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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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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469X
  • : 2734-03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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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9)~62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867
한국학연구
62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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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식민주의 역사학자 가운데 하나로 고대사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던 이마니시 류의 연구가 일본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것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연구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대륙침략이라는 역사적 국면만이 아니라 당시 일 본의 역사학계라는 자장 속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생각에서 이마니시 류의 연구에 나타나는 일본과 중국에 대한 논의들을 임나일본부와 낙랑ㆍ대방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그것이 일본사의 해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강점 이전부터 한국을 직접 조사해 본 경험이 있던 이마니시는 시종일관 일선동조론에 대해 선을 긋고, 한일은 빈번한 “교통”에 따른 “지배ㆍ피지배”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고대 일본이 삼한과 신라에 비해 진보해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이었다. 수차례의 고고학적 조사에도 어떠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임나일본부에 대한 이마니시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일본 세력의 성쇠를 일본의 국가 발전과 연결지었다. 즉 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은 일본 朝廷의 집권력이 일본 전체에 미칠 정도로 발전ㆍ성숙한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 神功皇后代에 이르러 통일적인 집권력을 갖춘 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내부적 역량을 바탕으로 신라 정벌을 단행한 이래 雄略天皇代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세력은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설명으로 이어졌다. 또 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의 시기를, 나카 미치요와 마찬가지로 日本書紀의 기년에 대략 120여년을 더하는 기년론에 입각하여, 4세기 초ㆍ중반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일본에서 4세기에 들어 집권력을 갖춘 국가가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찍부터 선진적인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마니시는 중국 문화를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연원”으로 위치짓고, 일본의 중국 문화 도입 시기를 낙랑군을 통해 끌어 올렸다. 강점 이후 일본인 연구자들이 평양 일대의 고분군을 낙랑군과 연결지으며,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비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유물을 발견했던 이마니시는 중국과 일본의 교류를 낙랑군과 일본의 교통으로 치환하여 그 시기를 기원 전후로 소급하는 한편 중국 문화의 수용도 더욱 편리해졌을 뿐만이 아니라 3세기 중반까지도 대방을 통해 魏와 倭가 계속해서 접촉을 이어갔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들은 낙랑과 대방은 한반도에 있었지만, 당대 중국 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곳으로 파악했으며, 이마니시 역시 이러한 연구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일본이 기원 전후 이래 낙랑과 대방을 통해 수용한 중국 문화는 바로 당시 최고 수준의 것이었으며, 이러한 문화 수용이 일본의 발전에 중요한 자양분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이마니시는 낙랑과 대방을 통해 기원 전후부터 중국 문화를 수용해 성장을 거듭하여 통일적인 집권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4세기 두 郡이 소멸하고 삼국이 정립되는 가운데 신라의 압력으로 위협을 받던 任那 小國들의 구원을 위해 신라를 정벌함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간다는 역사상을 제시했다고 하겠다.


