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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Jungbu Archaeological Society

  • : 중부고고학회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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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598-9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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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1호(2002)~21권2호(2022) |수록논문 수 : 222
고고학
21권2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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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저자 : 이후석 ( Yi Huseok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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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문화권의 차마구는 많은 기종들이 확인되는 것에 비해 그 조합이나 수량에는 중원이나 초원 문화권에 못미친다. 독자적인 것도 일부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초원계통이나 중원계통 차마구를 수용하였거나 이를 변형시켜 재지화한 것이 많다. 마차 또는 전차 문화를 수용하였지만, 이를 본격 사용하는 일상으로 연결하지 못하였다. 고조선 문화권의 엘리트는 차마구로 대표되는 마차(전차)의 상징성과 위세성을 차용하는 것에 주목하였으며, 일부 상위계층은 의례적인 행위들을 통해 그들만의 힘을 과시하며 공동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에 활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비파형동검문화권에서는 십이대영자문화를 중심으로 보이는데, 하가점상층문화와 교류하는 전기(기원전8~7세기경)에는 요서지역에서 확인되며, 옥황묘문화나 중원문화와 교류하는 후기(기원전 6~5세기경)에는 요중지역까지 확산되는 한편 차마구가 가장 발전한다. 이때에는 2·4마리의 말이 끄는 2륜 독주차로 복원되는 차마구가 주로 확인된다. 세형동검문화권에서는 북한이나 그 주변부를 중심으로 확인된다. 특히 위만조선에는 토착적인 차마구가 일부 확인되며, 서한·흉노와도 교류 관계가 형성된다. 낙랑 초기의 동병철검문화단계에는 재지화된 차마구와 서한계통 및 흉노계통 차마구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에는 1마리의 말이 끄는 2륜 쌍원차로 복원되는 차마구도 발전한다.


The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are often found in the Gojoseon cultural sphere, but in terms of combination and quantity, they cannot be compared with those found in the Zhongyuan and Steppe culture area. Some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were unique, but most were either from the Zhongyuan and Steppe style or modified for localization. However, Gojoseon elites focused on borrowing the symbolism and prestige of chariots represented by the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and it is thought that some of the upper classes manufactured and used them to display their authority or power in ceremonial marches.
The culture area of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is centered on the Shiertaiyingzi Culture; therefore, it only spread to the Liaoxi region in the 8th to 7th centuries BC, when they exchanged with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and to the Liaodong region in the 6th to 5th centuries BC when they exchanged with the Yuhuangmiao Culture and Zhongyuan Culture. It is confirmed that most of the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were restored as chariot drawn by two or four horses together. In the culture area of Slender Bronze Dagger, only a few types of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were identified, mainly in North Korea. However, some indigenous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were confirmed in Wiman Joseon. In the stage of Bimetallic Dagger Culture in the early of Nangnang, it is characterized by the coexistence of non-Han and Han style, as well as Xiongnu style's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At this time, the chariot fittings and harnesses were restored as chariot drawn by a single horse was also develo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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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재윤 ( Kim Jae Youn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8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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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쪽구들은 라즈돌라야 강(수분하)의 대성자 유적과 크로우노프카 I유적에서 만들어졌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등장한 시점은 기후하강기이다.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가 기후 온난기에 우리나라 중부지역 및 남부지역으로 이동한 것과는 달리 기후 하강기에 발생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쪽구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I기에서는 석재로 된 ㄱ자형 쪽구들이 만들어진다. II기에서는 ㄱ자형과 ㄷ자형쪽구들이 확인되고, 여기서 발전된 ㅁ자형 쪽구들도 확인된다. 축조재료는 아궁이와 구들이 모두 점토로 된것과 석재로 된 것이 있다. III기에서도 ㄱ자형 쪽구들이 설치되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기원지에서는 가장 다양한 형태의 쪽구들이 사용되었으며 평면형태, 축조재료, 단면형태는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경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쪽구들이 청천강 유역과 남해안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4세기~3세기 및 기원전 2세기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쌍조형 동검이 연해주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청천강 유역의 고조선 후기~위만조선의 문화교류로 그 과정 중에 쪽구들이 청천강 유역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방지리와 늑도 유적 쪽구들은 별도의 논고로 설명하겠다.
