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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Seo-ae Ryu Seong-ryong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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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20)~2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4
서애연구
2권0호(2020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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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류성룡의 중용 리더십

저자 : 송복 ( Song Bok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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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류성룡(柳成龍) 리더십의 새 모형을 설정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의 리더십 연구는 리더의 권능(權能)에 의한 리더십 발휘로, 얼마만큼 업적을 쌓았느냐,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했느냐를 보는 데 초점이 모아져 왔다. 이러한 연구는 사실상 리더의 바깥 모습인 '외면적 리더십' 연구라 할 수 있다. 리더의 쌓은 업적과 리더가 내놓은 공과(功過)는 순전히 리더의 외면에 나타난 대인관계이며 대내외 행동의 결과를 두고 평한 것이다.
그러나 리더에게는 또 다른 세계인 내면의 심덕(心德)이라는 것이 있다. 외면의 권능이 지상에 나타난 세계를 말한다면, 내면의 심덕은 지층에 감추어져 아직 드러나지 않는 세계다. 이 글에서는 이 드러나지 않은, 그래서 지금까지 주시되지 않았던 세계를 보려는 것이다. 그 내면의 심덕이 어떻게 형성돼 있으며, 그 심덕의 작용과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 리더의 심덕은 오로지 성(誠)을 다 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성(誠)이 없이는 결코 소생할 수 없는 성(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성(誠)은 사서(四書) 『중용』의 핵심개념이다. 그러나 사서 『중용』은 사변중용(思辨中庸)으로서 사변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현실세계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사실상 '이데아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심덕중용(心德中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해서, 이 심덕중용이 현실에게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류성룡의 성(誠)을 통해 그 과정을 보는 것이다. 류성룡은 성(誠)의 전형(典型)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일반 리더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권능의 리더십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그러면서 일반 권능의 리더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친화성과 자발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의 성(誠)은 명료히 드러난다.
그의 성(誠)은 사서 『중용』에서 말하는 선(善)과 명(明)을 수반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리더십은 배제와 거부의 당파성이 없는 관용의 정치인이며, 편견과 치우침이 없는 수용의 정치인으로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직분을 다하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는 높은 도덕적 지표를 보인다. 이러한 심덕중용의 리더십은 성(誠)과 용(容) 그리고 공(公)이라는 핵심과정을 통해 발휘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stablish the new model of leadership exemplified by Ryu Seong-ryong. Studies on leadership have so far focused on leaders' powers and abilities, and their achievements and successes. Such approaches highlight the external aspects of leaders, and can thus be called researches of external leadership. These studies generally focus on interpersonal relations and behavior patterns of leaders who made achievements, contributions as well as mistakes. Apart from such external aspects of leadership, leaders have in their internal world the virtues of the mind. Powers and abilities show on the surface of the external world whereas the virtue of the mind is not hidden in the internal world. This paper intends to see the internal world that is not disclosed, and has, therefore, not been heeded.
The virtue of the mind, discussed in this paper, is realized only through the fulfillment of sincerity. Sincerity is one of the core concepts in the Doctrine of the Mean (Zhongyong 中庸). However, the concept of zhongyong in the Four Books is possible only in the world of idea, and unrealizable in practice. For this reason, this paper coins the new concept of zhongyong as the virtue of the mind in order to show how it manifests itself in Ryu's embodiment of sincerity. Ryu was the paragon of sincerity.
Ryu's sincerity entails the virtues of goodness (seon 善) and clarity (myeong 明), presented in the Doctrine of the Mean. Therefore, by exercising his leadership, Ryu could become a tolerant statesman without partisanship, exclusiveness, biases or excesses. Having completed his duties, he was able to resign without hesitation, which attests to the high level of his moral accomplishment. The leadership of the mean(zhongyong) as the virtue of the mind was manifested through the embodiment of sincerity, generosity, and public-mindedness.

