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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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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734-03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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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9)~64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903
한국학연구
64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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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 정당정치기 사이토총독의 '문화정치'와 신간회

저자 : 전상숙 ( Jeon Sang Soo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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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는 일제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체였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16일 해소를 결정할 때까지 '합법적 민족운동 단체'로 존재했다. 이 글은 기존 연구 성과를 통해서 이루어진 이러한 신간회의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서의 존립이 가능했던 시기'에 주목했다. 일제하에서 신간회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될 수 있었던 '정치참여의 공간'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고, 이것이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재고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신간회 연구와 1920년대 일본의 정당정치기 조선통치에 관한 연구의 관점을 확장해 볼 필요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각적으로 이루어진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간회가 존속했던 '문화정치기'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가 존재한 '정치참여 공간'의 형성에 주목한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식민통치 방침을 변화시킨 하라수상을 필두로 한 일본의 정당정치와 조선통치, 그리고 이와 직결되어 '문화정치'를 실시한 사이토총독과 그의 조선통치방침을 제고하여, 신간회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돼 존재했던 '정치참여 공간'의 형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갖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지배정책으로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하 식민지 조선인의 삶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Shinganhoe' was the largest national coalition front fomulated by the alliance of the Nationalists and the Communists in Japanese Colonial era. Since its foundation on February 15th, 1927 until its disbandment on May 16th, 1931, it existed as the legal national movement organization. This paper focused on Shinganhoe's ability to exist as such organization: how the forum for a legal political participation was made possible and the meaning of such association in studying the history of Japanese Colonial rule. In doing so, this paper raises the need to expand the viewpoints in researching Shinganhoe and Japanese colonial rule in 1920's.
Especially, this paper places an emphasis on the formation of a “legal” political organization and 'cultural politics'. Therefore, prime minister Hara, who changed Japanese military rule of Joseon post the March 1st Movement, and Saito Governor-General of Joseon, who executed cultural politics, and their policies are closely studied to study the impacts of their policy on the formation of Shinganhoe. Through this study, the aim is to reinvigorate the interest in Korean's life and politic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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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과 식민지 체제의 균열적 성격-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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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신간회 운동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신간회의 재만동포옹호운동은 재만동포옹호동맹(이하 옹호동맹)을 매개로 전개되었다. 옹호동맹은 신간회 본부의 적극적 참여로 결성되었고, 신간회 지회는 옹호동맹의 지방 확산에 기여했다. 옹호동맹은 화교배척 반대 입장을 가지고 만주 조선인 학살 소문을 정정하고 재만 조선인 문제가 중국인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했다. 또한 중국인들과 우호적 관계 속에서 만주 조선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는 재만 조선인의 중국 입적 지지 주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재만 조선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인에게도 일본국적법을 적용해 탈적을 허용하라는 주장이기도 했다. 즉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제기된 사회적 의제는 조선 민족에게도 일본 민족과 동등한 법률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민족동권(民族同權)'이었다. 이처럼 신간회 운동은 외형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통치권을 전제한 개량적인 법적 권리 획득 운동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의 신민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민족동권의 논리가 일제의 재만 조선인 문제 해결의 방식과 달랐기 때문이다. 일제는 상조권 관철을 통해 만주 진출을 적극화하고 만주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서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일본국적법의 적용과 중국 입적을 통해 재만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옹호동맹의 견해와 충돌되었다. 만주 조선인들에게 일본국적법을 적용할 경우 이들은 중국 국민으로서 중국 법률의 보호를 받게 된다. 즉 재만 조선인의 국적이탈권(탈적권) 보장과 중국 입적 지지는 일제의 세력 범위에서 재만 조선인들을 제외시키려는 것이었다. 신간회 지회에서 기획한 강연회·연설회·주민대회와 지회대회는 이와 같은 주장을 조선인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려는 과정으로 이는 일제가 곧 만주 조선인의 보호자라는 허황된 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조선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이들의 삶이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될 필요가 없다는 의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간회 운동의 방향은 내선융화 이데올로기가 조선 민중의 의식에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사례에서 볼 때 신간회의 민족동권 운동은 조선 민중이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반식민주의적 효과를 꾀하면서 식민지 체제를 균열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explored aspects of that Singanhoe cracked the Japanese colonial regime focusing on a campaign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The campaign was developed through the Alliance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APMK). The APMK was made by the leaders of Singanhoe headquaters, and branches of Singanhoe contributed to the regional spread of the APMK. The campaign corrected rumors that Chinese slaughtered innocent Koreans in Manchuria and clarified that the deportation of Koreans was not caused by plain Chinese in Manchuria with the opposition to Koreans' attacks