청천강 유역의 쪽구들은 오늘날 자바이칼 지역인 기원전 2세기 흉노 유적에서 나온다. 쪽구들이 많이 나온 이볼가 유적에서는 주거지의 80%이상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의 쪽구들은 문화적으로 관련성이 크게 알려진 바 없는 북옥저 보다는 청청강 유역에서 요동동부까지 분포한 고조선후기 사회 혹은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교류는 잘 알려져 있는데 그로 인한 가능성이 크다. 양지역간의 인적 교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는 북한강 유역에서 기원후 2세기에 처음 나타난다. 당연히 기원전 3세기 청천강유역이나 남해안에 나타났을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고 생각된다. 북한강 유역에서는 같은 유적 내에서도 쪽구들이 발견되는 숫자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쪽구들이 수용되는 방법의 차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In the 5th century BC, the Ondol of Tuanjie-Krunovka culture was created at the Dachéngzi and Kronovka I sites on the Rajdolaya River
The time when the Tuanjie-Krunovka culture emerged is during the climate downturn. Unlike the Neolithic and Bronze Age cultures of this region, which moved to the central and southern regions of Korea during the climate warming period, the Tuanji-Krunovka culture that occurred during the climate downturn is found in many other regions, which was possible because of the use of early ondol.
In the Tuanji-Krunovka Cultural I period, an L-shaped ondol made of stone is made. In Phase II, there are L-shaped and U-shaped, and the ㅁ-shaped ondol developed from them is also confirmed. The construction materials are made of clay and stone, both of which do not change constantly. In the III stage, the L-shape was installed and used for the longest time. In the origin, the most diverse types of ondol were used, and the planar shape, construction material, and cross-sectional shape did not change constantly.
Around the 3rd century BC, the Tuanjie-Krunovka cultural dunes are found in the Cheongcheon River basin and on the southern coast. Long bronze bronze daggers and mirrors from the 4th to 3rd centuries BC and 2nd centuries BC are found in Primorsky, which is a cultural exchange in the late Gojoseon Period of the Cheongcheong River basin, and during the process, daggues may have flowed into the Cheongcheong River basin. The side districts of Bangji-ri and Neukdo ruins on the southern coast of Korea will be explained in a separate paper.
Ondol in the Cheongcheon River basin comes from the ruins of Hunno in the 2nd century BC, which is today the region of Zabaikal. In the Ibolga ruins, where the most ondol was produced, it was used very actively because more than 80% of the houses had ondol. Rather than the cultural relationship of Bukokjeo, the exchanges between the late Ogjeo and Joseon and Hunno, which are distributed from the Cheongcheong River basin to the eastern part of Liaodong, are well known, and it is natural to see it as human exchanges between the two regions.
In the central region of Korea, it first appeared in the 2nd century AD in the Bukhan River basin. Naturally, it is thought that it was different from when it appeared in the Cheongcheon River basin or the southern coast in the 3rd century BC. In the Bukhan River basin, the number of ondol found within the same ruins is limited. Perhaps it was the difference in the way Ondol was accep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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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정하 ( Yoon Jungha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9-10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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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차구유적과 노하심유적에서 출토되었던 양식의 동병철검이 청주 오송에서 발굴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현재 한반도에서 출토된 동일 양식의 부여계 유물은 검류와 이식류가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김포 운양동 유적의 금제이식 3점과 풍납토성의 은제 이식 부속품 1점, 청주 오송 유적의 동병철검 1점이 있다. 다만,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어 비교한 연구가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유물이 소수이기 때문에 이주와 이민을 논하기는 힘들지만, 운양동 유적과 오송 유적,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부여계 유물들이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어떤 유적에서, 어떤 맥락을 가지고 매납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한반도 내에서 출토한 부여계 유물들과 비교하였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부여계 유물들은 출토지역이 중부지역에 한정되고 있고, 시기적으로 유사성이 보이며, 남한 내에서 유사한 모티프를 지닌 유물조차 발견된 사례가 없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덤에서 출토된 운양동 금제이식이 출토한 유구의 피장자는 집단 내에서 높은 신분을 보이는 반면, 오송 유적의 동병철검의 피장자는 여타 무덤의 피장자들과 신분적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신분상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고, 각각 성토분구묘와 주구토광묘라는 무덤양식상 차이, 각 유적 내의 출토유물에서도 차이가 확인되었다.
