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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0)~1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68
한국계보연구
10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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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

저자 : 전진국 ( Jeon Jin-kook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50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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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본관성씨 제도는 고려 초에 시작되었지만, 성씨를 쓰는 사례는 삼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글에서는 위만조선과 낙랑 시기부터 성씨를 쓰는 문화가 있었음을 검토하였다.
위만조선과 낙랑에서 확인되는 주요 성씨는 한씨와 왕씨이다. 한씨는 위만 앞의 고조선 왕족이 왕위를 빼앗긴 뒤에 사용한 성씨였다. 고조선 왕족이 한씨를 썼던 정황은 『위략』과 『잠부론』에서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등장하는 한음과 왕겹은 위만조선에 존재했던 한씨와 왕씨의 인물이다. 한씨와 왕씨는 중국계 성씨이며, 이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왕족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씨를 쓰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중국의 성씨 문화가 위만조선에 전해졌다고 판단한다.
왕씨와 한씨는 위만조선 멸망 뒤 그 땅에 두어진 낙랑군에서도 확인된다.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는 글씨가 새겨진 유물을 통해 성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함께 발견되는 유물과 그 유물이 발견되는 무덤의 양식을 통해서 보면,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은 고조선계 토착 주민이었다. 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는 삼국시대의 성씨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지만, 지배층 사이에서 성씨를 쓰는 그 문화는 전수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한씨와 왕씨는 한국사에서 성씨 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다.


In Korea, the system of adding the Choronym(Pon'gwan, 本貫) to family names began in the early Goryeo Dynasty, but the use of family names can also be found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Furthermore, there was a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from the Weimanchosǒn(衛滿朝鮮) and the Lolang(樂浪) periods.
The main family names found in Weimanchoson and Lolang periods are Han(韓) and Wang(王). Han was the family name used by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after they lost the throne to Weiman(衛滿). The records of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writing Han are found in Weilueh (魏略) and Qianfulun(潛夫論). Hanum(韓陰) and Wanggyeop(王唊), who appeared in the Chosǒn(朝鮮傳) in Shiji(史記), were the people of Weimanchosǒn who used Han and Wang as family names. Han and Wang were family names used in China, and it was already common in China at that time to use surnames ranging from royalty to ordinary people. Such Chinese family name culture would have spread to Weimanchosǒn.
Wang and Han are also found in Lolang, which was placed on the land after the collapse of the Weimanchosǒn. The existence of the family name can be confirmed mostly through the inscriptions found in tombs. Based on the relics and the style of the tombs, the people who used the family name were indigenous people of Old Chosǒn. The family name of Weimanchosǒn and Lolang were not directly linked to the family nam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but the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was spread among the ruling class. Therefore, Han and Wang of Weimanchosǒn were the origin of the family name culture in Korean history.

