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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Journal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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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6)~51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494
지역과 역사
51권0호(2022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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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심민정 ( Shim Min-j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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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는 거칠산군의 치소성으로 볼 수 있는 성터가 수영구 병무청 자리에 소재하고 있다. 거칠산군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료는 대단히 소략한 상황이라 이 치소성이 존재할 당시 신라, 혹은 통일기 신라의 역사·문화 등을 구체적으로 모두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관련 역사·문화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문헌조사와 연구 과정에서 당시 거칠산군의 기능 중 하나였던 中祀 四海祭를 실시했던 남해 제장 兄邊이 부산 수영구 백산 일대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사해 제장은 신라의 영역 중 육지와 바다의 경계 지역에 마련되고 있다. 수·육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경계 지역과 수도 왕경으로의 연결성, 해당 지역이 침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신라의 의식 등이 반영되어 있다. 南海 제장이 신라의 왕경인 경주와 연결되는 육상 경로는 東海通이다. 이곳을 통해 거칠산군은 왕경과 경제·행정·군사적으로 연결되었으며, 국가제사 제장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정신적 소통까지 함께 하였다.
그리고 남해제장은 해양경계에 위치한 경계제사지로 해상교통로상의 개방적·폐쇄적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남해제장의 소재지로 비정되는 형변은 수영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수영강을 거슬러 올라가 육지와 연결되는 지점을 통과하여 서북쪽으로 이동하면 동평현성지를 거쳐 南瀆 제장이 위치한 낙동강 黃山河와 만나며, 남쪽으로는 釜山浦와 만난다. 이처럼 陸·海·江을 모두 접촉하고 있는 요지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In the Busan area, the castle ruins of Geochilsan-gun are located at the site of the Military Manpower Administration in Suyeong-gu. In the process of researching and researching documents related to Geochilsan-gun, it was confirmed that the location of the ancestral rites to the sea god was held in the southern sea, and this rite was located in the Baeksan area of Suyeong-gu, Busan.
On the other hand, it was found that the places where ancestral rites were held to the god of the sea were located in key points of water and land transportation. The priestly places of the east, west, south, and north seas are all being prepared at the end of the sea in the territory of Silla. The place where ancestral rites are held to the god of the southern sea is connected to Gyeongju, the capital of Silla, by land transportation called Donghaetong. Through this place, Geochilsan-gun(Dongnae) was economically, administratively, and militarily connected to Gyeongju, and it also played a role in holding national ceremonies and mental communication.
In addition, the area, where ancestral rites are held to the god of the South Sea, is a place of ceremonial border located on the border of the sea, showing both openness and closedness in the maritime traffic route. Hyeongbyeon, which is regarded as the location of the ancestral rites to the god of the southern sea, is located at the point where the Suyeong River and the sea meet. Also, if you climb Suyeong River, pass the point connecting to the mainland, and go northwest, you will pass Castle of Dongpyeon and meet Hwangsan River of the Nakdong River where ancestral rites are held to the gods of the southern river. And to the south, it meets Busan Port. It is very important as it is located in a key point where all land, sea and rivers are in 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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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경희 ( Son Kyoung-he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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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은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가 합해져 영천시, 경산시, 달성군을 흘러 대구의 북쪽을 통과하여 낙동강으로 합해진다. 금호강 유역은 경북의 대표적인 대구평야 지역으로 일제 강점 초기부터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농업경영을 하던 곳이다. 일제는 금호강 일대에 1920~1940년대까지 계속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이주일본인의 농업경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경북 달성군 해안면은 금호강 연안에 위치한 식민도시 대구부에서 1km 떨어진 곳으로 농업이 핵심 산업이었다. 해안면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경부철도를 통해 부산과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해안면은 식민도시 대구부의 인근 지역으로 곡물을 생산·이출하는 식민농촌 기능을 요구받았다. 금호강 연안의 토지를 싼 값으로 매입했던 이주일본인과 대구부의 부재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해안수리조합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당시 기존 수원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던 지역민들은 해안수리조합 설립으로 인한 과다한 조합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경북 도청에 해안수리조합 설립반대 「진정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해안수리조합은 달성군수와 해안면장, 대구부 · 달성군에 거주하던 부재지주들에 의해 1931년 1월 설립된다.