on the Chinese in the Korean Peninsula. In addition, the APMK declared to solve sufferings that Koreans were experiencing cementing friendly relations with Chinese and argued Manchurian Koreans' acquisition of Chinese nationality. This meant that the colonial state should have applied the Japanese Nationality Act to Koreans; therefore, the Singanhoe movement, represented by the campaign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was an ethnic equality movement to assert the same rights as Japanese and revealed itself as a kind of civil rights movement. However, it is very important that this played a role in disrupting the spread of the ideology of the harmony between Japanese and Koreans made by Japanese colonialists. If Koreans in Manchuria had been subject to the Japanese Nationality Act, they, as Chinese people, would have been protected by Chinese laws. This idea differed from the Japanese solution to protect Manchurian Koreans as Japanese subjects by giving them ownership of the lands. This showed that the APMK sought effectiveness to destabilize the image that the Empire of Japan was Manchurian Koreans' guardian. Also, this implicated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consider Koreans' lives improved in the prosperity of the Empire of Japan. Therefore, the Singanhoe movement, when figuring out in the case of the campaign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had anti-colonialism characteristic to help Koreans breaking away from the colonial ideology and played a part in cracking the colonial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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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30년 전후 합법적 정치 운동의 퇴조와 신간회를 둘러싼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저자 : 윤덕영 ( Yoon Duk-you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48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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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목적은 1930년 전후, 최린의 천도교 신파와 연결된 타협적 자치운동이 기독교계의 수양동우회와 기독신우회, 동아일보 등의 민족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신간회의 지도부도 포함하여 민족운동 세력내부에 광범하게 전개되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에 대신하여 1930년 전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정세 변화를 일본 제2차 중의원 보통선거와 식민지 조선의 제2차 지방제도 개정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천도교와 기독교계열, 동아일보 계열 등 민족주의세력의 실제 동향과 활동 양상, 신간회 김병로 중앙집행부의 조직 실상과 성격에 대해 해명하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 동아시아는 제국의 시대였다. 1920년대 정당정치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일본 특권세력들과 군부세력, 정당정치 핵심세력들은 식민지에 중의원 참정권을 부여하거나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3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방제도 제2차 개정은 이런 제국과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만들어지는 극히 제한되고, 권한도 별로 없는 지방정치 공간은 지방정치 참여의 의미를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1930년 2월 중의원 제2차 보통선거의 결과는 무산정당운동의 분열상만을 드러냈고, 일본사회의 민주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식민지 조선에서 합법적 정치운동의 공간을 대단히 축소시켰고, 그 전망을 어둡게 하였다. 당시 민족운동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1920년대 합법적 정치운동을 주도했던 동아일보계열은 일본 정계 변화 및 중국 국민혁명의 전개에 주목하면서 그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운동 노선과 방향을 수정하여 갔다. 그들은 중의원 제2차 보통선거의 결과와 식민지 지방제도 2차 개정을 통해 조선에서 자치의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판단했고, 합법적 정치 운동에서 사실상 후퇴했다. 반면에 천도교 신파는 정세와 무관하게 자치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가졌던 천도교세력들은 민족협동전선운동에 비판적이었고, 독자 활동에 주력했다. 기독신우회의 주요 인물들은 신간회에서 활동을 하였고, 천도교 신파와 연결되어 자치운동을 추진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세력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은 사회참여에 반대하는 기독교 보수 세력과의 갈등 속에 침체상태에 있었다.
신간회 허헌 중앙집행부나 민중대회사건이후 구성된 김병로 중앙집행부나 그 인적 구성과 조직 성격에 큰 차이가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적극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좌익사민주의자라 불리는 인물들도 있었고, 당재건운동과 혁명적 농노조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합법적 정치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신간회의 활동내용에서도 이전과 달라진바가 크게 없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hat, first, the compromising Self-governing movement connected to Linchoi's Cheondo-gyo sect around 1930 was a national movement that included the leadership of Singanhoe as well as nationalist forces such as Suyang donguhoe, Gidoksinuhoe, and Dong-A ilbo. Second, I would like to examine the changes in the situation in Japan and colonial Joseon around 1930, focusing on the second common election of the Japanese Imperial Council and the second revision of the local system of colonial Joseon. Third, it is to explain the actual trends and activities of nationalist forces such as Cheondo-gyo, Christian, and Dong-Ailbo, and the organizational reality and nature of the organization of the Singanhoe Kim Byeong-ro Central Executive.
The Dong-A ilbo group, who led the Lawful Political Movement in the 1920s, judged that self-government became impossible in Joseon, and virtually retreated from the Lawful Political Movement. On the other hand, the Cheondo-gyo new faction, which had the most powerful organizational power within the nationalist force, conducted a self-governing movement regardless of the political situation. The main characters of Gidoksinuhoe were active in Singanhoe, and they did not promote the Self-governing movement in connection with the Cheondo-gyo new sect. The Singanhoe Kim Byeong-ro Central Executive Department did not differ significantly from the previous Central Executive Department in its personnel composition and organizational characteristics. While the nationalists took the initiative, various socialists took part. There was a consensus among them about the necessity and importance of the Lawful Politica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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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우회와 신간회의 연대성 검토