2우복학단의 성격과 계보학적 갈래

저자 : 채광수 ( Chae Gwang-soo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9-8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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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 곧 우복학단의 형성 및 갈래와 그 성격에 대해서 다룬 것이다.
정경세는 화려한 관료생활, 양난 창의활동, 향촌 재건사업, 퇴계학파의 적통계승, 당색을 초월한 교유 등 당대 정치·사회적 위상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향촌에서 성리학에만 몰두한 산림과는 또 다른 유형의 관료학자였다. 그의 문인양성은 1600년(선조 33) 영해부사에서 파직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상주 우북산 서쪽에 별업을 조성하면서 본격화 된다. 그의 才望은 수학하려는 자들이 주변에 점차 늘어갔고, 이와 같은 문하생에 대한 정보는 『우복문인록』에 실려 있다.
『우복문인록』을 통해 검토한 우복학단의 성격은 크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다양한 연령대의 문인들로 구성, ②지역적 범위가 정경세의 향촌 생활 반경과 합치되는 상주권에 주로 분포, ③다른학파와 상호 소통을 가능케 하는 중첩적사승관계의 문인 다수, ④혼인과 戚緣으로 얽힌 문인 포진, ⑤여타 영남 문인록에서는 보기 힘든 소·대과 합격자와 관직 역임자들의 높은 비율 등을 들 수 있었다.
우복학단의 갈래를 이해하기 위해 확연히 대별되는 남인계와 서인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다수인 전자 집단에서는 도남서원 추향과 운영권 장악을 통해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 계보를 정립했고, 우복학단의 거점 서원으로서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 또 18세기 후반 우복 별집과 연보간행, 우산서원 설립, 우북산 修契所를 설치 등의 현양 사업은 우복문인 후손으로서의 정체성과 계승의식의 또 다른 발로였다.
반면에 영남에서 서인계 성향의 문인이 배출되는 현상은 매우 특이하다. 소수 이기는 하나 이에 대한 검증은 정경세가 영남학을 계승하면서도 기호학을 수용한 융화적인 면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또 영남 내 서인계 형성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This study examines the establishment and branches of the Ubok Academy, a talent-fostering school led by Ubok Jeong Gyung-se. Jeong Gyung-se is an unquestionable person when it comes to the political and social status of his time with various accomplishments, including flamboyant career as an official, creative activities during the two wars, village rehabilitation work, succession of the principles of Toegye Academy, and social companionship beyond partisan politics. He was a different type of bureaucratic scholar from who classical scholars devoted to Neo-Confucianism without seeking a government position. His effort to foster talents began in earnest in 1600 (33rd year of King Seonjo's reign) when he was dismissed from Yeonghae Busa and built a villa in the west of Mt. Ubuksan in Sangju to spend the rest of his life. His scholarly talent and reputation brought a large number of those who sought to learn from him, which is described in the 'Ubok Muninnok'.
According to the Ubok Muninnok, the characteristics of the Ubok Academy can be summarized in five categories as follows: ①Comprised of literary men of various ages, ② regional coverage limited to the Sangju area, which is within the radius of village life of Jeong Gyeong-se, ③ many literary men with overlapping relationship between teachers and disciples that allows interactive communications with other schools, ④ literary men linked with marriage and relative connections, and ⑤ higher percentage of those who successfully passed the state examinations and secured a government official post, unlike other Yeongnam Muninnok records.
The study has examined the Yeongnam Academy and the Giho Academy that are distinctly differentiated from each other in order to understand the branches of the Ubok Academy. The former, which is a majority scholarly group, established the lineage of the Yeungnam Academy involving Yi Hwang, Ryu Seong-ryong, and Jeong Gyeong-se by securing the right to practice fall memorial service and operate Donamseowon Confucian Academy and solidified its position as the foothold educational institute of Ubok Academy. The establishment of the Ubok villa, publishing of annuals, establishment of the Usan Confucian Academy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Ubuksan Suseolso in the late 18th century were another manifestation to ensure the identity and sense of succession as the descendants of Ubok literary men.
Meanwhile, the phenomenon of introducing literary men oriented toward Gihohak Study in Yeongnam region is quote uncommon. Despite being in small number, it carries a significant meaning in understanding Jeong Gyeong-se's tolerant aspect of embracing the Gihohak in a conciliatory manner while inheriting Yeongnamhak. It is also noted that it served as the beginning of establishing the Seoingye faction in Yeongnam.

3무안(務安) 박씨(朴氏) 무의공파(武毅公派)의 형성(形成)