The Geumho River originates from Jukjang-myeon, Yeongil-gun, Gyeongsangbuk-do, and various tributaries are combined to flow through Yeongcheon-si, Gyeongsan-si, and Dalseong-gun, passing through the north of Daegu, and merge into the Nakdong River. The Geumho River basin is a representative Daegu Plain area in Gyeongsangbuk-do, where the Japanese migrated and operated agricultural management from the early days of the Japanese occupation. For stable agricultural management, the Japanese continued to establish irrigation associations in the 1920s, 1930s, and 1940s around the Geumho River.
Haean-myeon, Dalseong-gun, Gyeongsangbuk-do, is 1km away from Daegu, a colonial city located on the coast of the Geumho River, and agriculture was a key industry. The agricultural products produced here were required to function as colonial farming villages to move grains to Busan and Japan through the Gyeongbu Railway. The Japanese immigrants who purchased land along the Geumho River at low prices and absent landlords in Daegu tried to establish a Heaan Irrigation Association. At that time, local residents who were farming using existing water sources saw that they could not afford the excessive union cost due to the establishment of the Heaan Irrigation Association. They submit a petition against the establishment of the Heaan Irrigation Association to the Gyeongbuk Provincial Office. However, the Heaan Irrigation Association was established in January 1931 by the head of Dalseong-gun, the head of Haean-myeon, and the absent landowners living in Daegu-bu and Dalseong-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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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나은 ( Ko Na-e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2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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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26년 주요 6개 하천 중 가장 규모가 큰 낙동강의 국비지변 10개년계속 치수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주요 개수대상이 되었던 곳은 낙동강 하류부의 소위 '일천식공사'로, 지역사회의 찬반 논쟁 속에 1930년 착공이 결정되었다.
낙동강은 총독의 직접 관리를 받는 직할하천으로 하천개수비용 역시 국고에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임시특별세인 하천부담금으로 도지방비에 분담되어 결국 많은 부분을 지역사회가 부담하게 되었다. 공사 편입지와 관련한 낮은 토지가격, 보상 지연, 이전 강요, 민족 간 보상액 차별 등의 피해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나아가 일제는 공사용지의 처분 시에 가능한 한 식민지민의 토지소유권을 일소하는 방향을 선호하고 있었다. 하천개수공사의 진행에는 식민지 조선 사회의 피해가 필연적으로 동반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천식공사가 원인이 되어 낙동강 하류부는 전례없는 대홍수라는 개발재난을 당하였다. 지역사회의 오랜 경험과 인천관측소의 과학적 분석은 1934년 7월 남선지방의 홍수 피해가 일천식을 원인으로 하는 개발재난임을 보여준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재해지 국고보상 등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이미 삶의 터전을 잃은 지역민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대응이었다.
일제는 식민사회의 안정화를 통한 식민권력의 지배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개발재난에 대응한 재해대책을 마련하였다. 일제는 임시치수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재해의 근본대책을 논의하면서 낙동강 하류부의 공사를 일천식안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는 총독부의 위신과 현실적 예산 문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된 결과에 불과하였다. 재해의 응급대책에는 국고보상, 하천부담금 등의 세금 징수 지연 및 감면 조치 등의 직접구제가 일부 이루어졌다. 간접구제인 생업부조는 여러 가지 토목사업으로 나타났는데 턱없이 낮은 임금과 공사 청부업자들의 비리, 임금의 미지불 및 체불 등으로 수재민들을 구궁하겠다는 일제 당국의 표면적인 목적은 사실상 달성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방사업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부역으로 시행되었다. 이렇듯 일제가 내세운 재해대책들은 식민지 조선민들을 구제한다는 명목 하에 실상은 식민지민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implemented river improvement project planned for 10 years in the Nakdong River area. The principle zone of the project, so-called 'confluence construction of two adjoining river streams into a singular channel', was the lower part of the river, in which the construction was decided in 1930 with arguments for and against it from local community. The river improvement project inevitably accompanied harm and damage to the colonial Joseon society. First, the local community had to share a large proportion of the expense for the project, since the colonial authority imposed a temporary river tax to the region. Second, colonists were to be burdened by lower compensation, delay of indemnity payment, demanded relocation, and discrimination in compensation payment, not to mention the Japanese preference on policy of depriving property right of colonists. Moreover, confluence construction method caused an unprecedented deluge in the lower area of the Nakdong River. The scientific analysis at Incheon Observatory clearly showed that the flood damage in Namson area of 1934 was a development disaster caused by confluence construction.