저자 : 김정인 ( Kim Jeong-i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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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협동전선에 기반한 민족유일당을 지향하며 등장한 신간회와 여성운동의 협동전선으로 출현한 근우회는 사건 혹은 사안별로 양자 간의 연대기구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았다. 근우회와 신간회 간의 연대는 '자매단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창립 초기 1년간 집중적으로 상호 지지를 표명하는 선언적 연대가 주를 이뤘다. 그나마 근우회와 신간회에서 동시에 활동한 여성운동가들을 통한 인적 연대는 양자가 해소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실천면에서 볼 때 두 단체의 활동 초기에 발발한 숙명여고보 맹휴사건에서 학부형회라는 공동대응기구에서 함께 행동하는 면모를 보였지만, 활동이 차츰 위축되던 시기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는 여학생 연대를 지도하고 지원하거나 전국적 연대를 촉구하는 민중대회 계획을 준비하는 등 별도로 대응하는 간접적인 연대에 그쳤다. 이처럼 근우회와 신간회 각각은 연대체이면서도 양자 간의 직접적인 연대를 시도하지 않았으며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느슨한 연대로 각립했다.


Shin'gan-hwe was an organization which surfaced in the 1920s, calling itself the one and only party representing the Korean race based on a cooperative front. On the other hand, Geun'u-hwe was an organizational body created by a cooperative front in the Women's movement. These two organizations never worked together or created a cooperative committee, even on individual issues or cases. They were called as 'sister organizations,' but their cooperation lasted merely a year, during which they did declare their support of each other, in the very early stage of both of their foundations. One may say it was only an exchange of supportive words and nothing more. What did exist between the two bodies was a marginal human connection, enabled through the Feminist movement activists who were involved with both organizations. Such connection remained till both of them were dissolved.
In the early days, when students of the Sukmyeong High/Middle school for Girls (“Sukmyeong Yeo-gobo”) entered an allied strike (refusal of classes), both organizations cooperated with each other within the confines of a response committee named the Parents Association. But when the Gwangju Students Movement broke out, both organizations were in pretty bad shape, and they only responded to the situation separately, like together just making preparations for the People Convention under the goal of guiding, supporting and overall promoting School girls' alliances all across the country. As we can see, Geun'u-hwe and Shin'gan-hwe stood independently till the end, never attempted any organizational alliance, but maintained its mutually supportive stance as well as a low-key cooperation with each other, in social movements nonethe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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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보산 사건과 아동문학-신의주 반중국인 폭동을 다룬 김우철의 소년소설-