저자 : 장준호 ( Jang Jun-ho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9-12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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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영남의 명문가 중 하나인 무안 박씨 영해파가 재지적·사회적 기반을 확립해 가는 과정과 무의공파라는 문중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가는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무안 박씨는 朴之蒙의 혼인과 이거를 계기로 영해에 정착하였다. 영해의 무안 박씨들은 박지몽의 입향 후 分家의 반복을 통해 지연에 기초한 동족조직을 형성하였다. 입향 초기 무안 박씨 문중은 재지적·사회적 기반이 취약하였다. 이후 4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儒風을 진작시켰고, 퇴계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학문적 기반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재지적·학문적 기반을 확대해 가던 무안 박씨 문중은 朴毅長 이후 家格이 보다 신장되었다. 그는 임란 기간 동안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시 경주판관으로 자신의 임지인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공을 올렸고, 이후 일본군의 재북상을 차단하고 경주 府民을 구휼하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역할도 차질 없이 수행하였다. 공신 책봉은 가격의 신장과 문중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의장에게 호조판서의 증직이 내려지면서 무안 박씨 문중은 판서의 후예라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박의장의 사남 朴瑄은 爲先 사업을 주도하면서 문중 후손들의 결속을 강화했고, 府君의 전적을 수습·정리하였다. 그는 여헌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했던 知友들에게 박의 장의 墓誌銘과 神道碑銘의 찬술을 부탁하면서 祠宇 건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박선의 위선을 위한 노력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朴師周는 존주의리를 강조하는 正祖대의 분위기 속에서 贈諡上言을 올려 武毅라는 시호를 받아냈다. 박의장은 시호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시호의 사여는 박의장 후손들에게 의미가 매우 컸다. 즉 시호의 사여는 경주성 탈환 전투의 공로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주성 탈환 전투에 대한 박의장의 공로를 인정받는 것은 무안 박씨 문중의 宿願이기도 했다. 따라서 延諡는 박의장의 임란 공적을 조정으로부터 확인받은 것임과 동시에 박의장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보다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무안박씨 문중은 武毅公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회적 기반을 보다 공고히 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process of forming a social identity of Muan Bakssi(務安 朴氏), a member of a prestigious family in Yeongnam. the Muan Bakssi of Yeonghae(寧海). After Bak Ji-mong(朴之蒙) had moved to London, a group of the same surname was formed when his children got married. Their social base was weak right after they moved to Yeonghae. They expanded their social base in Yeonghae by producing bureaucrats and learning from Yi Hwang(李滉).
The Munjung of Muan Bakssi 's status was higher than before because of Bak Ui-jang(朴毅長). It was because Bak Ui-jang established his major in Imjinwaeran(壬辰倭亂) and was appointed to a gongsin(功臣). This further strengthened the Munjung's solidarity and took strong pride in being a descendant of Bak Ui-jang. After Bak Ui-jang 's death, the government raised the ranks, and his descendants prided themselves as descendants of the Hojo panseo(戶曹判書). Bak Ui-jang's son Bak Sun(朴璿) did many things to honor his father's achievements. He took the lead in explaining and organizing his father's achievements. Bak Sun's efforts paid off by his descendants. Bak Sa-Ju(朴師周), a descendant of Bak Ui-jang, asked King Jeongjo(正祖) to gived him a posthumous title. King Jeongjo gaved Bak Ui-jang the a posthumous title "MuUi(武毅)". Bak Sa-Ju's efforts made Bak Ui-jang's contributions during Imjinwaeran recognized by the government, and Bak Ui-jang's descendants became the descendants of war heroes.

4은진송씨 송준길가를 통해 본 기호사대부의 통혼 양상과 혼례문화

저자 : 김연수 ( Kim Yeon Soo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1-194 (7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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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혼례문화 연구의 종합적 고찰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조선왕조 500년 동안 충청도 회덕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은진송씨 송준길 가문이 펼쳐 나갔던 통혼(通婚)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더불어, 주자학적 원리를 수용하면서도 그들만의 차별성이 강조되는 '혼례'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각장의 핵심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송준길가는 세족(世族)과 화벌(華閥)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혼인을 추구하였다. 15~16세기에는 안동김씨, 광산김씨, 완산이씨 등 당대 권문세가와의 적극적인 연혼(連婚)을 통해 호서중심의 라이센스를 획득하며 중앙권력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17세기에는 본격적인 세도가의 반열에 올라 여흥민씨, 우봉이씨, 진주정씨와의 거대 연계망 속에서 핵심 권력으로 역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치 사회적 입장차에 의한 세의(世誼)와 단절(斷切)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둘째, 친가·외가·처가를 아우르는 삼향의 공간 분석을 통해 친가인 충청도 회덕을 중심으로, 충청 및 경기(서울) 지역을 포괄하는 기호(畿湖)지방 통혼권(通婚圈)을 시각화할 수 있었다. 또한 송준길가의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외가출생과 처가살이(贅)의 사례는 조선사회에서 종적으로 구성된 친가의 직계혈연 뿐만 아니라 외가와 처가의 방계적 인척 연대 역시 상당히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셋째, 송준길가 인물 108명의 통계를 통해 초혼(初婚) 평균연령이 남자는 15.8세, 여자는 16.2세로 여성이 연상으로 나타났으며, 여성의 엄격한 재가(再嫁) 금지에 따른 남녀 연차(年差)가 극대화되는 현상을 살폈다. 혼서(婚書)의 작성과 교배례(交拜禮)의 실행 문제와 관해서는 주자학적 원리의 수용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사계예학을 적극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먼저 혼서로는 『가례의절』의 납채와 납폐식이 혼합된 유형을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이때 전국 51가문 314건의 혼서 유형을 분석한 결과, 기호지역(경기+충청)과 경북지역, 남부지역(경남+전라)의 세 권역으로 구분되었다. 교배례 방식에 있어서는 김장생의 주장에 따라 '여2-남1-여2-남1'의 협배(俠拜)방식을 채택하였으며, 당시에 작성된 홀기를 통해 실제로 각 가문마다 다르게 실행했음을 확인하였다.