It seems that the colonial authority provided a countermeasure against development disaster in order to seek stabilization of colonial society, discussing fundamental countermeasures against disaster. The colonial authority, however, approved confluence construction plan for the lower area of the Nakdong River. This means that the priority was the stance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and budget. The colonial government took emergency relief policies such as a small amount of state subsidies, partial tax exemption benefit, and employment in diverse engineering works introduced on the purpose of relief work, in which colonists were advantagiated by extreamely low wages, corruption, and delayed payment of wages. In conclusion, the anti-calamity measures presented by Japan mobilized colonists, under the pretext of relieving them from dis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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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백승충 ( Baek Seung-ch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74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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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임나일본부' 활동의 중심국인 안라는 물론 당시 안라와 밀접한 이해 관계가 있으면서 가야 진출을 두고 경쟁하고 있던 신라와 백제 등 주변 제국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임나일본부'는 곧 '안라일본부'이고, 안라와 함께 단기간에 친신라 활동을 펼친 점이 특징이다. '임나일본부'는 「백제본기」에서 처음 보이는데, 이들에 대한 백제의 비판적인 인식은 자국의 안라 진출 및 '가야부용관'과 무관하지 않다.
'임나일본부'는 일반 왜사와는 구분되는 독자성이 강한 이질적인 집단임은 분명하다. 그 특징으로는 ①파견과 귀국 관련 사료가 없는 점, ②출자가 다양하고 왜 왕권과의 관계가 모호한 점, ③안라가 주된 활동 지역이고 친신라 가야인의 영향을 받아 친신라 활동을 전개한 점, ④'재안라제왜신'과는 차별성이 보이는 점 등이 있다.
신라가 낙동강 하류의 남부가야 3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본격화하자 인접한 안라는 '안라회의'(529) 이후 자구책으로 친신라 외교정책을 폈다. 또한 교섭의 거점으로 안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왜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여기에 동참했다. 따라서 530년대 남부가야의 정황은 신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가운데 안라와 '임나일본부'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이중외교'를 전개한 까닭에 종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540년을 전후하여 백제는 신라와 우호관계의 복원을 시도하는 한편 안라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적어도 『일본서기』의 서술로 볼 때, 백제의 이 같은 계획은 왜 왕권과 함께 '복건임나'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남부가야 3국 병합 등 낙동강 하류 진출, 동남해 제해권의 장악, 그리고 안라와 '임나일본부'의 친신라 활동 등은 백제의 안라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백제가 두 차례의 '임나복건회의'(541·544)에서 안라와 '임나일본부'에게 강조한 것은, 근초고왕 이래 우호 관계가 깊고 더 이상 무도한 신라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제는 '복건임나'를 빌미로 안라에 진출하고, 대 고구려 적대감을 내세워 전례 없는 백제-신라-안라-왜 왕권 연합 라인의 구축을 추진했다. 다만 선결 과제로서 친신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안라와 '임나일본부'를 신라로부터 분리하여 외교적으로 고립시켜야 했다.