2진성리더십의 패러다임으로 본 서애 류성룡

저자 : 이민수 ( Lee Minsu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101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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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서애 류성룡이 보여준 리더십의 근간을 그가 지녔던 진성성이라 보고, 최근 새로운 리더십의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는 진성리더십의 관점에서 류성룡의 리더십을 분석하고 평가해 보는 것이다. 류성룡은 삶의 지침을 제시하며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마음의 지도인 정신모형 Ⅱ(Know-Why Model)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모형 안에는 조선의 자강이라는 사명, 백성들의 편안한 삶이라는 비전, 애민(愛民)이라는 핵심가치가 잘 구성되어 있었고, 이것이 류성룡과 다른 유사 리더들을 구별해주는 특징이었다.
진성리더십의 핵심 구성요소인 자기인식, 자기규제, 관계적 투명성, 균형있는 정보처리에 해당하는 리더 행동들을 도출한 후에, 류성룡이 실제로 이러한 행동들을 얼마나 보여주었는지를 확인해 봄으로써 류성룡의 진성리더십을 평가해 보았다. 이를 통해 류성룡은 높은 감수성과 도덕성을 지녔으며, 타인과 솔직한 관계를 유지하고 합리적 판단을 하는 높은 수준의 진성리더십을 발휘한 리더였음을 알 수 있었다.
비전제시 능력과 실행력을 기준으로 류성룡의 리더십을 분석해본 결과, 류성룡은 조직의 미션과 비전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함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실행력을 겸비한 진성 변혁적 리더였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탐욕과 연기가 아닌 진정성을 생명으로 명과 왜의 조선분할 획책을 막아내고, 조선의 자강만이 살 길이며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야만 나라의 중흥도 있을 수 있다는 신념을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몸소 실천한 류성룡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진성리더십의 원형'임을 알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and reassess Ryu Seong-ryong's leadership from the perspective of authentic Leadership, which has recently drawn attention as a new paradigm of leadership. Ryu Seong-ryong had the “Know-Why Model,” a map of the mind, which offers guidelines and compass of life. Within this mental model were the mission of Joseon's self-reliance, the vision of peaceful livelihood for the people, and fraternity, which distinguishes Ryu Seong-ryong from other leaders.
After deriving leadership behaviors that correspond to self-awareness, self-regulation, relational transparency, and balanced information processing, Ryu Sung-ryong's true leadership was evaluated by checking how much he actually showed these behaviors. Through this, we can see that Ryu Seong-ryong was a leader with a high level of authentic leadership who maintained honest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made rational judgments with a high level of sensitivity and morality.
After analyzing Ryu Seong-ryong's leadership based on his ability to present and execute visions, he was a authentic transformational leader who combined the organization's clear perception of its mission and vision with the execution power to implement them. It is clear that Ryu Seong-ryong's story is a prototype of the authentic leadership that we want today because he prevented the division of Joseon between Ming and Japan by his authenticity rather than greed and acting, in the national crisi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practiced the belief that Joseon's self-reliance was the only way to live and that only when the people's lives are comfortable, the revival of the country can be achieved.