본 고에서는 유적 간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며, 운양동 유적에서 출토하는 구슬류의 수량적·종류적 다양성과 한강 하류에서만 출토하는 백색토기의 분포양상, 상대적으로 이른 유적의 조성시기를 고려했을 때, 운양동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강 하류 일대의 정치체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해상교역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반면, 오송유적의 경우 동병철검의 유입루트를 상정하기 힘들고, 위신재로서의 상징성도 확인하기 힘들기 때문에 유입루트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당대 부여계 동병철검이 부장품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배경에 오송 유적의 조성집단이 개별 정체성으로 '부여계'도 용인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Recently, the bronze-department iron sword, which was excavated from the mounds of Seocha-gu and Nohasim, was excavated in Osong, Cheongju, was in the spotlights. Currently, the same-style Buyeo-based relics excavated from the Korean Peninsula include swords and grafts, and specifically, there are three of gold earrings from the mounds of Unyang-dong, Gimpo, one silver transplant accessory from the earthen fortification in Pungnap-dong, and one of bronze-department iron sword from Osong, Cheongju. However, no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comprehensive treatment and comparison. It is difficult to discuss migration and immigration because there are only a few relics, but the relics of Buyeo found in Unyang-dong, Osong, and earthen fortification in Pungnap-dong were identified and compared with Buyeo relics excavated in the Korean Peninsula.
Buyeo-based relics excavated from the Korean Peninsula show that the excavated areas are limited to the central region, show similarities in time, and there are no cases in South Korea that even relics with similar motifs have been found. However, while the remains excavated by gold earrings in Unyang-dong showed high status within the group, the remains of the bronze-department iron sword in Osong's mounds showed no difference in status from other tombs, and the tomb style and relics excavated in each site were also different.
Considering the quantitative and type diversity of beads excavated from Unyang-dong mounds, the distribution of white earthenware excavated only in the lower stream of the Han River, and the relatively early construction period of the Unyang-dong mounds, it is highly likely that political bodies led maritime trade using geographical advantages. On the other hand, it was noted that in the case of Osong mounds, it was difficult to assume the inflow route of the bronze-department iron sword and to confirm its symbolism as a prestige material, so rather than presenting the inflow route, the creation group of Osong mounds tolerated "Buyeo" as an individu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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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시은 ( Yang Si-eun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4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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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4~5세기대에 접촉이 잦았던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물질문화 교류 양상을 전반적으로 검토해본 것이다. 모용선비는 전연, 후연, 북연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고구려와 군사적 대립과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342년 전연의 고구려 수도 공략 당시 잡혀간 수많은 포로들과 355년 전연과 고구려의 책봉·조공관계 수립에 따른 일부 인원의 귀환, 436년 북연의 멸망 당시 용성 주민들의 고구려로의 대거 유입 등은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삼연의 정권 교체기를 비롯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고구려로 들어온 사람들은 고구려의 문화 형성 과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삼연에서 고구려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물질문화는 고분벽화, 마구, 보요장식, 대금구, 토기 등이다. 이번에 이들 고고학 자료들을 비교해본 결과, 고분벽화와 대금구는 모용선비의 문화가 고구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중원계통의 문화가 고구려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모용선비가 매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토기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관계를 찾기 어려웠지만 암문과 같은 특정 시문기법에서 그 관련성이 확인되었다. 보요관은 모용선비를 상징하는 유물이지만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보요장식에서만 유사성이 일부 관찰되었다. 그렇지만 마구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삼연의 마구 세트 간에 상당한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모용선비 두 세력 간 물질문화의 교류 양상에 대한 이상의 검토 과정에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와 삼연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였음에도 두 문화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뚜렷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모용선비를 통해 여러 외래적인 문화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선택적 수용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이후 고구려화를 거쳐 해당 물질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음이 확인되었다.


This paper is about the exchange of material culture between Koguryo and Murong Xianbei. The Culture of Muron Xianbei is known to had have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cultural development process of Koguryo. They continued their diplomatic relations with military confrontation for a long time. In particular, it is possible that the return of numerous prisoners taken during QianYan's invasion of Koguryo's capital in 342, the return of some people due to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in 355, the large influx of residents following the fall of BeiYan in 436, and the continuous influx of asylum seekers during Three Yan's regime change or during chaotic situations had a certain influence on the cultural formation process of Koguryo.