540년대 후반 백제가 한강고토회복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자 한강유역 진출을 꿈꾸고 있던 신라는 '나제동맹' 차원에서 적극 동조했고, 왜 왕권도 '고구려 밀통'(548)을 계기로 더 이상 실익이 없는 '이중외교'를 철회했다. 이로써 안라와 '임나일본부'의 친신라 활동은 실패하고, 남부가야에서도 그 입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백제가 이 같은 성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특히 여러 면에서 '임나일본부'와 비교되는 '왜계백제관료'의 역할이 컸다. 550년대 전반 안라에는 '임나일본부' 대신 친백제적인 '재안라제왜신'만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mprehensively examine the trends of the neighboring empires that have interests as well as Alla, the central country of the 'Imnailbonbu' activity. 'Imnailbonbu' also appears as 'Allailbonbu', but considering the circumstances at the time, such as the motive and scope of the activities, its nature is not so simple and difficult to define. As the premise, several points are noted.
Although there is controversy regarding the dispatching entity of 'Imnailbonbu', it is acknowledged that it is a heterogeneous group with strong uniqueness that is distinct from general Wai envoy. There are several characteristics identified in the relevant sources. ①The fact that there are no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dispatch and return, ②The amount of investment is varied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royal authority is ambiguous, ③The fact that Alla is the main activity area, ④The fact that the pro-Silla activities were conducted together with Alla, ⑤「Baekje Bongi」 These are the fact that it is called for the first time in ⑥ and that it has nothing to do with 'Jaeallajewaisin'.
What Baekje emphasized to Alla and the 'Imnailbonbu' at the two 'Imna Reconstruction Conference' is that Alla and the 'Imnailbonbu' have a deep friendship since King Geunchogo, and since Silla is a martial artist, do not fall for the tricks of Silla anymore and stop pro-Silla activities. is to do Baekje aimed to restore the Han River homeland, and actively sought to advance into Alla under the pretext of 'Reconstruction Imna' and to restore the Baekje-Alla-Wai royal power union line. Controlling the Close Silla activities of Alla and the 'Imnailbonbu' was a priority.
In the mid-540s, when Baekje emphasized the goal of restoring the homeland of the Han River and hostility to Goguryeo, Silla, who had been wishing to advance into the Han River, actively sympathized with the 'Naje alliance', and why the king was no longer using the 'Goguryeo intrigue' claimed by Baekje as an excuse. He gave up 'double diplomacy', which had no practical benefit. As a result, the Close Silla activities of Alla and the 'Imnailbonbu' were no longer possible, and they lost their posi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550s, in Alla, instead of 'Imnailbonbu', only 'Jaeallajewaisin' is seen, but it is safe to say that they were entirely pro-Baekje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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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20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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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왕 사후 벌어진 왕위계승 분쟁에서 김경신은 왕위계승 우선권자인 김주원을 무력으로 누르고 즉위하였다. 김주원계의 반발이 봉합된 상황에서 즉위 당시 고령이었던 원성왕이 후계 왕위 계승을 공인받지 못할 경우 왕위계승 분쟁이 재발될 가능성이 켰다.
원성왕은 재위 14년 동안(785~798) 3차에 걸쳐 태자를 책봉했다. 원성왕의 큰 아들 혜충태자 김인겸, 둘째 아들 헌평태자 김의영이 차례로 태자에 지명되었지만, 원성왕의 재위 중에 죽었다. 원성왕 11년에 왕의 손자 김준옹이 세 번째 태자로 책봉되어 마침내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2차례 태자위가 공백인 시기도 있었다. 태자제도가 정착화된 이래 3차례에 걸친 태자 책봉뿐 아니라 손자의 태자 책봉도 신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왕의 손자가 시중에 임명된 것도 원성왕대에 처음 나타났다. 원성왕의 손자 김준옹은 혜충태자가 죽은 후 1차 태자부재 시기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또 다른 손자 김언승은 헌평태자가 죽은 후 2차 태자 부재 시기에 시중에 임명되었다. 또한 모두 시중에서 물려나면서 병부령으로 승진하였다.
