to find examples of large buildings such as main building of palaces or main building of temples in temples, which were built by applying the Ogeumbeop. But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a case of applying the Ogeumbeop in a traditional small private house such as Gangneung Ogeumjip.
Research on this field has sometimes been done from a general point of view on the Ogeumbeop of large-scale major buildings. But no detailed research studies have been made yet. It is not an exaggeration to say that even in such a large building, there is not enough research on the Ogeumbeop, and there is no research on the Ogeumbeop of small private houses such as Gangneung Ogeumjip.
Particularly, the Ogeumbeop applied in small private houses such as Gangneung Ogeumjip, if neglected, leads to a mistake and annihilation of the old technique.
Sometimes craftsmen who are engaged in repairing traditional buildings in the field do not know the details of these techniques, so they judge the technique of the Ogeumbeop as a transformation or an original fault, and ignore the original form when repairing, and there is an example of arbitrarily erecting the column vertically. It can be said that such a thing is very dangerous and contradicts the fundamental ideology of repairing cultural properties.
Therefore, Gangneung Ogeumjip from this research view point, can be said to be an appropriate research subject to understand the Ogeumbeop applied to private houses, and it was judged that there was also the significance of the research accordingly. In this research, the concept of Ogeum and the erection of pillars by the Ogeumbeop, and the results of the study were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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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삼척(三陟) 봉황산(鳳凰山) 미륵불(彌勒佛)의 특징(特徵)과 조성(造成) 배경(背景)

저자 : 진정환 ( Jin Joung-hwa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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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三陟 鳳凰山 彌勒佛과 불상과의 조형적 상관성, 불교 조형물로서 삼척봉황산 미륵불의 조성 배경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특히 삼척지역 불교조각 양상을 검토하여, 봉황산 미륵불의 조형적 원류가 같은 시기 같은 지역 불교조각에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아울러 조성 배경 관련, '殺氣'의 정체가 무엇이며, 왜 불교미술품으로 그 살기를 막으려고 했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결론적으로 삼척 봉황산 석상은 삼척지역의 여러 불상, 예를 들면 삼화사, 천은사, 신흥사, 영은사 불상 등을 모방·변형한 것이다. 그러나 모방의 한계와 불상 조각에 능숙하지 않은 집단이 조성을 주도하면서 유기적 조화를 살펴볼 수 없고 조각 수법이 뒤떨어진다. 능묘 석인상의 얼굴과 봉황산 미륵불의 얼굴 표현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삼척 및 關東 일대에서 활동하며 유교조각을 담당했던 장인들이 봉황산 미륵불 조성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규헌이 봉황산 정상에 석상을 조성한 배경과 이유는 고려시대 확립된 '비보사탑설'의 영향이 크며 당시 빈번했던 화재를 예방하고 삼척부민들의 삶을 위협했던 災異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20여 년 후 삼척부민들은 彌勒下生의 염원과 함께 토착 신앙인 미르(용)신앙의 영향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미륵불로 지칭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척 봉황산 미륵불은 비록 19세기 조성된 것이고 예술성이 뚜렷하지는 않으나, 지역사·미술사·불교사·민속학적으로 차별화되는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구체적으로 봉황산 미륵불은 적극적으로 고을의 안녕을 염원하고 빈번했던 재이를 대처하기 위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통치행위의 한 사례로써 조선 후기 지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미술사적으로도 조성 시기와 이유가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조각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조각과 유교조각의 특징과 요소가 융합된 조각상이라는 점에서 조선 말 造像 활동 관련 장인 수급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불교사적으로도 조선 후기 불교가 삼척지역의 주민들에 끼친 영향은 물론 彌勒下生信仰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와 의의가 있다. 또한 '풍수지리설'이 지방통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 후 확립된 '비보사탑설'이 조선 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관련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착 신앙인 미르신앙과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어, 민속학적으로도 매우 큰 가치와 의의가 있다.