Artifacts known to have influenced Koguryo culture in ThreeYan is mural tombs, harnesses, boyo ornaments, belt ornaments, and pottery. As a result of their review, it was confirmed that the murals and belt ornaments played a mediating role in the transmission of Han-based culture to Koguryo rather than the culture of Murong Xianbei directly affecting Koguryo.
In the case of pottery, rather than assuming a direct relationship, relevance could be found only in certain engraving techniques such as dark burnished marks. Although gold boyo crown was an important relic that symbolized Murong Xianbei, it was not found in Koguryo, and some similarities were observed only in boyo ornaments.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the sets of harnesses had a significant relationship between Three Yan and Koguryo.
The clear fact that this review revealed the development of material culture between the two forces was that the two cultures maintained their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despite continuous exchanges between Koguryo and Three Yan. Koguryo accepted various foreign material cultures through Murong Xianbei, but it was based on selective acceptance, and it was confirmed that it developed its own culture fur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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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인욱 ( Kang In Uk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6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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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에서는 연해주 남부와 중도 레고랜드에서 발굴된 말갈 관련 자료를 통하여 한반도의 중심에서 남부지역과 북방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중부지역의 지리적인 특성을 새롭게 강조했다. 중부지역은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북한이라는 인위적 경계에 막혀있다. 한국 고고학의 연구의 범위는 북한과 만주를 포괄하지만, 실제 발굴조사는 남한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지리적 상황과는 다르게 고립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 중부지역의 지리적 상황, 즉 환동해를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악지형과 한강의 하류라는 평야지대가 공존하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한반도 중부지역의 고고학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도 레고랜드의 고구려와 말갈토광묘, 그리고 연해주 자레치노예 출토의 신라 환두대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서기 4세기 이후 고고학적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말갈의 양상을 볼때 강원도와 연해주 지역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비슷한 지형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며, 이들이 고구려의 남진과 함께 중부지역에서 일정 정도 역할을 해왔던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해주 발해 유적의 중심지인 라즈돌나야강에서 발견된 신라의 5세기대 삼루환두대도의 발견은 기존의 모든 인식을 깨는 동시에 그 동안 공백으로 있었던 발해 이전의 서기 5~7세기의 연해주와 한반도 일대의 관계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 역사에서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말갈, 그리고 위말갈이라는 개념으로 애매하게 정의되었던 강원도 지역의 말갈 세력에 대하여 최신 고고학자료를 통한 재평가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북한이라는 공백이 있기 때문에 말갈 세력의 애매함이 완전 해소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반도 중부를 삼국의 세력관계로만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연해주와 동북한에 대한 이해가 더할 때에 한반도 중부지역 삼국시대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이어질 것이다


This paper first defined the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the central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central region plays a role as a crossroad between Eurasia continent and the Korean Peninsula. The downstream area of the Han River is a plain suitable for farming, but the Gangwon-do area consists of a steep mountain range topography formed along the east coast. In other words, the central region is not a monolithic geographical region. At the same time, the modern political influence of the central region is also significant. The central region has been blocked by the artificial boundary of North Korea to the north and has been in the same position as the periphery since the 20th century.
To make a breakthrough, the author re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Malgal and the central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5th to 6th centuries AD were examined in detail. In particular, the Goguryo and Malgal ground tombs excavated at the Legoland site in Jungdo were analyzed. Furthermore, the Silla Three-ring Pommel sword of Zarechnoye(a.k.a. Pokrovka), Primorsky, was analyzed. As a result,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 group of residents called Malgal, which appeared in Gangwon-do, could not be thought of separately from the Primorsky area. The Malgal played a role in Goguryeo's campaign to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Silla's sword from Zarechinoye provides data on the relationship between Primorsky and the Korean Peninsula in the period before Balhae was established.