원성왕대는 하대의 권력구조를 특징짓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 권력집중의 한 전형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것은 연로한 나이에 즉위한 원성왕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다음 후계왕위 계승자인 태자로 책봉하며 시행한 정국 운영 과정에서 나타났다. 때문에 원성왕대의 근친 왕족들의 정치 요직 등용은 3차례의 태자의 책봉과 관계가 있으며, 하대정치의 특징과도 연결지울 수 있다.


As King Wonseong(元聖王) was advanced in age when he was enthroned, it was urgent to select a successor to the throne. With the resistance of Kim Juwon's lineage sealed, a succession dispute must have taken place i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would fail to be acknowledged.
King Wonseong installed three crown princes in his reign lasting for 14 years. King Wonseong's eldest son, Kim Ingyeom(金仁謙), Hyechung Taeja(惠忠太子), and his second son, Kim Euiyoung(金義英), Heonpyeong Taeja(憲平太子), were designated as a crown prince each, but they both failed to ascend the throne as they died before King Wonseong did. Year eleven of King Wonseong's reign, Kim Junong(金俊邕) was installed as the third crown prince and finally succeeded to the throne. In this process, there was a period that there was no crown prince twice. The third crown prince, Kim Junong, was the grandson of King Wonseong.
King Wonseong's grandson, Kim Junong, was appointed as Sijung(侍中) after the death of Crown Prince Hyechung, and another grandson, Kim Eonseung(金彦昇), was appointed as Sijung after the death of Crown Prince Heonpyeong. Also, both were promoted to Byeongburyeong(兵部令) when withdrawn from the post of Sijung.
King Wonseong's reign was the time when a type of power grasp and concentration by the members of the royal family characterizing the power structure of late Silla was being established. It happened in the process that King Wonseong who had ascended the throne at an old age selected his son and grandson as the next heir to the throne. Therefore, the appointment of close relatives of the royal family to important political posts during King Wonseong's reign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installation of those three crown pri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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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안주홍 ( An Ju-ho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3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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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애장왕대 假王子 파견 시도와 交聘結好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760년에 일본은 신라에 專對人의 파견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외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신라는 재위 왕의 아들만을 왕자라 칭하지 않았다. 원성왕의 손자로 흥덕왕 사후 왕위계승을 다툰 김균정을 가짜 왕자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이 왕자의 파견을 요구하였고, 이를 수용하여 802년에 김균정을 가왕자로 삼아 일본에 보내려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802년의 가왕자 파견 시도 기록은 원성왕계이지만 인겸계는 아니라는 분파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774년에 신라는 일본에 修好聘問의 관계를 표방하였고, 이를 신라 내부에 공식화한 것이 803년의 交聘結好이다. 802년의 질자 파견 시도는 교빙에 따른 交質이다. 聘은 『예기』에 근거한 것으로, 제후가 대부를 시켜 다른 제후를 방문하는 것이다. 신라왕은 당의 제후이자 신라의 천자라는 이중적인 천하관을 표방하였다. 신라는 교빙결호를 통해 일본이 자신과 같은 당의 제후임을 인정하면서도, 일본과 당의 교류를 중개하여 일본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드러내었다. 애장왕과 섭정 김언승은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803년의 대일외교 의례를 활용하였다.


This article analyzes diplomatic activities with Japan during the reign of King Aejang of Silla. Silla saw Japan as a servant(蕃國) of the Tang Dynasty, just like her. At the same time, Silla regarded itself as the center of the world, so it thought superior to Japan. In this worldview(天下觀), Silla exchanged envoys and to be a good relationship(Gyobingyeolho交聘結好) with Japan in 803. Through this, King Aejang was able to reveal the dignity of the emperor(天子, 皇帝) inside Silla.