3류성룡의 송대(宋代) 대외관계 인식과 「북변헌책의(北變獻策議)」 건의

저자 : 김한신 ( Kim Han-shin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3-151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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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긴 시간 동안 국가와 '외이(外夷)'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외이'가 일으키는 외침이 그 국가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 전형적인 사례가 송대(宋代)의 대외관계사였다. 류성룡의 당대를 전후로 조선의 지식인은 송이라는 국가가 지닌 상징성을 중시하고 있었다. 송과 '외이'와의 관계는 곧 '화(華)'와 '이(夷)'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화'의 보전을 위해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감계(鑑戒)였다. 류성룡이 「독사려측(讀史蠡測)」을 저술한 취지도 당대에 송대 역사를 학습하던 경향 속에서 류성룡 자신의 '화이론(華夷論)'을 반영하며 조선의 입장에서 '외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오랜 고민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역사의식 아래 국가와 '외이'의 대외관계에서 구체적인 방안으로 드러난 것이 「북변헌책의(北變獻策議)」였다. 1583년(선조 16) 회령진에 거주하는 여진 부족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니탕개가 우을지와 함께 함경도 관리의 부당한 대우에 반발하여 변란을 일으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류성룡이 「북변헌책의」를 제시했다. 류성룡이 「북변헌책의」에서 제시한 정책은 기존의 연구성과에서 보았듯이 조선초기 이래 시행된 대여진 정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대여진 정책이 상황이 달라진 선조대와 같을 수 없으며, 선조대안에서도 인물마다 견해가 동일할 수가 없다. 심지어 고정관념과 편견에도 편차가 있다. 시기별 대외인식과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인물의 역사 인식과 현실인식 그리고 그가 제시한 대안을 살펴보아야 한다. 류성룡은 임진전쟁기 전쟁국면을 총괄한 인물로서 중요성이 크며, 선조대 대외관계와 정책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그의 「독사려측」과 「북변헌책의」를 병행하여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For a long time Yu Seong-ryong had paid attention to the history of relation between 'the state' and 'the barbarian'. The invasion of 'the barbarian' had given effective momentum on the destiny of 'the state'. Yu found its classic model in the foreign relation of Song dynasty which served as the ideal state for many Joseon literati.
The relation between Song dynasty and 'the barbarian' showed a sharp contrast on 'the Civilized'(華) and 'the Barbaric'(夷) to the Literati. In this regard the Literati of Joseon had pondered over how they could control the barbarian movement to make sure of preservation of 'the Civilized'. Yu Seong-ryong wrote Doksaryeocheuk(讀史蠡測): A review on the history of Song dynasty with similar intention. He tried to record his long-standing thought about how Joseon could respond to the barbarian's threat reinforcing his prejudice on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an'(華夷論). His prejudice on 'the barbarian' was grounded in the general trend that the Literati of Joseon had studied the history of Song dynasty invaded by 'the barbarian'.
In this perspective, Yu Seong-ryong proposed Bukbyeonheonchaekeui(北變獻策議): A suggestion for northern border issue to the Joseon Court including concrete measures about the foreign relation on 'the barbarian'. In 1583, the year of Seonjo's 16th reign, a huge rebeillion by 'the barbarian' happened, which was led by Nitanggae(尼湯介) who was the chief of Jurchens having lived at Hoiryeongjin(會寧鎭) area. The Jurchens resisted the arrogation of Hamgyeong Province(咸鏡道) officers. And Yu proposed Bukbyeonheonchaekeui as the foreign policy to restrain and subdue 'the barbarian'.
The policy Yu Seong-ryong proposed was an extension of the previous foreign policy of the Joseon Court from its early days. Given the conditions of time, the policy for Jurchens in the former period of Joseson could not be same with that of Seonjo's reign. Moreover among policies of Seonjo's reign there were many opionions of leading figures. Even in prejudice and bias there were so many differences through this period. In order to understand foreign relations and policies in each period we should examine one's historical awareness, view of reality and plan for action individually. As for Yu Seong-ryong, he is important as the prime minister and chief director for armament in Imjin war. For that reason it is necessary to analyze his Doksaryeocheuk and Bukbyeonheonchaekeui connectively to bring light on the study for the foreign relation and policy of Seonjo's reign.

