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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4)~23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205
청계사학
23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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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거란문자 해독에 있어 다고르어와 한국어 활용의 필요성

저자 : 김태경 ( Kim Tae-gyeong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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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거란문자는 상당부분이 미해독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대다수 학자들이 해독 과정에서 특정 언어, 즉 몽골어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인접 언어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었기에 발생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는 다고르어를 통한 거란문 해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초적 문헌조사를 통하여 거란어 고유어와 동원관계를 이루는 다고르어의 비중이 서면몽골어나 중세몽골어 수준에 육박한다는 걸 수치로 보여 주었다. 이 과정에서 관련 사례도 몇 개를 적시하였고, 연구에 필요한 언어자료들도 자세히 소개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연구방법론도 제시하였는데, 거란문 언어자료가 금석문에 한정되어 있음을 감안하여 동 시대의 한자 묘지명들을 중간 매개체로 하는 접근방법을 제안하였다. 즉 아직 거란어로 해독되지 않은 한자 묘지명의 어휘들을 선별하여 다고르어와 연계시키고, 이를 다시 미해독 거란 문자들에 대응시키는 방법이다.
또한 거란어의 선조 언어격에 해당하는 고구려어 등 한국 고대어를 다고르어처럼 거란문 해독에 활용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그에 필요한 몇 가지 언어자료들도 소개하고 있다.


Currently, a large part of the Khitan Scripts remains undeciphered. In this study, it is considered that this problem is a result of the fact that most scholars excessively relied on a specific language, that is Mongolian language, in the decipher process and did not sufficiently consider neighboring languages. As an alternative to that problem, this study proposes the necessity of deciphering the Khitan language through Dagur language. In order to prove the validity of this proposal, a basic literature search shows that the proportion of Dagur language, which forms a paronym relationship with the native Khitan language, is numerically close to the level of the Written Mongolian or the Middle Mongolian. In this process, several related cases are provided, and lan-guage materials necessary for the study are also introduced in detail.
In addition, a new research methodology is also proposed, which is an approach using epitaph on tombstone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of the same period as an intermediate medium, considering that the lin-guistic source of Khitan characters is limited to the epigraph materials. In other words, it is a method of sorting Chinese words from epitaph on tombstones which have not yet been deciphered into Khitan lan-guage, linking them to Dagur language, and matching them with un- deciphered the Khitan Scripts again.
Furthermore, this study proposes to use ancient Korean language such as Goguryeo language, which corresponds to be ancestral language of the Khitan, in order to decipher the Khitan Scripts as well as Dagur lan-guage, and some language materials necessary for the proposal are also introduced.

2홍순언 행적과 기억과정

저자 : 박홍갑 ( Park Hong-gab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8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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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조에 살았던 홍순언은 종계변무에 공을 세워 역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공신에 책봉되었고 당릉군이란 작호까지 받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원군을 요청할 때에도 뇌물에 의존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외교로 일관하였는데, 그의 공적은 후일 위정자들에게도 자주 회자되곤 했다. 아울러 그가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거금을 들여 어려움에 처한 명나라 지인을 도운 적이 있었는데, 이 미담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한 마을에 살았던 유몽인의 『어우야담』이었다.
그런데 지인을 도운 단순했던 미담은 시간이 흐르면서 확대 재생산되어 여러 야담집에 오르게 되었으니, 임란 파병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과의 연결이 바로 그것이다. 즉, 홍순언이 사신단 일행으로 명을 방문했을 당시 어려움에 처한 여인을 구해 준 일이 있는데, 이 여인이 후일 석성 후실이 되어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서사구조로 발전해 간 것이다. 여기에는 한양 광동방의 홍순언이 살았던 보은단동이란 유래가 석성 후실이 은혜를 갚기 위해 비단에 '보은단'이란 글자를 수놓아 보낸 것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민담이라 할지라도 사실에 근거한 모티브는 있어야 한다. 서인집권 이후 광해군 외교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홍순언의 의로운 외교방향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다 조선후기 숭명 사상이 확대되면서 자연스레 임란 파병의 주인공 석성을 추모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기억과정에서 또 다른 문화 양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홍순언 민담이었다. 따라서 전승된 기억이 역사적 사실과 그 모습을 달리한다 할지라도, 기억과정 그 자체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할 것이다.