Meanwhile, in 802, Silla tried to make Kim Kyun-jeong a fake prince(假王子) and send him to Japan as a hostage(質). Kim Kyun-jeong is the grandson of King Wonseong and is not a fake prince. In Silla the male royal family was called the prince. Nevertheless, the record as a fake prince is due to the sense of distinction within the royal family. Silla sent a prince to Tang for diplomatic activities (Prince Sukwi 宿衛王子). It is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by monopolizing diplomacy. King Aejang tried to send a prince to Japan by imitating this form and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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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성권 ( Jeong Seong-kw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7-27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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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로는 <삼국사기> 아달라왕 3년(156)조에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계립령로는 충주에 중원소경이 설치된 557년(진흥왕 18) 이후부터 신라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계립령 일대에는 삼국시대 관방유적 이외에 통일신라~고려시대 조성된 많은 불교유적이 있다. 계립령로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으로는 월광사지, 덕주사지, 사자빈신사지, 미륵리사지, 관음리사지 등이다. 본 연구에서는 계립령로에 위치한 사지와 사지에 있는 석불, 석탑, 승탑, 탑비 등 주요 불교미술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삼국시대에 치중되었던 계립령로의 활용과 변천에 관한 양상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까지 확장하여 살펴보았다.
계립령의 불교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월광사지이다. 월광사는 8세기 전반경 국가적 후원과 관심 하에 창건된 사찰이다. 월광사는 후삼국시대 쇠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10세기 후반경부터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사자빈신사는 1022년(현종 13) 창건된 사찰이다. 사자빈신사의 조성배경에는 계립령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현종의 의도가 반영되었음을 논하였다. 덕주사는 11세기 중반경 창건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더불어 덕주사의 창건에 60포제에서 12조창제로 변하는 조세 운송제도의 변화와 법상종 사찰 법천사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계립령 남쪽에 위치한 사원의 경우 관음리사지 1, 2, 3이 고려초기부터 중기까지 시차를 두고 교통로의 발전과 연계하여 새로운 사원이 건립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 논문은 8~12세기 계립령로 소재 사찰의 건립과 그 의미를 다룬 논문이다. 계립령로에 위치한 불교유적과 불교미술은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계립령로의 활용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A record can be found in the 3rd year of King Adala (156) in the < Samguksagi (三國史記) >. Gyeripryeong-ro has been actively used by Silla since 557 (18th year of King Jinheung) when Jungwon Sogyeong was installed in Chungju. In addition to the fortresses built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re are many Buddhist artworks created during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eras in the area around Gyeryongryeong. Representative Buddhist relics along Gyeryipryeong-ro include Wolgwangsa Temple Site, Deokjusa Temple Site, Sasabin Shrine, Mireuknisa Temple Site, and Gwaneumnisa Temple Site.
In this study, Buddhist ruins located in Gyeryellyeong-ro and Buddhist art in this area were analyzed. Buddhist art works include stone Buddhas, stone pagodas, monk stone pagodas, and monk monuments.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understand the aspects of the use and change of Gyeryyeong-ro in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eras.
Wolgwangsa Temple is the oldest Buddhist relic in Gyeryongryeong. Wolgwangsa Temple was built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8th century with national support and interest. Wolgwangsa Temple began to flourish again in the late 10th century after Goryeo unified the later Three Kingdoms
Sasabinshin Temple was founded in 1022. In the background of the construction, not only was it closely related to Gyeryyeong-ro, but also the intention of King Hyeonjong to reorganize the national system and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was reflected. It is understood that Deokjusa was built around the middle of the 11th century.
In the case of temples located in the south of Gyeryipryeong, new temples were built in connection with 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routes at Gwaneum-ri Temple Sites 1, 2, and 3 at a time lag from the early to middle Goryeo period.
The Buddhist ruins and Buddhist art located on Gyeryellyeong-ro are important materials that reveal the process of transition to Gyeryyeong-ro, which is not recorded in historical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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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기섭 ( Kim Ki-seob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9-3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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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은 고려 후기 대표적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다. 이색은 아버지 이곡과 함께 원의 제과에 합격한 인재로서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이해하였다. 이색이 공민왕에게 올린 복중상서와 시정팔사의 상서는 이색의 고려후기 사회에 대한 진단과 해법이 담겨있는 내용으로 주목된다. 특히 토지 문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고려후기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에 대한 이해와 진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색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살필 수 있다.