저자 : 원종찬 ( Won Jong Cha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2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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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만보산 사건(1931)에서 촉발된 신의주 반중국인 폭동을 다룬 김우철의 소년소설 「왕매란과 순녀」(1937)에 대한 발굴 보고이다. 만보산 사건과 관련된 작품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 왔으나, 아동문학 분야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작품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렇다 할 논의가 뒤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찾은 김우철의 소년소설은 중일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만보산 사건과 반중국인 폭동을 불러와서 그 비극성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 가운데, 만보산 사건 당시 국내 거주 중국인 피해자를 주요 등장인물로 삼은 것은 한국문학을 통틀어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1931년 7월 초순경 전국 각지로 번져나간 반중국인 폭동은 한국인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윤리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차별과 혐오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김우철의 「왕매란과 순녀」는 아동문학을 넘어서는 한국문학의 뜻 깊은 유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n excavation report on the juvenile novel < Wang Mae-ran and Sunnyeo > (1937) dealing with the Anti-Chinese Riots in Sinuiju as a result of the Wanbaoshan Incident (1931). Works related to the Wanbaoshan Incident received a great deal of interest from academic circles, but because there are no works related to this incident in the children's literature sector, it was not followed with much discussions. However, the newly discovered juvenile novel by Kim Woo-cheol is on painfully looking back at the tragedies of the Wanbaoshan Incident and Anti-Chinese Riots.
Among the known works, this may be the only work in Korean literature that uses Chinese victims living in Korea during the Wanbaoshan Incident as a key character. In early July of 1931, the Anti-Chinese Riots that spread throughout the entire nation has become an ethically traumatic experience that Koreans don't want to remember. When considering today's situation where issues on discrimination and xenophobia are becoming more and more severe, < Wang Mae-ran and Sunnyeo > can be judged to be a meaningful heritage for not just children's literature but all of Korean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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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용정(龍井) 로컬리티'의 형성과정-용정 공간의 형성과정과 사상·종교의 유입을 중심으로-

저자 : 천춘화 ( Qian Chunhua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4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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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만주(滿洲) 조선인사회의 중심은 간도(間島)였고, 간도의 서울은 용정(龍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정의 위상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 식민지말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야 비로소 극히 제한적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본고는 이러한 용정의 지역적 특성을 '용정 로컬리티'의 형성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하였다. 공간적으로 용정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용정촌(龍井村)'과 '명동촌(明東村)'을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1900년대부터 시작된 학교건설운동은 용정을 만주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였다. 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수용의 주요 통로로도 작용하였다. 특히 명동학교(明東學校)는 북간도 기독교 수용과 전파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3.1운동 전까지의 용정은 민족의식과 기독교사상이 거의 동시적으로 유입되었던, 민족의 자주독립을 고취했던 교육·투쟁의 공간이자 민족 정체성의 장소였다.


The center of Joseon People's society in Manchuri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period was Gando, and the capital of Gando was Longjing (Yongjung). However the stature of Longjing (Yongjung) hardly gained attention, and it was recognized very limitedly, as study on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period became invigorated in the 2000s. This paper aimed to examine the local characteristics of Longjing (Yongjung) from the aspect of Longjing (Yongjung) locality. In terms of space, Longjing (Yongjung) started to be gradually formed, centered on Longjing (Yongjung) Village and Myongdong Village during the end of the 19C and early 20C. The school construction movement that began in the 1900s reinvigorated Longjing (Yongjung) as the national education hub of Manchuria. Schools not only became the center of nationalism education, but worked as a major channel for acceptance of Christianity. Myongdong School was an important source of acceptance and spread of Christianity in North Gando. Longjing (Yongjung), where national consciousness and Christian thought almost simultaneously flew into by the 1910s, was a space of educational struggle that inspired national independence and a place of nation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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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혼성어 개념에 대한 재검토

저자 : 양정정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9-28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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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어는 두 개 이상의 낱말이 합쳐져 혼합된 뜻을 가지게 된 낱말을 말한다. 혼성어의 형성이 현재 매우 왕성하게 진행 중인 단어 형성 과정이라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 왔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혼성의 형성 과정에 동시에 '절단'과 '결합'이라는 두 가지 형식적 조작을 거쳐 형성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합성' 또는 '파생'이라는 단어 형성 기제와 다른 양상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해 왔다. 하지만 그 동안의 대부분 논의에서는 주로 혼성어가 형성될 때 수반되는 형태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혼성어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새로운 의미의 파생을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했다.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하려면 혼성어가 새로운 의미 변화가 이루어진 새로운 단어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금까지 선행 연구에서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하면서 의미 변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형태적 특성에만 집중하여 혼성어를 정의하면 혼성어가 다른 개념들과 혼동되어 있다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혼성어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는 의미 변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먹방'과 같은 신어는 '라볶이'처럼 처음 생성될 때부터 새로운 의미로 생성된 것은 아닌 듯하다. 본고에서는 혼성어의 형성 과정 중 일차적인 의미 변화를 중요시하며 약어로 형성된 후 의미 확대가 일어난 경우를 혼성어로 보지 않기로 한다.