Hong Sun-eon, an official interpreter in King Seonjo's reign, was in-stalled as a meritorious minister based on his contribution to settling the matter of “clarifying the royal lineage.” He was also given the honor-ific title Dangreung-gun. Then when the Japanese invasions occurred, he played a key role in requesting military aid from Ming China without paying a bribe. Such achievement gave him a reputation for integrity, and since then his work was often talked about among the officials. There is a story about him helping a Chinese acquaintance when he was dispatched to Ming as an envoy. It was recorded first in the Eou's Unofficial Stories by Yu Mong-in, who lived in the same town as him. However, the simple story got expanded and embellished as time went on, and a different version of it is included in other story books. For example, in the Gukdang's Amusing Story by Jeong Tae-je, the Chinese acquaintance turned into a woman. In the story, Hong was on a diplo-matic mission to Ming and rescued the woman from her predicament. She later became a concubine of Minister Shi Xing and repaid Hong's kindness by asking her husband to provide assistance to him in both “clarifying the royal lineage” and obtaining the promise from the Ming court to send troops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s. The story was likely developed after the Westerners ousted King Gwanghaegun from power in order to disparage the deposed king's diplomatic policy toward Ming and at the same time praise Hong's diplomatic achievements. As the pro-Ming stance became dominant, Shi Xing's assistance was also hon-ored in Joseon society. This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 must have in-fluenced the collective memory, which is reflected in the story. Although the memory differs from the actual history, the memory process itself contains historical significance.

3조선 선조대 이산보의 관직생활

저자 : 임선빈 ( Yim Seon-bi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3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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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세기 후반 선조대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 초기의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이산보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폈다. 이산보는 문집을 남기지 않았고,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선조대의 실록은 실록편찬을 위해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관하던 시정기조차 모두 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상태에서 실록을 편찬했기 때문에, 연구에 활용할 자료의 한계가 많다. 본고는 정엽이 지은 이산보 행장,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그 외의 관련 자료들을 습유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면서 이산보의 가계와 생장, 관직에 나아가는 과정과 당하관까지의 실무 관직 생활, 당상관직 재임과 정치 활동,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전란 수습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병을 얻어 타계하기까지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산보는 고려말 조선전기 혁혁한 가문인 한산이씨로,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보의 선계는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이우-이장윤-이치-이지무-이산보로 이어지며, 조부인 이치부터 충청도 보령에 거주했다. 이산보는 숙부인 이지함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30세에 문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이산보는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의 요직과 이조 정랑을 지냈으며, 45세에는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53세까지는 정치관료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52세에는 성절사 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러한 이산보의 관직 제수에는 선조의 특지가 여러 차례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가 동서분당이 이루어진 직후로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기축옥사와 건저의 사건 등에서 이산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배까지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파직을 경험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파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이산보는 전쟁이 발발하자 평소의 충성스런 관직자답게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찾아가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전란의 와중에서 중책인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전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활동하였다. 55세에는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어 무군사 당상으로 왕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최전방에서 전란 극복에 애쓰다가, 56세인 선조 27년 4월에 과로로 쓰러지고 병이 들어 타계하였다. 이와 같은 이산보의 헌신적인 삶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문신 관료의 삶이면서도 충성스런 관직자의 삶이었다.
명곡 이산보(1539~1594)는 토정 이지함의 학문 영향을 받았으며, 율곡 이이(1536~1584)), 우계 성혼(1535~1598), 송강 정철(1536~1593) 등과 같은 서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이산보와 사촌이며 동갑으로 어려서 숙부 이지함으로부터 함께 학문을 익혔던 아계 이산해(1539~1609)는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이산보의 활약과는 달리 서인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선조대의 초기 동서분당 과정에서 한 집안이면서도 각각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산보와 이산해의 관직 생활을 이해하는 데에도 본고가 다소의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문집이 남아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찬 자료인 실록조차 내용이 소략하고 편파적인 선조대 전반기의 인물에 대해서, 관련 자료를 습유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면서 수행한 본 연구가 이 시대 인물의 사례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official life of Yi San-bo during King Seonjo's reign in the latter half of the 16th century. When the factional split between Easterners and Westerners developed and the Japanese in-vasions, or Imjin War, occurred, he was an influential figure but has never drawn much attention in academia. Worse, there are few histor-ical data left about him. He does not have a literary collection and moreover, all of the historians' daily record of events in the bureau of state records for the Annals of King Seonjo were burnt up during the Imjin War. Thus, research had to be based on the other related materials such as the restored Annals of King Seonjo, the Revised Annals of King Seonjo, and Jeong Yeop's “Biographical Account of Yi San-bo.” The in-formation collected from them is compared with each other and or-ganized as follows: his birth, lineage, and growth, his years before gov-ernment service, years in office as a low ranking official, years in office as a high ranking official and of political engagement, and his last years taking care of the aftermath of the Imjin War. All of them are inves-tigated in this article. On top of that, his life is portrayed, contrasted with his cousin Yi San-hae who studied under the same teacher Yi Ji-ham but belonged to the opposite faction.