고려 후기는 충숙왕의 개혁과 충목왕대의 개혁을 통해 갑인주안의 작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토지제도의 복구에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대에 이르기까지에도 그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공민왕의 개혁 과정에서 이색은 다시 갑인주안을 주목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한 일전일주의 원칙을 복구하고자 하였다.
이색의 토지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법은 당시 고려 사회의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되었던 일전다주의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공민왕대 개혁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추동할 수 있는 정치력의 한계와 정치적 목적에 경도된 개혁의 방향으로 인해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민왕대 진행된 여러 차례의 개혁은 개혁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정치적 목적으로 인한 개혁의 왜곡,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침입 등으로 인한 외적 조건에 의해 실질적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
이색의 토지문제 인식은 현실에 기반을 둔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정도전, 조준 등 사전혁파론자의 개혁성에 비견되는 현실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의 성공 여부에 기초한 평가라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에 의미를 둔다면 이색의 주장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색의 주장은 당시 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보수적 개혁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현실을 무시한 결과론적 평가라고 생각된다.


Mokeun Lee Saek, a representative intellectual and Neo-Confucian scholar in the late Goryeo dynasty as a talented man who had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the Yuan dynasty china like his father Lee Gok, understood the contradictions of the late Goryeo society more clearly than anyone else. Lee Saek's diagnoses and solutions to the late Goryeo society could be found in his appeals to King Gongmin, addressed in the year 1352 and 1356. Lee Saek's understanding and awareness of land problems especially show his accurate problem recognition of problems faced by the late Goryeo society.
Although reformations taken by King Chungsuk and King Chungmok made cadastre to restore the land system, the problem remained until King Gongmin. Progressing the reform by King Gongmin, Lee Saek tried to restore the principle of 'One Land, One Owner' based on the cadastre made in 1310.
His awareness and solution of the land problem was a practical proposal to solve the problem of 'one land, many owners', pointed out as the gravest indictment in the Goryeo society at that time. The reasons for the failure, however, were likely due to the lack of political power to sustain force for reform by King Gongmin and the direction of the reform weighted towards the political end. The reforms during King Gongmin, despite their justification, could not achieve real results because of distortion of reform by its political end and because of external conditions such as the Red Turban and Japanese Raiders' invasions of Goryeo.
Lee Saek's awareness of the land problem based on reality was a practical solution comparable to private land reformists such as Jeong Dojeon and Jo Jun. Even if evaluated concerning the success of the reform, his opinion is considered significant in terms of feasibility. Lee Saek's argument has limitations that could not keep up with the times in the course of the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at that time, but should not be criticized as conservative reform to defend the vested interests with a consequential evaluation that ignores the reality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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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성일 ( Han Sung-il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3-362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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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은 15세기 후반과 비슷한 규모의 水軍 軍額을 임진왜란 직전까지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수군의 流亡이 극심했기에, 수군의 실제 인원은 군액에 미치지 못했다. 군액을 고수하는 정책은 남아 있던 수군의 부담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망한 수군의 군역을 族隣에게 전가시켜 사회문제를 초래했다.
임진왜란 초 수군진은 다수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전체 병력의 약 70%가 전통적인 수군과 수군의 番價로 운영되는 인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군액을 고수하는 정책이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복무 기간이 증대함에 따라, 복무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던 양인 출신의 수군은 복무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유망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1593~1594년 기근과 질병으로 수군의 사망과 유망이 더욱 심각해졌다.
전쟁 기간 수군의 역할이 중요해졌기에 조선 정부는 새롭게 수군 병력을 편성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기간 양인의 유망이 극심했기에 田結을 기준으로 군사를 징발하거나, 流民을 모집하거나 雇立하여 군사로 삼는 방식이 등장했다. 또한 정유재란기를 전후하여 연해 군현의 군인과 백성들을 일괄적으로 수군에 편입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새롭게 편성된 수군 병력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이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수군과 같이 자비로 복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수군진에서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량을 지급해야만 했다. 이는 전쟁 기간 수군이 새로운 財源을 마련해야 함을 의미했다.