The main discussion of this study focuses on the origins of the Maitreya Buddha Statues of Bonghwangsan Mountain in Samcheok and the aesthetic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ues and other works of mainstream Buddhist sculpture in Korea. The discussion concludes that the origin of the statues is closely connected with other Buddhist sculptures made in and around Samcheok during the same period. The discussion also deals with the meaning of "the murderous energy" which led to the origin of the statues, and the reason why the creators of the statues decided to ward off evil energy with Buddhist images.
The main conclusion of the discussion is that the stone statues of Bonghwangsan Mountain in Samcheok were inspired by the Buddhist images enshrined in local Buddhist temples such as Samhwasa, Cheoneunsa, Sinheungsa and Yeongeunsa. Unfortunately, the carvers of these statues were unable to copy the originals faithfully and achieve their organic harmony due to a lack of carving skills and experience as well as knowledge of Buddhist sculpture. Considering the remarkable similarity between the facial expressions of the stone guardians standing at the royal tombs of Joseon and those of the Maitreya statues of Bonghwangsan Mountain, the latter could have been made by artisans of Samcheok and Gwandong(the East Coast of Gangwon-do Province) area.
As for the background to the stone images,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Yi Gyu-heon, influenced by the Pungsu (or Feng Shui) principles relating to "guardian temples and pagodas" established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placed them on the summit of Bonghwangsan Mountain in the belief that they would help prevent fire and expel the evil forces that were threatening the lives of the inhabitants of Samcheok-bu. The statues were moved to their current location some twenty years later according to the aspirations of the people of Samcheok to reach the utopian world ruled by Maitreya Buddha and the traditional folk belief in the dragon as a supreme power.
Although they were created relatively recently, in the nineteenth century, and lack aesthetic merit, the Maitreya Statues of Bonghwangsan Mountain in Samcheok hold significant value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local community, art, Buddhism and folklore. Specifically, the statues are directly connected with the efforts of a local administrative head to protect his town against disasters caused by evil forces, and thus provide important clues for studies on the area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statues are also regarded as an important tangible source for research on Korean Buddhist sculpture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combination of characteristic features of Buddhist and Confucian sculptures also makes the statues a useful resource for studies on the supply and demand of artisans who created stone sculptural work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The statues are also regarded as a valuable source of knowledge regarding the influence of Buddhism on the lives of the inhabitants of Samcheok during late Joseon, and the tradition of Maitreya worship that they preserved in particular. They also constitute tangible evidence to support the theory that the principles of Pungsu were exploited by the ruling class of Joseon in order to govern the regions more effectively and that the principle of using a guardian temple or pagoda to ward off evil forces remained influential from its emergence in the Goryeo period to the late Joseon period. Finally, the statues are also important sources for folklore studies, particularly the tradition of dragon worship among the common people of Samch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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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무성서원지의 체제와 특징 -1884년본을 중심으로-

저자 : 권이선 ( Kwon¸ E-sun ) , 박정민 ( Park¸ Jung-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8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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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은 신라 말에 태산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의 유풍을 간직하고, 대원군의 훼철에도 남아 전라도의 道院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최익현을 중심으로 태인유림들이 일어난 丙午倡義의 중심지였고, 이후에도 중요 역할을 수행하여 2019년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상징성이 있지만 무성서원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가장 적은 자료를 소장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4년에 간행한『무성서원원지』는 이들 서원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대뿐만 아니라 1615년에 설립된 태산서원의 자료, 사액을 받을 때의 기사 등을 기재하여 높은 사료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원래 무성서원은 원지가 없었는데 여러 정황상 1868년 서원 철폐 이후 復戶·保奴의 복구와 관련된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그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1884년 판 원지는 상·하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상권은 9개 내용과 31개의 하위 항목, 하권은 8개의 내용과 29개의 하위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지의 특징은 ①무성서원과 최치원의 관련성 강조, ②무성서원이 철폐된 후 폐지된 복호와 보노의 복구 과정, ③무성서원의 연혁을 기재한 갑을기사, ④무성서원의 강습례, ⑤1872년에 많은 책을 기증한 안재호 장서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무성서원원지』는 무성서원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Museong Seowon maintains traditions handed down by Choi Chiwon, who was a viceroy of the Taesan region during the Shilla Dynasty era. Museong Seowon served as a provincial lecture hall in Jeollanamdo Province despite an order of demolition issued by Regent Heungseon Daewongun, and was a center for the Byeongochangeui (丙午倡義), an uprising by Taein Confucian scholars led by Choi Ikhyeon. Museong Seowon has continued to play significant roles in Korean history, and was designated a UNESCO cultural heritage site in 2019 as one of Korea's notable seowon. Despite its symbolic significance, of the nine seowon designated as UNESCO cultural heritage sites, Museong Seowon has the fewest historical records. Notwithstanding, Museongseowonwonji is one of the earliest seowonji publications, as it was published in 1884. The book contains records, including material on Taesan Seowon, which was built in 1615, and articles written when the name of the seowon was given by the king. Hence, Museongseowonwonji has immense historical value.