4임진왜란기 조선의 전쟁수행과 류성룡의 역할

저자 : 장준호 ( Jang Jun Ho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97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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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이전 성곽의 수축과 유능한 무신들에 대한 인사를 통해 전란에 대비했다. 전쟁 발발 후 경상도 지역이 무너지자, 신립과 이일을 내려 보내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했다. 신립과 이일의 패전 후 조선 조정은 몽진을 결정하고 한강-임진강-대동강의 강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도강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조선 조정은 경상우도 초유사와 경상좌도 안집사를 파견하여 하삼도 지역의 민심의 동요를 차단하고 의병 창의를 독려했다. 그 결과 창의한 의병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면서 무너졌던 행정체계와 군사체제를 재건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군사를 임진강 방어에도 투입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일본군의 공세가 지속되자 선조는 평양성을 떠나 몽진을 이어갔고, 평양에 주둔한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을 기다리면서 일본군의 북상을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대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지 못했고 평양성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한 후 조선 조정은 안주를 거점으로 군량과 군병을 확보하여 명군 참전에 대비했다.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수세적이었던 전쟁 수행 방식을 공세적으로 전환하였다. 류성룡은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고, 도성 수복에 대한 구상을 개진하였다.
평양성 탈환 이후의 일본군에 대한 공세는 지속되지 못했다. 평양성 탈환의 전공을 둘러싸고 명군 지휘부가 알력을 벌이고 제독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조선 조정의 공세적인 전쟁수행의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했다. 더욱이 명군과 일본군이 강화협상을 진행하면서 조선 조정은 독자적인 방어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 조선 조정은 와해되었던 군사 체제를 개편하고 군사 훈련을 통해 일본군의 재 북상에 대비하였다. 명과 일본이 진행했던 강화협상이 파탄으로 종결되면서 일본군의 재침이 시작됐다.
정유재란기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재 북상에 대비하여 요해처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의 승전 이후 수륙양면으로 다시 북상을 시도하였다. 조선 조정은 명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명 총병양호는 남원성을 지키지 못했다. 전라도를 무너뜨리고 북상했던 일본군이 직산에서 명군에게 패하면서 전쟁의 양상을 다시 대치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이후 조선 조정은 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거점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조명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울산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압박하는 전투가 진행되었고 이른바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이 종결을 맞이했다.


This study approache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1592-1598) in the strategic aspects of conducting war. For such purpose, this article inquires into the records of Ryu Seong-ryong. Ryu Seong-ryong was in charge of state affairs during the war. Therefore, his records such as the Jingbirok are of primary importance for this study.
Before the war, the Joseon government had begun the construction of walls and fortresses and selected competent military officials.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was met with strong opposition, which left the project unfinished. The newly built fortresses proved ineffective against the Japanese attacks, and the government troops fled. King Seonjo(宣祖) dispatched a capable general to in order to stem the Japanese troops's advance northward, which also failed. Eventually, the king abandoned the capital and fled. Following Ryu Seong-ryong's advice, King Seongjo sent an official to the Lower Three Provinces (Hasamdo, 下三道) in order to appease the public.
The Joseon government tried to block the Japanese troops from moving northward by forming a defensive line around the river. However, the city was occupied by Japanese soldiers who came across the Han River, and the Imjin River did not stop the Japanese troops. Seonjo, who was in Pyongyang, fled northward, and officials who were left in Pyongyang tried to stop the Japanese troops from the Taedong River. The Joseon government's war policy, which tried to stop the Japanese military from crossing the river, has all failed. However, Yi Sun-sin stopped the Japanese army at sea, and righteous army set up a major in Gyeongsang-do to defeat the Japanese army.
The Joseon government sought to fight the Japanese by requesting reinforcements from the Ming Dynasty. In January 1593, the Ming army led by Li Rusong(李如松, 1549-1598) retrieved the Pyeongyang-seong Fortress. Upon recapturing Pyongyang, Ryu Seong-ryong planned to attack the Japanese troops stationed in Hamgyeong Province. However, the Ming general decided to move down south, . After Li Rusong lost the Byeokje-gwan battle, the Ming general avoided direct confrontations with the Japanese troops. Since then, the Joseon government had to implement its own defense measures while continuing negotiations with the Ming and the Japanese forces. At this time, the Joseon government trained soldiers and built fortresses.
After the peace talks failed, the Japanese army resumed fighting. The Japanese army, which tried to advance to the capital city through Jeolla Province, lost the battle in Jiksan, Chungcheong Province. As the Japanese troops moved south again, the war came to a stalemate. The Joseon government tried to destroy the Japanese military base with the Ming troops. The war ended as the Japanese army retreated.