4강후진의 와유록과 상고사의 서술

저자 : 허흥식 ( Heo Heungsik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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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侯晉은 많은 저술을 남긴 고창 출신의 학자이다. 그의 저술은 모두가 사본이고 간행된 부분이 아주 적다. 그가 남긴 와유록은 서문이나 발문이 없고 내용상 미완성 저술로 짐작된다. 와유록은 그가 직접 답사한 기록이므로 이를 분석하면 그의 생애와 활동을 규명할 요소도 적지 않다. 그가 시문을 모은 문집을 남겼다는 확증은 없다.
그가 남긴 와유록은 그의 대표적인 역사책인 감영록의 첫 부분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상고사에 대한 사관을 알아보기 위해서 긴요하다. 그는 만년에 우주관과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이고 화이잡록을 지었다. 화이잡록은 그의 세계관이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견해였다. 그의 세계를 화이관으로 파악한 견해는 그의 독창적인 관점은 아니고, 宋과 明에서 계승하여 조선에서 답습한 세계관을 답습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강후진은 명에서 청으로 이어지는 왕조교체와 서양문물이 서학으로 조선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초기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그는 국내외에 대한 저술에서 芝峯 李睟光을 자주 언급하였다. 앞으로 지봉유설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사상이 그의 저술과 이후에 거의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彛齋 黃胤錫에게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Gang HuJin(康侯晉) left a lot of manuscrips, and not a few works still appeared. His writings are all paleographes and very few published. The Wayurok he has no preface or epilogue, and it is presumed to be an incomplete collection of works in terms of content. Wayurok is a record he explored himself, so if he analyzes it, there are many factors to clar-ify his life and activities. There is no confirmation that he left a collec-tion of poems.
He left essential idea to find out the historical view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a situation of the ancient part of his representative historical work, Gam youngrok, has not been found. In his later years, he paid attention to space and worldviews and wrote Whaijaprok. Whajaprok was his worldview and his view of time and space. His idea of Whajaprok was not his original view, but did not deviate significantly from the level of following the worldview formed by Mlng Dynasty and followed by Joseon.
However, Gang Hujin was an early intellectual who influenced Joseon through the study of Western culture and the change of the dynasty from Ming to Ch'ing. He frequently mentioned in his writings at home and abroad. In the future, it is necessary to investigate in depth the in-fluence of the ideas of the time, including Jibong Yuseol, on his writings and Whang Yunseok, who worked in almost the same area afterwards.