混成詞是由兩個或多個詞組合而成的具有混合意義的詞。現在混成詞的形成是一個非常活躍的構詞過程, 因此引起了很多研究者的關注。在目前的討論中, 混成詞同時經曆了“切斷”和“結合”兩種形式上的操作而形成, 這點與傳統的韓國造詞法“合成”或“派生”不同, 因此混成詞被看作一種新的造詞法。然而, 迄今爲止的討論大多把重點放在了混成詞的形成過程中伴隨的形態特征上, 意義的變化被視爲次要的。但是要想把混成詞看做一種新的造詞法,必須把混成詞的意義變化作爲前提。先前的研究中一邊把混合詞看做一種新的造詞法, 一邊將意義變化視爲次要的, 互爲矛盾。另外, 用形態特征來定義混成詞, 不可避免地會導致混成詞與其他概念混淆。因此, 在定義混成詞時, 最好將意義的變化視爲最重要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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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차별 언어와 대안어의 성격-<서울시 성평등 언어 사전>(2018~2020)의 '성평등 단어'를 대상으로-

저자 : 김소영 ( Kim So-yeo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1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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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민감도가 증가하면서 차별 언어에 대한 대안어를 제시하는 작업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성차별어는 차별 언어 개선에 대한 움직임이 적극적인 분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해 온 <서울시 성평등 언어 사전>(2018~2020)역시 그러한 성격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지적된 성차별어는 크게 남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 표현을 사용하는 유형, 남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반영하는 유형, 여성 관련 단어 중 사회적 인식 및 관점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한편 성차별어의 대안어는 제3의 단어로 기존 성차별어를 대체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며, 성별 제거, 성별 통합, 표현 대칭화 역시 대안어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차별어를 선정함에 있어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어의 의미를 어디까지 이해할 것인지와 비유적 표현의 차별성을 인정할 수 있을지가 관련 쟁점이 될 수 있으며, 대안어의 선정 과정에서는 대안어가 기존 차별 언어의 원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지와 대안어 자체가 의미 분화의 가능성은 없는지 고려해야 한다. 차별 언어에 대한 대안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향후 대안어를 평가하고 새로운 대안어를 만드는 방향성을 논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As social sensitivity to discrimination increases, the work of presenting alternative words for discriminatory language is actively taking place in various fields of society. Gender discrimination can be said to be one of the areas where the movement to improve discriminatory language is active, and < Seoul Gender Equality Language Dictionary >(2018-2020), which has been published by the Seoul Women's and Family Foundation, is also such. Sexist words pointed out as problems here are largely divided into types that use male-centered language expressions, types that reflect stereotypes about men and women, and types that need to change social perceptions and perspectives among women-related words. On the other hand, alternative words of gender discrimination are mainly used as another words to replace existing gender discrimination words, and gender removal, gender integration, and expression symmetry are also used as alternative words. In selecting a discriminatory word, how far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Chinese characters constituting the word and whether the differentiation of figurative expressions can be recognized can be related issues. In addition, in the process of selecting an alternative word, it is necessary to consider whether the alternative word can maintain the original meaning of the existing discriminatory language and whether the alternative word itself is likely to differentiate meaning. Understanding the nature of alternative words for discriminatory languages is expected to contribute to evaluating alternative words in the future and discussing the direction of creating new alternative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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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게' 염자도의 주제 연구