5십만양병설의 실체

저자 : 류을하 ( Ryu Eul-ha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9-268 (7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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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리가 임진왜란 대비 선견지명으로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의 실체를 실록이나 이이의 문집 등에 나타난 기록 및 새로운 사료들을 통해 정밀하게 검증하여 사실여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주요 발견은 이이가 '니탕개의 난'에 대비하여 병조판서를 맡긴 선조의 양병지시를 받고도 민력이 쇠잔해 있음을 감안하여 '백성을 기르는 양민이 먼저'라고 보고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이는 양민(養民)의 방도로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현물세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지론을 다시 펼쳤지만, 선조가 공안의 개정에 불응함으로써 성과 없이 논의가 끝난 것으로 사료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이 글은 이이의 정치 지향이 왕도정치 사상으로서 무리하게 십만 양병과 같은 정책을 펴는 것과 상반되었다는 것을 밝히며, 당시의 인구·재정 등 사회경제적인 여건도 십만 양병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도 짚어 보았다.
하지만 김장생은 이이의 전기를 지으면서 원래의 사료와 다르게 현저하게 왜곡된 '십만양병설'을 만들어서 일화로 수록하였었다. 이후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잡게 되면서 자파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왜곡된 김장생의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도 실리도록 하여 국가의 공식 기록에 올랐다. 그리고 율곡 연보 등 다른 기록에서는 김장생이 지은 원전(原典)까지도 그럴듯하게 추가 변개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극일' 및 '부국강병' 분위기로 인해 왜곡이 오히려 더해졌다. 이로써 임란 당시 생존하지 않았던 이이가 국방에 더 큰 공이 있는 것처럼 존숭되고, 임란을 극복한 류성룡은 오히려 십만 양병에 반대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 인물로 호도되는 명예 훼손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점도 사료를 통해 허위임을 밝혔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quire into the so-called “Yul-gok's proposal to draft 100,000 men into armed forces,” widely recognized as Yi Yi's (李珥, 1536-1586) foresight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based on a close examination of Yi Yi's literary works. Yi Yi reported “commoners should be raised first” in consideration of the poor public power even after receiving orders from King Sŏnjo, who entrusted the court to prepare for the “Ni T'anggae Rebellion.” In addition, Yi Yi re-examined the principle that the burden of taxes in kind should be reduced by revising the tribute case as a way for the people of commoners, but it was confirmed through the records that the discussion ended without results as King Sŏnjo refused to comply with the revision of the tribute case.
The paper reveals that Yi Yi's political orientation was contrary to his unreasonable the policy of carrying out the same policy as “nurturing 100,000 soldiers against possible foreign enemies” as the king's political ideology, and also pointed out that the socio-economic conditions of the time, such as population and finance, could not handle the proposal to draft 100,000 men into armed forces. However, Kim Jangsaengs' anecdotal note would form the mythological basis of on Yi Yi's alleged proposal of “nurturing 100,000 soldiers against possible foreign enemies.” Since then, the biographies of Yi Yi continued to cite Kim Jangsaeng's notes. Finally, it was included in the Sŏnjo sujŏng sillok for the purpose of strengthen the legitimacy of the reign. In addition, the other records, including the Yulgok Chronicle, show that even Kim Jangseang's writings were doctored.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s colonial rule, the nationwide slogans of “overcoming Japanese” and “enriching the state” and strengthening the army intensified the myth. This resulted in the elevation of Yi Yi, who did not surviv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s if he made greater contributions to the national defense, and Ryu Sŏngnyong, who made real contributions, was misinterpreted as having ill-advisedly opposed the proposal of raising 100,000 troops. It will be shown that this point is also historically inaccurate.