Most of the studies by Imanishi Ryu, one of the leading historians of the historiography of colonialism, were about ancient Korean history. And it is indisputable that his work advocated Japanese aggression and colonial rule to Korea. However, his studies were not only in the historical phase of Japan's invasion to the continent in the early 20th century, but also in the magnetic field of Japanese academia of history at that time. From this point of view, this paper examines how Imanishi's research on the Japanese Ministry of Imna and Lelang-Daifang Commandery were linked to the explanation of ancient Japanese history.
Imanishi, who had investigated Korea before the colonial rule, believed it all the time that Korea and Japan had a “dominance-subordinance” relationship based on frequent “transportation” and that ancient Japan was more advanced than Samhan and Silla. What symbolized Japan's dominance over ancient Korea was that it dominated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Even though no relics had not been found in several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Imanishi's belief in the Japanese ministry of Imna remained unwavering. In particular, he linked the rise and fall of Japanese power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with the development of the Japanese state. In other words, it was possible to conquer Silla by Empress Jingu after the Japanese government's power was mature enough to affect Japan as a whole. This meant that by the time of the Empress Jingu's reign, a state with unified power was established in ancient Japan. Based on these internal capabilities, it was explained that the Japanese power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reached its heyday from conquering Silla by the Empress Jingu until the reign of Emperor Yūryaku. And Imanishi regarded the time when the Empress Jingu conquered Silla, based on the year adjustment, which adds 120 years to Nihon Shoki's Calendar year, like Naka michiyo, as the middle of the 4th century at the latest. This meant that in the 4th century, a unified state that stretched its power to the whole of Japan emerged.
The reason Japan was able to make progress in this early period was because it adopted advanced Chinese culture early. Imanishi argued that both Korean and Japanese cultures originated from Chinese culture, and argued that ancient Japan was more advanced than Korea on the grounds that Japan adopted Chinese culture before Korea. After Korean Annex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Japanese researchers linked the tomb clusters in Pyongyang with Lelang Commandery, and Imanishi discovered a decisive relic proving that Lelang Commandery was in Pyongyang. Since then, Imanishi replaced the exchanges between China and Japan with transport between Lelang Commandery and Japan, insisting that this exchange began around A.D. In addition, he said that China and Japan continued to maintain contact through Daifang Commandery until the middle of the 3rd century. At the time, Japanese researchers agreed that the essence of Chinese culture was preserved in Lelang-Daifang Commandery, although they were locat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Imanishi was also one of these researchers. This also meant that the Chinese culture that Japan had embraced throughLelang-Daifang Commandery since around A.D. was the highest level at the time, and that this culture acceptance was an important nutrient for the development of Japan. Imanishi's discussion about Lelang-Daifang Commandery was that Japan grew up to embrace Chinese culture since around A.D. and matured into a unified state in the 4th century. In addition, he suggested that in the early 4th century, while the Lelang -Daifang Commandery disappeared from the Korean peninsula, the three kingdoms were established, and in order to save the small states of Imna from the pressure of Silla and Baekje, Empress Jingu conquered Silla. As a result, Imanishi suggested that a new historical phase of East Asia surrounding the Korean Peninsula was developed after 4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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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타다 다카시의 중국 촌락 연구와 한국사 서술에의 영향

저자 : 박준형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90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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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현대 사회사학자이자 한국 중세 사회사학자이기도 했던 하타다 다카시(1908~1994)의 학문 이력을 전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한 사학사적 재조명을 시도하는 동시에, '아시아적 정체'라는 아포리아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한 것이다.
하타다 다카시는 1951년에 간행된 『조선사』 서문을 통해 일본의 대륙 침략과 함께 발전한 전전의 조선사 연구를 “인간이 없는 역사학”으로 규정하고, '조선인'이라는 '민족'을 주체로 한 새로운 역사서술을 주창했다. 그런데 『조선사』보다 10년 앞서 간행된 『지나민족발전사』(1941)에서는 하타다 자신에 의해 이미 '민족', 곧 '중국인'을 주체로 한 역사서술이 시도된 바 있었다. 전전과 전후라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 중심의 역사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조선사』를 『지나민족발전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조선민족발전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한편 1970년대 초 1년의 차이를 두고 하타다는 두 권의 책, 『조선중세사회사연구』(1972)와 『중국촌락과 공동체이론』(1973)을 차례로 세상에 내놓았다. 양자는 연구 대상의 시기와 지역, 그리고 접근 방식에서 모두 차이를 보였지만, 공통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부터 촌락 사회의 실태를 밝히고자 했다. 다만 중국촌락 연구에서 그것의 봉건성에 주목한 하타다는 전후 중국혁명의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게 보았으나, 조선중세사 연구에서는 봉건제결여론 극복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다.
하타다에게 '아시아'는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인 동시에,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예정하지 않은 혁명적 힘이 축적된 장소이기도 했다. 말년에 그는 『조선사』에 대한 반성 위에 새로운 통사 서술을 계획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숙원은 풀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この論文は、中国現代社会史学者であり韓国中世社会史学者でもある旗田巍(1908~1994)の学問履歴を全体的に検討し、彼の研究業績に対する史学史的再照明を試みると同時に、「アジア的停滞」というアポリアからの脱出を模索したものである。
旗田巍は、1951年に刊行された『朝鮮史』の序文を通じて、日本の大陸侵略とともに発展した戦前の朝鮮史研究を「人間不在の歴史学」と規定し、「朝鮮民族」を主体とした新しい歴史叙述を主唱した。ところで、『朝鮮史』より10年前に出された『支那民族発達史』(1941)では、すでに旗田自らにより「民族」、すなわち「中国人」を主体とした歴史が述べられた。戦前と戦後という時代的背景の違いにもかかわらず、「民族」中心の歴史叙述を試みたという点においては、『朝鮮史』を『支那民族発達史』の延長線上にある「朝鮮民族発達史」として位置づけることができる。
一方、1970年代のはじめ、 旗田は二冊の本、『朝鮮中世社会史研究』(1972)と『中国村落と共同体理論』(1973)を連続して刊行した。両者は、研究対象の時期及び地域からアプローチの方法まですべてにおいて異なっていたが、「共同体」に対する深い興味から村落社会の実態を明らかにしようとした点では共通している。ただし、中国村落の封建性に注目した旗田は戦後中国革命の成功可能性もまた高く評価してい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朝鮮中世史研究においては封建制欠如論の克服を何よりも優先的な課題とした。
旗田にとって「アジア」とは、いまだ封建的遺制から脱皮していない停滞した社会であると同時に、資本主義への移行が担保されていない革命的力が潜んでいる場所でもあった。老年の彼は『朝鮮史』に対する自己反省の上で新しい通史を叙述しようとしたが、その計画は彼の死とともに中断されてしま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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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동아문학자대회와 일제 말 동양주의 언설 -상호주의와 황도주의의 충돌을 중심으로-