저자 : 서성 ( Seo Sung ) , 강희안 ( Kang Hee Ah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3-34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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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게' 염자도(廉字圖)에 나타난 '게'의 형상 및 화제(畫題)를 둘러싸고 모호하게 해석된 점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그림의 주제 해석에 있어서도 조선 시대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근거를 찾아내 더 적절한 독해를 시도하였다. 먼저 '게'의 해석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화제를 '염계한천, 전퇴후퇴'[廉溪寒泉, 前退後退]로 정하고, “염계선생 주돈이와 한천정사를 세운 주희는, 처음에도 물러났고 나중에도 물러났다.”고 풀이하여 두 사람의 염퇴 정신을 기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조선 시대 '게'에 관한 문화적 인식을 「곽삭전」과 「무장공자사」 등에서 찾아냈으며, '물러남'을 높이 치고 '나아감'을 비판하는 보편적인 인식도 확인하였다. 또 주돈이와 주희의 행적에 대해서도 소동파와 송 효종이 '염퇴'(廉退)라 평가하였음을 보고, '게' 염자도의 주제가 '염퇴'라고 판단하였다. '염퇴'는 사양하고 양보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지만, 사회적 맥락에서는 벼슬을 물리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염퇴'의 정신은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나라의 기강과 사회의 기풍과도 관련되기에 더욱 중시되었다. '게'는 걸핏하면 뒷걸음질을 쳐 제 집으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게' 염자도는 상단의 게로 형상화된 선비가 벼슬을 물리치고 염퇴하여 글자 획으로 얽혀진 은자의 '세 갈래 길'이 있는 정원에서 염결한 정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해독할 수 있다. 그 길에서 소나무와 국화를 완상하며 도연명의 염결을 떠올릴 수 있고, 수석을 감상하고 배를 타며 육적의 청렴을 본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게' 염자도는 상하구조를 통합하여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도록 구성하였고, 문자의 자획들이 자획이면서 동시에 조형 형상이 되도록 설계하여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자체적인 문화적 기호로 '게'의 형상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점과 조선의 염퇴 문화를 간결한 형상과 자획으로 절묘하게 통합한 점은 '게' 염자도가 어느 문자도보다 뛰어남을 보여준다.


This research found problems about the 'crab' image and the subject of the 'crab'-type 'Yeom' word picture[廉字圖], which was solved by vagueness, and tried to solve it. We found evidences in the cultural background of the Joseon Dynasty and tried a more appropriate solution.
First, the title written in the picture, which is an important part of the unraveling of 'crab', is confirmed as “廉溪寒泉、前退後退”, Which can be traslated to “Zhou Dunyi[周敦頤] called as Mr. Lianxi and Zhu Xi[朱熹] who built Hanquan school, retired at first and continued to retire later.” In order to discuss this, we find cultural concepts related to 'crab' in the Joseon era in "The Story of Kwaksak"[郭索傳] and "Bowelless gentleman"[無腸公子辭], and we also confirmed there was raise 'retreat'[退] and criticize 'move forward'[進] concepts. Also, regarding the career of Zhou Dunyi and Zhu Xi, seeing that Su Dongpo[蘇東坡] and The Emperor Song-Xiaozong[宋孝宗] described it as 'Yeomtoe'[廉退], we found the theme of the 'crab'-type 'Yeom' word picture is 'Retreat'. 'Yeomtoe' is a humble attitude to sneak around, but in a social context, it is a deed to specify or retire from the official office. This 'Yeomtoe' spirit was further emphasized in the fact that the Joseon of the Confucian nation was swayed by the Confucian tradition and the style of the society.
Since they read the subject as “前進後退” in the previous study, They saw that 'crab moved forward and backward, but the fact was that it walk behind and retreat to its house. With these backgrounds, let's take a look at the 'crab'-type 'Yeom' word picture, the upper crab is embodied in a scholar, he retires from his office and is training a clean mind in the garden with hermit's 'the three-path' intertwined with strokes. He can watch pine and chrysanthemums along the way, think of Tao Yuanmng[陶淵明]'s clean mind, watch longevity stones or ride a little boat to imitate Lu ji[陸績]'s integrity. In this way, the 'crab'-type 'Yeom' word picture was designed so that the upper and lower structures were integrated, and the character stroke was designed to be a stroke but at the same time a figure, achieving a high degree of artistic perfection. Best of all, Joseon's self-made cultural notes creatively use the figure of 'crab', and the Joseon Dynasty's 'Yeomtoe' culture is exquisitely integrated with concise shapes and strokes to create an overall composition, it makes the 'crab'-type 'Yeom' word picture was superior to any Munjado[文字圖].