5조선후기 訓鍊大將의 성격과 정치적 위상

저자 : 나영훈 ( Na Yeong-hu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1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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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후기 군영 가운데 하나인 훈련도감의 대장을 대상으로 가계와 출신 등 개인 來歷과, 이직과 전직 등 官歷을 살펴서 그 정치적 위상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종2품의 훈련대장이 어떤 성분을 지닌 인물을 차출했는가에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접근한 지표는 훈련대장의 出身이다. 조선후기 훈련대장은 문과와 무과, 문음 출신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훈련대장은 대부분 무과 출신이었다. 그런데 숙종대부터 문과 출신도 훈련대장에 제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가 변경된 것은 순조가 즉위한 이후, 이른바 '세도정치기'로 불리는 시기로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19세기 전반기 동안 문과 출신이 무과 출신보다 더 많은 훈련대장을 배출한 유일한 시기였는데, 이는 모두 왕실외척이었다.
이어, 훈련대장의 가계에 주목하였다. 훈련대장의 가계는 특정 가문의 독점 여부와 이들의 성향에 대한 분석을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훈련대장의 성격 이해를 위해 이들이 공신, 종친, 외척과 같은 특정 집단의 가계인지 살피는 것이다. 훈련대장은 능성구씨와 평산신씨에서 가장 높은 비중으로 차출되었다. 이 두 가문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벌열무가의 하나였다. 훈련대장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무가에서 역량이 있는 인물을 차출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그 외에는 왕실과의 특수한 관계로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왕실의 외척과 종친, 공신 가문이 포함된다. 훈련대장은 절반 가까이 왕실외척이거나 종친이거나 공신이었다. 이는 개인적 역량과 함께 왕실과의 친연성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훈련대장의 정치적 위상을 살펴보기 위해 재임기간과 이직, 전직, 최고관직 등과 같은 관력을 통해 훈련대장의 관직 성격을 분석했다. 훈련대장은 평균 2년 이상을 재직하였는데, 특정한 인물들은 5년 이상 훈련대장에 자리하며 대표적인 무인으로 자리하였다. 17세기 훈련대장은 잦은 교체보다 오랜 기간 신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국왕의 개인적 친연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영정조대에는 잦은 교체를 보였는데, 이 역시 국왕이 군사권과 인사권에 강하게 개입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조치였다. 훈련대장은 주로 어영대장이나 금위대장과 같은 동일한 삼군문의 수장을 역임한 이후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훈련대장의 임기를 마치면 승진하여 병조판서에 제수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는 훈련대장이 5군영의 대장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지닌 관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후기 훈련대장의 면면을 분석함으로써 훈련대장의 정치적 입지나 위상에 대한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훈련대장 개인의 성분이나 관력에 초점을 맞추어서 몇 가지 역사적 의미 부여에 미흡하였던 한계도 존재한다. 예컨대, 훈련대장의 실제적인 역할과 권한 등을 실증적으로 파악하여야 그 관직의 권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훈련대장과 함께 거론되는 어영대장, 금위대장, 총융사, 수어사와의 비교분석도 필수적일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family background and official career of commanders of the Military Training Directorate, officials of rank 2B, and clarifies their political status. First of all, which examination they took is investigated. To be specific, whether they took a civil examina-tion or a military one is ascertained. Most commanders turn out to have been from among the military examination passers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However,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one of the civil examination passers also was appointed as commander. Moreover,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it happened for the first and the last time that the number of civil examination passers who became commander, became higher than its counterpart. All of them were of royal in-law families and thus this period is called the era of in-law government. Secondly, each commander's family background is investigated. Whether he was of a certain powerful clan is discovered. Most commanders emerged from among the Neungseong Gu clan or among the Pyeongsan Sin clan. Both of them were powerful military clans. Thirdly, each commander's term of office and official career are analyzed. Most of the commanders served for two years or more, but certain ones served for more than five years. During the 17th century it seems that they enjoyed long terms of office because of their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kings. However, their term became shorter during the 18th century because they were frequently replaced by different kings, such as Yeongjo and Jeongjo, who got involved in military per-sonnel matters. When the commander finished his term, it was usual for him to be promoted to the minister of military affairs. This indicates the commander of the Military Training Directorate held the highest sta-tus among the commanders of the Five Army Garrisons.