This study began with a sense of problem that there was a lack of comprehensive consideration of wedding culture research. From the perspective of time, space, and human analysis, Eun Jin-song's Song Jun-gil's marriage style was focused on the space called Hoedeok in Chungcheong-do for 500 years during the Joseon Dynasty, while embracing the principles of self-reliance and creating their own differentiation.
First, Song Jun Gil's family made a strategic marriage through the choice of a wealth and a .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he sought to obtain a license centered on Hoseo through his active marriage with the reign of aristocracy, such as Andong Kim, Gwangsan Kim, and Wansan Yi. In the 17th century, he joined forces with Yeo Heung-min, Woo Bong-yi, and Jinju-jung. In the process, he experienced a sense of intimacy and disconnection due to political and social differences.
Second, the spatial distribution of the family, mother-in-law, and the birth of the mother-in-law and the family-in-law, which continued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suggest that not only the direct blood relationship of relatives but also the mother's family and wife's family are important.
Third, the statistics of 108 Song Joon-gil's figures showed that the average age of first marriage was 15.8 years for men and 16.2 years for women, and that the annual gap between men and women was maximized due to the strict ban on women.
Starting with this study, if other households in Bojosam are analyzed in the same way, if further research is conducted in other areas such as Yeongnam, Honam, and Gangwon, a large genealogy of the Joseon Dynasty will be created.

