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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1)~44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362
강원문화연구
44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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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말 강원지역 왜구 침입과 이옥(李沃)의 강릉전투

저자 : 김동정 ( Kim Dong-jeong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2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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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는 강원지역에 왜구가 창궐하였다. 1372년 6월 왜구가 강릉도를 침범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군사들과 백성들은 도주하거나 피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릉도안렴사 김구용과 강릉부사 안종원은 강릉부 관노로 있던 이옥에게 방어를 부탁한다. 이옥은 원래 사대부가의 자손이었으나, 아버지 이춘부가 신돈의 일당으로 처형되고, 강릉의 관노로 적몰 되었다. 이옥은 강궁에 능한 사람이었다. 강릉부 주변 울창한 숲에 나무마다 화살을 꽂아놓고 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숲으로 유인하여 화살을 쏘아 몰살시켰다.
이옥의 승전보를 접한 국왕은 이옥과 아버지 이춘부를 신원시켜 주었다. 이옥의 승리로 인하여 강릉도 전역이 평안해졌다. 그리고 이옥이 전투에서 발휘했던 활쏘기 기술과 전술은 이후 조정의 계획과 對倭賊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훗날 강릉도절제사로 부임하여 왜구를 방어하는데 기여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이옥의 강릉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최무선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의 남해대첩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Japanese pirates broke out in Gangwon-do. In June 1372, when rumors spread that Japanese pirates invaded Gangneung Island, soldiers and people began to flee or evacuate. At this time, Gangneung Doanryumsa Kim Gu-yong and Gangneung Busa Ahn Jong-won ask Lee Ok, who was a government official of Gangneung-bu, to defend. Lee Ok was originally a descendant of the nobleman, but his father, Lee Chun-bu, was executed as a party of Sindon and was buried as a government official in Gangneung. Lee Ok was a person who was good at Ganggung Palace. Arrows were placed in each tree in the dense forest around Gangneung-bu and waited for the Japanese to come. When the Japanese invaded, they lured them into the forest and shot arrows to exterminate them.
Upon hearing Lee Ok's victory, the king identified Lee Ok and his father Lee Chun-bu. With Lee Ok's victory, the entire Gangneung area became peaceful. And Lee Ok's archery skills and tactics in the battle later influenced the royal court's plan and tactics against Japanese enemies. Later, he was appointed as a Gangneung Dojeoljesa and contributed to defending Japanese pirates, and was listed as a contributor to King Wonjong when Joseon was founded. Lee Ok's Battle of Gangneung was comparable to Choi Young's Battle of Hongsan, Jinpo Battle of Nase and Choi Mu-seon, Lee Seong-gye's Battle of Hwangsan, and Jeong Ji's Battle of Namhae.

2<강릉매화타령>을 통해 본 판소리 실전(失傳) 사설(辭說)의 특성 검토

저자 : 한창훈 ( Han Changhun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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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매화타령>은 판소리 12마당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으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관련 기록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새롭게 주목되었다. 일반적으로 '판소리'는 연행공간에서 연행되는 판소리와 판소리 사설을 정착시킨 창본, 판소리계 소설을 아울러 지칭하는 개념이다.
<강릉매화타령>은 강릉 사또와 기생 매화의 공모로 골생원을 발가벗겨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로 골생원을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풍자적 성격은 약화 되어 있지만, 골생원이 양반 신분으로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역으로 강조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작품 구조를 볼 때도 골생원과 매화의 만남, 사랑, 이별, 수난이라는 이야기의 흐름 중에서, 전반부에 해당하는 골생원과 매화의 만남과 사랑 대목은 비교적 간략한 사설로 짜여져 있는 반면에, 이별과 골생원의 수난 대목은 상당히 자세하게 부연되어 있다. 시장에서 정표를 사는 장면, 환쟁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서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 등이 인상적으로 부각된다.
골생원은 양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추한 외모에 거대한 성기를 가지고 있는 등 신체적 자질과 사회적 자질 사이에 큰 괴리를 보이며 기괴함을 낳게 한다. 이는 공간적으로 강릉과 서울의 대비화된 그리고 구조화된 공간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골생원의 형상은 '양반이 아닌 사람들' 눈에 비친 양반의 모습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화가라> 결말 부분에는 “世上 사암덜아 骨生員으로 볼지아도 쥬삭탐을 부□ 마소”라는 서술자의 직접적인 언술이 나온다. 자료를 보면, 서술자가 언급한 '주색을 탐하는 것에 대한 징계'라는 의미도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때문에 '골생원을 속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 자체의 재미'를 주목하는 것이 오히려 실상에 접근하는 태도로 인식된다.