In the 16th century, the Joseon state maintained a large-scale naval force comparable to that of the 15th century, despite the large number of naval soldiers - Sugoon(水軍) - evading the military service. The Joseon state's maintenance of a large naval force placed a great burden on naval soldiers and their relatives and neighbors.
However, through this policy, the Joseon naval forces were able to maintain a large number of troops in the early days of the Imjin War. However, due to the increased service cost of the naval soldiers during the war, the desertion of the soldier continued. Most of the naval soldiers died from the famine and disease that continued between 1593 and 1594.
Therefore, the Joseon state had to requisition a new naval soldiers. The Joseon state requisitioned troops based on farmland area - Jeongyeol(田結) - or recruited wanderers. The newly requisitioned naval soldiers included many poor people. Therefore, unlike the naval soldiers before the war, who had to bear the cost of their service, the government had to provide food to newly requisitioned soldiers. Therefore, the navy and the state had to come up with new sources of fu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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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문숙자 ( Moon Sook-ja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5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63-3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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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舊文記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토지매매 양상을 살펴볼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구문기는 노비나 토지 등을 매매할 때 계약문기와 함께 건네주는 것으로, 과거 동일한 대상물을 매매할 때 작성했던 매매문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해당 토지의 權原文記를 비롯하여 거래 대상물이 등재된 다른 유형의 문서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실제 구문기를 첨부하여 여러 장의 매매문기가 교부되는 현상은 주로 토지매매에 나타났다. 토지매매문기를 대량 소유하고 있으며 구문기가 흩어지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된 周村李氏家의 경우 구문기의 첨부는 18세기 전반기에 일반화하였다. 구문기를 첨부하지 못하는 경우 다른 토지가 함께 수록된 것을 사유로 드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구문기에 등재된 토지 전부를 매매하는 경우는 구문기의 첨부가 평이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구문기에 등재된 토지 중 일부만 매매하는 경우 放賣者는 구문기 첨부에 소극적이고, 買得者는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그 예로, 많은 토지가 등재된 분재문기가 그중 극히 일부의 토지를 매득한 다른 집안으로 옮겨가 傳存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렇게 다른 집안에서 발견되는 분재문기는 대부분 하위 신분의 것이다. 이 점은 대면거래로 이루어지는 토지거래에서 지역내의 사회적 지위나 위상이 구문기의 수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판단되기에 몇몇 사례로 이를 검증해 보았다. 하지만 이는 시론에 불과하며 그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례의 축적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patterns of land sales in Joseon through the analysis of previously written contract document(舊文記, Gumungi). A Gumungi was a registration certificate handed over with a contract document to sell and purchase a piece of land. It was a land sale document made to sell and purchase the same piece of land in the past. The term was also used as a broader concept to encompass other types of documents to register an object of trade. In the study, the cases of Juchon Lee family were examined as they had a large number of land sale documents and preserved intact Gumungis relatively well. The Results show that the addition of a Gumungi became a general practice in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When the seller could not attach a Gumungi, he would say that the concerned Gumungi registered other pieces of land, too, in many cases. When the purchaser bought all the pieces of land registered on a Gumungi, it was easy to attach one. When only some of the pieces of land registered on a Gumungi were sold, the seller would be passive about the attachment of the Gumungi, whereas the purchase would be active. One example is found in a property inheritance document with many pieces of land registered on it. The document was transferred to another family that purchased some of the pieces of land and would remain in the family. Most of the Property inheritance document found in other families belonged to people in lower ranks. It may show the possibilities of social ranks or status in the community had impacts on the acceptance of a Gumungi in face-to-face land deals. It was tested in several cases, but it is just a test theory. More cases should be accumulated to prove its pos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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