5족보를 통해 본 종족·가문·마을의 사회문화사 -의성김씨(義城金氏) 학봉(鶴峯)김성일가(金誠一家)를 중심으로-

저자 : 권지은 ( Kwon Jee-eun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5-23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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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족보를 자료로 활용하여 종족·가문·마을의 사회 문화적 역할과 그 의미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학봉(鶴峯) 김성일가(金誠一家)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 실상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의성김씨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이자 의성김씨 시조인 김석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 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김용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진민사(鎭民祠)가 건립되었으며 김용비의 아우인 김용필의 후손이었던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당시 진민사의 편액을 걸고 향사를 지냈다. 그러나 김용필 후손 계열은 기묘사화 이후 김안국·정국 형제의 입지적 기반이 흔들림에 따라 진민사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김용비의 10대손인 김진(金璡)의 발의로 묘비가 건립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성일(金誠一)이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김진이 혈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김극일, 김성일, 김복일 등이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정치·사회적 위상이 충분히 달성되어 이를 뒷받침할 혈통적 근원에 관심을 두게 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성김씨가의 족보는 16세기부터 간행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한 번 간행되고, 17세기에 3번, 18세기에 한 번, 19세기에 2번, 20세기에는 4차례 간행되었다. 족보 편찬의 과정과 주체를 통해 가문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세력 혹은 계파를 확인하고, 아울러 문중의 종법(宗法) 정착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김진(金璡)의 내외자손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계(稧)를 조직하고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혈연적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계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족[가문]의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적 공간인 마을에서 그 공간을 향유, 또는 점유하기 위하여 마을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학봉가에 있어서 그러한 공간은 곧 안동의 금계(金溪)마을이다. 이들은 금계마을에서 단순히 강학활동을 하거나 학문활동을 하는 것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풍속 향약에 맞추어 홍수가 나면 포구를 정비하고 제방을 쌓는 등 마을을 학술적 공간으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마을의 시설 보수 등 실생활 면에 있어서 마을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외부 인사들과도 지속적으로 교유하여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며 마을을 가꾸어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성일은 금계마을의 운영에 있어서 집안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권호문(權好文)과도 관계를 이어나가며 학술적 교유뿐 아니라 경광서당의 기문을 부탁하는 등 문자적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김성일가의 가학과 학풍이 계승·변화·발전의 단계를 거치며 그들 종족 내에서의 인적 자원과 김성일이 조성한 '금계마을'이라는 인문공간적 배경이 그 토대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use the geneological records of Uiseong Kim clan as data to examine the social and cultural roles and meanings of the clan, family and village and focusing on the family of Seong-il Kim.
The Uiseong Kim family is divided on the generation of Kim Yong-bi, Yong-pil, and Yong-ju brothers, the nineth generation of Kim Seok who is the son of King Gyeongsun of Silla. In honor of Kim Yong-bi's achievements, Jinminsa Temple was established, and Kim An-guk, a descendant of Kim Yong-pil, Kim Yong-bi's brother, was appointed as an observer of Gyeongsang-do. He put the tablet of Jinminsa Temple and performed ancestral rites. However, it can be inferred that the descendants of Kim Yong-pil were not involved in the operation of the Jinminsa Temple due to the precarious foothold of the Kim An-guk and Jeong-guk brothers. Later, the epitaph of tombstone was built at the suggestion of Kim Jin, Kim Yong-bi's descendant, and his son Kim Seong-il played a practical role. This can be interpreted as part of Kim Jin's efforts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bloodline, and it can b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Kim Geuk-il, Kim Seong-il, and Kim Bok-il passed the higher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fully achieved the political and social status of the family.
The genealogical records of Uiseong Kim Clan began to be published in the 16th century and was published once in the 16th century, three times in the 17th century, once in the 18th century, twice in the 19th century, and four times in the 20th century. The process and subject of the compilation of genealogy are meaningful in that it is possible to identify certain forces or factions that dominate power in the family and to examine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agnatic principle of the clan. Kim Jin's grandchildren organized and operated a Mutual Assistance Society to promote friendship and strengthen solidarity, which developed into a system in the process of strengthening blood ties, not temporary.
Based on the consciousness of race[family] they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the operation of the village to occupy the space of the village ideologically. For the family of Hakbong, such a space is Geumgye Village in Andong. They not only focused on academic activities in Geumgye Village, but also used the village as an to repair ports and build embankments in accordance with the customs of the village. In the operation of Geumgye Village, Kim Seong-il continued his rela tionship with not only his family members but also with Kwon Ho-mun, who was living nearby, to expand his spatial area through literary activities. It can be confirmed that Kim Seong-il's family custom and their academic culture have been the basis for human resources within their race and the humanities background of "Geumgye Village" created by Kim Seo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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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명의 왕비를 배출하여 조선의 왕비가문으로 자리한 청풍김씨를 중심으로 국혼의 대상을 간택하는 조건을 파악하고, 나아가 왕비가문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청풍김씨는 고려 문하시중에 오른 김대유가 청성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대두되었다. 두 왕비를 배출한 문의공파는 김대유의 5대손인 김중원을 파조로 한 청로상장군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청풍김씨는 김식이 절의를 지켜 기묘명현으로 추숭되면서 대표적인 사림가문으로 자리했다.
김식의 4대손 김육이 등장하고 김육의 아들, 김우명의 딸이 효종대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외척세력으로 부상하였고, 김시묵의 딸이 영조대 세손빈으로 간택되면서 왕비가문의 위격을 확립하였다. 국혼의 대상자를 간택하는데 있어서 명문가의 자제 혹은 당대 국정을 주도하는 현달한 인물의 후손 등 정치적인 요소로서 해석할 수 없는 모습들이 두 왕비의 간택 과정에서 보이며 이는 효의왕후가 간택되는 과정에서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다.
김육의 청풍김씨 가문은 선대부터 대군, 종실, 부마집안과의 혼인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명성왕후를 배출한 이후 더욱 증폭되었고 부마집안과 다른 외척 세력과의 혼인이 연이어 이루어졌다. 당시 국혼을 주도하였던 효종과 영조는 불완전한 왕위 계승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왕이다. 그들은 본인들의 영향으로 세자와 세손에서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여 조선 초부터 이루어진 왕실과의 '혈연적 유대감', '혈연의 누층'을 통해서 신성한 혈통으로서 세자와 세손의 지위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비가문은 당대 권세를 획득한 세력 가문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왕실과의 혼맥을 통해 신성한 혈연적 계통을 지닌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dentify the conditions under which two queens are produced, centering on Cheongpung Kim, who is the queen's family of Joseon, and the selection of spouse of the royal family as the subject of national marriage, and furthermore, to define the nature of the royal family. Cheongpung Kim emerged since Kim Daeyu conferred the title with Cheongseong Buwon-gun. Munuigong branch, which produced the two queens, is rooted in the Cheongnosangjanggun branch, which includes Kim Jung-won, the fifth-generation descendant of Kim Dae-yu. Cheongpung Kim became a representative family member as Kim Sik was honored as Gimyo Myeonghyeon in honor of his devotion. Kim Yuk, the fourth-generation grandson of Kim Sik, emerged as an outcast when Kim Yuk's son and Kim U-myeong's daughter were considered as Crown Princess of Hyojong, and Kim Si-muk's daughter was considered as the spouse of the oldest son of the Crown Prince of Yeongjo establishing the dignity of the royal family. In selecting the subject of national marriage, political factors such as the restraint of a prestigious family or descendants of a wise figure leading the state affairs of the time are seen in the process of the selection of the Queen Hyoui.
Kim Yuk's Cheongpung Kim family continued to marry the grand prince, royal family, and royal son-in-law families from the early generation. This aspect was amplified after the birth of Queen Myeongseong, and the marriage between the roayl son-in-law family and other relatives of queen took place one after another. King Hyojong and King Yeongjo, who led the national marriage at that time, had a complex of incomplete succession to the throne. Concerned that they might influence the crown prince and his descendants, they intended to strengthen the status of the crown prince and his descendants as a sacred lineage through the "blood ties" and "the accumulation of blood ties" with the royal family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Joseon's royal family does not just mean the powerful family that won the power of the time. It means a family with a sacred bloodline through a marriage with the royal family.