In this way, we can reexamine the role of Malgal in the Gangwon area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AD, which were vaguely defined as Pseudo-Malgals and ignored in Korean history. Like this, when we reexamine the significance of Mangal, we can deeply understand the meaning of Central part of Korea during the Three kingdom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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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준희 ( Kim Junhee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20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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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거의 구조와 시설, 취락의 점유기간 등 제 양상을 통해 취락 경관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점유기간을 파악할 수 있는 주거 내부 시설에 주목하여 이를 주거의 사용수명으로 환산한 뒤 취락 점유기간의 시·공간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한 생계경제적 차원으로 접근하여 점유 방식의 변화와 원인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중기에 농경이 발달하고 저장 식량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주민집단은 생산량 증가와 안정화에 유리한 전략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취락의 입지를 용수 획득과 복합 생산 활동에 유리한 대형 하천주변으로 선정하여 취락을 기획 조성했다. 또한 농지 및 저수지와 관개시설 등 생산 설비의 관리를 위해 장기점유가 가능하도록 주거 구조 등 시설물에 많은 비용과 에너지를 투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 농경 기반의 생계경제가 약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기 단계에 인구 밀집화에 의한 산림의 황폐와 가경지 감소로 인한 식량자원의 고갈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생계경제 자원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농경 및 수렵·채집, 어로를 병행하는 혼합경제 체제로 전환되면서 중기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생계 전략을 영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생계경제 전략 변화에 따른 점유기간의 시·공간적 변화 양상을 검토한 결과 경기 북부, 중부지역은 중기 단계까지 점유기간이 점차 증가하다가 후기에 대폭 감소한다. 점유기간이 증가하면서 취락의 경관은 주거군이 밀집하고, 배치와 주거 시설이 정형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외부 저장 수혈과 분묘군이 축조된다. 그러나 후기에 점유기간이 대폭 감소하면서 개별 주거가 분산되고, 주거 시설과 배치에서 정형성이 약화되며 외부 수혈이 사라진다. 경기 남부지역도 북부, 중부와 동일한 변화가 확인되지만 상대적으로 점유기간이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락 경관의 변화를 살펴보면 주거군이 점차 밀집하고 주거 시설과 배치에서 정형성이 강화되며, 외부 수혈이 증가하고 환호와 분묘군이 축조된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점유기간이 소폭 감소하면서 주거지들이 분산되고 수혈이 감소하지만, 소형·방형 주거지는 상대적으로 정연하게 배치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를 종합하면, 경기지역의 취락 경관은 생계경제 전략 변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지역 취락은 생계경제 전략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입지를 선정하고, 경관을 기획하여 예상 점유기간에 적합한 주거 시설을 마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The purpose of the present study is to examine changes in settlement landscapes through a variety aspects including the structure and facilities of dwellings and the occupation length of settlements. To this end, the study examined the spatio-temporal development process of settlement occupation lengths by focusing on the inner facilities of dwellings, identifiable by occupation length, and converting this into the use-life of the dwelling. Furthermore, the study attempted to verify changes in occupation styles and the causes behind them by taking an approach from a subsistence-economic level.
As agriculture advanced and the importance of food storage increased in the Middle Bronze Age, residential groups are presumed to have used a strategy more advantageous for increasing and stabilizing production. Therefore, they planned and constructed settlements by selecting, for their settlement locations, areas surrounding large rivers advantageous for obtaining water and mixed production activities. They also seemed to have invested much cost and energy into facilities such as dwelling structures to enable long-term occupation with the purpose of managing production facilities such as farmland, reservoirs, and irrigation facilities.
However, in the Late Bronze Age, it seems like the agriculture-based subsistence economy was weakened. This seems to have led to the depletion of food resources as a result of devastated forests and the decrease of arable land due to population concentration in the middle stages. It is likely that the people pursued a form of subsistence strategy different from the Middle Bronze Age, as a transition was made to a mixed-economic system which concurrently implemented agriculture, hunting-gathering, and fishing in order to resolve the instability of subsistence-economic resources.