저자 : 곽형덕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1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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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제1회와 2회 대동아문학자대회 회의록에 나타난 동양주의에 초점을 맞춰서, 상호주의와 황도주의 언설을 둘러싼 충돌/갈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했다. 특히 일본 대표와 중국 대표가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황도주의 언설을 둘러싸고 미묘하게 충돌하면서 균열이 표면화됐다. 제2회 대회에 참석한 중국 작가들은 '동양 고유의 사상', '도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일본과 중국 사이의 문화적 유사성만이 아니라 은연중에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천황을 그 정점으로 받들어 모시는 상징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작가들이 내세운 동양주의 또한 황도주의 언설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한편, 대동아문학자대회에 등장하는 중국은 크게는 세 가지 세력으로 나뉜다. 일본에 협력적인 남경 국민정부, 일본에 적대적인 중경의 국민당정부와 연안의 공산당이 그것이다.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한 중국 작가들은 남경 화평지구에서 왔으며,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중경(국민당) 문화인 포섭이었다. 화평지구에서 참석한 중국 작가들은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일본 중심주의를 견제하고 상호주의를 내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최근 발굴된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와 관련된 기록에서도 두드러진다. 3회 대회에서 돌출되는 것은 일본 중심주의의 현저한 약화이며, 이는 중국 작가들의 태도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가 더 이상 황도주의만을 단호하게 외쳐댈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개최됐음을 알 수 있다. 제2회 대회에서 절정에 달했던 황도주의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제3회 대회에서 눈에 띄게 약화됐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내세워진 동양주의는 '반서구 동양 담론'으로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지만, '문화공동체 담론'에서는 중국과 일본 작가 사이에 미묘한 충돌을 야기했다. 하지만 그 균열/노이즈는 '지배적 언설'을 부정하는 형태였다기보다는, 틈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확보하는 정도로 기능했다. 균열/노이즈는 동양주의 언설의 틈새이기도 했다.


本稿は第一回と第二回大東亜文学者大会の議事録に表れた東洋主義に焦点を当て、相互主義と皇道主義言説の衝突/葛藤を分析した。特に大東亜共栄圏の論理と皇道主義言説が衝突することが確認できる。第二回大会に参加した中国の作家たちは「東洋固有の思想」や「道義の精神」を強調しながら、日本と中国の間の文化的類似性を認めながらも、ひそかに中国文化の優秀性を主張した。しかし、日本が打ち出した大東亜共栄圏は「日本の天皇をその頂点に奉る象徴空間」だったので日本の作家たちが主張した東洋注意も、結局は皇道主義に含まれる。一方、大東亜文学者大会に登場する中国は大きくは三つの勢力に分かれる。日本に協力的な南京の国民政府と日本に敵対的な重慶の国民党政府や延安の共産党がそれだ。大東亜文学者大会に参加した中国の作家たちには重慶(国民党)の文化人を包摂するよう要求された。しかし和平地球から参加した中国の作家たちは、大会における日本の優位を認めながらも、強引な日本中心主義を相互主義で牽制しようとした。これは、最近、発掘された第3回大東亜文学者大会と関連する記録からも確認できる。3回大会で際立つのは、日本中心主義の著しい弱体化であり、これは中国の作家たちの態度の変化から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もはや皇道主義だけを叫ぶことができない時間の中で3回大会は開催されたことになる。3回大会で確認できるのは、日本の敗戦が近づくにつれて、第2回大会で頂点に達した皇道主義の言説が機能しなくなったことである。3回に亘る大東亜文学者大会における東洋主義とは「反西洋の東洋主義」としては機能したものの、「文化共同体の言説」としては東北アジアの作家たちの間で微妙な衝突を引き起こした。しかし、その亀裂/ノイズは「支配的言説」を否定するほどの力というよりは、自分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自尊心をひそかに確保するほどのものでしかなかった。亀裂/ノイズは大東亜文学者大会における東洋注意言説の隙間でも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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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한 일본문학가의 조선 체험과 문학 -가토 다케오, 기쿠치 간, 기무라 기를 중심으로-