7초암(草庵) 정윤우(丁允祐) 연구 - 16세기 지식인의 관료의식과 그 실천 -

저자 : 김학수 ( Kim Hak-su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9-347 (6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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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초암(草庵) 정윤우(丁允祐)가 국가의 위기에서 공인이 어떻게 처신하고 역할하였는지에 관한 사례를 통해 가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기림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지도자를 새롭게 발굴하고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에 15~16세기 나주정씨(羅州丁氏)의 가계와 문벌의 위상을 통해 가문적 연원을 살피고, 그러한 가문의 위상 속에서 정윤우의 생애와 내외족친의 인적 연계망을 확인하였다.
정윤우는 1570년 문과에 합격하여 문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관료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시기 전시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관료로서의 역할과 비중을 확대해나갔다. 또한 정윤우는 중형 정윤희(丁胤禧)를 매개로 퇴계학(退溪學)을 수용하였고 이를 통해 관료로서의 지위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정윤우의 관료적 역할과 업적에 비해 조정의 예우는 다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림에서는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할 것을 발론한다거나 별묘를 건립하여 불천위로 봉안된것 정도의 종족적 차원에서의 예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후 정조 연간에 들어서 명나라 사행 시 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유엽배(柳葉杯)를 계기로 정윤유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 영남지역 대명의리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정씨가문의 충효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정윤우는 국난의 시기에 공인의 자격으로 관료적소임을 다하였으며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 누구보다도 본분에 충실했던 인물로서의 이해가 요구된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iscover and shed light on true leaders who can receive social honor beyond family level through examples of how Cho-am(草庵) Jeong Yun-woo(丁允祐) acted and played a role as a public figure in the national crisis. Thus, the family origin was considered through the status of Naju Jeong Clan(羅州丁氏) lineage and literary cliqu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in such a family status, Jeong Yun-woo's life and his personal network formed by his kin relation were verified.
Jeong Yun-woo passed the higher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1570 and became a member of the ranks of civil officials, and his bureaucracy began in earnest from then on. Since then, he has expanded his role and importance as a bureaucrat by objectively and realistically judging the wartime situatio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Jeong Yun-woo accepted Toegye Studies through Jeong Yun-hui (丁胤禧) and through this, he became not only a bureaucrat but also a scholar. However, it is true that the respectful treatment of royal court was somewhat insufficient compared to Jeong Yoon-woo's bureaucratic roles and achievements. In Sarim society, Jeong Yoon-woo was respected in family-related level, such as to build a shrine for him and enshrine him as an ancestral rites for a meritorious in separate shrine.
Later, in the year of King Jeongjo's reign, the re-examination of Jeong Yoon-woo began to take place on the occasion of the Yuyeopbae(柳葉 杯), which was granted by Sinjong(神宗) during envoy travel to the Ming Dynasty. It soon became a symbol of fidelity to Ming Dynasty in Yeongnam region and was recognized as a symbol of the loyalty of the family. In the community of the nation and society, Jeong Yun-woo has to be understood as a person who served his bureaucratic duty as a public figure in the time of national crisis and was faithful to his duty more than anyone else for the benefit of the nation and society.