Initially, Museong Seowon did not have a seowon publication, and the need probably arose after the arduous restoration of Bokho (復戶) and Bono (保奴) after the seowon closed down in 1868. The 1884 edition of Museongseowonwonji comprises two volumes. The first volume has nine themes and 31 subthemes, and the second volume has eight themes and 29 subthemes. Some notable characteristics of the Museong Seowon publication include: (i) an emphasis on the relation between Museong Seowon and Choi Chiwon; (ii) a course on the restoring of Bokho and Bono, which had been abolished since the 1868 closing of Museong Seowon; (iii) gapeulgisa that documented the history of Museong Seowon, (iv) the ritual of lectures at Museong Seowon; and (v) notes on books by Ahn Jaeho, who donated a large volume of books to the seowon in 1872.
Museongseowonwonji is a repository of valuable historical records that bridge historical gaps regarding Museong Seowon, and its utility is multiface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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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식민지기 여성 고등교육의 지향점으로서 교사 양성 -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정인 ( Kim¸ Jeong-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7-21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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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여성 고등교육은 식민지기에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약 28년간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대학과와 이화여전에서 유일하게 여성 고등교육이 이뤄져 왔다.
이화여전은 문과·음악과·가사과·보육과 등을 중심으로 미국식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을 실시했다. 이와 같은 여성 고등교육은 현실적으로 개신교계 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를 양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화여전은 여성에게 한정된 직업으로 인식된 유치원 교사, 학교는 물론 선교 활동을 위해 필요한 음악 교사,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근대식으로 가르치는 가사 교사, 서구적 교양인으로서의 영어 교사를 키워냈다. 이화여전이 배출한 졸업생들은 전국의 유치원과 사립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약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극히 제한되었던 시절, 교사로 살아가던 이화여전 출신 졸업생들은 스스로를 여성 지식인으로 자부했고 또한 사회도 그렇게 대우했다. 또한 여성고등교육의 실현과 졸업생의 교사로의 진출은 여성들이 사회진출의 발판으로서 고등교육을 선택하는 계기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다.


Modern-style Higher education for Korean females were initiated by Protestant missionar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From the year 1910 through 1937, Higher education for women was only conducted at the Ewha Hakdang Collage and the Ewha Women's Special School - which we e schools aligned with the Protestant church- for 28 years. Status of the latter was unique, earning the school a reputation duly recognized by every school girl who aspired to be enrolled at the school. Ewha Women's Special School conducted American-styled Cultural education and Major education, through individual schools dedicated to respective majors such as Liberal arts, Music, Housework and Childcare, etc. Primary goal of this fashion of higher female education was to train teachers who could teach and serve in the future at Protestant schools.
Ewha Women's Special School was able to turn out countless teachers who would perform education in various areas, not only as kindergarten teachers (which had usually been females anyway) but also as Music teachers who could engage in missionary activities, Housework teachers who could teach students the role of modern-style females at home, and English teachers who could teach them the Western culture.