저자 : 윤미란 ( Yun Mira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3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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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여 발언을 하였으며 대회 전후로 조선과 관련된 글을 남긴 일본작가인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기쿠치 간(菊池寬), 기무라 기(木村毅)의 조선 체험과 조선관을 살펴보았다.
가토 타케오와 나가요 요시로(長與善郞)는 만주나 중국에서 촉발되어 조선에 대한 관심이 생김에 따라 조선을 만주나 중국과 비교하면서 조선을 인식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제의 '대동아정신'을 적극 이행하며 조선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조선 인식 속에는 '대동아정신'의 이상과 현실의 충돌 및 모순이 엿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기쿠치 간은 마해송을 예로 들어 '대동아정신'의 구현을 실천하였다며 자부하는 한편 당시 일본은 이러한 실천이 부족하였음을 패전 직후 비판하였다. 마지막으로 청년 시절 일제의 군인으로서 조선을 겪어본 기무라 기는 패전 후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을 떠올리며 '대동아정신'의 모순점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This thesis examines the Joseon experience and view of Joseon by Japanese writers like Kato Takeo(加藤武雄), Kikuchi Kan(菊池寬), and Kimura Gi(木村 毅) who attended and spoke at the Great Eastern Asian Writers Conventions(大東亞文學者大會).
Kato Takeo and Nagayo Yosiro(長與善郞) recognized Joseon by comparing Manchuria and China with Joseon as they became interested in Joseon from Manchuria or China. At the same time, they showed awareness of Joseon by actively implementing the 'Great Eastern Asia Spirit(大東亞情神)' of the Japanese Empire. In this perception of Joseon,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between the ideal and reality of the 'Great Eastern Asia Spirit' were also glimpsed.
On the other hand, Kikuchi Kan was proud to say that he practiced the “Great East Asia Spirit,” taking the Ma, Haesong(馬海松) as an example, while He criticized the Japanese Empire for not having such a practice. Lastly, Kimura Gi, who experienced Joseon as a soldier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s a young man, raised an objection to the contradiction of the 'Great Eastern Asia Spirit', recalling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20 years after the defeat of Pacific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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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역과 선교: H.G.언더우드의 중문 기독교문헌 번역(1886-1896)

저자 : 이고은 ( Lee Goeu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6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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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국 개신교 전래 초기에 내한하여 전도와 교육, 의료, 출판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행적을 남긴 미국 개신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가 중문 기독교 문헌을 한글로 번역했던 정황을 조명한다. 언더우드가 1886년 무렵부터 중문 기독교 문헌을 다수 번역하여 조선성교서회와 삼문활판소를 통해, 또는 개인적으로 발행했던 1890년대 중반까지로 연구의 범위를 설정한다. 먼저 언더우드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중문 기독교 문헌을 소개하고, 그가 19세기 중국의 개항장 상하이를 중심으로 발행된 수많은 기독교 문헌 중 어떤 것을 가져다 번역했는지 선택상의 특징을 이야기한 뒤, 그가 번역에 힘쓴 동기와 중문 기독교 문헌을 입수하게 된 정황, 언더우드 주변의 번역자와 독자에 대해 논한다. 마지막으로 연구상의 난제로서 서적의 발행연도ㆍ발행처 표기가 불분명한 점, 영문ㆍ중문 제목의 일관성 결여, 그로 인해 같은 책이 다른 선교사에 의해 중복 번역되었을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This study shed light on the context in which Horace G. Underwood (1859-1916), an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y who left important achievements in evangelism, education, medical, and publishing in Korea in the early days of Korean Protestantism. The scope of this study spans from 1886 up to the mid 1890s, when he introduced a number of Chinese Christian literature to Korea and have them translated into Korean. I provide a table of Chinese Christian texts and their Korean translations known to have been translated by H.G. Underwood to discuss some features of his selection books, how he obtained those book, what motivated him to produce those translations. In addition, attention is paid to the translators around Underwood and the readers of those books. Finally, I suggest several research conundrum, such as the unclear year and place of publication of the translations, the lack of consistency in English and Chinese titles, and the possibility of duplication of translation works by other miss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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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00~1940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와 서양인들의 한국 연구