61902년 元山 콜레라 창궐을 통해 본 尹致昊의 정부 비판

저자 : 김용진 ( Kim Yong-ji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7-25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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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의 원산 기록은 윤치호가 덕원부윤 겸 덕원감리로 1899년 3월에 부임하여 1903년 2월까지의 활동상을 담고 있다.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이 겪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나 일상 생활 등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어 개항장 원산을, 한 개인의 일기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그는 1902년 원산의 콜레라 창궐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과 원산 주민들의 비위생적 관념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윤치호일기』에서 1902년 원산의 콜레라 창궐을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근대 자주 개혁을 추진하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배아닌 유배' 로서 선택한 첫 피난처가 원산이었다. 그가 지방관으로서 겪은 원산의 콜레라 현장은 조선의 낙후성을 적나라하게 들어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1902년 콜레라 창궐은 1895년 콜레라 제4차 대유행 이후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 각종 법령과 규칙 등을 반포함으로써 서양의 근대 의료 체계로 진입하고자 시도하던 와중에 겪은 첫 번째 사례였다. 이는 1902년 콜레라 창궐이 조선 정부의 서양 근대 의료체계의 수용과 그에 따른 효용성 여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셋째, 원산은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물산의 집산지이자 군사상의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러시아와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의 각축장이 전개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 1904년 러·일 전쟁의 전초전 역할을 하였다. 이는 콜레라 창궐의 급속한 확산에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넷째, 대표적인 개화지식인 중 한 명인 윤치호가 원산에서 부임하면서 기록한 3여 년간의 일기는 개화지식인의 당시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공적인 기록에서 담아내지 못한 내면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윤치호일기』는 관 주도의 공적 기록이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던, 날 것의 기록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당대를 살아간 개화지식인 내면의 속사정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동안 선행 연구에서는 그의 사상적 토대를 주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일기 속에 담겨진 윤치호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치호 개인이 느꼈을 좌절·감정·성격 등이 응축되어 기록으로 표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원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 바가 컸으며 이는 비단 원산에만 머물러지 않고 조선 왕조와 조선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다시 말해 윤치호가 평소에 지녔던 사상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그가 처한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함을 시사한다. 한 인간의 사상은 그가 겪은 사회적 경험을 기반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당시 내한한 서양 의료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인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방관자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부정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일관된 '일그러진' 태도는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에 따라서 '침략적 사회진화론' 으로 서서히 심화되었고, 그에 따른 일본에 대한 찬양과 동경은 종국에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을 거치면서 고급친일파로 변모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작성한 방대한 일기는, 그가 친일파임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시대 상황과 한 지식인계층의 고뇌와 내면 세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n account of the cholera outbreak in Wonsan is included in Yun Chi-ho's Diaries. Yun recorded it when he was magistrate and direc-tor-general of Deokwon where Wonsan was located. He held the posts from March 1899 to February 1903. While in office, he wrote what he saw and heard as well as how he led his daily life. It is interesting to see the open port of Wonsan through his personal diary. In particular, his critical description of the government's response to the cholera out-break in 1902 is noteworthy. First, the outbreak made him as magistrate confront the explicit backwardness of Joseon's healthcare system. Second, on the other hand, it was a chance for him to verify the effi-ciency of the Western medical system which the government had just adopted. Third, Wonsan was a challenging place for him, where an in-fectious disease could spread rapidly to many people because it was a commercial port and a strategic military hub. The account provides a glimpse into the progressive intellectual Yun's perception of the issue at the time which was not captured in the public records. This article examines not only the account but the process of how his perception of the local issue led to his criticism of the Joseon dynasty and its gov-ernment on the whole. Furthermore, while previous research has mainly focused on his ideology based on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 this ar-ticle focuses on the social circumstances surrounding him. This is be-cause a man's ideology is built on his social experiences.