KCI등재

10유신체제와 검열, 검열체제 재편성의 동력과 민간자율기구의 존재방식

저자 : 이봉범 ( Lee Bong Beom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45-406 (6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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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박정희정권의 의사헤게모니 지배-프로파간다-검열체제의 동력학이란 구조적 역학의 관점에서 1970년대 검열체제의 확대 재편을 재구성하고, 사회통제의 하위양식으로서 검열의 위상과 그 기능을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국가안보를 지배이데올로기로 한 국가비상사태-유신헌법-긴급조치의 법제도적 토대 위에서 구사되었는데, 사회·문화정책도 이러한 기조와 방향에 종속되어 입안·배치되었다. 검열 또한 프로파간다 및 문화통제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변화무쌍한 변동을 거친다. 지배/저항의 분극화 현상이 촉진되면서 검열전선의 경직화를 고조시켰다. 1970년대 검열의 심층과 정점에는 합법적 검열자 중앙정보부가 존재한다. 중앙정보부는 대내외 심리전, 프로파간다, 검열을 일사불란하게 기획·통제하는 빅 브라더였다. 총력안보체제의 제도화를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발동된 긴급조치를 계기로 검열의 수위와 진폭이 최대치로 증대하면서 한국검열사의 종합전시장을 이룬다. 첫째, 행정입법의 강화를 통해 전면적·공세적 검열이 극대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언론 규제의 양산, 퇴폐 규제의 본격화,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검열 기조 등이 수반되고 식민지검열의 유제가 재생되기도 했다. 둘째, 통제의 표적이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까지 미친 가운데 표적이 된 검열대상에 대해서는 사회적·문화적 기반을 붕괴시키는 수준으로 진전된다. 행정지도를 동원하여 제도적 검열의 구성적 외부까지 통제했다. 셋째, 긴급조치시기 민간자율기구의 위상이 재정위되면서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통제가 전면화 된다. 법정기구화를 기반으로 대중문화예술을 총력안보의 정략적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프로파간다의 범용성보다는 부정적 통제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 문제를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퇴폐, 왜색, 저질 등은 반국가적 요소로 규정되면서 국민총화를 좀먹는 사회 내부의 적이자 명백한 이적행위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상검열의 부재, 미풍양속 저해에 대한 검열이 압도적이었던 심의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긴급조치가 무기한으로 연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런데 전면적 검열에 따른 사회·문화에 대한 강압적 통제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쇄시킨 최대장애물은 자유민주주의를 염원한 건전한 국민들이었다. 유신체제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절차적 원리를 통해 성립되었다는 불편한 진실, 또한 법치주의로 분식된 교묘한 관료주의체제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하는 작업을 통해서 박정희체제 검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construct the reorganization of the censorship system in the 1970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tructural dynamics of the Park Chung-hee regime's pseudo-hegemony domination, propaganda, and the dynamics of the censorship system, and to explore the status and function of censorship as a sub-mode of social control. The basis of the authoritarian rule of the Park Chung-hee regime in the 1970s was the permanentization of security ideology and state of national emergency. Socio-cultural policies were also deployed subordinate to these trends and directions. Censorship also undergoes changeable changes as it is used as a major means of propaganda and cultural control. At the depth and peak of censorship in the 1970s lies the legal censor, KCIA. The level and amplitude of censorship increased to the maximum in the wake of the law of prosecutive emergency, which was triggered as a policy means for the institutionalization of the all-out security system, and the Korean censor's total exhibition was completed. First, overall and offensive censorship was maximized through strengthening administration legislation. In the process, the mass production of media regulation, the full-scale implementation of decadence regulation, and the censorship stance that prioritized national interests were accompanied, and the emulsion of colonial censorship was revived. Second, while the target of control has reached a potential threat, the target object of censorship advances to a level that collapses the social and cultural foundation. Third, as the status of the private self-governing body during the law of prosecutive emergency is re-located, control over popular culture and arts is totalized. Because they wanted to use popular culture and art as a political means of all-out security based on legal organization, negative control had to prevail over the versatility of propaganda. However, despite the tangible results of coercive control over society and culture following full-scale censorship, the biggest obstacle that offset this was the sound people who aspired for liberal democracy. This is why the law of prosecutive emergency had to be extended indefinit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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