저자 : 이영미 ( Lee Yeong-m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3-1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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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6월 16일 서양인 17명이 서울 유니언(Seoul Union) 독서실에 모여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하 '한국지부'로 줄임)를 창립하였다. 한국지부는 1824년 왕의 칙허를 받은 영국 학회의 지부를 표방하였으나 런던보다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의 의지로 설립되었고, 다른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본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으면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고 학술지 『한국지부 회보(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이하 '『회보』'로 줄임)를 간행하였다. 이 단체는 창립 초기 다소 어려움을 겪었으나 1910년대 초 자리를 잡았으며,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미국인 선교사들을 강제 귀국시킬 때까지 약 30년간 국내외 서양인들에 의한 한국 연구의 본진으로 기능하였다. 1947년 12월 18일 소수의 영미권 인사들에 의하여 재조직되어 작년에 창립 120주년을 맞았다.
이 논문은 1940~1940년 한국지부의 초기 역사를 1900~1916년, 1917~1928년, 1929~1940년의 3개 시기로 구분하여 다룬 결과 다음과 같은 고찰을 얻었다. 첫째,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게일은 존스와 헐버트가 한국을 떠난 후 한국지부의 정착에 기여하였다. 둘째, 한국 연구에 진정한 열정을 가진 영국국교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트롤로프(Mark N. Trollope, 1862~1930)는 존스, 헐버트, 게일과 마찬가지로 '선교사 겸 학자'였던 랜디스(Eli B. Landis, 1865~1898)의 영향으로 한국지부 초창기에 『회보』에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1917년 이래 거의 매년 한국지부 회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동료 선교사들이 한국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셋째, 1920년대 말부터 미국 선교사 2세들이 한국지부를 이끌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노블(Harod J. Noble, 1903~1953)과 맥큔(George M. McCune, 1908~1948)은 한국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학계에 진입하였다. 비슷한 시기 천주교 선교사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3~1974) 역시 한국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한국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On June 16th, 1900, seventeen Western people gathered at the reading room, Seoul Union, and founded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Korea Branch). It was established as a branch of the British academic association which received its charter in 1824, but its founding fathers were residents in Korea, rather than those in London. They held regular meetings for research presentation and published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Transactions). They barely received intervention of the headquarters. It settled in the early 1910s after some difficulty, and had been the center of Korean studies for about thirty years until the Japanese forced American missionaries to leave Korea. It was reestablished by a few American and British people on December 18th, 1947. Last year saw its 120th year.
This article reviews the early history of the Korea Branch between 1900 and 1940, and divides it into three stages (1900-1916, 1917-1928 and 1929- 1940). First, George H. Jones (1867-1919), Homer B. Hulbert (1863-1949) and James S. Gale (1863-1937) had a major role in its foundation. Especially, Gale contributed to its settlement after Jones and Hulbert left Korea.
Secondly, some Anglican missionaries had a real enthusiasm for Korean studies. Under the influence Eli B. Landis (1865-1898), missionary and scholar like Jones, Hulbert and Gale, Mark N. Trollope (1862-1930) published his research to Transactions in the initial period. He had been elected as president almost every year since 1917, and helped his colleagues study Korea.
Finally, in the end of 1920s, second generation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 started leading the Korea Branch. Among them, Harold J. Noble (1903-1953) and George M. McCune (1908-1948) got a doctor's degree in Korean studies and entered the world of academia in the United States. Around the same time, Andreas Eckardt (1883-1974), Catholic missionary, got a doctor's degree as well and became a pioneer in Korean studies 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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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뚱딴지'의 단어 구조와 사전 뜻풀이 분석