< Gangneung Maehwa Taryeong >, known as one of the 12 madang of Pansori, could not be fully identified in detail by lack of relevant materials but later, it started to draw new attention when its related records were discovered. In general, Pansori is a concept that refers to Pansori play on a performance space, books that contributes to the establishment of Pansori's Saseol, and Pansori novels.
< Gangneung Maehwa Taryeong > is a story that Gangneung Sato and Gisaeng Maehwa together make fun of Golsaengwon by stripping him naked. It is not clearly suggested why they try to mock Golsaengwon. In this respect, the work weakens its satirical characteristics but emphasizes Golsaengwon's character as an excessively lascivious person despite his status as a noble yangban.
In the plot of this work, Golsaengwon and Maehwa's encounter, love, separation, and suffering respectively, while the parts of two characters' encounter and love, which make up the first half of the story, consist of a relatively brief Saseol, those of their parting and suffering are described in considerable detail. For example, two scenes of buying a present in the market and expressing love by making a painter draw a picture are impressively highlighted.
Golsaengwon character shows some discord of so-called physical and social qualities, for instance, as a yangban who has an ugly appearance and a huge penis, creating a grotesque atmosphere. This peculiarity is more revealed in terms of location of Gangneung and Seoul as contrasted and structured spaces. It can be seen that the figure of Golsaengwon is based on the appearance of yangban reflected in the eyes of people who are not yangban.
In the ending of < Maehwagara >, there is a direct statement by the narrator, “Well, everyone in this world, please listen! When you come across Golsaengwon, beware of not ruining yourselves by drinking and sensual pleasures!” But, in this story, the meaning of 'punishment for indulging drinking and lust' mentioned by the narrator is not clearly expressed. Therefore, we can say that the more reasonable approach to this story is to pay attention to 'the fun itself caused by the process of deceiving Golsaengwon.'

3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의 금강산 여행기 연구

저자 : 이승은 ( Lee Seung-eun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8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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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시기 서양인의 여행기를 통해 금강산의 장소성을 분석한 것이다. 장소란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공간으로, 지역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금강산은 전근대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원도,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명승지로 많은 사람들이 유람했던 곳이다. 근대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내국인과 외부인의 인식이 복잡하게 맞물리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장소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
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남긴 금강산 여행 기록을 목록화하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이들은 단순 유람, 지리와 생태 조사, 취재 및 보고의 목적으로 금강산을 방문했으며, 때로는 여러 목적이 뒤섞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기가 여행준비-여정-금강산 도착의 과정을 서술하였으며, 각 단계마다 유사한 서술이 반복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강산에 대해서는 경관의 아름다움과 사찰 및 불교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지만, 즉물적이고 피상적인 감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여행준비나 여정에서 경험한 한국인이나 한국의 풍습에 대한 서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이는 금강산이 그들에게 깊이 있는 고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한국의 문화에 익숙했던 제임스 게일이나 노르베르트 베버의 경우는 금강산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이들의 여행기에는 각기 사대부적/수도승의 관점에서의 장소성이 엿보였다.
이후 내국인 여행기와의 비교를 통해 금강산의 장소성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characteristics of a place of Mt. Geumgang through the travel writings of Westerners in the modern period. A place that is given meaning to is a subjective and experiential space, which is an important component of local identity. From the pre-modern times to the present, Mt. Geumgang has been the most significant scenic spot in Gangwon-do, or rather, in the whole country, and has always been visited. The westerners who visited Korea in the modern era also climbed there, and, through the records they left behind, it is possible to more three-dimensionally identify its characteristics of a place that was formed in the process of intricately interlocking the perceptions of the locals and the outsiders.
First of all, this paper catalogues the records of travel to Mt. Geumgang by Westerners in the modern period and categorizes them into three parts on the basis of the purpose of the trip. The visitors mainly went to Mt. Geumgang for the purposes of simple excursions, geography and ecology research, and newsgathering and reporting, each of which is, in some cases, mixed. They chose Mt. Geumgang, in particular, among the many mountains in Korea because of its high reputation among Koreans and Japanese. Due to the geographic location of Mt. Geumgang as the midpoint between Seoul and Wonsan, an open port, it was also easy for them to plan to travel between the two cities.
Next, the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a place revealed in the writings on traveling to Mt. Geumgang. Most travel journals describe the three processes of travel preparation-journey-arrival to Mt. Geumgang, and, at each stage, similar descriptions are repeated. They all have the mentions on the beauty of the landscape of Mt. Geumgang and on the temples and Buddhism, but, in many cases, they are limited to immediate and superficial appreciation. The writings, rather, deal with the Korean themselves and their customs mostly that they confront during the travel preparation and travel, which means that Mt. Geumgang was not the object of deep consideration for the western travelers. On the other hand, James Gale and Norbert Weber, both of whom were familiar with Korean culture, showed strong interest in Mt. Geumgang itself and each of their writings reveals the characteristics of a place from Sadaebu /monks' point of view.
This study have meanings in that, through the comparison with travelogues by the Koreans, it suggests one foundation for a more holistic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Mt. Geumgang.