6Ryu Seongryong's View of the Ideal World Order -A Preliminary Survey

저자 : Jaeyoon Song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9-286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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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inquires into Ryu Seong-ryong's view of all under-heaven (cheonha, tianxia, 天下), his big picture of foreign relations, which informed the Joseon court's strategic decisions during the Imjin War. How did Ryu Seong-ryong view the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Ming, Joseon and Wae, and Ming and Wae, respectively? How did he conceptualize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within the framework of the ideal world order by reference to the Confucian classics? Was Ryu Seong-ryong an early advocate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By addressing these questions, this paper argues that instead of envisioning the nation in the modern sense of the term, Ryu envisioned a completely different world order which the Joseon state helped to build and maintain as its active participant.

7근·현대 영국·일본인 역사가들이 본 『징비록』

저자 : 이종각 ( Lee Jong Gak )

발행기관 : 서애학회 간행물 : 서애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7-32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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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98년) 7년 동안 전시재상으로 미증유의 국난을 헤쳐나간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의 임란 회고록 『징비록(懲毖錄)』 은 조선에서 처음 간행(1647∼48년 경)된 뒤 조선통신사를 수행하는 역관에 의해 일본에 전해져 1695년, 교토(京都)에서 『조선징비록(朝鮮懲毖錄)』이란 이름의 번역본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징비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3백년간 일본과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번역, 영인본 등으로 최소 30여종 이상 발간되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이처럼 『징비록』이 '옛 적국'인 일본에 전해진 이래 수 백년간 널리 읽혀지며 임진왜란에 관해 '이보다 더 나은 사서(史書)는 드물다'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 『조선징비록』은 19세기 말 일본에 체류하던 중국인 학자에 의해 청나라에 전해지고,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년) 초기에는 주일 영국외교관(W. G. Aston)이 『징비록』의 내용을 사상 처음 영어로 번역, 대폭 인용한 영문저술이 간행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역사가들은 류성룡 및 『징비록』에 대한 치밀한 학문적인 분석, 검증을 통해 『징비록』에 대해 입을 모아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뛰어난 '명저', '실록'이라고 절찬하면서, 류성룡을 명재상일뿐 아니라 '역사가'로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징비록』이 동ㆍ서양, 시대를 넘어 임진왜란에 관한 '불멸의 기록'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필자는 그동안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주일 영국외교관의 영문저술과 근.현대 일본인 역사가들의 『징비록』 및 류성룡 관련 연구논문 4편 등 5편의 자료를 발굴, 전문을 번역(원문 첨부)하여 최근 자료집으로 간행하면서, 이에 그 의미와 주요내용을 소개하는 바이다. 특히 근.현대 일본인 역사가들의 실증적인 학술 논문은 류성룡 및 『징비록』에 대한 국내연구가 전무했던, 해방 이전의 공백을 보완해 주는 측면도 있는 만큼 참고로 삼을만 하다. 이 자료집이 향후 『징비록』 및 류성룡, 나아가 임진왜란 연구에 작은 기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The Jingbirok, Ryu Seong-ryong's memoirs, was transmitted to Japan by a Joseon embassy and published in 1695 under the title Joseon Jingbirok in Kyoto. Ever since the Jingbirok has remained a steady bestseller in various forms for the three centuries. Highly acclaimed as the best history of the Imjin War, the Joseon Jingbirok has reached numerous readers in Japan. Toward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Joseon Jingbirok was brought to Qing China by a Chinese scholar. In the early Meiji Era, W. G. Aston, then British diplomat to Japan, translated it into English, which led to a corpos of scholarly works.
Japanese scholars from the early 20th century have produced a large corpus of solid scholarly works on Ryu Seong-ryong and his book. In these works, Japanese scholars have praised Ryu not only as a great minister but a great historian, which attests to the immortality of the Jingbirok as historical record.
I have recently compiled into a source book hitherto unexplored English language publications by British diplomats, five pieces of primary documents, including four academic articles by modern Japanese historians. This paper introduces those sources, their general contents and significance. Particularly, evidential researches by modern Japanese historians will supplement the weaknesses of Korean scholarship, hoping that this source book will be a meaningful addition to our understanding of Ryu Seong-ryong, the Jingbirok, and, ultimately, the Imji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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