저자 : 홍석준 ( Hong Seok-ju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3-21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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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뚱딴지'의 단어 구조와 사전 뜻풀이를 분석하고, 동음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뚱딴지'는 주로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너무 엉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돼지감자'와 '애자(碍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뚱딴지'의 단어 구조와 동음관계에 대한 국어학적 분석은 찾을 수 없고, 신문 칼럼 몇 편에서 대략적인 분석을 찾을 수 있으나 정확한 근거가 부족하다. '뚱딴지'는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 단일어로 분석했으나, '뚱하다'의 어근 '뚱'과 접미사 '딴지'가 결합한 파생어로 분석된다. '딴지'는 'X단지' 단어족의 단어 구조 'X+단지'를 'X+딴지'로 재분석하여 얻어진 것이다. 사전들에서 '뚱딴지'의 의미항목이 변화하는 과정을 검토하면, '엉뚱한 사람'을 뜻하는 '뚱딴지'가 먼저 있었고 '애자(碍子)'와 '돼지감자'를 가리키는 '뚱딴지'가 나중에 등장한다. '애자(碍子)'와 '돼지감자'의 속성과 생김새가 '뚱딴지'의 속성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에도 똑같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속성의 유사성에 근거한 은유가 작용하여 명칭을 차용(借用)한 것이다. 지금은 이 세 '뚱딴지'의 의미적 거리가 아주 멀어졌으므로 사전에서도 이들을 동음어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word structure and dictionary definitions of 'ttungttanji(뚱딴지)' and explain homonymy. 'Ttungttanji(뚱딴지)' is usually used to mean “blunt person”, and is also used as a name for “pork potatoes(돼지감자)” and “insulators(애자, 礙子)”. 'Ttungttanji(뚱딴지)' is analyzed as a derived word combining the root 'ttung(뚱)' of 'ttunghada(뚱하다)' and the suffix 'ttanji(딴지)'. 'Ttanji(딴지)' was obtained by reanalyzing the word structure 'X+단지' of the 'X단지' word family as 'X+딴지'. If you look at the process of changing about the meanings of 'ttungttanji(뚱딴지)' in the dictionaries, 'ttungttanji(뚱딴지)' was first, which means “blunt person”, and 'ttungttanji(뚱딴지)' referring to “pork potatoes” and “insulators” later appears. They were given the same name because the attributes and appearances of 'insulators' and 'pork potatoes' are similar to those of 'ttungttanji(뚱딴지)'. This is a metaphor based on the similarity of the attribute and borrowed the name. Now that the meaning distance between the three 'ttungttanji(뚱딴지)'s has become far distant, it is desirable to treat them as homonyms in the dictionary.

KCI등재

8서해 중부 도서 지역어 연구

저자 : 한성우 ( Han Sungwo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4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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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해 중부 도서 지역어의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본고의 대상 지역인 서해 중부 도서는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지역의 여러 섬을 가리킨다. 이들 섬의 언어가 인근 육지 및 다른 섬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고 변화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 지역은 인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인천 연안도서, 강화도, 서해5도로 세분할 수 있다. 인천 연안도서 중 인천에 인접해 있는 섬들은 경기권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서해5도는 황해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권과 황해권 중간에 위치한 강화 지역은 경기-황해 전이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충청방언의 특성이 나타나는 경기 남부 지역은 경기-충청 전이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지역어는 중부방언의 특징을 공유하며 각 권역별로 고유한 특징을 보인다. 이와 함께 도서 지역으로서 주변성, 공통성, 불연속성 등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성도 보인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황해도 지역과의 단절, 행정구역 개편 등에 따라 이 지역어는 매우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방언의 탈색화와 인천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the language of the central island of the West Sea. The central island of the West Sea refers to several islands in Gyeonggi-do, Chungcheong-do, and Hwanghaedo. This paper aims to show how the languages of these islands were formed and changed in relation to the neighboring lands and other islands. Since this region is closely related to Incheon, it can be subdivided into Incheon coastal islands, Ganghwa Island, and the five northwestern border islands. Among the coastal islands of Incheon, the islands adjacent to Incheon can be classified as the Gyeonggi region, and five northwestern border islands can be classified as the Yellow Sea region. The Ganghwa region located between the Gyeonggi region and the Yellow Sea region can be divided into the Gyeonggi-Yellow Sea transition region. Lastly, the southern region of Gyeonggi Province, whe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ungcheong dialect appear, can be divided into the Gyeonggi-Chungcheong transition region. These regional languages sh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central dialect, while each region has its own characteristics. At the same time, as an island region, characteristics that distinguish it from other regions such as periphery, commonality, and discontinuity are also seen. Due to the break with the Hwanghae-do region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 re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the regional language is changing very rapidly. These changes can be characterized by the decolorization and Incheonization of dialects.