4양양의 3.1만세 운동사 고찰 - 유림을 중심으로 -

저자 : 양언석 ( Yang Eeon-seok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3-1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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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대표적인 유림(儒林) 고을로, 3.1만세운동의 성지(聖地)이다. 만세운동의 성지가 된 것은 오랜 역사와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양양은 삼국시대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고, 불교의 성지로 一心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였던 공동체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양 만세운동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그 규모가 크고 격렬하였고, 3.1만세운동의 정신을 보여준 진수였다. 종교와 신구세력의 이해와 관계 없이 군민이 하나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만세운동은 민족의 자긍심과 양양인의 정신이다.


Yang-yang was a typical Confucian society, known as a sacred plac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hich can be found in history and culture. In a historical aspect, Yang-yang was a training center of the code of Silla Hwarangdo during the epoch of the three Kingdoms and a sacred place of Buddhism, one of whose philosophy is il-sim(一心), which encourages the sense of community, serving for overcoming hardship in the country. These kinds of cultural spirit affected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Yang-yang was big and intense, showing the essenc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Yang-yang.
Without any clash between religion, old and new generations, that the united residents participated i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showed national pride and became the cornerstone of Yang-yang's spirit.

520세기 전반기 잡지에 나타난 관동팔경 연구

저자 : 김금숙 ( Kim Gum-suk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3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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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전반기 잡지들에 나타난 관동팔경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고 전대의 기록들에 비해 어떤 변모 양상을 보이는지 고찰해 보았다.
잡지 기사를 살펴보면 192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 시대까지의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관동팔경을 명승지나 특별한 곳, 일상에서 벗어난 곳으로서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점차 관동팔경을 이전 시대와는 다른 시선으로 담아내는 글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관동팔경을 삶의 구체적인 공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으로서 주목하는 글들이 그것이다.
잡지에 나타난 이러한 기록들은 통시적으로는 조선 시대의 다양한 기록들과 현대의 관동팔경을 연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공시적으로는 당대의 잡지 편찬자나 교양 있는 대중들이 관동팔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또한 당대의 사회가 점점 명승지를 동경하고 명승지 유람을 즐기던 시대에서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을 환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This study first organizes the records of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shown in the magazines of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then examines the aspect of changes which those records have in comparison with the previous ones.
The magazine articles till the mid-1920s, like those of the Joseon Dynasty, tend to handle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as scenic spots, special places, or somewhere far away from daily life. However, there are more and more writings approaching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in the different perspective from that of the previous time. Those writings pay attention to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as concrete, realistic, and daily space.
Diachronically, such records in the magazines have the meaning of connecting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of the modern times to the various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Synchronically, they show how the magazine compilers or the educated public of the time perceive the Gwandongpalgyeong(關東八景). The change in the perspective of the articles on the Gwandongpalgyeong metaphorically suggests that the society of the time which admires and enjoys the sightseeing of scenic spots is also changing itself.

6금강산전기철도의 자연재해와 극복 과정

저자 : 이부용 ( Lee Bu-yong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5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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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939년 발간된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20년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금강산 관광의 교통수단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린 금강산선의 이면에 보이는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와 그 복구 노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먼저 금강산선은 1923년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에 의한 개통 지연을 겪었다. 당시 시바우라제작소에 발주했던 전동발전기가 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어 재제작을 맡기게 되었다. 둘째로 금강산선은 빈번한 수해를 입었다. 홍수 때에는 송전탑이 전도되거나 발전소 침수가 일어나 전기를 송출할 수 없었다. 또한 하천범람으로 철도 선로가 붕괴되거나 훼손되어 전기철도를 운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수해가 자주 발생하는 사실을 숙지하고 시설을 점검하고 설계를 변경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해에 대비하게 되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다년간 쌓인 경험에 의해 조금씩 개선되었다. 그러나 금강산선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폐선되었다. 자연재해의 곤란은 이겨냈지만 전쟁은 이겨내지 못한 셈이다. 현재 철원역에는 금강산선의 선로 일부가 연결될 날을 기다리며 남아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damages caused by the natural disasters on the Geumgangsan Electric Railway (later known as the Geumgangsan Line) and its restoration efforts by reviewing the a “20-Year History of Geumgangsan Electric Railway Co., Ltd.” (1939). First,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in Japan wreaked havoc on the railway. At that time, the electric generators ordered from the Shibaura Engineering Works were destroyed by the earthquake and fire. Second, the Geumgangsan Line suffered frequent flood damages. During the flood that toppled electrical towers and submerged power plants, electric transmission was disrupted. In addition, the railway tracks collapsed, and the electric railway was not operational. From the mid-1930s onwards, active preparations were made for possible flood damages by inspecting facilities, bringing revisions to designs, and so forth. The damages caused by natural disasters were gradually repaired through years of accumulated experience. However, the railway was eventually decommissioned through World War II and the Korean War. In other words, the railway overcame the challenges of natural disasters, but was unable to recover after the war. Currently, some of the tracks of the Geumgangsan Line in Cheorwon station remain waiting for the day when they would be reconnected.