7한국전쟁기 미 극동공군 공격에 대한 북한군의 반응

저자 : 이상호 ( Lee Sang-ho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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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에서 미 극동공군의 공격에 대한 평가를 북한군 포로신문조서(Interrogation Report)를 통해 분석한 것이다.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는 지나치게 미 극동공군을 포함한 유엔공군의 작전에 대한 민간인 피해를 집중적으로 분석해왔다. 한국전쟁기 극동공군의 전술과 전략에 대한 고찰보다는 피해상황의 지나친 과장이나 확대 해석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연구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전술공군의 임무에는 전통적인 3대 임무인 제공작전, 후방차단(Interdiction)작전 및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작전이 있다. 후방차단작전은 아군 지상군과 적이 전선에서 근접전을 벌이게 한 다음 적이 보급지원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전술공군기로 적의 병력, 물자, 장비 등이 전선으로 유입되지 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아군 지상군이 전선에서 최대의 전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전쟁 초기부터 공중우세 속에서 북한군 병력, 전차, 야포, 차량 등의 이동목표와 철도, 도로, 교량 등 교통망에 대해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북한군은 극동공군의 지속적인 항공공격으로 보병부대가 기갑부대와 포병부대의 지원 없이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로, 교량 등의 차단으로 차량운행이 곤란하여 결정적으로 병력충원과 전선에서의 기동력을 상실하였다.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공군 전투기들의 폭격과 기총소사, 그리고 로켓공격은 가장 주요한 요소였다.
북한군은 미 극동공군의 압도적 공군력에 대항하여 초기에는 방공 작전을 전개했으나, 그 전술적, 전략적 무가치함으로 인해 소극적인 위장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결국 실제 전쟁에서 느끼는 미 극동공군의 공중 공격에 대한 효과를 북한군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evaluation of the attacks of the USAF's Far East Air Force (FEAF) in the Korean War through the interrogation re-ports related to the North Korean POWs. Previous research regarding the FEAF operations has mainly focused on the civilian casualties in the war, which needs to be reexamined whether they are overestimated. This article, on the other hand, turns to the strategy and tactics of the FEAF. The tactical air forces (TAF) have three traditional tasks: counter air, interdiction, and close air support. Among them, interdiction is an operation for ground forces to win a battle by starting close combat with the enemy and then destroying the enemy's backup forces and supplies en route to the battlefront by the air attack. From the beginning of the Korean War, the FEAF had air superiority and opened a concentrated bombardment on North Korea's transportation network including rail-ways, roads, and bridges, as well as on moving targets like troops, tanks, artillery, vehicles, and so on. Due to the continuous air attacks of the FEAF, the North Korean infantry had no choice but to engage the war without the support of armored forces and artillery corps. Furthermore, because roads and bridges were blocked, they could hardly operate ve-hicles and finally lost mobility, which resulted in the failure to replenish forces. Among the various factors that undermined the morale of the North Korean military, aerial bombing, machine-gunning, and rocket attacks were the major ones. The North Korean army initially conducted air defense operations against the overwhelming air forces, but due to the lack of its tactical and strategic use, they switched to a passive cam-ouflage strategy. The effect or influence of the FEAF's aerial attack is evidenced from the interrogation reports which contain the North Korean POWs' vivid descriptions.

8唐 高宗代 한반도 상황변화와 高句麗의 대응 -고구려 멸망 원인과 관련하여-

저자 : 拜根興(著) ( BAI Gen-xing ) , 張元燮(譯) ( Jang Won-Seob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7-31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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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이 재위하던 660년대 한반도에서는 백제 멸망, 나당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의 악전고투, 백강구전투,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졌다.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에 대한 군사행동에 직면하여 당과 한반도 교섭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던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계속되는 압력에 맞서 내부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백제 멸망 작전에 대응할 여력이 없어 백제부흥군의 패망을 수수방관하였고, 백강구 전투 때에는 어부지리를 노리고 참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반도에서의 상황이 급변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고구려는 그동안 견지해 왔던 강경노선 때문에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고, 마침내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고 말았다. 약소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만났을 때 강경 일변도의 대응은 결코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다. 고구려가 당과의 관계에서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은 다른 대응조치를 선택한 것은 결국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으로 당연한 결과였다.


In the 760s when Emperor of Gaozong of the Tang Dynasty was in the reign, a series of significant events happened in the Korean Peninsula, including the downfall of the Baiji kingdom, hard fighting be-tween the Tang garrison in Xinluo and the reviving troops of Baiji, the battle at the mouth of the Bai River, and the perish of the Gaoli kingdom.
In face of the military actions of the Tang-Xinluo allies to Baiji, Gaoli as an important side in the negotiation between theTang Dynasty and Korean Peninsula coped weakly with the allies'actions to annihilate Baiji because it had to deal with continuous pressures from the Tang Dynasty and Xinluo and with acute internal contradictions.
Even worse, it watched the annihilation of the reviving troops of Baiji without offering any help and was silently absent from the battle at the mouth of the Bai River attempting to take some unexpected gain.
At the critical moment of radical changes in the peninsula, Gaoli gave up its former tough and high-tuning strategies and became inactive and incapable, which sped up its downfall in the end.
In face, Gaoli's clearly different tactics in coping with its relations with the Tang Dynasty in the early and later days led necessarily to its final down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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