KCI등재

9한국어 학습자 음성 자료의 전사 방식에 대한 연구 -발음 교육용 음성 자료 구축을 위하여-

저자 : 하신영 ( Ha Shin You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5-26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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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어 학습자의 발음 교육 연구를 위해 학습자 구어 말뭉치를 구축하여 가공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전사 방식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한국어의 음성 자료를 대상으로 한 말뭉치는 사용 목적에 따라 철자법 전사, 음소 전사, 음성 전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축된 말뭉치 자료들은 대개 철자법 전사를 적용하여 원시 말뭉치를 구성했기 때문에 발음과 관련된 특징을 관찰하는 데에 불편함이 많았다. 대규모 학습자 말뭉치도 기본적으로 철자법 전사가 이루어졌고 음소 전사 방식이 부분적으로 적용되었으나 그런 방식으로 전사된 자료는 학습자의 발음을 관찰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고는 적어도 한국어 발음 교육의 분야에서 사용될 전사 자료는 음소 전사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1차적인 기준을 제안하였다. 덧붙여 음소 전사된 학습자 음성 자료의 예를 간단히 제시하였다.


This paper is a discussion on which transcription method to use in the process of constructing the learners' spoken corpus for the study of pronunciation education for Korean language. The corpus of spoken data can be transcribed in various ways, such as spelling transcription, phoneme transcription, and phonetic transcription, depending on the purpose of use. However, since most of the corpus materials constructed so far consisted of primitive corpora by applying spelling transcription, it was inconvenient to observe the characteristics related to pronunciation. Even a large corpus of learners was basically transcribed in spelling and partially transcribed by phoneme, but it was confirmed that data transcribed in such a manner was not suitable for observing learners' pronunciation. This paper asserts that at least transcription materials to be used in the field of Korean pronunciation education should be processed in a phonemme transcription method. And the primary criteria for phoneme transcription were presented. In addition, an example of phoneme-transcribed learner spoken data is briefly presented.

KCI등재

10한국어 '-더라'의 중국어의 대응 표현 분석

저자 : 송승남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7-2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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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한ㆍ중 대조 분석의 관점에서 한국어 '-더라'의 중국어 대응 표현에 대해 고찰하였다. 한국어 '-더라'는 '화자의 과거의 지각 행위'라는 증거성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선행 명제의 성격에 따라 그 의미를 '봄', '알게 됨', '느낌'으로 세분할 수 있다. 기존 연구는 대부분 한국어 '-더라'의 중국어 대응 표현을 '来着', 시태조사(时态助词)인 '了1', '过' 등으로 분석하였지만, 본 연구에서는 중국어의 증거성 표현 수단들에 입각하여 '-더라'의 대응 표현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 결과, '-더라'가 '봄'의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중국어의 '我看见/看到', '알게 됨'의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我发现', '느낌'의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我觉得/感到'와 대응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한국어 '-더라'에서 관찰되는 소위 '비동일주어제약'과 '동일주어제약'은 '我看见/看到'와 '我觉得/感到'가 쓰인 문장에서도 관찰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중국인을 위한 '-더라'의 교육 자료 및 교육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本研究从韩中对比分析的角度着手, 研究分析了韩语“-더라”的汉语对应表现。经分析韩语“-더라”具有“话者过去的知觉行为”的言据性意义, 根据先行命题的性质可以将其意义细分为“봄”、“알게 됨”、“느낌”。以往研究中, 多数研究将“-더라”的对应表现形式分析为“来着”, 或者时制助词“了1”、“过”等, 但本文立足于汉语的言据性表现方式, 考察了“-더라”的对应表现形式。结果证明: “-더라”在实现“봄”的意思时, 与汉语的“我看见/看到”相对应;在实现“알게 됨”的意思时, 与“我发现”相对应;在实现“느낌”的意思时, 与“我觉得/感到”相对应。此外, 所谓“-더라”的“비동일주어제약”和“동일주어제약”现象在“我看见/看到”和“我觉得/感到”出现的句子中也可以观察到。希望这样的研究对面向中国人的关于“-더라”的教育资料和教育方案的制定有所帮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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