7일제강점기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 설립과 금강산개발 실태 -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20년사』를 중심으로 -

저자 : 장혜진 ( JHANG Hyejin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9-17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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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1919년 설립된 이래, 금강산개발을 주목적으로 철도사업과 전기사업을 겸영하였다. 다만 이는 비단 금강산관광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일대의 강원도 권역의 산업 경제성과 성장성, 수익 사업성을 높이 평가한 후에 금강산 철도 부설 및 수력발전 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국유(국철) 경원선의 배양선으로서 철원에서 내금강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함과 동시에 여객 및 화물 운송의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결과적으로 금강산관광으로의 교통 편의성의 증대와 지역 산업 발전, 물류유통의 활성화, 유동 인구의 증대 등 사회, 경제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단순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과 연계되는 사회적 경제효과가 컸기 때문에 금강산개발이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산은 일제강점기 동양 최고의 절승지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국내외의 국제 관광지로서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금강산 자연 풍경과 금강산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시설 등의 유지, 보전을 고려하는 개발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이 주목했던 금강산이라는 공간은, 경제, 문화적 복합 산업이 망라되어 있는 풍부한 자연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았으며 이는 오늘날, 또는 미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이러한 금강산개발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기업이며, 근대 금강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데 그 단초를 제공하였다.


Since its establishment in 1919, Mt. Geumgang Electric Railway Co., Ltd. has been operating both railroad and electricity projects with the aim of developing Mt. Geumgang. However, it can be seen that the Mt. Geumgang Railway and hydroelectric power generation projects were launched in earnest after highly evaluating the industrial economy, growth, and profitability of the Gangwon-do area around Mt. Geumgang. In other words, the high expectations for passenger and cargo transportation from Cheolwon to Naegeumgang as a culture ship for the state-owned (national) Gyeongwon Line seem to have been socially and economically expected, including increased transportation convenience to Mt. Geumgang tourism, regional industrial development, logistics distribution, and increased floating population. In other words, it seems that the development of Mt. Geumgang was more valuable because the social and economic effect linked to it was greater than that of simple tourism. In addition, it emphasizes that the purpose of developing Japanese colonial era as the best scenic spot in the East as an international tourist destination at home and abroad, and the development takes into account the natural scenery and cultural facilities of Mt. Geumgang.
In other words, the space called Mt. Geumgang, which the Japanese colonial era Japanese Empire paid attention to, was of high value as a rich natural resource covering economic and cultural complex industries, which has great implications for today or the future. It can be seen that Geumgangsan Electric Railway Co., Ltd. participated in the development of Mt. Geumgang in earnest and had a leading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Mt. Geumgang tourism business.

8일제강점기 강원지역 고적조사 현황과 전망

저자 : 김준식 ( Kim Junsik ) , 김규운 ( Kim Gyuun ) , 권오빈 ( Kwon Ohbin ) , 이상규 ( Lee Sanggyu )

발행기관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간행물 : 강원문화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0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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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일합병 전후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에 대해서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당시 강원지역의 고적조사를 재조명하였고, 일제강점기 강원지역 고고자료의 활용과 그 전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강원지역 전체의 고대사를 정립하고, 그 문화상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비록 식민주의사학에 입각한 관학자들에 의한 것이나 현재 남아있는 자료 중에서는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자료가 가장 현실적이면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강원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심지어 고성군과 철원군은 개별적 분단의 어려움까지 겪고 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북강원도의 고분, 성곽, 취락, 사지 등의 고고자료는 사실상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미 공간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고, 곳곳에 흩어져있는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여 체계적인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야만 한다.


This article, first, diachronically examines the general investigation projects of historical sites between right before and after Japan's annexation of Korea and 1945, also re-examines the situation of the investigation in Gangwon area at that time, and finally considers the use of those archaeological data record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ong with its prospects. In the situation in which the Korean Peninsula is divided into North and South, it is more likely to be realistic and useful to use the data writte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order to establish the ancient history of the entire Gangwon region, including North Gangwon-do, and to properly restore the region's cultural images, although those surveys were conducted by government scholars based on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Gangwon-do is divided into south and north, and even Goseong-gun and Cheorwon-gun are suffering from separate division. In this situation, we have no choice but to use the survey dat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specially when it comes to the archaeological information on North Gangwon-do such as its tombs, fortresses, villages, temple sites. In order to overcome these difficulties in the future, it is also necessary, in addition to the already open data, to organize the new ones scattered here and there and to lay the foundation so that those materials can be used as systematic research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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