Graduates of the Ewha Women's Special School continued to teach at kindergartens and private women's high schools all around the country. At the time females were only able to cultivate limited careers in the society, but Ewha Women's Special School graduates who became teachers proudly considered themselves as female intellectuals, and the society too considered them as such. As time progressed, more females chose higher education, became teachers, and advanced their own careers in th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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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종족 이야기와 종족 형성 - 명대(明代) 복건(福建) 향산조씨(香山曹氏) 조사공(曹四公) 이야기를 중심으로 -

저자 : 원정식 ( Won¸ Jeong-s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5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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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확정하는 것은 종족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으며 영양현의 향산조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조에 대한 구전 자료의 문자화는 시조 이야기를 체계화하고 신빙성과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종족을 결집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핵심 과정이었는데, 거인 소신이 쓴 조사공전(1486년)과 용암현지의 열전에 수록된 조사공전(1558년)이 그 예다. 이에 향산조씨는 대부분의 종족들과 달리 족보 편찬 전에 최소한 시조 조사공에 대한 두 가지의 권위 있는 전기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종보 편찬이나 종족 결집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조사공 이야기가 문자화되고 지방지에 수록될 수 있었던 데는 15세기 중반 복건성을 비롯한 각 지역의 반란으로 지역질서가 재편되는 속에서 국가권력과 협력하고 종족화를 통한 자신들의 생존과 발전을 추구하려는 향산조씨 일족의 노력이 있었다. 조종례(20세)가 거인 소신에게 조사공(9세) 이야기의 문자화를 부탁한 것이나, 조사공이 용암현의 대표적인 선인이자 도사이며 인제라는 악습을 폐기시킨 인물임을 부각시켜 용암현지의 열전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 향산조씨는 종보 편찬 과정에 사실주의를 앞세우면서도 기초로 절충과 합의를 통해 '원조 조돈후, 시조 조사공'으로 시조문제를 정리하고, 지역사회의 불안정, 반란에 따른 주민들 간의 갈등, 국가질서와 민간질서의 충돌에 따른 혼란, 조씨 일족 내의 분란 등을 극복하고 종족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Deter mining the first ancestor was the most importantt ask in the process of forming a clan, and Xiangshan Cao clan was no exception. The textualization of oral data o n t he first ancestor was a key process of forming a clan and establishing identity by organizing first ancestor's stories and granting them credibility and authority.
The members of the Xiangshan Cao clan, who first published the first genealogy in 1588, worked on the textualization of their first ancestor story more than a hundred years ago. The result is the Suxin(蘇信)'s Caosigong biography(1486) and the Longyan-xianzhi(龍巖縣志)'s Caosigong biography(1558). Unlike most clans, Xiangshan Cao clan was able to efficiently compile their first genealogy and forming clan thanks to these two biographies.
The reason why the first ancestor story was written and included in local gazettes was that the Cao clan tried to cooperate with the national power and organize their own clan to pursue their survival and development amid the reorganization of regional order in the mid-15th century.
Since the mid-16th century, the awareness of Caosigong has spread and the instability of society around Xiangshan has heightened, leading to the development of a small clan into a large clan. The central figure was Cao wenye(曹文燁), who, along with the Xiangshan Cao clan, suppressed the rebellion of Suapu(蘇阿普), asked for the establishment of Ningyangxian(寧洋縣), and took the lead in building a county castle, a government office, etc.
In 1588, with the cooperation of his brothers and nephews, he compiled the first Xiangshan-Cao clan genealogy in which the Tang period figure, Cao Dunhou (曹惇厚), was the distant ancestor and the Song period figure, Cao sigong, was confirmed as the first ancestor in Xiangshan. This was a compromise based on the agreement of the members by accepting the friendship of the Chen(陳) clan, the influential clan of Zhangzhou(漳州), and the wishes of the clan for a long history of the clan. According to historicism and the principle that “Write down what you know, but leave what you don't know blank,” the genealogy from Cao Dunhou to Cao sigong was not included, and the records after Cao sigong also highlighted the genealogy's credibility by emptying unknown names, dates of birth, and burial sites, etc.
In addition, he actively accepted the clan code, rituals, national policies, and ideologies in his genealogy to resolve the instability of the community, conflicts between residents, conflicts between national and private orders, and conflicts within the Cao c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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