8인동장씨 장현광(張顯光) 가문(家門)의 학문과 계승 양상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49-3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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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가문의 운영 원리와 학문 정체성이 후손에게 계승되어 가는 양상을 밝혔다. 장현광은 17세기 전반에 영남에서 활동하던 학자 가운데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산림으로 지목되어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는 이 시기 조선 사회에 정치적으로 또 학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장현광은 일상생활에서 지향해야 할 가치를 재정립하고 삶의 터전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데에 기준을 제시하였다. 당시 그가 지향한 방향은 통합이었다. 이런 의식은 친족을 조직하고, 학문의 계통을 세우는 데에 작용하였다. 우선 가문에서는 내외친족을 아우르는 친족 조직을 구성하였고, 학문 영역에서는 예학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조화를 지향하였다. 조화와 통합은 장현광이 지향한 학문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이런 장현광의 인식은 이후 후손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그의 문인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인동장씨 후손들은 장현광의 학문 경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19세기 이후 내우외환의 시기에 인동장씨 사람들의 활동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인동장씨 가문의 학문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통합과 조화의 가족 운영과 학문적 자세는 오랜 시간 동안 장현광의 후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근본적인 원리로 작동하였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tendency of Jang Hyeon-gwang's (1554~ 1637) studies being inherited by later generations. He was one of the scholars that attracted attention in the Yeongnam region during the former half of the 17th century, which was demonstrated by the important fact that he was designated as Sanrim and involved in real politics. He had enormous political and academic impacts on Joseon society during this period.
Jang Hyeon-gwang provided a set of criteria to reestablish values and make the living foundation anew in daily life after Imjinwaeran. His direction was oriented toward "integration." He devised a relative organization encompassing both inner and outer relatives and sought after the voluntary participation and harmony of community members based on Yehak in the academic arena. Harmony and integration were the fundamental principles that he pursued.
His perceptions were passed down to his academic descendents. Of the many literary figures he influenced, a good number of his descents developed and inherited his academic trends further. These activities attracted more attention during times of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 from the 19th century due to his academic identity. Family management and academic attitudes based on integration and harmony had long served as fundamental principles to unite his descendents as one.

9해주오씨 추탄가문의 가문 활동과 위상

저자 : 이남옥 ( Yi Nam-ok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85-41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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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후기 해주오씨 족보 간행과 종계활동에 있어 추탄가문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 검토한 것이다. 해주오씨 추탄가문은 오윤겸을 현조로 하는 가문으로, 광주·용인을 지역적 근거로 한다. 갑술보·무술보·신묘보 등 조선후기 해주오씨 족보 간행과 “화수회”·“수양오씨증영의정감역부군제손종계” 등 종계활동은 오윤겸·오수원·오명항·오명구 등 추탄가문의 인물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다만, 오희문 이래 전승되는 포용적 가문 운영의 전통을 계승하여 다른 가문의 참여를 유도하고 적서 차별을 최소화하는 등 배타적 운영을 지양했다.


This study examines the activities and status of O Yun-gyeom's Family in compiling the genealogical record of Haeju O Clan and their relations with other families among the clan. The progenitor of this family, O Yun-gyeom whose pen name was Chutan, was a renowned figure. The family members have lived in Gwangju and Yongin areas in Gyeonggi province. Important figures from this family such as O Yun-gyeom, O Su-won, O Myeong-hang and O Myeong-gu played significant roles establishing the ancestral line and compiling the genealogical record of Haeju O Clan. They avoided esclusivism, encouraging other family members to participate in those activities and doing away with differentiation in status of primary and secondary sons. Such all-embracing attitude has become a tradition of this family since O Hui-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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