Upon examining spatio-temporal changes regarding occupation length depending on changes in subsistence-economic strategy, the study found a gradual increase in occupation length up to the Middle Bronze Age for the the northern and central Gyeonggi areas and then a huge decrease in the Late Bronze Age. With the increase in occupation length, the study confirmed, in terms of settlement landscape, increased concentration for dwelling clusters and the standardization of layout and residential facilities. Moreover, pits and tombs were also constructed. However, as occupation length largely decreased in the Late Bronze Age, and as individual dwellings dispersed and the regularity of residential facilities and layout weakened, pits disappeared. The southern Gyeonggi area exhibits the same changes as the northern and central areas but with a relatively longer occupation length. A look into changes in settlement landscape reveals a gradual increase in concentration for dwelling clusters and stronger regularity for residential facilities and layout, along with an increase in pits and "the construction of tombs and ditched enclosures. However, with a slight decrease in occupation length in the Late Bronze Age, dwellings became scattered, and the number of pits decreased, but small and square-shaped dwellings were found arranged in a relatively well-organized fashion. In summary, the settlement landscape of the Gyeonggi region is thought to be closely related to changes in subsistence-economic strategy. It seems like residential groups selected locations for settlements in the Gyeonggi region with the purpose of constructing an environment advantageous in terms of subsistence-economic strategy and subsequently planned landscapes in the interest of setting up residential facilities that fit their expected occupation l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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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성주 ( Lee Sungjoo ) , 이수정 ( Lee Sujung ) , 김진우 ( Kim Jinwoo )

발행기관 : 중부고고학회 간행물 : 고고학 21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7-24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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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초기는 물레질과 타날성형, 그리고 환원소성이라는 신제도기술이 남한지역에 도입됨으로써 이지역 토기생산기술의 큰 변화가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이래 신기술의 계통을 요동과 서북한의 타날문 회도에서 구했지만 와질토기론이 제기되면서 그 기원을 낙랑토기에서 찾았다. 와질토기 논쟁을 거치며 다시 전국계토기 기원론이 부상하고 근래에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환원소성 토기를 이른바 세죽리-연화보유형의 타날문회도와 비교하는 연구가 제출되고 있다. 이 논문은 이주-전파에 초점을 맞춘 기원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요녕지역을 대상으로 신제도기술의 확산과 수용을 기술혁신의 과정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연이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직전부터 서한시기에 해당하는 건창 동대장자, 조양 원대자, 본계 상보촌, 그리고 서풍 서차구 등 네 고분군의 토기유물군을 분석하여 타날문 회도 기술의 수용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연, 혹은 진·한 제국이 설치 운영한 거점에 회도 제작기술과 생산체계가 이식되는 과정을 설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토착사회의 도공이 신기술을 수용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의 진출 직전의 동대장자와 연이 진출한 거점 내부의 원대자유적 토기유물군을 통해 이식된 회도와 토착 무문토기계가 공존하는 가운데 토착도공이 물레질을 익혀 소형 발과 호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물레질-타날법을 수용하여 생활용기를 광범하게 생산했는지에 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요동지역의 상보촌과 서차구유적은 중원의 세력권 밖에 분포하는 토착집단의 고분군으로 그 부장 토기유물군에서도 토착 무문토기와 회도 생산체계의 공존이 확인되었다. 두 유적의 타날문호에 대한 관찰 결과 제국의 거점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토착집단의 도공이 서한 초기의 打捺陶罐이나 壺의 제작기술을 익혀 생산해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를 통해 요녕지역 토착사회의 신제도기술 수용과 그 시기, 그리고 생산기종에 대한 일단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The Liaoning region of China has long attracted attention by researchers studying the origins of the new ceramic production technology in the early Proto-historic Korea. Many researchers have reviewed the ceramic assemblages of the area to describe the diffusion of new technology, but I would like to explain the innovation process of ceramic production in this paper. Until the end of the Bronze Age, coarse fabric ware fired in oxidizing atmosphere was used in Liaoning, but during the Late Warring States Period, Yan State established the military and administrative outposts and introduced new ceramic technologies, such as, well-prepared raw materials, wheeling-turning, paddling, and firing in kiln, in the area. In this paper, based on the analysis of the ceramic assemblages from the four different burial sites, Jianchang Dongdazhangzi(建昌 東大杖子), Chaoyang Yuantaizi(朝陽 袁台子), Benxi Shangbaocun(本溪 上堡村), and Xifeng Xichagou(西豐 西岔溝) I am able to explain what technological choices the traditional potters in the indigenous communities made in the process of acquiring and embodying the new Chaîne Opératoire and how the organization of ceramic production has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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